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운명같이 그대와 5화
“그래서 김승찬 그 개자식은 연락 한 통 없어?”
강렬한 맛을 남기고 장렬하게 전사한 닭의 뼈로 무덤을 쌓던 나리가 혜연을 쳐다봤다.
“어, 뭐…….”
“순도 100% 또라이가 틀림없다.”
치킨 무가 원수라도 되는 양 우두둑 씹어 삼킨 나리가 중얼거렸다. 혜연은 별말 없이 제 앞에 놓인 맥주 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이미 탄산이 사라진 맥주는 답답하게 막힌 속을 뚫어 주지 못했다.
“걔는 쓰레기야. 네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그딴 쓰레기랑 결혼 안 한 게 얼마나 다행이냐.”
“그러게.”
혜연이 무미건조한 어투로 답하자 나리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녀의 눈에서 우수수 눈물이 떨어졌다.
“으흑, 김승찬…… 개새끼…….”
“그래. 울어. 울고 다 털어 내.”
따스한 손길에 그녀가 제 다리를 끌어안으며 참아왔던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승찬이 제게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저보다 더 걱정할 부모님을 알기에 그녀는 괜찮은 척, 강하게 버텨 냈다. 정작 제 상처 하나 달래지 못했으면서.
“더 울어. 더.”
“으어어엉. 지가 뭔데! 으흐흑. 제 까짓게 뭔데!”
그동안 마음 한편에 켜켜이 쌓아 뒀던 감정들을 와르르 무너뜨린 채 우는 그녀에 나리는 그저 티슈를 건네 줄 뿐이었다.
“실컷 울었어?”
“크흥, 큽. 응…….”
시원하게 코까지 푼 그녀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잊어. 그딴 새끼한테 미련 한 톨도 갖지 마. 알겠어?”
단호한 나리의 음성에 그녀가 알아들었다는 듯 이미 식어 버린 닭 다리 하나를 건넸다.
“기집애. 너나 먹어. 네가 잘 먹고 반질반질 윤이 나야 더 괜찮은 남자가 붙을 거 아냐.”
혜연의 손을 잡고 닭 다리를 미는 나리의 모습에 그녀가 작게 웃으며 입을 벌렸다.
“옳지. 잘 먹네. 나 여기 있는 동안 너 원상복구시켜 놓을 거야. 알겠어?”
“알겠으니까 너도 먹어.”
눅눅해진 튀김옷을 씹으며 나리의 설교 아닌 설교를 듣던 그녀가 나리가 제일 좋아하는 날개를 집어 건넸다. 그러자 언제 떠들었냐는 듯 거실엔 치킨 먹는 소리만 가득했다.
“아 참. 너 내일 뭐 해?”
한창 발골 작업 중이던 나리가 입에서 뼈 두 개를 뱉어 내며 물었다.
“나? 스케줄 없어. 왜 어디 갈 데 있어?”
“성당 갔다 오려고.”
“아……. 어디쯤에 있는데?”
“어. 여기서 걸어서 25분쯤?”
“차 빌려줄게.”
“그러지 말고 같이 다녀오자. 너 요즘 심란하다며.”
“에이, 됐어.”
“어허, 괜히 집에 앉아서 굿 같은 거 찾아보지 말고 같이 가. 미사 드리지 말고 밖에 있어. 거기 성당 외관이 진짜 예쁘대. 잠깐 바람 쐰다 생각하고.”
“그럼 한 번 가 볼까?”
그녀의 긍정적인 답변에 나리가 맥주 캔을 들어보였다. 나리의 행동에 그녀도 미소를 지었다.
“우리의 마지막 20대를 위하여!”
* * *
“뭐야, 다 찼잖아.”
혜연이 핸들을 잡고 주차장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젯밤, 제가 사 온 술로는 부족하다며 치킨집에서 같이 시킨 것까지 클리어 한 두 사람이었다.
