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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02 그의 목소리
연구실로 들어서는 세정의 어깨가 작아 보였다. 언제나 위태롭게 보이는 세정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의 어머니를 떠올리는 최 교수였다.
“교수님, 저 완전 실패했어요.”
세정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최 교수는 세정이 밝게 말하기 위해 한없이 많은 심호흡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 그 녀석이 커피 한 잔도 안 주더냐?”
“커피는 주던데, 못 마시고 나왔죠. 입학 안 할 생각은 아닌 듯한데, 제가 못마땅했나 봐요. 저 때문에 더 하기 싫다고 하던데요?”
“핑계지. 오늘 처음 본 너 때문에 하기 싫다는 게 말이 되나. 신경 쓰지 말고 일단 입학 준비는 해 둬. 그 녀석 그래도 배우로 살아가게 하려면 이게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게 네 생각이니까.”
최 교수는 작은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르며 작은 세정을 위로하고 있었다. 언제나 위로가 필요한 아이지만, 타인의 위로 따위가 스며들지 못하게 차가운 차단막을 치고 있는 아이였다. 자신의 따뜻한 차 한잔이 세정의 마음 한편을 아주 조금이라도 녹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최 교수였다.
“전 최현진 씨 목소리가 참 좋아요.”
“난 그 녀석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화가 끓어오르는데, 넌 도대체 현진이의 뭐가 배우로서 가능성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구나.”
“배우로서의 가능성이 아니라, 목소리요. 그 사람의 목소리가 좋아요, 전.”
“참 알 수가 없어. 너란 아이는…….”
세정은 오래전 추운 겨울날, 갈 곳을 잃어버린 자신을 끌어들였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날은 세정이 처음으로 최 교수를 찾아온 날이었다. 어머니를 무기로 최 교수에게 자신의 미래에 대한 후원을 요구하고 돌아서던 세정은 눈물을 참아 낸 자신을 다독였다.
그렇게 대학을 뒤돌아 나오던 세정을 잡아 끌어당긴 건 후문 옆 작은 소극장이었다. 기대 없이 자신을 숨기기 위해 반지하 소극장으로 들어가 어둠 속에 스스로를 숨겼다.
연극이 시작되고 언제나 삼류 배우에 지나지 않는 남자 주인공을 위로하는 그의 친구가 말했다.
‘괜찮아……. 이 순간마저도 언젠가는 의미 있었던 기억으로 남게 될 거야. 언젠가는…….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정말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고 말해 주는 그의 따뜻한 목소리가 세정의 마음속에 깊이 와 닿았다.
연극이 모두 끝이 나고 까만 밤 홀로 조용한 거리를 걷던 세정의 귓가에 조금 전 배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정말 괜찮아. 괜찮아.’
세정은 가던 길을 멈추고 한없이 소리 내어 울었다. 괜찮다고 말해 주는 그의 목소리가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세정의 울음은 통곡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래도 그 녀석에게 네 마음에 드는 목소리라도 있어 다행이네. 그나저나 넌 어쩔 생각이야. 올해까지만 하고 조교 일은 마무리한다며.”
“네. 너무 오랫동안 조교 자리를 꿰차고 있었잖아요. 이제 찾아야죠. 제가 할 일을.”
“공부는 더 할 생각인 거지?”
“저한테는 좋은 기회잖아요. 최현진 씨와 함께 공부하는 조건으로 내거신 장학금, 감사할 일이죠, 뭐.”
“이사장은 장사꾼이야.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현진이를 이 학교에 묶어 두고 싶어 밀어붙이는 일인데 네 생각처럼 그렇게 순진하게 돌아갈까 의문이다.”
“그렇게 안 되면 교수님이 막아 주세요. 형제시잖아요.”
세정이 따뜻한 찻잔에 퍼지는 향긋한 향처럼 미소 띠었다. 최 교수는 자신의 형, 이사장이 아들인 현진을 대학원에 입학시키겠다고 했을 때, 그 의도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사장에게 현진은 여전히 말썽꾸러기 막내아들이었고, 대학 재단을 물려줄 큰아들과 늘 비교되는 대상에 불과했다.
세정은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최 교수를 향해 미소 지어 주었다. 언제나 사람들은 자신을 불쌍하고 걱정스럽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이 온몸을 내리누르는 듯해 세정은 늘 자신을 향한 문을 잠그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 * *
최현진은 오랜만에 평창동 본가로 불려 들어와 앉아 있었다.
“네 작은아버지가 그러는데, 입학을 거부했다고?”
“제가 지금 이 나이에 굳이 대학원에서 그것도 연기 전공을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럼 뭘 할 생각인 거냐?”
