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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의 그 녀석 3화



“어디 가?”
수현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물음에 노아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곳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은근슬쩍 끌고 온 주제에, 어떻게 저렇게 담담한 표정으로 어디 가냐고 물을 수 있는 거지?’
마성의 그 녀석 한수현은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며, 순결을 이렇게 허무하게 빼앗길 수 없다는 생각에 노아는 수현에게 잡힌 팔을 빼내려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이, 이거 놔요! 치, 친구 하자면서요! 친구끼리 어떻게 이런 데를 와요!”
“그럼 친구랑 오지, 누구랑 와.”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지금!”
“시끄럽고, 빨리 들어가자.”
노아는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최대한 버둥거려 봤지만 결국엔 수현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끌려가는 내내 이러지 말라느니, 내가 잘못했다느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 나이에 엉엉 울기까지 하며 그의 손에 잡힌 채로 건물 안까지 들어가고야 말았다. 그렇게 환한 조명 빛이 꽉 감긴 눈꺼풀을 비출 때에 갑자기 수현의 걸음이 멈췄다.
노아는 반짝 눈을 뜨고 미처 흐르지 못한 눈물을 대롱대롱 단 채로 수현을 올려다봤다. 수현은 뭐 보듯 노아를 보고 있었다.
훌쩍, 흐르는 콧물을 삼키며 노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향긋한 커피 향으로 가득 찬 작은 카페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응?”
생각했던 것관 다른 장소에 노아는 멍하니 눈만 꿈뻑거렸다. 그때, 옆에서 노아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수현이 몸을 굽혀 노아와 눈을 마주쳤다.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범접할 수 없는 포스가 느껴져 노아가 한 번 더 “히끅!” 하고 눈물을 삼켰다. 그 모습까지 전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던 수현이 노아를 향해 낮게 말했다.
“……네가, 뭘 잘못했는데?”
“…….”
노아는 당연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저 커다란 눈만 깜빡이며 수현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제가 방금 했던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제발 이러지 마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아…… 이런 게 바로 ‘혀 깨물고 죽고 싶다.’는 기분이구나.
짧은 시간 내에 정말 많은 개소리를 뱉어 낸 자신을 흠씬 때려 주고 싶었다.
수현도 그런 노아의 마음을 알았는지 노아를 더 추궁하는 대신 한숨을 내쉬며 커다란 손으로 다정하게 노아의 눈물을 닦아 줬다.
수현은 적당한 자리에 노아를 앉힌 뒤,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손수 커피를 받아 와 노아에게 내밀어 주었다. 노아는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래서 차마 고개도 못 들고 혼자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노아의 앞에서 커피 한 모금을 마신 수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 소문이 안 좋긴 하지.”
수현은 그 말을 끝으로 “후우…….” 하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노아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수현은 슬프게 웃으며 마저 말을 이어 갔다.
“그래도 너까지 너무 그러지 마.”
“…….”
“넌 내 친구잖아.”
“한수현 씨…….”
노아는 수현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분명 노아가 수현을 불쌍하게 여길 처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의 모습이 소심한 성격 탓에 외롭게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여 가슴이 아팠다.
‘어쩌면 괜찮은 사람일지도 몰라.’
노아는 지난번처럼 또다시 마음이 약해져서는 수현을 믿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순진한 고민을 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예전에 서연에게 들었던 경고가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 정신 안 차릴래? 나쁜 인간들이 ‘나 나쁜 사람이에요.’ 하고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는 줄 알아?’

본격적으로 세상 속이기에 돌입했을 때, 노아는 정신적으로 많이 괴로워 누구에게나 기대고 싶어 했다. 그런 그녀에게 속이 새까만 사람들이 접근했고, 바보처럼 넘어가 일을 그르치려 할 때마다 서연이 나타나 막아 주었다. 그 덕분에 지금껏 별 탈 없이 지내 올 수 있었다.
