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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16년 전 3월. 새 학년 새 학기를 맞은 교실은 무척 소란스럽고 어수선했다. 처음 만나는 친구들이기도 했지만 남녀 합반이 된 첫해라 더 그랬다.

세원중학교는 작년까지만 해도 남녀 합반이 아니었다. 학교가 세워진 지 오래되어서인지 다른 학교에 비해 보수적인 편에 속했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한 시기에 남녀 합반을 하면 면학 분위기를 해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지금까지 반 편성이 남녀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 학교가 갑자기 50년의 고집을 버리고 남녀 합반에 대한 찬반 의견서를 배포하더니 순식간에 남녀로 분리되어 있던 반을 올해부터 통합해 버렸다.

초등학생 때까지 같은 반에서 공부했던 이성 친구들이지만 1년을 떨어져 있어서 그랬을까? 고작 1년인데 2년을 떨어져 지냈던 3학년들보다 2학년 학생들 사이엔 더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네 분단의 자리를 정확히 남자 여자 반으로 나누어 앉아 있었다.

그 기준을 만든 것이 진희였다. 가장 먼저 등교를 한 그녀가 창가 쪽 자리에 앉으면서 여학생은 진희가 있는 곳으로, 남학생은 그 반대편으로 모이게 된 것이다.

“어휴. 너는 오늘도 일찍 왔구나?”

지각을 겨우 면한 수경이 뛰어오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며 알은척을 했다. 수경의 자리를 맡아 놓고 있던 주연이 언니처럼 나무랐다.

“너는 좀 일찍 다녀. 그렇게 간당간당 오면 안 불안해?”

“그래도 지각 안 하는 거 보면 용하지 않아?”

수경이 헤벌쭉 웃으며 철없이 말했다.

“어? 그런데 넌 왜 옆자리가 없어?”

진희는 책상도 없이 텅 빈 옆자리를 무심하게 쳐다보았다. 주연이 한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쪽에 남자애가 떼어 갔어.”

주연이 가리킨 곳엔 정말로 벽과 붙은 분단 제일 끝에 남학생 하나가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반 배정이 어찌나 친절한지 남자 여자 같은 인원수에 홀수였다.

“그런데 책상 가져가기 전에 진희 옆에 아무도 없었어? 1학년 때 우리 반 애들 더 있잖아.”

혹시나 진희가 기분 상할까 봐, 수경이 조용히 물었다.

“우리 반에서 온 애들이 홀수잖아. 그리고…….”

“나랑 같이 앉는 거 애들이 싫어해.”

수경과 주연이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리며 진희를 쳐다보았다. 예의 무심한 표정의 진희가 보고 있던 책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에이, 뭘 또 말을 그렇게 해.”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야.”

두 사람의 위로가 공허하게 주변을 떠돌았다.

진희는 1학년 내내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무슨 시험이건 봤다 하면 1등이었다. 거기다 차갑고 사교성이 좋지 못해서 반 친구들과 그리 가깝지 않았다. 조용하고 말수가 없으니 아이들 사이에서는 공부만 하는 새침데기에 깍쟁이로 인식되어 있었다.

하얀 얼굴과 윤기 흐르는 긴 머리카락, 그리고 가냘픈 외모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것도 모자라 공부까지 잘하는 진희는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질투와 시샘의 대상이었다. 여학생들끼리만 있을 때는 그나마 나았는데 남학생과 합반이 된 지금, 자신과 비교가 되는 진희 옆에 앉으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이제 중학생인데,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달은 것처럼 구는 진희를 다들 꺼려 했다. 하지만 친구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관심 없다는 듯 새침하기만 한 진희에게 수경과 주연이 친구가 되어 주었다. 초등학교 동창인 두 사람이 2학년이 되어서도 같은 반이 되었을 때 진희는 내심 안도하고 기뻐했다. 물론 제대로 표현은 못 했지만…….

드디어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무리 지어 떠들고 있던 아이들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교실과 복도가 조용해졌다.

잠시 후 앞문이 열리고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는 순간 아쉬움이 섞인 소리와 함께 아이들 몇몇은 낙심한 듯 책상에 엎드려 버렸다. 무섭기로 소문난 영어 교과 담당 최명자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으……. 2학년 되면 안 만날 줄 알았는데.”

주연이 상체를 잔뜩 웅크리고서 중얼거렸다. 수경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뭐야. 나 들어오니까 지금 다들 실망한 거야?”

최 선생이 엄한 표정으로 얇은 지휘봉을 휘휘 휘두르며 교탁까지 걸어갔다. 아이들의 탄식 소리가 줄어들지 않자 최 선생이 지휘봉으로 교탁을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계속 볼멘소리 하면 1년이 괴로울 것이야.”

“아아아.”

