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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1화

1. 나는 너를 (1)





“노을아, 이거 먹을래?”

“아니. 너 먹어.”

이거 네 최애 과자인데. 너 생각나서 오다 주웠는데. 노을아. 노을아?

오다 줍기는……. 연신 내 이름을 불러 재끼는 선이안에게 대강 고개를 흔들고는 책상 위에 놓인 책에 정신을 집중했다. 7분 뒤면 쪽지 시험이었다. 오답 하나당 수행 평가 1점씩 깎인다고 소문이 자자한 그 영어 쪽지 시험.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나는 영어를 그다지 잘하는 편이 아니었으니까, 이 순간 1분 1초가 소중했다.

“우리 노을이는 박력도 넘치는 거 같아.”

짝이 놀러 나가 빈 내 옆자리에 앉은 이안이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칭찬하고 있었다. 또 시작이다 싶어 헛웃음을 쳤더니, 내 웃는 얼굴이 귀엽다고 물개 박수를 마구 쳐 댄다. 미친놈도 이런 미친놈이 없었다. 이 미친놈과 이런 대화를 한 게 벌써 12년째였다. 득도를 아직 못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 가라고!”

“왜, 시험 잘 보라고 응원해 주고 싶은데.”

“그게 퍽이나 응원이 되겠다. 악, 나 3분 남았다고!”

결국 책을 대강 엎어 두고 선이안의 팔을 질질 끌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얘를 쫓아내야 공부다운 공부를 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 다 있는 교실에서 이러는 게 쪽팔린 건 이미 애들이 익숙해졌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공부에 방해가 돼서 살 수가 없었다.

수행 평가는 중요했다. 수행 평가를 잘 받아야 성적이 잘 나오고, 성적이 잘 나오면 대학교 선택 폭이 더 넓어지니까. 그러면 선이안과 다른 대학교에 갈 수 있다. 캠퍼스에서도 이 미친놈과 붙어 다닐 수는 없었다. 얘의 미래 대학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는 게 내 꿈이었다. 내 캠퍼스 라이프는 소중했으니까.

내 손에 이끌려 못 이기듯 교실을 나선 이안은 한숨을 푹 내쉬며 불쌍한 표정으로 복도 벽에 기대섰다. 저 표정에 속아 넘어간 게 벌써 5백 번은 넘지 않았을까.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7반 쪽으로 이안의 등을 떠밀었다. 바로 옆 반인데도 이안은 발을 떼지 못하고 말끄러미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강아지 같아서 자꾸 마음이 약해지려고 했다. 수행 평가, 수행 평가! 눈앞에 닥친 고난을 마음에 되새기고 애써 이안을 째려봤다.

“이따 밥 먹기 전까지는 오지 마.”

“그러면 노을이 보고 싶어질 때 어떻게 해……?”

“너 아까도 내 사진 찍은 거 모를 줄 알아? 그거 보면서 참아.”

아까 이안이 교실로 쳐들어오기 전, 복도 쪽 창문 너머로 찰칵거리는 소리를 분명히 세 번 들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안의 손에 쥔 휴대폰을 바라봤더니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이안은 또다시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잘생기기는 더럽게도 잘생겨 가지고.

유치원 튤립반 시절, 바로 저 얼굴 축소판에 넘어가 결혼하자고 말을 꺼냈던 게 화근이었다. 거기에 발목을 잡힌 게 어느덧 12년이었다. 물론 그때 이안은 ‘노을이는 내 동생이니까 결혼 못 해. 내가 평생 지켜 줘야지’ 하는 말로 내 청혼을 거절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약간-사실은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겼었다. 선이안과 내가 그렇게 커 온 탓이었다. 제일 친한 친구이자 형제만큼 가까운 사이로. 우리의 부모님들은 바쁘셨고, 늘 시간이 없으신 분들이었다. 둘 다 외동인 우리는 각자 알아서 유치원에서 시간을 때웠고, 그러다 안면을 트게 됐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어릴 땐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의 나는 선이안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을 거였다. 확실하게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까.

