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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의 그 녀석 1화



1. 착한 사람? 나쁜 사람?


― 연애도 이제 사업입니다.

TV 화면 속의 여자는 누가 봐도 한눈에 반해 버릴 만큼 아주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 날카로워 보이지만 크고 예쁜 눈과 오뚝하게 솟아 있는 코. 새하얀 피부와 그와 대조되는 새빨간 입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작은 얼굴까지. 게다가 얇고 선이 고운 예쁜 몸매에 풍만한 가슴까지 갖추고 있어 스튜디오 안의 모든 남자들은 단 1초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그 시선을 즐기듯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가늘지만 탄탄해 보이는 다리를 꼬았다. 그 모습이 너무도 육감적이어서 남자들은 탄성을 내질렀고, 여자는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개의치 않으며 제 말만 이어 나갔다.
“미친…….”
며칠 전 출연했던 방송 모니터링 중 등 뒤에서 들려오는 욕설에 노아는 몸을 움츠렸다. 살며시 뒤를 돌아보자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채 노아와 함께 방송 모니터링 중이던 친구 서연과 눈이 마주쳤다.
“나날이 연기력이 늘어 간다?”
까칠한 서연의 말투에도 노아는 아무런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소심하게 고개를 푹 숙였다.
TV 화면 속에 나오는 당찬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순둥이도 이런 순둥이가 없을 정도로 소극적인 면을 보이는 노아에게는 사실 엄청난 비밀이 있다.
표면상으로는 남자 좀 가지고 놀아 본 언니, 소개팅 알선 업체 ‘연애 정보 회사’의 공동 CEO, 연애 지침서로 베스트셀러에 몇 번이나 오른 잘나가는 작가 서노아.
하지만 실상은 모태 솔로에 소심녀인데 잘난 외모 덕분에 소설이 실화로 오해받아 이 자리까지 올라오게 된 바지 사장이다.
지나치게 섹시하게 생긴 노아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소심한 성격인지라 직장에 다니는 걸 생각하는 것조차 막막해했다.
근데 얼떨결에 졸업 작품으로 쓴 소설이 실화로 오해받아 스타덤에 오르고, 어마어마한 저작권료에 현혹되어 먹고살겠다는 의지 하나로 벌써 3년째 잘나가는 언니를 연기하고 있다.
물론 겁이 많은 노아는 언제 들키게 될까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외줄타기 하는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억지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자신의 삶에 나름대로 만족하며, 영원하진 못해도 앞으로 몇 년간은 이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얼마 후에 그런 생각을 산산조각 내 줄 너무도 매혹적인 악마가 자신의 인생에 나타나게 될 거라는 걸, 그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후…….”
노아는 아침부터 청심환을 세 개나 먹고도 여전히 긴장이 되어 땅이 꺼져라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몇 년째 책을 내지 않아 인지도가 바닥을 보이고 있어, 그녀는 회사를 위해 가끔씩 울며 겨자 먹기로 각종 화보 촬영과 방송 출연을 했다. 그때마다 누가 제 본모습을 알지는 않을까 불안에 떨곤 했는데, 그게 항상 청심환을 세 개나 먹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오늘따라 이렇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벌벌 떨고 있는 이유는 함께 화보 촬영을 할 ‘그 남자’의 소문이 아주 무시무시하기 때문이다.
그 남자의 이름은 한수현.
올해로 스물여덟 살인 데뷔 10년 차 톱모델이다. 그는 모델다운 기럭지와 영화배우 뺨치게 잘생긴 외모로 2, 30대 여성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지만, 이미 언론에 몇 차례 언급될 정도로 어마 무시한 소문을 가진 남자였다.
일단 외모, 나이, 직종에 상관없이 자신에게 ‘거슬린다’ 싶은 여자를 탐색, 여러 가지 스킬로 혼을 쏙 빼놓은 뒤 결정적인 장면과 함께 스캔들을 터트려 사회에서 거의 매장을 시켰다. 그에게 속아 이미지가 난도질된 여자만 해도 벌써 열 명 가까이 되며 지금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더 무서운 이유는 그의 별명이 ‘마성의 그 녀석’인 만큼 이름대로 이런 소문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이 그에게 속아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거다. 그러니 노아가 이렇게 긴장을 할 수밖에.
가뜩이나 순진한 자신이 이런 무서운 남자에게 걸려 영혼까지 탈탈 털리게 될까 봐 노아는 두려운 마음을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가 없었다.
원래는 서연이 순진한 노아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을 차단하기 위해 촬영 때마다 매니저처럼 노아의 곁을 지켜 줬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VIP와의 약속에 끌려가 버리는 바람에 노아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태였다.
“대표님. 메이크업부터 들어가실게요.”
촬영장 구석에서 ‘확 도망가 버릴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노아의 곁으로 스태프가 다가와 말했다. 남을 속이는 생활 3년 만에 연기자가 다 된 노아가 언제 떨었냐는 듯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자연스럽게 메이크업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절대 눈도 마주치지 말자, 말 걸면 도망가자 등 온갖 ‘한수현 퇴치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노아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힐끔 시선을 보내자 그곳에는 말로만 듣던 ‘마성의 그 녀석’ 한수현이 서 있었다.
‘맙소사……!’
노아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예쁜 외모 덕분에 회사 대표라는 직업에도 남자 배우나 아이돌과 함께 촬영을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봤다.
소문의 남자 한수현은, 모델답게 190cm 가까이 되어 보이는 큰 키와 소멸 직전이라고 보기에도 충분한 작은 얼굴, 그리고 남자답고 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몸은 어떤 운동을 하는 건지 옷으로 전부 가려져 있는데도 단단해 보였다.
소심해서 남자랑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노아는 그 말도 안 되게 잘생긴 외모에 한 번 놀라고,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인간답지 않은 비율과 몸매에 두 번 놀라 정신없이 그를 쳐다봤다.
