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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첫날밤





“지인들과의 간단한 식사 자리로 대체? 진짜로? 그래도 돼?”

새로운 기사를 읽던 윤수의 호들갑에 재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의 예상대로 기부 소식이 전해지자 악플들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축복한다는 내용의 선플들이 늘어났다. 재욱은 ‘개념 배우’라는 수식어까지 얻을 수 있었다.

“아무튼 남달라, 도재영. 그 지인들은 누군데? 형 동료 배우라도 부르려고?”

“글쎄. 누구 부르지. 너 올래? 짜장면이나 시켜 먹자.”

“뭐?”

“탕수육이랑 동파육도 시켜 달라고 하자, 오빠한테.”

“우리 셋이 먹자고? 야, 우리 셋은 평소에도 맨날 같이 밥 먹는데, 뭘 새삼. 그게 결혼식 대신이라고?”

“아님, 네 여자 친구도 불러. 그러고 보니까 여태 한 번도 못 봤네.”

“야, 도재영.”

“아, 왜 이리 유난이야. 결혼이 뭐 별거야? 서로 마음만 맞으면 되지.”

물론 그 마음도 맞지 않는다는 게 흠이긴 하지만 상관은 없다. 어차피 이 결혼은 서로 원하는 바만 얻어도 성공한 결혼이니까. 아, 덤으로 재영은 월세 부담도 덜 수 있었다. 한 달에 40만 원가량의 그것은, 재영에겐 꽤 부담이 되었었으니까.

둘이 투닥대는 사이 재욱은 메이킹 영상에 들어갈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왔다.

재영은 윤수에게 심술궂은 표정을 보여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촬영 준비를 위해 의상들을 다시 체크하기 시작했다.

재욱은 메이크업 수정을 하면서도 거울 너머의 재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윤수는 아무도 몰래 혀를 쯧, 찼다. 좋아 죽네, 아주. 그동안 왜 몰랐지. 저 애절하기까지 한 시선을. 남자를 좋아한다는 오해 때문이었을까.

재영은 끝까지 그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등을 보인 채 다림질을 하는 모습이 퍽 슬퍼 보이기도 했지만, ‘뭐, 결혼까지 하는 마당에 괜한 기우겠지. 형의 진심은 이미 재영이에게 닿고도 남았겠지.’ 하고 마는 윤수였다.

“언니, 헤어는 옷 입고 난 다음에 하는 게 낫겠어요. 니트라서.”

“그럴까?”

헤어 담당 스태프인 연우와 이야기를 나누는 재영의 얼굴에선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빡빡한 스케줄에 가끔은 예민해질 법도 하건만 재영은 행복해했다. 자신의 일을 그만큼이나 좋아하는 애였다.

주위 사람들은 재영이 스타일리스트가 아니었다면 무얼 하고 살았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재욱이 배우가 아니었다면 무얼 하고 살았을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어제도 밤샜으면서 뭐가 그렇게 좋아? 결혼해서?”

“뭐, 그런 것도 있고. 처음으로 실장 언니 참견 없이 직접 옷 고르고 매치해 보니까 즐거워서요. 워낙 옷걸이가 좋아서 뭐든 어울리긴 하지만.”

“어우, 자기 남편 몸 좋은 거 은근 자랑하는 것 봐.”

연우의 놀림에 재영은 엷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단둘만 남았을 때 재욱이 나지막이 말했다.

“너한테 난, 이 니트보다도 못한 거지?”

“네?”

“아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라 재영이 되물었지만 재욱은 고개를 저었다. 재욱은 두려웠다. ‘나에게 오빠는 그저 내가 고른 옷을 입어 주는 마네킹이에요.’라는 대답이 재영에게서 들려올까 봐.

“이게 올해 유행할 색이래요. 경쟁률이 엄청 치열했는데, 오빠 입힐 거라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덜컥 내주더라니까요. 역시, 모재욱.”

재영이 맑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재욱은 제게 닿는 까끌한 니트의 촉감을 매만지며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왜요? 따가워요?”

재영은 재욱이 불편한 부분이 있을까, 싶어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가며 들여다보았다. 재영의 향기가 재욱에게로 훅 다가왔다. 재욱은 점점 더 자제력을 잃어 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재영의 하얗고 작은 손이 재욱의 목에 닿았다.