분명 같이 마셨는데 술이 약한 혜연만 아침부터 화장실 행이었다. 결국 미사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나리가 먼저 성당으로 가고 그녀는 뒤늦게 차를 끌고 성당으로 향했다.
“으으, 속 쓰려.”
분명 조절한다고 했는데 승찬의 이야기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 자식은 어떻게 마지막까지 사람을 괴롭히냐.”
빈 공간을 찾으면서도 쓰린 속을 부여잡은 그녀가 승찬을 향한 원망을 쏟아 냈다.
“여기다 주차를……. 헉.”
빼곡하게 들어선 차들 사이로 빈 공간을 발견하자마자 순간적으로 아랫배가 꿈틀거렸다.
“안…… 돼. 참아, 나혜연! 참아!”
위급한 상황이지만 어떻게든 주차를 하려 그녀가 천천히 핸들을 돌렸다. 하지만 차가 점점 주차 공간으로 들어감에 따라 핸들을 쥔 손에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하고 이마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다 됐어. 좀만, 조금……. 아! 안 돼!”
딱 10초면 완벽하게 주차 라인 안에 들어가는데 지금 혜연에겐 단, 10초의 여유는 사치였다. 시동도 제대로 끄지 못하고 차 문을 열어 밖으로 나온 그녀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화장실을 향해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학창 시절부터 체력장하는 날이 제일 싫을 정도로 저질 체력인 혜연은 놀라운 속도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결국 변기에 앉자마자 한바탕 큰 폭풍우를 만난 그녀는 잔잔한 바람을 맞이하고 나서야 화장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맞다, 주차!”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한달음에 주차장으로 달려간 그녀가 황당한 듯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뭐야, 차 어디 갔어?”
분명 자리에 있어야 될 차는 없고 텅 빈 공간에 당황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미사가 끝났는지 꽉 찼던 주차장은 몇 군데 빼고는 텅 비어 있었다.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펴보던 혜연은 순간적으로 제가 잘못 기억하는 줄 알고 다시 주차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녀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또 도난은…….”
제 차가 있어야할 텅 빈 공간을 보던 그녀가 불현듯 도난당한 자전거를 떠올렸다.
“나리한테 전화……. 맞다! 차에 있지!”
나리에게 전화를 하려 주머니에 손을 넣다 차 조수석에 놔두고 온 휴대폰을 생각해냈다. 결국 수중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해 망연자실한 그녀가 일단 나리를 만나야한다는 일념하에 성당 쪽으로 향했다.
“차 없는 거 보니 미사는 끝났겠고, 나리는……. 아!”
차를 끌고 올라온 길을 가로질러 성당으로 향하던 그녀가 순간 무언가에 부딪혔다.
“괜찮으세요?”
“네, 뭐……. 어!”
부딪히며 뒤로 밀려난 그녀에게 괜찮느냐고 물어오는 물음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제 눈앞에 바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 놀란 그녀가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당신은…….”
그는 놀란 얼굴의 그녀를 의아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카페…….”
“어! 그때, 카페에서 만난 분 맞으시죠?”
그는 혜연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생각이 났는지 의아한 시선을 버리고 반가움이 깃든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이제는 좀 괜찮으세요? 그때 그렇게 가 버리셔서 많이 걱정했는데…….”
“아, 네. 걱정해 주신 덕분에…….”
남자가 다정함이 한껏 묻어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자 혜연은 넋을 놓은 듯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니까 반갑네요.”
“네, 저도,”
“여기 성당 다니세요?”
“네?”
남자의 말에 홀린 듯 대답을 이어 가던 혜연이 그의 질문에 정신을 차렸다.
“여기 성당 다니시는지…….”
빵빵!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들리는 시끄러운 클랙슨 소리에 남자와 혜연이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성당 입구 앞에 낯익은 차가 눈에 들어왔다.
“어? 내 차!”
