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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연장전 2화

2. 연장전 (1)





[영철 태권도장 전국남녀고교태권도대회 고등부 웰터급 2위 최성준]

“저거 걸었네요.”

“걸어야지 그럼.”

“관장님. 나 대학 가게요.”

“용인대?”

“아니요. 그냥 진원 사부 다니는 대학이요.”

“어이고. 왜?”

“그냥.”

“뻥치네. 너 진원이 좋아하지?”

관장님이 평범하게 물었다. 밥 먹었냐고 묻는 것도 아니고. 나는 관장님의 물음에 슬쩍 찔리긴 했지만 부정했다. ‘전혀 아닌데요’. 고개를 저어 보이는 나를 향해 관장님이 삿대질했다.

“넌 예전부터 걔를 잘 따랐잖아.”

“그거랑 상관없잖아요.”

“왜 상관없어.”

“나 사부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관장님이 음흉하게 웃었다. 늙은 아저씨 같아. 괜히 맞붙었던 시선을 회피했다.

관장님의 말이 맞았다. 나는 은연중에 진원 사부를 존경했다. 존경하는 감정이 커지다 보니 어딘가 짝사랑 같은 감정으로 희미하게 남았다.

“이상해요?”

“뭐가.”

“내가 진원 사부 좋아하는 거.”

“혼자 찔려서 그러지?”

“아닌데요?”

“맞네. 뭘. 소심한 새끼.”

애먼 눈치를 봤다. 내가 이야기하고도 털어놓는 마음이 영 이상했다. 열둘에 처음 본 게 전부인 사람이었다. 나를 가르치긴 했지만 그 기간은 반년 남짓한 시간이 고작이었다. 분명 내겐 진원 사부보다 좋은 스승들이 많았다. 확실하게 많았지만…… 나는 그들을 좋아하진 않았다.

“하나도 안 이상해.”

관장님은 그렇게 말했다. 이상하지 않은 사랑이라고. 관장님이 이야기하는 좋아하는 감정은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거였다. 플라토닉 사랑. 그러니까, 사부로서의 존경이겠지. 내가 희미하게나마 기억하는 진원 사부에 대한 환상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왜 거짓말했어요?”

“뭔 거짓말.”

“진원 사부. 체대 다닌다고 했잖아요.”

“그건 거짓말 아니었는데?”

관장님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제가 입고 있던 도복 띠를 다시 둘러매 내게 새 도복을 꺼냈다. ‘길이가 맞나 모르겠네’. 관장님이 내민 도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티셔츠를 걷어 올렸다.

“그러게, 이상하네. 진원이 학교를 옮겼나? 분명 간 건 체대였는데.”

진실을 아는 사람은 진원 사부뿐이었으니 아무도 그에 답할 수 없었다. 학교를 옮긴 건가. 그냥 단순한 생각이었다. 진원 사부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 직접 묻지 않으면 추측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내 목표는 대학에 가서 진원 사부를 만나는 거였다. 사부에게 사랑한다는 이야기 따위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보고 싶었다 고 말하고 조금씩 관계를…….

“학교는. 오늘 다시 갔잖아.”

“그냥 그래요.”

“친구도 없는 게 답답하게 굴지 말고. 살갑게 대해 봐.”

관장님이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자 맨살에서 찰진 소리가 났다. 철석 들러붙는 손이 아파 눈물이 맺힐 뻔했다. 어깨를 감싸고 관장님을 흘겨보자 그사이 모른 척 굴었다.

“멀대만 한 놈이 엄살은.”

관장님이 먼저 탈의실을 나섰다. 벗어 놓은 옷을 여러 번 펼쳤다가 개었다. 왠지 일찍 나가고 싶진 않았다. 괜히 관장님이 친구 이야기를 해서. 대답할 핑계도 없는데.

학교에 친구가 없는 건 처음엔 운동 때문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운동을 하느라 친구들과 만날 시간이 없었다. 체육관을 다니고 이따금 대회에 나가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컴퓨터 게임은 할 줄 모르고 핸드폰은 알람이나 전화를 하는 용도였다. 태권도 말고는 이야기할 거리가 없으니 입을 다물게 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비겁해서였다. 분명 초등학교 때 같이 놀던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와 우위를 가리는 모습을 봤다. 모두 함께 진원 사부의 이야기를 들었었고 우린 비겁하게 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각오는 잠시라는 걸 깨달았을 땐 나와 모두가 같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신념이 맞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편안해졌다. 무리에 섞이지 못하니 더 이상 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나는 운동하는 애 정도로 만족했다. 가끔 들어오는 반 아이들의 놀이 정도에 어울릴 수 있을 정도의 관계면 충분했다.