“어, 여긴 좀 빨갛다. 간지러워요? 안에 뭐라도 받쳐 입을까요?”

“…….”

“오빠?”

재욱은 재영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를 그렇게 순수하게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불순한 내가 부끄러워지니까. 죄책감이 생겨나니까.

“왜 그래요? 혹시 아직도 나한테 화났어요?”

“아니. 화 안 났어. 목에서 손 좀 떼 줄래?”

“아, 네!”

재영은 황급히 그에게서 물러났다. 재욱은 열이 오른 목을 만지작거렸다. 재영은 머쓱한 기분으로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대기하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재욱은 헤어 담당 스태프의 손에 머리를 맡기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재영은 아까 전 느꼈던 이상한 기분을 한참 동안 떨쳐 내지 못했다.

목을 너무 만지작거렸나. 아니, 뭐 나도 딱히 만지고 싶어서 만졌던 건 아니라고. 그러게 왜 목은 벌게져 가지고. 그런데 진짜 괜찮은 건가? 손끝에 재욱의 열기가 남아 재영은 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재욱 씨, 촬영 들어갈게요.”

결국 그날, 재욱은 목이 벌게진 채로 촬영을 시작했다.



* * *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재욱의 배우자에 대해 갈수록 더 궁금해했다.

그에 대한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지만, 그녀가 재욱의 전담 스타일리스트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그들의 러브 스토리가 꼭 영화에나 나올 법만 낭만적인 이야기라며 열광했다.

누군가는 말했다. 모재욱 정도면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재벌가의 사위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그도 그저 사랑을 좇는 평범한 남자였구나.

그래서였을까. 재욱은 결혼 발표를 한 후 더욱 주가가 오르는 기이한 현상을 겪고 있었다.

그러한 시끌벅적한 외부 상황과는 별개로, 재욱과 재영은 묵묵히 자신들의 특별한 결혼 생활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재영이 재욱의 집으로 들어오는 날이었다. 짐 옮기는 걸 도와주겠다는 재욱의 제안을 굳이 거절한 재영은 녹초가 되어 초인종을 눌렀다.

“도와준다니까.”

“오빠 오면 시끄러워져요. 거기 원룸촌이라서 소란 일으키면 안 돼요. 그리고 어차피 풀 옵션으로 들어갔던 거라 짐도 이것뿐이에요.”

재영은 커다란 배낭과 캐리어 하나만을 가지고 들어왔다. 단출하기 짝이 없었다. 재영은 아마 이렇게 가볍게 왔다가, 다시 가볍게 나갈 것이다. 재욱은 말을 더 덧붙이지 않고, 그녀가 쓸 방으로 안내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대충 골랐는데, 네 취향에 맞았으면 좋겠다.”

“저 그냥 이불만 주셔도 잘 자는데.”

“그럴 순 없지. 명색이 모재욱 와이프인데.”

‘와이프’라는 단어가 어색해 재영이 슬쩍 웃었다. 재욱은 집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재영의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집의 전체적인 인테리어와 전혀 어긋나지 않는 모던한 가구들이 배치된 방이 보였다. 재영이 입을 벌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우와.”

“마음에 들어?”

“당연히 마음에 들죠! 제 원룸에 있던 낡은 가구들이랑 비교도 안 되는데. 화장대도 완전 넓고 예뻐.”

재영이 캐리어를 던져두고 방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재욱의 집에 여러 번 와 봤지만 거실에 머물다 간 게 다라 이런 아늑한 공간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재욱이 흐뭇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화장실 따로 딸려 있으니까 불편하지 않게 쓸 수 있을 거야. 집안일 도와주시는 아주머니는 월, 수, 금마다 오실 거고. 혹시 더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절대 없어요. 너무 좋아요. 과분하다 싶을 정도로.”

어릴 적 드라마에서 봐 온, 꼭 갖고 싶었던 방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방이 딱 하나 있는 집에서 개인적인 공간도 없이 엄마와 살아야 했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넉넉했다.

재영이 침대에 앉아 재욱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실 줄은 몰랐는데. 고마워요, 오빠.”

“당연한 걸로 너무 고마워한다, 너.”

“당연하지 않아요. 정말 진심으로 고마워요.”

