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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장
톡, 톡.
길게 이어지는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정민은 연필로 종이 위를 일정하게 두드렸다. 슬슬 지루해지려고 할 때 상냥하기 그지없는 여성이 일방적으로 소리샘으로 연결하겠다고 했다.
달칵.
정민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두 번째 전화도 연결이 되지 않자 이번엔 다른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정민이 처음 일을 시작했던 출판사에서 같이 근무했던 선배 의준이다.
― 여보세요.
“선배님. 접니다.”
― 왜? 이다경 역자가 전화를 안 받아?
“네. 전화를 받지 않네요. 처음 보는 번호라서 그럴 수도 있으니 선배님이 문자라도 하나 먼저 넣어 주시면 안 될까요?”
― 그거야 벌써 했지. 하늘출판사 하정민이 전화할 거라고.
“저도 문자를 먼저 보내 놓고 다시 연락을 해야겠네요.”
― 저번에도 말했지만, 성격이 엄청 내성적인 것 같아. 내가 남자라 그런 걸 수도 있기는 한데, 단 한 번도 사적인 얘기를 꺼내는 적이 없더라고. 나만 주절주절 떠들다가 통화를 끝내는 일이 허다해. 같이 작업하는 작가나 역자들 중 가장 어려운 상대야.
“이다경 역자를 만난 적은 없어요?”
― 없어.
“한 번도요?”
― 응. 식사 대접하고 싶다고 해도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괜찮습니다.’ 하면서 거절해.
번역을 의뢰하게 되면 보통은 역자들이 출판사로 와서 계약을 한다. 일정도 조율해야 하고 책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공유하고 출간 방향에 대해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업을 오래하여 친분이 있는 경우는 우편으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유선으로 논의하기도 한다. 그래도 처음 일을 시작하는 경우 한 번은 만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녀는 어지간히도 비사교적인 모양이었다.
“어째 벌써부터 이다경 역자가 어려워지는데요?”
― 오호. 그럼 포기하는 거야?
처음 이다경 역자를 소개해 달라고 했을 때 의준은 싫다고 진담 섞인 농담을 했었다. 정민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좋은 역자를 독식하는 꼴은 절대 못 보죠.”
― 후후. 아무튼 문자 보내 놓고 다시 연락해 봐. 내가 알기론 작업 중인 출판사는 우리뿐이라 바쁘다고 거절은 안 할 거야.
정민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의준과의 통화를 끝냈다. 이어 그는 휴대폰으로 장문의 문자를 입력했다.
[안녕하십니까? 해림출판사 김의준 편집자의 소개로 연락드리게 된 ‘도서출판 하늘’의 하정민입니다. 검토서를 의뢰하고 싶어 연락을 드렸는데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 인사를 문자로 대신합니다. 통화가 가능한 시간을 알려 주시면 맞춰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전송하고서야 생각난 것이 있어 정민은 몇 마디 더 추가했다.
[되도록 이번 주 안으로 연락이 가능했으면 합니다. 아시다시피 번역서는 일정이 빠듯해서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이다경 역자는 번역이 빠른 편이라서 대략 두 달 정도면 한 권이 끝난다고 했다. 평균이 3―4개월이고 정말 늦는 경우 여섯 달까지도 걸리니 그에 비하면 정말 빠른 것이다.
번역서 출간을 담당하고 있는 정민은 타 출판사의 신간들을 자주 찾아본다. 이다경 역자의 이름도 그렇게 발견한 것이다. 책을 구입해서 읽어 본 정민은 역자를 소개받기 위해 의준에게 연락을 했다. 이다경 역자가 번역한 책이 마침 의준의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었다.
번역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다경 역자는 의준이 근무하는 해림출판사에서만 세 권의 도서를 번역했다. 그녀의 글은 번역이 능숙하고 문체가 매끄러워 번역서라는 위화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한국의 작가가 쓴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의준과 통화를 하면서 얼마 되지 않아 독자들에게 친숙하게 자리 잡을 것이라는 의견을 함께했다. 실력 있고 유명한 역자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독자들에게 신뢰를 주어 도서 선택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다경 역자 역시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했다.
좋은 역자를 확보하는 것은 좋은 작가를 확보하는 것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정민은 이다경 역자를 꼭 섭외하고 싶었다. 책상에 턱을 괴고서 그녀가 번역한 책을 휘리릭 넘겨 보던 정민은 잠시 중단했던 기획서 작성을 다시 시작했다.
*
출근을 해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에이전시에서 보낸 뉴스레터를 보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어 소개 글을 다시 읽어 보고 있는데 휴대폰이 진동을 했다.
정민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책상 위를 더듬어 휴대전화를 손에 쥐었다.
