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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의 그 녀석 2화
깜짝 놀라 속으로는 벌벌 떨고 있는 주제에 노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쳐다봤다.
그 순간, 여유 있던 표정은 순식간에 보기 좋게 구겨져 버렸다. 문을 연 사람은 요즘 노아를 그토록 두렵게 만들었던 상대, 바로 악마 같은 한수현이었다.
애초에 재촬영 전까지는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사무실로 쳐들어오다니. 갑자기 들이닥친 수현의 등장에 노아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든가 말든가, 노아의 사정 따위는 전혀 봐주지 않는 수현은 여전히 싸늘한 눈동자로 노아를 바라보더니 허락도 없이 그녀의 앞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뒤늦게 뛰어 들어온 비서와 경비원들이 수현을 끌어내려 했지만, 수현이 바로 입을 열었다.
“우리, 할 말 있지 않았나?”
어쩜 사람이 입만 열었을 뿐인데 저렇게 악마 같을 수가!
노아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수현의 포스에 그대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 앞에서 비서와 경비원들이 억지로 수현을 일으키려 하는데도 여유롭게 웃고 있던 수현은 나직한 목소리로 노아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흘렸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들어도 괜찮아?”
노아는 수현의 한마디에 이제야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앞뒤 생각도 하지 않고 서둘러 소리쳤다.
“제, 제 손님이에요! 모두 나가 주세요!”
노아의 말에 비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서가 노아를 보필한 3년 동안 노아에게 개인적인 손님이 찾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약속 없이.
하지만 노아가 계속 나가라고 눈짓을 하는 탓에 비서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경비원들과 함께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사장실에는 노아와 수현,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노아는 제법 넓다고 생각했던 자신만의 공간이 순식간에 좁게 느껴졌다. 그녀는 불안감에 휩싸여 손까지 덜덜 떨었다.
올 것이 와 버렸다…….
노아는 지난 며칠간 자신을 괴롭혀 왔던, 진실이 밝혀진 후의 끔찍한 미래들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고는 수현에게 물었다.
“……저한테 원하시는 게 뭐예요?”
무슨 삼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노아의 대사에 수현의 입가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겉모습과는 다르게 너무도 순진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수현은 ‘제대로 된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여자를 어떻게 놀려 볼까 고민하다 장난기 가득 담긴 목소리로 노아에게 되물었다.
“뭘 해 줄 수 있는데?”
“……돈이면 돼요?”
“아니. 나 돈 많아.”
망설임 없이 바로 나오는 수현의 대답에 노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수현은 그런 노아를 보며 다시 한번 웃고, 누구든 한순간에 빠져들 것 같은 매혹적인 눈으로 노아를 노골적으로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한참의 감상 끝에 수현은 살며시 운을 뗐다.
“너 나랑…….”
수현이 말끝을 흐리자 노아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딱 봐도 ‘나 좀 놀아 봤어요.’라고 말해 주는 외모에 안 좋은 소문들만 자자한 수현의 입에서 당장이라도 성(性)적인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차라리 돈이면 몰라도 몸은 절대 줄 수 없다. 노아는 이 상황을 어떻게 잘 헤쳐 나갈지 머리를 굴리며 이리저리 시선을 회피하다 결국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수현과 눈이 마주쳤다.
노아는 수현이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그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에 지레 겁을 먹으며 재빨리 그의 시선을 피했다.
수현은 이마에 식은땀까지 흘리며 벌벌 떠는 노아를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랑 친구 하자.”
“네…… 친구…… 네?”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오자 노아는 토끼 눈이 되어 수현을 쳐다봤다. 그러자 수현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친구 하자고 나랑.”
노아는 마치 뭐에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수현을 바라봤다. 엄청 잘생긴 외모에 여자들과 관련된 안 좋은 소문만 가득한 남자가 뜬금없이 친구를 하자니. 이건 노아의 똑똑한 머리로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결국 노아는 참지 못하고 수현에게 물었다.
“왜요……?”
친구 하자는 사람에게 되묻기에는 조금 웃긴 질문이겠지만 노아는 굉장히 진지했다. 그래서 그런지 수현도 딱히 그 질문에 토를 달지 않고 가만히 노아를 바라보고는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모델로 데뷔한 지 10년 됐거든.”
