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화
그의 일탈이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고신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황자를 향한 감시는 강화되고 그와 관련된 일은 철저히 파묻혀 더욱 엄중히 숨겨질 테지. 최악의 경우, 황자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를 찾기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건만, 여기서 방해받고 싶지는 않았다. 원왕이 사람을 보내기 전에 바라는 걸 가져다줘야 잡힌 이들의 안위가 보장됐다.
추하산을 빠져나온 이영은 한숨을 내쉬며 청호각으로 돌아갔다. 혼자로는 밤을 새워도 무리일 것 같아 목안을 부르기 위함이었다. 자신과 낙주만 알고 있는 청호각 뒤편의 통로로 들어서는 그녀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피곤으로 예민해진 신경이 주루의 소음으로 인해 더욱 곤두섰다.
어둡고 긴 복도로 이어진 통로엔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암흑에 익숙한 걸음은 무리 없이 복도 끝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옆으로 틀어 조금만 더 가면 그녀의 방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오지만 발길은 잠시 멈춰 섰다.
이영이 언뜻 벽처럼 보이는 복도 끝 어느 한 곳에 손을 대자 작은 구멍이 뚫렸다. 그녀는 그것을 통해 주루 내부의 동태를 살폈다. 귀찮은 게 따라붙을 걸 늘 염려해야 하는 일상이었다. 하는 일이 이렇다 보니 종종 뒤를 쫓는 자들이 생겼고 복면을 쓴 그녀의 용모파기가 저자에 한차례 나붙은 적도 있었다.
황자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청호각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한 인물이었다. 처음엔 피로감에 젖어 환영을 보는 건가 싶었다. 기실 별스럽지 않은 우연이었다. 저자를 모르는 그가 갈 만한 곳은 그다지 많지 않고 어디가 주루인지 모르니 가장 눈에 띄는 곳으로 들어왔을 테지. 이영의 그런 추측은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소운은 그녀의 예상대로 움직여 청호각으로 들어왔다.
벌써 백화주를 네 병째 비우고 있는 그는 눈가를 붉게 물들이고도 흐트러짐 없는 정자세를 유지했다. 고고함이 묻어나는 풍경이었다.
상황을 대충 파악한 이영이 한시름 놓으며 계단을 올랐다. 위험에 처해 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걱정은 오래지 않아 다시 시작됐다. 황자 때문이었다.
의복을 갖춘 뒤 그에게 갔을 땐 이미 값을 치르는 중이었다. 헌데 난데없이 금화를 꺼내는 그로 인해 이영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 뒤에 서 있던 자들이 황자가 꺼낸 금화를 보고 눈을 치켜떴다. 누이인 의양 황녀가 5년 전쯤 별 뜻 없이 주었던 금화를 챙겨서 나온 소운은 그것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아니, 저…… 이렇게는 필요 없습니다.”
“두 개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 하나도 많은 것인데…….”
세상 물정 모르는 물음을 지껄인 그가 의문을 띠며 사환을 쳐다봤다. 이영은 골치가 아파질 것을 예감했다. 벌써 그의 뒤에 서 있는 자들이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돈 없는 자의 순진함은 넘어갈 수 있어도 돈 많은 자의 순진함은 먹잇감이었다.
눈을 감으면 코를 베이고 눈을 떠도 주머니가 털리는 곳이 가한의 저자이거늘. 저리 순진해서야 청호각을 나간 뒤 두 걸음도 지나지 않아 발가벗겨질 터였다.
객주의 눈짓을 발견한 사환이 상냥하게 웃으며 그냥 가셔도 좋다 답했다. 처음 오신 분이니 특별히 대접해 드리겠다고, 다음에도 오시라 솜씨 좋게 말을 꾸며 냈다.
‘내가 왜 저자를 지켜야 하는 건지…….’
그가 감사 인사를 한 뒤 청호각을 나가자 이영도 한숨을 내쉬며 그를 뒤따랐다. 그 사이 객주를 알아본 몇몇이 인사를 올렸지만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술에 취한 자가 걸음은 어찌나 빠른지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키가 커서 그러한가. 이영은 복면을 가져올 생각도 못하고 급히 그를 뒤쫓았다.
“아이쿠, 미안합니다. 거, 조심하시고.”
“……괜찮습니다.”
