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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좋은 반려자보다는 좋은 동거인
「소속사 측, 모재욱 결혼 사실이다」
「단독! 톱 배우 모재욱 결혼, 배우자는 누구?」
「허무맹랑한 루머에는 법적 대응 진행할 것」
그야말로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재욱의 결혼 소식이 들려오자 대한민국은 떠들썩해졌다. 누군가는 그의 배우자에 대해 알고 싶어 했고, 또 누군가는 정치적 이슈를 묻으려는 수작이 아니냐는 의심을 했다.
해외 언론에서도 그의 결혼을 대서특필했으며, 소속사의 전화는 고장이 안 나는 게 신기할 정도로 울려 댔다.
“난 형이 정말 게이일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는데. 그럼 그 사진들은 뭐지. 내가 그거 수습하려고 뛰어다녔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재욱의 집 소파에 앉아 기사를 읽던 윤수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그냥 정원 씨는 소속사 동생이니까 같이 술 마시다가 오해가 생긴 거지, 뭐!”
“남자 둘이서 게이바에서 술을 마셨다고?”
“…….”
“결혼만 아니었으면, 나 같아도 그 허술한 변명 절대 안 믿겠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의 ‘게이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소속사에서 루머에 대해 강경 대응을 하겠다는 뜻을 밝힌 뒤로는 의심의 목소리조차 사라졌다. 결혼 발표가 확실한 해결책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던 거야?”
재영이 쏟아지는 기사들을 보며 하얗게 질린 사이 옆으로 다가온 윤수가 섭섭하다는 얼굴로 재영에게 물었다.
“난 그런 낌새를 전혀 못 느꼈는데.”
“하하, 미안해. 우리 둘 다 엄청 조심했거든. 그래도 너한테는 기사 터지기 전에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그럼 그동안 두 사람 실랑이한 것도 다 사랑싸움이었던 거야?”
“…….”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 두자. 재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재욱이 윤수에게조차 결혼의 내막을 비밀로 하자고 했기 때문이다.
윤수에게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앞으로의 편의를 위해 좋지 않겠냐고 반항해 보았지만 재욱은 단호했다. 소속사 대표와 자신, 그리고 나 말고는 아무도 이 사실을 몰라야 한다고 했다.
“아무튼 나는 이제 네가 그만두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좋긴 한데, 괜찮겠냐? 감당할 수 있겠어?”
“응?”
“재욱이 형이랑 결혼하면서 받게 될 사람들의 시선이랑 관심들, 다 견딜 수 있겠냐고. 알다시피 형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배우 중 한 사람이고, 또…….”
윤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충고를 이어 나가려는데, 재욱이 젖은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그러다 윤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너 아직 안 갔냐?”
“아, 재영이랑 이야기 좀 하느라. 그럼 우린 이만 가 볼게요. 쉬어요, 형.”
“재영이는 두고 가.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거야.”
“네?”
그 말에 재영이 더 놀라 버렸다. 마시던 음료수까지 뿜고서 캑캑대는 재영에게 티슈를 뽑아 내민 윤수는 재욱에게 물었다.
“왜요? 가는 길에 내려 주면 되는데.”
“내 예비 신부를 내 집에 두고 가라는데, 그게 이상한 일인가?”
“아, 맞다.”
또 금세 망각해 버린 사실에 윤수가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 적응이 안 되지. 발표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런가.
물론, 평소에 재욱이 재영을 눈에 띄게 아낀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애인으로서의 애정이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얼떨떨하기만 했다.
“아니야. 나 데려가.”
그때 재영이 애절한 목소리로 윤수에게 매달렸다. 재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할 얘기 많잖아, 우리.”
“다음에, 밖에서…….”
“우리 재영이는 참 부끄러움이 많다니까. 어차피 결혼하고 나면 이 집에서 나랑 단둘이 살아야 되는데.”
재욱이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 하지만 그가 이를 악물고 있다는 것을, 재영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더 그의 신경을 긁었다가는 정말 성질이라도 낼 것 같아 재영은 눈물을 머금고 윤수를 보내야만 했다.
일단 저 인간은 나의 고용주야. 저 인간이 아니면 나 받아 줄 데도 없다고. 서글펐지만 사회란 원래 냉정한 거다.