“차렷. 인사.”

키가 커 버렸다.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무릎 뒤가 아려 오는 건 당연했다. 내가 내 팔과 다리를 움직이기 어색해 자꾸만 멈칫거렸다. 몸무게를 유지하기 위해 근육을 늘려야 했다. 할 일이 많았다. 비틀거리는 무릎에 힘을 줘 관장님을 따라 다시 품새를 시작했다. 늘 처음이 중요했다.



***



“체육 특기자로 넣는다고?”

“네.”

“체대는 안 가고?”

“네.”

“대학 가면, 운동은 안 하게?”

“잘 모르겠어요.”

“일반 대학으로는 네가 말한 곳이 좋은데…… 체대가 너한테는 좋을 것 같아서 그래.”

상담이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체육 특기자로서는 충분한 성적을 가진 나를 두고 선생님은 고민했다. 국가 대표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뜬금없이 가겠다고 한 건 나름 명문대였다. 체육 명문대도 아니고 그저 일반 학생들이 가고 싶어 하는 명문 대학교를 지망한 내 종이를 보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가고 싶어서요.”

“그래, 뭐 일단 넣는 거야 상관없지만…….”

“네.”

“성준아. 체대도 넣어야 해.”

꾸역꾸역 맞지 않는 원서를 넣었다. 선생님의 기대에 체육 대학교를 넣었고 설렁설렁 실기 준비에 집중했다. 공부와 함께 대회 준비도 철저하게 했다. 엄마는 퇴근하는 길에 도장에 있는 나를 한번 보고 가곤 했다. 내가 그걸 모를 줄 알았는지 집에 가면 막상 모른 척하기 바빴다. 도장 안은 전부 통유리라 잘 보이는걸.

“대학은 넣었고?”

“응.”

“아들. 엄마 봐.”

“왜에.”

“무슨 일 있었어? 예쁘장한 얼굴이 왜 이래.”

“엄마한테나 예쁘지.”

“엄마가 태권도 다음으로 자랑스러워하는 게 네 얼굴이야.”

엄마와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었다. 시원찮은 젓가락질에 엄마가 걱정하는 투로 물어 왔다. 나는 엄마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걱정이 너무 많아. 예전부터 그래. 말도 안 하고, 살갑지도 않고.”

“이 정도면 살갑지.”

“퍽이나.”

“그래서, 아들이 싫어?”

“누가 싫대?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후. 대학 결정 나면 말이나 해.”

“나 운동 안 하면. 미워할 거야?”

식탁 아래 두고 있던 다리가 떨렸다. 엄마의 표정을 살폈다. 엄마는 뭐 별 이야기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엄마의 한숨의 뜻을 알고 있었다. 내가 한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도, 확인받고 싶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물었다.

내가 답을 들을 수 있는 상대는 엄마와 관장님이 전부였다.

“절대 안 그래.”

엄마의 확언과도 같은 말에 떨리던 다리가 멈췄다. 아려 오던 종아리가 힘이 풀리자 저릿해져왔다. 엄마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엄마가 일어난 자리를 보며 남은 밥을 비워 냈다.



***



“또 걸었어요? 저거 불법 아니에요?”

“뭔 상관이야. 우리가 너희 학교냐.”

“학교에 걸면 불법인가?”

“그럴걸? 너도 아르바이트나 해라.”

“최저시급은 챙겨 줘요?”

“나 양심으로 장사한다. 갈아입고 나와.”

관장님이 탈의실에서 먼저 나섰다. 대학에 합격한 건 가을이었다. 가을이라고 말하기도 뭣할 만큼 춥긴 했지만 어쨌거나 달력은 아직 낙엽 사진이었다. 수능을 봤고 평범하게 공부를 하기도 했다.

합격한 대학교까지는 버스를 타고 두 시간이 걸렸다. 기숙사를 신청했기에 합격 여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구나. 12월에는 대회가 있었고 나는 거기에 집중했다.

“금메달은 못 따겠죠.”

“따 보게?”

“네.”

“아직 눈빛이 살아 있네.”

“그럼 가능해요?”

“운동인은 마음가짐이야. 투지. 열정. 근성이지.”

“셋 다 별론데.”

“넌 그 세 개가 다 있어.”

“나 12월에 대회 끝나면 관둘래요.”

“아르바이트는.”

“안 할래요.”

“왜.”

“그냥요.”

“퍽이나.”

