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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소인은 이름 없는 아무개일 뿐입니다. 그저 스승이라 불러 주십시오.’
어릴 땐 저를 스승이라 하라던 이가 여드레에 한 번 드나들었으나 그마저도 10여 년 전 발길이 끊겼다. 기실 그가 있을 때도 말을 못 했던 건 마찬가지이니 지금과 별반 차이는 없었다. 공부와 관련 없는 사담은 나누지 못했고 천자문, 소학과 같은 기본적인 학문과 예절, 겉핥기식의 의술만 배웠다. 무엇을 물어도 ‘모릅니다, 아닙니다, 답할 수 없습니다.’와 같은 대답만 돌아왔기에 소운은 그에게 정을 붙이지 못했다. 붙일 수 없게 만들었다.
‘주국의 학자가 쓴 책이라 한다. 퍽 재밌는 내용이니 네가 읽기에도 좋겠지.’
몇 달에 한 번 누이가 서적을 가져다주면 그것을 몰래 공부했다. 제 숨소리만 들리는 고요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종종 소운이 먼저 대문을 두드리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병사의 우두머리가 문을 열어 인사를 올리고 무언으로 그를 압박했다. 그런 눈길이 익숙해 필요한 것을 적은 종이만 넘긴 뒤 방으로 돌아왔다. 상처를 받지도, 서운하지도 않았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제 키가 더 커져서 그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는 점만 달라졌을 뿐이다.
‘문 열어! 어머니! 어머니!’
울음과 반항이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건 6살 즈음이었다. 대문 밖을 나가기는커녕 누구와도 얘기할 수 없었다. 그런 제 처지가 체기가 얹힌 것처럼 답답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렸던 제게 담장은 높았으며 대문 밖을 지키는 창칼은 두려웠다.
“공자님! 이거 쌉니다. 보고 가세요!”
그러나 17살 겨울, 소운은 기어코 높은 담장을 넘었다. 그마저도 놀랄 만큼 소란스럽고 시끄러운 소리에 벅차고 어지러워 금세 집으로 돌아갔지만 제겐 첫 경험이었다. 담장에서 수백 번 넘게 떨어지고 가시에 찔려 피가 나고 방울을 건드릴까 무서움에 떨며 힘겹게 빠져나온 밖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만 그는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그 후 반년이 훌쩍 지나서야 다시 담장을 넘어 보자는 결심이 섰다. 그때서야 진정으로 마주한 가한은 찬란했다. 야밤에도 환히 빛나는 등불이 아름다웠다. 처음 듣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시끄럽고 좋았다. 제게 물건을 팔겠다고 말을 거는 게 무서우면서도 신기했고 좌판에 널린 완호지물에 시선이 빼앗겼다.
“아, 미안합니다! 짐 때문에 못 봤네……. 미안합니다.”
다른 사람과 부딪치기라도 할 때면 크게 움찔거리며 몸을 움츠렸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못했다. 소운은 불안해하다가도 금세 저자의 화려함에 눈길을 사로잡혔다. 모든 게 아름다웠다. 그 말밖에 알지 못하는 제 부족한 표현이 안타까울 만큼 가한은 아름다웠다.
이제는 모든 것에 무감해진 줄 알았건만, 기쁨과 눈물은 아득한 말이었고 마음은 돌과 다를 바 없었다. 생명이 없는 바위. 감정도, 움직임도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가한을 마주한 순간, 그는 감히 눈을 뗄 수 없었다.
익숙해졌기에 무뎌졌던 것이다. 모든 낯선 풍경에서 그는 평범한 사람처럼 더없이 약하고 여리나 또한 밝았다. 복작거리는 거리를 걸으며 몸을 떨고 팔을 움츠렸지만 미소는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좋았다. 저 자신의 이면을 깨닫게 된 순간이, 황홀하리만치 화려한 가한이 너무도 좋았다.
