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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원왕. 빌어먹을 원왕 놈. 뒷간에 백 번은 엎어질 우라질 자식.’
낙주는 과거, 원왕을 저리 칭했었다. 주국 황제의 이복형제이자 이영의 숨통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원왕은 이영의 동생인 이온부터 그녀가 식구라 여기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 두고 충심을 요구했다.
하여 낙주는 그를 염오하고 질색했다. 원왕의 끄나풀을 만나는 일도 진저리를 칠 만큼 싫어했다. 하나같이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잡힌 이들의 안위를 들먹이며 결과를 내놔라 성화인데, 그 면상에 찻물을 끼얹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온이가 걱정되나 보네.”
낙주가 입을 불퉁하게 내밀고 아닙니다, 답했다. 이영은 가볍게 웃으며 다시 창 너머 추하산을 바라봤다.
“첫 연정은 잊지 못하는 거라더니.”
“아, 좀! 아니라지 않습니까.”
“온이가 처음이 아니라고?”
“……맞긴 하지만.”
이온은 낙주의 첫 연정이었다.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주먹을 꼬옥 쥐고 울망울망한 눈으로 ‘내 누이야!’라고 소리친 순간부터 낙주는 그에게 반했다. 어찌나 귀여운지 볼을 꼭꼭 깨물어 주고 싶었다. 그녀는 그때부터 온을 쫓아다녔다. 이후로는 이영에게 누이라 부르지도 않았다. 온이 싫다고 하는 건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낙주가 씩씩거리며 방을 나가다 말고 이영을 돌아봤다.
“나중에 누굴 좋아하기만 해 보십시오. 제가 지금까지 당한 놀림을 배로 갚아 줄 겁니다.”
“내가 그럴 수 있는 처지라도 된다면 얼마든지.”
쓸쓸하게 들릴 답을 저리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으면 제 말문이 막힐 걸 알고 저러는 것이다. 낙주는 괜스레 입술을 더 내밀었다가 탁 풀어져서는 이영에게 다가갔다.
이영이 원왕에게 잡혔던 7살 어린 날부터 그의 명으로 식구들을 둔 채 이 악물고 주국을 떠나 연국으로 오기까지. 연국에 오고서도 아는 것 하나 없는 이 가한 땅에 자리를 잡아 이만큼 크기까지. 낙주는 이영의 그 모든 삶을 곁에서 지켜봐 왔고 함께했다. 하여 지금의 말뜻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녀는 삶에 미련이 없는 듯 보이다가도 가끔 제 처지를 더없이 비관적으로 말했다. 저가 그러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도 못한다. 그저 제게 있어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간혹 짐승 같은 눈을 하고 원왕을 향한 투지를 보일 때도 있으나 이영은 제 감정을 잘 숨겼다. 마치 가면극을 하는 사람처럼 제 뜻과 속내를 감췄다. 그럴 때면 낙주는 불안했다. 이영이 안쓰럽고 아팠다.
“잡아서 데려오는 건 불가할 테고.”
“누굴 말입니까?”
그녀의 턱짓이 황자의 거처가 있는 즈음을 가리켰다.
“장난하지 마세요. 친군의 눈을 속이는 것도 문제고 황제가 알기라도 하면 죽는 건 우리뿐입니다. 원왕이 도와준답시고 거들떠볼 리도 없는데.”
“허면 어찌할까. 말을 걸어 볼까?”
“참 친절히도 예, 예 해 주겠습니다.”
이영이 피식 웃으며 검집 끝으로 낙주의 팔을 쳤다. 과하게 옆으로 밀려난 낙주가 엄살을 부리며 원망스레 눈을 흘겼다.
“방도를 내놓으라 한 것이지 재수 없게 맞는 말이나 하라는 게 아니었다.”
밖에선 위엄 있고 인망 높은 청호각의 대행수였으나 이영의 앞에서 낙주는 늘 5살 꼬맹이였다. 하여 이영은 그녀가 옳은 말만 하며 잔소리를 늘어놓을 때면 꼬물대기나 하던 애가 언제 저리 컸나 싶었다. 고작 2살뿐이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그랬다.