‘미쳤어…… 또.’
노아는 그렇게 당해 놓고 또 의심 없이 사람을 믿어 일을 망치려 한 자신을 욕했다. 그리고 눈앞에서 웃고 있는 수현을 보며 아직은 믿으면 안 된다고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 * *

― 오늘도 도망가면 죽는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살벌한 목소리에 노아는 지금 눈앞에 서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처음 수현을 만난 날, 자신이 모태 솔로라는 것을 들키고 덜컥 겁이 나 도망을 가 버린 노아 때문에 예정되어 있던 화보 촬영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 후 서연은 다시 촬영 날짜를 잡고도 안 가겠다는 노아를 설득시키는 데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다.
그것 때문이라도 재촬영 날에는 기필코 노아의 곁에서 단 1초도 떨어지지 않겠다고 서연은 몇 차례 으름장을 놓았는데, 하필 이런 날 갑자기 생겨 버린 VIP와의 약속 때문에 또다시 노아 혼자 촬영장에 오게 되었다.
노아를 혼자 보낸 게 영 불안한지 서연은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협박 전화를 해 왔다. 스토커가 따로 없는 서연의 행동에도 노아는 지은 죄가 있으니 찍소리 한 번 하지 못하고 얌전히 서연의 잔소리를 들었다.
촬영 전부터 진이라는 진은 다 빠져서 전화를 끊기 무섭게 한숨부터 나오는데,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노아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수현이 촬영장에 도착했음을 단번에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수현이 긴 다리로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그냥 걷는 것뿐인데 수현은 이 공간을 순식간에 화보 촬영지로 만들었다. 게다가 조명은 혼자 다 받는지 등 뒤에서 후광이 번쩍거리는데, 평소 남자한테 관심이 없던 노아조차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수현을 바라보게 됐다.
그러다 문득 수현과 눈이 마주치자 수현은 ‘나 보고 있었어?’라고 말하는 듯이 눈웃음을 보내왔다.
‘들켰어? 본 거 들킨 거야?’
잘생긴 거 좀 훔쳐보는 게 그리 큰 죄는 아니지만, 노아는 마치 대역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 최대한 수현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그건 모두 헛수고였다는 걸 금세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왜냐하면 오늘 수현과 노아가 함께 하기로 한 촬영은 커플 화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여길 왜 온다고 했을까…….”
서연이 무슨 말로 협박을 해도 절대 와서는 안 됐다. 한수현과 커플 화보라니…….
얼마 전, 그의 슬픈 눈동자를 보고 마음이 잔뜩 약해졌었는데, 오늘은 수현과 몸을 밀착하며 농도 짙은 스킨십을 해야 한다. 멀리서 바라만 봐도 심장 떨리게 잘생긴 남자와 진한 스킨십까지 해야 한다는 건 가뜩이나 이 남자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되는 노아에게는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표님. 촬영 시작합니다.”
먼저 모든 준비를 끝내고 스튜디오 위에 서 있는 수현을 뒤늦게 와서 지켜보고 있던 노아의 귓가에 사형 선고와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이미 한 번 노아에게 제대로 당한 스태프가 손수 노아를 스튜디오 위에 세워 두고, 도망갈 타이밍을 주지 않았다.
“그럼 대표님 잘 부탁드립니다.”
분명 웃고는 있는데 뭔가 살벌하게 들리는 스태프의 말에 노아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만 나온다는 미친 연기력을 선보이며 수현의 앞으로 다가섰다.
근데 이 남자,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특유의 새까만 눈동자로 노아를 뚫어 버릴 기세로 바라보기만 했다.
‘난 떨리지 않아. 안 떨어!’
노아는 그렇게 자기 최면을 걸며 심호흡을 하고 수현을 똑바로 쳐다봤다. 하지만 최면은 순식간에 풀려 버렸다.
“가……까워…….”
