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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래서 말을 걸 방도를 찾은 게 뇌물입니까?”

낙주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목검을 쳐다봤다.

“대책도 없네요.”

“좋아할 거라니까.”

“무모해지는 것에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몸을 사리고 황제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 때입니다.”

단단한 손이 낙주의 어깨에 닿았다.

“무모해지는 것에 때가 어디 있다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면 되는 거지.”

“…….”

“왜, 난 이번에도 성공할 것 같은데.”

대거리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낙주는 기분 좋게 웃는 얼굴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저리 무모했던 때마다 대부분 결과가 좋았기 때문이다. 승기를 잡은 전적이 숱한 장수에게 이제 막 창을 잡은 병졸이 무슨 조언을 할 수 있나. 그리고 확신 없이 감으로 움직이는 듯하지만 이영의 계산은 언제나 방대했다. 저가 모르는 부분도 있으니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이번에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마다 낙주는 이영 혼자 감당하는 짐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가, 미안했다. 숱한 시간을 어둠에서 움직인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신이 피폐해지고 나날이 피로에 치인다. 그럼에도 그녀는 노상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외려 위태로워 보일 만큼.

“사람 일에 무모해지지 마세요. 사람은 상단과 달리 감정이란 게 있습니다. 그것은 예상하는 대로만 흐르지 않고요.”

괜히 투정 어린 말이 튀어 나갔다.

“세상에 사람이 관여치 않는 일이 대관절 있긴 하고? 상단 일과 다르지 않아. 결과는 하늘에 달린 것이지.”

“그자가 객주를 더 경계할 수도 있습니다. 최악의 수는, 직접 밀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땐 나를 버려.”

“객주.”

낙주가 처참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땐 망설이지 말고 저들에게 던져. 늦장 부리다간 상단의 다른 이들이 얽힐 수 있다. 그러면…….”

“알겠으니 그만하십시오.”

“망설이지 말고, 낙주야.”

“……압니다. 다 알아요!”

씩씩거리며 바닥을 노려보던 낙주가 크게 발을 구르며 방을 나갔다. 저다지 마른 몸에서 저리 큰 소리가 나는 것을 보면 성이 많이 났나 보다. 이영은 괜히 속없는 생각을 하며 창밖의 푸른 나무로 시선을 던졌다. 청호각과 달리 상단의 거처는 하늘이 바로 보이지 않는 낮은 높이의 전각이었다.

‘목검이 별로면 백화주를 가져다줄까…….’

진지한 고민을 늘어놓으며 그녀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날부터 소운의 집엔 출처를 알 수 없는 물건이 놓이기 시작했다. 주기가 불규칙한 선물은 선물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것들이었다. 때가 탄 목검 한 자루. 역시나 때가 탄 서책 한 권. 보자에 싸인 이름 모를 다디단 당과 세 개. 과줄 네 개. 또다시 때가 탄 서책. 백화주 한 병.

전부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러나 소운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는 자의 방문이었다. 게다가 전부 소량이라 자주 있는 수색에도 들킬 염려가 없었다. 먹을 것은 먹어서 없애면 됐고 목검과 서적은 원래 두는 곳에 자연스레 끼워 넣으면 됐다. 보자는 태웠고 술병은 잘게 부순 뒤 기둥 아래 땅속에 묻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선물은 꺼려졌다. 어느 날부터 담장 한쪽에 고이 놓여 있는 물건을 보기가 싫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뚫고도 속절없이 마음 한구석은 설렜다. 여전히 경계심이 많아 한참 동안 뚫어져라 노려보다 걸음을 움직이지만, 그럼에도 다음이 기다려졌다. 굳어 간다 여겼던 내면은 이렇듯 끝을 모르고 또다시 샘솟았다. 유약하고 여린 이면을 드러내며 제 존재를 알린다. 소운은 여느 때와 다른, 떨리고 어린 눈망울로 그것을 바라봤다.

“담장…….”

하루는 저도 모르게 담벼락 앞을 서성이며 밤을 보냈다. 얼굴도, 목소리도, 심지어 정체 자체도 모르는 사람을 자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는 온밤을 상념에 젖어 보냈다.