현진의 아버지는 냉철했다. 자신의 아들에게조차. 아버지의 냉기를 현진 역시도 닮고 싶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는 정반대로 그는 냉정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며 열정적인…….
“네가 벌여 놓은 일들을 수습할 때인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수습할 일은 아니죠.”
“그런 식이라……. 네가 잠깐씩 만나는 여자들과의 추문은 그렇다고 치자. 연기 못하는 배우로 낙인찍힌 지는 오래전이고, 하는 작품마다 보기 좋게 말아먹는 네 이미지가 정말 배우로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는 게냐?”
아버지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추문이라기보다는 스캔들로 정정해 주시죠. 제가 그 학교 대학원에 들어가는 게 지금 제 상황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지메이킹. 네가 가장 잘하는 것 아니냐. 네가 좋은 배우인지 어쩐지는 난 관심 없다.”
“결국 형이 하는 일에 먹칠하지 마라. 집안 망신 시키지 마라. 그 말씀이군요.”
“아주 머리가 녹슬진 않았구나. 네 형에게 본격적으로 재단 운영을 맡길 거다. 너야 관심 밖이라 하겠지만, 난 그 아이 가는 길에 네가 방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현진은 아버지의 건조한 말이 자신을 비껴가 공중에 흩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 대학원 입학과 아버지가 걱정하시는 일이 도대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네 형이 재단을 이어받는 2년 정도 조용히 지내란 말을 하고 있는 게다.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한다 하면 다들 관심들이 좀 사그라질 것 아니냐.”
결국 자신의 형이 재단을 잘 이어받기 위해 숨죽이며 학교에 숨어 있으란 이야기였다. 예상은 했지만, 그리고 형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심술궂은 반항기가 밖으로 삐져나오려는 현진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작은아버지와 상의해 보죠. 그런데 아버지. 제가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아버지 의도대로 조용히 있을지는 저도 장담 못 합니다. 일어나죠.”
현진은 오랜만에 들른 자신을 위해 어머니가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평창동 본가를 급하게 빠져나왔다. 자신에게 집은 언제나 감옥 같았다.
#03 11월의 바람이 스며들다
11월의 바람은 스산하게 현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생각보다 겨울은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와 있었다.
현진이 작은아버지의 연구실에 도착해서 바라본 청춘들은, 차가운 겨울을 몰아내고 봄을 다시 부르는 듯했다. 대학생들은 발랄했고 즐거워 보였고 모두 사랑스러웠다.
젊음이란 무엇을 품고 있든 아름다운 것임을 발견한 현진의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똑똑―
“네.”
연구실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작은아버지가 아니었다. 현진은 젊은 여자의 대답 소리에 며칠 전 자신을 찾아왔던 세정을 떠올렸다.
“이런. 난 내 작은아버지를 만나러 왔는데, 내 인품을 논하던 아가씨를 만나게 되는군.”
현진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담겨져 있었다.
“반갑다는 인사로 받죠. 앉으세요. 교수님은 회의 가셨어요. 아마 30분쯤 기다리셔야 할 거예요.”
현진의 놀라움은 자신과 상관이 없다는 듯 책상에서 몸을 일으킨 세정은 전기 포트에 생수를 따르고 있었다.
“녹차하고 커피밖에 없어요. 뭐 드릴까요?”
“아, 조교. 그게 내 작은아버지 개인 조교라는 말이었나?”
현진은 처음부터 비아냥거릴 마음이 없었음에도 자신을 앞에 두고도 아무렇지 않게 도리어 무시하듯 대하는 그녀의 행동을 보자, 괜한 심술이 나 작정한 듯 비꼬아 말을 내뱉었다.
“아니요. 과 조교예요. 지금은 최 교수님 일을 좀 봐드리고 있는 거구요. 컴퓨터 작업을 어려워하셔서요.”
“난 또 작은어머니라고 불러야 할 일이 생길까 해서 말이야.”
현진의 비아냥에 세정은 돌아서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현진은 세정의 눈빛에서 차가운 바람을 느꼈다. 그건, 자신의 빈정거림에 화를 내거나, 분노를 표하는 눈빛이 아니라 그저 차갑고 메마른 눈빛이었다.
“그럴 일이야 있겠어요. 그래도 생각은 해 보죠. 당신의 작은어머니도 나쁘지는 않겠네요. 커피로 드시죠. 저도 한잔 마시게요.”
작고 어린 여자가 현진의 앞에 서 있었다. 현진이 멋대로 던진 비수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한 듯 현진의 앞에 오롯이 혼자 서 있었다. 현진은 세정에게서 전해 오는 차가운 바람이 자신을 감싸고 돌 때, 그녀의 눈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바람만이 스산할 뿐 텅 비어 있는 듯했다.