이후 시간이 날 때면 담장 너머를 그렸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몰래 밖을 나갈 때도 있었지만 드문 일이었다. 보통은 무심하게 창 너머를 보며 초연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삼엄한 경비가 이어지는 나날인데다 병사들이 간혹 순찰을 돌기에 들킬 뻔한 적도 있었다. 탈주가 매번 성공하는 게 아니다 보니 몸을 사리는 건 당연했다.
이 집 안이 세상의 전부가 될 수밖에 없는 그에게 목숨은 무엇보다 중했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살아남아야만 미래를 그릴 수 있었다. 훗날에는 사람처럼 살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살아 있어야만 했다. 그에게 목숨은 목숨만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동아줄이고 유일한 희망이며 미래였다. 해서 답답해 숨이 막힐 즈음이 되어서야 집을 벗어났다.
막상 밖을 나가도 멀리서만 지켜보며 제 추억을 회상하는 데에 그치는 건 그 때문일 테지. 저를 알아보는 병사가 있을까 염려되고 타인과 부딪칠 때마다 놀라는 스스로가 못나 보이니까. 집 안에서 무표정하게 가라앉은 눈을 하던 때와는 달랐다.
“명입니다. 더 이상 검술은 불가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같은 날이면 저 창칼을 넘어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고 싶다. 저자의 수많은 이들처럼 삼삼오오 모여 웃음꽃을 피우고 싶다.
“……알겠습니다.”
보름 전, 목검을 더 가져다 달라는 청에 돌아온 답은 저것이었다. 두꺼운 대문이 닫히고, 그 앞에 서 있는 무감한 눈길이 바닥을 맴돌았다. 무심함에 감춰진 체념이 짙었다.
‘짐의 말을 똑똑히 새겨들으라.’
저를 여기 가둔 이가 누구인지 안다. 저런 명을 내린 이가 누군지도 안다. 제 아비가 누구인지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운은 황제가, 아비가 어찌하여 저를 가둔 채 버려두는지는 알지 못했다. 황제는 그 연유를 친절히 설명해 가며 자식을 대하지 않았다. 소운이 황제를 마지막으로 본 건 처음 이 집에 들어온 5살 때였다. 이후 그는 한 번도 걸음 하지 않았다. 간혹 병사들의 입을 통해서만 황명입니다, 하는 말만 전해 들었다.
“운아. 의양 누이. 황궁. 목검. 가한……. 운아.”
멍하니 마당을 내다보며 의미 없이 단어를 나열하는 건 말을 잊을까 겁났던 어린 시절의 습관이었다. 이대로 가다 목소리가 아예 나오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였다. 온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을 때가 많으니 언젠가 목이 스스로 쓸모를 잃었다 여기며 영영 소리를 내지 않을 거라고.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적막을 울렸다.
“운아.”
운아, 부르는 목소리. 어머니에 관해 남은 그 한 가지 기억에 특별한 의미를 두진 않았지만 소운이라는 음보다는 운을 발음하는 울림이 더 마음에 들었다.
“가한. 황궁. 운아. 가한…….”
‘……나가고 싶다.’
충동은 늘 한순간 시작됐고 그때부턴 한 뼘씩 숨이 막혔다.
‘도망치고 싶다.’
결국 담벼락 앞에 선 너른 등이 벽을 타고 담장 위로 올라갔다. 어둠이 가라앉은 풀숲은 스산했다. 서늘하고 초연해 보이는 그가 이토록 빠르게 움직이는 건 이 순간이 유일했다. 의외의 곳에서 보이는 재능이었으나 살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말이 옳았다.
넝쿨 위에 천을 던져 가시를 가리고 사뿐히 담장에서 뛰어내리면 그나마 상처가 덜했다. 이후 줄을 지나 나무 사이를 빠져나간 뒤 적막한 산을 걸었다. 풀벌레만 우는 고요함을 벗어나면 저 아래로 광활한 가한이 펼쳐졌다. 오래도록 그 화려한 밤을 감상하던 소운이 희미하게 웃었다. 입매를 끌어올린 미소가 섬세한 미모에 한순간 빛을 더했다. 가한의 등불이 담긴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만약에…….’
