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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이름이나 알고 이야기하죠. 난 최현진. 그쪽은?”
“이세정이에요.”
이세정, 세정의 목소리는 여전히 맑고 경쾌했다. 그 맑은 목소리와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현진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세정이에요.’ 하던 목소리가 현진의 귓가를 떠나지 않고 맴돌며 심장을 저리게 할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세정이라……. 이세정 씨, 어쩐지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내 작은아버지보다 당신이 더 많이 알고 있는 듯한데,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설명해 달라고 부탁해도 될까?”
세정은 현진에게 등을 돌려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담았다. 그러고는 뜨거운 물을 부어 커피스틱으로 젓는 모습을 현진은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커피를 담은 종이컵이 현진 앞에 놓이고, 다른 종이컵을 잡은 세정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며칠 전 이사장님이 절 부르셨죠. 일개 학과 조교를 이사장님이 부르는 일은 거의 없는데, 당신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내게 연예인 아들이 있다. 그런데 연기에는 소질이 없어 보인다. 집안 사정으로 2년 정도 학교에 묶어 두고 싶은데, 도와 달라. 그러시더군요.”
“그러니까 그 연기에 소질 없는 연예인 아들이 나인 거군.”
“네, 당신이었죠. 전 올해로 조교직 계약이 만료되죠. 가진 게 없는 아이들 주특기인 미친 듯이 공부해서 버티기가 내 전공이에요. 아마도 제 상황이 당신을 묶어 두기엔, 아니 당신이 2년이란 시간 동안 대학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하신 듯했어요.”
“어떻게?”
“대학원을 다니는 2년 동안 당신의 학업 파트너가 되기를 바라셨어요. 그리고 그 대가로 2년의 학비 지원을 제안하셨죠.”
세정의 목소리는 변화가 없었다. 자신을 묶어 두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가 제안한 것들이 그녀에게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을 텐데, 자존심 상했을 법한 제안에 전혀 상처받지 않은 듯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에 현진은 심사가 뒤틀려 작정한 듯 비꼬아 말을 던졌다.
“학업 파트너라. 그 안에 섹스 파트너도 들어가나?”
세정은 다시 한번 숨을 고르고 현진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쥐고 있던 커피 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목을 축였다. 달달한 커피가 식도를 흘러 위장까지 따뜻하게 데우는 듯했다. 세정은 커피 한 모금의 따뜻함만큼의 위로가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바로 지금.
“글쎄요. 이사장님이 그걸 요구하신 건지는 생각해 봐야겠어요. 표면적인 거래에는 포함되지 않았거든요.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당신과도 다시 거래를 해야겠죠. 섹스 파트너가 필요하시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저에게 지불하셔야 할 거예요.”
세정은 맑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었지만, 현진은 그녀의 목소리에 추운 바람이 서려 있음을 느꼈다. 작정하고 흔드는 자신의 손길에도 흔들리지 않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가 11월의 초겨울 바람보다 더 춥게만 느껴졌다. 이 캠퍼스의 청춘들이 한 아름 안고 있는 싱그러움도, 그 누구에게든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젊음도 세정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거래를 하자?”
“선택은 오롯이 당신의 몫이에요. 내 선택은 중요하지 않죠. 당신이 입학을 거부한다면, 전 낯선 사회에서 제 일을 찾으면 돼요. 하지만 만약 당신이 학교에 들어온다면, 전 전에 없이 다정하고 가까운 친구 하나를 사귀게 되는 거겠죠. 표면적으로는…….”
“다정하고 가까운 친구라. 어쩌지. 난 여자를 친구로 두지 않아.”
현진은 세정이 쌓아 놓은 견고한 벽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벽 안쪽으로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이 작은 아이는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현진은 자신의 한없이 가벼운 삶이 이제 무게를 지녀야 할 때라고, 깊이를 가지게 되어야 하는 순간이란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한동안 흐르던 침묵이 깨지고 세정이 차갑고 메마른 눈빛으로 말했다.