속으로만 생각했어야 했는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노아는 순간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수현과 노아의 거리는 고작 10cm 남짓. 원래부터 남자들과의 화보 촬영은 긴장되고 떨렸지만, 오늘은 그게 배는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몸은 가까운데 얼굴은 최대한 수현과 떨어진 웃지 못할 포즈가 나왔다.
그때 노아의 귀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수현 씨, 고개 조금만 더 돌려요.”
‘돌리긴 뭘 돌려요!’
노아는 마음 같아서는 정말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아 ‘제발 저 말 듣지 마요.’라고 애원하는 눈으로 수현을 쳐다봤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항상 마이 웨이를 고집하던 수현이 이럴 때만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순순히 고개를 틀었다. 덕분에 결국 노아와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자세가 되어 버렸다.
무서울 정도로 잘생긴 남자랑 얼굴은 가깝고, 평소랑 다르게 그의 표정이 진지하기까지 하니 노아는 정말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자꾸 몸은 뻣뻣하게 굳어 가고 포즈는 개뿔, 수현과 제대로 붙어 있지도 못했다.
가뜩이나 지난번에 촬영팀을 곤혹스럽게 만든 노아가 이렇게 포즈도 제대로 취하지 않고 표정도 어색하게 지으며 촬영에 비협조적으로 나오기까지 하니 촬영 감독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노아 씨, 수현 씨랑 붙어 있어야죠!”
짜증 섞인 감독의 목소리에 노아는 원망 가득한 눈으로 촬영 감독을 쳐다봤다. 속으로 ‘당신이라면 이런 남자와 붙어 있을 수 있나요?’라고 따지고 싶은 욕구를 애써 삼키는데, 그때 갑자기 노아의 허리를 무언가가 강하게 휘감았다.
순식간에 단단하고 넓은 남자의 품에 안긴 노아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올려다봤다. 그 순간, 얼굴에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현과 눈이 마주쳤다. 자신이 수현의 품에 안겼다는 걸 깨닫기 무섭게 노아는 화들짝 놀라 물러서려고 했다.
하지만 수현은 노아의 가는 허리를 더욱 꽉 껴안으며 낮게 말했다.
“가만히 나한테 붙어 있어.”
“…….”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이 말이 뭐라고, 노아의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잘생긴 남자들과 지금보다 더 농도 짙은 스킨십까지 하며 수많은 촬영을 해 왔다. 근데 이렇게까지 심하게 떨리고 긴장이 된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노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촬영 내내 수현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돌처럼 굳어 있는 노아와는 달리 수현은 10년 차 모델답게 노아를 자연스럽게 보이게끔 리드해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
“고생하셨습니다!”
촬영이 끝났음을 알리는 스태프들의 목소리에 노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촬영을 한 건지, 촬영본은 언제 확인하고 쉬는 시간엔 뭘 하고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노아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나 어떡해. 떨렸어…….”
다행히도 노아의 작은 중얼거림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아니, 노아는 그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떨림을 준 주인공 수현이 그녀의 말을 들으며 노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아에게서 ‘떨렸다’는 말을 들은 그의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가 마치 앞으로 노아에게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 * *

노아는 친구라고는 서연 단 한 명밖에 없다. 고로 서연 말고는 놀아 줄 사람이라고는 전혀 없는데, 서연은 바빠서 좀처럼 노아와 놀아 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혼자서 무언가를 할 용기도 없어서 노아는 집순이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보통 찾아오는 고객들과는 다르게 방문 상담을 해 줘야 하는 VIP들에게 서연이 불려갔다. 집순이인 노아에겐 출퇴근할 때 빼곤 차가 필요 없어 서연과 차 한 대를 같이 쓰고 있는데, 오늘 서연이 그 차를 타고 가 버려 노아는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퇴근을 하기 위해 도로 앞에 서 있었다.