도난당한 줄 알았던 차가 떡하니 성당 입구에 있다는 사실에 그녀가 얼른 차를 향해 입구 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다 문득 등 뒤의 남자가 생각나 뒤를 돌았다. 몸에 맞는 검은색 슈트를 차려입은 그는 멀리서 보아도 눈이 부셨다.
이렇게 헤어지면 이젠 정말 끝이다. 입구를 향해 내려가던 걸음을 멈추고 양옆을 번갈아 쳐다봤다. 저를 기준으로 길의 밑에는 제 차가 있었고 길의 위에는 이상형이 있었다.
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선뜻 어디로도 가지 못하던 그녀가 점점 움직여 앞으로 나가는 차에 반사적으로 입구 쪽으로 뛰었다.
“안 돼! 아직 할부가 남았다고!”
점점 멀어져 가는 차에 그녀가 좀 더 속력을 내 차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다 성당 입구로 뛰어 들어오는 아이와 부딪혔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넘어지려는 아이를 붙잡아 세웠다.
“아야!”
“괜찮아?”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살피는데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곤 성당 쪽을 쳐다봤다.
“어? 학사님이다!”
“응? 학사님?”
“감사합니다. 학사니임!”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한 아이가 성당 쪽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다다다 언덕을 뛰어올라갔다. 혜연은 긴 언덕을 잘도 뛰어 올라가는 아이를 멍하게 쳐다봤다.
숨이 찰 법도 한데 빠르게 언덕을 올라간 아이는 남자를 잡았다. 멀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지만 남자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같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건물 안으로 사라진 것을 본 뒤에야 그녀는 차도를 살폈다. 하지만 제 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거 꿈이지?”
빈 차도를 보며 세상을 잃은 듯 중얼거린 혜연이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그러자 정말 마법처럼 그녀의 차가 나타났다.
“어? 내 차!”
제 차를 놀란 듯 멍하니 쳐다보자 조수석의 창문이 내려가고 나리의 얼굴이 드러났다.
“야! 얼른 타!”
“어? 어!”
저를 보며 소리를 지르는 나리에 정신을 차린 그녀가 서둘러 조수석에 올라타고 문을 닫자 나리가 액셀을 밟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도대체 어디 있었어? 지갑이며 핸드폰이며 다 차에 두고. 아니, 그보다 시동도 안 끈 차 두고 어디 갔었어?”
“아, 그게…….”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알아? 미사 끝나고 나왔는데 너는 없고, 시동 걸린 차만 덜렁.”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아니, 그리고 내가 클랙슨 눌렀으면 빨리 내려왔어야지. 뒤에 차 와서 한 바퀴 더 돌았잖아.”
홍수처럼 와르르 쏟아지는 말에 찌릿하고 편두통을 느낀 그녀가 심호흡을 하며 지끈대는 제 머리를 눌렀다. 그 행동을 봤는지 쉬지 않고 움직이던 나리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괜찮아? 약국으로 갈까?”
평소에도 편두통이 심한 그녀를 알기에 나리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녀가 됐다며 제 머리를 누르던 손을 떼어 손사래를 쳤다. 그럼에도 나리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몇 번이고 그녀를 힐끔댔다. 그런 나리의 행동에 괜히 더 신경이 쓰인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 차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아니, 미사 드리고 나오는데 주차장에 사람들이 떼로 서 있더라고. 궁금해서 갔는데 웬걸, 네 차가 시동이 켜진 채로 주차라인 밖에 나와 있는 거야.”
“아…….”
“다들 누구 차냐고 웅성대고, 혹시나 너 있을까 하고 봤는데 너는 안 나타나고. 그냥 죄송하다고 나라고 하고 얼른 차 끌고 나왔지. 내가 운전해도 차 보험 그대로 적용되는 거지? 집까지 내가 운전할게.”
“응, 문제없어. 미안. 창피했겠다.”
듣는 것만으로도 화끈거리는 말에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를 건넸다.
“됐어. 너 별일 없었으면 된 거지. 뭐. 근데, 너 진짜 어디 있었어?”
