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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자신만 아는, 잠깐의 해프닝 탓이었을까? 그녀의 메일을 기다리는 시간이 무척이나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매일 마감을 하는 기분으로 업무를 하면서도 말이다.
오늘은 말일에 출간될 도서의 최종교를 보고 있는데 집중을 하지 못해 같은 부분만 반복해서 보고 있다. 세 번이나 교정 교열을 했으나 숨은 오타를 잡아야 하는 최종 단계여서 온 신경을 집중해서 봐야 한다. 그렇게 해도 출간하고 나면 뒤늦게 오타를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리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야. 알 수 없는 묘한 긴장감이 정민은 잘 통제가 되지 않았다.
“아오…….”
결국 정민은 머리를 감싸고 한탄을 하다가 벌떡 일어나서 탕비실로 향했다. 커피라도 왕창 타서 마실 참이었다. 이렇게라도 머리를 깨워야지 까딱하다가는 밤샘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믹스 커피를 두 개 타서 자리로 돌아왔을 때 휴대전화에 문자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검토서 보냈습니다.]
이다경 역자였다. 이제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검토서가 벌써 도착한 것이다. 정민은 서둘러 메일을 확인했다. 그녀가 작성한 파일을 열어 죽 훑어본 정민은 정성 들여 작성된 검토서에 감탄했다. 검토서에서조차 기승전결의 흐름이 느껴졌다.
정민은 설레는 마음으로 검토서를 처음부터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다경 역자는 책의 감상은 물론이고 나름의 캐릭터 분석도 해 놓았다. 발췌 부분은 이 책의 중요 포인트로 잘 선택했고, 번역도 잘되어 있었다. 책의 장단점 분석은 날카로웠으며, 시장성에 대한 분석도 성의 있었다.
현지의 반응 역시 꼼꼼하게 첨부되어 있었다. 또한 어떤 문체와 분위기로 번역하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작품에 대한 분석을 기초를 다지듯 탄탄하게 해 놓은 것이다.
어떤 역자는 목차, 발췌 번역만 해 놓고 자기 의견이라고는 A4 용지 반쪽을 겨우 채우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다경 역자는 평론가 수준으로 작성해 놓았다. 그것도 일주일 만에 말이다.
“영미 씨.”
“네?”
파티션 너머로 영미가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이거 한번 읽어 볼래?”
“뭔데요?”
“이다경 역자한테서 받은 검토서.”
“벌써 왔어요?”
영미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담당 분야가 정해져 있지만 출판사 공용 메일을 이용하고, 일주일에 한 번 기획 회의를 하면서 담당자들은 모든 도서의 진행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
“잘한 쪽이에요, 못한 쪽이에요?”
정민이 피식 웃음을 보였다.
“잘한 쪽. 무척 잘한 쪽이야.”
“오오, 알았어요.”
영미가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파티션 너머 제 자리로 쏙 들어갔다. 영미가 검토서를 읽는 동안 정민은 커피를 마시며 검토서를 반복해 읽었다.
일본어만 고정적으로 작업하는 역자가 십여 명 정도 되는데 모두 실력이 좋았다. 검토서를 받아 보면 번역을 맡길지 말지 대략적인 판단이 서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그런 과정을 거친 역자들이다.
검토 후 판권 계약이 되면 번역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다들 책임감을 가지고 검토서를 작성한다. 그럼에도 이다경 역자가 눈에 띄는 이유는 이제 막 번역을 시작한, 신참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선배가 장난처럼 소개 안 시켜 준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선배님이 할 일을 역자가 다 했는데요?”
검토서를 다 읽은 영미가 웃으며 말했다. 일본어를 전공하지 않았으니 역자에게 상당 부분을 의지해야 하는데, 이 정도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검토서 중에서는 단연 최고.”
영미의 칭찬이 이어졌다. 정민 역시 이견이 없었다. 곧바로 이다경 역자에게 잘 받았다는 회신을 문자로 보냈다. 판권 계약이 되면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잠시 후 그녀로부터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다는 답장을 받았다.
불쑥 얼굴이 붉어져서, 정민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업무 얘긴데 어째서 이리도 심장이 두근대는지, 정민은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런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던지라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아아, 뭐야. 정말 목소리에 반하기라도 한 거야?’
가을 탓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면 가을이면 생각나는 진희 탓을 해야 하나, 아님 잠들어 있던 진희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다경 역자를 탓해야 하나. 두 사람을 자꾸 연관 짓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괴상하다.
‘우후!’
