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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2화
1. 나는 너를 (2)
곰 같은 덩치가 어깨를 접고 있는 게 안쓰러워 툭툭 등을 쳐 줬다. 축구란 건 내일도 할 수 있는 거였다. 원래 남자 고딩들이란 그런 거니까. 더워 죽을 거 같은 때도, 얼어 죽을 거 같은 때도 애들은 우르르 밖으로 몰려 나가 공을 원수진 것처럼 차 댔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볼 때 내일 이정민은 이 시간에 저 틈바구니에 끼어 공을 차고 있을 터였다.
“야, 쟤 왜 그래.”
산만 한 등을 툭툭 두들기다 정민의 목소리에 운동장을 바라봤더니 이안이 또 멀뚱하게 이쪽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웃지 않는 채였다. 왜 저래, 갑자기. 다섯 번이나 눈을 마주칠 동안 단 한 번도 인사를 안 해 줘서 삐친 건가 싶어 얼른 경기나 하라고 손을 흔들어 줬다. 내가 좀 심하기는 했다 싶었다. 이안은 은근히 마음이 여린 데가 있었으니까.
마지못해 손을 흔드는 나를 보고서도 이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옆에서 선이안의 기행을 바라보고 있던 정민이 배시시 웃으며 나도 손 흔들라는 건가? 하고는 오른손을 들어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랬더니 이안의 표정이 확 구겨지는 게 보였다.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이안은 다시 공이 있는 쪽으로 뛰어갔고, 정민은 상처를 받았다며 또 징징거렸다.
손도 아픈데 마음도 아프다고 울먹이는 정민의 얘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방금 전 이안의 얼굴을 떠올렸다. 솔직히 얼빠진 것처럼 웃지 않을 때, 그러니까 저럴 땐, 역시 잘생겼다 싶었다. 간만에 보는 정상적인 모습에 속으로 기립 박수를 쳤다. 새삼스럽지만 어릴 때부터 내가 얼빠가 된 이유가 있다 싶었다. 저렇게 가만히만 있으면 이안은 굉장히 멀쩡하고 잘생긴 남학생처럼 보였다.
대체 그놈의 우정이 뭐라고 내가 저런 애를 미친놈으로 만들어 놓은 건지, 가끔은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물론 나한테 하는 그 정신머리 나간 짓들을 다른 데서는 하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긴 했지만……. 정말로 사방팔방 그러고 다닌다면 감당이 안 돼 끔찍할 것 같았다.
운동장에서 제일 시선이 가는, 팔랑이는 까만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음료수 캔도 버릴 겸 이안에게 뭐라도 사다 줄 생각이었다. 이안이 미친놈인 건 맞지만, 저 미친놈을 챙겨 온 것도 10년이 넘다 보니 거의 생활의 일부가 돼 있었다. 사실은 그게 제일 무서운 일인지도 몰랐다. 저 또라이에게 익숙해진 지가 오래돼서, 어릴 적 그 짝피구인지 축구인지 모를 경기를 생각해도 짜증보다는 웃음이 나온다는 게.
“야, 음료수 사러 갈래?”
“너 뭐 하나 더 마시게?”
“아니, 뭐.”
대강 말을 얼버무리니 정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나섰다. 그 와중에도 나는 선이안이 무슨 음료수를 좋아하는지도 잘 알 것 같다는 게 좀 괴로웠다. 어릴 때부터 소풍을 갈 때면 오렌지 맛 뿌요를 가져오던 선이안의 입맛은-물론 대부분 이안은 내게 그 뿌요를 선물이랍시고 내밀고는 했었다- 지금까지도 그대로였다. 심심하면 제 음료수를 사면서 내 것까지 사다 쥐여 주는 통에 이제 오렌지 맛 음료수 캔을 보면 선이안부터 생각날 지경이었다.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이 기세로 가다가는 둘 다 연애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그것부터도 걱정이었다. 솔직히 잘생기기는 했지만 친구랑 괴상한 우정을 쌓아 가고 있는 이안도, 그 괴상한 우정의 대상인 나도 연애에 있어선 미래가 좀 깜깜한 것 같았다. 이안과 함께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캠퍼스 라이프가 문득 다시 떠올라 한숨이 나왔다.
어릴 때, 나는 뿌요 같은 건 안 먹는다고 거절했어야 되나. 그럼 선이안이 좀 멀쩡해졌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매점으로 향했다. 어쨌건 간에 이안에게 음료수는 쥐여 줘야 했다. 습관이란 건 무서운 거였다.
***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은 걸까. 얘는 전생에 나랑 무슨 관계였을까. 전생에 나는 선이안을 종으로 부린 악덕 귀족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안이 나한테 이렇게까지 심적 스트레스를 줄 리가 없었다.
마시라고 준 음료수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있는 이안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다가 모르는 척 책을 펴고 자리에 앉았다. 매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종종 먹을 것도 사다 주고, 생일마다는 선물도 줬었는데, 선이안은 내가 내민 음료수에 새삼스레 또 감동을 받아 저 모양이었다. 이안은 노을이가 준 걸 어떻게 마시냐고 감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음료수를 저대로 집에 싸 가겠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미친 소리였다. 땡볕 아래서 공을 차겠다고 뛰어다닌 터라 얼굴은 빨갛게 열이 오른 지 오래면서, 마시라고 준 걸 저러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관종의 기질이 있었다면 이안과 환상의 콤비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관심을 그렇게까지 즐기는 편이 아니었기에 이안이 방해꾼으로 보였다. 아까는 정민이 인사를 했다고 삐치더니, 음료수 하나에 다시 말짱해진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혼란이 왔다. 그러건 말건 난 창피해 죽을 것 같았는데.
“너 이제 가.”
“왜?”