“아니, 딱 주차하려는데 갑자기 배가 뒤틀리면서 아픈 거야. 그래서 그냥 본능적으로 튀어나갔지, 뭐.”
“으이구. 그러면 차라리 집에서 나오지 말지 그랬어.”
“아니, 집에선 잠잠해져서 괜찮아진 건 줄 알았지. 누가 그렇게 갑자기 밀려올 줄 알았나.”
나리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핸들을 부드럽게 돌렸다. 저 또한 제가 생각해도 그 상황이 웃겨 피식 웃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나리를 쳐다봤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하사님? 학사님? 그게 뭐야?”
”아아, 학사님?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
빨간불에 차를 세우던 나리가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냥 어쩌다 보니……. 근데 뭐야? 무슨 호칭 같던데?”
남자를 보고 학사님이라 부르던 꼬마를 떠올린 그녀가 넌지시 물었다.
“신부님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신학생을 부르는 호칭이야.”
“뭐?”
정말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그녀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신부님 될 사람이라고. 학사님은.”
그녀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리가 또박또박 정확히 말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한 문장이 스쳐 지나갔다.
이거 실화냐?
“풉!”
“웃지 마.”
소파 한구석에 앉아 키득거리는 나리에 혜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나도 안 웃고……. 풉! 푸하하하!”
“야, 윤나리! 난 진짜 심각하다고!”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하는 나리를 향해 그녀가 제 옆에 놓인 쿠션을 집어 던졌다. 나리는 웃는 와중에도 혜연이 던진 쿠션을 정확히 잡아냈다.
“이씨…….”
나리의 순발력 있는 행동에 더욱 괘씸한 듯 씩씩대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가 크게 반응할수록 나리의 웃음소리 역시 커져 갔다. 한참을 웃는 나리에 혜연이 다시 소파에 앉았다.
“윤나리, 넌 지금 이 상황이 재밌어?”
“아니, 솔직히 웃긴 건 사실이잖아.”
이제 다 웃었는지 나리는 틀어놓고 미처 보지 못한 예능방송을 되감고 있었다.
“야! 난 진짜 심각하다고!”
“아니, 혼자 뭐가 그렇게 심각한데. 네가 그 남자랑 사귀길 했어. 뭘 했어. 따지고 보면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너무나 객관적인 나리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어깨가 한껏 아래로 처졌다.
“맞아. 그건 그래.”
“그래. 그만 잊어버려. 어차피 그분은 네가 닿을 수 없는 곳에 계시는 분이다. 알겠어?”
결정적인 쐐기를 박는 나리의 말에 혜연이 맥 빠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방에.”
“이따 죽 쒀 줄게.”
“고마워.”
방으로 향하는 뒷모습에 대고 나리가 말하자 그녀가 손을 흔들며 방에 들어갔다.
“에휴.”
풀썩. 침대에 몸을 던지듯 뉘인 혜연이 천장을 바라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어떻게 골키퍼가 쭉쭉 빵빵 예쁜 여자도 아니고 전 세계인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받는 분이냐고! 왜! 제대로 겨뤄볼 수도 없는 상대에 드는 패배감에 혜연이 침대 위로 발장구를 쳤다.
“왜 그런 비주얼로…….”
몸에 힘이 빠진 듯 대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혜연이 다시금 떠오르는 남자의 얼굴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제 심정을 아는지 천장에 나타난 남자의 얼굴은 저를 향해 환히 웃음 짓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생길 수 있지?”
남자를 떠올리며 감탄하던 혜연의 머릿속으로 검은색 수단을 입은 남자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어쩜…….”
수단을 입은 남자의 모습은 상상이었음에도 고결함이 느껴졌다.
“아니야! 그만 생각해! 그만!”
헤벌쭉 벌어지려던 입매를 단속한 혜연이 제 머리를 헤집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수록 더욱 떠오르는 남자의 모습에 그녀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제 그만 사라져 주세요!”
