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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붉게 물든 귀
“왜요?”
사무실의 옷걸이들을 정리하던 재영은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동생들에게 현장도 다 양보하고, 하루 종일 협찬사만 빙빙 돈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니잖아, 지금.
도대체 뭘 잘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어진 온갖 패널티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니잖아, 지금.
“그냥. 너랑 일하는 거 다들 불편해해. 다수가 힘들어하는 문제는 실장인 내가 처리해 줘야지.”
서진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성의 없이 대꾸했다. 재영이 코웃음을 치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웃었니, 너 지금?”
“네.”
“넌 아무런 잘못도 안 했는데, 내가 이유도 없이 괴롭히는 것 같지? 왕따당하는 애들이 꼭 그렇게, 자기만 그 이유를 모르더라.”
“따돌림이란 행위를 엄청나게 정당화하시네요.”
“뭐?”
순식간에 분위기가 냉각되었다. 티셔츠 리폼을 하고 있던 막내가 슬금슬금 일어나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재영은 끌어안고 있던 의상들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 자르려면 아침에 자르든가. 일 시켜 먹을 건 다 시켜 먹고 이제 와서 말하는 건 무슨 심보예요?”
“야, 도재영.”
“실장님은 학창 시절에도 반 친구 왕따시켰을 거야, 분명. 한 명 고립시켜 놓고 친구들이랑 깔깔 웃었죠? 그러곤 따돌림을 당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떠들고 다녔죠? 안 봐도 뻔해요.”
재영이 가방을 집어 들며 서진에게 서늘하게 쏘아 댔다.
“나잇값 좀 해요, 제발. 동생들 데리고 중학생도 안 할 짓 하고 다니면 좋아요?”
“너 미쳤어?”
“그래요. 미쳤어요. 그럼 내가 안 미치고 배겨요? 뭘 잘못한 줄도 모르고 이 수모들을 겪고 있는데?”
재영의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서진이 말을 더듬었다. 재영은 현관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패기 넘치게 외쳤다.
“월급은 됐어요. 더러워서 안 받아.”
그리고 방문 너머로 귀를 기울이고 있을 동생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그러는 거 아니야. 내가 너희를 얼마나 챙겼는데.”
* * *
“미쳤어, 미쳤어.”
물론,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쐬고 나니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화가 가라앉았고, 그 미친 짓을 후회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재영은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을 침대 위에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월급은 됐다는 소리는 왜 해. 당장 이번 달 월세 낼 돈도 없는데.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싹싹 빌까.
그런데 그때,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그에 황급히 휴대폰을 집어 들지만 띄워진 메시지는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언니, 죄송한데요. 우리 단체방에서 좀 나가 주세요.]
“다들 너무하시네. 같이 일한 세월이 얼만데.”
그러면서도 재영의 손은 착실히 ‘채팅창 나가기’ 미션을 수행하고 있었다. 곧 휴대폰은 다시 조용해졌다. 재영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끙끙거렸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부러운 사람들은 집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적어도 월세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
이를 테면 모재욱 같은 사람. 생각해 보니 열받네. 나는 회사 사람들 생각하느라 그 솔깃한 제안도 다 뿌리쳤는데. 재영은 분노를 담아 침대를 팡팡 내리쳤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누군가는 그런 재영을 보며 단순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비웃을지도 모르나,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녀는 지금 몇 주째 고단한 잡일을 도맡아 한 데다 하루에 3시간 이상 자는 날이 없었으니 말이다.
“여보세요.”
― 몇 신데 아직도 자고 있어?
재영은 비몽사몽인 채로 전화를 받다가 몸을 돌렸다. 그러자 밝은 아침 햇살이 그녀의 눈을 괴롭혔다. 에이, 눈부셔. 그나저나 나 화장도 못 지우고 잤네. 베개에 파운데이션 다 묻었겠다. 얼른 빨아야지.
― 듣고 있어?
재영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전화를 건 상대는 하던 말을 멈추고 까칠하게 물었다. 그제야 재영은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재욱 오빠. 바로 상체를 일으킨 재영이 눈을 비벼 대며 대꾸했다.
