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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사탕 줄까?
“반에서 1등이면 뭐 해. 시우 걔가 아버지 없는 사생아잖아. 게다가 엄마는 어떻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우와 반에서 1, 2등을 다투는 수혜였다. 수혜와 늘 붙어 다니는 단짝 친구, 지수가 물었다.
“엄마는 왜?”
“시우 엄마 술집 여자야. 나와 같은 초등학교 나왔는데, 우리 동네에서는 걔 엄마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어.”
“뭐야. 완전 구질구질해.”
학교 축제가 막 끝난 후였다. 반 아이들은 모두 뒷정리를 하는데, 수혜와 지수만 빠져서 두 사람을 찾으러 나온 차였다.
학급 반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소각장 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쑥덕이는 목소리를 들으니 차마 나가서 학급 일을 도우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담벼락 뒤에 숨어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와 악의적인 말을 듣는 게 고작이었다.
사생아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게 언제였더라. 아마도 중학교 입학할 무렵인 거 같다.
동네에서 작은 슈퍼를 하는 이웃 아줌마가 밤늦은 시간에 집으로 뛰어 들어와, 대뜸 엄마의 머리채를 움켜잡으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사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화냥년이라고, 아비 없는 사생아를 낳고도 여전히 아랫도리 관리를 못 한다고.
아버지 없는 아이를 사생아라고 부른다면 시우는 사생아가 맞았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처음 듣는 낯선 단어가 직접 귀에 닿는 순간 귀가 먹먹해질 만큼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엄마는 술집 다니고 아빠는 없고. 딱 봐도 스토리가 나오잖아. 그런 주제에 학급 반장이라고 누구보고 이래라저래라 하는지. 볼 때마다 역겨워 죽겠어.”
“애들한테 확 불어 버릴까?”
“내색하지 않을 뿐, 아는 애는 이미 다 알아.”
한참이나 수군대던 두 사람이 무언가를 보았는지 단숨에 화제를 바꾸었다.
“……앗! 저기 봐. 박찬혁이다.”
소각장에서 보이는 운동장으로 몇 명의 남학생이 농구대를 향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농구공을 든 남학생 한 명이 찬혁에게 공을 던지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야외 농구대를 향해 달려갔다. 모델처럼 늘씬한 체구 때문인지, 소매를 말아 올린 하얀 셔츠 차림이 더없이 잘 어울렸다.
그들이 다니는 학교는 물론, 주변 학교에서도 박찬혁을 모르는 아이가 없었다. 남다르게 잘생긴 외모와 전교 1등에 운동까지 잘하니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리더로,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선망의 대상으로 통했다.
그의 아버지가 전체 학부모를 대표하는 학부모 회장을 할 만큼, 집안도 남부럽지 않은 부자라고 들었다.
사실 그런 찬혁이 너무도 먼 존재처럼 느껴져서, 말 한번 섞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학년 회장이라 교무실이나 회의에서 종종 마주치곤 했는데, 스치다가 가끔 눈이 마주치면 마치 가까운 사이처럼 환하게 웃어 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시우는 고개를 돌리며 그를 외면했다. 아이들을 몰고 다니는 그와 친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고 어떤 이유로든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 역시 질색이었기 때문이다.
사생아. 술집 여자. 아빠 없는 아이. 조금 전에 들었던 말 때문일까. 노란 은행잎이 이리저리 뒹구는 교정, 바람을 가르며 뛰어다니는 그의 눈부신 모습이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아! 심장이 쫄깃쫄깃해. 완전 내 스타일이야.”
찰칵찰칵, 사진 찍는 소리와 함께 지수의 감탄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정도면 네 스타일이 아니라, 만인의 스타일이거든?”
“미친년. 그걸 누가 몰라? 아니까, 이렇게 몰래 사진을 찍는 거지.”
내내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이 운동장이 잘 보이는 방향으로 사라졌다.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시우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담임 선생님이 시킨 일이 산더미였지만, 다리가 풀려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어서 교실로 돌아가서 축제 뒷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선생님이 주신 가정 통신문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내일은 정상 수업이라는 말도 전해야 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티도 안 나는 자리, 자신을 학급 반장으로 뽑아 준 아이들 역시 겉으론 웃으면서 속으로는 뒷말을 할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다음부터는 절대 학급 반장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이런 기분으로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자체가 고역이었다. 그저 아무도 없는 곳에 꼭꼭 숨고만 싶었다.
터벅터벅 걸어서 교실로 돌아오니, 가까운 친구인 서영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붙여 왔다.
“뭐 하다가 이제 와. 수혜와 지수는 못 찾았어?”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 그냥 돌아왔어.”
시우의 말에 서영이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하여튼, 힘든 일 할 때마다 늘 쏙 빠져나간다니까. 왜들 그러는지, 원.”
서영이 시우를 곁눈으로 살폈다.
