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화
一
무흥(茂興) 23년.
때를 만나지 못했던 용이 승천했다 하여 교룡승천(蛟龍昇天)이라 불리는 해로부터 22년이 지난 연국. 천하에 태평성대가 도래했노라. 허나 이는 형제의 피를 뒤집어쓴 용의 손에 의한 것이니, 과연 태평성대라 할 수 있는가. 배곯는 민초들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느냐, 금궁의 용이여.
제궐의 주인이 된 기광헌은 수만의 군사 앞에서 선황의 유지를 반포하며 황제에 즉위했다. 허니 용을 교활한 뱀으로 칭하는 항간의 말을 어찌 잘못됐다 하리오. 그러나 연의 땅 아래 뱀의 세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으니 뉘가 함부로 입을 놀릴쏘냐. 용이 패륜을 저질렀다 해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릴 때인 것을.
***
창연한 하늘 아래로 화려한 고층 누각이 즐비한 연국의 수도 가한. 바람을 일으키는 매의 날갯짓 아래로 저자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퍼졌다. 활기찬 사람들의 걸음 틈으로 종종거리며 뛰어가던 아이가 철퍽, 석계에 부딪쳐 넘어졌다. 발그레한 볼에 흙먼지가 잔뜩 묻었으나 아프지도 않은지 아이는 금방 일어나 주루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낙주! 낙주!”
끝이 없을 것처럼 보이는 주루의 가장 꼭대기 층까지 빠르게 올라간 아이는 작은 손으로 연신 장지문을 두드렸다. 허나 크고 작은 소음 탓인지 낙주란 이는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누님! 낙주! 좀 나와라…….”
옆방을 살피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결국 아이는 눈치를 보며 문을 슬쩍 열고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없어……? 낙주 누님.”
“상단에 갔느니라.”
조그마한 몸이 화들짝 놀라 움츠러들었다. 얼굴만 문 사이에 넣은 채로 굳은 모양새가 퍽 귀여웠다. 어찌할 바를 몰라 발끝을 꼼질거리던 아이가 이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 겨우 용기를 가지고 고개를 빼내어 옆에 서 있는 여인을 올려다봤다.
아이의 둥그런 눈이 더 커지더니 얼른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린다.
“평안…… 안녕, 아니. 처음, 처음 뵙겠습니다, 객주님.”
옆방의 기척을 열심히 살폈건만 끝내 객주님이 나오신 걸 보니 저가 많이 시끄러웠나 보다, 아이는 생각했다. 출타하셨기를 바랐는데 이리 떡하니 마주치니 다리에 힘이 다 풀렸다.
“낙주는 어찌 찾는 것이냐.”
“누…… 아니, 아니. 대행수님께서 심부름을 시켜서, 시키셔서.”
부드럽게 풀린 여인의 표정을 보지 못한 아이는 긴장을 삼키며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내게 주고 가거라.”
“예. 그러면 저는…… 아, 안녕히 계십시오!”
황급히 줄행랑을 치는 작은 등 뒤로 짧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객주에 대한 소문 중 무엇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저리 도망치는 걸 보면 그리 좋은 말은 아닐 게 분명했다.
난간 너머로 1층까지 정중앙이 훤히 뚫린 주루의 풍경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였다. 난간을 짚은 객주의 무표정한 눈이 북적이는 내부를 훑었다. 간혹 시선이 마주치는 이가 인사를 올렸으나 그녀의 눈빛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바쁜 이들 사이로 종종 달려가던 아이는 키 큰 여인에게 붙잡혀 은화 하나를 받아 갔다. 여인은 그대로 아이의 코를 한 번 꼬집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객주.”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여인이 미려하게 웃었다. 미소가 잘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가는 길에 빼앗기면 어쩌려고 은화를 줘.”
“아, 제가 그랬었지요. 누이가 어릴 때 은화 하나를 덜렁 던져 주고 가 버려서 그거 지키느라 엄청 고생했는데, 기억나십니까?”
“그랬나.”
“저 아인 괜찮을 겁니다. 쪼그만 게 무척 날랩니다. 해서 심부름도 시키는 것이고. 누이도 산채에선 저한테 심부름을 과하게 시켰었는데, 당연히 기억나실 겁니다.”
“이젠 네가 누이라 부르면 진저리가 난다.”