“네?”
“친구가 없어. 하나도.”
수현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두 사람밖에 없는 방 안 공기가 그의 말에 숙연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노아에게도 친구라고는 태어날 때부터 함께였던 고향 친구 서연이 전부였다.
옛말에 동병상련이라고, 노아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는 수현을 지금 자신의 상황도 잊고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금세 그녀의 얼굴에 슬픔이 가득 묻어 나왔다. 노아는 수현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바보처럼 순진한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 사람도 나처럼 소문이랑 다르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 외로운 사람인 거 아닐까?’
노아는 더 이상 떨지 않고 수현을 바라봤다. 그러자 노아의 대답을 기다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싫으면…….”
“싫으면……?”
“내 노예 하든가.”
수현의 폭탄 발언에 노아는 순식간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런 노아의 마음도 모르고, 삽시간에 변하는 그녀의 표정이 그저 재밌기만 한지 수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풉, 푸하하.”
갑자기 혼자 미친 듯이 웃는 수현을 노아는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수현은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로 더욱더 크게 한참 동안 웃더니 진짜 울기라도 한 건지 눈가를 매만지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지금 농담이라고 하셨나요?
누구는 겁까지 먹고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농담이라며 너무도 쉽게 말하는 못된 남자를 순둥이 서노아가 열심히 노려봤다.
수현은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건지, 아니면 하고 싶지 않은 건지 노아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못된 말을 했다.
“앞으로 심심하진 않겠네.”
사람을 앞에 두고 심심하지 않겠다니! 아무래도 방금 전 ‘이 사람도 외로운 사람이 아닐까.’ 했던 자신의 생각은 완벽한 착오였다는 느낌이 들어 노아는 배신감에 이를 악물었다.
근데 여기서 더 화가 나는 건 수현이 자기 할 말은 다 끝났다는 듯 제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는 거다.
“연락할게, 친구.”
수현은 ‘친구’라는 단어에 힘을 실어 말하고는 난리를 치며 들어왔던 사장실을 얌전히 빠져나갔다.
노아는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진 수현을 맞닥뜨린 게 혹시 꿈이 아닐까 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볼을 꼬집어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꿈이 아니었는지 볼에 생생하게 고통이 느껴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진짜야?”
현실을 믿을 수 없는 건지, 아님 믿기 싫은 건지 노아는 수현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혼잣말로 되물었다.
그렇게 얼떨결에 나이도, 성별도, 성격도 다른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 * *
늦은 저녁, 회사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중요한 서류를 보관하는 것밖에 없는데도 왠지 모르게 피곤에 절은 노아가 침대에 누워 막 잠에 들려고 할 때쯤 휴대폰이 울렸다.
자신에게 전화를 할 사람은 지금 옆방에서 잠들어 있는 서연밖에 없기에 노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휴대폰 액정 속에는 생전 처음 보는 번호가 떠 있었다. 노아는 상대를 추측해 보다가 조심스럽게 귓가에 휴대폰을 가져다 댔다.
“여보…….”
― 서노아.
운을 떼기 무섭게 다짜고짜 말을 끊으며 이름부터 부르는 상대 때문에 노아의 미간이 구겨졌다. 도대체 누구기에 반말부터 하냐며 속으로 열심히 상대를 욕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목소리가 익숙했다.
설마…….
노아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입에 담는 것조차 두려운 상대, 바로 수현의 목소리가 아닌가!
수현은 그날 이후로 노아를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연락처를 알려 준 적이 없으니 연락이 오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혹시 수현이 찾아왔던 게 전부 꿈은 아니었을까 생각하다가도 비서에게 현실이었음을 확인받고 혼자 불안해했었다. 그런데 이런 뜬금없는 전화라니…… 당연히 반갑지 않았다.
이 남자는 대체 어떻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아냈으며, 이 야밤에 무슨 일로 전화를 한 걸까. 노아는 수많은 궁금증이 샘솟았다.
여러 가지 생각들로 노아가 말이 없자 역시나 거침없는 수현이 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 내일 저녁 일곱 시.
“네, 네?”