누가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전화를 하나 싶어 휴대폰을 힐끔 쳐다보던 정민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토록 기다리던 이다경 역자로부터의 전화였다. 정민은 손에 들고 있던 머그컵을 내려놓고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하정민입니다.”
― 안녕하세요? 저…… 이다경이라고 합니다.
조용하면서 신중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연락을 기다린 지 나흘째라 다른 역자를 섭외해야 하나 실망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연락이 반가웠다.
“안녕하세요? 연락 기다렸습니다.”
― 김의준 에디터님께 소개를 받으셨다고요.
“네. 소개를 받기는 했는데, 그 전에 역자님이 번역한 책을 먼저 읽었어요. 그 책 출판사에 같이 일했던 의준 선배가 있어서 소개를 부탁했습니다.”
― 어떤 책을 의뢰하시려고요?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인 성격이 목소리에도 나타나는 듯, 그녀의 목소리는 좀처럼 높아지지 않고 속삭이듯 들려왔다.
“일본에서 출간된 소설인데, 신인 작가예요. 출간되고 6개월간 꾸준히 아마존 상위권에 있는 작품이고요. 에이전시가 독점으로 진행하는 작품이라 오퍼 기간이 짧아요.”
― 언제까지 보내 드리면 되나요?
“보통은 이 주일 정도 드리는데, 힘드시겠지만 열흘 안에 검토서를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 원고는 어떤 걸로 보내 주시나요?
“PDF 파일이요. 지금 바로 메일로 보내 드릴 수 있습니다.”
― 알겠습니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뒤 통화가 끝났다. 정민은 곧바로 그녀의 이메일로 원고를 송부하고 거의 식은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켰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풀리고, 정민은 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의준이 대뜸 물었다.
― 아직도 연락 안 됐어?
“아니요. 오늘 전화 왔어요. 원고 검토해 주기로 했어요.”
― 연락한 지 한 나흘 됐지?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모르는 번호이니 전화를 받지 않을 수는 있는데, 문자로 연락한 사유에 대해 설명했음에도 나흘이나 지나 전화가 왔으니 충분히 의아한 상황이었다. 오죽하면 여행이라도 간 걸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선배님.”
― 왜?
“혹시 이다경 역자 말이에요. 저랑 또래쯤 되나요?”
뜬금없는 질문을 정민은 무척이나 진지하게 했다. 당황한 듯 잠시 뜸을 들이던 의준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 뭐야. 목소리에 홀딱 반하기라도 했어?
“하하하하. 아니요. 워낙 경계심이랑 낯가림이 심한 것 같아서 나이가 몇이나 되나 궁금했어요.”
애써 설명했는데 의준은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 그런 게 아니라면 나이부터 다짜고짜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없잖아. 어허, 이것 봐라. 촉도 좋아. 동갑인 건 어떻게 알았어?
“동갑이요? 누구랑요?”
― 설마 나랑 동갑이라고 하겠어?
“아…… 그래요?”
― 나이도 같고, 잠깐 들은 목소리만으로 뿅 가다니. 하정민 의외로 로맨티시스트네?
의준의 짓궂은 웃음이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정민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 끊자.
의준은 제 생각을 철회할 생각이 없다는 듯 냉큼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정민은 졸지에 미지의 누군가에게 홀딱 반한 남자가 되어 버렸다.
웃자고 한 소린데 전화해서 다시 장황하게 설명해 줄 수도 없고, 정민은 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는 어느새 가을 옷을 입기 시작한 가로수를 아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가을이구나.’
그러고 보니 가을이 되면 문득문득 진희가 떠오르곤 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6년 전쯤. 까마득하기까지 한 중학생 시절의 한 친구가 생각났다. 이다경 역자의 비사교적이고 내성적인 데다 묘하게 경계심이 느껴지는 말투가 어쩐지 진희와 닮았다.
‘잘 지내고 있나?’
기억을 더듬던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자리에 없던 친구, 이진희.
공부를 잘했으니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옛날 그 모습 그대로 자랐다면 여전히 예쁠 것이고. 봄 햇살에 반짝이던 뽀얀 얼굴이 어렴풋 떠오른다.
같은 반 짝꿍이었을 때는 서먹했던 것 같은데, 문득문득 그녀가 떠오르곤 했다. 그럴 때 사진이라도 보면서 추억을 되살리면 좋은데, 그럴 만한 사진이 없었다.
함께 생활한 기간이 짧기도 했고 교내 외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던 진희는 단체 사진에도 없다. 유일하게 함께 참여했던 합창 대회에서는 반주자였던 관계로 행사 사진에서 빠져 있다.
정민은 몸을 바로 하고 앉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고작 한 학기 함께했을 뿐인데, 이토록 깊이 새겨진 인연이라니……. 마음 한구석에 그녀가 남기고 간 흔적들이 무겁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1장
톡, 톡.