“회사에서는 최대한 날짜를 앞당기고 싶어 해. 그 전에 애먼 기사 나면 좋을 거 없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부모님을 좀 뵙고 싶어. 편한 날짜 잡아 주면 내가 식당을 예약…….”
“그냥 ‘유부남’ 타이틀만 필요한 거 아니었어요?”
“그래도 인사는 드려야지. 내가 부모님을 뵙는 게 싫어?”
재욱의 질문에 재영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재욱의 눈이 짧게 그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잠깐의 침묵 후 재영은 덤덤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엄마는 제가 스물한 살 때 돌아가셨어요. 아빠는 엄마랑 이혼한 뒤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고요. 그러니까 귀찮은 절차는 생략하셔도 돼요. 웬만하면 저도 오빠네 부모님 뵙고 싶지 않고요.”
“미안해.”
“뭐가 미안해요? 오빠가 미안할 일은 아닌데.”
하지만 덤덤한 목소리와 달리 표정은 조금 어두워졌다. 재영은 시선을 내리깔고 있다가 물었다.
“오빠는 가족 관계가 어떻게 돼요?”
“…….”
“이런 거 물으니까 무슨 소개팅하는 거 같다. 서로 무심하긴 했네요. 같이 일한 세월이 꽤 되는데 아무것도 몰랐네요, 우리.”
재욱이 습관적으로 담배를 물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비흡연자인 재영을 배려한 것일 테다. 피워도 되는데. 이곳은 재욱의 공간이니 딱히 상관없다는 뜻을 내비쳤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부모님은 미국에 계셔. 한국엔 거의 안 들어와. 어차피 그 양반들은 내가 버는 돈에만 관심 있지, 내 결혼엔 별로 관심 없어. 나도 그 사람들에게 허락받고 결혼할 마음 없고. 그러니까 너도 우리 부모님 뵐 일은 없을 거라는 거야.”
간결한 설명이었지만, 재욱이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재영은 그에 대해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말해 봤자 서로 슬퍼지기만 할 테니까. 어쨌든 중요한 건 불편한 식사 자리나 시집살이 같은 건 없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동생이 한 명 있어.”
“아, 그래요? 한국에 있어요?”
“응. 그런데 걔도 네가 신경 쓸 건 없어.”
“우리, 어쩐지 복잡하네요.”
“오히려 너무 복잡해서 일이 단순하게 흘러갈 때도 있지.”
“맞아요. 지금이 딱 그렇네요.”
분명 웃을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재욱은 분위기를 전환할 겸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영은 그의 젖은 머리가 계속 눈에 거슬렸지만 애써 넘겼다. 그사이 재욱은 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 두 캔을 꺼냈다.
“맥주 괜찮지?”
“오늘 저 정말로 집에 안 보내시려고요?”
“응. 슬슬 이 집에 적응해.”
간단한 스낵과 함께 맥주 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재욱은 그중 하나를 따 재영에게 내밀었다. 맥주를 꽤 좋아하는 편인 재영은 거부감 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가볍게 건배를 하고 입으로 가져다 대자 청량한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절로 크, 소리가 흘러나왔다.
“결혼하면 맥주는 늘 꽉 채워 놓을게. 언제든 꺼내서 마실 수 있도록.”
“오, 그건 좀 좋네요. 맥주가 은근 비싸거든요. 4캔에 10,000원 하는 것도 내 월급으로는 한참을 고민해야 한다니까요. 돈 없어서 맥주도 못 마시는 그런 처량함을 알아요? 아, 오빠는 모르시겠구나.”
“…….”
“저번에는요. 맥주랑 새우깡 하나 골랐는데, 결제가 안 된다는 거예요. 얼마나 창피하던지. 당황해서 그 자리에서 확인해 보니까 통장 잔고가 딱 3,800원 남았더라고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러워서 펑펑 울었어요. 집세랑 휴대폰 요금, 교통비 내고 나면 밥값 외에 남는 돈이 하나도 없어요.”
신나게 쫑알쫑알대다가 문득 재욱이 말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재영은 민망한 듯 마시던 맥주를 입에서 뗐다.
“죄송해요. 제가 말이 너무 많았죠?”
“아니야. 재밌는데, 뭐. 아,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좋아. 계속해.”
“집에서는 원래 조용히 쉬지 않으세요? 성가시면 입 다물고 있을게요.”