마른 사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그가 다시 길을 걸었다. 분명 자신의 풀린 주머니를 본 것 같았는데, 이영은 의아했다. 조금 전 황자의 눈길은 사내의 손에 닿아 있었다. 헌데 아무것도 보지 못한 양 자리를 뜬다. 이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끝까지 상황을 지켜보던 그녀가 곧 주머니를 여는 사내와 일부러 어깨를 부딪쳤다. 동시에 그의 만족스런 얼굴이 구겨졌다.
“조심해야지.”
“뭐요?”
예의 없는 말에 그는 황당한 얼굴로 이영을 노려봤다.
“요새는 그리 허튼수작 부리는 자가 없는 줄 알았는데. 뒤처지면 먹고살기 힘드니 다른 길을 찾아. 손놀림이 어색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어느새 자신의 손에 넘어온 주머니를 일별하며 그녀는 사내를 비웃었다. 그리고 그의 무리가 다가오기 전 자리를 벗어나 황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렸다.
술이 센 건지 약한 건지 도무지 갈피를 못 잡겠다. 보통 술에 취한 사람은 걸음이 느려지기 마련이건만 저이는 그사이 또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술에 강해 보이지도 않는데, 약간은 어눌한 발음이 그 이유였다.
“떨어뜨렸습니다.”
소운의 소맷자락을 잡는 이영의 손은 그다지 상냥치 못했다. 한시라도 빨리 황자가 무사히 귀가하는 것을 보고 돌아가 쉬고 싶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무척이나 가벼운 주머니의 무게에 이영은 당황했다. 분명 금화가 여러 개 들어 있었는데 느껴지는 무게는 겨우 하나쯤 있을까 싶은 정도였다.
거친 힘에 뒤를 돌아본 소운이 놀라 움츠러들었다가 제 주머니를 보고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 눈썹을 찡그린 이영에게 주눅이 들 법도 하건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이영은 점차 그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감사합니다.”
‘든 게 없어?’
미간을 찌푸린 채로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곧이어 허탈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 위로 등불이 아롱졌다. 소운은 조심히 옷자락을 빼냈지만 먼저 자리를 뜨진 못했다. 낯선 이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한쪽 입꼬리가 호선으로 올라간 얼굴은 무서웠지만 이상하게도 아름다웠다. 이제껏 이렇게 가까이, 얼굴선 하나까지도 자세히 봐 온 사람이라곤 누이밖에 없는 그에게 미의 기준이랄 건 없었다. 눈은 눈이고 입은 입이었다. 그러나 관자놀이에 땀방울이 달린 채 빛을 받고 있는 그녀는 아름다웠다. 가한을 처음 봤을 때처럼 두렵지만 두근거렸다. 문득, 목이 말랐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강한 경계심은 처음 보는 이에게 더욱 날을 세웠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소운의 손이 주머니를 잡았다. 두근거림과 두려움이 동반된 괴이한 감정이 그의 눈빛을 가라앉게 했다. 속히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 거셌다.
“감사합니다.”
이영은 곧바로 등을 돌리는 황자를 다시 붙잡지 않았다.
‘순해 빠진 줄 알았더니.’
호의적이지 못한 짧은 웃음이 그의 뒤통수를 향했다.
황자의 가슴팍은 그가 가져온 금화로 불룩했다. 돈을 숨겨 놓고 주머니는 무방비하게 둔 것이다. 청호각을 빠져나올 때까지만 해도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는데, 대체 언제 옮겨 놓은 걸까. 어쩐지 어색한 수작에도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를 내준다 싶었다. 알고 그리 한 것일까, 아니면 모르고 우연히 그랬나.
평소로 돌아온 이영의 눈에 너른 등이 담겼다. 다른 이보다 머리 하나는 큰 사내가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그녀의 눈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쩌면 황자가 제 예상만큼 이용하기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홀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나 삼엄한 감시와 잦은 수색에도 원망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초연하고, 어찌 보면 선량한 눈을 하고 있다. 과연 가능한 일인가. 실은 유약한 게 아니라 뿌리가 단단해 꺾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담장을 넘을 때 보았던 그의 고집스런 눈빛을 반추했다.
던지기 좋을 거라 예상했던 돌멩이가 실은 땅에 단단히 박힌 바위의 끄트머리라는 걸 알게 된 것처럼 입 안이 말랐다. 등불 아래로 멀어지는 그를 서늘하게 바라보던 이영이 곧 등을 돌렸다.