이번엔 아이들이 항의하듯 단체로 탄식했다. 무심하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진희만 빼고.

“자, 출석 확인하자.”

선생님의 호명에 따라 대답이 이어지는 동안 아이들의 관심은 딴 곳으로 옮겨 갔다.

“저기 봐. 정민이야.”

“봤어, 봤어. 완전 좋아.”

“작년 내내 정민이 노래를 부르더니 좋겠다, 너.”

여학생들이 소곤거리며 동경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대상은 하정민이었다. 정민은 큰 키와 말끔한 외모 덕에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활발하고 운동을 좋아해서 남학생들과도 친하게 잘 지냈다.

“자, 이제 자리를 정할까?”

출석 확인이 끝나고 최 선생이 장난기 다분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할까? 그냥 이대로 앉을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불만을 표현하자 최 선생이 귀찮다는 듯 지휘봉을 휘둘렀다.

“됐어. 내 맘대로 정할 거야. 그대들이 좋아하는 이성 짝꿍을 만들어 주겠어.”

이성 짝꿍이라는 소식에 술렁이는 아이들을 둘러보던 최 선생이 교탁을 지휘봉으로 두드렸다.

“가방들 챙겨서 남자 녀석들은 여기 키 순서대로 서고 어여쁜 소녀들은 모두 뒤로 가서 대기!”

선생님의 구령에 아이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의 소란이 잦아들고 남학생들이 키 순서대로 자리에 앉았다.

최 선생이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학생들을 가나다순으로 한 명씩 앞으로 불렀다. 작은 바구니에서 번호가 적힌 쪽지를 뽑아 정해진 자리에 앉으면 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었다.

자리가 정해지면서 학생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예스’를 연달아 외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싫다고 투정을 부리는 아이도, 포기했다는 듯 울상이 되어 자리에 앉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진희.”

구석에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진희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앞으로 나갔다. 여학생은 반쯤 자리를 배정받은 상태였다. 진희는 바구니에 남아 있는 종이 중 하나를 꺼내 선생님께 내밀었다.

“음…… 진희는…… 저기 1분단 네 번째 자리.”

“아아.”

여학생들의 탄식과 함께 진희는 이마를 잔뜩 찡그렸다. 선생님이 가리킨 곳은 하정민의 옆자리였다. 아까부터 정민의 옆자리를 탐내던 아이는 울상이 되었다.

순간 진희는 자리를 바꿔 달라고 할까 고민했다. 피하기만을 바랐던 자리에 앉게 된 자신보다는 그 자리를 원했던 사람에게 주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쳤다. 선생님이 허락하지 않을뿐더러 설령 허락해서 다시 뽑는다고 해도 이제는 분해서 자신을 무섭게 쏘아보는 그 아이가 원하는 자리에 앉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나저러나 신경 쓰이는 건 마찬가지라서 진희는 잠자코 자리로 향했다.

“민수경.”

선생님이 다음 사람을 호명했다.

제 자리로 간 진희는 창가 쪽에 앉아 있는 정민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작게 물었다.

“왜?”

“내가 그쪽에 앉을게.”

“어?”

정민이 황당해서 되물었다. 키 순서대로 먼저 자리에 앉은 남학생들은 모두 왼쪽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암묵적 규칙은 진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창가 쪽에 앉고 싶어서.”

“아…….”

대답을 미루며 주변을 둘러보던 정민이 활짝 웃었다.

“그래.”

흔쾌히 대답한 정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수상한 움직임을 알아챈 선생님이 물었다.

“짝꿍끼리는 자리 바꿔도 되죠?”

“왜?”

“제가 이 자리는 좀 불편해서요.”

정민의 넉살 좋은 거짓말에 진희는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억지 같은 요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민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거짓말까지 해 가며 자리를 바꿔 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수경과 주연을 빼고 이런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런 의아함도 잠시. 자신에 대해 잘 몰라서 처음엔 그럴 수 있겠거니, 다경은 생각했다.

“둘이 알아서 해.”

선생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정민이 가방을 챙겨 자리를 비켜 주었다. 본인이 자리를 바꾸고 싶어 했음에도 막상 상황이 쉽게 정리되어 버리자 조금은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진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새침하게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난 하정민이야.”

“알아.”

진희는 정민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무안해서라도 말을 안 걸 줄 알았는데, 정민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한 학기 동안 잘 부탁해.”

“난 그냥 없는 사람으로 생각해. 나도 너를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서 눈으로만 힐끔, 정민을 쳐다보았다. 처음엔 당황한 것 같던 정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너 참 신기하다.”

뭐? 엉뚱한 대꾸에 놀라서 진희는 저도 모르게 정민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정민이 선하게 웃었다. 순간 진희는 심장이 요동친다는 걸 생전 처음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