“진짜 괜찮아. 그동안 말할 사람이 없어서 말을 못 했던 거지, 나도 말하는 거 좋아해.”
“…….”
“이 적막한 집에 너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어.”
재욱이 촉촉해진 재영의 입술을 엄지로 닦아 주며 말했다. 흠칫 놀라서 재영은 뒤로 조금 물러났다. 게이한테 설레는 것만큼 부질없는 것도 없다고 아무리 다짐해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쉽지 않다.
“사람들은 내가 외로움을 안 탄다고 생각하지만, 은근히 외로움 많이 타거든. 윤수는 데이트한다고, 너는 사무실 들어가 봐야 한다고 가 버리고 난 뒤에 덩그러니 남는 그 기분이 싫었어. 그런데 이제 이 집에 네가 들어오네.”
“정말 의외네요. 사람을 귀찮아하는 줄 알았는데.”
“좋아하는 사람은 안 귀찮지.”
“…….”
“근데 내가 벌레야? 왜 자꾸 슬금슬금 뒤로 가?”
“아무리 남자를 좋아한다지만 너무 가까운 것 같아서요. 설레면 저만 손해잖아요.”
재영의 말에 재욱이 픽 웃었다. 그러곤 맥주를 들이켰다. 재영은 장난스러운 얼굴을 지워 내고 그에게 말했다.
“앞으로 엄청 시끄럽게 떠들어야지. 오빠 귀에서 피날 정도로.”
“그래라.”
“쫓아내면 안 돼요.”
“그럴 리가.”
“내가 있는 동안은 안 외롭게 해 줄게요.”
“…….”
“진짜 반려자나 애인은 되어 주지 못하겠지만 좋은 동거인은 되도록 노력해 볼게요.”
“…….”
“어떻게 보면 오빠가 동성애자라 더 편한 점도 있어요. 오빠는 절대 나를 좋아하지 않을 테고, 또, 남녀 사이에서 흔히 벌어지는 사건들이 우리에겐 발생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으니까요. 우린 서로의 가장 안전한 동거인이 될 거예요.”
그 말을 하는 내내 왜 그리 가슴이 아려 왔을까. 재영은 씁쓸하게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나란히 앉아 있던 재욱은 몸을 옆으로 돌려 그런 재영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홀짝홀짝 마시니까 한 캔은 금방이다. 오빠, 저 한 캔만 더 마셔도 돼요?”
“재영아.”
“네?”
“우리 웨딩드레스는 언제 고르러 갈까?”
“……웨딩드레스요?”
맥주를 가지러 가려던 재영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재욱과 마찬가지로 몸을 옆으로 틀어 앉았다.
“그래. 다른 건 못 해 주더라도 결혼식은 성대하게 해 주고 싶어서.”
“됐어요. 요즘 결혼식 생략이 대세라던데, 우리도 생략해요.”
“그래도 처음은 소중하잖아.”
“처음이 뭐가 소중해요? 처음이건 둘째건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게 중요하지.”
“…….”
“제가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이랑 할 때 성대하게 할게요. 그러니까 괜한 데 돈 쓰지 마요. 아, 아니다. 결혼식 할 돈으로 기부하면 되겠다. 그럼 오빠 이미지도 더 좋아지고, 나도 사람들한테 욕 덜 먹고. 일석이조겠다, 그쵸?”
“…….”
“뭐죠? 부모님을 죽인 원수가 친한 친구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남자 주인공 같은 그 무서운 눈빛은.”
이렇게 진심을 다해 당신의 유익을 위해 노력하는 나를 향한 적절한 눈빛은 아닌 것 같은데. 재욱이 팔을 뻗어 재영의 손을 쥐었다.
“손은 왜…….”
“웨딩드레스는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만 입겠다?”
“네. 그게 뭐 잘못됐어요?”
“아니. 굉장히 이성적이고 바른 소리야.”
“눈빛은 전혀 아닌데요?”
재영을 제게로 가까이 끌어당기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 낸 재욱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재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말갛게 올려다볼 뿐이다.
“그래. 결혼식도 생략하자. 결혼식에 들어갈 예정이었던 돈은 내가 지금 기부하고 있는 단체에 추가로 더 기부할게.”
“오빠, 혹시 화났어요?”
“아니. 내가 왜?”
