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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목소리
1화
#01 그녀의 목소리
“나라면 그 드라마, 할 거 같은데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였다. 등 뒤에서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에 놀라 날 선 논쟁을 멈추고는 최현진과 박 실장은 뒤를 돌아봤다.
두 사람의 거친 목소리를 멈추게 한 그녀의 목소리. 현진은 세정을 만났던 첫날을 그녀의 목소리로 기억한다고 말하곤 했다.
지나간 시간이 소리로 기억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 세정의 목소리가 현진을 돌려세웠고 그의 일상이, 삶의 흐름이 그렇게 바뀌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순간이 지나가고 현진은 갑자기 튀어나온 그녀가 그들의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듣고 있었는지 생각하느라 일그러진 표정으로 싸늘하고 불쾌하게 물었다.
“당신 뭐야.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이 대본 봤어?”
최현진은 연기력 논란과 함께 터진 제작진과의 불화설로 자신에게 닥친 위기들로 신경이 온통 날이 서 있었고,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박 실장 역시도 이 논란들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아야만 하는 무거운 책임에 머리가 아프던 찰나였다.
“뭐부터 대답할까요? 저는 정현대학교 연극영화과 조교 이세정이구요, 최현진 씨를 여기서 기다리면 된다고 친절하게 회사 직원분이 안내해 주셨구요. 분명 약속이 되어 있는데도 두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셔서, 테이블에 너저분하게 펼쳐져 있던 대본을 읽으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 어떤 행동이 최현진 씨를 화나게 했을까요?”
세정의 목소리는 맑고 경쾌했다. 그러나 알록달록한 껍질에 포장된 쓴 알약처럼, 그녀의 목소리 속에는 맑음과는 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포장 속의 알맹이가 차가움임을, 현진에게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큰 아픔이 될 것이라고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정현대라……. 젠장. 작은아버지 약속을 잊고 있었네.”
현진은 그제야 작은아버지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대학원 입학에 도움 줄 사람을 보내겠다고 하던 말이 생각나자, 그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박 실장은 갑자기 튀어나온 여자가 현진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급하게 대본을 정리했다.
“미안한데, 그 대본 아직 방송 전이라 내용이 유출되지 않도록 부탁드리죠.”
박 실장의 목소리는 정중한 듯 들렸으나, 실상은 여기에서 나온 어떤 이야기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기를 바란다는 강한 눈빛을 함께 담고 있었다.
박 실장의 강한 눈빛에도 흔들림이 없는 여자는 처음보다 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멋대로 대본을 본 대목이 두 분을 당황시킨 듯하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드리죠. 그럼 이제 여기서 두 시간이나 기다린 제가 최현진 씨와 대화를 나눌 수 있나요?”
세정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대본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현진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최현진은 연예인인 자신을 바라보는 낯선 아가씨의 시선 안에 반가움이나 동경, 혹은 호기심 같은 것이 섞여 있지 않다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아무리 인기가 떨어진 배우라 하지만, 그래도 자신은 톱스타 반열에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앞에 선 키가 작은 여자는 자신을 사무적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그것이 자신의 관심을 끌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연기였다면, 이 여자는 성공한 듯했다.
“박 실장, 우리 마실 거나 좀 가져오지. 날 두 시간이나 기다린 아가씨인데 말은 들어 봐야 하지 않겠어. 앉아.”
박 실장을 내보내고 현진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지 않은 세정이 맑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현진을 둘러싼 공기를 흔들었다.
“딱떨어지는 반말이군요.”
“나이는 나보다 어린 듯하니 실례는 아닌 듯한데. 그리고 근래 아무리 작품 활동을 뜸하게 했다고 해도, 이렇게 당신에게 딱딱한 대접을 받을 만큼 형편없는 인기는 아닐 텐데…….”
“그러게요. 인기와 인품이 비례하진 않네요.”
“뭐?”
현진은 이 작은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소리와 비아냥거림이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겨진 적대감을 느끼며 다시 한번 세정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두 시간을 기다리게 한 자신에 대한 적대감인지, 아니면 그녀를 둘러싼 모든 세상에 대한 적대감인지 궁금해지려는 순간, 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랑이는 그만하죠. 제 아까운 시간을 더는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먼저 학과장님께서 보내신 서류입니다. 올해 저희 대학원에 입학하시는 걸로 준비한다고 하셨습니다.”
“싫은데. 난 대학원에 입학할 생각 따위 없고, 오늘 그쪽 때문에 더 없어지기도 했고.”
세정은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앉아 자신을 히죽거리며 보고 있는 최현진을 감정이 없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오래인 듯했지만, 짧은 침묵의 시간이 흘러가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세정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저 대본은 제가 기다린 두 시간에 대한 대가라 생각하죠.”