이안과 내가 친구가 되자 우리 부모님도 서로 친구가 되셨고, 동생을 갖고 싶다고 떼를 쓰는 이안에게 우리 엄마는 이상한 한마디를 덧붙여 버렸다.

‘호호, 우리 노을이가 이안이보다 생일이 느리니까, 노을이가 이안이 동생 하면 되겠네.’

그리고 거기서부터 비극은 시작됐다. 비극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이안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노을이를 만난 건 행운인데 무슨 소리냐고 길길이 날뛸 게 눈에 선하지만 사람이 말은 바로 해야 했다. 비극은 비극이었다. 어느 정도는 희극적인 비극.

“그러면 노을아, 아까 사 온 초코송이 가방에 넣어 놨으니까 꼭 먹어. 원래 공부할 땐 단거 먹어야 돼. 알았지?”

“오다 주웠다더니.”

“응, 주운 초코송이. 나 갈게, 이따가 봐.”

여전히 아련한 얼굴을 한 채 이안은 손을 흔들다 제 반으로 돌아갔다. 제가 서 있던 데서 세 발짝만 걸으면 자기 반이었다. 한 시간 전 쉬는 시간에도 여기서 놀았으면서, 이안은 그새 풀이 죽은 채로 발걸음을 뗐다.

참 나, 웃음이 새어 나오려고 해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쩌면 문제는 내가 얼빠라는 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는 짓이 저렇게 좀 많이 멍청이 같은데 그게 또 귀여워 보였다.

머뭇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걷는 이안을 보기를 잠시, 수업 시작종이 울렸다. 자꾸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고서 이제 막 단어를 외워 볼까 하며 발을 떼던 순간이었다. 못 외운 단어가 열다섯 개는 넘었는데, 이미 복도 끝에 학주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10분 뒤, 나는 빨간 비가 내리는 시험지를 앞에 두고서 ‘선이안 진짜 죽었어’를 염불처럼 외우고 있어야 했다.



***



선이안과 나의 첫 만남은 무려 여섯 살이 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빠의 전근으로 인해 처음 서울로 올라왔던 저 아득한 어느 날, 나는 샛노란 원복을 입고서 튤립반에 첫발을 내디뎠었다. 사실 나는 네 살부터 의젓하게 유치원에 다니던 어린이였기에 그날의 등원은 내게 있어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선이안이 눈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랬다.

선생님이 내 소개를 해 주는 내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아이들과는 달리 선이안은 꼿꼿이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똘망똘망한 게, 토끼 같은 어린이였다. 사건의 발단은 거기서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다. 조그만 손으로 꾹 쥔 주먹을 양 무릎에 올려놓고, 초롱초롱 나를 올려다보고 있던 선이안. 쟤 뭐야, 진짜 귀여워. 선생님이 시킨 자기소개를 어떻게 대강 끝마치는 중에도 나는 이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짧은 자기소개를 대충 끝내자마자 나는 쪼르르 이안의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안녕, 속닥이며 샐쭉 웃는 내게 선이안은 통통한 볼을 빨갛게 붉히며 마주 웃어 주었다. 즐거운 첫 등원 날이었다. 토끼 같아, 귀여워.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1년 뒤, 이안은 내게서 프러포즈를 받았다.

어쩌다 이안의 ‘동생’이 된 후, 처음엔 낯을 가리는 듯하던 이안은 곧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노을이 귀여워, 하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복 학습으로 인해 나는 점점 이안이 예쁜 또라이 토끼라는 사실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우리가 유치원을 막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도 이안은 정말로 나를 제 동생처럼 생각했다. 미래 모습을 그려 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밤새 열심히 그려 냈던 건 예쁜 꽃이 가득한 큰 정원과, 거기 저와 함께 서 있는 ‘이노을’일 정도였으니까. 삐뚤빼뚤하게 쓰인 ‘내 동생’이라는 글자는 덤이었다.

