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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우와 스타일리스트의 사이





“나랑 결혼하지 않을래?”

“아니요.”

그러니까 이건 아주 심각한 이야기다. 지금까지 쌓아 온, 아니, 앞으로 쌓아 갈 나의 커리어에 무척이나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는 화제란 거다.

“나랑 결혼할래?”

“아니요.”

“참나 어이가 없네. 네가 뭔데.”

만약 ‘적반하장’의 표본을 찾는 실없는 이가 있다면 난 당당히 말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 내 눈앞에 있노라고. 지금 화내야 할 사람이 누군데, 화를 내.

“나랑 결혼하자.”

“싫어요.”

“생각 좀 하고 대답해.”

“생각 좀 하고 질문해요.”

그러니까 이건 아주 심각한 이야기다. 나의 찬란한, 아니 찬란할 미래에 무척이나 중대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는 화제란 거다.



* * *



“집에 들어갔다가 가.”

“아, 왜요. 짐 많은 거 안 보여요? 얼른 회사 들어가서 이거 다 반납하고, 다음 의상 협찬도 받아야 해요.”

“일 얘기 할 거 있으니까 들어오라고.”

“그냥 여기서 해요.”

“요즘 왜 이렇게 삐딱하지?”

“몰라서 물어요?”

재욱의 뻔뻔한 말에 재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재욱은 조금의 타격도 없이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정말이지 양심이란 건 어디다 따로 보관해 두고 다니는 건지 묻고 싶은 바이다.

“저기…… 내릴 거면 내리고, 문 닫을 거면 닫아 주겠어요? 제가 오늘 여자 친구랑 4주년이라고 두 사람한테 500번도 더 말한 거 같은데.”

그때, 두 사람 사이에서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던 매니저 윤수가 끼어들었다. 이 망할 인간들아. 오늘까지 바람맞히면 나 차일지도 모른다고 신신당부를 했지. 언제까지 당신들 싸움에 내가 등이 터져야 하는 거냐고. 이런 새우젓 같은…….

“아, 미안해. 윤수야.”

그제야 윤수의 험악한 얼굴을 살핀 재영이 바로 사과를 했다. 가뜩이나 지은 죄가 많아 미안했는데, 여자 친구한테 차이게 할 수는 없지. 윤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5초 안에 결정해. 여기서 내릴 건지, 아니면 너희 사무실로 갈 건지. 사무실까지는 기꺼이 태워다 줄 수 있어.”

‘그럼 우리 사무실로.’라고 다급하게 말하려던 찰나 재욱이 재영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집어넣고 그녀를 안아 올렸다. 재영은 단숨에 차에서 내려 땅에 발을 디디고 서 있었다. 재영이 당황해 하는 사이 재욱은 고민도 없이 차 문을 닫았다.

“재영이 여기서 내릴 거야. 데이트 잘해.”

“형. 재영이 괴롭히지 마요.”

“내가 언제 재영이를 괴롭혔다고 그래. 얼른 가! 붙잡기 전에.”

재욱의 섬뜩한 말에 윤수는 잽싸게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고는 재영에게는 닿지도 않을 사죄의 말을 건넸다. 미안하네, 친구. 네가 무척이나 소중한 친구라는 건 변함이 없지만 여자 친구랑 헤어지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너를 도울 순 없는 일이지 않겠니. 그리고, 형이 좀 이기적이긴 해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니 괜찮을 거야.

“굉장히 폭력적인 행동이에요, 그거.”

“그럼 집에 돌아가는 길에 신고하시고, 일단은 들어와.”

윤수가 대책 없는 긍정을 내뿜고 있던 순간, 재욱과 재영은 여전히 실랑이 중이었다.

두 사람이 싸울 때마다 윤수는 말했다. “거, 이름도 비슷한 사람들끼리 좀 잘 지내지, 왜 그리 허구한 날 싸워 대는 거야.” 그럴 때마다 재영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우리 둘은 이름만 비슷할 뿐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사람들 몰려든다.”

“…….”

“결혼하기도 전에 사진 찍혀서 스캔들부터 나고 싶어?”

“저 오빠랑 결혼 안 할 거라니까요!”