세정은 작정한 듯 비꼬는 태도에도 흔들림 없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꾸벅 인사를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
충분히 기분이 나빴을 상황, 현진이 작정하고 비아냥거리고 있음을 알고도 아무런 저항 없이 돌아서 나가는 세정의 뒷모습을 현진은 기가 막힌 듯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오랫동안 세정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건 한참의 시간이 지나 인터폰이 울리고 난 후였다.
― 무슨 일이야? 아까 그 아가씨는 또 뭐고?
“내 이미지 쇄신을 위한 우리 집안의 프로젝트랄까? 내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나보고 대학원에 진학하란다. 그것도 연극영화과에…….”
― 나쁘지는 않네. 공식적인 공백의 이유로는 근사하네.
“공백?”
― 그래. 영화와 드라마 캐스팅 제의가 없어서 어쩔 수 없는 공백을 그렇게라도 포장하는 거지. 역시 너희 집안사람들은 똑똑한 것 같아.
“비아냥거림이냐, 박 실장아.”
― 아니, 현실 직시지. 넌 하고 싶은 작품이 없고, 좋은 감독들은 널 원하지 않고.
박 실장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운 좋게 캐스팅된 최현진의 첫 작품은 엉성한 연기력에도 깨끗하고 반듯한 마스크 덕택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게다가 대학 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집안 배경과 사고 치고 나가 있던 미국 유학이 또 다른 스펙이 되어 최현진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개의 트렌디 드라마와 영화를 섭렵하면서 최고의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자유롭고 가벼운 삶을 즐기기만을 원했던 현진에게 깊이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렇게 연기자로서의 고민 없이 이미지만을 소비하며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 지금은 작품 선택을 가장 못하는 연기자로, 좋은 작품을 말아먹는 연기자로, 연기로 평가받는 연기자가 아닌 연기를 함께 한 사람과의 스캔들 메이커로 낙인찍혀 버리고 말았다.
서른여덟의 그가 여전히 스물 언저리에 있다는 스스로의 착각 때문에 그의 연기가 발전하지 않는 거라고, 함께 일한 여자 연예인들과 크고 작은 스캔들을 흘리는 책임감 없는 가벼움이 그의 매력을 갉아먹고 있다고, 그에 대한 평가는 점점 과격해지고 있었다.
박 실장과의 답 없는 답답한 대화를 끝내고 현진은 자신을 아무런 감흥 없이 바라보던, 목소리가 맑았던 여자의 눈을 떠올렸다. 그녀의 눈에는 최현진 자신은 진지한 대응조차 아까운 한심한 사람이라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그에게 향하는 경멸에 당황하지 않기 위해 비아냥이란 방패로 대응한 자신의 한심함에 한숨을 내뱉을 즈음, 휴대폰이 울렸다. 친구 찬영이었다.
“여보세요?”
― 야, 최현진. 또 까였다며?
“소식 한번 빠르네.”
휴대폰 너머로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흥청거리는 술 파티가 어디선가 이뤄지고 있는 중일 것이다.
― 혼자 심각해하지 말고, 한잔하자.
“귀찮다.”
― 김규식 감독만 영화 만드냐? 친구야, 영화는 많고 네가 할 영화는 널렸다. 언제부터 최현진이 그렇게 심각했어? 잔말 말고 나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다. 인생은 가벼운 것이고, 즐기면 그만인 것이었다. 현진은 처음부터 무거움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듯 상황을 떨쳐 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술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렇지 않은 듯 최현진에게서 돌아서 나온 세정을 반기는 것은 도심의 어둠뿐이었다. 화려한 불빛들이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도심의 한 곳에서 세정은 어쩐지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에 싸여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오랫동안 서 있었다.
“왜? 길을 잃었나? 아니면 날 설득하지 못하면 학교에서 쫓겨나나?”
빈정거림이 빠진 현진의 목소리는 깊고 달콤했다. 그 옛날 세정을 흔들던 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그녀는 깊은숨을 내쉬고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렇다면요? 인류애를 발휘해 절 구원해 주실 건가요?”
세정의 물음에 오랫동안 현진은 답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 세상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고 두려울 것 없어 보이던 사무실에서의 그녀가 아닌, 어둠 따위를 무서워하는 작은 여자아이 하나만 서 있는 것 같았다.
“구원이라……. 내가 지금 누굴 구원할 처지는 못 되고, 작은아버지께 전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네. 그렇게 전하죠.”
세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현진이 그녀 곁을 지나쳐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넋두리처럼 흘러나왔다.