물론 점점 커 가면서, 언젠가부터 이안은 말도 안 되는, 내가 동생이니 뭐니 하는 얘기들을 꺼내지 않기 시작했다. 다만 그때의 애정이 이상한 방식으로 발전해 지금은 남들과는 좀 다른 우정으로 변형됐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그래서 요점은, 선이안과 나는 조금 괴상하게 친한 사이라는 거다. 같이 놀기 시작한 지도 벌써 12년을 다 채워 가고, 이안은 나를 귀엽다고 쫓아다니며 안달하는 뭐 그런 관계. 만약 다른 애들이 그랬다면 뭐야, 징그러워, 미친놈아, 했을 법한 일들도 이안이 한다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익숙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이안은 어릴 때부터 늘 그래 왔으니까. 예를 들면 지금도 그런 순간 중에 하나였다.

“너 이거 보고 감상문 써야 된다고.”

“응, 알아.”

“그럼 영화를 봐야지.”

왜 내 사진을 보는데 멍청아. 다들 영화에 집중한 CA 시간, 속닥속닥 소리를 줄여 건넨 말에 이안은 손에 든 휴대폰을 소중하게 무릎 위로 내려놨다. 이안이 보던 사진은 오늘 낮 복도에서 찍은 내 사진이었다. 하루에 최대 열 장만 찍기로 약속을 했으니, 이제 오늘 분량은 최대치까지 서너 장쯤 남았을 터였다.

또라이는 맞지만, 하지 말란 건 또 칼같이 지키는 또라이였다. 별 대단한 사진도 아니고 매일 보는 얼굴인데 저 사진을 왜 지금 또 보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이안의 휴대폰을 뒤져 보면 비슷한 각도의 내 사진이 30장은 더 나올 것 같았다. 게다가 심지어 저 사진의 실물은 지금 선이안의 옆에 앉아 있었다. 뭐 하러 사진을 보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애초에 선이안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과한 시도기는 하지만.

영화 보는 것보다 노을이 사진 보는 게 더 재밌어, 이안은 속닥속닥 그런 말을 꺼내 놓고서는 다시 휴대폰을 들어 내 사진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새침하게 웃는 얼굴이 사뭇 진지하기까지 해서 어이가 없었다. 보아하니 내 사진을 모아 두는 전용 폴더도 있는 모양이었다.

내 얼굴을 보는 게 재밌다는 건 내가 웃기게 생겼다는 뜻일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인상을 찌푸렸더니 이안은 ‘너 일곱 살 때 사진도 있는데, 볼래?’와 같은 쓸데없는 질문을 해 왔다. 그런 건 왜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젠 우리 엄마도 내가 다 커서 징그럽다고 하는데.

“아니.”

칼같이 거절의 말을 속닥이고서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서 이안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감상문은 써야 하는데.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는 이안을 흘긋 보며 잠깐 내적 갈등을 하다, 곧 그냥 영화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늘 있는 CA 시간이고 영화는 지루했으므로 감상실 안 3분의 2는 이미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까 얘도 이대로 내버려 둬도 되지 않을까. 내가 왜 이런 걱정을 하고 있어야 되는 건지 조금 억울해졌다. 타고난 얼빠만 아니었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여전히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이안을 바라보다 포기한 채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대앉았다.

영화가 막 클라이맥스를 지날 무렵, 시선 끄트머리에 나를 흘긋거리는 이안의 얼굴이 보였다. 영화가 지루한 듯 아까부터 손을 꼼질거리고 있더니, 아예 영화 감상은 포기해 버린 모양이었다. 왜, 뭐. 입 모양으로 물으니 이안은 내가 뭐?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잠깐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안을 쳐다봐 주고는 다시 저 앞 스크린을 바라봤다. 옆얼굴로 이안의 해맑은 시선이 와 닿는 게 느껴졌다. 이미 영화에 집중하는 건 물 건너간 것 같았다.