객주의 얼굴에서 기어코 웃음을 만들어 낸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입에는 객주가 더 붙습니다. 아무래도 그리 부른 세월이 훨씬 오래이니. 누이는 그냥, 놀릴 때 쓰는 신호탄 같은 것이지요.”
어린 시절 뭣도 모르고 산채 아이들을 따라 누이, 누이 부르던 때가 있었다. 나중에서야 저는 누이가 아니라 언니라 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이미 습관이 되어 버려 계속 저 편한 대로 누이라 불렀었다. 지금이야 쓰지 않지만 간혹 놀릴 때면 누이라는 말이 나오곤 했다.
“낙주야.”
“예.”
“기분이 좋아 보이네.”
“…….”
“온이에게서 서찰이 오는 날이었나.”
순식간에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낙주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려다 말고 어색하게 긍정했다.
방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는 객주를 따라 낙주도 딱딱한 몸짓으로 움직였다. 넓은 방 안, 온통 열려 있는 창밖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들었다. 가한에서도 유독 크고 화려한 주루 청호각(靑浩閣)은 옆에 조그마한 객잔을 겸하고 있었다. 청호각의 객주, 청호 상단의 상단주는 그 재물과 따르는 사람의 수가 여느 귀족 못지않다는 소문이 있는 자였다.
청호각 객주 이영. 혹자는 그녀를 이 가(家)라 했고 어떤 이는 그녀에게 성씨가 없다 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청객주 혹은 객주님이라 불렀다. 이영은 청호각으로 시작해 청호 상단을 차려 점차 규모를 키워 갔다. 그리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녀는 청호 상단을 황성 일대 상권을 좌지우지하는 상단 중 하나로 만들었다.
때로 무모한 듯 일을 크게 벌이는 그녀의 성정은 오히려 막대한 재물을 불러왔고, 재물은 또 다른 재물을 낳았다. 최근 상단은 황궁과 멀어지는 가한의 외곽지역과 지방으로도 세를 확장해 가고 있었다. 상단의 거점은 청호각 이영의 방에서 바로 내다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다.
허나 근래 상단의 일로 바쁜 것은 객주 이영이 아니었다. 내부는 여전히 그녀의 명대로 움직이고 있으나 그를 따르고 세부적인 일을 처리하는 것은 낙주로, 외려 그녀가 이영보다 상단에 더 깊게 개입했다. 상단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후 이영이 주로 하는 일은 대외적으로 알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주국에서도 연통이 왔습니다.”
열려 있던 창을 차례로 닫으며 얼굴을 식히던 낙주가 곧 이영의 앞에 앉아 서찰을 내밀었다. 연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주국은 국토의 크기와 병력이 연국과 비슷한 나라로, 이영의 고향이었다. 비록 그녀 스스로는 그리 여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서찰을 받아든 이영의 눈이 느긋하게 글자를 읽어 갔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낙주도 숨죽이고 온에게서 온 서신을 펼쳤다.
“뭐라 적혀 있습니까?”
먼저 고개를 든 건 낙주였다. 이영의 눈길이 서찰 끄트머리에 머물렀다.
“위험한 일입니까?”
“……사람을 찾는다.”
“사람이요?”
서신을 태우는 얼굴에서 아무런 단서도 얻을 수 없어 낙주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떤 사람을 찾는 것입니까?”
“황상의 자식.”
별거 아닌 듯 던진 말에 머리를 맞아 멍해진 낙주가 눈을 깜빡였다.
“황녀와 황자들을 어찌……. 설마 벌써 황제를 건드리겠다는 겁니까?”
“그들이 아니다.”
“허면…….”
“황제가 버린 자식을 찾는 것이다.”
타오르는 불씨를 바라보던 낙주가 미간을 구겼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영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가 닫아 놓았던 창을 하나 열었다. 내려다본 가한의 거리가 아득했다.
“빌어먹을 놈.”
낙주의 분한 음성에도 그녀의 미소는 짙어지기만 했다. 이영은 이 상황이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대체 그놈은……!”
“내 앞이라고 말을 가려 할 필요 없어.”
장난스러운 어투에도 낙주의 표정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본래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저기서 고작 놈이라는 말만 나오지 않았을 텐데. 듣기 민망할 만큼의 험한 욕을 쏟아 놓았겠지. 그래도 제 앞이라고 자제하는가 싶어 이영은 어린 동생 보듯 그녀를 쳐다봤다.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황제와 연관된 일이면 따르는 위험은 배가 될 게 자명한데,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저따위 걸 알아 오라고!”