***
“목검은 왜요.”
낙주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른 아침부터 창고의 먼지를 뒤집어쓴 이영은 대충 어깨를 털며 그녀를 지나쳤다.
“뇌물.”
“뇌물이요? 누구에게 말입니까?”
낙주가 눈을 깜빡이다 황급히 뒤를 쫓았다. 쓰지 않는 물건을 모아 놓은 창고에 들어가더니 일각도 지나지 않아 나왔다. 그리곤 한다는 소리가 저것이다. 나부끼는 먼지 탓에 손을 휘적거리면서도 그녀는 지치지 않고 이영을 뒤따랐다.
상단에 마련된 상단주의 전각은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정작 주인인 이영은 상단보다 청호각에 머무는 날이 많아 쓰임이 적었다.
“추하산(秋賀山) 귀인에게.”
이영이 더러워진 겉옷을 벗으며 답했다. 황자를 황자라 대놓고 부를 수 없으니 대체된 말이 추하산 귀인(秋賀山 貴人)이었다. 황자의 거처가 있는 산의 이름에서 따온 별칭이었다.
“그 말 하지 말라니까…….”
낙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는 ‘곤인궁(壼仁宫) 귀인’이라는 말이 먼저 존재했다. 황후가 몹시도 아끼는 이가 황후궁인 곤인궁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낙주가 은밀히 알아 온 뒤로 이영은 황자를 추하산 귀인이라 불렀다. 곤인궁의 귀인이 여인이라는 건 중요치 않은 사실이었다. 이영에겐 그저 황자를 칭할 말이 필요했다.
“황상의 숨겨진 아들이다, 대놓고 말할까? 그게 더 위험하잖아.”
“황후께 죽임을 당하는 거나, 황제한테 죽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은연중에 황제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낙주가 볕 드는 창가에 걸터앉았다. 황후는 ‘황후께’이고 황제는 ‘황제한테’라니. 남이 들으면 경을 칠 언행이었으나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이영부터가 황제를 존중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고작 목검을 뇌물로 줘 뭘 어쩌시게요.”
“말을 걸어 볼까 하고.”
“그런…… 걸 주고 말을…….”
“왜.”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낙주를 쳐다보는 눈이 담담했다.
“뇌물이라면서요…….”
“뇌물이야.”
“그런 게?”
어깨를 으쓱이는 이영을 보다 낙주는 고개를 돌렸다. 무척 의심스러웠던 얼굴이 곧 체념으로 뒤덮였다.
“좋아할 거야.”
“예에-”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는 것을 보아하니 그다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고개를 홱 돌리고 이영을 노려본다.
“진심이십니까?”
“좋아할 거라니까.”
“갑자기 왜 결정을 바꾼 겁니까? 그자가 필요 없을 거라고 한 게 엊그제인데, 이제 와서 뇌물은 왜요.”
“잡아야 할 것 같아서.”
낙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햇살이 이영의 무릎으로 손아귀를 뻗었으나 그녀가 환복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늘은 곧장 몸을 집어삼켰다. 허나 날이 밝은 탓에 어둠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어느덧 봄의 절정이었다.
“아무래도 그자를 잡아야겠다. 반드시 알아내야 할 게 있는데, 그자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무엇을 알아내려 하는 겁니까?”
“더는 다른 이를 통하는 게 불가해. 입을 열 만한 자가 남아 있지도 않을뿐더러 있기야 했겠지만 진즉 뱀의 아귀에 황천을 건넜을 테니까. 허니 관련하여 남아 있는 사람은 추하산 귀인뿐이다. 계속 헛물을 켤 바에야 차라리 가장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묻는 게 낫지.”
“본인이니 명확히 알고 있기야 하겠지요. 헌데 입을 열겠습니까? 그리고 그, 거 목검은 진짜 아닙니다. 그걸 준다고 술술 불면 그게 더 이상합니다.”
이영이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처럼 낙주가 보기엔 작위적인 표정이었다. 남들에겐 실로 자연스러울 테지만.
“이름이 무엇인지, 언제 가둬졌고, 어찌 가둬졌고, 그전에 어디서 누구와 무슨 성을 가지고 살았는지. 거기까지라도 알게 된다면 당시 있었던 일을 조사할 수 있을 거야. 자연히 그자의 친모와 그에 얽힌 사정도 알 수 있을 테고.”