이안은 여전히 음료수를 소중하게 품에 안은 채 물었다. 왜긴 왜야, 네가 그러고 있으니까지.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는 뭐한 말을 꾹 삼키고 이안을 쳐다봤다. 점심시간이 5분쯤 남은 교실은 교과서를 꺼낸다, 신발을 갈아 신는다, 체육복을 갈아입는다 등등 온갖 부산을 떠는 애들로 복작거렸다.
그 틈바구니에서 수줍게 음료수를 껴안은 선이안은 내게 있어 그다지 달가운 풍경이 아닌 것 같았다. 축구도 안 한 이정민은 그냥 있어도 칙칙한데, 30분 내내 뛰고 땀투성이가 된 선이안은 왜 저렇게 화사한 걸까. 심지어 얘는 땀 냄새도 안 나는 것 같았다. 문득 어릴 적부터 뛰어났던 내 안목이 감탄스러워 한숨이 나왔다.
“노을이가 그렇게 쳐다보면 좀 부끄러워…….”
“그러니까 빨리 꺼져라.”
아까 내가 운동장에서 본, 멀쩡한 것 같았던 이안은 환각임에 틀림없었다. 바가지가 안 새기는 뭘 안 새냐고. 대자보라도 만들어 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꼴을 나만 안다는 게 억울했다. 반쯤은 썩은 것 같은 내 표정에 이안은 다시 한번 수줍게 씩 웃더니 이따가 다시 올게, 서운해 하지 말고 있어, 하는 말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서운할 건 내가 아니라 본인인 것 같은데.
아까 인사 때문에 이안이 삐쳤던 게 생각나서, 이번에는 순순히 마주 손을 흔들어 줬다. 이안은 여전히 소중히 음료수를 껴안은 채 우리 교실을 나섰고, 나는 아직 오후 수업이 남았음에도 진이 빠진 기분을 느껴야 했다.
옆 분단에서는 정민이 윤서를 붙잡고 아무래도 깜지 때문에 제 손가락 관절이 나간 것 같다고 울먹이고 있었다. 그에 윤서는 게임을 한 판 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같이 롤을 하자고 응답했다. 왜 내 주변은 다 이런 걸까……. 코끝이 찡했다.
울먹이는 정민과 눈을 빛내며 게임 얘기로 대꾸를 하는 윤서를 보고 있자니 종이 쳤다. 집에 가기까지 아직도 세 시간이나 남아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심지어 이번 시간은 제일 지루한 영어 시간이었다. 아직 학주가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벌써부터 심심해지는 기분이었다.
[노을아, 뭐 해? 오후 2:01]
하지만 선이안은 나한테 심심할 틈도 주지를 않았다. 방금 전에 갔으면서 이런 메시지는 왜 보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던 학생이 수업 시간에 뭘 하겠냐고. 연신 뭐 하냐고 이어지는 글자들을 보다가 대강 공부. 두 글자를 써 보내고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교과서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 주까지 모의고사 대비 문제 풀이를 해 오라는 학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보다 인생이 두 배로 피곤해졌다. 어쩔 수 없이 이건 선이안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영어라니.
고등학생의 인생이란 뭘까를 고찰하다 몰래 책상 밑으로 다시 휴대폰 액정을 켰다. 거기에는 이안이 보낸 잡다한 메시지가 몇 개 더 와 있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쓸데없는 말일 걸 알기에 주말에 나 영어 좀 도와줘, 하는 메시지를 보내고는 창을 닫았다. 이안은 또 바로 답장을 보냈고, 알림 바에는 선이안이라는 세 글자가 가지런히 놓였다.
이번 주말, 선이안은 우리 집에서 같이 놀다 하룻밤 자기로 돼 있었다. 물론 내가 요청한 건 아니었다. 이안을 만나는 건 학교에서 시달리는 걸로도 족했고,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좋았지만, 문제는 우리 부모님이었다.
결혼기념일을 맞아 1박 2일 여행을 가시면서 부모님은 이안을 우리 집에 초대했고, 내가 공부를 하는지 안 하는지 좀 감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나는 그 소식을 이안에게서 들어야 했다. ‘노을아, 우리 같이 공부해서 같은 대학 들어가자!’와 같은 희망찬 말과 더불어서. 누가 우리 집 아들인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어쨌건 간에 그래서 나는 이번 주 토요일, 하루 종일 선이안과 강제로 붙어 있을 예정이었다. 그 김에 영어 숙제나 좀 때우면 되겠지. 하루 내내 내 얼굴을 보며 실실 웃고 있을 선이안이 떠올라 어이없는 웃음이 픽 터졌다.
뭘 하고 놀아 줘야 할까. 약간의 의무감으로 머리를 싸맸다. 뭘 해도 좋아할 테지만, 역시 쟤는 책을 읽고, 나는 영화를 보는 게 가장 평화로운 풍경이 아닐까 싶었다.
[주말 영화 콜? 오후 2:03]
[그래*^^* 노을이가 보는 건 다 좋아! 보자 보자 오후 2:03]
역시나 예상대로의 답장이라, 대충 ㅇ을 하나 보내 주고는 수업에 집중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였다. 특히 나는 이번 쪽지시험으로 수행 평가 점수가 엉망진창이 됐기에 지금은 단어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했다. 다 듣고 필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열정이 불타올랐다.
다만 그러는 중에도 계속 이안이 신경 쓰였다. 얘는 공부를 안 하나. 휴대폰은 몇 번 반짝이다 멈췄지만 신경이 계속 그쪽으로 향했다. 하여간에 어릴 때부터 손이 많이 가는 애였다. 그때는 토끼 같아서 귀엽기나 했지.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몰래 휴대폰 액정을 켰다. 이안이 보낸 건 저를 닮은 토끼가 하트를 그리고 있는 이모티콘 몇 개였다.