그러니까요. 도대체 왜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이죠?
「소속사 측, 모재욱 결혼 사실이다」
「단독! 톱 배우 모재욱 결혼, 배우자는 누구?」
「허무맹랑한 루머에는 법적 대응 진행할 것」
그야말로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재욱의 결혼 소식이 들려오자 대한민국은 떠들썩해졌다. 누군가는 그의 배우자에 대해 알고 싶어 했고, 또 누군가는 정치적 이슈를 묻으려는 수작이 아니냐는 의심을 했다.
해외 언론에서도 그의 결혼을 대서특필했으며, 소속사의 전화는 고장이 안 나는 게 신기할 정도로 울려 댔다.
“난 형이 정말 게이일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는데. 그럼 그 사진들은 뭐지. 내가 그거 수습하려고 뛰어다녔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재욱의 집 소파에 앉아 기사를 읽던 윤수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그냥 정원 씨는 소속사 동생이니까 같이 술 마시다가 오해가 생긴 거지, 뭐!”
“남자 둘이서 게이바에서 술을 마셨다고?”
“…….”
“결혼만 아니었으면, 나 같아도 그 허술한 변명 절대 안 믿겠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의 ‘게이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소속사에서 루머에 대해 강경 대응을 하겠다는 뜻을 밝힌 뒤로는 의심의 목소리조차 사라졌다. 결혼 발표가 확실한 해결책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던 거야?”
재영이 쏟아지는 기사들을 보며 하얗게 질린 사이 옆으로 다가온 윤수가 섭섭하다는 얼굴로 재영에게 물었다.
“난 그런 낌새를 전혀 못 느꼈는데.”
“하하, 미안해. 우리 둘 다 엄청 조심했거든. 그래도 너한테는 기사 터지기 전에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그럼 그동안 두 사람 실랑이한 것도 다 사랑싸움이었던 거야?”
“…….”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 두자. 재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재욱이 윤수에게조차 결혼의 내막을 비밀로 하자고 했기 때문이다.
윤수에게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앞으로의 편의를 위해 좋지 않겠냐고 반항해 보았지만 재욱은 단호했다. 소속사 대표와 자신, 그리고 나 말고는 아무도 이 사실을 몰라야 한다고 했다.
“아무튼 나는 이제 네가 그만두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좋긴 한데, 괜찮겠냐? 감당할 수 있겠어?”
“응?”
“재욱이 형이랑 결혼하면서 받게 될 사람들의 시선이랑 관심들, 다 견딜 수 있겠냐고. 알다시피 형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배우 중 한 사람이고, 또…….”
윤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충고를 이어 나가려는데, 재욱이 젖은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그러다 윤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너 아직 안 갔냐?”
“아, 재영이랑 이야기 좀 하느라. 그럼 우린 이만 가 볼게요. 쉬어요, 형.”
“재영이는 두고 가.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거야.”
“네?”
그 말에 재영이 더 놀라 버렸다. 마시던 음료수까지 뿜고서 캑캑대는 재영에게 티슈를 뽑아 내민 윤수는 재욱에게 물었다.
“왜요? 가는 길에 내려 주면 되는데.”
“내 예비 신부를 내 집에 두고 가라는데, 그게 이상한 일인가?”
“아, 맞다.”
또 금세 망각해 버린 사실에 윤수가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 적응이 안 되지. 발표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런가.
물론, 평소에 재욱이 재영을 눈에 띄게 아낀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애인으로서의 애정이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얼떨떨하기만 했다.
“아니야. 나 데려가.”
그때 재영이 애절한 목소리로 윤수에게 매달렸다. 재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할 얘기 많잖아, 우리.”
“다음에, 밖에서…….”
“우리 재영이는 참 부끄러움이 많다니까. 어차피 결혼하고 나면 이 집에서 나랑 단둘이 살아야 되는데.”
재욱이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 하지만 그가 이를 악물고 있다는 것을, 재영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더 그의 신경을 긁었다가는 정말 성질이라도 낼 것 같아 재영은 눈물을 머금고 윤수를 보내야만 했다.
일단 저 인간은 나의 고용주야. 저 인간이 아니면 나 받아 줄 데도 없다고. 서글펐지만 사회란 원래 냉정한 거다.