관장님의 물음에 말끝을 흐렸다.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면 진원 사부처럼 여기서 일해야 했다. 아이들을 가르칠 만큼 좋은 스승이 될 자신이 없었다.

기숙사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합격 소식과는 별개로 대회에 참여했다. 영철 태권도장 앞에서 관장님의 제안으로 졸업 사진처럼 사진을 찍었다. 관장님이 찍자고 했던 사진을 확인했다. 사진을 확인하니 자리 잡은 도장 뒤에 함께 찍힌 건 내 플래카드였다.

[영철 태권도장 제5회 XX시 전국태권도대회 고등부 웰터급 3위 최성준]

3위. 이 정도면 만족하는 걸까. 비겁하지 않은 운동이었을까 생각했다. 매일같이 러닝을 했고 예전처럼 운동을 했지만 도장에 나가진 않았다. 산을 타고 강을 뛰었다. 고향과의 이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잘할게.”

“그래. 엄마는 별 기대 안 해.”

“거짓말하지 마.”

“엄청 기대하고 있다고 하면, 뭐 하겠어?”

“아니.”

엄마와 작별 인사를 했다. 버스 터미널까지 굳이 태워 주겠다고 해서 가벼운 백팩을 메고 터미널로 향했다. 대부분의 짐을 택배로 보낸 상태라 몸이 가벼웠다. 챙길 건 별로 없었는데 엄마는 뭐가 그리 걱정인지 내게 여러 가지를 확인했다.

우린 울지 않기로 했다. 가족이라는 그런 핑계여서가 아니라, 그러니까 둘뿐이라는 가족이라서 울지 않는 게 아니었다. 다시 만날 게 분명했고 언젠가 다시 함께 살 거였다. 우린 그저 지금이 헤어질 때라고 생각하기로 타협했다. 엄마는 버스에 올라탄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엄마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했다. 엄마는 차에 올라타지 못한 채 내가 탄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괜한 약속이었다. 먼저 눈물이 터진 건 내 쪽이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바로 커튼을 쳤다. 엄마가 내가 우는 모습을 보면 괜히 속상할 게 뻔했다. 알면서도 터진 눈물이 멈출 줄 몰랐다. 미안했다. 우는 것조차 엄마에게 보이기 죄스러웠다.

정류장에서 내려 학교로 향했다. 버스에 올라탔다가 지하철을 갈아타고 배정받은 기숙사로 아주 조용히 들어갔다. 나는 스물이 되었고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봄이었다.



***



“너 말야. 그래. 승준이. 왜 소개팅 안 해?”

“최성준입니다.”

“그래? 아니, 그래. 성준이. 우리 과 소개팅 엄청 들어오잖아.”

같은 과 선배였다. 김씨였나. 박씨였나. 흔해 빠진 성을 가진 사람이어서 잘 기억하지 못했다. 개강 총회는 무조건 참여해야 한다고 해서 끌려오다시피 한 자리였다. 술자리는 거북해서 어색하게 목만 축이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선배에게 큰 소리로 인사하는 전통이 체대의 덕목이니 하고 넘어가려 했다. 융통성 있는 게 좋은 거라 생각하려 했지만 술잔에 술을 따르며 내게 하는 말이 영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별로 관심 없습니다.”

“왜? 남자 좋아해? 이 새끼 게이래~”

소란스러워진 술집에서 옆 사람의 목소리가 들릴 일은 없었다. 이미 취한 건가. 붉은 조명 아래 희미한 얼굴을 오래 마주하는 것도 곤욕이었다. 취한 상태인 건 맞았는지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내 쪽에서 언성이 높아진 걸 듣고 사과했다. 짧게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면서 후배들 앞이라 부끄러운지 얼굴을 숙였다.

“정성배. 야, 성배야! 어후 술을…… 미안하다, 그.”

“최성준입니다.”

“그래. 그래, 성준아. 미안하다. 성배 얘가 술이 약해서.”

사람이 문제인 거 아닌가. 앞에 놓인 물이 든 컵을 들어 한 입 마셨다. 언제 바꿔치기한 건지 컵엔 소주가 가득했다. 이거 저 새끼가 일부러 그런 거네. 입 속에 남은 소주를 삼키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옆에 앉아 있던 정성배는 내 팔을 두어 번 쳐 댔다. 술 취했다는 핑계도 정도가 있지. 정성배를 쳐다보자 자신의 등을 굽히더니 내게 제 팔을 들어 보였다.

“나 너 알아.”

“네.”

“태권도, 했잖아 너.”

“네.”

“그거지. 체육 뭐. 특기.”

