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 비와 당신





― 너 은근 책임감 없다? 나한테 화났다고 촬영장까지 안 나와?

뭐라는 거야, 이 양반은. 무거운 가방을 들며 낑낑대고 있던 재영은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그게 아니라요. 어제 누구 덕분에 의상 반납을 못 하고 가서, 페널티를 받은 거라니까요.”

― 내가 지금 너랑 일하려고 너희 회사에 주고 있는 돈이 얼만데, 고작 의상 반납을 못 했다는 이유로 촬영장에 다른 사람을 보냈다고?

“끊어 주세요. 협찬사 돌려면 바빠요.”

― 내가 너희 실장한테 대신 전화할게.

“아니요. 하지 마세요. 저 이미 충분히 곤란하거든요?”

― 나 때문에?

“…….”

그 와중에 가방의 줄이 떨어져 옷들이 우르르 바닥으로 쏟아졌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재영이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재욱의 의상뿐 아니라 온갖 연예인들의 의상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어찌나 무거웠던지 어깨엔 시퍼런 멍이 들었을 것이다. 추워도 추운지 모를 만큼 재영은 지쳐 있었다.

― 그러니까 내가 독립시켜 준다고 했잖아.

“…….”

― 재영아. 너 없으니까 허전해.

그런 말에, 속지 않을 거야. 더 이상 헷갈리지 않을 거야.

“저보다 말대꾸도 안 하고, 고분고분할 거 아니에요. 적응하면 훨씬 나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만 끊어요.”

재욱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재영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자신의 몇 년 치 월급보다 비싼 옷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이 직업을 가진 것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왔다. 구박받는 신데렐라나 되려고 시작한 일이 아닌데.

“아…….”

하지만 안타깝게도 재영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애꿎은 겨울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재영은 온몸으로 옷들을 비로부터 막아섰다.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졌다. 뭐 하는 거야, 도재영. 너도 엄마에겐 귀한 딸이었다고. 얼굴에 흐르는 게 눈물인지 비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재영은 덩그러니 서 있었다.



* * *



“왜 이제 들어와? 저 옷들 다 세탁소에 맡기고 와.”

흠뻑 젖어 돌아온 재영을 보면서 그 누구도 수건을 건네거나 괜찮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재영은 물이 뚝뚝 흐르는 제 머리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지금 제 꼴 안 보이세요?”

“협찬받은 옷은 안 젖게 잘 가져다줬지?”

“진짜 너무하네요.”

“내가? 뭘?”

서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그 공간에 있던 재영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재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네가 자초한 거야. 담당 연예인이 잘나가면 자기도 톱이라고 생각하는 애들이 꼭 있다니까? 회사 입장에서 그런 애들을 눌러 줘야지, 나머지 사람들이 편하게 일하는 거 아니겠어?”

“…….”

“그리고 오늘 오빠한테서 별 연락 없는 거로 봐서는 이제 전담 바뀌어도 상관없나 봐. 그래서 앞으로는 로테이션으로 돌리려고 해. 너한테만 그런 특권을 줄 순 없잖아?”

“예, 그러세요. 아니, 그냥 전 모재욱 스케줄에서 완전히 제외시켜 주셔도 돼요.”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말투에 오히려 놀란 것은 서진과 팀원들이었다. 재영은 피곤했다. 차라리 모두가 꺼려 하는 연예인을 맡아서 마음 편하게 일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재영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세탁소에 맡길 옷들을 집어 들었다.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재영은 우산도 챙기지 않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재영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만둘까. 하지만 이미 윤 실장이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다 퍼뜨려 놓은 마당에 여기가 아니면 날 받아 줄 데가 있긴 할까.

먹구름만큼이나 미래가 깜깜했다. 고민의 방향이 이동했다. 만약 스타일리스트를 그만둔다면 뭘 하면서 먹고살아야 하지. 이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말이다.

요긴한 자격증도 없고, 내세울 만한 다른 경력도 없다. 나이는 벌써 스물여섯 살이다. 이제 와서 뭘 시작할 수 있을까.

어쩌면 재욱의 마음에 든 게 저에게는 불행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재욱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회사 사람들과 그럭저럭 잘 지내며 재욱급은 못 되더라도 꽤 이름 있는 연예인의 전담을 맡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재욱이 얼마나 제게 호의적이었는지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그리고 재영은 끝없는 우울에 빠져들었다.