― 톡으로 주소 보낼게. 늦지 말고 와.
“무슨…….”
뚝.
수현은 그렇게 지난번 만났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노아는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잠시 휴대폰을 멍하니 쳐다봤다.
“헐.”
정말 입에서 ‘헐’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이딴 무례한 남자가 다 있을까. 사람이 너무 무례한 행동만 골라 하다 보니 당일이 아닌 전날에라도 미리 말해 준 걸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노아는 신경질적으로 침대에 누우며 소리를 질렀다.
“안 나가! 내가 왜 나가?”
그때, 악마 같은 표정을 짓던 수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들어도 괜찮아?’
그날 일이 떠오르자 노아의 얼굴에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그리고 이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영원한 거짓말은 없다지만 일단 지금은 아니야…….”
그렇게 노아는 수현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 * *
― 제대로 오고 있는 거 맞아?
“가고 있어요. 걱정 말아요.”
핸들을 돌리는 노아의 손이 분주했다. 분명 수현과 통화를 마친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나가야겠다고 결정을 내렸는데, 막상 당일이 되니 노아는 퇴근 직전까지도 약속을 지켜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수십 번도 더 고민했다.
하지만 수현이 협박할 게 두려웠던 탓에 노아는 결국 서연이 남자 친구와 데이트를 나간 틈을 타 공용으로 쓰는 차까지 끌고 수현과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근데 이상하게도 운전 경력 7년으로 웬만한 서울 지리는 빠삭하게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노아가 계속 길을 헤매고만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수현이 알려 준 장소는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곳이었다.
“내비가 고장이 났나?”
노아는 심각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비게이션이 알려 주는 길을 따라 한참을 뱅뱅 돌다가 멀리서 봐도 길쭉한 게 딱 봐도 수현인 것 같은 남자가 시야에 들어와, 일단 근처에 차를 대고 수현을 향해 걸어갔다.
어두운 골목 사이에서 혼자 자체 발광 중인 수현을 보다 노아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다. 수현은 그냥 평범한 화이트 셔츠에 청바지를 입었는데도 역시 모델답게 어두침침한 골목을 화보 촬영지로 만들고 있었다.
남자에 관해서라면 문외한인 노아가 보기에도 너무도 멋진 그의 모습에 그녀는 속으로 감탄을 하며 멈춰 선 채로 넋을 놓고 수현을 감상했다.
그때, 팔짱을 낀 채 노아를 기다리고 있던 수현이 그제야 그녀를 발견했는지 긴 다리로 터벅터벅 다가와 까칠하게 말했다.
“늦었어.”
두려운 감정을 빼고 들으니 아주 매력적인 허스키한 목소리가 골목에 천천히 울려 퍼졌다. 그때서야 정신이 돌아온 노아가 수현을 쳐다보고, 수현은 그런 노아를 내려다봤다.
노아의 키는 168cm로 여자들 중에서 나름 큰 편에 속했다. 그런데도 정말 멀대같이 큰 수현의 앞에 있으니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 위압감에 약간 주눅이 들어 노아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남 생각 따위는 전혀 안 하는 수현은 노아의 팔목을 잡아 그녀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졸지에 수현에게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면서도 노아는 태평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서울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아주 외지고 딱히 가게라 할 것도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하지만 노아는 ‘이 사람은 유명한 모델이니까 눈이 많은 곳에서 여자인 나와 만나는 건 어려울 거야.’라는 생각을 하며 그가 이곳을 약속 장소로 고른 이유를 쉽게 납득했다.
거기다 노아 또한 그녀의 실체가 발각될지도 모르니 남자는 절대 만나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는 서연의 눈을 피할 수 있어 나름대로 괜찮은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여러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새 수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노아는 수현을 따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눈앞에 펼쳐진 화려한 광경에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이건 말로만 듣던…… 모, 모, 모…….’
생각 속에서조차 제대로 말을 이을 수 없는 장소의 정체는 다름 아닌 모텔로 빼곡한 모텔촌이었다.
노아는 그 현란한 불빛에 한 번 놀라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두 번 놀라더니 머릿속에서 울리는 위험을 알리는 경고음에 살며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수현은 도망을 치려는 노아의 손목을 재빠르게 낚아챘다.