“친구가 싫다면, 그럼…… 애인…… 할까요?”
그렇게 세정이 현진의 마음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04 통속
“입시 준비는 특별한 건 없어요. 특별전형으로 들어오시는 거니까요. 면접 정도만 성의 있게 준비하시면 될 겁니다.”
세정은 현진의 사무실에서 입학과 관련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다. 현진은 세정의 설명 따위가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정의 목소리가 며칠 동안 자신을 괴롭혔고, 그녀의 공허하고 차가운 눈빛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한동안 세정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현진을 깨운 건 무섭게 문을 열고 들어온 박 실장이었다.
“서정아하고 스캔들 터졌어. 너무한 거 아니냐. 지난번 최수지하고 터진 스캔들 막은 지 얼마나 됐다고…….”
“뒤에 손님 있다. 말 가려서 해.”
현진은 박 실장에게 주의를 주며 세정의 존재를 알렸다. 박 실장은 이미 상황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는 듯한 세정을 흘끗 보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게 건드리려면 앞뒤 잘 보고 했어야지.”
“기회는 이때다 하고 스캔들 기사가 터지겠군.”
“당연하지. 서정아 입장에서는 인지도를 높이는 데 최고의 타이밍이야. 젠장. 넌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이제 정말 막장까지 가는 거야?”
세정은 박 실장의 비난을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받아 내고 있는 현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막장이라…….”
“들어오던 드라마 제안도 줄어들고 있어. 정말 어쩔 생각이야.”
“일단 흥분 가라앉히고 스캔들부터 막아. 회사 차원에서 부탁하자. 앞으로는 조심하지. 더 깊은 이야기는 저 친구 가고 나서 하고.”
박 실장은 다시 한번 흘끗 세정을 바라보고는 긴 한숨을 쉬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최현진의 모습이니까 해명은 필요 없는 거지?”
당황할 법한 상황에서도 아무런 동요 없이 앉아 있는 세정이었다. 그런 그녀가 늘 자신의 일상에 함께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어 현진은 자신의 생각을 떨쳐 버리려 일부러 담담한 척 그녀에게 물었다.
“이해했어요. 상황을. 내일이면 많은 사람들은 당신이 또 어린 여자 배우를 건드렸구나, 하고 생각하겠죠. 아마 그 어린 여자 배우는 당신 덕택에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겠죠. 아닌가요?”
“맞아. 그게 지금의 나지. 그래서 대학원으로 나를 숨기고 싶은 거고. 내 아버지는.”
세정은 현진의 목소리가 좋았다. 괜찮다고 다독여 주던 그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있으면 차가운 자신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런데 오늘 현진의 목소리는 어두웠다. 괜찮다고 말해 주는 목소리가 아니라, 괜찮지 않다고 되뇌는 목소리처럼 들렸다.
“지난번 내가 본 대본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세정의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질문에 현진은 의아했다.
“뭐?”
“다시 물어요. 지난번 제가 읽은 대본 여전히 당신에게 유효한 캐스팅이냐구요.”
현진은 가만히 세정을 바라보다가 인터폰을 눌렀다.
“박 실장아. 지난번에 여기 있는 아이가 본 대본, 그거 어떻게 됐어? 그거 아직도 나에게 유효한가?”
― 너 싫다며. 지고지순한 찌질한 남자 역이라서 싫다며, 사랑놀음이라고.
“알아. 그러니까 어떻게 됐어?”
― 그 작품 아직도 사람 못 찾은 듯하던데. 워낙 통속이고 흔해 빠진 이야기라서 아무도 선뜻 하겠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 같더라고.
“알았어.”
인터폰 스피커가 꺼지고 현진은 질문을 던진 의도를 궁금해하며 세정에게 물었다.
“들었지? 여전히 유효하다는데?”