“언제는 쉬운 일이 있었다고.”
“객주가 그렇게 아무 말 안 하고 다 해 주니까 더 힘든 걸 요구하는 겁니다……!”
“허면 잡혀 있는 이들을 버릴까.”
“…….”
말문이 막힌 낙주가 이를 악물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이영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창공을 보는 눈이 어두웠다.
“다 끝낼 때까지만. 전부 무사히 빼 오고 그곳을 무너뜨릴 때까지는 죽은 듯 살아야지.”
그 빌어먹을 놈의 충실한 엽견(獵犬)으로.
벽을 짚은 이영의 손끝이 떨렸다. 창 너머, 저 아래로 뛰어내려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치고 싶었던 때가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스스로를 찌르는 상상을 했던 때가 있다. 허나 그러지 못했다. 몇 번이고 충동에 시달렸으나 이영은 끝내 청호각에 남았다.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대로 쫓기며 사는 것 역시 성정에 맞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청호각을 사랑했다. 사는 게 괜찮다 느꼈던 기억은 전부 이곳에 담겨 있었다. 청호각은 그녀가 처음으로 가진 제 것이었고 석계 하나까지 자신의 손으로 일구어 낸 결과물이었다. 일평생 남의 수족으로 살아온 제게 하나뿐인 의미였다. 하여 무엇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 이영은 대신 제 삶을 버렸다. 제 생을 온전히 남에게 바치고 원치 않는 일을 했다. 그것이 이 청호각과 식구를 지키는 길이었다.
번뜩이는 눈이 저 너머에 있을 주국의 하늘로 향했다. 이영은 미소를 지었다. 부드러운 표정은 그녀의 괴로움을 감추기 충분했다.
***
가을이면 황제가 직접 제를 올리는 산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추하산(秋賀山)은 건국 초기부터 신성한 기운이 흐르는 연의 명산(名山)이었다. 현 황제에 이르러선 금지(禁地)로 정해져 사람의 출입이 불가했으나 그전까진 꽤 많은 인파가 모였다.
추하산에 금줄이 쳐져 사람의 발길이 끊긴 이후, 산의 초입과 중턱 사이엔 고요함만 남은 지 오래인 사저가 들어섰다. 대문은 저자의 화려함을 향해 나 있지만 그 앞을 지키는 병사들의 얼굴은 무감했다. 마치 다른 세상인 양 인가의 소음마저 들리지 않는 곳이었다.
대문을 제외하고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없었으며 가파른 산을 향해 나 있는 집의 뒤편은 빽빽한 풀숲이었다. 그도 모자라 담장엔 날카로운 가시넝쿨이 자라고 나무 기둥엔 출입을 금하는 줄이 묶였다. 담장을 넘기 위해선 수많은 나무 사이를 비집고 방울 달린 줄을 넘어 가시넝쿨을 밟아야지만 담벼락을 짚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벽이 높아 그곳을 오르는 것 또한 문제였다.
앞은 병사가, 뒤는 날카로운 넝쿨과 산이 막고 있는 사저의 주인은 남소운 때로는 기소운, 어린 날엔 자소운, 그리고 운이라 불리던 사내였다.
그의 누이는 그가 아비를 닮아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다 했다.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해도 이 정도니 잘 먹기만 한다면야 아버지를 능가할 것이라고. 그러나 사내는 그 얘기를 들은 12살 후로도 배를 곯는 일이 잦았다. 하여 살이 붙진 못했으나 다행히 누이의 말대로 아비를 닮아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했다. 그것이 그가 유일하게 아비를 닮은 구석이었다.
적막한 집 안에 사람이라곤 그 혼자였다. 말을 걸 수 있는 이도, 말을 거는 이도 없었다. 대문 밖을 나갈 수도, 병사들에게 함부로 다가설 수도 없었다.
문이 열리는 건 조반, 중반, 석반을 내올 때뿐이었다. 그마저도 그에게 직접 건네는 게 아닌, 대문 앞에 상과 음식을 놓고 다시 문을 닫는 것이었다. 허면 그는 그것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 홀로 끼니를 해결했다. 겨울이면 차갑게 식은, 때로는 얼어 버린 찬을 먹었고 여름이면 거칠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속히 나가 상을 가지고 와야 했다. 해서 소운은 지금과 같은 선선한 봄이 좋았다.