“촬영장에 있을 시간 아니에요? 촬영에 집중 안 하시고, 웬 전화?”
― 안부 전화 했지.
“안부 전화요? 우리가 그렇게까지 긴밀한 사이였나. 이제 난 당신 스태프도 아닌데요.”
재영은 기지개를 쭉 펴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뭐, 아무리 해고를 당했더라도 일단 날이 밝아 왔으니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긴 해야겠지. 빨래하고, 밀린 청소하고, 구인 사이트를 돌아보려면 매우 바쁠 테다. 그런 의미에서 하는 이야긴데…….
“이만 끊어 주시겠어요?”
― 넌 왜 이렇게 나한테만 매정해?
말은 그렇게 하나 재욱의 말소리 끝에는 웃음이 섞여 있었다.
“전 모두에게 매정해요. 차별이 없는 참된 사람이죠.”
어제의 충격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라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조잘대고 있는데, 재욱은 그럼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단속적 웃음을 흘렸다.
이 남자의 가장 짜증 나는 부분은 목소리조차 감미롭다는 거다. 잠시 그 웃음소리를 만끽하던 재영은 어쩐지 서글픈 눈으로 변했다.
― 내가 왜 전화했을 것 같아?
“제가 해고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으셨겠죠. 그래서 그 고소한 기분을 표출하려고 전화하셨거나 아니면 일말의 동정심으로 위로하려고 전화하셨겠죠. 이왕이면 후자였으면 좋겠어요.”
곧 재욱의 웃음이 멎었다.
― 잘 들어. 촬영 미뤄졌어. 그래서 2시간 뒤에 촬영 다시 시작해. 그러니까 1시간 내로 촬영장에 도착해야 할 거야.
“누가요? 제가요?”
― 응. 당신이요. 내가 지금 스타일리스트가 없거든.
“왜…… 스타일리스트가 없어요?”
― 잘랐어. 10분 전에.
“네?”
재영이 비명을 지르듯 되물었다. 스타일리스트가 없으면 넥타이도 제대로 맬 줄 모르는 사람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면서도 어느새 재영은 급히 외투에 팔을 끼워 넣고 있었다. 정말이지 노예근성이 몸에 배어 버린 건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말했잖아. 굳이 네가 아니라면 난 그 회사랑 일할 필요 없다고.
“저기요. 모 배우님.”
― 내가 말도 안 되는 꼴로 카메라 앞에 서도 좋으면 안 와도 돼.
“…….”
그렇게 말하면 또 단호하게 굴기도 어려워지잖아. 모재욱은 내 경력 중 제일 빛나는 페이지인데. 재영은 자신이 스타일리스트 외에는 그 어떤 직업도 가질 수 없는 종자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끊긴 전화를 보며 한숨을 쉬던 재영은 운동화 안에 발을 집어넣었다. 택시를 타면 1시간 내로 도착할 수 있을까. 그러다 현관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보며 소스라치듯 다시 신발을 벗었다.
“세수는 하고 가자, 인간적으로.”
* * *
“안 늦었어요?”
재영이 재욱의 대기실로 뛰어 들어오자 헤어와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스태프들이 반갑게 눈인사를 해 왔다.
메이크업 수정을 하고 있던 재욱은 거울 너머로 재영을 응시하다가 시계를 봤다. 진짜 빨리 왔네.
재영은 오자마자 재욱에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바로 행거를 뒤적였다. 다행히도 오늘을 위해 준비된 옷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윤수가 재영에게 대본을 내밀었다. 그러자 재영이 능숙하게 대본을 펼쳐 들었다.
“아, 오랜만에 보니까 헷갈리네. 이 씬이랑, 이 씬이랑 연결인 거지?”
“응. 근데, 너…….”
“일단 급하니까 이야기는 이따가 하자.”
“알았어. 자, 다른 사람들은 형 옷 갈아입게 나가 주자.”
곧 윤수가 재영을 제외한 재욱의 스태프들을 모두 데리고 나갔다. 그사이 재영은 빠른 손길로 옷들을 골라내고, 그중에서 셔츠 하나를 골라 재욱에게로 내밀었다.
“이거 입고 있어요.”