깜짝 놀라 속으로는 벌벌 떨고 있는 주제에 노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쳐다봤다.
그 순간, 여유 있던 표정은 순식간에 보기 좋게 구겨져 버렸다. 문을 연 사람은 요즘 노아를 그토록 두렵게 만들었던 상대, 바로 악마 같은 한수현이었다.
애초에 재촬영 전까지는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사무실로 쳐들어오다니. 갑자기 들이닥친 수현의 등장에 노아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든가 말든가, 노아의 사정 따위는 전혀 봐주지 않는 수현은 여전히 싸늘한 눈동자로 노아를 바라보더니 허락도 없이 그녀의 앞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뒤늦게 뛰어 들어온 비서와 경비원들이 수현을 끌어내려 했지만, 수현이 바로 입을 열었다.
“우리, 할 말 있지 않았나?”
어쩜 사람이 입만 열었을 뿐인데 저렇게 악마 같을 수가!
노아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수현의 포스에 그대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 앞에서 비서와 경비원들이 억지로 수현을 일으키려 하는데도 여유롭게 웃고 있던 수현은 나직한 목소리로 노아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흘렸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들어도 괜찮아?”
노아는 수현의 한마디에 이제야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앞뒤 생각도 하지 않고 서둘러 소리쳤다.
“제, 제 손님이에요! 모두 나가 주세요!”
노아의 말에 비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서가 노아를 보필한 3년 동안 노아에게 개인적인 손님이 찾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약속 없이.
하지만 노아가 계속 나가라고 눈짓을 하는 탓에 비서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경비원들과 함께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사장실에는 노아와 수현,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노아는 제법 넓다고 생각했던 자신만의 공간이 순식간에 좁게 느껴졌다. 그녀는 불안감에 휩싸여 손까지 덜덜 떨었다.
올 것이 와 버렸다…….
노아는 지난 며칠간 자신을 괴롭혀 왔던, 진실이 밝혀진 후의 끔찍한 미래들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고는 수현에게 물었다.
“……저한테 원하시는 게 뭐예요?”
무슨 삼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노아의 대사에 수현의 입가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겉모습과는 다르게 너무도 순진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수현은 ‘제대로 된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여자를 어떻게 놀려 볼까 고민하다 장난기 가득 담긴 목소리로 노아에게 되물었다.
“뭘 해 줄 수 있는데?”
“……돈이면 돼요?”
“아니. 나 돈 많아.”
망설임 없이 바로 나오는 수현의 대답에 노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수현은 그런 노아를 보며 다시 한번 웃고, 누구든 한순간에 빠져들 것 같은 매혹적인 눈으로 노아를 노골적으로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한참의 감상 끝에 수현은 살며시 운을 뗐다.
“너 나랑…….”
수현이 말끝을 흐리자 노아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딱 봐도 ‘나 좀 놀아 봤어요.’라고 말해 주는 외모에 안 좋은 소문들만 자자한 수현의 입에서 당장이라도 성(性)적인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차라리 돈이면 몰라도 몸은 절대 줄 수 없다. 노아는 이 상황을 어떻게 잘 헤쳐 나갈지 머리를 굴리며 이리저리 시선을 회피하다 결국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수현과 눈이 마주쳤다.
노아는 수현이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그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에 지레 겁을 먹으며 재빨리 그의 시선을 피했다.
수현은 이마에 식은땀까지 흘리며 벌벌 떠는 노아를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랑 친구 하자.”
“네…… 친구…… 네?”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오자 노아는 토끼 눈이 되어 수현을 쳐다봤다. 그러자 수현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친구 하자고 나랑.”
노아는 마치 뭐에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수현을 바라봤다. 엄청 잘생긴 외모에 여자들과 관련된 안 좋은 소문만 가득한 남자가 뜬금없이 친구를 하자니. 이건 노아의 똑똑한 머리로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결국 노아는 참지 못하고 수현에게 물었다.
“왜요……?”
친구 하자는 사람에게 되묻기에는 조금 웃긴 질문이겠지만 노아는 굉장히 진지했다. 그래서 그런지 수현도 딱히 그 질문에 토를 달지 않고 가만히 노아를 바라보고는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모델로 데뷔한 지 10년 됐거든.”