언젠가 구금이 풀리게 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저도 저들처럼 마음껏 저자를 돌아다닐 수 있을까. 크게 웃고 떠들 수 있을까. 누이가 주었던 책에서처럼 친우가 생기기도 할까.
그러다 곧 그의 순하고 부드러운 눈에 조소가 덧그려졌다. 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점차 저들의 삶과 멀어지고 있음을. 무엇에도 화가 나거나 상처 입지 않았다. 이대로 굳어 메마를 날이 오려나. 이런 자를 웃으며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긴 할까. 제대로 웃을 수조차 없는 자를.
부질없는 희망을 품은 눈동자 아래로는 당연히 불가할 거라는 씁쓸함과 자조가 녹아났다.
“가한. 가한……. 가한.”
의미 없는 읊조림 뒤로 소리 없는 그림자가 움직인 건 그때였다. 단단한 가지 위에 걸터앉아 사내를 내려다보는 이의 얼굴은 복면과 어둠에 가려져 식별이 불가했다.
‘황제가 버린 자식을 찾는 것이다.’
낙주에게 그 말을 했었을 당시, 와락 구겨진 그녀의 얼굴은 꽤나 험악했다. 터무니없는 요구에 대한 짜증이 가득 담긴 낯으로 낙주는 자세한 내용이 무엇이냐 물었다. 그러나 이영은 답을 주지 않은 채 청호각을 나섰다. 그리고 곧장 황제가 숨겨 놓은 이를 캐내기 시작했다.
황자를 찾아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단단한 벽이 버티고 있는 듯 파고들 수 있는 한계가 명확했다. 그의 거처를 찾기까지 한 해하고도 두 계절을 더 보냈다.
그동안 이영은 가한 땅 전체를 뒤져 수상한 자의 뒤를 밟고 황궁을 출입하는 이를 쫓고 친군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피곤함에 쓰러지듯 잠드는 날이 늘수록 낙주가 부러웠다. 내가 상단 일을 맡을 테니 네가 주국의 간자 노릇을 좀 하라 농을 치면 낙주는 기겁하며 저를 피했다.
이영이 직접 움직였는데도 이다지 오랜 시간이 걸린 걸 보면 황제가 벌여 놓은 일이란 건 확실했다. 자식을 가둔 아비. 그의 속내가 궁금했지만 알아내는 일 역시 제 몫이었다. 벌써부터 피곤이 몰려왔다. 그나마 황자를 찾았으니 일단은 한시름 놓았다.
얼마 전부터 그를 지켜보며 이영이 알아낸 건 한 가지였다. 존재만으로 황실에 해가 될 수 있는 자가 저토록 무해하고 처연한 눈을 할 수도 있다는 것. 하여 유약하고 순한 줄로만 알았던 그가 담장을 넘었을 땐 꽤나 놀랐다. 황자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 가시넝쿨로 뛰어들 때도 그랬다. 상처를 보고 한바탕 인상을 찡그릴 줄 알았건만 그 정도는 별거 아니란 듯 털고 일어서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라는 대로 얌전히 있는 자인 줄 알았는데…….’
기실 기나긴 세월을 갇혀 보내며 아직까지 제정신이 박힌 채 살아 있는 것도 대단했다. 독한 걸까. 이영은 황자가 피골이 상접하고 당장 죽을 안색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허나 막상 마주한 그의 눈빛은 또렷했다.
또한 황자는 훤칠하고 수려했다. 누구나 돌아볼 법한 외양이었다. 얼굴선이 뚜렷하고 눈매가 깊었으나 별개로 눈망울은 말갛다. 헌데 표정은 냉담하니 이질적인 조화였다. 머리와 눈썹의 색이 짙고 속눈썹은 길고 가지런하여 눈이 더욱 깊어 보였다. 키가 큰 것은 황제를 닮았기 때문인가. 이영은 우연히 본 적 있는 용안과 그에 관해 도는 풍문을 떠올렸다.
‘사황자 기광헌의 풍채는 가히 거도산 기슭바위와 같다. 그곳에 운무가 끼면 누가 기광헌과 바위를 식별할 수 있을까. 석계에 오르지 않아도 군사들을 굽어보고 대장군마저 그의 앞에선 아이와 다를 바 없음이라.’