재욱은 순순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재영은 뒤를 돌아 시계를 골랐다. 저번에 어떤 걸 착용했더라. 이 가죽 스트랩으로 된 시계였던가. 아니면 조금 메탈릭한 느낌의 시계였던가.
저장된 사진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아직 재욱이 옷을 덜 갈아입은 듯 그의 맨살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에 재영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재욱이 단추를 잠그다 말고 픽 웃음을 터뜨렸다.
“내 몸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닌데, 볼 때마다 그놈의 귀는 붉어지네.”
“내, 내가 언제요.”
“그리고 그 가죽 스트랩 시계 찼었어.”
“아, 그래요?”
남자가 좋다는 남자한테 설레지 마. 일하자, 일.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재영은 재욱이 말한 시계를 집어 들었다. 재욱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단추를 마저 잠갔다.
재영은 그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 주고, 미리 팔에 걸어 놓은 넥타이를 셔츠의 깃 아래에 둘렀다. 그러곤 온 신경을 집중해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 재영을 빤히 보던 재욱이 갑자기 그녀의 앞으로 불쑥 다가갔다. 옅은 향수 냄새와 함께 재욱의 숨결이 가까워지자 놀란 재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어 버렸다.
“결혼하자.”
이런 타이밍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비겁해. 재욱은 정말 키스라도 할 듯 굴었다. 재영은 몸을 아래로 푹 숙여 그에게서 빠져나왔다. 귀는 이제 거의 그녀의 입술 색과 같아졌다.
재욱이 나른한 시선으로 그녀를 담았다.
“너 나한테만 매정한 거 맞다니까. 네 전 회사 사람들한테 미안해서 내 제안 거절하는 거잖아. 그 사람들한테 하는 것의 반만큼만 나한테 해 봐.”
“…….”
“만약 내 제안 거절하면 너 이제 뭐 하고 살 건데? 너 이 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근데 지금 흘러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그 어떤 회사에서도 너를 받아 줄 것 같지 않은데, 다른 일 하면서 살아도 되겠어?”
재욱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 바닥은 좁으니까.
“오빠, 남의 약점 가지고 그러는 거 진짜 나쁘다는 거 알죠?”
“응. 알아.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애초에 난 이렇게 생겨 먹었으니까.”
“그게 뭐 자랑이라고…….”
선행 떠벌리듯이 떠벌립니까. 재영이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지만 재욱은 그저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재영은 대화를 포기했다. 대신 재킷을 그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재욱 씨 촬영 들어갈게요.”
“네. 금방 나가요!”
재영이 의상의 구겨진 부분이 없나 확인하며 대답했다. 곧 재욱이 극 중 집무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모델 출신이라 그런지 확실히 포스가 있긴 해.
재욱의 움직임을 따라 여자 스태프들의 시선이 움직였다. 괜히 뿌듯해지는 마음에 재영이 웃음을 머금고 있는데, 뒤이어 재욱의 상대 여배우도 모습을 드러냈다. 딱 붙는 드레스가 무척이나 고혹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하여튼 스타일리스트 망신은 혼자 다 시키고 다닌다니까.”
재욱의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고 있던 재영은 난데없는 비아냥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여배우의 스타일리스트가 서 있었다. 물론 구면이었다.
“저한테 한 말이에요?”
“소문 쫙 났어요, 알아요? 잘생긴 남자 연예인만 맡고 싶어 한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네. 그래도 여태 다닌 회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도 지켜야 되는 거 아니에요? 전 회사 사람 잘리자마자 쪼르르 달려와서 알랑대는 꼴이 웃겨 죽겠네.”
“저기요.”
“자존심 지켜요.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열심히 사는 다른 스타일리스트들도 괜히 욕먹잖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윤수가 다가오려고 했으나 재영은 손짓으로 그를 제지했다.
“하긴, 이제 모재욱 씨 말고는 맡을 수 있는 연예인이 없으니까 죽을힘을 다해 매달리긴 해야겠네. 아우, 쪽팔려. 나 같으면 그냥 이 바닥 뜨고 말았을 거야.”
“그래요.”
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말에 수긍을 하자, 못마땅하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라고요?”
