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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태율은 활짝 열린 그녀의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키가 큰 태율이 방에 있자, 넓게 느껴졌던 공간이 비좁아 보이는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

“주인 허락도 없이 함부로 방에 들어가면 어떡해요?”

“건물주의 허락을 받았는데, 뭐가 더 필요해? 앉아.”

또 명령이네. 다온은 손가락으로 책상용 의자를 지정한 태율이 방 한쪽에 놓인 일인용 안락의자에 앉는 것을 못마땅하게 지켜보았다.

“성적은 상위권이라고 들었어. 알바는 그만둬. 복학하기 전까지 월, 수, 금, 주에 3일 두 시간씩. 복학하면 월, 목, 하루에 세 시간씩. 일주일에 총 여섯 시간이야. 유림대학이 목표라고 그랬지? 올해 안에 무조건 일 등급으로 끌어올릴 테니 각오해 두는 것이 좋을 거야. 그건 시험 예상 문제집이야. 동그라미 쳐 놓은 문제들 위주로 풀어.”

책상 위에는 못 보던 문제집이 나열되어 있었다. 호기심에 수학 문제집을 슬쩍 펼쳐 보았다. 진짜 번호에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 쳐진 문제들이 있었다. 아는 문제도 있고, 모르는 문제도 있었다.

“풀다가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그때 물어봐요?”

멀찍이 떨어져 있는 태율을 보며 다온은 순진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손가락은 이미 모르는 문제를 하나 가리키고 있었다.

“응, 물어봐, 인터넷에.”

“…….”

황당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이 오빠가 장난하나. 공부를 가르쳐 주겠다고 와서는, 혼자 알아서 다 하라니.

“농담이죠?”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여?”

정직해 보이는 눈동자에 웃음기라고는 없었다.

“그럼 우리 집에는 왜 왔어요? 내가 비밀 지키나, 안 지키나 감시하러 왔어요?”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

“말도 안 돼. 내가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고 했잖아요. 내 말 못 믿어요?”

“믿어. 다만 얼굴이 열일하는 타입이라.”

믿는다는 거야, 못 믿는다는 거야. 다온은 진이 빠졌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지 이 주일째였다. 몸에 익숙하지 않은 노동으로 팔다리가 뻐근했다. 가족들 모르게 알리바이를 만드느라 정신적으로도 피곤하고 지쳐 있었다. 어서 빨리 이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서 침대에 눕고만 싶었다. 신경질적으로 문제집을 휘리릭 넘기는데 흰 봉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봉투는 뭐예요?”

“돈 필요하다며? 알바비 대신이야. 이자 쳐서 꼬박꼬박 갚아라. 나는 계산 확실한 사람이야. 참고로 누가 옆에서 부스럭대는 것도 질색이야. 딱 이 정도 거리가 좋겠다. 더 이상은 다가올 생각 말고.”

지금도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태율이 의자를 방 안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밀고 갔다.

“문제집을 풀다가 어려운 게 나와도 물어보지 말라는 게 진담이었어요?”

“농담 안 한다고 했지?”

“그럼 오빠가 하는 일은 뭔데요?”

“감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트는 그를 다온이 있는 힘껏 노려봤다.

“내가 그렇게 싫어요?”

“내가 널 왜 싫어한다고 생각해?”

“어렸을 때부터 내가 다가가는 걸 싫어했잖아요.”

“내가?”

“맞잖아요. 나만 보면 멀찍이 피하고, 인상 찌푸리고…….”

“너는 사람들이 똥을 왜 피한다고 생각해?”

여기서 똥이 왜 나와. 다온은 멀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똥이야 더러워서 피하겠죠.”

“잘 아네.”

“그럼 내가 더러워서 피한다, 이 뜻이에요?”

황당함을 넘어 기가 막혔다.