“몸 사리며 하세요. 괜히 다치지 말고.”
“궁의 움직임을 잘 주시해. 황제가 눈치채기 전에 알아낼 수 있는 건 전부 알아내야 하니.”
“그냥 아무거나 대충 던져 주면 원왕 놈이 알아서 잘 받아먹을 텐데, 매번 왜 그리 열심히 하십니까.”
낙주가 불퉁하게 내뱉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미운 말이 나갔다.
“호락호락한 이가 아니니까. 대충 속였다가 빠져나오기도 전에 식구들이 다치면 안 되잖아.”
낙주가 낮은 한숨을 쉬며 주국이 있을 방향을 쳐다봤다. 언제쯤 저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득해서 흐리기까지 한 미래였다.
“수고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린 손짓이 멀어지고 곧 방문이 열렸다. 이영을 뒤이어 낙주도 창을 꼼꼼히 잠근 뒤 방을 나갔다.
창연한 하늘이 푸른빛을 뿜어냈으나 어둠이 익숙한 이영에겐 눈이 부실 따름이었다. 상단으로 향하는 걸음은 피곤에 절어 무거웠다.
“오셨습니까, 객주님.”
“금방 갈 것이니 그리 긴장하지 마라.”
그녀의 웃음기 띤 말에 상단의 어린 사환(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청객주에 관한 소문 중엔 허황되고 과장된 것이 많았다. 대부분은 낙주가 힘을 써 잠재웠지만 사람의 입은 그리 쉬이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풍문은 여전했다. 상단과 주루에서 오래 일을 한 자들은 소문이 거짓임을 알고 이영을 따르지만 처음 보거나 가깝지 않은 이들은 지레 겁부터 집어먹었다.
“목안에게 내가 찾는다 전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흙바닥을 달리는 사환의 급한 발걸음 뒤로 뿌연 먼지가 날렸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이영이 곧 청호각으로 눈을 돌렸다. 높은 화각(畫閣)이 즐비한 가한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곳인지라 저절로 시선이 갔다. 느리게 눈꺼풀을 움직이며 청호각의 지붕을 바라보다 옆을 보자 마침 멀리서 걸어오던 목안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상단의 호위인 목안은 드물게 이영의 신뢰를 받고 있는 자였다.
부른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사환의 걸음이 빠른 것인가, 이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다시 청호각을 응시했다.
“찾으셨습니까.”
“대행수에게 찾아가면 내가 일러 놓은 걸 받을 수 있다. 살벌한 자들이 지키고 있는 사저의 위치가 적힌 지도니라.”
“살벌하기까지 합니까.”
진지한 어투였다. 농을 농으로 받지 못하는 건 목안 특유의 성격이었다. 이영 저가 농을 농처럼 말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황제의 친군(親軍)이다.”
단순한 농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목안의 낯빛이 굳었다.
“그곳을 드나드는 자와 움직임을 면밀히 살필 사람이 필요하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목안에게 말한 순간 이미 그도 짐작했을 것이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임을.
“잡히면 버릴 것이다.”
이영이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녀의 손이 단단한 목안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니 들키지 마. 목숨은 소중한 것이니.”
목안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낙주였다면 위험한 일 자체를 시키지 말라며 받아쳤겠지만 그는 그럴 성정이 되지 못했다.
이영이 그를 뒤로 하고 상단을 빠져나갔다. 해가 질 시각이었다. 삼일을 밤낮없이 움직인 터라 심신이 피로했다. 눈이 시리고 어깨가 뻐근했지만 그녀는 곧장 변복을 한 뒤 은밀히 움직였다. 추하산을 찾아가는 걸음이 빠르다. 이영의 그림자가 차츰 어둠에 삼켜졌다.
***
“어떤 걸로 드릴까요?”
“술…… 한 병.”