“회사에서는 최대한 날짜를 앞당기고 싶어 해. 그 전에 애먼 기사 나면 좋을 거 없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부모님을 좀 뵙고 싶어. 편한 날짜 잡아 주면 내가 식당을 예약…….”
“그냥 ‘유부남’ 타이틀만 필요한 거 아니었어요?”
“그래도 인사는 드려야지. 내가 부모님을 뵙는 게 싫어?”
재욱의 질문에 재영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재욱의 눈이 짧게 그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잠깐의 침묵 후 재영은 덤덤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엄마는 제가 스물한 살 때 돌아가셨어요. 아빠는 엄마랑 이혼한 뒤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고요. 그러니까 귀찮은 절차는 생략하셔도 돼요. 웬만하면 저도 오빠네 부모님 뵙고 싶지 않고요.”
“미안해.”
“뭐가 미안해요? 오빠가 미안할 일은 아닌데.”
하지만 덤덤한 목소리와 달리 표정은 조금 어두워졌다. 재영은 시선을 내리깔고 있다가 물었다.
“오빠는 가족 관계가 어떻게 돼요?”
“…….”
“이런 거 물으니까 무슨 소개팅하는 거 같다. 서로 무심하긴 했네요. 같이 일한 세월이 꽤 되는데 아무것도 몰랐네요, 우리.”
재욱이 습관적으로 담배를 물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비흡연자인 재영을 배려한 것일 테다. 피워도 되는데. 이곳은 재욱의 공간이니 딱히 상관없다는 뜻을 내비쳤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부모님은 미국에 계셔. 한국엔 거의 안 들어와. 어차피 그 양반들은 내가 버는 돈에만 관심 있지, 내 결혼엔 별로 관심 없어. 나도 그 사람들에게 허락받고 결혼할 마음 없고. 그러니까 너도 우리 부모님 뵐 일은 없을 거라는 거야.”
간결한 설명이었지만, 재욱이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재영은 그에 대해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말해 봤자 서로 슬퍼지기만 할 테니까. 어쨌든 중요한 건 불편한 식사 자리나 시집살이 같은 건 없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동생이 한 명 있어.”
“아, 그래요? 한국에 있어요?”
“응. 그런데 걔도 네가 신경 쓸 건 없어.”
“우리, 어쩐지 복잡하네요.”
“오히려 너무 복잡해서 일이 단순하게 흘러갈 때도 있지.”
“맞아요. 지금이 딱 그렇네요.”
분명 웃을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재욱은 분위기를 전환할 겸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영은 그의 젖은 머리가 계속 눈에 거슬렸지만 애써 넘겼다. 그사이 재욱은 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 두 캔을 꺼냈다.
“맥주 괜찮지?”
“오늘 저 정말로 집에 안 보내시려고요?”
“응. 슬슬 이 집에 적응해.”
간단한 스낵과 함께 맥주 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재욱은 그중 하나를 따 재영에게 내밀었다. 맥주를 꽤 좋아하는 편인 재영은 거부감 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가볍게 건배를 하고 입으로 가져다 대자 청량한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절로 크, 소리가 흘러나왔다.
“결혼하면 맥주는 늘 꽉 채워 놓을게. 언제든 꺼내서 마실 수 있도록.”
“오, 그건 좀 좋네요. 맥주가 은근 비싸거든요. 4캔에 10,000원 하는 것도 내 월급으로는 한참을 고민해야 한다니까요. 돈 없어서 맥주도 못 마시는 그런 처량함을 알아요? 아, 오빠는 모르시겠구나.”
“…….”
“저번에는요. 맥주랑 새우깡 하나 골랐는데, 결제가 안 된다는 거예요. 얼마나 창피하던지. 당황해서 그 자리에서 확인해 보니까 통장 잔고가 딱 3,800원 남았더라고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러워서 펑펑 울었어요. 집세랑 휴대폰 요금, 교통비 내고 나면 밥값 외에 남는 돈이 하나도 없어요.”
신나게 쫑알쫑알대다가 문득 재욱이 말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재영은 민망한 듯 마시던 맥주를 입에서 뗐다.
“죄송해요. 제가 말이 너무 많았죠?”
“아니야. 재밌는데, 뭐. 아,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좋아. 계속해.”
“집에서는 원래 조용히 쉬지 않으세요? 성가시면 입 다물고 있을게요.”