황자시절 표기장군을 지냈던 황제는 가슴팍이 떡 벌어지고 근육이 두꺼워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았다. 머리가 두 개쯤 차이난다 하여 모든 문무백관을 내려다볼 정도라 하니 키는 말할 것이 없었다.
궁에서 육식을 즐기는 황제만큼 살이 붙진 않아 태는 날씬하였으나 황자도 어깨가 넓고 키가 큰 것을 보면 핏줄은 핏줄이었다. 몸을 더 단련하면 완전히 단단해져 여느 장수 못지않을 듯했다. 허나 지금은 귀족 가의 선비와 엇비슷했다. 귀족과 선비는 썩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가둬진 황상의 자식이란 말만 할까.
나이 어린 도령으론 보이지 않는 것이, 그보단 좀 더 세상 풍파를 많이 겪은 눈을 하고 있는 탓이었다. 간혹 지천명을 바라보는 이처럼 보일 때면 낯선 향취를 풍겼다.
복면 뒤로 감춰진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그의 너른 등을 내려다보던 이영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자리를 벗어났다. 구름 사이로 달빛이 새는 밤이었다.
***
“뭐라도 찾아내셨습니까?”
“아니.”
창틀에 기대 허공을 보는 눈이 황궁과 가까운 산자락에 닿았다. 그녀를 보던 낙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헌데 의외입니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 숨겨 놓는 게 나을 텐데, 왜 이리 지척에 두었을까요?”
“감시를 해이하게 할 수 없으니까.”
이미 그른 것 같지만. 저자를 바라보던 황자를 떠올리며 이영은 조소했다.
“또한 그자가 도망이라도 친다면 바로 알릴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있어야 뒷일을 처리하기 용이할 테고.”
낙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늦어지면 원왕의 압박이 있을 겁니다.”
이영은 상관없다는 듯 짧게 웃으며 그녀를 돌아봤다.
‘소인은 이름 없는 아무개일 뿐입니다. 그저 스승이라 불러 주십시오.’
어릴 땐 저를 스승이라 하라던 이가 여드레에 한 번 드나들었으나 그마저도 10여 년 전 발길이 끊겼다. 기실 그가 있을 때도 말을 못 했던 건 마찬가지이니 지금과 별반 차이는 없었다. 공부와 관련 없는 사담은 나누지 못했고 천자문, 소학과 같은 기본적인 학문과 예절, 겉핥기식의 의술만 배웠다. 무엇을 물어도 ‘모릅니다, 아닙니다, 답할 수 없습니다.’와 같은 대답만 돌아왔기에 소운은 그에게 정을 붙이지 못했다. 붙일 수 없게 만들었다.
‘주국의 학자가 쓴 책이라 한다. 퍽 재밌는 내용이니 네가 읽기에도 좋겠지.’
몇 달에 한 번 누이가 서적을 가져다주면 그것을 몰래 공부했다. 제 숨소리만 들리는 고요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종종 소운이 먼저 대문을 두드리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병사의 우두머리가 문을 열어 인사를 올리고 무언으로 그를 압박했다. 그런 눈길이 익숙해 필요한 것을 적은 종이만 넘긴 뒤 방으로 돌아왔다. 상처를 받지도, 서운하지도 않았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제 키가 더 커져서 그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는 점만 달라졌을 뿐이다.
‘문 열어! 어머니! 어머니!’
울음과 반항이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건 6살 즈음이었다. 대문 밖을 나가기는커녕 누구와도 얘기할 수 없었다. 그런 제 처지가 체기가 얹힌 것처럼 답답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렸던 제게 담장은 높았으며 대문 밖을 지키는 창칼은 두려웠다.
“공자님! 이거 쌉니다. 보고 가세요!”