그러면서도 재영은 순순히 재욱을 따라 그의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재욱 정도의 배우라면 주위에 파파라치들이 가득할 테다. 물론, 스타일리스트라는 신분을 밝히면 되지만 그래도 일이 복잡해지는 건 딱 질색이었다.

“뭐 마실래?”

재영을 소파로 안내하며 재욱이 물었다. 집을 관리해 주시는 분이 다녀가신 지 얼마 안 됐는지 내부는 무척이나 깔끔했다.

“아뇨. 할 말만 얼른 하세요.”

“급하기는. 나 커피 마실 건데, 너도 마셔라.”

내 대답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면 애초에 묻지 말아 줬으면 해.

“아, 너 커피 못 마시지. 우유라도 줄게.”

“…….”

“하여튼, 애기라니까.”

“징그럽게 무슨 망발이에요, 그게.”

소심해 보였던 첫인상과 달리 꽤 솔직한 편인 재영의 말에, 재욱은 오늘도 웃음이 터졌다. 나중에 친해져 보니 재영은 단순히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일 뿐이었다. 편한 사람들에게는 싫은 건 싫다고 말할 줄 아는 당찬 아이였다.

“가만 보면 웃음이 참 헤퍼.”

“네 앞에서만 자주 웃는 거야.”

재욱이 눈을 찡긋하며 재영의 앞에 데운 우유를 내려놓았다. 솔직히 말한다. 여자가 아닌 남자를 좋아하는 이성애자로서 저 잘생긴 얼굴과 저 은근한 매너와 저 나른한 시선에 설레는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솔직히 제 앞의 이 남자에게 반하지 않을 여자, 별로 없을 것이다.

“뜨거우니까 후후 불어서 먹어.”

남몰래 비밀스러운 감정을 키운 적도 있었다. 그의 연인이 되고, 그의 부인이 되는 상상을 해 보지 않았다면 그것도 거짓말일 것이다.

“이혼할 때 위자료 많이 줄게. 귀책 배우자는 나로 하고.”

그랬던 재영이 재욱의 끈질긴 프러포즈에도 기뻐할 수 없는 건 그가 지금 애정이 배제된 결혼을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해진 시간만큼만 살고, 헤어지자. 깔끔하게. 이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나랑 이혼해도 우리 소속사 배우들 맡을 수 있게, 내가…….”

“단지 게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들키기 싫어서요?”

“…….”

“그래서 이렇게 필사적인 거예요?”

과거의 짧은 짝사랑을 끝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스스로 말하자니 재영은 속이 쓰라려 왔다. 그렇다. 그는 동성애자였다. 그러니까 자신과 같은 성의 남자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당연히 그와 다른 성의 재영은 짝사랑을 비참하게 끝내야만 했다.

“위자료는 부족하지 않게…….”

“위자료 얘기 그만해요. 부모님이 남기고 간 빚 같은 것도 없고요. 나도 내가 버는 만큼 쓰는 데에 만족해요. 뻔뻔한 제안을 할 거면 적어도 제대로 된 설명은 해 줘야죠. 너무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를 오빠 아랫사람쯤으로 보는 건 알겠는데…….”

“나, 너 아랫사람으로 생각한 적 없어.”

그런데, 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피하는 거야. 내가 조금 더 어려운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무성의하지는 않았을 거잖아. 혹시 당신 애인한테 피해가 갈까 봐 그런 거야?

“남정원 씨한테도 이런 식으로 대해요?”

“뭐?”

소문으로만 떠돌던 재욱의 게이설이 공론화가 된 건 같은 소속사 아이돌 정원과 게이바에서 함께 나오는 사진이 찍힌 후였다. 정원은 취해 있었고, 재욱은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사실 같은 소속사 사람들끼리 술을 마시는 것 자체는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소의 특수성과 또, 이전부터 떠돌던 재욱에 대한 풍문이 더해져 그것은 굉장히 이상한 일이 되어 버렸다.

“오빠도 초조한 거 알아요.”