서글서글한 사내의 물음에 낮은 음성으로 답한 건 소운이었다. 이젠 사람이 많은 것에 익숙하지만 얼굴을 맞대고 하는 대화는 아직까지 꺼려졌다. 어색하기보단 경계가 됐다. 그의 표정이 무감하게 가라앉았다.
“어떤 술을 찾으십니까?”
“……아.”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지 않아도 사내는 당황하지 않고 사근사근하게 웃었다.
“백화주는 어떠십니까? 향이 무척 좋은 술이랍니다.”
“그럼 그걸로 주십시오.”
주루의 사환인 사내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그제야 왁자지껄한 소음이 소운의 귓가로 내려앉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오늘 낮, 그의 거처에선 한차례 난리가 있었다. 병사들의 딱딱한 걸음이 집 안 곳곳을 수색했다. 수상쩍은 물건이나 서신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이들의 눈빛엔 죽은 듯 무엇도 담겨 있지 않았다.
달에 한 번 으레 겪는 일이었으나 이따금 착잡했다. 자신은 죄인이 아니건만, 그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나 황제는 끝없이 그를 압박했다.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없도록 지켜보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특히 소운의 이복누이인 의양 황녀가 다녀간 다음이면 수색은 길게 이어졌다. 처마 밑까지 샅샅이 뒤진 후에야 무도한 발소리는 물러갔다.
차라리 집이 어수선해지면 그걸 핑계 삼아 난리라도 피울 텐데 그들은 외려 전보다 말끔한 정리를 마치고 떠났다. 그 뒤 홀로 남은 소운은 딱딱한 질서정연함 속에서 제 처지를 직면했다.
“백화주 나왔습니다. 필요한 게 더 있으십니까?”
사환의 나긋한 말투가 어지러운 상념을 깼다. 소운은 대답 없이 고개를 저었다. 사내는 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금세 물러났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다른 이들과 달리 혼자 상 하나를 차지한 소운은 말없이 술병을 쳐다봤다. 한 번도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어 문득 걱정이 일었다. 술에 이름이 있다는 것도 방금 처음 안 사실이었다. 하여 어떤 술을 찾느냐는 물음이 의아했다. 술은 그저 술인 줄 알았으니.
“여기 호제주 두 병!”
“네, 곧 갑니다!”
“전병도 가득!”
“야, 적당히 시켜.”
“뭐! 먹고 죽자!”
멀리서 들려온 말소리에 소운도 술병을 들었다.
‘먹고 죽자…….’
실제로 그런 뜻이 아님은 알지만 죽자는 소리는 곧장 뇌리에 박혀 들었다. 그만큼 거나하게 취해 보고 싶었다. 죽었다 할 만큼 정신 못 차리고 스며들어 저들과 비슷하게.
금세 술 한 병을 동낸 소운이 옆을 지나가던 사환의 옷자락을 조심히 잡았다.
“두 병, 아니. 세 병만 더 부탁합니다.”
“예, 금세 가져오겠습니다!”
향이 좋은 술이었다. 소운은 이내 긴장을 조금 풀고 희미하게 웃었다. 어찌된 일인지 아직 취기는 올라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아졌다. 밝은 주루의 분위기에 자신도 자연스럽게 녹아나고 있는 듯해 오랜만에 흐릿한 웃음이 피었다. 동경해 마지않던 삶이 지척에서 펼쳐졌다. 마치 저도 그런 생을 사는 것처럼 어딜 둘러봐도 평범한 행복들이다.
“아이고, 많이 자셨네.”
“지금 갑니다!”
“요즘 객주님이 안 보이네?”
“제일 독한 걸로 다섯 병 주셔요.”
“대행수께선 저기 계신데?”
“그만 마셔, 인마!”
“너 이거 몇 개로 보이냐. 어?”
“한 개! 열두 개! 세 개!”
시끄러운 말소리가 이어졌다. 두 병의 끝자락을 달리던 소운도 조심히 제 음성을 얹었다.