별 쓸데없는 내용의 카톡을 대충 훑어봤다. 영어 공부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머리를 맴돌긴 했지만 하기가 싫었다. 선이안이 도와주겠지 싶은 마음에 안심이 되는 탓이기도 했다. 이안은 언제나 친절하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설명해 줬으니까.
자상하고 상세한 이안의 목소리에 정민과 윤서는 선이안은 대단한 놈이라고, 너 운전 가르칠 때도 진심으로 칭찬만 할 것 같다고 박수를 쳐 댔었다. 운전면허는 내가 먼저 딸 거거든, 새침하게 응수했지만 둘은 들은 척도 안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선이안이 먼저 면허를 따고, 나한테 생글거리며 가르쳐 줄 것 같긴 했다. 쟤는 뭐든지 잘하는 편이니까.
저런 애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화면에서 열심히 하트를 그리는 토끼를 보다가 뒤로 가기를 눌렀다. 요새 볼 게 뭐가 있나, 휴대폰 화면을 이리저리 넘기다 문득 달력 어플 위에서 손이 멈췄다. 선이안, 세 글자는 달력 어플, 다음 주 토요일 날짜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뒤에 생일이라는 두 글자를 달고서.
요즘 들어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는데, 다음 주 토요일이 이안의 생일이었다. 머릿속으로 대강 날짜 계산을 해 봤다. 이번 주 주말에는 선이안이 우리 집에서 자고 간다고 했으니까, 다음 주 중에 당장 선물을 사야 했다. 우리 집에서 놀 거라고 들뜬 이안에게 차마 오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다음 주의 언젠가는 핑계를 대고 이안과 따로 집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사실 이렇게 선물을 사 주는 것도 10년이 넘었지만 아직 ‘네 선물 사러 갈 거니까 너 혼자 집에 가라’는 말을 하기엔 좀 낯부끄러웠다. 역시 선물은 서프라이즈가 최고였다.
[야, 선이안이 좋아할 만한 게 뭐 있지? 오후 2:25]
다만 문제는 뭘 사 주냐는 거였다. 윤서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생각에 잠겼다. 예전에 뭘 갖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일곱 살의 선이안은 ‘동생은 형아한테 선물 사 줄 필요 없어’라는 소리를 했었고, 열 살의 선이안은 ‘나는 노을이가 갖고 싶은 거! 그거 노을이한테 선물로 줄 거야’ 같은 헛소리를 했었다. 그리고 더 성장한 선이안에게서는 ‘노을이가 제일 최고인데, 나는 다 필요 없어’라는 개소리를 들었었다.
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이안에게 뭔가 묻는 걸 포기했다. 뭐만 하면 노을이, 노을이. 정말로 형이 있는 애들은 싸우기 바쁘던데, 쟤는 무슨 문제가 있어서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문상 주면 안 돼? 책 많이 읽잖아. 게임에도 쓸 수 있고. 오후 2:26]
참 한결같은 윤서는 저 같은 대답을 해 왔다. 그래. 윤서는 게임이지……. 영혼 없이 ‘고마워’ 하는 대답을 보내고 다시 머리를 싸맸다. 도서 상품권은 이미 3년째 줬던 선물이었다. 이안은 늘 물개 박수를 치며 좋다고 받았지만, 뭐라고 할까, 네 번이나 상품권을 주기엔 조금 마음이 그랬다.
이번에 또 상품권을 준대도 이안은 좋아할 게 분명하지만-실제로 이안은 도서 상품권을 보자마자 우리 노을이는 내가 책 좋아하는 걸 알아서 이런 것도 준다고, 참 사려 깊은 것 같다고 눈물을 글썽였었다- 그래도 소꿉친구인데 좋아하는 걸 찾아서 줘야 될 것 같았다. 나는 진짜 책임감이 강한 게 문제였다.
[김윤서. 나 책임감 쩔지 않냐. 오후 2:29]
그리고 윤서의 카톡에서 1은 그날이 끝날 때까지 없어지지 않았다. 나는 좋은 친구들이 많은 것 같다…….
***
나는 정말 좋은 친구들이 많았다. 굳이 짜요짜요 두 개를 먹으라고 내밀어 주는 미친놈도 있고, 그거 안 먹으면 날 달라고 소리치는 축구 덕후와, 이따 게임 해서 이긴 사람이 상품으로 가져가자는 게임 덕후도 있었다. 급식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노을아, 짜요짜요. 딸기 맛 우리 노을이 최애잖아.”
“아니, 너 먹어.”
“왜?”
“딸기 이제 최애 아니야.”
딸기 맛이 최애가 아니라는 내 말에 선이안은 상처받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가 딸기도 아니고, 왜 매번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거의 눈물을 글썽일 듯한 청초한 얼굴을 바라보다 결국 ‘거짓말이야’ 하고는 짜요짜요를 받아 들었다. 이걸 안 먹으면 이안이 굉장히 상심할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랬다.
제가 짜요짜요 공장 사장님도 아니고, 어이가 없었다. 하여간에 쟤는 얼굴이 잘생긴 게 최고의 무기였고, 나는 늘 거기에 넘어가는 사람이었다. 토끼같이 생겨 가지고서는. 사실 이제 토끼라기엔 키가 너무 커졌지만, 그래도 아직 나한테는 토끼 같은 여섯 살의 선이안이 익숙했다.