一
무흥(茂興) 23년.
때를 만나지 못했던 용이 승천했다 하여 교룡승천(蛟龍昇天)이라 불리는 해로부터 22년이 지난 연국. 천하에 태평성대가 도래했노라. 허나 이는 형제의 피를 뒤집어쓴 용의 손에 의한 것이니, 과연 태평성대라 할 수 있는가. 배곯는 민초들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느냐, 금궁의 용이여.
제궐의 주인이 된 기광헌은 수만의 군사 앞에서 선황의 유지를 반포하며 황제에 즉위했다. 허니 용을 교활한 뱀으로 칭하는 항간의 말을 어찌 잘못됐다 하리오. 그러나 연의 땅 아래 뱀의 세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으니 뉘가 함부로 입을 놀릴쏘냐. 용이 패륜을 저질렀다 해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릴 때인 것을.
***
창연한 하늘 아래로 화려한 고층 누각이 즐비한 연국의 수도 가한. 바람을 일으키는 매의 날갯짓 아래로 저자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퍼졌다. 활기찬 사람들의 걸음 틈으로 종종거리며 뛰어가던 아이가 철퍽, 석계에 부딪쳐 넘어졌다. 발그레한 볼에 흙먼지가 잔뜩 묻었으나 아프지도 않은지 아이는 금방 일어나 주루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낙주! 낙주!”
끝이 없을 것처럼 보이는 주루의 가장 꼭대기 층까지 빠르게 올라간 아이는 작은 손으로 연신 장지문을 두드렸다. 허나 크고 작은 소음 탓인지 낙주란 이는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누님! 낙주! 좀 나와라…….”
옆방을 살피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결국 아이는 눈치를 보며 문을 슬쩍 열고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없어……? 낙주 누님.”
“상단에 갔느니라.”
조그마한 몸이 화들짝 놀라 움츠러들었다. 얼굴만 문 사이에 넣은 채로 굳은 모양새가 퍽 귀여웠다. 어찌할 바를 몰라 발끝을 꼼질거리던 아이가 이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 겨우 용기를 가지고 고개를 빼내어 옆에 서 있는 여인을 올려다봤다.
아이의 둥그런 눈이 더 커지더니 얼른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린다.
“평안…… 안녕, 아니. 처음, 처음 뵙겠습니다, 객주님.”
옆방의 기척을 열심히 살폈건만 끝내 객주님이 나오신 걸 보니 저가 많이 시끄러웠나 보다, 아이는 생각했다. 출타하셨기를 바랐는데 이리 떡하니 마주치니 다리에 힘이 다 풀렸다.
“낙주는 어찌 찾는 것이냐.”
“누…… 아니, 아니. 대행수님께서 심부름을 시켜서, 시키셔서.”
부드럽게 풀린 여인의 표정을 보지 못한 아이는 긴장을 삼키며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내게 주고 가거라.”
“예. 그러면 저는…… 아, 안녕히 계십시오!”
황급히 줄행랑을 치는 작은 등 뒤로 짧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객주에 대한 소문 중 무엇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저리 도망치는 걸 보면 그리 좋은 말은 아닐 게 분명했다.
난간 너머로 1층까지 정중앙이 훤히 뚫린 주루의 풍경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였다. 난간을 짚은 객주의 무표정한 눈이 북적이는 내부를 훑었다. 간혹 시선이 마주치는 이가 인사를 올렸으나 그녀의 눈빛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바쁜 이들 사이로 종종 달려가던 아이는 키 큰 여인에게 붙잡혀 은화 하나를 받아 갔다. 여인은 그대로 아이의 코를 한 번 꼬집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객주.”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여인이 미려하게 웃었다. 미소가 잘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가는 길에 빼앗기면 어쩌려고 은화를 줘.”
“아, 제가 그랬었지요. 누이가 어릴 때 은화 하나를 덜렁 던져 주고 가 버려서 그거 지키느라 엄청 고생했는데, 기억나십니까?”
“그랬나.”
“저 아인 괜찮을 겁니다. 쪼그만 게 무척 날랩니다. 해서 심부름도 시키는 것이고. 누이도 산채에선 저한테 심부름을 과하게 시켰었는데, 당연히 기억나실 겁니다.”
“이젠 네가 누이라 부르면 진저리가 난다.”