“근데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근심 어린 얼굴에 서영의 진심이 묻어났다. 다른 아이들은 몰라도 학기 초부터 단짝 친구였던 서영만은 믿을 수 있었다.
“우리 집에 가는 길에 떡볶이 먹고 갈까? 내가 쏠게.”
“공붓벌레 이시우가 어쩐 일이야. 늘 학습실에만 처박혀 있더니.”
“축제 끝이잖아.”
아침에 눈뜰 때마다 늘 상상한다. 이대로 눈을 감고 영영 깨어나지 않는 상상. 그리고 먼지처럼 우주 어딘가를 떠도는 상상.
먼지가 된 자신은 아버지 없는 사생아도, 술집 출신 어머니를 둔 딸도 아니었다. 더없이 가볍고 자유롭고 충만했다.
그러나 상상이 현실을 이길 수는 없었다. 눈을 뜨면 어김없이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하고, 지옥 같은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아침에 눈뜬 순간만큼 싫은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하굣길이었다. 밤 11시 자습이 끝나면 교문 앞에는 자동차가 즐비하게 늘어선다. 피로에 지친 아이들을 기다리는 부모의 긴 행렬이지만, 그 많은 차 가운데 시우를 기다리는 차는 없었다.
자칫 늦어서 버스 막차를 놓치는 날에는 집까지 걸어가야 했으니, 다른 아이들처럼 하굣길이 마냥 좋을 리 없었다.
축제 날인 오늘만큼은 막차를 놓칠까, 가슴 두근대지 않고 서영과 오붓하게 떡볶이를 먹고 가도 된다. 소각장 근처에서 그런 말만 듣지 않았다면 꽤 즐겁게 오늘 하루를 보냈을 텐데.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뒷정리를 도와준 서영과 함께 교문을 나섰다. 학교 근처 분식점 문 앞에 막 도착했을 때,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문밖으로 흘러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좁은 분식점 안에는 남학생 너덧 명이 앉아서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활짝 웃고 있는 박찬혁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시우가 저도 모르게 눈길을 피했다. 우습게도 수혜와 지수가 수군대던 장면과 농구대를 향해 날아오르는 그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시우가 다니는 학교는 남녀 공학이지만, 남녀 반이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라 남학생들의 얼굴이 제법 눈에 익었지만, 수업을 함께 듣지 않는 탓에 어딘지 모르게 그들이 서먹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중학교를 남녀 공학으로 다닌 서영은 달랐다. 테이블에 앉은 남학생이 낯이 익은지, 서영이 그들을 향해 허물없이 말을 건넸다.
“너희는 아직도 집에 가지 않고 뭐 해?”
“남이사.”
왜소한 체격의 남학생 한 명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나 서영의 뒤에 선 시우를 보고 이내 굳은 표정을 풀며 옆 테이블을 턱으로 가리켰다.
“앉아서 시켜. 오늘은 이 오라버니가 쏠 테니까.”
“웬일. 짠돌이 김형우가.”
서영의 말에 남학생들이 쿡쿡대며 웃었다. 찬혁 역시 우스운지,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시우는 하루에 한 번도 웃을 일이 없는데, 그는 뭐가 즐거운지 항상 웃는 낯이었다.
“야. 좀 비켜 봐.”
서영이 찬혁을 옆으로 밀치며 그들이 앉은 테이블에 나란히 붙어 앉았다. 그리고 떡볶이와 어묵을 주문했다. 기다리는 동안 배가 고팠는지, 남학생 테이블에 놓인 만두를 집어다가 한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남은 만두의 반을 시우의 입에 갖다 댔다.
“시우야. 너도 먹어 봐.”
웃음기가 가득한 서영의 눈동자를 보니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남학생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시우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고개를 푹 숙이며 마지못해 만두를 씹고 있을 때, 시우와 대각선으로 앉은 찬혁이 시우 앞에 슬며시 만두 접시를 밀어 놓았다.
남자답지만 기다랗고 섬세한 손가락이 고개 숙인 시야로 들어오는 순간, 까닭도 없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는 태생적으로 반듯하고 예의 바른 성품인지, 교무실 문 앞이나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시우가 지나가도록 길을 비켜 주거나, 선생님이 전달하라는 통신문을 교실까지 가져다주곤 했다. 그뿐 아니었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시우를 도와준 적이 여러 차례였다.
찬혁이 자신에게 호감을 보인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지나치리만큼 완벽해 보이는 그가 늘 딴 세상 사람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그녀의 태생이나 가정 환경을 알면 아마 다른 아이들처럼 경멸의 눈초리로 대하지 않을까.
그런 상상만 해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저 먼발치에서 보던 현실감 없는 존재와 마주 앉아 있으니 어쩐지 자신이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떡볶이와 함께 따끈한 어묵이 나왔다. 배가 고팠는지, 헐레벌떡 떡볶이를 먹는 서영을 향해 형우가 물었다.
“우리야 지금껏 농구를 했지만, 너는 뭐 하다가 이제야 하교하는 거야?”