느릿느릿 포장지를 뜯으니 아까부터 짜요짜요를 노리던 정민이 실망하는 게 느껴졌다. 줄 거면 쟤한테 주지……. 눈을 반짝이는 이안을 보며 짜요짜요를 먹었다. 맛있긴 했다. 내가 먹는 걸 보면서 선이안은 연신 ‘나는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것 같아……’ 하고 웃어 보였다. 살살 눈웃음을 치는 게, 잘생기긴 했지만 역시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선이안을 바라보는 정민과 윤서의 눈에 멍청이라고 적혀 있는 것 같아서 그만 좀 하라고 이안에게 눈짓을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응, 왜? 노을이 왜? 이따가 짜요짜요 더 사 줄까? 맛있어? 더 사 줘?”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이안은 내게 또 뭘 사 주려고 눈을 빛내고 있었다. 짜요짜요에서 쓴 맛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급식을 마저 먹었다. 이런 애의 생일 선물을 진지하게 고민했다니, 조금 현타가 오는 것 같았다. 얘는 제가 좋아하는 음료수 한 박스를 대충 사다 줘도 ‘노을이는 내 취향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 하고 박수를 칠 사람이었다.
“야, 야, 그보다 오늘 축구 해?”
“몰라. 우리 반 애들은 한다는데, 너네 반 애들 해?”
“할걸? 나 오늘은 뛴다. 형아가 메시 뺨치는 실력 보여 준다.”
“그래라.”
눈을 빛내는 정민을 보며 이안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 반응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정민이 윤서를 붙들고 ‘나 축구 잘하지 않냐? 그치?’ 하고 물었지만 윤서는 아까 내 카톡을 씹었듯이 이번에는 정민의 말을 씹었다. 참 한결같은 친구였다.
“오늘 운동장 가기 전에 매점 좀.”
“노을이 매점 가? 짜요짜요 사 줄까?”
“미친놈아, 그거 아니야.”
매점에 간다고 했더니 선이안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내 팔을 붙잡았다. 얘는 내가 짜요짜요에 미친 줄 아는 걸까. 아님 진짜 나도 모르게 짜요짜요 공장 사장님네 아들이 된 걸까. 선이안을 한번 한심하게 쳐다봐 주고는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애저녁에 급식을 다 먹고 수다를 떨고 있던 정민과 윤서 역시 일어서고, 이안이 뒤를 따랐다.
급식실 옆에 붙어 있는 매점은 늘 사람이 붐볐다. 이 나이대의 남자애들이란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기 마련이었다. 이미 다 팔려 나간 단팥빵 자리를 보고 속으로 박수를 쳤다. 대단한 놈들이었다.
“노을이 뭐 살 건데, 여기 사람 많은데, 들어갔다가 다치면 어쩌지?”
매점에 몰린 인파를 보고 이안은 제가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발을 동동 굴렀다. 마치 전쟁터를 보는 눈빛이었다. 유난 떠는 걸로는 이 분야 최고인 이안은-요즘에는 헬리콥터 파파 수준으로 그랬다-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내 눈에 선이안이 여섯 살짜리 토끼 같듯, 얘 눈에도 내가 그때의 어린애 같은 모양이었다. 내가 제 ‘동생’이라는 이상한 포지션을 고수하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난 이제 다 큰 열여덟 살의 청년인데, 이안은 나를 과잉보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뭘 사다 주면 되냐고 울먹이는 선이안을 대충 뿌리치고 매점으로 들어섰다. 사람이 많긴 많아도, 나도 멀쩡한 청소년 남자라는 걸 선이안이 알아야 될 텐데. 물건을 찾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고, 나는 곧 계산을 마치고 매점 밖으로 나섰다.
정민과 윤서는 그새 축구를 한다고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고 했다. 열정이 정말 대단한 친구들이었다. 선이안도 열정이 그쪽으로 분산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이안에게 딸기 맛 사탕 다섯 개를 내밀었다.
“아까 나한테 짜요짜요 줬으니까 주는 거야. 너도 딸기 맛 좋아하면서, 날 왜 줘.”
“노을아…….”
나 진짜 감동받았어……. 사탕 다섯 개를 끌어안고 울먹이는 이안을 보며 잠깐 후회를 했다. 열정 분산은 아무래도 글러 먹은 것 같았다. 그냥 사탕도 주지 말걸, 게다가 아까도 이런 장면을 한 번 본 것 같은데, 나는 학습 능력이 없는 걸까 자괴감이 들었다.
“빨리 가, 축구 하러.”
“사탕 먹으면서 축구 할까?”
“그러든지.”
잘생기다 못해 예쁜 얼굴로 샐샐 웃는 이안을 보니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 먼저 앞서 복도를 걸었다. 머쓱하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하고. 저는 맨날 나한테 이거저거 다 갖다 주면서, 사탕에 감동할 일인가.
생각해 보면 이안은 언제나 그랬다. 내가 주는 모든 것에 감동하고, 감격했다. 조금 코끝이 찡해지는 기분에 뒤돌아보니 이안은 벅찬 표정으로 ‘우리 노을이는 뒤통수도 귀엽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막 동글거려’ 하는 말을 건네 왔다. 오랜만에 올라오는 감성을 와장창 부수는 소리였다. 역시 한 번 또라이는 계속 또라이였다. 뒤통수가 세모난 사람도 있는 걸까.
“야, 빨리 축구 하러 가.”
“노을이랑 놀고 싶은데…….”
“시끄러워, 빨리 가.”
선이안을 재촉해 운동장으로 나섰다. 저쪽에서 축구를 준비하는 애들이 보였다. 머뭇거리던 이안은 사탕 네 개를 주머니에 넣고, 하나는 까서 입에 문 채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나 축구 하고 올게.”
“응, 가.”
팔랑팔랑 손을 흔들고서 뛰어가는 이안을 보고 있자니 픽 웃음이 나왔다. 미친놈 같은 이안도 가끔 이렇게 귀엽게 보이는 순간들이 있었다. 정이란 건 무서운 거였다.