세정은 자신의 삶이 뿌리째 흔들릴 거란 두려움에 한동안 침묵했다. 하지만 현진의 어두운 목소리를 듣는 것은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이었다. 세정에게 현진의 목소리는 자신을 버리지 않는 단 하나의 안식처임을…….
“그 남자 주인공 역, 당신이 해요.”
“뭐?”
“그 통속극 주인공 당신이 하라구요.”
세정의 눈빛에 단호함이 보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현진은 세정의 단호함이 두려움처럼 느껴져 당황하고 있었다. 작고 여린 세정이 두려움을 안고 자신에게 말했다. 통속극 <첫사랑>의 주인공이 되라고. 한동안 말없이 세정을 쳐다보고만 있는 현진이었다.
“내가 그걸 하면 달라질 게 있어?”
오랜 침묵을 깨고 현진이 던진 첫마디였다.
“난, 당신이 그 역을 통해 당신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줬으면 좋겠어요. 잊어버리고 있었던 당신의 목소리.”
“잊어버리고 있었던 목소리?”
현진은 감정을 담고 있지 않던 세정의 눈빛 안에서 두려움과 그리움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녀가 가진 감정이 갇혀 있지 않고 밖으로 튀어나와 자유로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최현진 씨가 만약 그 작품을 하게 된다면, 전 당신 아버지가 주신 대학원의 기회를 놓치겠죠. 그래도 당신이 다시 한번 그 누군가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순간이 오기를 바라요.”
“누군가에게 내가 괜찮다고 말하는 순간?”
“아주 오래전, 위로가 간절히 필요하던 그 어느 날, 당신이 내게 괜찮다고 말해 줬거든요. 당신의 괜찮다는 목소리가 날 견디게 했죠.”
기억에도 없는 자신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다는 고백, 언제인지도 모를 그 언젠가 던진 괜찮다는 말 한마디로 견뎠다는 그녀의 삶. 현진은 그녀의 지나간 시간들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 작품이 사람들에게 내 목소리를 제대로 들려줄 수 있다는 거니?”
“한없이 깊은 통속과 신파 속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위로니까요.”
“이름이나 알고 이야기하죠. 난 최현진. 그쪽은?”
“이세정이에요.”
이세정, 세정의 목소리는 여전히 맑고 경쾌했다. 그 맑은 목소리와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현진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세정이에요.’ 하던 목소리가 현진의 귓가를 떠나지 않고 맴돌며 심장을 저리게 할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세정이라……. 이세정 씨, 어쩐지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내 작은아버지보다 당신이 더 많이 알고 있는 듯한데,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설명해 달라고 부탁해도 될까?”
세정은 현진에게 등을 돌려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담았다. 그러고는 뜨거운 물을 부어 커피스틱으로 젓는 모습을 현진은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커피를 담은 종이컵이 현진 앞에 놓이고, 다른 종이컵을 잡은 세정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며칠 전 이사장님이 절 부르셨죠. 일개 학과 조교를 이사장님이 부르는 일은 거의 없는데, 당신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내게 연예인 아들이 있다. 그런데 연기에는 소질이 없어 보인다. 집안 사정으로 2년 정도 학교에 묶어 두고 싶은데, 도와 달라. 그러시더군요.”
“그러니까 그 연기에 소질 없는 연예인 아들이 나인 거군.”
“네, 당신이었죠. 전 올해로 조교직 계약이 만료되죠. 가진 게 없는 아이들 주특기인 미친 듯이 공부해서 버티기가 내 전공이에요. 아마도 제 상황이 당신을 묶어 두기엔, 아니 당신이 2년이란 시간 동안 대학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하신 듯했어요.”
“어떻게?”
“대학원을 다니는 2년 동안 당신의 학업 파트너가 되기를 바라셨어요. 그리고 그 대가로 2년의 학비 지원을 제안하셨죠.”
세정의 목소리는 변화가 없었다. 자신을 묶어 두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가 제안한 것들이 그녀에게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을 텐데, 자존심 상했을 법한 제안에 전혀 상처받지 않은 듯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에 현진은 심사가 뒤틀려 작정한 듯 비꼬아 말을 던졌다.