서영이 형우의 말은 무시하고 물을 연신 들이켜며 중얼댔다.
“아, 맵다 매워.”
“이게 말을 씹네.”
“어라, 꼬맹이 김형우 많이 컸다. 감히 누나 앞에서 개기고.”
서영이 때리는 시늉을 하자, 형우가 기다렸다는 듯 서영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이게 진짜. 동창이라고 봐줬더니, 자꾸 까불래?”
아무리 장난이라도 이런 분위기는 질색이다. 사소한 말다툼이 손찌검으로 변하고, 그 손찌검이 발길질로 이어진다는 것을 이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맞아서 눈가에 멍이 떠나지 않는 엄마, 순영의 얼굴이 떠오르자 입맛이 싹 가시며 속까지 울렁거렸다.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시우가 서영의 소매를 붙들며 애원하듯 말했다.
“그만해. 서영아.”
내내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던 남학생들이 시우의 굳은 얼굴을 보고 그제야 장난을 멈추었다. 뚫어질 듯 자신을 바라보는 찬혁의 시선이 의식되었다. 사소한 다툼에 안색까지 바꾸는 자신을 그는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와 자신은 사는 처지만큼이나 자라 온 환경이 다르니까.
“……서영아. 다 먹었으면 나가자. 응?”
서영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식점을 나와서 몇 걸음을 떼었을 때, 갑자기 분식점 문이 열리고 박찬혁이 나왔다. 큰 걸음으로 성큼 걸어온 그가 두 사람 앞에 섰다. 시우 역시 키가 작지는 않지만, 185cm가 훌쩍 넘는 찬혁과 마주 서 있으니 시야가 완전히 가려지는 기분이었다.
축제가 끝나고 한참 농구를 했는지, 그의 새하얀 셔츠에 군데군데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땀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지만, 어쩐지 그 땀 냄새마저 풋풋하고 건강하게 느껴졌다.
“조금 전 일은 내가 사과할게.”
찬혁의 말에 서영이 가볍게 웃었다.
“사과할 게 뭐 있어. 그냥 장난인데.”
서영의 말이 맞았다. 가벼운 장난인데, 자신으로 인해 분위기가 깨지고 말았다. 시우의 속사정을 유일하게 아는 서영이기에 말없이 따라 나왔을 뿐, 모르는 사람 같으면 과민 반응을 보이는 시우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을 테지. 하긴, 찬혁 역시 이상한 건 마찬가지다. 그가 사과할 일이 아닌데.
찬혁은 여전히 무언가가 마음에 걸리는지, 눈꺼풀을 길게 드리운 채 시우를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시우가 다투는 걸 유난히 싫어해. 가는 길에 기분 풀면 되니까, 너는 그만 들어가 봐.”
“바로 집으로 가는 거야?”
느닷없는 그의 물음에 서영이 대답 대신 그에게 대뜸 물었다.
“그건 왜 물어?”
“그냥 궁금해서.”
“궁금할 것도 많네.”
서영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찬혁과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호들갑을 떠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서영은 찬혁은 물론 다른 남학생에게도 늘 무덤덤한 태도를 보였다.
남자 형제 틈에서 자란 탓도 있지만, 타고난 성품이 워낙 느긋하고 어른스러워서 선생님들에게 애늙은이라는 소리를 듣곤 했었다.
“집에 가는 길이면, 집까지 데려다줄게.”
찬혁의 고집스러운 말에 서영이 시우를 곁눈으로 보았다.
“나는 집이 코앞이니까, 시우나 좀 데려다줘.”
갑작스러운 서영의 말에 시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영의 집이 이 근처인 건 맞지만, 말 한 번 섞어 보지 못한 찬혁과 집까지 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유흥가 뒷골목에 있는 초라한 집은 단짝인 서영조차 데려간 적이 없었다.
“나도 괜찮아. 버스 타면 금방이니까, 친구들에게 돌아가 봐.”
당황한 시우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러나 눈앞에 버티고 선 찬혁은 분식점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가자. 어차피 나도 버스를 타야 하니까.”
버스 정류장에 간다는데, 괜찮다고 거절하기도 우스웠다.
분식점을 지나 큰길을 향해 얼마를 걸어갔을 때, 서영이 먼저 간다며 좁은 골목길로 사라졌다. 그와 둘만 남게 되자, 어색한 침묵만 흐를 뿐 따로 할 말이 없었다.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해를 바라보며 찬혁과 나란히 걸었다. 가을의 끝자락,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심한 날씨였다.
해가 기울고 있는데 재킷도 없이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걷고 있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신경 쓰였다. ‘춥지도 않나.’라는 생각과 함께 그의 드러난 팔목에 자꾸 시선이 갔다. 결국, 참다못한 시우가 그에게 말했다.
“……춥지 않아? 재킷 입어.”
“아.”