객주의 얼굴에서 기어코 웃음을 만들어 낸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입에는 객주가 더 붙습니다. 아무래도 그리 부른 세월이 훨씬 오래이니. 누이는 그냥, 놀릴 때 쓰는 신호탄 같은 것이지요.”
어린 시절 뭣도 모르고 산채 아이들을 따라 누이, 누이 부르던 때가 있었다. 나중에서야 저는 누이가 아니라 언니라 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이미 습관이 되어 버려 계속 저 편한 대로 누이라 불렀었다. 지금이야 쓰지 않지만 간혹 놀릴 때면 누이라는 말이 나오곤 했다.
“낙주야.”
“예.”
“기분이 좋아 보이네.”
“…….”
“온이에게서 서찰이 오는 날이었나.”
순식간에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낙주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려다 말고 어색하게 긍정했다.
방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는 객주를 따라 낙주도 딱딱한 몸짓으로 움직였다. 넓은 방 안, 온통 열려 있는 창밖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들었다. 가한에서도 유독 크고 화려한 주루 청호각(靑浩閣)은 옆에 조그마한 객잔을 겸하고 있었다. 청호각의 객주, 청호 상단의 상단주는 그 재물과 따르는 사람의 수가 여느 귀족 못지않다는 소문이 있는 자였다.
청호각 객주 이영. 혹자는 그녀를 이 가(家)라 했고 어떤 이는 그녀에게 성씨가 없다 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청객주 혹은 객주님이라 불렀다. 이영은 청호각으로 시작해 청호 상단을 차려 점차 규모를 키워 갔다. 그리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녀는 청호 상단을 황성 일대 상권을 좌지우지하는 상단 중 하나로 만들었다.
때로 무모한 듯 일을 크게 벌이는 그녀의 성정은 오히려 막대한 재물을 불러왔고, 재물은 또 다른 재물을 낳았다. 최근 상단은 황궁과 멀어지는 가한의 외곽지역과 지방으로도 세를 확장해 가고 있었다. 상단의 거점은 청호각 이영의 방에서 바로 내다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다.
허나 근래 상단의 일로 바쁜 것은 객주 이영이 아니었다. 내부는 여전히 그녀의 명대로 움직이고 있으나 그를 따르고 세부적인 일을 처리하는 것은 낙주로, 외려 그녀가 이영보다 상단에 더 깊게 개입했다. 상단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후 이영이 주로 하는 일은 대외적으로 알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주국에서도 연통이 왔습니다.”
열려 있던 창을 차례로 닫으며 얼굴을 식히던 낙주가 곧 이영의 앞에 앉아 서찰을 내밀었다. 연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주국은 국토의 크기와 병력이 연국과 비슷한 나라로, 이영의 고향이었다. 비록 그녀 스스로는 그리 여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서찰을 받아든 이영의 눈이 느긋하게 글자를 읽어 갔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낙주도 숨죽이고 온에게서 온 서신을 펼쳤다.
“뭐라 적혀 있습니까?”
먼저 고개를 든 건 낙주였다. 이영의 눈길이 서찰 끄트머리에 머물렀다.
“위험한 일입니까?”
“……사람을 찾는다.”
“사람이요?”
서신을 태우는 얼굴에서 아무런 단서도 얻을 수 없어 낙주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떤 사람을 찾는 것입니까?”
“황상의 자식.”
별거 아닌 듯 던진 말에 머리를 맞아 멍해진 낙주가 눈을 깜빡였다.
“황녀와 황자들을 어찌……. 설마 벌써 황제를 건드리겠다는 겁니까?”
“그들이 아니다.”
“허면…….”
“황제가 버린 자식을 찾는 것이다.”
타오르는 불씨를 바라보던 낙주가 미간을 구겼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영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가 닫아 놓았던 창을 하나 열었다. 내려다본 가한의 거리가 아득했다.
“빌어먹을 놈.”
낙주의 분한 음성에도 그녀의 미소는 짙어지기만 했다. 이영은 이 상황이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대체 그놈은……!”
“내 앞이라고 말을 가려 할 필요 없어.”
장난스러운 어투에도 낙주의 표정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본래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저기서 고작 놈이라는 말만 나오지 않았을 텐데. 듣기 민망할 만큼의 험한 욕을 쏟아 놓았겠지. 그래도 제 앞이라고 자제하는가 싶어 이영은 어린 동생 보듯 그녀를 쳐다봤다.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황제와 연관된 일이면 따르는 위험은 배가 될 게 자명한데,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저따위 걸 알아 오라고!”