그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갑자기 어디선가 빵빵, 하고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노아는 혹시 상담이 빨리 끝난 서연이 자신을 데리러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텅 비어 있는 도로 위에 홀로 서 있는 새까만 자동차가 눈에 들어왔다. 노아는 본 적 없는 낯선 차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차는 노아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노아는 상대가 이미 몇 번이나 겪어 봤던 자신의 겉모습에 관심을 가진 남자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서연도 없이 어떻게 단칼에 거절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그녀의 앞에서 멈추어 선 차의 창문이 열리면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한수현 씨?”
노아는 예상하지 못했던 수현의 등장에 인상을 찡그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워낙 잘나가 스케줄이 많기로 소문난 모델이고, 얼마나 바쁜지 그때 촬영 이후 단 한 번도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그것도 자신의 회사 앞에 그가 갑작스럽게 등장해 노아는 당황스러웠다.
얼마 전 수현과의 촬영에서 그에게 느꼈던 묘한 감정에 노아는 되도록이면 수현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노아는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면 좋을까 고민했다.
그때, 특유의 짙은 눈으로 노아를 바라보던 수현이 까칠한 말투로 말했다.
“타.”
노아는 말없이 수현을 바라봤다. 노아의 약점을 잡고 있는 그가 금방이라도 협박을 할 것처럼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노아는 겁이 나, 결국 토도 달지 못하고 그의 차에 올라탔다.
지금껏 자신을 차에 태워 주겠다던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수현은 노아가 차에 타기 편하도록 문을 열어 준다든가 안전벨트를 매 준다든가 하는 온갖 매너 있다 싶은 행동을 하진 않았다. 그런데도 노아는 이상하게 그런 수현의 무심한 행동이 제 부담감을 줄여 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노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현은 노아에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근육으로 다부진 팔로 핸들을 돌렸다.




마성의 그 녀석
4화
노아가 정신없이 그의 팔뚝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툭 던지듯 물어 오는 수현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잘 지냈어?”
“네, 네? 아…… 네.”
어울리지 않게 웬 안부 인사? 평소라면 의문이 들었겠지만, 노아는 방금 전까지 수현의 팔뚝을 구경하고 있었기에 나쁜 짓이라도 하다 들킨 아이처럼 놀라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때문에 대충 말을 얼버무리며 자꾸만 수현의 팔로 돌아가려는 시선을 애써 말리고 있는데, 다시 수현의 질문이 이어졌다.
“근데 왜 연락이 없었어.”
마치 삐치기라도 한 말투였다. 도대체 어디서 뭐 때문에 삐친 건지 알 수 없어서 노아는 얼떨떨한 눈으로 수현을 쳐다봤다.
그러자 수현이 날카로운 눈으로 노아를 노려보며 다시 까칠한 말투로 말했다.
“뭐.”
“아닙니다.”
예. 그럼요. 아니고말고요.
노아의 대답에도 그의 살벌한 시선은 여전히 거두어질 줄을 몰랐다. 노아는 괜히 헛기침을 하고, 이 분위기가 무서워 말을 돌리려 했다.
“그, 그런데 저희 집은 어떻게 알았어요?”
“몰라.”
“네?”
“모른다고. 네 집.”
노아는 수현의 당당하고 단호한 대답에 그대로 할 말을 잃었다. 혹시나 싶어 서둘러 창밖을 보니 정말 수현의 차는 자신의 집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노아는 잠시 멍하니 수현을 바라봤다. 그리고 한참 망설인 끝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
노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앞만 보며 운전을 하던 수현이 힐끔 노아를 쳐다보더니 이내 진지하게 물었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데?”
노아는 이번에도 수현의 물음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진심이다. 이 남자 진심이야!’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큰일이 났다는 생각에 떨리는 눈으로 수현을 보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노아는 이대로 새우잡이 배로 팔려 가는 게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었다.
노아의 걱정은 수현이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벗어나면서 확신으로 다가왔다.
“지, 지금 어디 가요?”