그의 일탈이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고신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황자를 향한 감시는 강화되고 그와 관련된 일은 철저히 파묻혀 더욱 엄중히 숨겨질 테지. 최악의 경우, 황자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를 찾기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건만, 여기서 방해받고 싶지는 않았다. 원왕이 사람을 보내기 전에 바라는 걸 가져다줘야 잡힌 이들의 안위가 보장됐다.
추하산을 빠져나온 이영은 한숨을 내쉬며 청호각으로 돌아갔다. 혼자로는 밤을 새워도 무리일 것 같아 목안을 부르기 위함이었다. 자신과 낙주만 알고 있는 청호각 뒤편의 통로로 들어서는 그녀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피곤으로 예민해진 신경이 주루의 소음으로 인해 더욱 곤두섰다.
어둡고 긴 복도로 이어진 통로엔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암흑에 익숙한 걸음은 무리 없이 복도 끝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옆으로 틀어 조금만 더 가면 그녀의 방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오지만 발길은 잠시 멈춰 섰다.
이영이 언뜻 벽처럼 보이는 복도 끝 어느 한 곳에 손을 대자 작은 구멍이 뚫렸다. 그녀는 그것을 통해 주루 내부의 동태를 살폈다. 귀찮은 게 따라붙을 걸 늘 염려해야 하는 일상이었다. 하는 일이 이렇다 보니 종종 뒤를 쫓는 자들이 생겼고 복면을 쓴 그녀의 용모파기가 저자에 한차례 나붙은 적도 있었다.
황자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청호각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한 인물이었다. 처음엔 피로감에 젖어 환영을 보는 건가 싶었다. 기실 별스럽지 않은 우연이었다. 저자를 모르는 그가 갈 만한 곳은 그다지 많지 않고 어디가 주루인지 모르니 가장 눈에 띄는 곳으로 들어왔을 테지. 이영의 그런 추측은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소운은 그녀의 예상대로 움직여 청호각으로 들어왔다.
벌써 백화주를 네 병째 비우고 있는 그는 눈가를 붉게 물들이고도 흐트러짐 없는 정자세를 유지했다. 고고함이 묻어나는 풍경이었다.
상황을 대충 파악한 이영이 한시름 놓으며 계단을 올랐다. 위험에 처해 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걱정은 오래지 않아 다시 시작됐다. 황자 때문이었다.
의복을 갖춘 뒤 그에게 갔을 땐 이미 값을 치르는 중이었다. 헌데 난데없이 금화를 꺼내는 그로 인해 이영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 뒤에 서 있던 자들이 황자가 꺼낸 금화를 보고 눈을 치켜떴다. 누이인 의양 황녀가 5년 전쯤 별 뜻 없이 주었던 금화를 챙겨서 나온 소운은 그것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아니, 저…… 이렇게는 필요 없습니다.”
“두 개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 하나도 많은 것인데…….”
세상 물정 모르는 물음을 지껄인 그가 의문을 띠며 사환을 쳐다봤다. 이영은 골치가 아파질 것을 예감했다. 벌써 그의 뒤에 서 있는 자들이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돈 없는 자의 순진함은 넘어갈 수 있어도 돈 많은 자의 순진함은 먹잇감이었다.
눈을 감으면 코를 베이고 눈을 떠도 주머니가 털리는 곳이 가한의 저자이거늘. 저리 순진해서야 청호각을 나간 뒤 두 걸음도 지나지 않아 발가벗겨질 터였다.
객주의 눈짓을 발견한 사환이 상냥하게 웃으며 그냥 가셔도 좋다 답했다. 처음 오신 분이니 특별히 대접해 드리겠다고, 다음에도 오시라 솜씨 좋게 말을 꾸며 냈다.
‘내가 왜 저자를 지켜야 하는 건지…….’
그가 감사 인사를 한 뒤 청호각을 나가자 이영도 한숨을 내쉬며 그를 뒤따랐다. 그 사이 객주를 알아본 몇몇이 인사를 올렸지만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술에 취한 자가 걸음은 어찌나 빠른지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키가 커서 그러한가. 이영은 복면을 가져올 생각도 못하고 급히 그를 뒤쫓았다.
“아이쿠, 미안합니다. 거, 조심하시고.”
“……괜찮습니다.”