사실 말하자면 이안은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건 나였고, 언제나 내가 VOD를 보고 있으면 이안은 그 옆에 앉아서 책을 읽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영화관에 간 적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따지고 보면 이안은 굳이 영화를 찾아서 보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게 독서 감상부로 가라고 5백 번은 말했었는데, CA를 신청하던 날, 이안은 굳이 나를 따라 영화를 보겠다고 결연한 얼굴을 해 보였다.

책을 읽는 데에 친구가 크게 필요한 건 아니었는데, 이안은 자기가 낯을 가린다며 친구가 없는 부서는 가기 싫다고 입술을 삐죽였다. 하는 걸 보면 별로 낯을 가리는 것 같지도 않던데, 그냥 가서 책 읽으면 되지 않나. 그리고 그냥 교실에 가서 가만히 앉아 생글생글 웃고만 있어도 이안에겐 나 같은 얼빠 친구가 두세 명쯤 생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안이 나를 제외한 타인에게 어느 정도는 철벽남이긴 했지만 인맥 관리는 나름 잘하는 것 같았는데…….

사실은 알고 보면 새 친구를 만드는 게 좀 어려운 모양이었다. 갑자기 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 줬더니, 이안은 좋다고 머리를 디밀어 댔다. 손 밑에 마구 비벼지는 머리를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매번 CA마다 이안은 내 책임이 돼 있었다. 이안의 기준에서 무서운 게 나오면 종종 손도 잡아 줘야 했고, 좀비 영화라도 보는 날이면 밤잠을 설치는 이안이 새벽 1시쯤 걸어오는 전화도 받아 줘야 했다.

뭐, 그래도 그게 영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 좀비 영화 같은 건 나도 무서웠으니까. 불을 끄면 좀비가 문을 두드릴 것 같아 불을 켜고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던 밤마다, 이안에게서 걸려 온 전화는 좀 반갑기도 했다. 그래도 오래된 친구라고 목소리를 들으니까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 밤마다 나는 선이안과 한 시간쯤 쓸데없는 얘기들을 늘어놓다가 전화도 끊지 못한 채로 잠이 들었다. 만약 이안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친구인 이정민이나 김윤서가 새벽 1시에 전화를 걸어서 좀비가 나올까 봐 무섭다고 했더라면,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전화를 끊어 버리지 않았을까. 소꿉친구라는 건 내게 있어서 그런 의미였다. 선이안이니까 할 수 있고, 선이안이니까 괜찮은 일들이 있었다.

뭐, 그에 반해 괜찮지 않은 일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

“영화 보라니까, 왜 내 손을 조물락거리는데.”

“노을이 손등이 보들보들해서, 귀엽잖아.”

“뭐라는 거야.”

이안은 늘 내 손이 예쁘게 생겼다고 손을 조물락대고는 했다. 여섯 살 때야 괜찮았지만, 지금은 좀 느낌이 이상했다. 왠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머쓱한 기분에 늘 손을 툭툭 쳐 내는데도 이안은 매번 다시 손을 내밀곤 했다. 하여간에 어지간한 내 덕후였다.

영화 내용보다는 선이안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 상태로 영화 상영은 끝이 났다. 그리고 동시에 선이안은 내게 호되게 손을 얻어맞았다. 물론 내가 작년에 이안이 선물해 준 핸드크림을 꼬박꼬박 바르고는 있지만, 당연하게도 그건 손이 거칠거칠해서였지, 이안에게 손등을 내주려고 그렇게 바르던 게 아니었다.

하여간에 이 또라이는 내가 아련하게 우리의 옛날 일을 떠올릴 시간 같은 건 주지를 않았다. 내가 느긋하게 영화를 감상할 만한 시간도 마찬가지였고.

우리 노을이는 어릴 때부터 손이 맵더라……. 다 큰 아들을 보는 것 같은 기특한 표정으로 저딴 말을 하고 앉아 있는 이안을 한심하게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실로 올라가서 얼른 공부를 해야 했다. 원서 접수 기간에 기필코 저 미친놈과 다른 대학을 몰래 써내는 것, 그게 스무 살이 되기 전 내가 이뤄야 할 목표였다.