‘소문이 사실이었어. 아니, 소문은 약과였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생겼잖아!’
분명 CF 속에서 질리도록 봐 왔던 존재인데 실물은 화면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첫사랑 한 번 앓아 본 적 없는 노아는 벌써부터 수현에게 반해 버릴 것 같아 두려움이 밀려왔다.
결국, 노아는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려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자 갑작스러운 노아의 행동에 부담스러운 시선들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노아에겐 지금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지금은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 간절할 뿐이었다.
그녀는 촬영장을 빠져나와 바쁘게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사람이 없는 건물 뒤쪽으로 나오자 노아는 쓰러지듯 벽에 몸을 기대며 작게 중얼거렸다.
“……저 정도면 정말 반해 버릴 수도 있겠다.”
맹세코 자신은 외모에 약한 여자가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지만, 수현의 비주얼은 외모에 약하고 말고를 따질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일이 나도 정말 큰일이 나겠다 싶어 그냥 촬영을 포기하고 도망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때 갑자기 노아의 주머니에서 요란하게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노아는 화들짝 놀라 서둘러 휴대폰을 꺼냈다. 액정을 확인해 보니 유일한 친구인 ‘서연’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도망갈까 말까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상태에서 때마침 걸려 온 전화에 노아는 서연이 참 귀신같다고 생각했다.
노아는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댄 후, 서연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서연아…… 나 못 하겠어…….”
대뜸 들려오는 노아의 폭탄 발언에 서연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추측하건데 서연은 지금 노아에게 화를 낼까, 달래 줄까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흐르고, 곧이어 생각을 정리한 건지 서연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협박하는 말투로 말했다.
― 좋은 말로 할 때 촬영 잘 마치고 와.
노아는 서연의 위협적인 목소리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금 우는 소리를 냈다.
“나 정말 못 하겠어…….”
― 시끄럽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한수현 촉 엄청 좋다니까 안 들키게 조심이나 해.
“뭘……?”
― 몰라서 물어?
“나 모태 솔로인 거?”
― 어.
쌀쌀맞은 서연의 대답에 노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는데, 이 냉정한 친구는 끝까지 노아의 말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 ……도망가면 너 진짜 죽어. 확인 전화 한다.
노아는 서연의 협박에 대한 답은 운조차 떼지 못했다. 왜냐하면 서연이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으니까!
뼈 속까지 소심한 노아는 차마 서연에게 따질 용기가 나지 않아 연신 죄 없는 휴대폰만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러나 금세 ‘내 주제에 서연일 어떻게 이기냐.’며 현실과 타협하고는 촬영장을 향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 순간, 언제 나온 건지 건물 입구에서 싸늘한 눈동자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수현과 눈이 마주쳤다.
노아는 마치 메두사라도 본 사람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표정을 짓고는 있지만, 이미 그녀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설마 내가 모태 솔로라고 한 걸 들은 거야?’
절대 벌어져서는 안 될 끔찍한 상황에 노아는 떨리는 눈동자로 수현을 바라봤다.
수현은 모든 것을 들은 사람치고는 너무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고, 그렇다고 듣지 않았다기엔 너무나 싸늘한 눈빛으로 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보며 노아의 머릿속엔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서연이가 화내겠지? 맞을지도 몰라……. 이제 고객도 줄 텐데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는 걸까? 엄마, 아빠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분명 실망하실 거야…….’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머리가 터지기 일보 직전인 노아의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수현이 노아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왔다. 노아는 그의 발자국 소리가 마치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노아가 속으로 같은 말만 되풀이하기를 여러 번, 노아의 앞에 다다른 수현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가뜩이나 날카롭게 생긴 외모라 가만히만 있어도 무서운데, 부담스럽게 쳐다보기까지 하니 노아는 당장이라도 최대한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겁에 질린 탓에 발은커녕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 없어서 식은땀만 줄줄 흘렸다.
그때, 지금까지 굳게 닫혀 있던 수현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모태 솔로?”
수현은 마치 장난이라도 치는 사람처럼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사람이 웃고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 굉장히 실례라는 걸 알지만, 노아는 그의 미소가 흡사 악마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금세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수현을 바라보는데, 수현의 얼굴이 점점 더 노아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귓가에 멈추어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본의 아니게 약점을 알게 된 건가.”
그게 순진한 여자 서노아와 악마 같은 남자 한수현의 첫 만남이었다.