“언제는 쉬운 일이 있었다고.”
“객주가 그렇게 아무 말 안 하고 다 해 주니까 더 힘든 걸 요구하는 겁니다……!”
“허면 잡혀 있는 이들을 버릴까.”
“…….”
말문이 막힌 낙주가 이를 악물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이영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창공을 보는 눈이 어두웠다.
“다 끝낼 때까지만. 전부 무사히 빼 오고 그곳을 무너뜨릴 때까지는 죽은 듯 살아야지.”
그 빌어먹을 놈의 충실한 엽견(獵犬)으로.
벽을 짚은 이영의 손끝이 떨렸다. 창 너머, 저 아래로 뛰어내려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치고 싶었던 때가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스스로를 찌르는 상상을 했던 때가 있다. 허나 그러지 못했다. 몇 번이고 충동에 시달렸으나 이영은 끝내 청호각에 남았다.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대로 쫓기며 사는 것 역시 성정에 맞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청호각을 사랑했다. 사는 게 괜찮다 느꼈던 기억은 전부 이곳에 담겨 있었다. 청호각은 그녀가 처음으로 가진 제 것이었고 석계 하나까지 자신의 손으로 일구어 낸 결과물이었다. 일평생 남의 수족으로 살아온 제게 하나뿐인 의미였다. 하여 무엇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 이영은 대신 제 삶을 버렸다. 제 생을 온전히 남에게 바치고 원치 않는 일을 했다. 그것이 이 청호각과 식구를 지키는 길이었다.
번뜩이는 눈이 저 너머에 있을 주국의 하늘로 향했다. 이영은 미소를 지었다. 부드러운 표정은 그녀의 괴로움을 감추기 충분했다.
***
가을이면 황제가 직접 제를 올리는 산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추하산(秋賀山)은 건국 초기부터 신성한 기운이 흐르는 연의 명산(名山)이었다. 현 황제에 이르러선 금지(禁地)로 정해져 사람의 출입이 불가했으나 그전까진 꽤 많은 인파가 모였다.
추하산에 금줄이 쳐져 사람의 발길이 끊긴 이후, 산의 초입과 중턱 사이엔 고요함만 남은 지 오래인 사저가 들어섰다. 대문은 저자의 화려함을 향해 나 있지만 그 앞을 지키는 병사들의 얼굴은 무감했다. 마치 다른 세상인 양 인가의 소음마저 들리지 않는 곳이었다.
대문을 제외하고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없었으며 가파른 산을 향해 나 있는 집의 뒤편은 빽빽한 풀숲이었다. 그도 모자라 담장엔 날카로운 가시넝쿨이 자라고 나무 기둥엔 출입을 금하는 줄이 묶였다. 담장을 넘기 위해선 수많은 나무 사이를 비집고 방울 달린 줄을 넘어 가시넝쿨을 밟아야지만 담벼락을 짚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벽이 높아 그곳을 오르는 것 또한 문제였다.
앞은 병사가, 뒤는 날카로운 넝쿨과 산이 막고 있는 사저의 주인은 남소운 때로는 기소운, 어린 날엔 자소운, 그리고 운이라 불리던 사내였다.
그의 누이는 그가 아비를 닮아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다 했다.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해도 이 정도니 잘 먹기만 한다면야 아버지를 능가할 것이라고. 그러나 사내는 그 얘기를 들은 12살 후로도 배를 곯는 일이 잦았다. 하여 살이 붙진 못했으나 다행히 누이의 말대로 아비를 닮아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했다. 그것이 그가 유일하게 아비를 닮은 구석이었다.
적막한 집 안에 사람이라곤 그 혼자였다. 말을 걸 수 있는 이도, 말을 거는 이도 없었다. 대문 밖을 나갈 수도, 병사들에게 함부로 다가설 수도 없었다.
문이 열리는 건 조반, 중반, 석반을 내올 때뿐이었다. 그마저도 그에게 직접 건네는 게 아닌, 대문 앞에 상과 음식을 놓고 다시 문을 닫는 것이었다. 허면 그는 그것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 홀로 끼니를 해결했다. 겨울이면 차갑게 식은, 때로는 얼어 버린 찬을 먹었고 여름이면 거칠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속히 나가 상을 가지고 와야 했다. 해서 소운은 지금과 같은 선선한 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