“글쎄.”
“난 팔아 봤자 얼마 안 나와요!”
“뭐?”
“힘도 약하고 일머리도 없어서…….”
열심히 자기는 쓸모가 없다고 어필하고 있는 노아를 수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보통 남자가 데리고 나와서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달리면 당연히 드라이브 아닌가?’
도대체 어떤 사고방식을 가졌으면 자신이 팔려 간다고 오해를 하고, 아무리 소문이 나쁘기로서니 사람을 여자나 팔아먹는 그런 놈으로 보는 건지, 수현은 순간 화가 났다.
그래서 노아를 더 놀려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겁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표정 하나 안 변하고 폭탄 발언을 했다.
“괜찮아. 그래도 넌 예쁘잖아. 어딘가 쓸모가 있겠지.”
어머, 예쁘대.
노아는 지금껏 살면서 질리도록 들었던 그 말을 수현이 해 줬다는 이유로 순간 설레었다.
하지만 금세 자신이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급하게 정신을 차리며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때, 수현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액셀을 세게 밟았다.
“꺄악!”
아무리 텅 빈 도로라 해도 그렇지, 이 무슨 위험한 행동이란 말인가!
노아는 난폭한 수현의 운전에 연신 비명을 내지르며 수현의 팔을 꼭 붙잡고, 울 것 같은 목소리로 급하게 소리쳤다.
“너무 빨라요!”
“…….”
“이러다 사고 난다고요!”
겁에 질린 노아가 두 눈을 질끈 감으려는데, 갑자기 달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자동차 지붕이 열리고 있었다.
쏴아아.
날개 뼈를 훌쩍 넘기는 노아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강물처럼 굽이쳤다.
잠시 차가운 바람에 몸을 움츠리던 노아는 문득 까만 밤하늘이 눈에 들어오자 그대로 넋을 놓고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하늘……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노아는 한 학년에 학생이 10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는 밤이면 마당에 있는 정자에 누워 별 구경을 하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드는 게 일상이었는데, 대학을 위해 상경하면서부터는 하늘을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노아는 괜히 감성에 젖어 들고, 요 몇 년 동안 자신을 지독히도 괴롭혔던 이유 없이 답답한 가슴이 조금 뚫리는 기분도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불안에 떨었던 주제에 하늘을 보며 온화한 미소를 짓는 노아를, 수현은 아무런 말 없이 바라봤다. 편안해진 노아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수현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그리고 천천히 흐르는 바람 위로 매력적인 허스키한 목소리를 흘렸다.
“많이 답답했지?”
노아는 갑작스러운 수현의 질문에 놀란 눈으로 수현을 쳐다봤다. 그리고 수현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표정을 짓자 수현이 노아와 눈을 마주치며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너 숨기고 사는 거.”
노아는 수현의 말의 의미를 이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얼떨결에 유명해져서, 다른 방법으로는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팔자에도 없던 연기를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말할 곳도 딱히 없던 탓에 사실 그동안 혼자 괴로워하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근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자신의 마음을 수현이 단번에 알아차려 주자 노아는 괜히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노아가 눈물 맺힌 눈으로 수현을 바라보자, 수현이 도롯가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노아의 눈가를 커다란 손으로 조심스럽게 닦아 주더니 노아와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어 갔다.
“난 힘들었거든.”
노아에게 있어서 위로보다 좋은 건 공감이었다. ‘너 힘들지?’, ‘힘 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들을 수 있는 거였지만, ‘나도 너랑 같아.’라는 말은 쉽게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참지 못하고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을 쏟아 내자 수현이 노아를 넓은 품에 안아 줬다.
“널 만나서 다행이야. 아니었으면 평생 외로웠을 거야.”
노아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목 끝까지 ‘나도 한수현 씨를 만나서 다행이에요.’라는 말이 차올랐지만, 터져 나오는 울음 때문에 입도 달싹할 수 없었다.