그러나 17살 겨울, 소운은 기어코 높은 담장을 넘었다. 그마저도 놀랄 만큼 소란스럽고 시끄러운 소리에 벅차고 어지러워 금세 집으로 돌아갔지만 제겐 첫 경험이었다. 담장에서 수백 번 넘게 떨어지고 가시에 찔려 피가 나고 방울을 건드릴까 무서움에 떨며 힘겹게 빠져나온 밖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만 그는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그 후 반년이 훌쩍 지나서야 다시 담장을 넘어 보자는 결심이 섰다. 그때서야 진정으로 마주한 가한은 찬란했다. 야밤에도 환히 빛나는 등불이 아름다웠다. 처음 듣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시끄럽고 좋았다. 제게 물건을 팔겠다고 말을 거는 게 무서우면서도 신기했고 좌판에 널린 완호지물에 시선이 빼앗겼다.
“아, 미안합니다! 짐 때문에 못 봤네……. 미안합니다.”
다른 사람과 부딪치기라도 할 때면 크게 움찔거리며 몸을 움츠렸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못했다. 소운은 불안해하다가도 금세 저자의 화려함에 눈길을 사로잡혔다. 모든 게 아름다웠다. 그 말밖에 알지 못하는 제 부족한 표현이 안타까울 만큼 가한은 아름다웠다.
이제는 모든 것에 무감해진 줄 알았건만, 기쁨과 눈물은 아득한 말이었고 마음은 돌과 다를 바 없었다. 생명이 없는 바위. 감정도, 움직임도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가한을 마주한 순간, 그는 감히 눈을 뗄 수 없었다.
익숙해졌기에 무뎌졌던 것이다. 모든 낯선 풍경에서 그는 평범한 사람처럼 더없이 약하고 여리나 또한 밝았다. 복작거리는 거리를 걸으며 몸을 떨고 팔을 움츠렸지만 미소는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좋았다. 저 자신의 이면을 깨닫게 된 순간이, 황홀하리만치 화려한 가한이 너무도 좋았다.
이후 시간이 날 때면 담장 너머를 그렸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몰래 밖을 나갈 때도 있었지만 드문 일이었다. 보통은 무심하게 창 너머를 보며 초연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삼엄한 경비가 이어지는 나날인데다 병사들이 간혹 순찰을 돌기에 들킬 뻔한 적도 있었다. 탈주가 매번 성공하는 게 아니다 보니 몸을 사리는 건 당연했다.
이 집 안이 세상의 전부가 될 수밖에 없는 그에게 목숨은 무엇보다 중했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살아남아야만 미래를 그릴 수 있었다. 훗날에는 사람처럼 살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살아 있어야만 했다. 그에게 목숨은 목숨만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동아줄이고 유일한 희망이며 미래였다. 해서 답답해 숨이 막힐 즈음이 되어서야 집을 벗어났다.
막상 밖을 나가도 멀리서만 지켜보며 제 추억을 회상하는 데에 그치는 건 그 때문일 테지. 저를 알아보는 병사가 있을까 염려되고 타인과 부딪칠 때마다 놀라는 스스로가 못나 보이니까. 집 안에서 무표정하게 가라앉은 눈을 하던 때와는 달랐다.
“명입니다. 더 이상 검술은 불가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같은 날이면 저 창칼을 넘어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고 싶다. 저자의 수많은 이들처럼 삼삼오오 모여 웃음꽃을 피우고 싶다.
“……알겠습니다.”
보름 전, 목검을 더 가져다 달라는 청에 돌아온 답은 저것이었다. 두꺼운 대문이 닫히고, 그 앞에 서 있는 무감한 눈길이 바닥을 맴돌았다. 무심함에 감춰진 체념이 짙었다.
‘짐의 말을 똑똑히 새겨들으라.’
저를 여기 가둔 이가 누구인지 안다. 저런 명을 내린 이가 누군지도 안다. 제 아비가 누구인지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운은 황제가, 아비가 어찌하여 저를 가둔 채 버려두는지는 알지 못했다. 황제는 그 연유를 친절히 설명해 가며 자식을 대하지 않았다. 소운이 황제를 마지막으로 본 건 처음 이 집에 들어온 5살 때였다. 이후 그는 한 번도 걸음 하지 않았다. 간혹 병사들의 입을 통해서만 황명입니다, 하는 말만 전해 들었다.