“그쪽 말이 맞다고요. 나 이제 오빠 없으면 안 되니까 죽을힘을 다해 오빠한테 매달릴 거라고요. 이 바닥 뜨는 건 죽어도 싫거든요.”
무슨 말을 해도 색안경을 끼고 나를 비난할 거면, 차라리 당신들이 원하는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어차피 이 바닥에서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은 해 봐야지? 안 그래? 이렇게 맥없이 쫓겨나라고 엄마가 없는 형편에 학원 보내 준 게 아니거든.
재영은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엄마 얼굴을 떠올리며 겨우 참아 냈다. 운다고 무조건 지는 건 아니지만,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불쌍해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앞으로 저 많이 씹고 다니세요. 그래서 당신들 속이 시원해진다면.”
잠시 후 감독의 촬영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촬영장은 고요해졌다. 오로지 배우들의 대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고혹적인 느낌의 여배우가 천천히 재욱에게로 다가가 입을 맞췄다. 곧이어 입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숨죽인 촬영장 안을 채웠다.
아까 전, 가까이 다가온 재욱의 얼굴과 그 마찰음이 오버랩되어 재영은 다시 귀가 붉게 물들었다.
“오케이. 좋았어.”
다른 각도에서 같은 촬영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재욱의 입술이 여배우의 립스틱으로 물들었을 때쯤 키스신 촬영은 끝이 났다.
재영은 재욱이 내미는 시계를 받아 들었다. 메이크업 담당 스태프가 재욱의 입가를 정리하는 동안 그녀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영아. 오빠 옷 벗는 것 좀 도와드려.”
“네, 언니.”
다시 둘만 남게 되었을 때, 재욱은 넥타이를 풀면서 재영을 힐끗 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재영은 대답 없이 그의 넥타이를 대신 풀어 주었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좋아요. 결혼해요, 우리.”
그 말을 들은 직후 재욱의 표정이 어땠더라. 당황스러워했던 것 같기도. 웃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만큼 재영은 떨고 있었다. 애정이 없는 프러포즈를 승낙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재영은 떨고 있었다.
“왜요?”
사무실의 옷걸이들을 정리하던 재영은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동생들에게 현장도 다 양보하고, 하루 종일 협찬사만 빙빙 돈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니잖아, 지금.
도대체 뭘 잘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어진 온갖 패널티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니잖아, 지금.
“그냥. 너랑 일하는 거 다들 불편해해. 다수가 힘들어하는 문제는 실장인 내가 처리해 줘야지.”
서진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성의 없이 대꾸했다. 재영이 코웃음을 치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웃었니, 너 지금?”
“네.”
“넌 아무런 잘못도 안 했는데, 내가 이유도 없이 괴롭히는 것 같지? 왕따당하는 애들이 꼭 그렇게, 자기만 그 이유를 모르더라.”
“따돌림이란 행위를 엄청나게 정당화하시네요.”
“뭐?”
순식간에 분위기가 냉각되었다. 티셔츠 리폼을 하고 있던 막내가 슬금슬금 일어나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재영은 끌어안고 있던 의상들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 자르려면 아침에 자르든가. 일 시켜 먹을 건 다 시켜 먹고 이제 와서 말하는 건 무슨 심보예요?”
“야, 도재영.”
“실장님은 학창 시절에도 반 친구 왕따시켰을 거야, 분명. 한 명 고립시켜 놓고 친구들이랑 깔깔 웃었죠? 그러곤 따돌림을 당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떠들고 다녔죠? 안 봐도 뻔해요.”
재영이 가방을 집어 들며 서진에게 서늘하게 쏘아 댔다.
“나잇값 좀 해요, 제발. 동생들 데리고 중학생도 안 할 짓 하고 다니면 좋아요?”
“너 미쳤어?”
“그래요. 미쳤어요. 그럼 내가 안 미치고 배겨요? 뭘 잘못한 줄도 모르고 이 수모들을 겪고 있는데?”
재영의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서진이 말을 더듬었다. 재영은 현관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패기 넘치게 외쳤다.
“월급은 됐어요. 더러워서 안 받아.”