***



어릴 때부터 선이안은 인간관계를 적당히 잘 유지하는 데에 재능이 있었다. 엄청나게 친한 친구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지만, 얼굴을 알고 서글서글하게 잘 지내는 애들은 꽤 있었으니까. 평소 나한테 하는 짓들을 보면 나사가 열다섯 개쯤 빠진 모양새였지만 대외적으로는 멀쩡했다는 소리다.

웃기도 잘 웃고, 예의 바르며 친절했다. 공부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곧잘 하는 편이고, 나 같은 얼빠를 홀릴 만한 외모는 기본 베이스였다. 다른 애들이랑 있는 걸 보면 되게 멀쩡해 보였다. 하도 어릴 때부터 알아 온 나와 함께 있을 때면 조금 멍청이같이 구는 게 문제기는 했지만, 아마도 그건 그냥 나에게만 문제가 되는 사항인 것 같았다.

그게 제일 큰 문젠데, 왜 사람들은 그걸 몰라줄까. 저를 찾아온 친구와 뭐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안을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리가 멀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뭔가 재밌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까 급식을 먹을 때부터 축구 경기를 위해 몸을 푸는 지금까지 이안을 찾던 친구가 벌써 대강 일곱 명쯤이었다. 이안이 하도 노을아, 노을아, 내 이름만 부르면서 쫓아다니기에 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는데, 밖에서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 말고 다른 친구들도 많고.

잠시 더 뭐라고 대화를 나누다가, 이안의 친구는 손을 흔들고는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햇빛이 쨍한 운동장에 선 이안은 친구에게 손을 마주 흔들어 줬다. 그리고, 곧 스탠드에 앉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씩 웃어 보인다. 원래대로라면 손이라도 흔들어 줬을 텐데, 뭔지 모를 기분에 나는 인사 대신 대강 고개를 끄덕이곤 손에 쥔 음료수 캔을 만지작거렸다. ‘우리 노을이가 좋아하는 거’라고 이안이 기어코 던져 주고 간 캔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어린 시절, 유치원에서 같이 놀 때부터도 이안은 발이 넓은 편이기는 했다. 나도 이리저리 아는 친구들을 만들어 놓고 다니는 타입이지만-선이안한테 먼저 친한 척을 한 것도 나였으니까- 이안은 나보다도 더한 것 같았다. 어릴 때는 낯을 가리는 듯하더니, 조금씩 머리가 커 가면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애들에게 사근사근하게 굴기 시작했다.

그런 걸 보고 있을 때면 쟤가 많이 컸구나, 싶기도 하면서 기분이 좀 이상한 게 사실이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는 새지 않는다는 게 새삼스레 낯설기도 했고, 우리가 아는 친구의 범주가 꽤 많이 달라졌다는 게 어색하기도 했다.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이안의 다른 친구들을 여럿 봐 왔음에도 그때마다 나는 그게 좀 생경했다. 아무래도 이건 너무 어릴 때부터 하루 종일 붙어 있는 데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가벼워진 캔을 옆에 내려놓고 운동장을 바라봤다. 그새 이안이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우리 노을이, 다 마셨네.”

“어, 뭐.”

“한 캔 더 뽑아다 줄까?”

“됐어. 내가 애냐.”

나도 손 있거든. 이쪽으로 오자마자 다시 새기 시작하는 바가지에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더니 이안은 대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음료수 사 먹는 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왜 벅찬 표정을 짓는 건지 어이가 없어서 아까처럼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는 이안의 팔을 저쪽으로 떠다밀었다. 축구 한다며, 빨리 내려가. 내 말에 이안은 금세 풀이 죽은 척 어깨를 늘어뜨렸다.

“노을이는 내가 축구 하러 가는 게 아쉽지 않아……?”

“그게 왜 아쉬워.”