“청호각. 백화주. 남소운이라…… 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굳이 누군가와 얘기하지 않아도 만족스러웠다. 틈에 섞여 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채 살고 싶었다. 소운은 어느새 독하게 담근 백화주를 세 병째 들이켜는 중이었다.
“백화주.”
사실 사람을 좋아하진 않는다. 일평생 사람에게 버려지고 상처만 받으며 살아온 삶이니 무엇을 더 바랄까. 헌데 그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는 모습은 즐겁게 보였다. 해서 한 사람, 한 사람 자체는 꺼리지만 많은 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사는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의미 없는 읊조림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백화주를 끝없이 입에 담는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시선을 내리깔며 잔잔히 짓는 미소가 저절로 시선이 갈 만큼 수려했다.
‘대체 여기서…….’
그리고 그런 그를 지켜보던 이영의 미간은 처참히 구겨졌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불이 꺼져 있는 추하산의 집을 지켜보던 채였다. 그러다 그 적막이 왠지 이상해 황자가 자고 있을 방문을 조심히 열었는데 조잡하게 꾸며진 이불더미만이 이영을 반겼다. 순간 굳어 버린 몸은 뒤늦게야 움직였다.
다시 담장을 넘어 저자로 돌아가는 동안 그녀는 짜증스레 미간을 구겼다. 황자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한에서 고작 사람 하나를 찾는 것은 산에서 선어(鮮魚)를 찾는 것만큼 불가능하다는 말이 따로 있을 정도로 수도는 넓고 저자는 인산인해였다.
황자에게서 뭔가를 알아내는 게 힘들다는 판단이 이미 내려진 후였지만 자연스레 접근해 달래다 보면 쓸 만한 얘기가 나올 수도 있으니 신경이 쓰이는 건 당연했다. 헌데 새끼 강아지처럼 낑낑거릴 것 같은 눈으로 겁 없이 담장을 성큼 넘는 황자 덕에 이영은 생전 팔자에 없던 남 걱정을 하고 있었다.
‘원왕. 빌어먹을 원왕 놈. 뒷간에 백 번은 엎어질 우라질 자식.’
낙주는 과거, 원왕을 저리 칭했었다. 주국 황제의 이복형제이자 이영의 숨통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원왕은 이영의 동생인 이온부터 그녀가 식구라 여기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 두고 충심을 요구했다.
하여 낙주는 그를 염오하고 질색했다. 원왕의 끄나풀을 만나는 일도 진저리를 칠 만큼 싫어했다. 하나같이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잡힌 이들의 안위를 들먹이며 결과를 내놔라 성화인데, 그 면상에 찻물을 끼얹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온이가 걱정되나 보네.”
낙주가 입을 불퉁하게 내밀고 아닙니다, 답했다. 이영은 가볍게 웃으며 다시 창 너머 추하산을 바라봤다.
“첫 연정은 잊지 못하는 거라더니.”
“아, 좀! 아니라지 않습니까.”
“온이가 처음이 아니라고?”
“……맞긴 하지만.”
이온은 낙주의 첫 연정이었다.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주먹을 꼬옥 쥐고 울망울망한 눈으로 ‘내 누이야!’라고 소리친 순간부터 낙주는 그에게 반했다. 어찌나 귀여운지 볼을 꼭꼭 깨물어 주고 싶었다. 그녀는 그때부터 온을 쫓아다녔다. 이후로는 이영에게 누이라 부르지도 않았다. 온이 싫다고 하는 건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낙주가 씩씩거리며 방을 나가다 말고 이영을 돌아봤다.
“나중에 누굴 좋아하기만 해 보십시오. 제가 지금까지 당한 놀림을 배로 갚아 줄 겁니다.”
“내가 그럴 수 있는 처지라도 된다면 얼마든지.”
쓸쓸하게 들릴 답을 저리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으면 제 말문이 막힐 걸 알고 저러는 것이다. 낙주는 괜스레 입술을 더 내밀었다가 탁 풀어져서는 이영에게 다가갔다.