#02 그의 목소리
연구실로 들어서는 세정의 어깨가 작아 보였다. 언제나 위태롭게 보이는 세정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의 어머니를 떠올리는 최 교수였다.
“교수님, 저 완전 실패했어요.”
세정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최 교수는 세정이 밝게 말하기 위해 한없이 많은 심호흡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 그 녀석이 커피 한 잔도 안 주더냐?”
“커피는 주던데, 못 마시고 나왔죠. 입학 안 할 생각은 아닌 듯한데, 제가 못마땅했나 봐요. 저 때문에 더 하기 싫다고 하던데요?”
“핑계지. 오늘 처음 본 너 때문에 하기 싫다는 게 말이 되나. 신경 쓰지 말고 일단 입학 준비는 해 둬. 그 녀석 그래도 배우로 살아가게 하려면 이게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게 네 생각이니까.”
최 교수는 작은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르며 작은 세정을 위로하고 있었다. 언제나 위로가 필요한 아이지만, 타인의 위로 따위가 스며들지 못하게 차가운 차단막을 치고 있는 아이였다. 자신의 따뜻한 차 한잔이 세정의 마음 한편을 아주 조금이라도 녹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최 교수였다.
“전 최현진 씨 목소리가 참 좋아요.”
“난 그 녀석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화가 끓어오르는데, 넌 도대체 현진이의 뭐가 배우로서 가능성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구나.”
“배우로서의 가능성이 아니라, 목소리요. 그 사람의 목소리가 좋아요, 전.”
“참 알 수가 없어. 너란 아이는…….”
세정은 오래전 추운 겨울날, 갈 곳을 잃어버린 자신을 끌어들였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날은 세정이 처음으로 최 교수를 찾아온 날이었다. 어머니를 무기로 최 교수에게 자신의 미래에 대한 후원을 요구하고 돌아서던 세정은 눈물을 참아 낸 자신을 다독였다.
그렇게 대학을 뒤돌아 나오던 세정을 잡아 끌어당긴 건 후문 옆 작은 소극장이었다. 기대 없이 자신을 숨기기 위해 반지하 소극장으로 들어가 어둠 속에 스스로를 숨겼다.
연극이 시작되고 언제나 삼류 배우에 지나지 않는 남자 주인공을 위로하는 그의 친구가 말했다.
‘괜찮아……. 이 순간마저도 언젠가는 의미 있었던 기억으로 남게 될 거야. 언젠가는…….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정말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고 말해 주는 그의 따뜻한 목소리가 세정의 마음속에 깊이 와 닿았다.
연극이 모두 끝이 나고 까만 밤 홀로 조용한 거리를 걷던 세정의 귓가에 조금 전 배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정말 괜찮아. 괜찮아.’
세정은 가던 길을 멈추고 한없이 소리 내어 울었다. 괜찮다고 말해 주는 그의 목소리가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세정의 울음은 통곡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래도 그 녀석에게 네 마음에 드는 목소리라도 있어 다행이네. 그나저나 넌 어쩔 생각이야. 올해까지만 하고 조교 일은 마무리한다며.”
“네. 너무 오랫동안 조교 자리를 꿰차고 있었잖아요. 이제 찾아야죠. 제가 할 일을.”
“공부는 더 할 생각인 거지?”
“저한테는 좋은 기회잖아요. 최현진 씨와 함께 공부하는 조건으로 내거신 장학금, 감사할 일이죠, 뭐.”
“이사장은 장사꾼이야.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현진이를 이 학교에 묶어 두고 싶어 밀어붙이는 일인데 네 생각처럼 그렇게 순진하게 돌아갈까 의문이다.”
“그렇게 안 되면 교수님이 막아 주세요. 형제시잖아요.”
세정이 따뜻한 찻잔에 퍼지는 향긋한 향처럼 미소 띠었다. 최 교수는 자신의 형, 이사장이 아들인 현진을 대학원에 입학시키겠다고 했을 때, 그 의도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사장에게 현진은 여전히 말썽꾸러기 막내아들이었고, 대학 재단을 물려줄 큰아들과 늘 비교되는 대상에 불과했다.
세정은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최 교수를 향해 미소 지어 주었다. 언제나 사람들은 자신을 불쌍하고 걱정스럽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이 온몸을 내리누르는 듯해 세정은 늘 자신을 향한 문을 잠그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 * *
최현진은 오랜만에 평창동 본가로 불려 들어와 앉아 있었다.
“네 작은아버지가 그러는데, 입학을 거부했다고?”
“제가 지금 이 나이에 굳이 대학원에서 그것도 연기 전공을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럼 뭘 할 생각인 거냐?”