그리고 방문 너머로 귀를 기울이고 있을 동생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그러는 거 아니야. 내가 너희를 얼마나 챙겼는데.”
* * *
“미쳤어, 미쳤어.”
물론,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쐬고 나니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화가 가라앉았고, 그 미친 짓을 후회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재영은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을 침대 위에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월급은 됐다는 소리는 왜 해. 당장 이번 달 월세 낼 돈도 없는데.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싹싹 빌까.
그런데 그때,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그에 황급히 휴대폰을 집어 들지만 띄워진 메시지는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언니, 죄송한데요. 우리 단체방에서 좀 나가 주세요.]
“다들 너무하시네. 같이 일한 세월이 얼만데.”
그러면서도 재영의 손은 착실히 ‘채팅창 나가기’ 미션을 수행하고 있었다. 곧 휴대폰은 다시 조용해졌다. 재영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끙끙거렸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부러운 사람들은 집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적어도 월세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
이를 테면 모재욱 같은 사람. 생각해 보니 열받네. 나는 회사 사람들 생각하느라 그 솔깃한 제안도 다 뿌리쳤는데. 재영은 분노를 담아 침대를 팡팡 내리쳤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누군가는 그런 재영을 보며 단순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비웃을지도 모르나,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녀는 지금 몇 주째 고단한 잡일을 도맡아 한 데다 하루에 3시간 이상 자는 날이 없었으니 말이다.
“여보세요.”
― 몇 신데 아직도 자고 있어?
재영은 비몽사몽인 채로 전화를 받다가 몸을 돌렸다. 그러자 밝은 아침 햇살이 그녀의 눈을 괴롭혔다. 에이, 눈부셔. 그나저나 나 화장도 못 지우고 잤네. 베개에 파운데이션 다 묻었겠다. 얼른 빨아야지.
― 듣고 있어?
재영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전화를 건 상대는 하던 말을 멈추고 까칠하게 물었다. 그제야 재영은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재욱 오빠. 바로 상체를 일으킨 재영이 눈을 비벼 대며 대꾸했다.
“촬영장에 있을 시간 아니에요? 촬영에 집중 안 하시고, 웬 전화?”
― 안부 전화 했지.
“안부 전화요? 우리가 그렇게까지 긴밀한 사이였나. 이제 난 당신 스태프도 아닌데요.”
재영은 기지개를 쭉 펴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뭐, 아무리 해고를 당했더라도 일단 날이 밝아 왔으니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긴 해야겠지. 빨래하고, 밀린 청소하고, 구인 사이트를 돌아보려면 매우 바쁠 테다. 그런 의미에서 하는 이야긴데…….
“이만 끊어 주시겠어요?”
― 넌 왜 이렇게 나한테만 매정해?
말은 그렇게 하나 재욱의 말소리 끝에는 웃음이 섞여 있었다.
“전 모두에게 매정해요. 차별이 없는 참된 사람이죠.”
어제의 충격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라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조잘대고 있는데, 재욱은 그럼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단속적 웃음을 흘렸다.
이 남자의 가장 짜증 나는 부분은 목소리조차 감미롭다는 거다. 잠시 그 웃음소리를 만끽하던 재영은 어쩐지 서글픈 눈으로 변했다.
― 내가 왜 전화했을 것 같아?
“제가 해고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으셨겠죠. 그래서 그 고소한 기분을 표출하려고 전화하셨거나 아니면 일말의 동정심으로 위로하려고 전화하셨겠죠. 이왕이면 후자였으면 좋겠어요.”
곧 재욱의 웃음이 멎었다.
― 잘 들어. 촬영 미뤄졌어. 그래서 2시간 뒤에 촬영 다시 시작해. 그러니까 1시간 내로 촬영장에 도착해야 할 거야.
“누가요? 제가요?”
― 응. 당신이요. 내가 지금 스타일리스트가 없거든.
“왜…… 스타일리스트가 없어요?”
― 잘랐어. 10분 전에.
“네?”