이영이 원왕에게 잡혔던 7살 어린 날부터 그의 명으로 식구들을 둔 채 이 악물고 주국을 떠나 연국으로 오기까지. 연국에 오고서도 아는 것 하나 없는 이 가한 땅에 자리를 잡아 이만큼 크기까지. 낙주는 이영의 그 모든 삶을 곁에서 지켜봐 왔고 함께했다. 하여 지금의 말뜻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녀는 삶에 미련이 없는 듯 보이다가도 가끔 제 처지를 더없이 비관적으로 말했다. 저가 그러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도 못한다. 그저 제게 있어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간혹 짐승 같은 눈을 하고 원왕을 향한 투지를 보일 때도 있으나 이영은 제 감정을 잘 숨겼다. 마치 가면극을 하는 사람처럼 제 뜻과 속내를 감췄다. 그럴 때면 낙주는 불안했다. 이영이 안쓰럽고 아팠다.
“잡아서 데려오는 건 불가할 테고.”
“누굴 말입니까?”
그녀의 턱짓이 황자의 거처가 있는 즈음을 가리켰다.
“장난하지 마세요. 친군의 눈을 속이는 것도 문제고 황제가 알기라도 하면 죽는 건 우리뿐입니다. 원왕이 도와준답시고 거들떠볼 리도 없는데.”
“허면 어찌할까. 말을 걸어 볼까?”
“참 친절히도 예, 예 해 주겠습니다.”
이영이 피식 웃으며 검집 끝으로 낙주의 팔을 쳤다. 과하게 옆으로 밀려난 낙주가 엄살을 부리며 원망스레 눈을 흘겼다.
“방도를 내놓으라 한 것이지 재수 없게 맞는 말이나 하라는 게 아니었다.”
밖에선 위엄 있고 인망 높은 청호각의 대행수였으나 이영의 앞에서 낙주는 늘 5살 꼬맹이였다. 하여 이영은 그녀가 옳은 말만 하며 잔소리를 늘어놓을 때면 꼬물대기나 하던 애가 언제 저리 컸나 싶었다. 고작 2살뿐이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그랬다.
“몸 사리며 하세요. 괜히 다치지 말고.”
“궁의 움직임을 잘 주시해. 황제가 눈치채기 전에 알아낼 수 있는 건 전부 알아내야 하니.”
“그냥 아무거나 대충 던져 주면 원왕 놈이 알아서 잘 받아먹을 텐데, 매번 왜 그리 열심히 하십니까.”
낙주가 불퉁하게 내뱉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미운 말이 나갔다.
“호락호락한 이가 아니니까. 대충 속였다가 빠져나오기도 전에 식구들이 다치면 안 되잖아.”
낙주가 낮은 한숨을 쉬며 주국이 있을 방향을 쳐다봤다. 언제쯤 저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득해서 흐리기까지 한 미래였다.
“수고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린 손짓이 멀어지고 곧 방문이 열렸다. 이영을 뒤이어 낙주도 창을 꼼꼼히 잠근 뒤 방을 나갔다.
창연한 하늘이 푸른빛을 뿜어냈으나 어둠이 익숙한 이영에겐 눈이 부실 따름이었다. 상단으로 향하는 걸음은 피곤에 절어 무거웠다.
“오셨습니까, 객주님.”
“금방 갈 것이니 그리 긴장하지 마라.”
그녀의 웃음기 띤 말에 상단의 어린 사환(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청객주에 관한 소문 중엔 허황되고 과장된 것이 많았다. 대부분은 낙주가 힘을 써 잠재웠지만 사람의 입은 그리 쉬이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풍문은 여전했다. 상단과 주루에서 오래 일을 한 자들은 소문이 거짓임을 알고 이영을 따르지만 처음 보거나 가깝지 않은 이들은 지레 겁부터 집어먹었다.