눈에 힘을 주어 부릅뜬 정민은 최종 점검을 기다리고 있는 원고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
전무님의 결재가 나고 곧바로 오퍼를 진행해서 계약까지 무사히 끝냈다. 기대하던 작품이 계약되고 출간까지 이어지면 기쁘고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번 계약은 기분이 조금 남달랐다. 황당하기만 한 사연이 덧붙여진 작품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정민은 이다경 역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검토서를 의뢰한 이후 두 번째다. 이번에는 그녀가 전화를 바로 받았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통상적인 인사를 건네자 그녀도 인사를 해 왔다. 의준이 말하던, 웃음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지난번에 검토했던 책 판권이 계약되어서요. 번역 의뢰하려고 전화드렸습니다.”
― 재밌게 읽은 책인데, 계약이 되었다니 좋네요.
“역자님이 보내 주신 검토서가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덕분에 좋은 작품을 놓치지 않은 것 같아요.”
― 과찬이십니다.
조금 웃어 주면 좋을 텐데. 그녀의 정적인 목소리에 정민도 괜히 긴장이 되었다.
“그럼 언제쯤 저희 사무실로 나오실 수 있나요?”
― …….
그녀가 침묵했다. 세 번이나 작업한 해림출판사도 한 번을 만난 적이 없다는데 괜한 부담을 준 모양이었다. 정민은 미안해서 웃으며 말했다.
“방문이 어려우시면 우편으로…….”
― 에디터님은 언제가 편하신가요?
기대하지 않았던 말에 순간 정민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어, 저야 역자님 편한 날이면 다 괜찮습니다.”
― 그럼 내일 갈까요?
내일? 대환영! 아…… 이건 아닌가.
“네. 내일 오셔도 됩니다.”
― 몇 시쯤이면 좋을까요?
짧게 고민하던 정민은 과감히 말했다.
“괜찮으시면 함께 식사하는 건 어떨까요?”
― 아…….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던 그녀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좋다고 했다. 데이트 신청을 받아 준 것처럼 정민은 기분이 한껏 들떴다.
“저희 출판사 근처에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어요.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니까 사무실 앞에서 뵙죠. 전화 주시면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정민은 쉬지도 않고 술술 말했다.
― 그럼 12시까지 갈게요.
“네. 오시는 길은 문자로…….”
― 출판사 블로그에서 주소 봤어요. 그럼 전 이만.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알 수 없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세 번을 작업하는 동안 담당자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는 그녀를 마주하게 되었으니 아주 조금은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다.
당연한 것 아닌가? 사교적이지 못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그녀와 5분 이상 통화를 해 본 적 없는 사이에 뭘 기대했다는 말인가. 바보처럼.
가을이라고 너무 감상적이 되어 버린 자신의 한심함을 나무라며, 정민은 하다 만 업무로 시선을 돌렸다.
#2장
다경은 동네 전체를 가로지르는 작은 운하를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날씨가 제법 선선해져서 기분 전환을 위해 바람을 쐬러 나왔다. 주말이면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이지만 평일은 한가해서 사색을 하며 걷기에 좋았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아이를 동반한 젊은 엄마들을 관찰하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중에 다경의 시선을 가장 오래 붙잡는 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었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직은 자그마한 학생들이 지나갈 때면 유독 마음이 찌르르 아파 온다. 아마도 교복을 입었던 기간이 짧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떠오르는 그때 그 시절.
열다섯 살의 이다경 아니, 이진희는 친구들과 정을 나누는 것이 어려웠다. 당장 제 앞에 놓인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 허덕이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랬음에도 지금까지 기억나는 친구들은 있다. 그중에 한 명…….
[안녕하십니까? 해림출판사 김의준 편집자의 소개로 연락드리게 된 ‘도서출판 하늘’의 하정민입니다. 검토서를 의뢰하고 싶어 연락을 드렸는데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 인사를 문자로 대신합니다. 통화가 가능한 시간을 알려 주시면 맞춰서 연락드리겠습니다.]
모르는 번호라서 두 번이나 전화를 받지 않았더니 장문의 문자가 도착했다. 일을 맡기고 싶다는 문자 속에 큼지막하게 보이는 이름, 하정민.
순간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하정민’이라는 이름의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실제로 16년 전 학교를 떠난 뒤 ‘정민’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여럿 만났는데 ‘하정민’은 처음이다.
설마…… 아니겠지?
우연히 같은 이름의 사람을 만난 것일 텐데, 자꾸 그때의 정민이 생각났다.