찬혁이 짧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그제야 재킷을 걸쳐 입었다. 그 역시 침묵이 어색했던 모양이다. 시우가 대화의 물꼬를 트자, 기다렸다는 듯 말을 붙여 왔다.
“저기…… 원래 그래?”
분식점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묻는 건가. 밑도 끝도 없는 물음에 시우가 찬혁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뭐가?”
“눈동자 말이야. 서클 렌즈를 낀 거 같지는 않은데, 유난히 동공이 크고 홍채 빛깔이 진한 거 같아.”
친구들에게 자주 듣곤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외모에 관해 그다지 의식해 본 적이 없어서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시우가 대답이 없으니 그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기분 나쁜 건 아니지? 자세히 보니, 눈동자가 빨려 들어갈 듯이 예뻐서 나도 모르게 그만…….”
“사과할 거 없어. 기분 나쁜 말도 아닌데, 뭐.”
“……아. 다행이다.”
비록 찬혁과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지만, 잠깐의 대화만으로도 그가 꽤 솔직하고 직선적인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짧은 대화를 끝으로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보폭이 큰데도 그가 워낙 느긋하게 걸으니, 버스 정류장까지 거리가 평소보다 먼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를 더 걸었을까. 마침내 버스 정류장이 보이자, 긴장감이 풀리며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류장 부스에서 목을 뺀 상태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찬혁이 재킷 소매로 정류장 의자를 쓱쓱 문지르며 말했다.
“여기 앉아서 기다려.”
“괜찮아.”
시우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그런 시우를 묵묵히 응시하던 찬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입학하고 내내 말을 붙이고 싶었는데, 이제야 겨우 말을 붙여 보는구나.”
느닷없는 말에 시우가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찬혁이 어색한 표정으로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뭐, 그냥 그렇다고.”
그가 싱긋 웃었다. 저녁 하늘을 물들인 검붉은 해를 등지고 있는 날렵한 얼굴선과 가지런하고 새하얀 이가 꽤 인상적이었다.
지금껏 누군가를 이렇게 유심히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시우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 하나 감동적인 게 없을 뿐만 아니라, 그도 모자라서 삶 자체가 역겹고 더럽고 따분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한동안 왜 그럴까, 하고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 의문은 술 취한 엄마의 넋두리를 듣고 깨끗하게 해소되었다.
그녀의 엄마, 순영은 시우와 비슷한 나이일 때 남학생들에게 강제적으로 끌려가서 몹쓸 짓을 당했다고 했다. 두렵고 겁이 나서 할머니에게 숨기다가 시우를 낳았다고 하니, 결국 시우의 아버지는 파렴치한 강간범 중의 한 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났으니, 하는 생각마저 부정적일 수밖에.
단 하나 억울한 부분은 자신을 향한 세상의 편견이었다. 흔히 말하기를, 사랑으로 잉태한 생명은 인류의 소중한 가치라고 한다. 그럼 사랑이 아닌 폭력으로 잉태한 생명은 어찌 되는가.
누군들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피해자인 순영과 무방비하게 세상에 나온 자신이 세상의 손가락질까지 받아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시우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찬혁이 또다시 말을 붙여 왔다.
“……저기, 시우야.”
갑자기 나온 제 이름이 어색하여 그를 쳐다보자, 찬혁이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내 이름은 박찬혁이니까, 너도 찬혁이라고 불러 줘.”
가까운 친구도 아닌데 이름을 불러 달라는 말에 대답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는 정작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는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 축제도 그렇고 지난번 체육 대회도 그렇고. 늘 혼자 남아서 뒷정리를 하던데, 아이들이 함께 거들도록 유도하는 게 좋지 않을까?”
찬혁은 학년 회장, 시우는 학급 반장이니, 학교 행사 때마다 그녀가 어떻게 일하는지 관심 있게 지켜본 모양이다.
찬혁이야 따르는 친구가 많지만, 시우는 서영 외에는 특별히 의지할 만한 친구가 없었다. 꾀부리는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시켜 봤자, 괜한 뒷말만 나오니 혼자 일하는 게 마음 편했다.
“아이들과 쓸데없이 부딪치는 게 싫어. 혼자 하는 게 마음이 편하고.”
“그러면 너만 힘들잖아.”
누군가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사실이 더없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이번 학기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뭐.”
그는 여전히 할 말이 남은 듯 보였지만, 다행히 말을 잇지는 않았다.
잠시 후, 집으로 가는 버스가 정류장을 향해 달려왔다.
“먼저 갈게.”
시우가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막 출입문을 닫으려는 순간, 머뭇거리던 찬혁이 버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렇게 갑자기 튀어나와!”
버스 기사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찬혁이 고개를 몇 번이나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찬혁이 버스 기사에게 핀잔을 듣고 사과하는 모습이 어쩐지 지켜보기 언짢았다.
뒷자리까지 따라와서 시우와 나란히 앉은 그의 뺨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아무리 성격이 좋아도 여러 사람 앞에서 꾸중을 들으니, 그 역시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사탕 줄까?”