“목안에게 내가 찾는다 전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흙바닥을 달리는 사환의 급한 발걸음 뒤로 뿌연 먼지가 날렸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이영이 곧 청호각으로 눈을 돌렸다. 높은 화각(畫閣)이 즐비한 가한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곳인지라 저절로 시선이 갔다. 느리게 눈꺼풀을 움직이며 청호각의 지붕을 바라보다 옆을 보자 마침 멀리서 걸어오던 목안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상단의 호위인 목안은 드물게 이영의 신뢰를 받고 있는 자였다.
부른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사환의 걸음이 빠른 것인가, 이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다시 청호각을 응시했다.
“찾으셨습니까.”
“대행수에게 찾아가면 내가 일러 놓은 걸 받을 수 있다. 살벌한 자들이 지키고 있는 사저의 위치가 적힌 지도니라.”
“살벌하기까지 합니까.”
진지한 어투였다. 농을 농으로 받지 못하는 건 목안 특유의 성격이었다. 이영 저가 농을 농처럼 말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황제의 친군(親軍)이다.”
단순한 농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목안의 낯빛이 굳었다.
“그곳을 드나드는 자와 움직임을 면밀히 살필 사람이 필요하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목안에게 말한 순간 이미 그도 짐작했을 것이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임을.
“잡히면 버릴 것이다.”
이영이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녀의 손이 단단한 목안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니 들키지 마. 목숨은 소중한 것이니.”
목안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낙주였다면 위험한 일 자체를 시키지 말라며 받아쳤겠지만 그는 그럴 성정이 되지 못했다.
이영이 그를 뒤로 하고 상단을 빠져나갔다. 해가 질 시각이었다. 삼일을 밤낮없이 움직인 터라 심신이 피로했다. 눈이 시리고 어깨가 뻐근했지만 그녀는 곧장 변복을 한 뒤 은밀히 움직였다. 추하산을 찾아가는 걸음이 빠르다. 이영의 그림자가 차츰 어둠에 삼켜졌다.
***
“어떤 걸로 드릴까요?”
“술…… 한 병.”
서글서글한 사내의 물음에 낮은 음성으로 답한 건 소운이었다. 이젠 사람이 많은 것에 익숙하지만 얼굴을 맞대고 하는 대화는 아직까지 꺼려졌다. 어색하기보단 경계가 됐다. 그의 표정이 무감하게 가라앉았다.
“어떤 술을 찾으십니까?”
“……아.”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지 않아도 사내는 당황하지 않고 사근사근하게 웃었다.
“백화주는 어떠십니까? 향이 무척 좋은 술이랍니다.”
“그럼 그걸로 주십시오.”
주루의 사환인 사내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그제야 왁자지껄한 소음이 소운의 귓가로 내려앉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오늘 낮, 그의 거처에선 한차례 난리가 있었다. 병사들의 딱딱한 걸음이 집 안 곳곳을 수색했다. 수상쩍은 물건이나 서신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이들의 눈빛엔 죽은 듯 무엇도 담겨 있지 않았다.
달에 한 번 으레 겪는 일이었으나 이따금 착잡했다. 자신은 죄인이 아니건만, 그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나 황제는 끝없이 그를 압박했다.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없도록 지켜보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특히 소운의 이복누이인 의양 황녀가 다녀간 다음이면 수색은 길게 이어졌다. 처마 밑까지 샅샅이 뒤진 후에야 무도한 발소리는 물러갔다.
차라리 집이 어수선해지면 그걸 핑계 삼아 난리라도 피울 텐데 그들은 외려 전보다 말끔한 정리를 마치고 떠났다. 그 뒤 홀로 남은 소운은 딱딱한 질서정연함 속에서 제 처지를 직면했다.
“백화주 나왔습니다. 필요한 게 더 있으십니까?”
사환의 나긋한 말투가 어지러운 상념을 깼다. 소운은 대답 없이 고개를 저었다. 사내는 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금세 물러났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다른 이들과 달리 혼자 상 하나를 차지한 소운은 말없이 술병을 쳐다봤다. 한 번도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어 문득 걱정이 일었다. 술에 이름이 있다는 것도 방금 처음 안 사실이었다. 하여 어떤 술을 찾느냐는 물음이 의아했다. 술은 그저 술인 줄 알았으니.