“네?”
“친구가 없어. 하나도.”
수현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두 사람밖에 없는 방 안 공기가 그의 말에 숙연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노아에게도 친구라고는 태어날 때부터 함께였던 고향 친구 서연이 전부였다.
옛말에 동병상련이라고, 노아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는 수현을 지금 자신의 상황도 잊고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금세 그녀의 얼굴에 슬픔이 가득 묻어 나왔다. 노아는 수현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바보처럼 순진한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 사람도 나처럼 소문이랑 다르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 외로운 사람인 거 아닐까?’
노아는 더 이상 떨지 않고 수현을 바라봤다. 그러자 노아의 대답을 기다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싫으면…….”
“싫으면……?”
“내 노예 하든가.”
수현의 폭탄 발언에 노아는 순식간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런 노아의 마음도 모르고, 삽시간에 변하는 그녀의 표정이 그저 재밌기만 한지 수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풉, 푸하하.”
갑자기 혼자 미친 듯이 웃는 수현을 노아는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수현은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로 더욱더 크게 한참 동안 웃더니 진짜 울기라도 한 건지 눈가를 매만지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지금 농담이라고 하셨나요?
누구는 겁까지 먹고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농담이라며 너무도 쉽게 말하는 못된 남자를 순둥이 서노아가 열심히 노려봤다.
수현은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건지, 아니면 하고 싶지 않은 건지 노아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못된 말을 했다.
“앞으로 심심하진 않겠네.”
사람을 앞에 두고 심심하지 않겠다니! 아무래도 방금 전 ‘이 사람도 외로운 사람이 아닐까.’ 했던 자신의 생각은 완벽한 착오였다는 느낌이 들어 노아는 배신감에 이를 악물었다.
근데 여기서 더 화가 나는 건 수현이 자기 할 말은 다 끝났다는 듯 제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는 거다.
“연락할게, 친구.”
수현은 ‘친구’라는 단어에 힘을 실어 말하고는 난리를 치며 들어왔던 사장실을 얌전히 빠져나갔다.
노아는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진 수현을 맞닥뜨린 게 혹시 꿈이 아닐까 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볼을 꼬집어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꿈이 아니었는지 볼에 생생하게 고통이 느껴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진짜야?”
현실을 믿을 수 없는 건지, 아님 믿기 싫은 건지 노아는 수현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혼잣말로 되물었다.
그렇게 얼떨결에 나이도, 성별도, 성격도 다른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 * *
늦은 저녁, 회사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중요한 서류를 보관하는 것밖에 없는데도 왠지 모르게 피곤에 절은 노아가 침대에 누워 막 잠에 들려고 할 때쯤 휴대폰이 울렸다.
자신에게 전화를 할 사람은 지금 옆방에서 잠들어 있는 서연밖에 없기에 노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휴대폰 액정 속에는 생전 처음 보는 번호가 떠 있었다. 노아는 상대를 추측해 보다가 조심스럽게 귓가에 휴대폰을 가져다 댔다.
“여보…….”
― 서노아.
운을 떼기 무섭게 다짜고짜 말을 끊으며 이름부터 부르는 상대 때문에 노아의 미간이 구겨졌다. 도대체 누구기에 반말부터 하냐며 속으로 열심히 상대를 욕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목소리가 익숙했다.
설마…….
노아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입에 담는 것조차 두려운 상대, 바로 수현의 목소리가 아닌가!
수현은 그날 이후로 노아를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연락처를 알려 준 적이 없으니 연락이 오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혹시 수현이 찾아왔던 게 전부 꿈은 아니었을까 생각하다가도 비서에게 현실이었음을 확인받고 혼자 불안해했었다. 그런데 이런 뜬금없는 전화라니…… 당연히 반갑지 않았다.
이 남자는 대체 어떻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아냈으며, 이 야밤에 무슨 일로 전화를 한 걸까. 노아는 수많은 궁금증이 샘솟았다.
여러 가지 생각들로 노아가 말이 없자 역시나 거침없는 수현이 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 내일 저녁 일곱 시.
“네, 네?”
― 톡으로 주소 보낼게. 늦지 말고 와.