* * *



“어, 윤수야.”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뻗었던 재영은 밤늦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이 시간에 웬일이지. 윤수는 현장에서 만난 몇 안 되는 동갑이자 마음이 맞는 친구였다.

― 넌 죽었냐, 살았냐. 왜 이렇게 연락이 없어.

“미안해. 바빴어.”

― 우리한테서 도망치니까 좋냐?

“그래. 좋다.”

― 매정한 여자. 난 별로 안 좋아. 새로 온 애가 너만큼 착하지는 않은 거 같거든.

“아, 유지? 유지 착한 애야. 순하고.”

― 너만큼 착하고 순할까. 됐고, 나 지금 너희 집 앞인데 나올 수 있어?

“뭐? 이 시간에 왜?”

― 이제야 스케줄이 끝났어. 근데 마침 새로 섭외된 촬영장이 너희 집 주위였거든. 그래서 얼굴이나 보자고.

“……오빠도 같이 있어?”

재영의 질문에 윤수가 한 박자 쉬고 대답을 했다.

― 아니. 형은 아까 약속 있다고 먼저 가셨어.

“아, 그렇구나.”

― 내려올래?

“응. 조금만 기다려.”

침대에서 후다닥 일어난 재영은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아무리 재욱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더라도 정이 든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리웠던 만큼 발걸음을 서두르게 된다. 머리를 대충 묶고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었다. 그리고 3층에서 1층까지 쉬지 않고 뛰어 내려갔다.

“춥지. 미안……. 어?”

그런데 재영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윤수가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윤수에게서 미안하다는 문자가 왔다. 재영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에 재욱은 마음에 안 든다는 시선으로 재영을 훑었다.

“오빠가 여기 왜……. 윤수는요?”

“내가 보자고 그러면 안 나올 것 같아서, 윤수한테 거짓말 좀 하라고 시켰어. 혹시 너 나 피하냐?”

“아니, 피하는 게 아니라…….”

말을 이어 나가다가 또 어디에서 카메라가 튀어나올지 몰라 재영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재욱과 함께라면 근처의 허름한 술집을 가는 것도 쉽지 않다. 재영은 다급히 재욱을 잡아당겼다.

“일단 우리 집으로 들어가요.”

“뭐?”

“이러다가 누구한테 들키면 어떡해요.”

재욱의 옷을 쥐고 있다가 곧 어색한 기분이 들어 놓았다. 하지만 재욱이 다시 재영의 손을 잡았다. 재영이 놀란 듯 뒤를 돌아보았지만, 재욱은 열심히 계단을 오를 뿐이다.

결국 재영도 더 이상의 소란을 일으키기 싫어 그대로 자신의 집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나저나 내가 집을 치워뒀던가.

“집이 좀 더러울 수도 있어요. 요즘 너무 바빴거든요.”

“내 촬영장 안 나와도 바쁜가 봐?”

재욱의 가시 돋친 말에 재영은 움찔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러니까 이해해 주세요.”

익숙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재욱의 침실보다도 좁은 원룸이 눈에 들어왔다. 새삼 부끄럽네. 앉을 데도 마땅치 않고.

“어, 침대나 책상 의자에 앉으세요. 소파가 따로 없어서. 뭐 드실래요? 커피? 아, 커피는 없구나. 오렌지 주스 괜찮아요?”

“됐으니까, 앉아.”

어째 지난번과 처지가 바뀐 것 같다. 됐다는데도 억지로 오렌지 주스를 가져온 재영은 어색하게 침대에 앉았다. 재욱이 책상 의자에 앉았기 때문이다.

그 뒤로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와 단둘이 방에 있게 되자 어색해진 재영은 손가락으로 장난을 쳤다. 재욱은 눈으로 집 내부를 훑다가 재영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할 말이야 많지. 안 그래?”

“…….”

“너 아예 내 현장 안 나오겠다고 했다며?”

“…….”

“네가 실장한테 말할래, 아님 내가 말할까?”

“굳이, 제가 아니어도 되잖아요.”

“분명 굳이 너여야 한다고 여러 번 말했던 것 같은데.”