“학업 파트너라. 그 안에 섹스 파트너도 들어가나?”
세정은 다시 한번 숨을 고르고 현진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쥐고 있던 커피 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목을 축였다. 달달한 커피가 식도를 흘러 위장까지 따뜻하게 데우는 듯했다. 세정은 커피 한 모금의 따뜻함만큼의 위로가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바로 지금.
“글쎄요. 이사장님이 그걸 요구하신 건지는 생각해 봐야겠어요. 표면적인 거래에는 포함되지 않았거든요.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당신과도 다시 거래를 해야겠죠. 섹스 파트너가 필요하시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저에게 지불하셔야 할 거예요.”
세정은 맑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었지만, 현진은 그녀의 목소리에 추운 바람이 서려 있음을 느꼈다. 작정하고 흔드는 자신의 손길에도 흔들리지 않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가 11월의 초겨울 바람보다 더 춥게만 느껴졌다. 이 캠퍼스의 청춘들이 한 아름 안고 있는 싱그러움도, 그 누구에게든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젊음도 세정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거래를 하자?”
“선택은 오롯이 당신의 몫이에요. 내 선택은 중요하지 않죠. 당신이 입학을 거부한다면, 전 낯선 사회에서 제 일을 찾으면 돼요. 하지만 만약 당신이 학교에 들어온다면, 전 전에 없이 다정하고 가까운 친구 하나를 사귀게 되는 거겠죠. 표면적으로는…….”
“다정하고 가까운 친구라. 어쩌지. 난 여자를 친구로 두지 않아.”
현진은 세정이 쌓아 놓은 견고한 벽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벽 안쪽으로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이 작은 아이는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현진은 자신의 한없이 가벼운 삶이 이제 무게를 지녀야 할 때라고, 깊이를 가지게 되어야 하는 순간이란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한동안 흐르던 침묵이 깨지고 세정이 차갑고 메마른 눈빛으로 말했다.
“친구가 싫다면, 그럼…… 애인…… 할까요?”
그렇게 세정이 현진의 마음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04 통속
“입시 준비는 특별한 건 없어요. 특별전형으로 들어오시는 거니까요. 면접 정도만 성의 있게 준비하시면 될 겁니다.”
세정은 현진의 사무실에서 입학과 관련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다. 현진은 세정의 설명 따위가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정의 목소리가 며칠 동안 자신을 괴롭혔고, 그녀의 공허하고 차가운 눈빛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한동안 세정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현진을 깨운 건 무섭게 문을 열고 들어온 박 실장이었다.
“서정아하고 스캔들 터졌어. 너무한 거 아니냐. 지난번 최수지하고 터진 스캔들 막은 지 얼마나 됐다고…….”
“뒤에 손님 있다. 말 가려서 해.”
현진은 박 실장에게 주의를 주며 세정의 존재를 알렸다. 박 실장은 이미 상황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는 듯한 세정을 흘끗 보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게 건드리려면 앞뒤 잘 보고 했어야지.”
“기회는 이때다 하고 스캔들 기사가 터지겠군.”
“당연하지. 서정아 입장에서는 인지도를 높이는 데 최고의 타이밍이야. 젠장. 넌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이제 정말 막장까지 가는 거야?”
세정은 박 실장의 비난을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받아 내고 있는 현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막장이라…….”
“들어오던 드라마 제안도 줄어들고 있어. 정말 어쩔 생각이야.”
“일단 흥분 가라앉히고 스캔들부터 막아. 회사 차원에서 부탁하자. 앞으로는 조심하지. 더 깊은 이야기는 저 친구 가고 나서 하고.”
박 실장은 다시 한번 흘끗 세정을 바라보고는 긴 한숨을 쉬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최현진의 모습이니까 해명은 필요 없는 거지?”