“내가 기억력이 남다른 것은 알고 있지?”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에요?”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온 것이 네 살 때인가 그랬다. 그 전에는 태율을 만난 적이 없으니, 기저귀 찬 모습을 기억할 리가 없었다. 어린애가 실수해 봤자지 하는 마음으로 호기롭게 던진 질문에 남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에이, 아닐 거야. 다온은 물가로 나온 물고기처럼 팔딱대는 심장을 손으로 살며시 눌렀다.

“1995년 12월 24일. 우리 집이 주택으로 이사 가고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던 날이었어. 감기에 걸렸는지 너는 계속 코를 훌쩍거리더라.”

역시나. 다온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코찔찔로 불리던 암흑기 시절. 올림픽 경기에 꽂힌 엄마는 그녀를 국가 대표 수영선수를 시키겠다는 당찬 포부를 갖고 있었다. 유치원 무렵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다온은 수영장에 매일 출석하다시피 했었다. 덕분에 비염을 달고 살아, 콧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결국은 그 비염 때문에 수영을 그만둘 수 있었지만.

“케이크 위에 놓인 초콜릿 나무가 탐이 났었나 봐. 넌 케이크 주위에서 벗어나질 못했지. 네 성화에 식사를 하기도 전에 케이크에 초를 꽂았어. 사람들은 너한테 소원을 빌고 촛불을 끄라고 했었지. 비록 네가 재채기가 나오는 바람에 촛불을 끄지는 못했지만…….”

별것도 아니네. 재채기 좀 한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괜히 쫄았네.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다시 펴는데 이어지는 설명에 다온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재채기 한 번에 초콜릿 나무가 희멀건 콧물을 뒤집어썼더라. 난 여섯 살 난 여자애 비강에 그토록 많은 콧물이 쌓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으로 알았다. 그 후로 난 초콜릿케이크는 쳐다도 안 봐.”

“마…… 말도 안 돼. 내가 기억 못 한다고 그렇게 과거를 날조하면 안 되죠. 꼬맹이 재채기에 콧물이 나오면 얼마나 나왔다고…….”

“너도 안 믿기지? 우리 형이 그때 사진기에 꽂혀 있었던 건 기억하지. 우리 집 앨범에 증거 사진 있으니까, 한번 찾아보든지. 1994년 7월 18일은 어땠게. 바이러스성 장염이 유행이라고 방송에서 한창 떠들어 댈 때였어.”

태율은 10년도 훨씬 지난 일을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날짜까지 들이대니 증거 자료라도 되는 것처럼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하필…… 똥이 화두로 시작된 대화에 장염이라는 단어가 영 꺼림칙했다. 설마 바지에 설사라도 한 것은 아니겠지.

“학원 갔다 집에 왔는데, 네가 내 방에서 초코파이를 먹고 있었어. 어른들 몰래 먹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지. 나가라고 해도 꼼짝을 안 하더라. 할 수 없이 숙제를 하고 학원에 가야 해서 책상에 앉았는데…….”

태율은 엄청 심각한 얘기를 꺼내기라도 하려는지 한 템포 호흡을 골랐다.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다온은 긴장됐다.

“장염에 걸려 병원까지 갔다 왔다는 애가…….”

또다시 말이 끊어졌다. 태율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싫다는 내 무릎에 기어코 올라와서는…….”

“잠깐만요!”

다온은 다급하게 말을 막았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입이 바짝 말랐다. 쏟아져 나올 말이 두려워, 당장이라도 태율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싫다는데도 억지로 내 무릎에…….”

“그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인가, 바쁜 와중에도 아침저녁으로 꼭 샤워를 해야 잠을 자더라구.’

‘태율이는 다 좋은데, 너무 깔끔을 떨어서 피곤하다니까. 화장실 청소를 하루라도 안 하면 우리 아들 눈치부터 보여.’

현미 이모가 유일하게 태율에 관해 털어놓던 불평이 머릿속을 배회했다.

“왜 자꾸 그만하래. 믿지 못하겠다면, 그날 찍은 사진도 있으니까 앨범 찾아봐. 네가 그날 내 무릎 위에서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지…….”

“아아아아……. 더 이상은 안 들을래요.”