*
자신만 아는, 잠깐의 해프닝 탓이었을까? 그녀의 메일을 기다리는 시간이 무척이나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매일 마감을 하는 기분으로 업무를 하면서도 말이다.
오늘은 말일에 출간될 도서의 최종교를 보고 있는데 집중을 하지 못해 같은 부분만 반복해서 보고 있다. 세 번이나 교정 교열을 했으나 숨은 오타를 잡아야 하는 최종 단계여서 온 신경을 집중해서 봐야 한다. 그렇게 해도 출간하고 나면 뒤늦게 오타를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리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야. 알 수 없는 묘한 긴장감이 정민은 잘 통제가 되지 않았다.
“아오…….”
결국 정민은 머리를 감싸고 한탄을 하다가 벌떡 일어나서 탕비실로 향했다. 커피라도 왕창 타서 마실 참이었다. 이렇게라도 머리를 깨워야지 까딱하다가는 밤샘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믹스 커피를 두 개 타서 자리로 돌아왔을 때 휴대전화에 문자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검토서 보냈습니다.]
이다경 역자였다. 이제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검토서가 벌써 도착한 것이다. 정민은 서둘러 메일을 확인했다. 그녀가 작성한 파일을 열어 죽 훑어본 정민은 정성 들여 작성된 검토서에 감탄했다. 검토서에서조차 기승전결의 흐름이 느껴졌다.
정민은 설레는 마음으로 검토서를 처음부터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다경 역자는 책의 감상은 물론이고 나름의 캐릭터 분석도 해 놓았다. 발췌 부분은 이 책의 중요 포인트로 잘 선택했고, 번역도 잘되어 있었다. 책의 장단점 분석은 날카로웠으며, 시장성에 대한 분석도 성의 있었다.
현지의 반응 역시 꼼꼼하게 첨부되어 있었다. 또한 어떤 문체와 분위기로 번역하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작품에 대한 분석을 기초를 다지듯 탄탄하게 해 놓은 것이다.
어떤 역자는 목차, 발췌 번역만 해 놓고 자기 의견이라고는 A4 용지 반쪽을 겨우 채우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다경 역자는 평론가 수준으로 작성해 놓았다. 그것도 일주일 만에 말이다.
“영미 씨.”
“네?”
파티션 너머로 영미가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이거 한번 읽어 볼래?”
“뭔데요?”
“이다경 역자한테서 받은 검토서.”
“벌써 왔어요?”
영미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담당 분야가 정해져 있지만 출판사 공용 메일을 이용하고, 일주일에 한 번 기획 회의를 하면서 담당자들은 모든 도서의 진행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
“잘한 쪽이에요, 못한 쪽이에요?”
정민이 피식 웃음을 보였다.
“잘한 쪽. 무척 잘한 쪽이야.”
“오오, 알았어요.”
영미가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파티션 너머 제 자리로 쏙 들어갔다. 영미가 검토서를 읽는 동안 정민은 커피를 마시며 검토서를 반복해 읽었다.
일본어만 고정적으로 작업하는 역자가 십여 명 정도 되는데 모두 실력이 좋았다. 검토서를 받아 보면 번역을 맡길지 말지 대략적인 판단이 서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그런 과정을 거친 역자들이다.
검토 후 판권 계약이 되면 번역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다들 책임감을 가지고 검토서를 작성한다. 그럼에도 이다경 역자가 눈에 띄는 이유는 이제 막 번역을 시작한, 신참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선배가 장난처럼 소개 안 시켜 준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선배님이 할 일을 역자가 다 했는데요?”
검토서를 다 읽은 영미가 웃으며 말했다. 일본어를 전공하지 않았으니 역자에게 상당 부분을 의지해야 하는데, 이 정도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검토서 중에서는 단연 최고.”
영미의 칭찬이 이어졌다. 정민 역시 이견이 없었다. 곧바로 이다경 역자에게 잘 받았다는 회신을 문자로 보냈다. 판권 계약이 되면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잠시 후 그녀로부터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다는 답장을 받았다.
불쑥 얼굴이 붉어져서, 정민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업무 얘긴데 어째서 이리도 심장이 두근대는지, 정민은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런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던지라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아아, 뭐야. 정말 목소리에 반하기라도 한 거야?’
가을 탓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면 가을이면 생각나는 진희 탓을 해야 하나, 아님 잠들어 있던 진희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다경 역자를 탓해야 하나. 두 사람을 자꾸 연관 짓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괴상하다.
‘우후!’