길게 이어지는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정민은 연필로 종이 위를 일정하게 두드렸다. 슬슬 지루해지려고 할 때 상냥하기 그지없는 여성이 일방적으로 소리샘으로 연결하겠다고 했다.
달칵.
정민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두 번째 전화도 연결이 되지 않자 이번엔 다른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정민이 처음 일을 시작했던 출판사에서 같이 근무했던 선배 의준이다.
― 여보세요.
“선배님. 접니다.”
― 왜? 이다경 역자가 전화를 안 받아?
“네. 전화를 받지 않네요. 처음 보는 번호라서 그럴 수도 있으니 선배님이 문자라도 하나 먼저 넣어 주시면 안 될까요?”
― 그거야 벌써 했지. 하늘출판사 하정민이 전화할 거라고.
“저도 문자를 먼저 보내 놓고 다시 연락을 해야겠네요.”
― 저번에도 말했지만, 성격이 엄청 내성적인 것 같아. 내가 남자라 그런 걸 수도 있기는 한데, 단 한 번도 사적인 얘기를 꺼내는 적이 없더라고. 나만 주절주절 떠들다가 통화를 끝내는 일이 허다해. 같이 작업하는 작가나 역자들 중 가장 어려운 상대야.
“이다경 역자를 만난 적은 없어요?”
― 없어.
“한 번도요?”
― 응. 식사 대접하고 싶다고 해도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괜찮습니다.’ 하면서 거절해.
번역을 의뢰하게 되면 보통은 역자들이 출판사로 와서 계약을 한다. 일정도 조율해야 하고 책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공유하고 출간 방향에 대해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업을 오래하여 친분이 있는 경우는 우편으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유선으로 논의하기도 한다. 그래도 처음 일을 시작하는 경우 한 번은 만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녀는 어지간히도 비사교적인 모양이었다.
“어째 벌써부터 이다경 역자가 어려워지는데요?”
― 오호. 그럼 포기하는 거야?
처음 이다경 역자를 소개해 달라고 했을 때 의준은 싫다고 진담 섞인 농담을 했었다. 정민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좋은 역자를 독식하는 꼴은 절대 못 보죠.”
― 후후. 아무튼 문자 보내 놓고 다시 연락해 봐. 내가 알기론 작업 중인 출판사는 우리뿐이라 바쁘다고 거절은 안 할 거야.
정민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의준과의 통화를 끝냈다. 이어 그는 휴대폰으로 장문의 문자를 입력했다.
[안녕하십니까? 해림출판사 김의준 편집자의 소개로 연락드리게 된 ‘도서출판 하늘’의 하정민입니다. 검토서를 의뢰하고 싶어 연락을 드렸는데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 인사를 문자로 대신합니다. 통화가 가능한 시간을 알려 주시면 맞춰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전송하고서야 생각난 것이 있어 정민은 몇 마디 더 추가했다.
[되도록 이번 주 안으로 연락이 가능했으면 합니다. 아시다시피 번역서는 일정이 빠듯해서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이다경 역자는 번역이 빠른 편이라서 대략 두 달 정도면 한 권이 끝난다고 했다. 평균이 3―4개월이고 정말 늦는 경우 여섯 달까지도 걸리니 그에 비하면 정말 빠른 것이다.
번역서 출간을 담당하고 있는 정민은 타 출판사의 신간들을 자주 찾아본다. 이다경 역자의 이름도 그렇게 발견한 것이다. 책을 구입해서 읽어 본 정민은 역자를 소개받기 위해 의준에게 연락을 했다. 이다경 역자가 번역한 책이 마침 의준의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었다.
번역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다경 역자는 의준이 근무하는 해림출판사에서만 세 권의 도서를 번역했다. 그녀의 글은 번역이 능숙하고 문체가 매끄러워 번역서라는 위화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한국의 작가가 쓴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의준과 통화를 하면서 얼마 되지 않아 독자들에게 친숙하게 자리 잡을 것이라는 의견을 함께했다. 실력 있고 유명한 역자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독자들에게 신뢰를 주어 도서 선택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다경 역자 역시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했다.
좋은 역자를 확보하는 것은 좋은 작가를 확보하는 것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정민은 이다경 역자를 꼭 섭외하고 싶었다. 책상에 턱을 괴고서 그녀가 번역한 책을 휘리릭 넘겨 보던 정민은 잠시 중단했던 기획서 작성을 다시 시작했다.
*
출근을 해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에이전시에서 보낸 뉴스레터를 보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어 소개 글을 다시 읽어 보고 있는데 휴대폰이 진동을 했다.
정민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책상 위를 더듬어 휴대전화를 손에 쥐었다.