마른 사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그가 다시 길을 걸었다. 분명 자신의 풀린 주머니를 본 것 같았는데, 이영은 의아했다. 조금 전 황자의 눈길은 사내의 손에 닿아 있었다. 헌데 아무것도 보지 못한 양 자리를 뜬다. 이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끝까지 상황을 지켜보던 그녀가 곧 주머니를 여는 사내와 일부러 어깨를 부딪쳤다. 동시에 그의 만족스런 얼굴이 구겨졌다.
“조심해야지.”
“뭐요?”
예의 없는 말에 그는 황당한 얼굴로 이영을 노려봤다.
“요새는 그리 허튼수작 부리는 자가 없는 줄 알았는데. 뒤처지면 먹고살기 힘드니 다른 길을 찾아. 손놀림이 어색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어느새 자신의 손에 넘어온 주머니를 일별하며 그녀는 사내를 비웃었다. 그리고 그의 무리가 다가오기 전 자리를 벗어나 황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렸다.
술이 센 건지 약한 건지 도무지 갈피를 못 잡겠다. 보통 술에 취한 사람은 걸음이 느려지기 마련이건만 저이는 그사이 또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술에 강해 보이지도 않는데, 약간은 어눌한 발음이 그 이유였다.
“떨어뜨렸습니다.”
소운의 소맷자락을 잡는 이영의 손은 그다지 상냥치 못했다. 한시라도 빨리 황자가 무사히 귀가하는 것을 보고 돌아가 쉬고 싶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무척이나 가벼운 주머니의 무게에 이영은 당황했다. 분명 금화가 여러 개 들어 있었는데 느껴지는 무게는 겨우 하나쯤 있을까 싶은 정도였다.
거친 힘에 뒤를 돌아본 소운이 놀라 움츠러들었다가 제 주머니를 보고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 눈썹을 찡그린 이영에게 주눅이 들 법도 하건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이영은 점차 그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감사합니다.”
‘든 게 없어?’
미간을 찌푸린 채로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곧이어 허탈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 위로 등불이 아롱졌다. 소운은 조심히 옷자락을 빼냈지만 먼저 자리를 뜨진 못했다. 낯선 이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한쪽 입꼬리가 호선으로 올라간 얼굴은 무서웠지만 이상하게도 아름다웠다. 이제껏 이렇게 가까이, 얼굴선 하나까지도 자세히 봐 온 사람이라곤 누이밖에 없는 그에게 미의 기준이랄 건 없었다. 눈은 눈이고 입은 입이었다. 그러나 관자놀이에 땀방울이 달린 채 빛을 받고 있는 그녀는 아름다웠다. 가한을 처음 봤을 때처럼 두렵지만 두근거렸다. 문득, 목이 말랐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강한 경계심은 처음 보는 이에게 더욱 날을 세웠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소운의 손이 주머니를 잡았다. 두근거림과 두려움이 동반된 괴이한 감정이 그의 눈빛을 가라앉게 했다. 속히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 거셌다.
“감사합니다.”
이영은 곧바로 등을 돌리는 황자를 다시 붙잡지 않았다.
‘순해 빠진 줄 알았더니.’
호의적이지 못한 짧은 웃음이 그의 뒤통수를 향했다.
황자의 가슴팍은 그가 가져온 금화로 불룩했다. 돈을 숨겨 놓고 주머니는 무방비하게 둔 것이다. 청호각을 빠져나올 때까지만 해도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는데, 대체 언제 옮겨 놓은 걸까. 어쩐지 어색한 수작에도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를 내준다 싶었다. 알고 그리 한 것일까, 아니면 모르고 우연히 그랬나.
평소로 돌아온 이영의 눈에 너른 등이 담겼다. 다른 이보다 머리 하나는 큰 사내가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그녀의 눈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쩌면 황자가 제 예상만큼 이용하기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홀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나 삼엄한 감시와 잦은 수색에도 원망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초연하고, 어찌 보면 선량한 눈을 하고 있다. 과연 가능한 일인가. 실은 유약한 게 아니라 뿌리가 단단해 꺾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담장을 넘을 때 보았던 그의 고집스런 눈빛을 반추했다.
던지기 좋을 거라 예상했던 돌멩이가 실은 땅에 단단히 박힌 바위의 끄트머리라는 걸 알게 된 것처럼 입 안이 말랐다. 등불 아래로 멀어지는 그를 서늘하게 바라보던 이영이 곧 등을 돌렸다.