“원래 스태프는 자주 바뀌고, 또…….”

“그럼, 내가 더 이상 너희 회사랑 일을 안 하는 걸로 할게.”

“네?”

재영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아니, 당신이 우리 회사랑 일을 안 하면 지금 그 직원들 월급은 어떻게 다 준단 말인가요? 하지만 재욱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굳이’ 네가 아니라면 난 ‘굳이’ 너희 회사랑 일할 필요가 없거든. 그리고 너희 실장보다 더 화려한 경력의 실장들이 날 맡고 싶다고 전부터 쭉 러브 콜을 보내왔었고. 솔직히 내가 돈도 과하게 많이 주고 있긴 하잖아.”

맞는 말이라 재영은 할 말이 없었다. 재욱이 굳이 재영의 회사를 고집할 의무는 없었다. 이 업계에서 최고라고 불리는 이들도 모두 재욱과 일하기를 염원하고 있었으니까.

“가끔은 서운하기도 해. 나는 너를 이렇게나 아끼는데, 너는 나를 그저 같이 일하는 연예인으로만 보는 거 같아서.”

“아니에요. 저도 오빠를 각별하게 생각해요. 생각은 하는데…….”

“아직 유효해. 너 독립시켜 주겠다는 약속. 물론 거액의 위자료도 줄 거야. 창창하게 어린 너한테 이혼이라는 기록을 남기는 것이 미안하긴 하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손해 볼 건 없잖아? 넌 지금 너를 괴롭히는 그 실장보다 훨씬 더 잘나갈 수도 있다고.”

“이 일도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되잖아요.”

“이 일 또한 굳이 너여야 한다고 말했을 텐데.”

분명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다. 요즘 시대에 ‘이혼’이 커다란 흠도 아닌 데다 무엇보다 재영은 재욱을 짝사랑했었다.

비록 실리를 따지는 결혼이라 하여도, 생판 모르는 사람과 하는 것보다야 한때 좋아하던 사람과 하는 것이 나았다. 재욱의 말대로 정해진 시간만큼만 살고 깔끔하게 헤어진다면, 그다지 나쁜 것도 아닐 것이다.

“모두가 너처럼 막내부터 시작하지만, 실장이 되는 사람은 소수야. 네 스스로가 실장이 되지 않으면 평생 실장이 지정해 준 옷을 가지고 현장에 나가서 인형 놀이 하듯 연예인들에게 갈아입힐 뿐이라고. 그런 걸 원해서 스타일리스트가 된 건 아니잖아. 너에게도 꿈이 있었던 거 아니야?”

“…….”

“내가 그 꿈 이뤄 주겠다잖아. 내가 독립시켜 줄게. 실장이고, 뭐고, 네가 다 해 먹어. 대신 내가 요구하는 건 딱 하나야.”

실장이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연예인과 직접 계약을 맺는 것이었다. 회사를 끼지 않고. 재욱은 지금 그 방법을 제안하고 있었다. 게다가 첫 시작이 모재욱이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메리트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한 그녀의 마음을 꿰뚫기라도 하듯 재욱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나랑 결혼해.”

어릴 적부터 예쁜 옷이 좋았다. 직접 입지 못할 정도로 요란한 옷이라도, 예쁘면 그저 좋았다. 중학교 때, 엄마에게 재영은 ‘스타일리스트’가 되고 싶노라고 말했다.

그 당시 학부모들이 꿈꾸는 직업과는 거리가 먼 직업임에도 재영의 엄마는 딸이 꿈을 찾은 것에 대해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바로 스타일리스트 학원에 등록을 시켜 줬다.

재영은 엄마의 얼굴을 보며 다짐했다. 반드시 이 바닥에서 성공할 거라고. 절대 엄마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거라고.

물론 재영이 정식 스타일리스트가 되기도 전에 엄마는 돌아가셨지만 하늘에서라도 자랑스러워하시길 바라는 마음엔 변함이 없었다.

그랬기에 재욱의 말이 더욱 강력하게 와닿았다.

“결혼 생활은 최소 3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너에게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전에 이혼을 해 줄 마음도 있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이 아래로 가라앉을 테니까.”

“…….”

“어때?”

재욱이 재영을 강하게 옭아매었다. 재영의 눈엔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