“그래서 김승찬 그 개자식은 연락 한 통 없어?”
강렬한 맛을 남기고 장렬하게 전사한 닭의 뼈로 무덤을 쌓던 나리가 혜연을 쳐다봤다.
“어, 뭐…….”
“순도 100% 또라이가 틀림없다.”
치킨 무가 원수라도 되는 양 우두둑 씹어 삼킨 나리가 중얼거렸다. 혜연은 별말 없이 제 앞에 놓인 맥주 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이미 탄산이 사라진 맥주는 답답하게 막힌 속을 뚫어 주지 못했다.
“걔는 쓰레기야. 네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그딴 쓰레기랑 결혼 안 한 게 얼마나 다행이냐.”
“그러게.”
혜연이 무미건조한 어투로 답하자 나리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녀의 눈에서 우수수 눈물이 떨어졌다.
“으흑, 김승찬…… 개새끼…….”
“그래. 울어. 울고 다 털어 내.”
따스한 손길에 그녀가 제 다리를 끌어안으며 참아왔던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승찬이 제게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저보다 더 걱정할 부모님을 알기에 그녀는 괜찮은 척, 강하게 버텨 냈다. 정작 제 상처 하나 달래지 못했으면서.
“더 울어. 더.”
“으어어엉. 지가 뭔데! 으흐흑. 제 까짓게 뭔데!”
그동안 마음 한편에 켜켜이 쌓아 뒀던 감정들을 와르르 무너뜨린 채 우는 그녀에 나리는 그저 티슈를 건네 줄 뿐이었다.
“실컷 울었어?”
“크흥, 큽. 응…….”
시원하게 코까지 푼 그녀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잊어. 그딴 새끼한테 미련 한 톨도 갖지 마. 알겠어?”
단호한 나리의 음성에 그녀가 알아들었다는 듯 이미 식어 버린 닭 다리 하나를 건넸다.
“기집애. 너나 먹어. 네가 잘 먹고 반질반질 윤이 나야 더 괜찮은 남자가 붙을 거 아냐.”
혜연의 손을 잡고 닭 다리를 미는 나리의 모습에 그녀가 작게 웃으며 입을 벌렸다.
“옳지. 잘 먹네. 나 여기 있는 동안 너 원상복구시켜 놓을 거야. 알겠어?”
“알겠으니까 너도 먹어.”
눅눅해진 튀김옷을 씹으며 나리의 설교 아닌 설교를 듣던 그녀가 나리가 제일 좋아하는 날개를 집어 건넸다. 그러자 언제 떠들었냐는 듯 거실엔 치킨 먹는 소리만 가득했다.
“아 참. 너 내일 뭐 해?”
한창 발골 작업 중이던 나리가 입에서 뼈 두 개를 뱉어 내며 물었다.
“나? 스케줄 없어. 왜 어디 갈 데 있어?”
“성당 갔다 오려고.”
“아……. 어디쯤에 있는데?”
“어. 여기서 걸어서 25분쯤?”
“차 빌려줄게.”
“그러지 말고 같이 다녀오자. 너 요즘 심란하다며.”
“에이, 됐어.”
“어허, 괜히 집에 앉아서 굿 같은 거 찾아보지 말고 같이 가. 미사 드리지 말고 밖에 있어. 거기 성당 외관이 진짜 예쁘대. 잠깐 바람 쐰다 생각하고.”
“그럼 한 번 가 볼까?”
그녀의 긍정적인 답변에 나리가 맥주 캔을 들어보였다. 나리의 행동에 그녀도 미소를 지었다.
“우리의 마지막 20대를 위하여!”
* * *
“뭐야, 다 찼잖아.”
혜연이 핸들을 잡고 주차장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젯밤, 제가 사 온 술로는 부족하다며 치킨집에서 같이 시킨 것까지 클리어 한 두 사람이었다.