“여기 호제주 두 병!”
“네, 곧 갑니다!”
“전병도 가득!”
“야, 적당히 시켜.”
“뭐! 먹고 죽자!”
멀리서 들려온 말소리에 소운도 술병을 들었다.
‘먹고 죽자…….’
실제로 그런 뜻이 아님은 알지만 죽자는 소리는 곧장 뇌리에 박혀 들었다. 그만큼 거나하게 취해 보고 싶었다. 죽었다 할 만큼 정신 못 차리고 스며들어 저들과 비슷하게.
금세 술 한 병을 동낸 소운이 옆을 지나가던 사환의 옷자락을 조심히 잡았다.
“두 병, 아니. 세 병만 더 부탁합니다.”
“예, 금세 가져오겠습니다!”
향이 좋은 술이었다. 소운은 이내 긴장을 조금 풀고 희미하게 웃었다. 어찌된 일인지 아직 취기는 올라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아졌다. 밝은 주루의 분위기에 자신도 자연스럽게 녹아나고 있는 듯해 오랜만에 흐릿한 웃음이 피었다. 동경해 마지않던 삶이 지척에서 펼쳐졌다. 마치 저도 그런 생을 사는 것처럼 어딜 둘러봐도 평범한 행복들이다.
“아이고, 많이 자셨네.”
“지금 갑니다!”
“요즘 객주님이 안 보이네?”
“제일 독한 걸로 다섯 병 주셔요.”
“대행수께선 저기 계신데?”
“그만 마셔, 인마!”
“너 이거 몇 개로 보이냐. 어?”
“한 개! 열두 개! 세 개!”
시끄러운 말소리가 이어졌다. 두 병의 끝자락을 달리던 소운도 조심히 제 음성을 얹었다.
“청호각. 백화주. 남소운이라…… 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굳이 누군가와 얘기하지 않아도 만족스러웠다. 틈에 섞여 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채 살고 싶었다. 소운은 어느새 독하게 담근 백화주를 세 병째 들이켜는 중이었다.
“백화주.”
사실 사람을 좋아하진 않는다. 일평생 사람에게 버려지고 상처만 받으며 살아온 삶이니 무엇을 더 바랄까. 헌데 그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는 모습은 즐겁게 보였다. 해서 한 사람, 한 사람 자체는 꺼리지만 많은 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사는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의미 없는 읊조림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백화주를 끝없이 입에 담는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시선을 내리깔며 잔잔히 짓는 미소가 저절로 시선이 갈 만큼 수려했다.
‘대체 여기서…….’
그리고 그런 그를 지켜보던 이영의 미간은 처참히 구겨졌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불이 꺼져 있는 추하산의 집을 지켜보던 채였다. 그러다 그 적막이 왠지 이상해 황자가 자고 있을 방문을 조심히 열었는데 조잡하게 꾸며진 이불더미만이 이영을 반겼다. 순간 굳어 버린 몸은 뒤늦게야 움직였다.
다시 담장을 넘어 저자로 돌아가는 동안 그녀는 짜증스레 미간을 구겼다. 황자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한에서 고작 사람 하나를 찾는 것은 산에서 선어(鮮魚)를 찾는 것만큼 불가능하다는 말이 따로 있을 정도로 수도는 넓고 저자는 인산인해였다.
황자에게서 뭔가를 알아내는 게 힘들다는 판단이 이미 내려진 후였지만 자연스레 접근해 달래다 보면 쓸 만한 얘기가 나올 수도 있으니 신경이 쓰이는 건 당연했다. 헌데 새끼 강아지처럼 낑낑거릴 것 같은 눈으로 겁 없이 담장을 성큼 넘는 황자 덕에 이영은 생전 팔자에 없던 남 걱정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