“네.”

“나 한 대 쳐 봐. 어? 그냥. 선수 한 애한테 맞으면 얼마나 아픈가…… 해서.”

“저. 선배.”

맞은편 선배를 불렀다. 이미 만취한 정성배 쪽으로 눈짓하자 선배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이미 제 몸도 못 가누는 정성배에게 나오라고 소리쳤다.

시끄러운 노래가 술집을 울리고 있었다. 6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한 개강 총회에 각자의 이야기가 들릴 리 없었다. 그런 소란 와중 고함 지르는 정성배의 행동은 충분히 관심받을 만했다. 자리 잘못 걸렸다. 그 생각이 제일 컸다.

“새끼야. 야, 선배가 말하는데. 얼굴 그게 뭐냐.”

“많이 취하셨습니다.”

“뭐? 야. 민준아. 아 씨발. 야 비켜 봐. 어? 왜 내 팔을 잡아?”

“야, 성배야. 취했다니까.”

소란스러워진 술자리가 순간 정적이 되었다. 노랫소리 말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괜히 머쓱해졌다. 테이블 쪽으로 조교가 달려왔다. 누가 봐도 화가 난 얼굴이었다. 조교의 말에 분위기가 싸해지는 건 당연했다.

“저쪽에 교수님도 있는데…… 시발, 너 뭐 하는 거야?”

잔뜩 곤란한 얼굴이었다. 조교가 정성배를 향해 손을 짧게 올렸다.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기세였다. 정성배가 조교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조교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조교는 올렸던 대충 손을 털어 냈다.

“됐다. 됐어. 진짜 저 새끼 누가 술자리 데려왔어! 정성배 학번 과대 누구야!”

조교의 불평에 다른 테이블에서 뛰어온 선배가 정성배의 팔을 끌었다. 어기적거리며 가게 문을 연 정성배가 나가고 그 틈에 누군가 들어왔다. 조교는 정성배의 뒷모습을 보다 눈에 띄게 놀라며 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형, 진짜 오셨네요?”

“김 교수님이 연락해서.”

“퇴근하고 오신 거죠?”

“어. 오늘 무슨 행사해?”

“아, 오늘 개총이요.”

“어쩐지. 김 교수님은?”

“저기…….”

조교가 제 손을 들어 깍듯하게 모신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정장을 입은 채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10년 전 그때보다 조금 더 큰 키와 잘 관리된 몸이 태가 나는 사람이었다. 멀뚱히 서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눈빛이 스쳤다. 노래와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끄러웠던 공간이 순식간에 죽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상대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진원 사부.”

내 목소리가 노래에 묻혔다. 시끄러운 노래가 윙윙거린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내 귀엔 그게 들리지 않았다. 조교와 함께 걷고 있는 건 진원 사부가 확실했다. 내가 아는 진원 사부가,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진원 사부가 맞았다.

“아는 후배예요?”

멈춰 선 조교가 나와 진원 사부를 번갈아 봤다. 진원 사부는 어두운 조명과 한창 물이 오른 시끄러운 공간에서 나를 보았다. 힐끗 바라본 나를 향한 시선이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진원 사부가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보지도 않았으면서. 잇새까지 새어 나온 목소리가 진원 사부의 한마디에 정리됐다.

“취한 것 같은데.”

사부에게 받아칠 말이 없었다. 진원 사부는 나를 지나쳐 가게 안쪽으로 사라졌다. 조교는 다시 진원 사부의 뒤를 따랐고 나는 일어난 자리에서 그대로 가게 밖으로 나갔다. 가게 안보다 밖에서 기다리면 진원 사부가 나올 거라 생각했다.

담배를 피우던 정성배가 다시 비틀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동기들이 모두 떠난 자리에서 정성배는 내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얼굴을 한번, 가게 입구를 다시 한번 돌아보더니 그대로 계단을 조용히 올라갈 뿐이었다.

“뭘 봐.”

내 말에 정성배의 등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그는 내게 아무런 해를 끼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성배의 태도에 아깐 왜 그런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무런 대꾸도 없는 길을 오르던 정성배가 제 어깨를 움츠렸다. 가게 문이 열리고 선배 여럿이 나왔다. 정성배는 그 틈에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30분 정도 지나자 가게 문이 열렸다. 가게에서 빠져나온 가로등 아래 진원 사부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진원 사부의 앞에 섰다. 나보다 조금 작은 키에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예전엔 훨씬 컸었는데. 진원 사부는 그대로인데 나만 변한 기분이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저 기억 안 나세요?”