재영이 비명을 지르듯 되물었다. 스타일리스트가 없으면 넥타이도 제대로 맬 줄 모르는 사람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면서도 어느새 재영은 급히 외투에 팔을 끼워 넣고 있었다. 정말이지 노예근성이 몸에 배어 버린 건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말했잖아. 굳이 네가 아니라면 난 그 회사랑 일할 필요 없다고.
“저기요. 모 배우님.”
― 내가 말도 안 되는 꼴로 카메라 앞에 서도 좋으면 안 와도 돼.
“…….”
그렇게 말하면 또 단호하게 굴기도 어려워지잖아. 모재욱은 내 경력 중 제일 빛나는 페이지인데. 재영은 자신이 스타일리스트 외에는 그 어떤 직업도 가질 수 없는 종자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끊긴 전화를 보며 한숨을 쉬던 재영은 운동화 안에 발을 집어넣었다. 택시를 타면 1시간 내로 도착할 수 있을까. 그러다 현관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보며 소스라치듯 다시 신발을 벗었다.
“세수는 하고 가자, 인간적으로.”
* * *
“안 늦었어요?”
재영이 재욱의 대기실로 뛰어 들어오자 헤어와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스태프들이 반갑게 눈인사를 해 왔다.
메이크업 수정을 하고 있던 재욱은 거울 너머로 재영을 응시하다가 시계를 봤다. 진짜 빨리 왔네.
재영은 오자마자 재욱에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바로 행거를 뒤적였다. 다행히도 오늘을 위해 준비된 옷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윤수가 재영에게 대본을 내밀었다. 그러자 재영이 능숙하게 대본을 펼쳐 들었다.
“아, 오랜만에 보니까 헷갈리네. 이 씬이랑, 이 씬이랑 연결인 거지?”
“응. 근데, 너…….”
“일단 급하니까 이야기는 이따가 하자.”
“알았어. 자, 다른 사람들은 형 옷 갈아입게 나가 주자.”
곧 윤수가 재영을 제외한 재욱의 스태프들을 모두 데리고 나갔다. 그사이 재영은 빠른 손길로 옷들을 골라내고, 그중에서 셔츠 하나를 골라 재욱에게로 내밀었다.
“이거 입고 있어요.”
재욱은 순순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재영은 뒤를 돌아 시계를 골랐다. 저번에 어떤 걸 착용했더라. 이 가죽 스트랩으로 된 시계였던가. 아니면 조금 메탈릭한 느낌의 시계였던가.
저장된 사진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아직 재욱이 옷을 덜 갈아입은 듯 그의 맨살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에 재영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재욱이 단추를 잠그다 말고 픽 웃음을 터뜨렸다.
“내 몸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닌데, 볼 때마다 그놈의 귀는 붉어지네.”
“내, 내가 언제요.”
“그리고 그 가죽 스트랩 시계 찼었어.”
“아, 그래요?”
남자가 좋다는 남자한테 설레지 마. 일하자, 일.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재영은 재욱이 말한 시계를 집어 들었다. 재욱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단추를 마저 잠갔다.
재영은 그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 주고, 미리 팔에 걸어 놓은 넥타이를 셔츠의 깃 아래에 둘렀다. 그러곤 온 신경을 집중해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 재영을 빤히 보던 재욱이 갑자기 그녀의 앞으로 불쑥 다가갔다. 옅은 향수 냄새와 함께 재욱의 숨결이 가까워지자 놀란 재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어 버렸다.
“결혼하자.”
이런 타이밍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비겁해. 재욱은 정말 키스라도 할 듯 굴었다. 재영은 몸을 아래로 푹 숙여 그에게서 빠져나왔다. 귀는 이제 거의 그녀의 입술 색과 같아졌다.
재욱이 나른한 시선으로 그녀를 담았다.
“너 나한테만 매정한 거 맞다니까. 네 전 회사 사람들한테 미안해서 내 제안 거절하는 거잖아. 그 사람들한테 하는 것의 반만큼만 나한테 해 봐.”
“…….”
“만약 내 제안 거절하면 너 이제 뭐 하고 살 건데? 너 이 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근데 지금 흘러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그 어떤 회사에서도 너를 받아 줄 것 같지 않은데, 다른 일 하면서 살아도 되겠어?”
재욱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 바닥은 좁으니까.