누가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전화를 하나 싶어 휴대폰을 힐끔 쳐다보던 정민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토록 기다리던 이다경 역자로부터의 전화였다. 정민은 손에 들고 있던 머그컵을 내려놓고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하정민입니다.”
― 안녕하세요? 저…… 이다경이라고 합니다.
조용하면서 신중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연락을 기다린 지 나흘째라 다른 역자를 섭외해야 하나 실망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연락이 반가웠다.
“안녕하세요? 연락 기다렸습니다.”
― 김의준 에디터님께 소개를 받으셨다고요.
“네. 소개를 받기는 했는데, 그 전에 역자님이 번역한 책을 먼저 읽었어요. 그 책 출판사에 같이 일했던 의준 선배가 있어서 소개를 부탁했습니다.”
― 어떤 책을 의뢰하시려고요?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인 성격이 목소리에도 나타나는 듯, 그녀의 목소리는 좀처럼 높아지지 않고 속삭이듯 들려왔다.
“일본에서 출간된 소설인데, 신인 작가예요. 출간되고 6개월간 꾸준히 아마존 상위권에 있는 작품이고요. 에이전시가 독점으로 진행하는 작품이라 오퍼 기간이 짧아요.”
― 언제까지 보내 드리면 되나요?
“보통은 이 주일 정도 드리는데, 힘드시겠지만 열흘 안에 검토서를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 원고는 어떤 걸로 보내 주시나요?
“PDF 파일이요. 지금 바로 메일로 보내 드릴 수 있습니다.”
― 알겠습니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뒤 통화가 끝났다. 정민은 곧바로 그녀의 이메일로 원고를 송부하고 거의 식은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켰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풀리고, 정민은 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의준이 대뜸 물었다.
― 아직도 연락 안 됐어?
“아니요. 오늘 전화 왔어요. 원고 검토해 주기로 했어요.”
― 연락한 지 한 나흘 됐지?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모르는 번호이니 전화를 받지 않을 수는 있는데, 문자로 연락한 사유에 대해 설명했음에도 나흘이나 지나 전화가 왔으니 충분히 의아한 상황이었다. 오죽하면 여행이라도 간 걸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선배님.”
― 왜?
“혹시 이다경 역자 말이에요. 저랑 또래쯤 되나요?”
뜬금없는 질문을 정민은 무척이나 진지하게 했다. 당황한 듯 잠시 뜸을 들이던 의준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 뭐야. 목소리에 홀딱 반하기라도 했어?
“하하하하. 아니요. 워낙 경계심이랑 낯가림이 심한 것 같아서 나이가 몇이나 되나 궁금했어요.”
애써 설명했는데 의준은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 그런 게 아니라면 나이부터 다짜고짜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없잖아. 어허, 이것 봐라. 촉도 좋아. 동갑인 건 어떻게 알았어?
“동갑이요? 누구랑요?”
― 설마 나랑 동갑이라고 하겠어?
“아…… 그래요?”
― 나이도 같고, 잠깐 들은 목소리만으로 뿅 가다니. 하정민 의외로 로맨티시스트네?
의준의 짓궂은 웃음이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정민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 끊자.
의준은 제 생각을 철회할 생각이 없다는 듯 냉큼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정민은 졸지에 미지의 누군가에게 홀딱 반한 남자가 되어 버렸다.
웃자고 한 소린데 전화해서 다시 장황하게 설명해 줄 수도 없고, 정민은 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는 어느새 가을 옷을 입기 시작한 가로수를 아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가을이구나.’
그러고 보니 가을이 되면 문득문득 진희가 떠오르곤 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6년 전쯤. 까마득하기까지 한 중학생 시절의 한 친구가 생각났다. 이다경 역자의 비사교적이고 내성적인 데다 묘하게 경계심이 느껴지는 말투가 어쩐지 진희와 닮았다.
‘잘 지내고 있나?’
기억을 더듬던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자리에 없던 친구, 이진희.
공부를 잘했으니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옛날 그 모습 그대로 자랐다면 여전히 예쁠 것이고. 봄 햇살에 반짝이던 뽀얀 얼굴이 어렴풋 떠오른다.
같은 반 짝꿍이었을 때는 서먹했던 것 같은데, 문득문득 그녀가 떠오르곤 했다. 그럴 때 사진이라도 보면서 추억을 되살리면 좋은데, 그럴 만한 사진이 없었다.
함께 생활한 기간이 짧기도 했고 교내 외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던 진희는 단체 사진에도 없다. 유일하게 함께 참여했던 합창 대회에서는 반주자였던 관계로 행사 사진에서 빠져 있다.
정민은 몸을 바로 하고 앉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고작 한 학기 함께했을 뿐인데, 이토록 깊이 새겨진 인연이라니……. 마음 한구석에 그녀가 남기고 간 흔적들이 무겁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