분명 같이 마셨는데 술이 약한 혜연만 아침부터 화장실 행이었다. 결국 미사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나리가 먼저 성당으로 가고 그녀는 뒤늦게 차를 끌고 성당으로 향했다.
“으으, 속 쓰려.”
분명 조절한다고 했는데 승찬의 이야기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 자식은 어떻게 마지막까지 사람을 괴롭히냐.”
빈 공간을 찾으면서도 쓰린 속을 부여잡은 그녀가 승찬을 향한 원망을 쏟아 냈다.
“여기다 주차를……. 헉.”
빼곡하게 들어선 차들 사이로 빈 공간을 발견하자마자 순간적으로 아랫배가 꿈틀거렸다.
“안…… 돼. 참아, 나혜연! 참아!”
위급한 상황이지만 어떻게든 주차를 하려 그녀가 천천히 핸들을 돌렸다. 하지만 차가 점점 주차 공간으로 들어감에 따라 핸들을 쥔 손에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하고 이마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다 됐어. 좀만, 조금……. 아! 안 돼!”
딱 10초면 완벽하게 주차 라인 안에 들어가는데 지금 혜연에겐 단, 10초의 여유는 사치였다. 시동도 제대로 끄지 못하고 차 문을 열어 밖으로 나온 그녀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화장실을 향해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학창 시절부터 체력장하는 날이 제일 싫을 정도로 저질 체력인 혜연은 놀라운 속도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결국 변기에 앉자마자 한바탕 큰 폭풍우를 만난 그녀는 잔잔한 바람을 맞이하고 나서야 화장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맞다, 주차!”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한달음에 주차장으로 달려간 그녀가 황당한 듯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뭐야, 차 어디 갔어?”
분명 자리에 있어야 될 차는 없고 텅 빈 공간에 당황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미사가 끝났는지 꽉 찼던 주차장은 몇 군데 빼고는 텅 비어 있었다.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펴보던 혜연은 순간적으로 제가 잘못 기억하는 줄 알고 다시 주차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녀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또 도난은…….”
제 차가 있어야할 텅 빈 공간을 보던 그녀가 불현듯 도난당한 자전거를 떠올렸다.
“나리한테 전화……. 맞다! 차에 있지!”
나리에게 전화를 하려 주머니에 손을 넣다 차 조수석에 놔두고 온 휴대폰을 생각해냈다. 결국 수중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해 망연자실한 그녀가 일단 나리를 만나야한다는 일념하에 성당 쪽으로 향했다.
“차 없는 거 보니 미사는 끝났겠고, 나리는……. 아!”
차를 끌고 올라온 길을 가로질러 성당으로 향하던 그녀가 순간 무언가에 부딪혔다.
“괜찮으세요?”
“네, 뭐……. 어!”
부딪히며 뒤로 밀려난 그녀에게 괜찮느냐고 물어오는 물음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제 눈앞에 바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 놀란 그녀가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당신은…….”
그는 놀란 얼굴의 그녀를 의아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카페…….”
“어! 그때, 카페에서 만난 분 맞으시죠?”
그는 혜연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생각이 났는지 의아한 시선을 버리고 반가움이 깃든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이제는 좀 괜찮으세요? 그때 그렇게 가 버리셔서 많이 걱정했는데…….”
“아, 네. 걱정해 주신 덕분에…….”
남자가 다정함이 한껏 묻어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자 혜연은 넋을 놓은 듯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니까 반갑네요.”
“네, 저도,”
“여기 성당 다니세요?”
“네?”
남자의 말에 홀린 듯 대답을 이어 가던 혜연이 그의 질문에 정신을 차렸다.
“여기 성당 다니시는지…….”
빵빵!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들리는 시끄러운 클랙슨 소리에 남자와 혜연이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성당 입구 앞에 낯익은 차가 눈에 들어왔다.
“어? 내 차!”