* * *

“서노아, 너 무슨 일 있지?”
아까부터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노아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아가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무서운 눈으로 노아를 노려보는 서연이 서 있었다.
“……아니야!”
노아는 서연과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소리부터 지르고 봤다. 그러자 서연은 노아를 한 번 더 노려보고, 며칠을 괴롭혀도 알아낼 수 없었던 이야기를 오늘도 듣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는지 “나 외근.”이라는 말만 남기고 노아의 방을 빠져나갔다.
쿵.
서연이 나간 걸 확인하기 무섭게 노아는 바로 책상 위에 머리를 내리박았다. 그리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난 이제 끝났어.”
사건 당일, 노아는 너무 겁에 질린 탓에 다짜고짜 수현을 밀어 내고 뒷일은 생각도 안 한 채 그대로 도망을 가 버렸다.
당연히 촬영은 엉망이 되어 버렸고, 노아는 서연의 온갖 협박에도 연신 ‘촬영 거부’만 외쳤다. 물론 서연이 더 화를 낼 게 무서워 수현과 있었던 일은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다시 해야만 하는 수현과의 촬영부터 시작해서 수현의 입막음을 어떻게 하고, 서연에게 현재 상황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까지……. 해결해야 할 일은 수만 가지인데 방안은 딱히 나오지 않아서 노아는 정말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망했다느니, 모두 끝났다느니 온갖 부정적인 말들만 중얼거리는데, 그때 문 너머에서 가뜩이나 힘든 노아를 더 힘들게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약속 없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사장실 밖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서의 고함 소리가 들려와 노아는 토끼 눈을 하고 문 쪽을 쳐다봤다. 상대가 마음에 안 들거나 괜히 차이고 나서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사람인가 보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 이번에도 경찰을 불러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예고도 없이 사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