“길을 잃은 지는 아주 오래되었죠. 난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현진이 떠나고 나서도 세정은 오랫동안 자신이 내뱉은 낮은 목소리에 묶여 꼼짝도 못 하는 사람처럼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1화
#01 그녀의 목소리
“나라면 그 드라마, 할 거 같은데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였다. 등 뒤에서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에 놀라 날 선 논쟁을 멈추고는 최현진과 박 실장은 뒤를 돌아봤다.
두 사람의 거친 목소리를 멈추게 한 그녀의 목소리. 현진은 세정을 만났던 첫날을 그녀의 목소리로 기억한다고 말하곤 했다.
지나간 시간이 소리로 기억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 세정의 목소리가 현진을 돌려세웠고 그의 일상이, 삶의 흐름이 그렇게 바뀌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순간이 지나가고 현진은 갑자기 튀어나온 그녀가 그들의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듣고 있었는지 생각하느라 일그러진 표정으로 싸늘하고 불쾌하게 물었다.
“당신 뭐야.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이 대본 봤어?”
최현진은 연기력 논란과 함께 터진 제작진과의 불화설로 자신에게 닥친 위기들로 신경이 온통 날이 서 있었고,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박 실장 역시도 이 논란들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아야만 하는 무거운 책임에 머리가 아프던 찰나였다.
“뭐부터 대답할까요? 저는 정현대학교 연극영화과 조교 이세정이구요, 최현진 씨를 여기서 기다리면 된다고 친절하게 회사 직원분이 안내해 주셨구요. 분명 약속이 되어 있는데도 두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셔서, 테이블에 너저분하게 펼쳐져 있던 대본을 읽으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 어떤 행동이 최현진 씨를 화나게 했을까요?”
세정의 목소리는 맑고 경쾌했다. 그러나 알록달록한 껍질에 포장된 쓴 알약처럼, 그녀의 목소리 속에는 맑음과는 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포장 속의 알맹이가 차가움임을, 현진에게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큰 아픔이 될 것이라고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정현대라……. 젠장. 작은아버지 약속을 잊고 있었네.”
현진은 그제야 작은아버지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대학원 입학에 도움 줄 사람을 보내겠다고 하던 말이 생각나자, 그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박 실장은 갑자기 튀어나온 여자가 현진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급하게 대본을 정리했다.
“미안한데, 그 대본 아직 방송 전이라 내용이 유출되지 않도록 부탁드리죠.”
박 실장의 목소리는 정중한 듯 들렸으나, 실상은 여기에서 나온 어떤 이야기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기를 바란다는 강한 눈빛을 함께 담고 있었다.
박 실장의 강한 눈빛에도 흔들림이 없는 여자는 처음보다 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멋대로 대본을 본 대목이 두 분을 당황시킨 듯하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드리죠. 그럼 이제 여기서 두 시간이나 기다린 제가 최현진 씨와 대화를 나눌 수 있나요?”
세정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대본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현진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최현진은 연예인인 자신을 바라보는 낯선 아가씨의 시선 안에 반가움이나 동경, 혹은 호기심 같은 것이 섞여 있지 않다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아무리 인기가 떨어진 배우라 하지만, 그래도 자신은 톱스타 반열에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앞에 선 키가 작은 여자는 자신을 사무적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그것이 자신의 관심을 끌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연기였다면, 이 여자는 성공한 듯했다.
“박 실장, 우리 마실 거나 좀 가져오지. 날 두 시간이나 기다린 아가씨인데 말은 들어 봐야 하지 않겠어. 앉아.”
박 실장을 내보내고 현진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지 않은 세정이 맑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현진을 둘러싼 공기를 흔들었다.
“딱떨어지는 반말이군요.”
“나이는 나보다 어린 듯하니 실례는 아닌 듯한데. 그리고 근래 아무리 작품 활동을 뜸하게 했다고 해도, 이렇게 당신에게 딱딱한 대접을 받을 만큼 형편없는 인기는 아닐 텐데…….”
“그러게요. 인기와 인품이 비례하진 않네요.”
“뭐?”
현진은 이 작은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소리와 비아냥거림이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겨진 적대감을 느끼며 다시 한번 세정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두 시간을 기다리게 한 자신에 대한 적대감인지, 아니면 그녀를 둘러싼 모든 세상에 대한 적대감인지 궁금해지려는 순간, 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랑이는 그만하죠. 제 아까운 시간을 더는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먼저 학과장님께서 보내신 서류입니다. 올해 저희 대학원에 입학하시는 걸로 준비한다고 하셨습니다.”
“싫은데. 난 대학원에 입학할 생각 따위 없고, 오늘 그쪽 때문에 더 없어지기도 했고.”
세정은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앉아 자신을 히죽거리며 보고 있는 최현진을 감정이 없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오래인 듯했지만, 짧은 침묵의 시간이 흘러가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세정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저 대본은 제가 기다린 두 시간에 대한 대가라 생각하죠.”