“30분이나 떨어져 있는데.”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 이안은 ‘노을이는 차도남이네. 멋있다’ 같은 되도 않는 말을 해 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건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이안의 시선을 무시하고서 다시 팔을 툭 밀었더니 이안은 못 이기는 척 스탠드에서 발을 떼 냈다. 불만이라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 서 있다가는, 하얀 교복 셔츠만 입은 등이 곧 저 멀리 운동장 쪽으로 멀어졌다.

사실 중학교 때였나, 언젠가 저 얼굴에 속아 ‘그럼 같이 축구 하든지’ 하고 경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살다 살다 그런 미친 짓거리는 처음 봐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희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때 우리가 했던 경기는 분명히 축구였다. 짝피구 같은 게 아니라. 그럼에도 선이안은 내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그리고 내 쪽으로 공이 올라치면 아기 걸음마를 보는 아빠처럼 박수를 치면서 공을 차라고 응원을 해 댔다. 축구를 하다 말고 얼빠진 표정을 짓는 애들을 보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나중에는 창피해서 공이 내 쪽으로 올 때마다 기겁을 하게 됐다. 축구를 할 때 공을 피해 다니는 놈이 또 어딨을까 싶었지만, 옆에서 진성 미친놈이 따라다니며 짝짝 박수를 쳐 대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그 지옥 같은 경기를 마지막으로 나는 다시는 선이안과 축구를 하지 않았다. 단둘이 축구를 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면 이안은 자살골을 열 번도 더 넣고서 노을이 실력이 늘었다며 기뻐할 인간이었으니까.

상상 속 선이안이 당장에라도 튀어나와 환호를 할 것 같아 진저리를 쳤다. 원래부터가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이안과 축구를 같이 꼭 하고 싶은 적도 없었지만 저 꼴을 내 눈으로 안 봐도 된다는 건 정말 큰 행복이었다.

손에 들린 빈 캔을 만지작대며 운동장을 바라보니 이쪽을 쳐다보는 선이안이 보였다. 요리조리 뛰어다니는 애들 사이에서 이쪽을 보다가, 나랑 눈이 마주치니 한차례 씩 웃고서는 공을 향해 뛰어간다. 회전목마에 아들내미를 태워 놓고 한 바퀴를 돌 때마다 손을 흔들어 주는 부모님의 마음이 이런 걸까.

그래도 생각보다 경기가 지루하지는 않았다. 저 땡볕에서 뛰는 걸 싫어할 뿐이지, 축구를 보는 건 재밌었다. 아무리 아마추어 고등학생들이 정신 사납게 뛰어다니기만 하는 경기더라도.

공은 정신없이 날아다니고, 애들은 괴성을 지르며 공 뒤꽁무니를 쫓아다녔다. 그 와중에도 선이안은 주기적으로 내가 앉은 쪽에 손을 흔들어 가며 해맑게 웃어 댔다. 이쯤이면 회전목마를 탄 아들내미가 나인지 이안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쟤 또 인사해?”

“어…… 뭐……. 반가운가 보지.”

그리고 약 다섯 번쯤 인사를 받았을 때, 새끼손가락 끝에 새까맣게 흑연을 묻힌 정민이 털레털레 다가와 옆에 자리를 잡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이안이 나한테 저러는 꼴을 봐 왔어도 아직도 새삼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긴 해서 나는 가만히 고개만 주억거렸다.

“숙제는 다 했냐?”

“어, 나 진짜 손가락 나가는 줄.”

정민은 관절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징징거렸다. 물론 진지하게 내민 정민의 손은 슬쩍 보기에도 튼튼하고 멀쩡해 보였다. 그래. 아프겠네……. 심드렁하게 대답했더니 정민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나도 축구공 잘 차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진짜로 억울한 듯 정민의 목소리엔 한이 서려 있었다. 지각을 걸려도 하필이면 학주에게 걸린 게 잘못이었다. 학주는 우리 반 영어 담당으로, 정민에게 주어진 숙제는 교과서 지문 깜지였다. 다섯 장, 빽빽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