1. 나는 너를 (2)
곰 같은 덩치가 어깨를 접고 있는 게 안쓰러워 툭툭 등을 쳐 줬다. 축구란 건 내일도 할 수 있는 거였다. 원래 남자 고딩들이란 그런 거니까. 더워 죽을 거 같은 때도, 얼어 죽을 거 같은 때도 애들은 우르르 밖으로 몰려 나가 공을 원수진 것처럼 차 댔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볼 때 내일 이정민은 이 시간에 저 틈바구니에 끼어 공을 차고 있을 터였다.
“야, 쟤 왜 그래.”
산만 한 등을 툭툭 두들기다 정민의 목소리에 운동장을 바라봤더니 이안이 또 멀뚱하게 이쪽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웃지 않는 채였다. 왜 저래, 갑자기. 다섯 번이나 눈을 마주칠 동안 단 한 번도 인사를 안 해 줘서 삐친 건가 싶어 얼른 경기나 하라고 손을 흔들어 줬다. 내가 좀 심하기는 했다 싶었다. 이안은 은근히 마음이 여린 데가 있었으니까.
마지못해 손을 흔드는 나를 보고서도 이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옆에서 선이안의 기행을 바라보고 있던 정민이 배시시 웃으며 나도 손 흔들라는 건가? 하고는 오른손을 들어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랬더니 이안의 표정이 확 구겨지는 게 보였다.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이안은 다시 공이 있는 쪽으로 뛰어갔고, 정민은 상처를 받았다며 또 징징거렸다.
손도 아픈데 마음도 아프다고 울먹이는 정민의 얘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방금 전 이안의 얼굴을 떠올렸다. 솔직히 얼빠진 것처럼 웃지 않을 때, 그러니까 저럴 땐, 역시 잘생겼다 싶었다. 간만에 보는 정상적인 모습에 속으로 기립 박수를 쳤다. 새삼스럽지만 어릴 때부터 내가 얼빠가 된 이유가 있다 싶었다. 저렇게 가만히만 있으면 이안은 굉장히 멀쩡하고 잘생긴 남학생처럼 보였다.
대체 그놈의 우정이 뭐라고 내가 저런 애를 미친놈으로 만들어 놓은 건지, 가끔은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물론 나한테 하는 그 정신머리 나간 짓들을 다른 데서는 하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긴 했지만……. 정말로 사방팔방 그러고 다닌다면 감당이 안 돼 끔찍할 것 같았다.
운동장에서 제일 시선이 가는, 팔랑이는 까만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음료수 캔도 버릴 겸 이안에게 뭐라도 사다 줄 생각이었다. 이안이 미친놈인 건 맞지만, 저 미친놈을 챙겨 온 것도 10년이 넘다 보니 거의 생활의 일부가 돼 있었다. 사실은 그게 제일 무서운 일인지도 몰랐다. 저 또라이에게 익숙해진 지가 오래돼서, 어릴 적 그 짝피구인지 축구인지 모를 경기를 생각해도 짜증보다는 웃음이 나온다는 게.
“야, 음료수 사러 갈래?”
“너 뭐 하나 더 마시게?”
“아니, 뭐.”
대강 말을 얼버무리니 정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나섰다. 그 와중에도 나는 선이안이 무슨 음료수를 좋아하는지도 잘 알 것 같다는 게 좀 괴로웠다. 어릴 때부터 소풍을 갈 때면 오렌지 맛 뿌요를 가져오던 선이안의 입맛은-물론 대부분 이안은 내게 그 뿌요를 선물이랍시고 내밀고는 했었다- 지금까지도 그대로였다. 심심하면 제 음료수를 사면서 내 것까지 사다 쥐여 주는 통에 이제 오렌지 맛 음료수 캔을 보면 선이안부터 생각날 지경이었다.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이 기세로 가다가는 둘 다 연애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그것부터도 걱정이었다. 솔직히 잘생기기는 했지만 친구랑 괴상한 우정을 쌓아 가고 있는 이안도, 그 괴상한 우정의 대상인 나도 연애에 있어선 미래가 좀 깜깜한 것 같았다. 이안과 함께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캠퍼스 라이프가 문득 다시 떠올라 한숨이 나왔다.
어릴 때, 나는 뿌요 같은 건 안 먹는다고 거절했어야 되나. 그럼 선이안이 좀 멀쩡해졌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매점으로 향했다. 어쨌건 간에 이안에게 음료수는 쥐여 줘야 했다. 습관이란 건 무서운 거였다.
***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은 걸까. 얘는 전생에 나랑 무슨 관계였을까. 전생에 나는 선이안을 종으로 부린 악덕 귀족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안이 나한테 이렇게까지 심적 스트레스를 줄 리가 없었다.
마시라고 준 음료수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있는 이안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다가 모르는 척 책을 펴고 자리에 앉았다. 매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종종 먹을 것도 사다 주고, 생일마다는 선물도 줬었는데, 선이안은 내가 내민 음료수에 새삼스레 또 감동을 받아 저 모양이었다. 이안은 노을이가 준 걸 어떻게 마시냐고 감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음료수를 저대로 집에 싸 가겠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미친 소리였다. 땡볕 아래서 공을 차겠다고 뛰어다닌 터라 얼굴은 빨갛게 열이 오른 지 오래면서, 마시라고 준 걸 저러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관종의 기질이 있었다면 이안과 환상의 콤비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관심을 그렇게까지 즐기는 편이 아니었기에 이안이 방해꾼으로 보였다. 아까는 정민이 인사를 했다고 삐치더니, 음료수 하나에 다시 말짱해진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혼란이 왔다. 그러건 말건 난 창피해 죽을 것 같았는데.
“너 이제 가.”
“왜?”