현진의 아버지는 냉철했다. 자신의 아들에게조차. 아버지의 냉기를 현진 역시도 닮고 싶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는 정반대로 그는 냉정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며 열정적인…….
“네가 벌여 놓은 일들을 수습할 때인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수습할 일은 아니죠.”
“그런 식이라……. 네가 잠깐씩 만나는 여자들과의 추문은 그렇다고 치자. 연기 못하는 배우로 낙인찍힌 지는 오래전이고, 하는 작품마다 보기 좋게 말아먹는 네 이미지가 정말 배우로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는 게냐?”
아버지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추문이라기보다는 스캔들로 정정해 주시죠. 제가 그 학교 대학원에 들어가는 게 지금 제 상황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지메이킹. 네가 가장 잘하는 것 아니냐. 네가 좋은 배우인지 어쩐지는 난 관심 없다.”
“결국 형이 하는 일에 먹칠하지 마라. 집안 망신 시키지 마라. 그 말씀이군요.”
“아주 머리가 녹슬진 않았구나. 네 형에게 본격적으로 재단 운영을 맡길 거다. 너야 관심 밖이라 하겠지만, 난 그 아이 가는 길에 네가 방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현진은 아버지의 건조한 말이 자신을 비껴가 공중에 흩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 대학원 입학과 아버지가 걱정하시는 일이 도대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네 형이 재단을 이어받는 2년 정도 조용히 지내란 말을 하고 있는 게다.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한다 하면 다들 관심들이 좀 사그라질 것 아니냐.”
결국 자신의 형이 재단을 잘 이어받기 위해 숨죽이며 학교에 숨어 있으란 이야기였다. 예상은 했지만, 그리고 형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심술궂은 반항기가 밖으로 삐져나오려는 현진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작은아버지와 상의해 보죠. 그런데 아버지. 제가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아버지 의도대로 조용히 있을지는 저도 장담 못 합니다. 일어나죠.”
현진은 오랜만에 들른 자신을 위해 어머니가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평창동 본가를 급하게 빠져나왔다. 자신에게 집은 언제나 감옥 같았다.
#03 11월의 바람이 스며들다
11월의 바람은 스산하게 현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생각보다 겨울은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와 있었다.
현진이 작은아버지의 연구실에 도착해서 바라본 청춘들은, 차가운 겨울을 몰아내고 봄을 다시 부르는 듯했다. 대학생들은 발랄했고 즐거워 보였고 모두 사랑스러웠다.
젊음이란 무엇을 품고 있든 아름다운 것임을 발견한 현진의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똑똑―
“네.”
연구실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작은아버지가 아니었다. 현진은 젊은 여자의 대답 소리에 며칠 전 자신을 찾아왔던 세정을 떠올렸다.
“이런. 난 내 작은아버지를 만나러 왔는데, 내 인품을 논하던 아가씨를 만나게 되는군.”
현진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담겨져 있었다.
“반갑다는 인사로 받죠. 앉으세요. 교수님은 회의 가셨어요. 아마 30분쯤 기다리셔야 할 거예요.”
현진의 놀라움은 자신과 상관이 없다는 듯 책상에서 몸을 일으킨 세정은 전기 포트에 생수를 따르고 있었다.
“녹차하고 커피밖에 없어요. 뭐 드릴까요?”
“아, 조교. 그게 내 작은아버지 개인 조교라는 말이었나?”
현진은 처음부터 비아냥거릴 마음이 없었음에도 자신을 앞에 두고도 아무렇지 않게 도리어 무시하듯 대하는 그녀의 행동을 보자, 괜한 심술이 나 작정한 듯 비꼬아 말을 내뱉었다.
“아니요. 과 조교예요. 지금은 최 교수님 일을 좀 봐드리고 있는 거구요. 컴퓨터 작업을 어려워하셔서요.”
“난 또 작은어머니라고 불러야 할 일이 생길까 해서 말이야.”
현진의 비아냥에 세정은 돌아서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현진은 세정의 눈빛에서 차가운 바람을 느꼈다. 그건, 자신의 빈정거림에 화를 내거나, 분노를 표하는 눈빛이 아니라 그저 차갑고 메마른 눈빛이었다.
“그럴 일이야 있겠어요. 그래도 생각은 해 보죠. 당신의 작은어머니도 나쁘지는 않겠네요. 커피로 드시죠. 저도 한잔 마시게요.”
작고 어린 여자가 현진의 앞에 서 있었다. 현진이 멋대로 던진 비수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한 듯 현진의 앞에 오롯이 혼자 서 있었다. 현진은 세정에게서 전해 오는 차가운 바람이 자신을 감싸고 돌 때, 그녀의 눈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바람만이 스산할 뿐 텅 비어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