“…….”

진원 사부가 나를 향해 제 고개를 들이밀었다. 열아홉의 진원 사부와 다른 건 당연한 거라는 걸 알았다. 마지막으로 뉴스에서 봤던 사부의 모습과도 조금 달라져 있었지만 무심한 눈만은 여전했다.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진원 사부는 내게서 조금 멀어졌다.

“이름이 뭔데요?”

“아. 성준이요.”

“흔한 이름이라.”

“그럼 그, 용인 태권도 다녔는데.”

진원 사부가 내 곁에서 천천히 거리를 두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진원 사부 옆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어디 차를 주차한 건지 고개를 움직이며 거리에 세워진 차를 살피고 있었다. 나를 무시하며 걷고 있는 사부의 뒤를 쫓았다.

“용인 태권도 다녔고, 어, 관장님 이름은 영철이요. 그러니까 진원 사부가…….”

그가 걸음을 재촉할수록 내 걸음도 빨라졌다. 진원 사부가 자신의 주머니를 뒤지더니 차 키를 꺼냈다. 차가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위치를 알렸다. 나는 멀뚱히 사부의 뒤에 서 있었다. 사부가 상체를 돌려 나를 보고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탈래요? 우리 과 후배는 맞죠?”

“……네? 네!”

“개강 총회라면서. 다시 안 가요?”

“네, 괜찮아요.”

“집은 어느 쪽인데요.”

“기숙사 살아요.”

“가까우니까 태워 줄게요.”

“아. 네. 아, 감사합니다.”

조수석 문을 열어 차에 올라탔다. 진원 사부가 차 키를 돌려 시동을 걸었다. 옆에 정자세로 앉아 있는 나를 보며 진원 사부가 제 손가락을 까딱였다.

“안전벨트.”

“네. 네…….”

차가 출발했다. 기숙사까지 끽해 봐야 걸어서 10분이었으니 차를 타면 5분도 안 걸릴 게 뻔했다. 나는 급해진 마음에 사부를 향해 먼저 인사했다.

“최성준입니다.”

“용인 태권도?”

“네.”

“몇 년 전이지. 한 5년 넘지 않았나.”

“저 그때 열두 살이었어요.”

“……한참 전이네. 지금 스물이죠?”

“네.”

“여기서 좌회전이었죠?”

나를 쳐다보지 않은 채 고개를 움직이며 백미러만을 보고 있었다. 사부에게 한 번이라도 더 말을 걸고 싶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니까. 그런 핑계로 사부 차에 있던 물건을 빠르게 살폈고 그를 향해 쫑알거리며 말했다.

“우회전이요.”

“……좌회전인데.”

이미 핸들을 돌리고서야 나를 보며 말했다. 좌회전인 걸 알면서도 모른 척 굴었다. 사부가 나를 향해 힐끔 시선을 보냈지만 눈을 돌려 회피했다. 길 알고 있으면서 왜 모른 척한 거야. 괜히 우회전이라고 이야기한 내가 민망해졌다.

“저 그때 머리 노랬어요.”

“전체가?”

“아뇨. 앞머리만요.”

“아아. 예전에 그런 게 유행이었잖아요.”

능숙하게 운전할 줄 알면서 길은 왜 확인한 거야. 나를 신경 쓰지 않는 목소리가 얄미웠다. 길에 대해 신뢰를 잃은 건지 더 이상 내게 묻지 않은 터라 다른 길로 빠지라고 말할 수 없었다.

“반말하셔도 괜찮아요.”

“나이 많다고 반말하는 꼰대는 아니에요.”

조수석에서 본 사부는 예전보다 훨씬 성숙해져 있었다. 아니, 당연한 거라는 건 알지만 뉴스에 나왔을 때보다 살은 더욱 빠져 있었다. 아직도 운동을 하는 건지 팔꿈치에서 끌어당겨진 셔츠의 가슴 부근은 탄탄했다.

“직업이 뭐예요?”

“그냥 일해요.”

사부가 다시 핸들을 돌렸다. 창밖의 거리를 보니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였다. 하나라도 더 알아내고 싶었다. 사부는 나를 룸미러로 힐끔 쳐다본 뒤 바로 전방을 주시했다.

“그럼 무슨 일 하는지 알려 주세요.”

“궁금해요?”

“네. 궁금해요.”

“왜요?”

차가 멈췄다. 기숙사 입구에서 깜빡이가 켜진 차를 세웠다. 사부가 이제야 나를 정확히 쳐다봤다. 내리라는 뜻인 걸 알았지만 좀 더 대화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