이안은 여전히 음료수를 소중하게 품에 안은 채 물었다. 왜긴 왜야, 네가 그러고 있으니까지.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는 뭐한 말을 꾹 삼키고 이안을 쳐다봤다. 점심시간이 5분쯤 남은 교실은 교과서를 꺼낸다, 신발을 갈아 신는다, 체육복을 갈아입는다 등등 온갖 부산을 떠는 애들로 복작거렸다.
그 틈바구니에서 수줍게 음료수를 껴안은 선이안은 내게 있어 그다지 달가운 풍경이 아닌 것 같았다. 축구도 안 한 이정민은 그냥 있어도 칙칙한데, 30분 내내 뛰고 땀투성이가 된 선이안은 왜 저렇게 화사한 걸까. 심지어 얘는 땀 냄새도 안 나는 것 같았다. 문득 어릴 적부터 뛰어났던 내 안목이 감탄스러워 한숨이 나왔다.
“노을이가 그렇게 쳐다보면 좀 부끄러워…….”
“그러니까 빨리 꺼져라.”
아까 내가 운동장에서 본, 멀쩡한 것 같았던 이안은 환각임에 틀림없었다. 바가지가 안 새기는 뭘 안 새냐고. 대자보라도 만들어 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꼴을 나만 안다는 게 억울했다. 반쯤은 썩은 것 같은 내 표정에 이안은 다시 한번 수줍게 씩 웃더니 이따가 다시 올게, 서운해 하지 말고 있어, 하는 말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서운할 건 내가 아니라 본인인 것 같은데.
아까 인사 때문에 이안이 삐쳤던 게 생각나서, 이번에는 순순히 마주 손을 흔들어 줬다. 이안은 여전히 소중히 음료수를 껴안은 채 우리 교실을 나섰고, 나는 아직 오후 수업이 남았음에도 진이 빠진 기분을 느껴야 했다.
옆 분단에서는 정민이 윤서를 붙잡고 아무래도 깜지 때문에 제 손가락 관절이 나간 것 같다고 울먹이고 있었다. 그에 윤서는 게임을 한 판 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같이 롤을 하자고 응답했다. 왜 내 주변은 다 이런 걸까……. 코끝이 찡했다.
울먹이는 정민과 눈을 빛내며 게임 얘기로 대꾸를 하는 윤서를 보고 있자니 종이 쳤다. 집에 가기까지 아직도 세 시간이나 남아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심지어 이번 시간은 제일 지루한 영어 시간이었다. 아직 학주가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벌써부터 심심해지는 기분이었다.
[노을아, 뭐 해? 오후 2:01]
하지만 선이안은 나한테 심심할 틈도 주지를 않았다. 방금 전에 갔으면서 이런 메시지는 왜 보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던 학생이 수업 시간에 뭘 하겠냐고. 연신 뭐 하냐고 이어지는 글자들을 보다가 대강 공부. 두 글자를 써 보내고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교과서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 주까지 모의고사 대비 문제 풀이를 해 오라는 학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보다 인생이 두 배로 피곤해졌다. 어쩔 수 없이 이건 선이안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영어라니.
고등학생의 인생이란 뭘까를 고찰하다 몰래 책상 밑으로 다시 휴대폰 액정을 켰다. 거기에는 이안이 보낸 잡다한 메시지가 몇 개 더 와 있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쓸데없는 말일 걸 알기에 주말에 나 영어 좀 도와줘, 하는 메시지를 보내고는 창을 닫았다. 이안은 또 바로 답장을 보냈고, 알림 바에는 선이안이라는 세 글자가 가지런히 놓였다.
이번 주말, 선이안은 우리 집에서 같이 놀다 하룻밤 자기로 돼 있었다. 물론 내가 요청한 건 아니었다. 이안을 만나는 건 학교에서 시달리는 걸로도 족했고,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좋았지만, 문제는 우리 부모님이었다.
결혼기념일을 맞아 1박 2일 여행을 가시면서 부모님은 이안을 우리 집에 초대했고, 내가 공부를 하는지 안 하는지 좀 감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나는 그 소식을 이안에게서 들어야 했다. ‘노을아, 우리 같이 공부해서 같은 대학 들어가자!’와 같은 희망찬 말과 더불어서. 누가 우리 집 아들인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어쨌건 간에 그래서 나는 이번 주 토요일, 하루 종일 선이안과 강제로 붙어 있을 예정이었다. 그 김에 영어 숙제나 좀 때우면 되겠지. 하루 내내 내 얼굴을 보며 실실 웃고 있을 선이안이 떠올라 어이없는 웃음이 픽 터졌다.
뭘 하고 놀아 줘야 할까. 약간의 의무감으로 머리를 싸맸다. 뭘 해도 좋아할 테지만, 역시 쟤는 책을 읽고, 나는 영화를 보는 게 가장 평화로운 풍경이 아닐까 싶었다.
[주말 영화 콜? 오후 2:03]
[그래*^^* 노을이가 보는 건 다 좋아! 보자 보자 오후 2:03]
역시나 예상대로의 답장이라, 대충 ㅇ을 하나 보내 주고는 수업에 집중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였다. 특히 나는 이번 쪽지시험으로 수행 평가 점수가 엉망진창이 됐기에 지금은 단어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했다. 다 듣고 필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열정이 불타올랐다.
다만 그러는 중에도 계속 이안이 신경 쓰였다. 얘는 공부를 안 하나. 휴대폰은 몇 번 반짝이다 멈췄지만 신경이 계속 그쪽으로 향했다. 하여간에 어릴 때부터 손이 많이 가는 애였다. 그때는 토끼 같아서 귀엽기나 했지.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몰래 휴대폰 액정을 켰다. 이안이 보낸 건 저를 닮은 토끼가 하트를 그리고 있는 이모티콘 몇 개였다.