“무슨…….”
뚝.
수현은 그렇게 지난번 만났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노아는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잠시 휴대폰을 멍하니 쳐다봤다.
“헐.”
정말 입에서 ‘헐’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이딴 무례한 남자가 다 있을까. 사람이 너무 무례한 행동만 골라 하다 보니 당일이 아닌 전날에라도 미리 말해 준 걸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노아는 신경질적으로 침대에 누우며 소리를 질렀다.
“안 나가! 내가 왜 나가?”
그때, 악마 같은 표정을 짓던 수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들어도 괜찮아?’
그날 일이 떠오르자 노아의 얼굴에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그리고 이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영원한 거짓말은 없다지만 일단 지금은 아니야…….”
그렇게 노아는 수현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 * *
― 제대로 오고 있는 거 맞아?
“가고 있어요. 걱정 말아요.”
핸들을 돌리는 노아의 손이 분주했다. 분명 수현과 통화를 마친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나가야겠다고 결정을 내렸는데, 막상 당일이 되니 노아는 퇴근 직전까지도 약속을 지켜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수십 번도 더 고민했다.
하지만 수현이 협박할 게 두려웠던 탓에 노아는 결국 서연이 남자 친구와 데이트를 나간 틈을 타 공용으로 쓰는 차까지 끌고 수현과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근데 이상하게도 운전 경력 7년으로 웬만한 서울 지리는 빠삭하게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노아가 계속 길을 헤매고만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수현이 알려 준 장소는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곳이었다.
“내비가 고장이 났나?”
노아는 심각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비게이션이 알려 주는 길을 따라 한참을 뱅뱅 돌다가 멀리서 봐도 길쭉한 게 딱 봐도 수현인 것 같은 남자가 시야에 들어와, 일단 근처에 차를 대고 수현을 향해 걸어갔다.
어두운 골목 사이에서 혼자 자체 발광 중인 수현을 보다 노아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다. 수현은 그냥 평범한 화이트 셔츠에 청바지를 입었는데도 역시 모델답게 어두침침한 골목을 화보 촬영지로 만들고 있었다.
남자에 관해서라면 문외한인 노아가 보기에도 너무도 멋진 그의 모습에 그녀는 속으로 감탄을 하며 멈춰 선 채로 넋을 놓고 수현을 감상했다.
그때, 팔짱을 낀 채 노아를 기다리고 있던 수현이 그제야 그녀를 발견했는지 긴 다리로 터벅터벅 다가와 까칠하게 말했다.
“늦었어.”
두려운 감정을 빼고 들으니 아주 매력적인 허스키한 목소리가 골목에 천천히 울려 퍼졌다. 그때서야 정신이 돌아온 노아가 수현을 쳐다보고, 수현은 그런 노아를 내려다봤다.
노아의 키는 168cm로 여자들 중에서 나름 큰 편에 속했다. 그런데도 정말 멀대같이 큰 수현의 앞에 있으니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 위압감에 약간 주눅이 들어 노아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남 생각 따위는 전혀 안 하는 수현은 노아의 팔목을 잡아 그녀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졸지에 수현에게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면서도 노아는 태평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서울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아주 외지고 딱히 가게라 할 것도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하지만 노아는 ‘이 사람은 유명한 모델이니까 눈이 많은 곳에서 여자인 나와 만나는 건 어려울 거야.’라는 생각을 하며 그가 이곳을 약속 장소로 고른 이유를 쉽게 납득했다.
거기다 노아 또한 그녀의 실체가 발각될지도 모르니 남자는 절대 만나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는 서연의 눈을 피할 수 있어 나름대로 괜찮은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여러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새 수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노아는 수현을 따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눈앞에 펼쳐진 화려한 광경에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이건 말로만 듣던…… 모, 모, 모…….’
생각 속에서조차 제대로 말을 이을 수 없는 장소의 정체는 다름 아닌 모텔로 빼곡한 모텔촌이었다.
노아는 그 현란한 불빛에 한 번 놀라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두 번 놀라더니 머릿속에서 울리는 위험을 알리는 경고음에 살며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수현은 도망을 치려는 노아의 손목을 재빠르게 낚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