“운아. 의양 누이. 황궁. 목검. 가한……. 운아.”
멍하니 마당을 내다보며 의미 없이 단어를 나열하는 건 말을 잊을까 겁났던 어린 시절의 습관이었다. 이대로 가다 목소리가 아예 나오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였다. 온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을 때가 많으니 언젠가 목이 스스로 쓸모를 잃었다 여기며 영영 소리를 내지 않을 거라고.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적막을 울렸다.
“운아.”
운아, 부르는 목소리. 어머니에 관해 남은 그 한 가지 기억에 특별한 의미를 두진 않았지만 소운이라는 음보다는 운을 발음하는 울림이 더 마음에 들었다.
“가한. 황궁. 운아. 가한…….”
‘……나가고 싶다.’
충동은 늘 한순간 시작됐고 그때부턴 한 뼘씩 숨이 막혔다.
‘도망치고 싶다.’
결국 담벼락 앞에 선 너른 등이 벽을 타고 담장 위로 올라갔다. 어둠이 가라앉은 풀숲은 스산했다. 서늘하고 초연해 보이는 그가 이토록 빠르게 움직이는 건 이 순간이 유일했다. 의외의 곳에서 보이는 재능이었으나 살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말이 옳았다.
넝쿨 위에 천을 던져 가시를 가리고 사뿐히 담장에서 뛰어내리면 그나마 상처가 덜했다. 이후 줄을 지나 나무 사이를 빠져나간 뒤 적막한 산을 걸었다. 풀벌레만 우는 고요함을 벗어나면 저 아래로 광활한 가한이 펼쳐졌다. 오래도록 그 화려한 밤을 감상하던 소운이 희미하게 웃었다. 입매를 끌어올린 미소가 섬세한 미모에 한순간 빛을 더했다. 가한의 등불이 담긴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만약에…….’
언젠가 구금이 풀리게 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저도 저들처럼 마음껏 저자를 돌아다닐 수 있을까. 크게 웃고 떠들 수 있을까. 누이가 주었던 책에서처럼 친우가 생기기도 할까.
그러다 곧 그의 순하고 부드러운 눈에 조소가 덧그려졌다. 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점차 저들의 삶과 멀어지고 있음을. 무엇에도 화가 나거나 상처 입지 않았다. 이대로 굳어 메마를 날이 오려나. 이런 자를 웃으며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긴 할까. 제대로 웃을 수조차 없는 자를.
부질없는 희망을 품은 눈동자 아래로는 당연히 불가할 거라는 씁쓸함과 자조가 녹아났다.
“가한. 가한……. 가한.”
의미 없는 읊조림 뒤로 소리 없는 그림자가 움직인 건 그때였다. 단단한 가지 위에 걸터앉아 사내를 내려다보는 이의 얼굴은 복면과 어둠에 가려져 식별이 불가했다.
‘황제가 버린 자식을 찾는 것이다.’
낙주에게 그 말을 했었을 당시, 와락 구겨진 그녀의 얼굴은 꽤나 험악했다. 터무니없는 요구에 대한 짜증이 가득 담긴 낯으로 낙주는 자세한 내용이 무엇이냐 물었다. 그러나 이영은 답을 주지 않은 채 청호각을 나섰다. 그리고 곧장 황제가 숨겨 놓은 이를 캐내기 시작했다.
황자를 찾아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단단한 벽이 버티고 있는 듯 파고들 수 있는 한계가 명확했다. 그의 거처를 찾기까지 한 해하고도 두 계절을 더 보냈다.
그동안 이영은 가한 땅 전체를 뒤져 수상한 자의 뒤를 밟고 황궁을 출입하는 이를 쫓고 친군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피곤함에 쓰러지듯 잠드는 날이 늘수록 낙주가 부러웠다. 내가 상단 일을 맡을 테니 네가 주국의 간자 노릇을 좀 하라 농을 치면 낙주는 기겁하며 저를 피했다.