별 쓸데없는 내용의 카톡을 대충 훑어봤다. 영어 공부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머리를 맴돌긴 했지만 하기가 싫었다. 선이안이 도와주겠지 싶은 마음에 안심이 되는 탓이기도 했다. 이안은 언제나 친절하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설명해 줬으니까.
자상하고 상세한 이안의 목소리에 정민과 윤서는 선이안은 대단한 놈이라고, 너 운전 가르칠 때도 진심으로 칭찬만 할 것 같다고 박수를 쳐 댔었다. 운전면허는 내가 먼저 딸 거거든, 새침하게 응수했지만 둘은 들은 척도 안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선이안이 먼저 면허를 따고, 나한테 생글거리며 가르쳐 줄 것 같긴 했다. 쟤는 뭐든지 잘하는 편이니까.
저런 애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화면에서 열심히 하트를 그리는 토끼를 보다가 뒤로 가기를 눌렀다. 요새 볼 게 뭐가 있나, 휴대폰 화면을 이리저리 넘기다 문득 달력 어플 위에서 손이 멈췄다. 선이안, 세 글자는 달력 어플, 다음 주 토요일 날짜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뒤에 생일이라는 두 글자를 달고서.
요즘 들어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는데, 다음 주 토요일이 이안의 생일이었다. 머릿속으로 대강 날짜 계산을 해 봤다. 이번 주 주말에는 선이안이 우리 집에서 자고 간다고 했으니까, 다음 주 중에 당장 선물을 사야 했다. 우리 집에서 놀 거라고 들뜬 이안에게 차마 오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다음 주의 언젠가는 핑계를 대고 이안과 따로 집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사실 이렇게 선물을 사 주는 것도 10년이 넘었지만 아직 ‘네 선물 사러 갈 거니까 너 혼자 집에 가라’는 말을 하기엔 좀 낯부끄러웠다. 역시 선물은 서프라이즈가 최고였다.
[야, 선이안이 좋아할 만한 게 뭐 있지? 오후 2:25]
다만 문제는 뭘 사 주냐는 거였다. 윤서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생각에 잠겼다. 예전에 뭘 갖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일곱 살의 선이안은 ‘동생은 형아한테 선물 사 줄 필요 없어’라는 소리를 했었고, 열 살의 선이안은 ‘나는 노을이가 갖고 싶은 거! 그거 노을이한테 선물로 줄 거야’ 같은 헛소리를 했었다. 그리고 더 성장한 선이안에게서는 ‘노을이가 제일 최고인데, 나는 다 필요 없어’라는 개소리를 들었었다.
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이안에게 뭔가 묻는 걸 포기했다. 뭐만 하면 노을이, 노을이. 정말로 형이 있는 애들은 싸우기 바쁘던데, 쟤는 무슨 문제가 있어서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문상 주면 안 돼? 책 많이 읽잖아. 게임에도 쓸 수 있고. 오후 2:26]
참 한결같은 윤서는 저 같은 대답을 해 왔다. 그래. 윤서는 게임이지……. 영혼 없이 ‘고마워’ 하는 대답을 보내고 다시 머리를 싸맸다. 도서 상품권은 이미 3년째 줬던 선물이었다. 이안은 늘 물개 박수를 치며 좋다고 받았지만, 뭐라고 할까, 네 번이나 상품권을 주기엔 조금 마음이 그랬다.
이번에 또 상품권을 준대도 이안은 좋아할 게 분명하지만-실제로 이안은 도서 상품권을 보자마자 우리 노을이는 내가 책 좋아하는 걸 알아서 이런 것도 준다고, 참 사려 깊은 것 같다고 눈물을 글썽였었다- 그래도 소꿉친구인데 좋아하는 걸 찾아서 줘야 될 것 같았다. 나는 진짜 책임감이 강한 게 문제였다.
[김윤서. 나 책임감 쩔지 않냐. 오후 2:29]
그리고 윤서의 카톡에서 1은 그날이 끝날 때까지 없어지지 않았다. 나는 좋은 친구들이 많은 것 같다…….
***
나는 정말 좋은 친구들이 많았다. 굳이 짜요짜요 두 개를 먹으라고 내밀어 주는 미친놈도 있고, 그거 안 먹으면 날 달라고 소리치는 축구 덕후와, 이따 게임 해서 이긴 사람이 상품으로 가져가자는 게임 덕후도 있었다. 급식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노을아, 짜요짜요. 딸기 맛 우리 노을이 최애잖아.”
“아니, 너 먹어.”
“왜?”
“딸기 이제 최애 아니야.”
딸기 맛이 최애가 아니라는 내 말에 선이안은 상처받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가 딸기도 아니고, 왜 매번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거의 눈물을 글썽일 듯한 청초한 얼굴을 바라보다 결국 ‘거짓말이야’ 하고는 짜요짜요를 받아 들었다. 이걸 안 먹으면 이안이 굉장히 상심할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랬다.
제가 짜요짜요 공장 사장님도 아니고, 어이가 없었다. 하여간에 쟤는 얼굴이 잘생긴 게 최고의 무기였고, 나는 늘 거기에 넘어가는 사람이었다. 토끼같이 생겨 가지고서는. 사실 이제 토끼라기엔 키가 너무 커졌지만, 그래도 아직 나한테는 토끼 같은 여섯 살의 선이안이 익숙했다.