당황할 법한 상황에서도 아무런 동요 없이 앉아 있는 세정이었다. 그런 그녀가 늘 자신의 일상에 함께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어 현진은 자신의 생각을 떨쳐 버리려 일부러 담담한 척 그녀에게 물었다.
“이해했어요. 상황을. 내일이면 많은 사람들은 당신이 또 어린 여자 배우를 건드렸구나, 하고 생각하겠죠. 아마 그 어린 여자 배우는 당신 덕택에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겠죠. 아닌가요?”
“맞아. 그게 지금의 나지. 그래서 대학원으로 나를 숨기고 싶은 거고. 내 아버지는.”
세정은 현진의 목소리가 좋았다. 괜찮다고 다독여 주던 그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있으면 차가운 자신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런데 오늘 현진의 목소리는 어두웠다. 괜찮다고 말해 주는 목소리가 아니라, 괜찮지 않다고 되뇌는 목소리처럼 들렸다.
“지난번 내가 본 대본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세정의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질문에 현진은 의아했다.
“뭐?”
“다시 물어요. 지난번 제가 읽은 대본 여전히 당신에게 유효한 캐스팅이냐구요.”
현진은 가만히 세정을 바라보다가 인터폰을 눌렀다.
“박 실장아. 지난번에 여기 있는 아이가 본 대본, 그거 어떻게 됐어? 그거 아직도 나에게 유효한가?”
― 너 싫다며. 지고지순한 찌질한 남자 역이라서 싫다며, 사랑놀음이라고.
“알아. 그러니까 어떻게 됐어?”
― 그 작품 아직도 사람 못 찾은 듯하던데. 워낙 통속이고 흔해 빠진 이야기라서 아무도 선뜻 하겠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 같더라고.
“알았어.”
인터폰 스피커가 꺼지고 현진은 질문을 던진 의도를 궁금해하며 세정에게 물었다.
“들었지? 여전히 유효하다는데?”
세정은 자신의 삶이 뿌리째 흔들릴 거란 두려움에 한동안 침묵했다. 하지만 현진의 어두운 목소리를 듣는 것은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이었다. 세정에게 현진의 목소리는 자신을 버리지 않는 단 하나의 안식처임을…….
“그 남자 주인공 역, 당신이 해요.”
“뭐?”
“그 통속극 주인공 당신이 하라구요.”
세정의 눈빛에 단호함이 보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현진은 세정의 단호함이 두려움처럼 느껴져 당황하고 있었다. 작고 여린 세정이 두려움을 안고 자신에게 말했다. 통속극 <첫사랑>의 주인공이 되라고. 한동안 말없이 세정을 쳐다보고만 있는 현진이었다.
“내가 그걸 하면 달라질 게 있어?”
오랜 침묵을 깨고 현진이 던진 첫마디였다.
“난, 당신이 그 역을 통해 당신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줬으면 좋겠어요. 잊어버리고 있었던 당신의 목소리.”
“잊어버리고 있었던 목소리?”
현진은 감정을 담고 있지 않던 세정의 눈빛 안에서 두려움과 그리움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녀가 가진 감정이 갇혀 있지 않고 밖으로 튀어나와 자유로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최현진 씨가 만약 그 작품을 하게 된다면, 전 당신 아버지가 주신 대학원의 기회를 놓치겠죠. 그래도 당신이 다시 한번 그 누군가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순간이 오기를 바라요.”
“누군가에게 내가 괜찮다고 말하는 순간?”
“아주 오래전, 위로가 간절히 필요하던 그 어느 날, 당신이 내게 괜찮다고 말해 줬거든요. 당신의 괜찮다는 목소리가 날 견디게 했죠.”
기억에도 없는 자신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다는 고백, 언제인지도 모를 그 언젠가 던진 괜찮다는 말 한마디로 견뎠다는 그녀의 삶. 현진은 그녀의 지나간 시간들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 작품이 사람들에게 내 목소리를 제대로 들려줄 수 있다는 거니?”
“한없이 깊은 통속과 신파 속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위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