***
“목검은 왜요.”
낙주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른 아침부터 창고의 먼지를 뒤집어쓴 이영은 대충 어깨를 털며 그녀를 지나쳤다.
“뇌물.”
“뇌물이요? 누구에게 말입니까?”
낙주가 눈을 깜빡이다 황급히 뒤를 쫓았다. 쓰지 않는 물건을 모아 놓은 창고에 들어가더니 일각도 지나지 않아 나왔다. 그리곤 한다는 소리가 저것이다. 나부끼는 먼지 탓에 손을 휘적거리면서도 그녀는 지치지 않고 이영을 뒤따랐다.
상단에 마련된 상단주의 전각은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정작 주인인 이영은 상단보다 청호각에 머무는 날이 많아 쓰임이 적었다.
“추하산(秋賀山) 귀인에게.”
이영이 더러워진 겉옷을 벗으며 답했다. 황자를 황자라 대놓고 부를 수 없으니 대체된 말이 추하산 귀인(秋賀山 貴人)이었다. 황자의 거처가 있는 산의 이름에서 따온 별칭이었다.
“그 말 하지 말라니까…….”
낙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는 ‘곤인궁(壼仁宫) 귀인’이라는 말이 먼저 존재했다. 황후가 몹시도 아끼는 이가 황후궁인 곤인궁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낙주가 은밀히 알아 온 뒤로 이영은 황자를 추하산 귀인이라 불렀다. 곤인궁의 귀인이 여인이라는 건 중요치 않은 사실이었다. 이영에겐 그저 황자를 칭할 말이 필요했다.
“황상의 숨겨진 아들이다, 대놓고 말할까? 그게 더 위험하잖아.”
“황후께 죽임을 당하는 거나, 황제한테 죽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은연중에 황제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낙주가 볕 드는 창가에 걸터앉았다. 황후는 ‘황후께’이고 황제는 ‘황제한테’라니. 남이 들으면 경을 칠 언행이었으나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이영부터가 황제를 존중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고작 목검을 뇌물로 줘 뭘 어쩌시게요.”
“말을 걸어 볼까 하고.”
“그런…… 걸 주고 말을…….”
“왜.”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낙주를 쳐다보는 눈이 담담했다.
“뇌물이라면서요…….”
“뇌물이야.”
“그런 게?”
어깨를 으쓱이는 이영을 보다 낙주는 고개를 돌렸다. 무척 의심스러웠던 얼굴이 곧 체념으로 뒤덮였다.
“좋아할 거야.”
“예에-”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는 것을 보아하니 그다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고개를 홱 돌리고 이영을 노려본다.
“진심이십니까?”
“좋아할 거라니까.”
“갑자기 왜 결정을 바꾼 겁니까? 그자가 필요 없을 거라고 한 게 엊그제인데, 이제 와서 뇌물은 왜요.”
“잡아야 할 것 같아서.”
낙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햇살이 이영의 무릎으로 손아귀를 뻗었으나 그녀가 환복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늘은 곧장 몸을 집어삼켰다. 허나 날이 밝은 탓에 어둠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어느덧 봄의 절정이었다.
“아무래도 그자를 잡아야겠다. 반드시 알아내야 할 게 있는데, 그자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무엇을 알아내려 하는 겁니까?”
“더는 다른 이를 통하는 게 불가해. 입을 열 만한 자가 남아 있지도 않을뿐더러 있기야 했겠지만 진즉 뱀의 아귀에 황천을 건넜을 테니까. 허니 관련하여 남아 있는 사람은 추하산 귀인뿐이다. 계속 헛물을 켤 바에야 차라리 가장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묻는 게 낫지.”
“본인이니 명확히 알고 있기야 하겠지요. 헌데 입을 열겠습니까? 그리고 그, 거 목검은 진짜 아닙니다. 그걸 준다고 술술 불면 그게 더 이상합니다.”
이영이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처럼 낙주가 보기엔 작위적인 표정이었다. 남들에겐 실로 자연스러울 테지만.
“이름이 무엇인지, 언제 가둬졌고, 어찌 가둬졌고, 그전에 어디서 누구와 무슨 성을 가지고 살았는지. 거기까지라도 알게 된다면 당시 있었던 일을 조사할 수 있을 거야. 자연히 그자의 친모와 그에 얽힌 사정도 알 수 있을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