느릿느릿 포장지를 뜯으니 아까부터 짜요짜요를 노리던 정민이 실망하는 게 느껴졌다. 줄 거면 쟤한테 주지……. 눈을 반짝이는 이안을 보며 짜요짜요를 먹었다. 맛있긴 했다. 내가 먹는 걸 보면서 선이안은 연신 ‘나는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것 같아……’ 하고 웃어 보였다. 살살 눈웃음을 치는 게, 잘생기긴 했지만 역시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선이안을 바라보는 정민과 윤서의 눈에 멍청이라고 적혀 있는 것 같아서 그만 좀 하라고 이안에게 눈짓을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응, 왜? 노을이 왜? 이따가 짜요짜요 더 사 줄까? 맛있어? 더 사 줘?”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이안은 내게 또 뭘 사 주려고 눈을 빛내고 있었다. 짜요짜요에서 쓴 맛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급식을 마저 먹었다. 이런 애의 생일 선물을 진지하게 고민했다니, 조금 현타가 오는 것 같았다. 얘는 제가 좋아하는 음료수 한 박스를 대충 사다 줘도 ‘노을이는 내 취향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 하고 박수를 칠 사람이었다.
“야, 야, 그보다 오늘 축구 해?”
“몰라. 우리 반 애들은 한다는데, 너네 반 애들 해?”
“할걸? 나 오늘은 뛴다. 형아가 메시 뺨치는 실력 보여 준다.”
“그래라.”
눈을 빛내는 정민을 보며 이안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 반응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정민이 윤서를 붙들고 ‘나 축구 잘하지 않냐? 그치?’ 하고 물었지만 윤서는 아까 내 카톡을 씹었듯이 이번에는 정민의 말을 씹었다. 참 한결같은 친구였다.
“오늘 운동장 가기 전에 매점 좀.”
“노을이 매점 가? 짜요짜요 사 줄까?”
“미친놈아, 그거 아니야.”
매점에 간다고 했더니 선이안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내 팔을 붙잡았다. 얘는 내가 짜요짜요에 미친 줄 아는 걸까. 아님 진짜 나도 모르게 짜요짜요 공장 사장님네 아들이 된 걸까. 선이안을 한번 한심하게 쳐다봐 주고는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애저녁에 급식을 다 먹고 수다를 떨고 있던 정민과 윤서 역시 일어서고, 이안이 뒤를 따랐다.
급식실 옆에 붙어 있는 매점은 늘 사람이 붐볐다. 이 나이대의 남자애들이란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기 마련이었다. 이미 다 팔려 나간 단팥빵 자리를 보고 속으로 박수를 쳤다. 대단한 놈들이었다.
“노을이 뭐 살 건데, 여기 사람 많은데, 들어갔다가 다치면 어쩌지?”
매점에 몰린 인파를 보고 이안은 제가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발을 동동 굴렀다. 마치 전쟁터를 보는 눈빛이었다. 유난 떠는 걸로는 이 분야 최고인 이안은-요즘에는 헬리콥터 파파 수준으로 그랬다-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내 눈에 선이안이 여섯 살짜리 토끼 같듯, 얘 눈에도 내가 그때의 어린애 같은 모양이었다. 내가 제 ‘동생’이라는 이상한 포지션을 고수하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난 이제 다 큰 열여덟 살의 청년인데, 이안은 나를 과잉보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뭘 사다 주면 되냐고 울먹이는 선이안을 대충 뿌리치고 매점으로 들어섰다. 사람이 많긴 많아도, 나도 멀쩡한 청소년 남자라는 걸 선이안이 알아야 될 텐데. 물건을 찾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고, 나는 곧 계산을 마치고 매점 밖으로 나섰다.
정민과 윤서는 그새 축구를 한다고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고 했다. 열정이 정말 대단한 친구들이었다. 선이안도 열정이 그쪽으로 분산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이안에게 딸기 맛 사탕 다섯 개를 내밀었다.
“아까 나한테 짜요짜요 줬으니까 주는 거야. 너도 딸기 맛 좋아하면서, 날 왜 줘.”
“노을아…….”
나 진짜 감동받았어……. 사탕 다섯 개를 끌어안고 울먹이는 이안을 보며 잠깐 후회를 했다. 열정 분산은 아무래도 글러 먹은 것 같았다. 그냥 사탕도 주지 말걸, 게다가 아까도 이런 장면을 한 번 본 것 같은데, 나는 학습 능력이 없는 걸까 자괴감이 들었다.
“빨리 가, 축구 하러.”
“사탕 먹으면서 축구 할까?”
“그러든지.”
잘생기다 못해 예쁜 얼굴로 샐샐 웃는 이안을 보니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 먼저 앞서 복도를 걸었다. 머쓱하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하고. 저는 맨날 나한테 이거저거 다 갖다 주면서, 사탕에 감동할 일인가.
생각해 보면 이안은 언제나 그랬다. 내가 주는 모든 것에 감동하고, 감격했다. 조금 코끝이 찡해지는 기분에 뒤돌아보니 이안은 벅찬 표정으로 ‘우리 노을이는 뒤통수도 귀엽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막 동글거려’ 하는 말을 건네 왔다. 오랜만에 올라오는 감성을 와장창 부수는 소리였다. 역시 한 번 또라이는 계속 또라이였다. 뒤통수가 세모난 사람도 있는 걸까.
“야, 빨리 축구 하러 가.”
“노을이랑 놀고 싶은데…….”
“시끄러워, 빨리 가.”
선이안을 재촉해 운동장으로 나섰다. 저쪽에서 축구를 준비하는 애들이 보였다. 머뭇거리던 이안은 사탕 네 개를 주머니에 넣고, 하나는 까서 입에 문 채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나 축구 하고 올게.”
“응, 가.”
팔랑팔랑 손을 흔들고서 뛰어가는 이안을 보고 있자니 픽 웃음이 나왔다. 미친놈 같은 이안도 가끔 이렇게 귀엽게 보이는 순간들이 있었다. 정이란 건 무서운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