혹 거부하면 더는 이런 해괴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 담장 밖으로 물건을 던져 봤지만 다음 날이면 물건은 다시 집 안, 마당으로 들어와 있었다. 결국 받은 걸 거절하지 못하고 차곡차곡 모아 둘 수밖에 없었다. 고작 해 봐야 남은 건 목검 한 자루와 책 세 권이었다. 백화주는 이후로 오지 않았다. 헌데 그 별로 없다 생각했던 것들이 시선을 묶었다. 신경이 쓰이고 그런 자신이 짜증 났다가도 불쌍했다.

아무도 저를 모른다 여겼는데, 제게 관심을 가지는 자는 없다고. 아비의 명으로 갇혀 버린 저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헌데 단조로워 적막하기까지 한 일상을 낯선 이가 무참히 깨부수고 들어왔다. 그 감각이 이상했다. 집 안 수색 때처럼 불쾌해야 할진대 어찌하여 그이가 누구인지 궁금한가. 어찌하여 속절없이 반가운 기분이 드는가. 어찌 저 작은 순간들이 마음에 손을 뻗고 있는가.

소운은 담장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샐 듯했다. 여섯 살 이후로 한 번도 이렇게 감정이 격해진 적은 없었건만. 입술을 거칠게 깨물었다. 여전히 이 관심이 꺼려졌다. 경계됐고 차라리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람을 기다렸다. 복잡함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마당을 서성이게 만들었다.

“……계십니까.”

이 밤, 저도 모르게 입을 연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중심을 잡지 못해서. 어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이곳에 없는 거겠지. 물건을 가져다 놓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으니 언제 오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끝내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모든 걸 귀신이고 환각이라 여기게 될 듯했다. 자신이 드디어 미쳐가고 있다고.

무엇을 물어야 할까, 온종일 고민했지만 마땅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저를 불쌍히 여기냐고 물어볼까. 만일 그렇다 하면 어쩌지. 허면 기분이 나빠야 하나. 무엇이 보통의 반응인지 알지 못해 소운은 긴 시간 고민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물은 건 절대 묻지 않겠다 다짐했던 말이었다.

“내일도, 오십니까.”

코끝이 아렸다. 눈물을 흘려 본 지 오래라 울기 직전이 어떤지 잊고 있었는데, 그래. 코끝이 아렸다. 아려서 절로 눈썹을 찡그리게 만든다. 눈에 금세 습기가 차올랐다. 허나 신기하게도 그는 순식간에 평소처럼 돌아왔다. 마치 꿈에 젖어 있다 현실을 깨달은 것처럼 극적인 변화였다.

어둠 속에서 그를 지켜보던 이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기둥에 기대 황자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엔 소운이 예상했던 호의나 동정이 없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무료함이 전부였다. 그의 변화에 흥미가 일기도 잠시였다. 언제 말을 걸지, 계산속이 바삐 돌아갔다.

“저는…….”

“…….”

“남소운입니다.”

이영의 눈꺼풀이 느리게 움직였다. 황제 기광헌의 성씨를 가져오지 않았을 건 그녀도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아마 어느 몰락한 귀족 가의 족보를 이용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름을 알았으니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영의 얼굴은 곧 굳어졌다.

“다음부터는, 오지 마십시오.”

이름을 일러 준 제 말에 스스로 놀란 황자는 담장을 뛰어넘을 때처럼 비장한 눈을 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등 위로 굵은 뼈가 불거졌다.

“절대로, 오지 마십시오.”

그 말을 마친 뒤에야 크게 숨을 들이켜고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히 방으로 들어간다. 마당에 혼자 남겨진 이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말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해 한동안은 자리도 뜨지 못했다.

가져다준 목검과 서책을 아끼며 저도 모르게 쓰다듬다 흠칫거리는 걸 몇 번이나 보았건만, 하여 제 뇌물이 마음에 든 줄 알았더니 다음부터는 오지 말라니. 속내를 파악할 수 없었다. 이영을 이리 어렵고 난해하게 만드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녀에겐 열 길 물속도 한 길 사람 속도 같았다. 사람 속이 조금 더 복잡하긴 하지만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이면 의외로 쉬웠다. 돈에 움직이는 자인지, 명예에 움직이는 자인지, 이상을 꿈꾸는 자인지, 의리가 우선인지. 어디에 중점을 두는지만 알면 살살 구슬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 정도만 파악해도 상단과 간자의 일을 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따르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오지 마십시오.’