“반에서 1등이면 뭐 해. 시우 걔가 아버지 없는 사생아잖아. 게다가 엄마는 어떻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우와 반에서 1, 2등을 다투는 수혜였다. 수혜와 늘 붙어 다니는 단짝 친구, 지수가 물었다.
“엄마는 왜?”
“시우 엄마 술집 여자야. 나와 같은 초등학교 나왔는데, 우리 동네에서는 걔 엄마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어.”
“뭐야. 완전 구질구질해.”
학교 축제가 막 끝난 후였다. 반 아이들은 모두 뒷정리를 하는데, 수혜와 지수만 빠져서 두 사람을 찾으러 나온 차였다.
학급 반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소각장 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쑥덕이는 목소리를 들으니 차마 나가서 학급 일을 도우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담벼락 뒤에 숨어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와 악의적인 말을 듣는 게 고작이었다.
사생아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게 언제였더라. 아마도 중학교 입학할 무렵인 거 같다.
동네에서 작은 슈퍼를 하는 이웃 아줌마가 밤늦은 시간에 집으로 뛰어 들어와, 대뜸 엄마의 머리채를 움켜잡으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사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화냥년이라고, 아비 없는 사생아를 낳고도 여전히 아랫도리 관리를 못 한다고.
아버지 없는 아이를 사생아라고 부른다면 시우는 사생아가 맞았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처음 듣는 낯선 단어가 직접 귀에 닿는 순간 귀가 먹먹해질 만큼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엄마는 술집 다니고 아빠는 없고. 딱 봐도 스토리가 나오잖아. 그런 주제에 학급 반장이라고 누구보고 이래라저래라 하는지. 볼 때마다 역겨워 죽겠어.”
“애들한테 확 불어 버릴까?”
“내색하지 않을 뿐, 아는 애는 이미 다 알아.”
한참이나 수군대던 두 사람이 무언가를 보았는지 단숨에 화제를 바꾸었다.
“……앗! 저기 봐. 박찬혁이다.”
소각장에서 보이는 운동장으로 몇 명의 남학생이 농구대를 향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농구공을 든 남학생 한 명이 찬혁에게 공을 던지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야외 농구대를 향해 달려갔다. 모델처럼 늘씬한 체구 때문인지, 소매를 말아 올린 하얀 셔츠 차림이 더없이 잘 어울렸다.
그들이 다니는 학교는 물론, 주변 학교에서도 박찬혁을 모르는 아이가 없었다. 남다르게 잘생긴 외모와 전교 1등에 운동까지 잘하니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리더로,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선망의 대상으로 통했다.
그의 아버지가 전체 학부모를 대표하는 학부모 회장을 할 만큼, 집안도 남부럽지 않은 부자라고 들었다.
사실 그런 찬혁이 너무도 먼 존재처럼 느껴져서, 말 한번 섞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학년 회장이라 교무실이나 회의에서 종종 마주치곤 했는데, 스치다가 가끔 눈이 마주치면 마치 가까운 사이처럼 환하게 웃어 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시우는 고개를 돌리며 그를 외면했다. 아이들을 몰고 다니는 그와 친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고 어떤 이유로든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 역시 질색이었기 때문이다.
사생아. 술집 여자. 아빠 없는 아이. 조금 전에 들었던 말 때문일까. 노란 은행잎이 이리저리 뒹구는 교정, 바람을 가르며 뛰어다니는 그의 눈부신 모습이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아! 심장이 쫄깃쫄깃해. 완전 내 스타일이야.”
찰칵찰칵, 사진 찍는 소리와 함께 지수의 감탄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정도면 네 스타일이 아니라, 만인의 스타일이거든?”
“미친년. 그걸 누가 몰라? 아니까, 이렇게 몰래 사진을 찍는 거지.”
내내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이 운동장이 잘 보이는 방향으로 사라졌다.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시우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담임 선생님이 시킨 일이 산더미였지만, 다리가 풀려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어서 교실로 돌아가서 축제 뒷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선생님이 주신 가정 통신문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내일은 정상 수업이라는 말도 전해야 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티도 안 나는 자리, 자신을 학급 반장으로 뽑아 준 아이들 역시 겉으론 웃으면서 속으로는 뒷말을 할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다음부터는 절대 학급 반장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이런 기분으로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자체가 고역이었다. 그저 아무도 없는 곳에 꼭꼭 숨고만 싶었다.
터벅터벅 걸어서 교실로 돌아오니, 가까운 친구인 서영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붙여 왔다.
“뭐 하다가 이제 와. 수혜와 지수는 못 찾았어?”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 그냥 돌아왔어.”
시우의 말에 서영이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하여튼, 힘든 일 할 때마다 늘 쏙 빠져나간다니까. 왜들 그러는지, 원.”
서영이 시우를 곁눈으로 살폈다.