다온은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러게 먹지 말라는 초코파이는 왜 처먹어 가지구…….

청천벽력과도 같은 과거 앞에 18세의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나만 보면 인상을 찡그리고, 죽기 살기로 피해 다닌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니. 그것도 모르고, 볼 때마다 놀아 달라고 바지를 붙잡고 엉겨 붙었으니…… 얼마나 추했을 거야. 그런데 어쩌자고 나는 바지에 똥 싼 기억조차 없을까.

코찔찔은 황송한 별명이었다. 똥싸개가 아닌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 처지라니. 다온은 암담하다 못해 자포자기에 빠져 머리를 마구마구 흔들었다. 10년도 더 지난 일을 날짜 하나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한테 깔끔병을 안겨 준 게 바로 나였다. 열여덟 살이라는 나이는 이런 치욕을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버거웠다.

사진이라는 빼도 박도 못할 증빙 자료까지 있다는데. 태율이 진짜 맘먹고 인터넷에 올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사진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치욕이었다.

“너 어디 아파? 갑자기 어지럽게 머리는 왜 흔들고 그래?”

“미안해요, 오빠. 오빠가 하려는 말은 충분히 이해했어요. 비밀은 무덤까지 안고 갈게요. 그리고 공부 열심히 할게요. 인터넷만은 안 돼요.”

“뭐?”

태율은 이 애가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 미간을 좁혔다.

“알바도 그만두고, 용돈 모아서 이자도 꼬박꼬박 갚고, 공부만 할게요. 대신 앞으로 평생 내 앞에서 어린 시절 얘기는 꺼내지 말아 주세요. 아니, 다른 어느 누구 앞에서도요. 그럼 오빠가 시키는 건 뭐든 다 할게요.”

제 손으로 무덤을 파는 줄도 모르고 다온은 엄청난 거래를 제안하고 있었다.

“진짜 내가 어린 시절 얘기만 꺼내지 않으면, 시키는 건 뭐든 다 할 거야?”

다온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도 모자라는지, 간절하게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안쓰럽다 못해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태율은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다온이 철모르던 시절까지 들먹이며 협박한 것은 비겁했다. 하지만 그만큼 절박했다.

입막음을 위해 바쁜 시간을 쪼개 과외까지 하러 왔다. 찾아온 목적은 충분히 이룬 셈이었다. 양심을 찌르는 죄책감은 성적을 끌어올려 줌으로 무마할 생각이었다.

“좋아. 우선은 책상에 앉아서 거기 있는 문제집부터 풀어. 막히는 게 있으면…….”

“알아요. 인터넷에 물어볼게요.”

태율은 문제 풀이에 어려운 게 있으면 가져오라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의 의도를 오해한 다온은 호기롭게 문제집을 펼쳐 들었다. 우선은 혼자 힘으로 해 보겠다는데 나쁠 거야 없지. 인터넷으로도 해결 방법이 없으면 그때는 알아서 가지고 오겠지. 태율은 마음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시작이 어찌 되었든, 나쁘지 않은 전개였다. 어려서는 마냥 순하기만 하더니, 컸다고 대드는 폼이 제법 귀여웠다.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하겠다고 했지? 통통 튀는 반응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소파에 편하게 기대앉는 태율의 입가에 모처럼 만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져 갔다.





2장. 전쟁의 서막을 알려라



2016년 가을.

“잠깐만요. 같이 가요.”

다온은 초현대식 빌딩 로비의 대리석 바닥을 구르다시피 달려가며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향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헉헉거리며 열린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번지르르한 대리석 바닥보다 더 반짝거리는 갈색 구두코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시간에 어딜 쏘다니다 오는 거야?”

헉.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다온은 엘리베이터에 타다 말고, 급히 종이봉투를 뒤로 숨겼다.

“잘한다. 회의 시간에 땡땡이나 치고…….”

다온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자, 광이 반짝거리는 갈색 수제화 뒤에 숨어 있던 커다란 검정 스니커즈가 옆으로 걸어 나왔다. 이 인간이 이 시간에 여긴 왜 있는 건데…….