세정은 작정한 듯 비꼬는 태도에도 흔들림 없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꾸벅 인사를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
충분히 기분이 나빴을 상황, 현진이 작정하고 비아냥거리고 있음을 알고도 아무런 저항 없이 돌아서 나가는 세정의 뒷모습을 현진은 기가 막힌 듯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오랫동안 세정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건 한참의 시간이 지나 인터폰이 울리고 난 후였다.
― 무슨 일이야? 아까 그 아가씨는 또 뭐고?
“내 이미지 쇄신을 위한 우리 집안의 프로젝트랄까? 내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나보고 대학원에 진학하란다. 그것도 연극영화과에…….”
― 나쁘지는 않네. 공식적인 공백의 이유로는 근사하네.
“공백?”
― 그래. 영화와 드라마 캐스팅 제의가 없어서 어쩔 수 없는 공백을 그렇게라도 포장하는 거지. 역시 너희 집안사람들은 똑똑한 것 같아.
“비아냥거림이냐, 박 실장아.”
― 아니, 현실 직시지. 넌 하고 싶은 작품이 없고, 좋은 감독들은 널 원하지 않고.
박 실장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운 좋게 캐스팅된 최현진의 첫 작품은 엉성한 연기력에도 깨끗하고 반듯한 마스크 덕택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게다가 대학 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집안 배경과 사고 치고 나가 있던 미국 유학이 또 다른 스펙이 되어 최현진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개의 트렌디 드라마와 영화를 섭렵하면서 최고의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자유롭고 가벼운 삶을 즐기기만을 원했던 현진에게 깊이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렇게 연기자로서의 고민 없이 이미지만을 소비하며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 지금은 작품 선택을 가장 못하는 연기자로, 좋은 작품을 말아먹는 연기자로, 연기로 평가받는 연기자가 아닌 연기를 함께 한 사람과의 스캔들 메이커로 낙인찍혀 버리고 말았다.
서른여덟의 그가 여전히 스물 언저리에 있다는 스스로의 착각 때문에 그의 연기가 발전하지 않는 거라고, 함께 일한 여자 연예인들과 크고 작은 스캔들을 흘리는 책임감 없는 가벼움이 그의 매력을 갉아먹고 있다고, 그에 대한 평가는 점점 과격해지고 있었다.
박 실장과의 답 없는 답답한 대화를 끝내고 현진은 자신을 아무런 감흥 없이 바라보던, 목소리가 맑았던 여자의 눈을 떠올렸다. 그녀의 눈에는 최현진 자신은 진지한 대응조차 아까운 한심한 사람이라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그에게 향하는 경멸에 당황하지 않기 위해 비아냥이란 방패로 대응한 자신의 한심함에 한숨을 내뱉을 즈음, 휴대폰이 울렸다. 친구 찬영이었다.
“여보세요?”
― 야, 최현진. 또 까였다며?
“소식 한번 빠르네.”
휴대폰 너머로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흥청거리는 술 파티가 어디선가 이뤄지고 있는 중일 것이다.
― 혼자 심각해하지 말고, 한잔하자.
“귀찮다.”
― 김규식 감독만 영화 만드냐? 친구야, 영화는 많고 네가 할 영화는 널렸다. 언제부터 최현진이 그렇게 심각했어? 잔말 말고 나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다. 인생은 가벼운 것이고, 즐기면 그만인 것이었다. 현진은 처음부터 무거움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듯 상황을 떨쳐 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술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렇지 않은 듯 최현진에게서 돌아서 나온 세정을 반기는 것은 도심의 어둠뿐이었다. 화려한 불빛들이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도심의 한 곳에서 세정은 어쩐지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에 싸여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오랫동안 서 있었다.
“왜? 길을 잃었나? 아니면 날 설득하지 못하면 학교에서 쫓겨나나?”
빈정거림이 빠진 현진의 목소리는 깊고 달콤했다. 그 옛날 세정을 흔들던 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그녀는 깊은숨을 내쉬고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렇다면요? 인류애를 발휘해 절 구원해 주실 건가요?”
세정의 물음에 오랫동안 현진은 답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 세상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고 두려울 것 없어 보이던 사무실에서의 그녀가 아닌, 어둠 따위를 무서워하는 작은 여자아이 하나만 서 있는 것 같았다.
“구원이라……. 내가 지금 누굴 구원할 처지는 못 되고, 작은아버지께 전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네. 그렇게 전하죠.”
세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현진이 그녀 곁을 지나쳐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넋두리처럼 흘러나왔다.
“길을 잃은 지는 아주 오래되었죠. 난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현진이 떠나고 나서도 세정은 오랫동안 자신이 내뱉은 낮은 목소리에 묶여 꼼짝도 못 하는 사람처럼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