오늘 노아는 그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그건 지금껏 그를 향해 가지고 있던 경계심을 마법처럼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노아는 자신과 너무도 닮은 듯 보이는 수현에게 조금 마음을 열어 보기로 했다.

* * *
“풉. 진짜요?”
노아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섭기만 하고 어려웠던 수현과의 통화가 이제는 제법 자연스럽고 재밌어졌다. 그건 아마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람 사이의 벽이 동질감 하나로 거짓말처럼 허물어졌기 때문일 거다.
수현도 바쁘고 노아도 서연에게 수현과의 관계를 들키지 않기 위해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두 사람은 요즘 연인 사이라도 된 것처럼 이렇게 종종 통화를 주고받았다.
노아는 난생처음 느껴 보는 감정과 한 남자와의 잦은 만남, 그리고 공감과 위로 속에서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수현에게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덕분에 어색했던 그와의 통화가 너무 즐거워 서연이 방에 들어온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떠들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노아는 서연을 발견하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바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망했다.
지금껏 서연은 노아가 남자를 만나려고 하는 것을 칼같이 반대했었다. 노아가 이상한 남자에게 속거나, 사실은 연애며 남자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의 정체가 들통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남자도 아니고, 서연이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던 수현과 노아가 지금 썸 아닌 썸을 타고 있는 걸 알아챈다면 절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잔뜩 얼어붙어 있는 노아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서연은 노아의 예상과는 다르게 화를 내기는커녕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노아는 상대가 염라대왕 같은 최서연이라는 이유로 발자국 소리를 듣자마자 겁에 질렸다.
하지만 노아의 앞에 다다른 서연의 입에서는 아주 의외의 말이 나왔다.
“더 하지, 왜 끊어?”
응? 이건 무슨 소리?
방금 전까지 노아가 통화하던 상대가 남자라는 건 정말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알아챘을 것이다. 그런데 눈치 백 단 최서연이 혼을 내기는커녕 더 하지 왜 끊냐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좀처럼 판단이 서지 않아 노아가 서연의 눈치만 슬금슬금 보고 있자 서연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연애해?”
“아, 아냐, 그런 거!”
노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서연을 향해 소리쳤다. 평소라면 ‘어디 감히 서노아 주제에 소리를 질러!’라며 면박을 줘야 할 서연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너도 이제 연애 좀 해야지.”
노아를 보는 서연의 두 눈에 미안함이 가득 어렸다. 노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서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널 위해서라는 핑계로 내가 네 청춘 다 버리게 했잖아.”
서연의 말에 노아도 표정이 슬프게 변했다.
노아는 맹세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노아가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소심하다는 건 서연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쁜 사람이 되더라도 노아의 곁에 남아 노아를 잡아 주는 걸 택해 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니, 노아는 코끝이 찡해졌다.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데 이어지는 서연의 한마디에 노아는 슬픔이 단번에 사그라졌다.
“그러니까 이상한 놈만 만나지 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연을 향해 아련한 눈빛을 보내고 있던 노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순간적으로 양심이 몹시 찔렸기 때문이다.
노아가 입도 달싹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연을 바라보는데, 평소엔 눈치 백 단인 서연은 노아의 표정을 보지 못한 건지, 보지 못한 척을 하는 건지 연속으로 노아의 양심을 찔렀다.
“나쁜 놈만 아니면 돼.”
‘어쩌지 서연아.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은데…… 소문이 나빠.’
“너무 센 놈도 만나지 말고.”
‘너보다 센 놈인데?’
“특히 한수현, 그 자식 같은 놈.”
“…….”
“그런 것만 아니면 내가 어느 정도 커버 쳐 줄 수 있으니까. 알았지?”
노아는 어쩜 찍어도 이렇게 정확하게 상대를 집어내느냐며 서연의 귀신같음에 할 말이 없어졌다.