“진짜 괜찮아. 그동안 말할 사람이 없어서 말을 못 했던 거지, 나도 말하는 거 좋아해.”
“…….”
“이 적막한 집에 너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어.”
재욱이 촉촉해진 재영의 입술을 엄지로 닦아 주며 말했다. 흠칫 놀라서 재영은 뒤로 조금 물러났다. 게이한테 설레는 것만큼 부질없는 것도 없다고 아무리 다짐해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쉽지 않다.
“사람들은 내가 외로움을 안 탄다고 생각하지만, 은근히 외로움 많이 타거든. 윤수는 데이트한다고, 너는 사무실 들어가 봐야 한다고 가 버리고 난 뒤에 덩그러니 남는 그 기분이 싫었어. 그런데 이제 이 집에 네가 들어오네.”
“정말 의외네요. 사람을 귀찮아하는 줄 알았는데.”
“좋아하는 사람은 안 귀찮지.”
“…….”
“근데 내가 벌레야? 왜 자꾸 슬금슬금 뒤로 가?”
“아무리 남자를 좋아한다지만 너무 가까운 것 같아서요. 설레면 저만 손해잖아요.”
재영의 말에 재욱이 픽 웃었다. 그러곤 맥주를 들이켰다. 재영은 장난스러운 얼굴을 지워 내고 그에게 말했다.
“앞으로 엄청 시끄럽게 떠들어야지. 오빠 귀에서 피날 정도로.”
“그래라.”
“쫓아내면 안 돼요.”
“그럴 리가.”
“내가 있는 동안은 안 외롭게 해 줄게요.”
“…….”
“진짜 반려자나 애인은 되어 주지 못하겠지만 좋은 동거인은 되도록 노력해 볼게요.”
“…….”
“어떻게 보면 오빠가 동성애자라 더 편한 점도 있어요. 오빠는 절대 나를 좋아하지 않을 테고, 또, 남녀 사이에서 흔히 벌어지는 사건들이 우리에겐 발생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으니까요. 우린 서로의 가장 안전한 동거인이 될 거예요.”
그 말을 하는 내내 왜 그리 가슴이 아려 왔을까. 재영은 씁쓸하게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나란히 앉아 있던 재욱은 몸을 옆으로 돌려 그런 재영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홀짝홀짝 마시니까 한 캔은 금방이다. 오빠, 저 한 캔만 더 마셔도 돼요?”
“재영아.”
“네?”
“우리 웨딩드레스는 언제 고르러 갈까?”
“……웨딩드레스요?”
맥주를 가지러 가려던 재영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재욱과 마찬가지로 몸을 옆으로 틀어 앉았다.
“그래. 다른 건 못 해 주더라도 결혼식은 성대하게 해 주고 싶어서.”
“됐어요. 요즘 결혼식 생략이 대세라던데, 우리도 생략해요.”
“그래도 처음은 소중하잖아.”
“처음이 뭐가 소중해요? 처음이건 둘째건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게 중요하지.”
“…….”
“제가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이랑 할 때 성대하게 할게요. 그러니까 괜한 데 돈 쓰지 마요. 아, 아니다. 결혼식 할 돈으로 기부하면 되겠다. 그럼 오빠 이미지도 더 좋아지고, 나도 사람들한테 욕 덜 먹고. 일석이조겠다, 그쵸?”
“…….”
“뭐죠? 부모님을 죽인 원수가 친한 친구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남자 주인공 같은 그 무서운 눈빛은.”
이렇게 진심을 다해 당신의 유익을 위해 노력하는 나를 향한 적절한 눈빛은 아닌 것 같은데. 재욱이 팔을 뻗어 재영의 손을 쥐었다.
“손은 왜…….”
“웨딩드레스는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만 입겠다?”
“네. 그게 뭐 잘못됐어요?”
“아니. 굉장히 이성적이고 바른 소리야.”
“눈빛은 전혀 아닌데요?”
재영을 제게로 가까이 끌어당기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 낸 재욱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재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말갛게 올려다볼 뿐이다.
“그래. 결혼식도 생략하자. 결혼식에 들어갈 예정이었던 돈은 내가 지금 기부하고 있는 단체에 추가로 더 기부할게.”
“오빠, 혹시 화났어요?”
“아니. 내가 왜?”
그러니까요. 도대체 왜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