“근데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근심 어린 얼굴에 서영의 진심이 묻어났다. 다른 아이들은 몰라도 학기 초부터 단짝 친구였던 서영만은 믿을 수 있었다.
“우리 집에 가는 길에 떡볶이 먹고 갈까? 내가 쏠게.”
“공붓벌레 이시우가 어쩐 일이야. 늘 학습실에만 처박혀 있더니.”
“축제 끝이잖아.”
아침에 눈뜰 때마다 늘 상상한다. 이대로 눈을 감고 영영 깨어나지 않는 상상. 그리고 먼지처럼 우주 어딘가를 떠도는 상상.
먼지가 된 자신은 아버지 없는 사생아도, 술집 출신 어머니를 둔 딸도 아니었다. 더없이 가볍고 자유롭고 충만했다.
그러나 상상이 현실을 이길 수는 없었다. 눈을 뜨면 어김없이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하고, 지옥 같은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아침에 눈뜬 순간만큼 싫은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하굣길이었다. 밤 11시 자습이 끝나면 교문 앞에는 자동차가 즐비하게 늘어선다. 피로에 지친 아이들을 기다리는 부모의 긴 행렬이지만, 그 많은 차 가운데 시우를 기다리는 차는 없었다.
자칫 늦어서 버스 막차를 놓치는 날에는 집까지 걸어가야 했으니, 다른 아이들처럼 하굣길이 마냥 좋을 리 없었다.
축제 날인 오늘만큼은 막차를 놓칠까, 가슴 두근대지 않고 서영과 오붓하게 떡볶이를 먹고 가도 된다. 소각장 근처에서 그런 말만 듣지 않았다면 꽤 즐겁게 오늘 하루를 보냈을 텐데.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뒷정리를 도와준 서영과 함께 교문을 나섰다. 학교 근처 분식점 문 앞에 막 도착했을 때,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문밖으로 흘러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좁은 분식점 안에는 남학생 너덧 명이 앉아서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활짝 웃고 있는 박찬혁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시우가 저도 모르게 눈길을 피했다. 우습게도 수혜와 지수가 수군대던 장면과 농구대를 향해 날아오르는 그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시우가 다니는 학교는 남녀 공학이지만, 남녀 반이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라 남학생들의 얼굴이 제법 눈에 익었지만, 수업을 함께 듣지 않는 탓에 어딘지 모르게 그들이 서먹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중학교를 남녀 공학으로 다닌 서영은 달랐다. 테이블에 앉은 남학생이 낯이 익은지, 서영이 그들을 향해 허물없이 말을 건넸다.
“너희는 아직도 집에 가지 않고 뭐 해?”
“남이사.”
왜소한 체격의 남학생 한 명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나 서영의 뒤에 선 시우를 보고 이내 굳은 표정을 풀며 옆 테이블을 턱으로 가리켰다.
“앉아서 시켜. 오늘은 이 오라버니가 쏠 테니까.”
“웬일. 짠돌이 김형우가.”
서영의 말에 남학생들이 쿡쿡대며 웃었다. 찬혁 역시 우스운지,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시우는 하루에 한 번도 웃을 일이 없는데, 그는 뭐가 즐거운지 항상 웃는 낯이었다.
“야. 좀 비켜 봐.”
서영이 찬혁을 옆으로 밀치며 그들이 앉은 테이블에 나란히 붙어 앉았다. 그리고 떡볶이와 어묵을 주문했다. 기다리는 동안 배가 고팠는지, 남학생 테이블에 놓인 만두를 집어다가 한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남은 만두의 반을 시우의 입에 갖다 댔다.
“시우야. 너도 먹어 봐.”
웃음기가 가득한 서영의 눈동자를 보니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남학생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시우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고개를 푹 숙이며 마지못해 만두를 씹고 있을 때, 시우와 대각선으로 앉은 찬혁이 시우 앞에 슬며시 만두 접시를 밀어 놓았다.
남자답지만 기다랗고 섬세한 손가락이 고개 숙인 시야로 들어오는 순간, 까닭도 없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는 태생적으로 반듯하고 예의 바른 성품인지, 교무실 문 앞이나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시우가 지나가도록 길을 비켜 주거나, 선생님이 전달하라는 통신문을 교실까지 가져다주곤 했다. 그뿐 아니었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시우를 도와준 적이 여러 차례였다.
찬혁이 자신에게 호감을 보인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지나치리만큼 완벽해 보이는 그가 늘 딴 세상 사람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그녀의 태생이나 가정 환경을 알면 아마 다른 아이들처럼 경멸의 눈초리로 대하지 않을까.
그런 상상만 해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저 먼발치에서 보던 현실감 없는 존재와 마주 앉아 있으니 어쩐지 자신이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떡볶이와 함께 따끈한 어묵이 나왔다. 배가 고팠는지, 헐레벌떡 떡볶이를 먹는 서영을 향해 형우가 물었다.
“우리야 지금껏 농구를 했지만, 너는 뭐 하다가 이제야 하교하는 거야?”