“오빠, 남의 약점 가지고 그러는 거 진짜 나쁘다는 거 알죠?”
“응. 알아.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애초에 난 이렇게 생겨 먹었으니까.”
“그게 뭐 자랑이라고…….”
선행 떠벌리듯이 떠벌립니까. 재영이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지만 재욱은 그저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재영은 대화를 포기했다. 대신 재킷을 그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재욱 씨 촬영 들어갈게요.”
“네. 금방 나가요!”
재영이 의상의 구겨진 부분이 없나 확인하며 대답했다. 곧 재욱이 극 중 집무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모델 출신이라 그런지 확실히 포스가 있긴 해.
재욱의 움직임을 따라 여자 스태프들의 시선이 움직였다. 괜히 뿌듯해지는 마음에 재영이 웃음을 머금고 있는데, 뒤이어 재욱의 상대 여배우도 모습을 드러냈다. 딱 붙는 드레스가 무척이나 고혹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하여튼 스타일리스트 망신은 혼자 다 시키고 다닌다니까.”
재욱의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고 있던 재영은 난데없는 비아냥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여배우의 스타일리스트가 서 있었다. 물론 구면이었다.
“저한테 한 말이에요?”
“소문 쫙 났어요, 알아요? 잘생긴 남자 연예인만 맡고 싶어 한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네. 그래도 여태 다닌 회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도 지켜야 되는 거 아니에요? 전 회사 사람 잘리자마자 쪼르르 달려와서 알랑대는 꼴이 웃겨 죽겠네.”
“저기요.”
“자존심 지켜요.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열심히 사는 다른 스타일리스트들도 괜히 욕먹잖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윤수가 다가오려고 했으나 재영은 손짓으로 그를 제지했다.
“하긴, 이제 모재욱 씨 말고는 맡을 수 있는 연예인이 없으니까 죽을힘을 다해 매달리긴 해야겠네. 아우, 쪽팔려. 나 같으면 그냥 이 바닥 뜨고 말았을 거야.”
“그래요.”
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말에 수긍을 하자, 못마땅하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라고요?”
“그쪽 말이 맞다고요. 나 이제 오빠 없으면 안 되니까 죽을힘을 다해 오빠한테 매달릴 거라고요. 이 바닥 뜨는 건 죽어도 싫거든요.”
무슨 말을 해도 색안경을 끼고 나를 비난할 거면, 차라리 당신들이 원하는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어차피 이 바닥에서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은 해 봐야지? 안 그래? 이렇게 맥없이 쫓겨나라고 엄마가 없는 형편에 학원 보내 준 게 아니거든.
재영은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엄마 얼굴을 떠올리며 겨우 참아 냈다. 운다고 무조건 지는 건 아니지만,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불쌍해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앞으로 저 많이 씹고 다니세요. 그래서 당신들 속이 시원해진다면.”
잠시 후 감독의 촬영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촬영장은 고요해졌다. 오로지 배우들의 대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고혹적인 느낌의 여배우가 천천히 재욱에게로 다가가 입을 맞췄다. 곧이어 입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숨죽인 촬영장 안을 채웠다.
아까 전, 가까이 다가온 재욱의 얼굴과 그 마찰음이 오버랩되어 재영은 다시 귀가 붉게 물들었다.
“오케이. 좋았어.”
다른 각도에서 같은 촬영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재욱의 입술이 여배우의 립스틱으로 물들었을 때쯤 키스신 촬영은 끝이 났다.
재영은 재욱이 내미는 시계를 받아 들었다. 메이크업 담당 스태프가 재욱의 입가를 정리하는 동안 그녀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영아. 오빠 옷 벗는 것 좀 도와드려.”
“네, 언니.”
다시 둘만 남게 되었을 때, 재욱은 넥타이를 풀면서 재영을 힐끗 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재영은 대답 없이 그의 넥타이를 대신 풀어 주었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좋아요. 결혼해요, 우리.”
그 말을 들은 직후 재욱의 표정이 어땠더라. 당황스러워했던 것 같기도. 웃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만큼 재영은 떨고 있었다. 애정이 없는 프러포즈를 승낙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재영은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