헌데 황자는 조금 더 복잡하고 어렵다. 가치를 두는 것을 가져다줬다 생각했건만 또 한달음에 멀어져 버린다. 세상 물정을 몰라 쉽게 당할 거라 여겼는데 의외로 제 금화를 잘 지켰던 그날처럼.

이영이 자리를 벗어난 건 한참이 지난 뒤였다. 이번에도 빼놓지 않고 가져온 선물은 담장 앞에 고이 놓았다.

단단히 묶인 보자 끝이 바람에 살랑살랑 몸을 흔들었다. 달빛이 비추는 마당은 여느 때처럼 고요했다. 방문이 열린 건 이영이 떠나고 반 시진이 지난 후였다. 체념 섞인 걸음은 느리고 무거웠다. 너른 어깨는 내려간 눈꼬리만큼이나 안쓰러웠다. 그러나 또다시 담장 앞에 떡하니 놓인 선물을 본 순간 그의 눈은 급변해 당황과 반가움을 흘려 댔다. 노상 차갑고 무덤덤한 사내가 아니었다.

실은 좀 전, 비장하게 내뱉은 말은 저를 위한 것이었다. 이제 기대를 끊어야지. 누군지도 모르는 이에게 설렘까지 느끼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겨우 몇 번의 방문이 있었다고 이름까지 알려 줬는가. 제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네가 누군지 잊지 마라. 그러나 또한 네가 누군지 완전히 잊으라.’

‘…….’

‘누구에게도 너에 대해 발설하는 일은 없어야 하느니. 네놈이 누구인지는 오직 너 하나만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밝히거나 여길 빠져나가 도망친다면, 그땐 그 목이 붙어 있지 않을 테니 짐의 말을 똑바로 새기라.’

아버지를 처음 만난 어린 날, 그에게 들었던 말은 지금껏 잊히지 않았다. 헌데도 이름을 알려 줘 버렸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참으로 못나게도.

이름을 말하고선 자신도 당혹스러웠다. 대체 왜 그 말이 튀어나온 건지. 해서 다짐처럼 뒷말을 짓씹듯 토했다. 다신 오지 말라고. 절대로 찾아오지 말라고. 그런데 그 사람은 또 한 번 제게 의미 모를 선물을 두고 갔다.

거부하는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알 수 없지만 소운은 굳은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물건이 놓이면 병사에게 알리거나 담장 밖으로 버려 버릴 것이라 다짐했는데 또 속절없이 저것이 반갑다. 오지 말라는 제 말을 듣지 않고 다시 와 준 게 고맙다.

소운은 피가 날 것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끝내 여린 살이 터져 버려 아플 텐데도 멈추지 않고 입술을 짓씹었다. 낡은 보자를 노려보는 눈에 온갖 감정이 뒤섞였다.

‘내일도, 와 주십시오…….’

절대로 해선 안 되는 말이 주인의 의지를 누르며 목구멍을 찌른다. 그 아픔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이 귀중한 목숨을, 희망을 뒤편으로 밀려나게 할 것만 같았다.



***



“오늘은 날이 덥습니다.”

낮고 듣기 좋은 음성이 주변을 울렸다. 귓가에 뚜렷이 박히는 깊은 목소리와 더불어 적당히 느릿한 어투가 말에 더욱 집중을 하도록 만들었다.

“아직 봄이 다 가지 않았을진대, 여름은 더할 듯합니다.”

수풀을 바라보던 이영이 짧게 웃었다. 담장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확실히 황자의 것이었다. 대관절 하루 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심경변화였다. 이영은 어이가 없다 못해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연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 중 탄리국이 있다 들었습니다. 소금이 많이 나는 곳이라고. 멀리, 모래가 땅을 뒤덮은 나라는 서국이라 배웠습니다.”

오늘은 그에게 말을 걸어 볼까 했는데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저가 뭘 해 볼 기회도 없었다. 하여 이영은 침묵하는 길을 택했다. 여기서 갑자기 답을 하는 것도 모양새가 웃길 것 같아서였다.

“추하산에는 꽃나무가 없어 아쉽습니다. 있었다면 호사 선생이 화폭에 담아낸 봄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사실 소운은 이영의 생각만큼 급격한 변화를 겪은 게 아니었다. 그녀에겐 다른 날과 다를 바 없이 숨 가쁜 하루였겠지만 그에겐 고민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길고 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