도난당한 줄 알았던 차가 떡하니 성당 입구에 있다는 사실에 그녀가 얼른 차를 향해 입구 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다 문득 등 뒤의 남자가 생각나 뒤를 돌았다. 몸에 맞는 검은색 슈트를 차려입은 그는 멀리서 보아도 눈이 부셨다.
이렇게 헤어지면 이젠 정말 끝이다. 입구를 향해 내려가던 걸음을 멈추고 양옆을 번갈아 쳐다봤다. 저를 기준으로 길의 밑에는 제 차가 있었고 길의 위에는 이상형이 있었다.
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선뜻 어디로도 가지 못하던 그녀가 점점 움직여 앞으로 나가는 차에 반사적으로 입구 쪽으로 뛰었다.
“안 돼! 아직 할부가 남았다고!”
점점 멀어져 가는 차에 그녀가 좀 더 속력을 내 차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다 성당 입구로 뛰어 들어오는 아이와 부딪혔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넘어지려는 아이를 붙잡아 세웠다.
“아야!”
“괜찮아?”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살피는데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곤 성당 쪽을 쳐다봤다.
“어? 학사님이다!”
“응? 학사님?”
“감사합니다. 학사니임!”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한 아이가 성당 쪽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다다다 언덕을 뛰어올라갔다. 혜연은 긴 언덕을 잘도 뛰어 올라가는 아이를 멍하게 쳐다봤다.
숨이 찰 법도 한데 빠르게 언덕을 올라간 아이는 남자를 잡았다. 멀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지만 남자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같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건물 안으로 사라진 것을 본 뒤에야 그녀는 차도를 살폈다. 하지만 제 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거 꿈이지?”
빈 차도를 보며 세상을 잃은 듯 중얼거린 혜연이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그러자 정말 마법처럼 그녀의 차가 나타났다.
“어? 내 차!”
제 차를 놀란 듯 멍하니 쳐다보자 조수석의 창문이 내려가고 나리의 얼굴이 드러났다.
“야! 얼른 타!”
“어? 어!”
저를 보며 소리를 지르는 나리에 정신을 차린 그녀가 서둘러 조수석에 올라타고 문을 닫자 나리가 액셀을 밟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도대체 어디 있었어? 지갑이며 핸드폰이며 다 차에 두고. 아니, 그보다 시동도 안 끈 차 두고 어디 갔었어?”
“아, 그게…….”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알아? 미사 끝나고 나왔는데 너는 없고, 시동 걸린 차만 덜렁.”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아니, 그리고 내가 클랙슨 눌렀으면 빨리 내려왔어야지. 뒤에 차 와서 한 바퀴 더 돌았잖아.”
홍수처럼 와르르 쏟아지는 말에 찌릿하고 편두통을 느낀 그녀가 심호흡을 하며 지끈대는 제 머리를 눌렀다. 그 행동을 봤는지 쉬지 않고 움직이던 나리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괜찮아? 약국으로 갈까?”
평소에도 편두통이 심한 그녀를 알기에 나리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녀가 됐다며 제 머리를 누르던 손을 떼어 손사래를 쳤다. 그럼에도 나리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몇 번이고 그녀를 힐끔댔다. 그런 나리의 행동에 괜히 더 신경이 쓰인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 차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아니, 미사 드리고 나오는데 주차장에 사람들이 떼로 서 있더라고. 궁금해서 갔는데 웬걸, 네 차가 시동이 켜진 채로 주차라인 밖에 나와 있는 거야.”
“아…….”
“다들 누구 차냐고 웅성대고, 혹시나 너 있을까 하고 봤는데 너는 안 나타나고. 그냥 죄송하다고 나라고 하고 얼른 차 끌고 나왔지. 내가 운전해도 차 보험 그대로 적용되는 거지? 집까지 내가 운전할게.”
“응, 문제없어. 미안. 창피했겠다.”
듣는 것만으로도 화끈거리는 말에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를 건넸다.
“됐어. 너 별일 없었으면 된 거지. 뭐. 근데, 너 진짜 어디 있었어?”