그러고 보면 재영은 늘 그랬다.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아는 아이였다. 그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전혀 모르면서, 그녀는 늘 그랬다.

“드레스 룸은 나랑 같이 쓰자.”

재욱은 머쓱한 것을 숨기려 말을 돌렸다.

“저는 옷이 별로 없어서 이 붙박이장으로도 충분해요.”

“너는 스타일리스트라는 애가 옷이 그렇게 없어서 어떡해?”

“스타일리스트가 어디 본인이 예쁜 옷 입는 직업인가요. 남 예쁘게 입히는 직업인걸요.”

재욱은 재영의 짐이 점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옷이든, 가구든. 그래야 나갈 때 조금이라도 무거운 마음으로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좁은 원룸처럼 쉽게 떠날 수 없을 테니까.

“너 들어온 기념으로 저녁에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갈까? 결혼식은 못 하게 했지만, 밥 정도는 사 줄 수 있게 해 줄 거지?”

“네, 좋아요!”

“그럼 일단 짐 정리하고 좀 쉬어. 놀아 달라고 엄청 조르고 싶은데, 오늘은 참아 볼게.”

재영이 쾌활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재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남편님.”

“나도 잘 부탁하오, 부인.”

재욱의 커다란 손이 재영의 자그마한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그 손이 건네주는 온기가 참 따뜻해서, 재영은 이상하게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무도 재영의 손을 이다지도 따뜻하게 잡아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재욱이 방을 나가고 재영은 침대에 그대로 발라당 누웠다.

엄마. 엄마 딸 출세했어. 이 방 보여? 침대도 엄청 넓어요. 테라스에 나가면 한강도 바로 보여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그리고 저 사람도 착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아, 다음 주에 혼인 신고 하러 가요. 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게 어쩌면 불효라면 불효겠지만, 그래도 잘 살아 볼게요. 꼭 엄마에게 약속했던 대로 이 바닥에서 성공할게요. 지켜봐 주세요.

오랜만에 엄마 생각을 해서였는지, 아니면 혼인 신고를 앞두고 마음이 뒤숭숭해서였는지 재영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집이 넓어서 개인 공간이 보장된다는 게 참 다행이야. 이런 처량한 모습을 오빠에게 보여 주지 않아도 되잖아.

“행복해질게요, 엄마.”



* * *



누군가가 다정하게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에 재영은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 재욱이 있었다. ‘이 사람이 왜 내 앞에…….’ 하며 당황했다가 곧 자신이 재욱의 집으로 들어왔다는 것이 생각나 눈을 비비적대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하도 문을 두드려도 대꾸가 없길래 어디 아픈가, 해서 들어왔어. 근데 많이 피곤했나 보다. 깊게 잠들었던데.”

“와, 나 엄청 오래 잤네요. 역시 좋은 침대라 달라.”

“눈 땡땡 부었다.”

“정말요?”

재영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러자 재욱이 픽 웃었다.

“에이, 짐 정리는 하나도 못 했다.”

“천천히 하면 되지. 너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는 이상 적어도 3년은 여기서 살아야 하는데.”

“그렇긴 하네요.”

재영이 팔을 쭉 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재욱은 몸을 일으켰다.

“피곤하면 오늘 저녁은 대충 시켜 먹자.”

“그래도 돼요?”

“응. 대신 나중에 맛있는 거 사 줄게.”

“우리 계속 스케줄 빡빡하던데. 아무튼 기대할게요.”

재영은 시계를 보았다. 내일 아침도 새벽 5시부터 움직여야 하는 처지였다. 얼른 뭐라도 먹고 다시 잠을 청하는 게 좋겠지.

“그래도 오빠랑 같이 사니까 좋은 점이 많네요. 1시간 정도 더 잘 수 있겠다. 사무실 들렀다가 여기로 오는 게 꽤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곧바로 윤수랑 합류할 수 있으니까…….”

“좋은 게 겨우 그것만은 아닐 텐데.”

“네?”

“스케줄 없는 날에도 내 잘생긴 얼굴 매일 볼 수 있잖아.”

“뭐야.”

재영이 재욱을 툭 치며 웃었다.

“그래. 웃어. 울지 말고.”

“네?”

“넌 웃는 게 잘 어울리니까.”

“…….”

“나 먼저 거실로 나가 있을게. 너도 얼른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