“코찔찔. 안 탈 거야?”

신경질적인 부름에 다온이 쭈뼛거렸다. 목소리에서부터 짜증이 잔뜩 배어 있었다. 코찔찔로 불릴 때는 가능한 한 건드리지 않는 게 신상에 좋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지금쯤 소개팅이 한창일 거라며 회의실에서 유유자적하게 피자를 먹고 있을 동료들을 떠올렸다. 태율이 편집장으로 출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시한 일이 회의실 음식물 반입금지 조항이었다.

단톡방에 경고 메시지라도 보내야 하는 것 아닐까. 한바탕 난리가 날 텐데. 태율은 점심 식사 후에 소개팅 약속이 잡혀 있어 편집회의에 참석할 수 없을 거라고, 큰소리를 뻥뻥 친 것도 사실 다온이었다. 서른이 넘은 아들이 도통 연애에 뜻이 없자, 어려서부터 이모, 이모 하며 따르던 조현미 여사께서 그녀에게 친히 SOS를 보냈다.

소개팅이나, 선 자리라고 말하면 죽어도 안 나갈 녀석이니, 외부에 스케줄이 있는 적당한 날, 장소와 시간을 알려 달라고. 그럼 나머지는 본인이 다 알아서 할 거라고…….

“회의실에 있을 시간 아니야? 아까 보니 뒤에 뭘 감추는 것 같던데…… 또 김아영 대리가 너보고 간식 사 오래?”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다온은 연이은 질문에 고개만 주억거렸다. 친절하게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는 갈색 수제 구두를 신은 사람 덕에 엘리베이터 문은 계속 열린 채였다.

“잘한다. 회의 시간에 간식이나 사다 나르고. 내가 분명히 PT룸에 음식물 반입하지 말자고…… 가만, 설마 너야?”

검정 스니커즈가 밖으로 나오려 하자 다온은 움찔움찔 뒤로 물러났다. 회의 시간에 간식을 사다 먹는다는 것은 그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거라는 가정이 있어서였다. 누군가 중간에서 소식을 전한 사람이 있다는 증거였다. 잔뜩 쫄은 얼굴로 스스로 스파이임을 증명하는 다온의 머리 위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해, 강태율. 다온이가 무슨 잘못이야. 유독 둘째 아들 사랑이 과한 어머니가 문제인 거지. 안 그래, 꼬맹아?”

“태민 오빠!”

친밀한 말투에 다온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갈색 수제화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태율의 형 태민이었다. 태율보다 두 살 많은 형으로 그녀와는 여섯 살 차이가 나지만 어린 다온을 꽤나 귀여워해서 자주 데리고 놀아 주었다. 그래서 다온은 태민을 태율보다 훨씬 스스럼없이 대했다.

“꼬맹이, 오랜만이다. 부모님은 건강하시지?”

“그럼요. 시골로 내려가시더니 농사짓는 것에 한참 재미를 붙이셨어요. 그런데 오빠는 우리 회사에는 어쩐 일이에요? 편집장님 만나러 왔어요?”

“쿡. 회사에서는 태율이를 그렇게 부르는구나. 나도 지난주부터 이쪽으로 출근하고 있었는데, 몰랐어? 여기 편집장님이 말 안 해?”

“대박. 위층 비어 있는 사무실에 로펌이 이사 온다고 들었는데, 오빠 회사였어요?”

태민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태율이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어 나왔다. 놀란 다온이 그를 피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대로 목덜미를 붙들렸다.

“2시에 클라이언트랑 미팅 있다며. 형은 먼저 올라가. 나중에 연락할게.”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말투에 태민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어딘가 절실해 보이는 다온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시간 약속은 철저히 지키는 게 그의 신조였다.

“그래. 다온이 잘못 아니니까 너무 닦달하지 말고……. 꼬맹이, 만나서 반가웠다. 언제 오빠가 맛있는 저녁 사 줄게.”