서영이 형우의 말은 무시하고 물을 연신 들이켜며 중얼댔다.
“아, 맵다 매워.”
“이게 말을 씹네.”
“어라, 꼬맹이 김형우 많이 컸다. 감히 누나 앞에서 개기고.”
서영이 때리는 시늉을 하자, 형우가 기다렸다는 듯 서영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이게 진짜. 동창이라고 봐줬더니, 자꾸 까불래?”
아무리 장난이라도 이런 분위기는 질색이다. 사소한 말다툼이 손찌검으로 변하고, 그 손찌검이 발길질로 이어진다는 것을 이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맞아서 눈가에 멍이 떠나지 않는 엄마, 순영의 얼굴이 떠오르자 입맛이 싹 가시며 속까지 울렁거렸다.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시우가 서영의 소매를 붙들며 애원하듯 말했다.
“그만해. 서영아.”
내내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던 남학생들이 시우의 굳은 얼굴을 보고 그제야 장난을 멈추었다. 뚫어질 듯 자신을 바라보는 찬혁의 시선이 의식되었다. 사소한 다툼에 안색까지 바꾸는 자신을 그는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와 자신은 사는 처지만큼이나 자라 온 환경이 다르니까.
“……서영아. 다 먹었으면 나가자. 응?”
서영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식점을 나와서 몇 걸음을 떼었을 때, 갑자기 분식점 문이 열리고 박찬혁이 나왔다. 큰 걸음으로 성큼 걸어온 그가 두 사람 앞에 섰다. 시우 역시 키가 작지는 않지만, 185cm가 훌쩍 넘는 찬혁과 마주 서 있으니 시야가 완전히 가려지는 기분이었다.
축제가 끝나고 한참 농구를 했는지, 그의 새하얀 셔츠에 군데군데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땀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지만, 어쩐지 그 땀 냄새마저 풋풋하고 건강하게 느껴졌다.
“조금 전 일은 내가 사과할게.”
찬혁의 말에 서영이 가볍게 웃었다.
“사과할 게 뭐 있어. 그냥 장난인데.”
서영의 말이 맞았다. 가벼운 장난인데, 자신으로 인해 분위기가 깨지고 말았다. 시우의 속사정을 유일하게 아는 서영이기에 말없이 따라 나왔을 뿐, 모르는 사람 같으면 과민 반응을 보이는 시우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을 테지. 하긴, 찬혁 역시 이상한 건 마찬가지다. 그가 사과할 일이 아닌데.
찬혁은 여전히 무언가가 마음에 걸리는지, 눈꺼풀을 길게 드리운 채 시우를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시우가 다투는 걸 유난히 싫어해. 가는 길에 기분 풀면 되니까, 너는 그만 들어가 봐.”
“바로 집으로 가는 거야?”
느닷없는 그의 물음에 서영이 대답 대신 그에게 대뜸 물었다.
“그건 왜 물어?”
“그냥 궁금해서.”
“궁금할 것도 많네.”
서영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찬혁과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호들갑을 떠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서영은 찬혁은 물론 다른 남학생에게도 늘 무덤덤한 태도를 보였다.
남자 형제 틈에서 자란 탓도 있지만, 타고난 성품이 워낙 느긋하고 어른스러워서 선생님들에게 애늙은이라는 소리를 듣곤 했었다.
“집에 가는 길이면, 집까지 데려다줄게.”
찬혁의 고집스러운 말에 서영이 시우를 곁눈으로 보았다.
“나는 집이 코앞이니까, 시우나 좀 데려다줘.”
갑작스러운 서영의 말에 시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영의 집이 이 근처인 건 맞지만, 말 한 번 섞어 보지 못한 찬혁과 집까지 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유흥가 뒷골목에 있는 초라한 집은 단짝인 서영조차 데려간 적이 없었다.
“나도 괜찮아. 버스 타면 금방이니까, 친구들에게 돌아가 봐.”
당황한 시우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러나 눈앞에 버티고 선 찬혁은 분식점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가자. 어차피 나도 버스를 타야 하니까.”
버스 정류장에 간다는데, 괜찮다고 거절하기도 우스웠다.
분식점을 지나 큰길을 향해 얼마를 걸어갔을 때, 서영이 먼저 간다며 좁은 골목길로 사라졌다. 그와 둘만 남게 되자, 어색한 침묵만 흐를 뿐 따로 할 말이 없었다.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해를 바라보며 찬혁과 나란히 걸었다. 가을의 끝자락,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심한 날씨였다.
해가 기울고 있는데 재킷도 없이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걷고 있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신경 쓰였다. ‘춥지도 않나.’라는 생각과 함께 그의 드러난 팔목에 자꾸 시선이 갔다. 결국, 참다못한 시우가 그에게 말했다.
“……춥지 않아? 재킷 입어.”
“아.”