눈에 힘을 주어 부릅뜬 정민은 최종 점검을 기다리고 있는 원고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
전무님의 결재가 나고 곧바로 오퍼를 진행해서 계약까지 무사히 끝냈다. 기대하던 작품이 계약되고 출간까지 이어지면 기쁘고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번 계약은 기분이 조금 남달랐다. 황당하기만 한 사연이 덧붙여진 작품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정민은 이다경 역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검토서를 의뢰한 이후 두 번째다. 이번에는 그녀가 전화를 바로 받았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통상적인 인사를 건네자 그녀도 인사를 해 왔다. 의준이 말하던, 웃음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지난번에 검토했던 책 판권이 계약되어서요. 번역 의뢰하려고 전화드렸습니다.”
― 재밌게 읽은 책인데, 계약이 되었다니 좋네요.
“역자님이 보내 주신 검토서가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덕분에 좋은 작품을 놓치지 않은 것 같아요.”
― 과찬이십니다.
조금 웃어 주면 좋을 텐데. 그녀의 정적인 목소리에 정민도 괜히 긴장이 되었다.
“그럼 언제쯤 저희 사무실로 나오실 수 있나요?”
― …….
그녀가 침묵했다. 세 번이나 작업한 해림출판사도 한 번을 만난 적이 없다는데 괜한 부담을 준 모양이었다. 정민은 미안해서 웃으며 말했다.
“방문이 어려우시면 우편으로…….”
― 에디터님은 언제가 편하신가요?
기대하지 않았던 말에 순간 정민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어, 저야 역자님 편한 날이면 다 괜찮습니다.”
― 그럼 내일 갈까요?
내일? 대환영! 아…… 이건 아닌가.
“네. 내일 오셔도 됩니다.”
― 몇 시쯤이면 좋을까요?
짧게 고민하던 정민은 과감히 말했다.
“괜찮으시면 함께 식사하는 건 어떨까요?”
― 아…….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던 그녀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좋다고 했다. 데이트 신청을 받아 준 것처럼 정민은 기분이 한껏 들떴다.
“저희 출판사 근처에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어요.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니까 사무실 앞에서 뵙죠. 전화 주시면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정민은 쉬지도 않고 술술 말했다.
― 그럼 12시까지 갈게요.
“네. 오시는 길은 문자로…….”
― 출판사 블로그에서 주소 봤어요. 그럼 전 이만.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알 수 없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세 번을 작업하는 동안 담당자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는 그녀를 마주하게 되었으니 아주 조금은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다.
당연한 것 아닌가? 사교적이지 못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그녀와 5분 이상 통화를 해 본 적 없는 사이에 뭘 기대했다는 말인가. 바보처럼.
가을이라고 너무 감상적이 되어 버린 자신의 한심함을 나무라며, 정민은 하다 만 업무로 시선을 돌렸다.
#2장
다경은 동네 전체를 가로지르는 작은 운하를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날씨가 제법 선선해져서 기분 전환을 위해 바람을 쐬러 나왔다. 주말이면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이지만 평일은 한가해서 사색을 하며 걷기에 좋았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아이를 동반한 젊은 엄마들을 관찰하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중에 다경의 시선을 가장 오래 붙잡는 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었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직은 자그마한 학생들이 지나갈 때면 유독 마음이 찌르르 아파 온다. 아마도 교복을 입었던 기간이 짧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떠오르는 그때 그 시절.
열다섯 살의 이다경 아니, 이진희는 친구들과 정을 나누는 것이 어려웠다. 당장 제 앞에 놓인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 허덕이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랬음에도 지금까지 기억나는 친구들은 있다. 그중에 한 명…….
[안녕하십니까? 해림출판사 김의준 편집자의 소개로 연락드리게 된 ‘도서출판 하늘’의 하정민입니다. 검토서를 의뢰하고 싶어 연락을 드렸는데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 인사를 문자로 대신합니다. 통화가 가능한 시간을 알려 주시면 맞춰서 연락드리겠습니다.]
모르는 번호라서 두 번이나 전화를 받지 않았더니 장문의 문자가 도착했다. 일을 맡기고 싶다는 문자 속에 큼지막하게 보이는 이름, 하정민.
순간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하정민’이라는 이름의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실제로 16년 전 학교를 떠난 뒤 ‘정민’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여럿 만났는데 ‘하정민’은 처음이다.
설마…… 아니겠지?
우연히 같은 이름의 사람을 만난 것일 텐데, 자꾸 그때의 정민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