이영이 직접 움직였는데도 이다지 오랜 시간이 걸린 걸 보면 황제가 벌여 놓은 일이란 건 확실했다. 자식을 가둔 아비. 그의 속내가 궁금했지만 알아내는 일 역시 제 몫이었다. 벌써부터 피곤이 몰려왔다. 그나마 황자를 찾았으니 일단은 한시름 놓았다.
얼마 전부터 그를 지켜보며 이영이 알아낸 건 한 가지였다. 존재만으로 황실에 해가 될 수 있는 자가 저토록 무해하고 처연한 눈을 할 수도 있다는 것. 하여 유약하고 순한 줄로만 알았던 그가 담장을 넘었을 땐 꽤나 놀랐다. 황자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 가시넝쿨로 뛰어들 때도 그랬다. 상처를 보고 한바탕 인상을 찡그릴 줄 알았건만 그 정도는 별거 아니란 듯 털고 일어서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라는 대로 얌전히 있는 자인 줄 알았는데…….’
기실 기나긴 세월을 갇혀 보내며 아직까지 제정신이 박힌 채 살아 있는 것도 대단했다. 독한 걸까. 이영은 황자가 피골이 상접하고 당장 죽을 안색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허나 막상 마주한 그의 눈빛은 또렷했다.
또한 황자는 훤칠하고 수려했다. 누구나 돌아볼 법한 외양이었다. 얼굴선이 뚜렷하고 눈매가 깊었으나 별개로 눈망울은 말갛다. 헌데 표정은 냉담하니 이질적인 조화였다. 머리와 눈썹의 색이 짙고 속눈썹은 길고 가지런하여 눈이 더욱 깊어 보였다. 키가 큰 것은 황제를 닮았기 때문인가. 이영은 우연히 본 적 있는 용안과 그에 관해 도는 풍문을 떠올렸다.
‘사황자 기광헌의 풍채는 가히 거도산 기슭바위와 같다. 그곳에 운무가 끼면 누가 기광헌과 바위를 식별할 수 있을까. 석계에 오르지 않아도 군사들을 굽어보고 대장군마저 그의 앞에선 아이와 다를 바 없음이라.’
황자시절 표기장군을 지냈던 황제는 가슴팍이 떡 벌어지고 근육이 두꺼워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았다. 머리가 두 개쯤 차이난다 하여 모든 문무백관을 내려다볼 정도라 하니 키는 말할 것이 없었다.
궁에서 육식을 즐기는 황제만큼 살이 붙진 않아 태는 날씬하였으나 황자도 어깨가 넓고 키가 큰 것을 보면 핏줄은 핏줄이었다. 몸을 더 단련하면 완전히 단단해져 여느 장수 못지않을 듯했다. 허나 지금은 귀족 가의 선비와 엇비슷했다. 귀족과 선비는 썩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가둬진 황상의 자식이란 말만 할까.
나이 어린 도령으론 보이지 않는 것이, 그보단 좀 더 세상 풍파를 많이 겪은 눈을 하고 있는 탓이었다. 간혹 지천명을 바라보는 이처럼 보일 때면 낯선 향취를 풍겼다.
복면 뒤로 감춰진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그의 너른 등을 내려다보던 이영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자리를 벗어났다. 구름 사이로 달빛이 새는 밤이었다.
***
“뭐라도 찾아내셨습니까?”
“아니.”
창틀에 기대 허공을 보는 눈이 황궁과 가까운 산자락에 닿았다. 그녀를 보던 낙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헌데 의외입니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 숨겨 놓는 게 나을 텐데, 왜 이리 지척에 두었을까요?”
“감시를 해이하게 할 수 없으니까.”
이미 그른 것 같지만. 저자를 바라보던 황자를 떠올리며 이영은 조소했다.
“또한 그자가 도망이라도 친다면 바로 알릴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있어야 뒷일을 처리하기 용이할 테고.”
낙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늦어지면 원왕의 압박이 있을 겁니다.”
이영은 상관없다는 듯 짧게 웃으며 그녀를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