찬혁이 짧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그제야 재킷을 걸쳐 입었다. 그 역시 침묵이 어색했던 모양이다. 시우가 대화의 물꼬를 트자, 기다렸다는 듯 말을 붙여 왔다.
“저기…… 원래 그래?”
분식점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묻는 건가. 밑도 끝도 없는 물음에 시우가 찬혁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뭐가?”
“눈동자 말이야. 서클 렌즈를 낀 거 같지는 않은데, 유난히 동공이 크고 홍채 빛깔이 진한 거 같아.”
친구들에게 자주 듣곤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외모에 관해 그다지 의식해 본 적이 없어서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시우가 대답이 없으니 그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기분 나쁜 건 아니지? 자세히 보니, 눈동자가 빨려 들어갈 듯이 예뻐서 나도 모르게 그만…….”
“사과할 거 없어. 기분 나쁜 말도 아닌데, 뭐.”
“……아. 다행이다.”
비록 찬혁과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지만, 잠깐의 대화만으로도 그가 꽤 솔직하고 직선적인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짧은 대화를 끝으로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보폭이 큰데도 그가 워낙 느긋하게 걸으니, 버스 정류장까지 거리가 평소보다 먼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를 더 걸었을까. 마침내 버스 정류장이 보이자, 긴장감이 풀리며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류장 부스에서 목을 뺀 상태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찬혁이 재킷 소매로 정류장 의자를 쓱쓱 문지르며 말했다.
“여기 앉아서 기다려.”
“괜찮아.”
시우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그런 시우를 묵묵히 응시하던 찬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입학하고 내내 말을 붙이고 싶었는데, 이제야 겨우 말을 붙여 보는구나.”
느닷없는 말에 시우가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찬혁이 어색한 표정으로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뭐, 그냥 그렇다고.”
그가 싱긋 웃었다. 저녁 하늘을 물들인 검붉은 해를 등지고 있는 날렵한 얼굴선과 가지런하고 새하얀 이가 꽤 인상적이었다.
지금껏 누군가를 이렇게 유심히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시우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 하나 감동적인 게 없을 뿐만 아니라, 그도 모자라서 삶 자체가 역겹고 더럽고 따분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한동안 왜 그럴까, 하고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 의문은 술 취한 엄마의 넋두리를 듣고 깨끗하게 해소되었다.
그녀의 엄마, 순영은 시우와 비슷한 나이일 때 남학생들에게 강제적으로 끌려가서 몹쓸 짓을 당했다고 했다. 두렵고 겁이 나서 할머니에게 숨기다가 시우를 낳았다고 하니, 결국 시우의 아버지는 파렴치한 강간범 중의 한 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났으니, 하는 생각마저 부정적일 수밖에.
단 하나 억울한 부분은 자신을 향한 세상의 편견이었다. 흔히 말하기를, 사랑으로 잉태한 생명은 인류의 소중한 가치라고 한다. 그럼 사랑이 아닌 폭력으로 잉태한 생명은 어찌 되는가.
누군들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피해자인 순영과 무방비하게 세상에 나온 자신이 세상의 손가락질까지 받아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시우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찬혁이 또다시 말을 붙여 왔다.
“……저기, 시우야.”
갑자기 나온 제 이름이 어색하여 그를 쳐다보자, 찬혁이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내 이름은 박찬혁이니까, 너도 찬혁이라고 불러 줘.”
가까운 친구도 아닌데 이름을 불러 달라는 말에 대답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는 정작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는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 축제도 그렇고 지난번 체육 대회도 그렇고. 늘 혼자 남아서 뒷정리를 하던데, 아이들이 함께 거들도록 유도하는 게 좋지 않을까?”
찬혁은 학년 회장, 시우는 학급 반장이니, 학교 행사 때마다 그녀가 어떻게 일하는지 관심 있게 지켜본 모양이다.
찬혁이야 따르는 친구가 많지만, 시우는 서영 외에는 특별히 의지할 만한 친구가 없었다. 꾀부리는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시켜 봤자, 괜한 뒷말만 나오니 혼자 일하는 게 마음 편했다.
“아이들과 쓸데없이 부딪치는 게 싫어. 혼자 하는 게 마음이 편하고.”
“그러면 너만 힘들잖아.”
누군가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사실이 더없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이번 학기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뭐.”
그는 여전히 할 말이 남은 듯 보였지만, 다행히 말을 잇지는 않았다.
잠시 후, 집으로 가는 버스가 정류장을 향해 달려왔다.
“먼저 갈게.”
시우가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막 출입문을 닫으려는 순간, 머뭇거리던 찬혁이 버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렇게 갑자기 튀어나와!”
버스 기사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찬혁이 고개를 몇 번이나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찬혁이 버스 기사에게 핀잔을 듣고 사과하는 모습이 어쩐지 지켜보기 언짢았다.
뒷자리까지 따라와서 시우와 나란히 앉은 그의 뺨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아무리 성격이 좋아도 여러 사람 앞에서 꾸중을 들으니, 그 역시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사탕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