노아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들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서연은 노아의 표정이 굳어진 이유가 슬픈 분위기 때문일 거라고 착각했는지 분위기 전환을 하기 위해 이번엔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나저나 소심쟁이 서노아가 연애라니, 많이 발전했네.”
“아, 아니야!”
노아는 서연의 입에서 나온 연애라는 단어에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수현과는 친구지 연인 관계가 될 거라고는 절대, 맹세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하지만 이런 노아의 마음을 모르는 서연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럼 이 언니는 너 연애 방해되지 않게 나가 준다.”
“정말 아니야!”
“휘둘리지 말고 휘둘러라, 서노아. 하긴…… 네가 휘둘러 봤자 퍽이나 잘 휘두르겠냐만.”
서연은 그 말을 끝으로 부정하고 있는 노아를 말끔히 무시하며 방을 빠져나갔다. 노아는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다 뭐에 홀린 사람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연애…….”
처음으로 머릿속에 친구가 아닌, 애인이 된 수현을 그려 봤다. 그러자 순진하게도 금세 얼굴이 달아올랐다. 수현을 떠올렸을 뿐인데 왜 이렇게 설레는 건지.
노아는 이 감정이 뭔지 이때까지만 해도 전혀 알지 못했다.

* * *

“오늘은 어디 가요?”
노아는 자연스럽게 수현의 차에 올라타며 물었다. 수현은 “글쎄?” 하고 또 궁금증만 자극시킨 채 차를 출발시켰다. 퇴근길에 이렇게 수현의 차를 얻어 타는 게 어느새 익숙해졌다.
그날 이후로도 두 사람은 종종 만났다. 무슨 꿍꿍이 때문인지 지난번 통화 사건 이후로 묘하게 자유 시간을 늘려 준 서연 덕분에 노아는 그녀의 감시에서 벗어나게 됐다.
덕분에 수현의 스케줄이 없는 날이면 함께 드라이브를 가거나 커피를 마시면서 대화를 하고, 가끔씩은 전화 통화로 밤을 지새우며 마치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지내 왔다.
오늘도 마침 수현의 스케줄이 비는 날이어서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들떠 있던 노아는,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수현이 운전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오늘은 드라이브를 할까, 카페를 갈까. 항상 혼자서만 지내 와 외로웠기에 노아는 수현과 함께하는 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잠시 후,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수현은 얼마 가지 않아 갑자기 외진 곳에 주차를 했다. 보통 드라이브를 할 땐 서울 근교까지 갔으니 드라이브는 아닌 것 같고, 주변을 보니 딱히 카페가 있을 만한 곳도 아니라 노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수현을 쳐다봤다.
노아가 그러든가 말든가, 오늘도 역시나 아무런 설명 없이 안전벨트를 풀던 수현은 멍하니 자신만 보고 있는 노아를 힐끔 쳐다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뭐 해, 안 내려?”
“네? 아, 네…….”
노아는 약간 의문을 가졌지만, 지난번 모텔촌에 있던 카페처럼 외지고 독특한 곳으로 자신을 데려가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일단 수현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앞장서서 빠르게 걷는 수현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두운 하늘 아래 밝은 빛들로 가득 찬 오락실 앞이었다.
노아는 멍하니 오락실을 바라봤다. 그러자 수현이 얼굴을 숨기기 위해 쓰고 온 모자를 더 푹 눌러쓰며 노아의 손목을 끌고 오락실 안으로 들어갔다.
노아가 태어나서 처음 입성한 오락실 안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부터 퇴근을 한 직장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게임기 앞에 앉아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컴퓨터조차 간단한 문서 작업이나 웹 서핑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노아는 난생처음 와 본 오락실에 좀처럼 적응할 수 없었지만, 금세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묘한 설렘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수현은 노아의 손목을 더욱 꽉 붙잡으며 주변을 탐색했다. 그러다 문득 뭔가를 발견했는지 그곳으로 가 멈추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