“아니, 딱 주차하려는데 갑자기 배가 뒤틀리면서 아픈 거야. 그래서 그냥 본능적으로 튀어나갔지, 뭐.”
“으이구. 그러면 차라리 집에서 나오지 말지 그랬어.”
“아니, 집에선 잠잠해져서 괜찮아진 건 줄 알았지. 누가 그렇게 갑자기 밀려올 줄 알았나.”
나리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핸들을 부드럽게 돌렸다. 저 또한 제가 생각해도 그 상황이 웃겨 피식 웃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나리를 쳐다봤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하사님? 학사님? 그게 뭐야?”
”아아, 학사님?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
빨간불에 차를 세우던 나리가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냥 어쩌다 보니……. 근데 뭐야? 무슨 호칭 같던데?”
남자를 보고 학사님이라 부르던 꼬마를 떠올린 그녀가 넌지시 물었다.
“신부님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신학생을 부르는 호칭이야.”
“뭐?”
정말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그녀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신부님 될 사람이라고. 학사님은.”
그녀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리가 또박또박 정확히 말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한 문장이 스쳐 지나갔다.
이거 실화냐?
“풉!”
“웃지 마.”
소파 한구석에 앉아 키득거리는 나리에 혜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나도 안 웃고……. 풉! 푸하하하!”
“야, 윤나리! 난 진짜 심각하다고!”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하는 나리를 향해 그녀가 제 옆에 놓인 쿠션을 집어 던졌다. 나리는 웃는 와중에도 혜연이 던진 쿠션을 정확히 잡아냈다.
“이씨…….”
나리의 순발력 있는 행동에 더욱 괘씸한 듯 씩씩대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가 크게 반응할수록 나리의 웃음소리 역시 커져 갔다. 한참을 웃는 나리에 혜연이 다시 소파에 앉았다.
“윤나리, 넌 지금 이 상황이 재밌어?”
“아니, 솔직히 웃긴 건 사실이잖아.”
이제 다 웃었는지 나리는 틀어놓고 미처 보지 못한 예능방송을 되감고 있었다.
“야! 난 진짜 심각하다고!”
“아니, 혼자 뭐가 그렇게 심각한데. 네가 그 남자랑 사귀길 했어. 뭘 했어. 따지고 보면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너무나 객관적인 나리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어깨가 한껏 아래로 처졌다.
“맞아. 그건 그래.”
“그래. 그만 잊어버려. 어차피 그분은 네가 닿을 수 없는 곳에 계시는 분이다. 알겠어?”
결정적인 쐐기를 박는 나리의 말에 혜연이 맥 빠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방에.”
“이따 죽 쒀 줄게.”
“고마워.”
방으로 향하는 뒷모습에 대고 나리가 말하자 그녀가 손을 흔들며 방에 들어갔다.
“에휴.”
풀썩. 침대에 몸을 던지듯 뉘인 혜연이 천장을 바라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어떻게 골키퍼가 쭉쭉 빵빵 예쁜 여자도 아니고 전 세계인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받는 분이냐고! 왜! 제대로 겨뤄볼 수도 없는 상대에 드는 패배감에 혜연이 침대 위로 발장구를 쳤다.
“왜 그런 비주얼로…….”
몸에 힘이 빠진 듯 대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혜연이 다시금 떠오르는 남자의 얼굴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제 심정을 아는지 천장에 나타난 남자의 얼굴은 저를 향해 환히 웃음 짓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생길 수 있지?”
남자를 떠올리며 감탄하던 혜연의 머릿속으로 검은색 수단을 입은 남자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어쩜…….”
수단을 입은 남자의 모습은 상상이었음에도 고결함이 느껴졌다.
“아니야! 그만 생각해! 그만!”
헤벌쭉 벌어지려던 입매를 단속한 혜연이 제 머리를 헤집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수록 더욱 떠오르는 남자의 모습에 그녀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제 그만 사라져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