“네, 안녕히 가세요.”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다온은 인사를 건넸다. 목덜미를 잡지 않는 손이 모자 쓴 머리를 푹 하고 아래로 내렸기 때문이었다. 행여나 모자가 벗겨지기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다온을 끌고 태율은 새로 도착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다온은 냉큼 사과부터 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다온은 10층 버튼을 누르는 기다란 손가락만 뚫어져라 주시했다. 차마 시선을 마주칠 엄두도 안 났다. 납작 엎드리는데 잡아먹히기야 하겠어.

“나는 안 한다고, 안 한다고 했는데…… 이모가 편집장님이 노총각으로 혼자 늙어 가면 평생 책임질 거냐고, 하도 협박을 하셔서…….”

“그래서 평생 나를 책임지기 싫어서 소개팅을 주선하셨다?”

“그건 오해예요. 나는 그 여자분이 누군지도 몰라요. 이모가 고양이 상과 강아지 상 중에 고르라고 하셔서, 아무래도 편집장님처럼 까르칠한 분에게는 포근한 곰돌이 상이 어울리지 않을까라고…….”

“죽을래?”

좁은 공간에 낮게 깔린 목소리가 음산하기까지 했다. 다온이 과장되게 놀라는 표정으로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런, 억울해서 발음이 제대로 샜네. 까리스마라고 한다는 게…….”

“입술에 침이나 발라. 그런데 이건 무슨 냄새야?”

키가 큰 태율이 머리 위에서 코를 킁킁거렸다. 시킨다고 시키는 대로, 입술에 침을 바르던 다온은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점집에 다녀오고 나흘이 지났다. 물론 저녁마다 샤워는 하지만, 머리에 물을 묻히지 말래서 샤워캡을 써서 머리를 감지 않았다. 나흘 동안 안 감아 떡진 머리를 숨기느라 하루 종일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가뜩이나 가려운 것도 참고 있었는데…….

“냄새 많이 나요? 머리에 물을 묻히지 말라 해서…….”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다온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가로채 안을 살피던 태율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태율이 찾던 냄새의 진범은 그녀가 아닌 간식으로 사 온 고로케였다.

“너 머리 안 감았어? 그러고 보니 사흘 전부터 모자를 쓰고 있었던 것 같은데, 설마 그동안 계속 안 감은 거야?”

놀람을 넘어 경악으로 변해 가는 표정에 다온은 모자를 푹 눌러썼다. 사흘 전부터 모자 쓰고 다닌 것은 또 어찌 알았대. 빌어먹을 놈의 기억력.

“샤워는 했어요.”

“가지가지 한다.”

엘리베이터가 10층에 도착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태율을 따라잡느라 다온은 뛰다시피 걸었다. 지저분한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데. 아무리 피곤해도 자기 전에 꼭 샤워하는 습관은 그것 때문이었다. 여기서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진짜 샤워는 했어요. 누가 머리에 물을 묻히지 말래서 머리만 안 감았어요.”

“누가?”

“아, 그게……. 누가 그랬다기보다는……. 어디서 읽었는데, 머리를 안 감으면 글발이 산다고…….”

점쟁이한테 들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를 떼어 내기 위한 점괘 중의 하나라고는. 적당한 핑계거리를 찾아 머리를 굴리는데, 태율이 우뚝 멈춰 섰다.

“지금 그게 팩트를 다뤄야 할 기자 입에서 나올 소리야? 차갑고 냉철한 이성으로 정보를 다루고 독자들에게 진실을 제공해야 할 기자가 그런 미신에 휘둘린다는 게 말이 돼? 감성팔이나 하려고 기자 됐어?”

이게 아닌데. 기세 좋게 한바탕 퍼부을 준비를 하는 태율을 보며 다온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팥의 효험은 언제 나타나는 거야. 찾으라는 의인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트집거리만 하나 더 제공하고 있었다.

“언론은 제4의 권력이야. 글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자는 자기가 쓴 기사에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져야 해. 네가 쓴 글 하나에…….”

“여엄병!”

“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