이제 남은 건 언론이 언제 터뜨리나였다. 요즘 연예계는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았다. 대한민국의 톱 배우가 아웃팅을 당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위기감이 퍼지고 있었으니까. 재욱의 소속사는 재욱의 이미지에 타격을 최소한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그리고 그 결론이 ‘결혼’이라는 초강수였다. 이성과의 단순한 스캔들이 아닌 무려 결혼 말이다. 결혼만이 게이설을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성소수자보다는 유부남이 낫다고 판단한 거지. 이것이 바로 재욱이 재영에게 끈질기게 매달리는 이유였다.

“하지만 저에 대한 배려는 하나도 하지 않고 있잖아요.”

“누군가와 꼭 결혼을 해야 한다면 다른 여자가 아니라 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다른 이유는 없었어. 정말이야. 너에게 상처 줄 마음은 없었어. 미안해.”

“저, 갈래요.”

“데려다줄게.”

“싫어요. 혼자 생각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리고 오빠가 데려다주면, 나 우리 회사 사람들한테 더 미움받아요.”



* * *



“스케줄 아까 전에 끝났다면서 왜 보고도 안 하고, 이제야 돌아와?”

다행히도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기 전, 윤수가 재영의 짐은 사무실에 가져다주고 간 모양이다. 멍하니 사무실로 쓰이는 오피스텔에 들어서던 재영이 뒤늦게 문자로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하고 박 터지는 소리를 내자 실장인 서진이 팔짱을 끼며 비아냥댔다.

“아? 아? 너 지금 아, 라는 소리가 나와? 오빠가 예뻐해 주니까 아주 기고만장하지? 그럴 바엔 그냥 네가 실장 해. 오빠더러 독립시켜 달라고 하라고.”

“죄송해요. 정신이 없었어요.”

“오빠한테 살랑거릴 시간에 네 할 일이나 해.”

이제 이런 의도적인 악담엔 적응될 때도 됐는데, 여전히 재영은 큰 상처를 받았다.

처음부터 회사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건 아니다. 먼저 들어온 선배들과 늦게 들어온 후배들 사이를 잘 조율하며 모두에게 예쁨을 받던 시절도 있었다.

서진도 재영을 자신의 스케줄에 데리고 다니며 일을 가르쳐 주려고 애썼다. 그때의 재영은 지금 이 회사 사람들과 일할 수 있는 것을 아주 큰 행운이라고 여겼었다.

“저 오빠한테 살랑거린 적 없는데요.”

“뭐? 이제 말대꾸까지 하네?”

“아니, 자꾸 없는 말 지어내시길래 말씀드리는 거예요.”

사이가 묘해지기 시작한 건 재욱이 자신을 전담할 스타일리스트로 재영을 지목했을 때부터였다.

원래 실장 정도의 급이 되면 현장엔 잘 나가지 않는 편이지만 서진은 재욱의 촬영장만큼은 꼭 자신이 나가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 최고 배우의 스태프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당시의 재영은 한 신인 가수를 전담하고 있었다. 그러다 외국 출장 중이던 서진의 부탁으로 재욱의 촬영장을 대신 나갔던 날이 있었다. 처음으로 어시가 아닌 메인으로서 재욱과 일을 했는데, 그와 꽤 호흡이 잘 맞는다는 생각을 했다.

“너 오빠한테 꼬리 치고 다닌다는 거 이 바닥에 모르는 사람 없어.”

“꼬리 치긴 개뿔. 내가 강아지도 아니고.”

재욱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 이후부터 자신의 전담 스타일리스트를 재영이 맡아 줬으면 좋겠다고 회사에 요구했다. 회사의 수입의 90%가량이 재욱에게서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서진은 그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후배에게 자신의 배우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그녀는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고 그 후부터 재영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야, 너 말 다 했어?”

“저 이틀 동안 밤 샜거든요? 딱히 할 말 없으시면 이만 가 볼게요.”

“협찬사에 옷 다 반납하고 가.”

“내일 와서 할게요. 근데요. 다른 언니들은 현장 나가는 대신 반납 업무는 제외해 주시면서, 저는 왜 현장에 나가고도 반납까지 다 해야 해요?”

재욱과의 일로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았던 터라 재영은 평소보다 감정을 추스를 수 없었다. 곧 서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재영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나, 왠지 곧 잘릴 것 같다. 연초부터 이게 뭐람. 한숨을 쉬자 새어 나오는 하얀 입김을 보며 재영은 지친 발걸음을 터덜터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