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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같이 그대와 6화
“꼴이…… 말이 아닌데?”
“잠을 설쳐서.”
“딱 봐도 그래 보여. 눈에 빨간 물감 부은 줄.”
“그 정도야?”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는 혜연의 얼굴을 보던 나리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어떻길……. 이게 뭐야!”
테이블 위 거울을 가리키는 나리에 그녀가 거울에 얼굴을 비추다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네가 봐도 대박이지?”
“으아아, 이게 뭐야…….”
“쭉 자라고 일부러 깨우지도 않았는데 몰골이 참…….”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는 그녀에 나리가 쯧, 혀를 찼다.
“나리야아, 이대로 눈이 터지는 거 아닐까?”
“애냐? 눈이 어떻게 터져. 기다려.”
한 며칠 밤을 샌 모양새를 한 그녀의 눈에 나리가 제 방으로 들어가더니 휴대용 구급함을 들고 나왔다.
“소파에 누워.”
구급함을 테이블 위에 올린 나리가 구급함을 열어 안약을 꺼냈다.
“눈 살짝 위로 떠 봐.”
구급함에 들어 있던 멸균 장갑까지 낀 나리가 안약의 뚜껑을 열고 아래 눈꺼풀을 살짝 잡아당겼다.
“약 들어가면 잠깐 눈 감고 있어. 바로 뜨지 말고.”
“응.”
주의를 준 나리가 안약을 떨어뜨렸다. 그리곤 반대쪽 눈에도 똑같이 행했다. 나리의 말대로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눈을 뜨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슬며시 눈을 떴다.
“덜 뻑뻑하지?”
“응. 고마워.”
“뭐 하느라 잠도 안 잤어?”
장갑을 벗은 뒤 구급함 정리를 하던 나리가 눈을 깜박거리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그게 어젯밤 꿈…….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나리의 물음에 별생각 없이 술술 얘기를 하려던 그녀가 급하게 제 입을 막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에 수상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던 나리가 다 정리된 구급함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 하마터면 다 말할 뻔했어.
방으로 들어가는 나리를 보며 그녀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 사실대로 말했으면 아마 등짝을 맞았을 거야. 절대 내 입으로 말 못 하지. 또 그 남자 꿈꿨다고 어떻게 말해.
그녀가 자못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제 입을 앙 다물었다. 나리는 더 이상 별 관심이 없는지 거실 바닥에 앉아 리모컨으로 채널을 휙휙 돌렸다.
“혜연아, 그래서 학사님은 꿈에서 잘 만났어?”
“아니 계속 뒷모습만……. 헉!”
아무 생각 없이 돌아가는 채널을 바라보던 혜연이 나리의 물음에 자연스럽게 답하다 순간적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아, 그래서 네가 잠을 설쳤구나! 어?”
“하하하, 그게…….”
음산한 기운을 뿜어 내는 나리의 뒷모습에 그녀가 순간적으로 소파에서 일어나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야! 나혜연! 문 안 열어?”
“싫어! 못 열어! 안 열어!”
“내가 그만 생각하랬지! 어?”
“나는 뭐 꾸고 싶어서 꿨나? 원래 꿈은 무의식의 실현이야! 의사가 그것도 모르냐!”
혹시 나리가 들어올까 방문 손잡이를 꼭 쥔 그녀가 잠잠한 문 밖에 손에 슬슬 힘을 뺐다.
“윤……나리?”
“…….”
“나리야?”
분명 방금 전까지 앞에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바깥에 혜연이 고민했다.
문을 열까? 아냐, 앞에 있을지도 몰라. 그냥 방에 들어갔나?
분명 들려야 되는 TV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요한 바깥에 문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얘가 방에 들어 갔…… 엄마!”
홀로 중얼거리던 그녀가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돌려지는 손잡이에 반사적으로 손잡이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승기는 나리에게로 기울어져 있었다.
“하하하, 나…… 나리야?”
“나와.”
“응?”
“나오라고.”
방문을 잡은 채 나리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인 그녀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등짝 맞을 줄 알았는데?
나오라는 말만 남기고 거실로 향하는 나리에 그녀가 조심스레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은 나리의 반대편 바닥에 천천히 앉았다.
여차하면 방으로 전력 질주 하는 거야.
혹시나 제가 예상하는 상황이 벌어질까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까지 한 그녀가 비장한 눈으로 나리를 쳐다봤다. 나리는 그런 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 받아.”
“핸드폰은 왜?”
예상과는 달리 차분히 휴대폰을 내밀자 혜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골라.”
“뭐를……. 이게 뭐야?”
다짜고짜 고르라는 말에 그녀가 휴대폰의 화면을 쳐다봤다. 화면엔 남자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걔를 1번으로 옆으로 넘기면 5번까지 있어.”
“설마…….”
“제일 마음에 드는 애부터 골라. 제일 처음으로 만나게.”
“소개팅?”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그녀가 난감한 표정으로 묻자 나리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출국하기 전까지 다 만나 보자. 알겠지?”
단단히 결심한 나리에 그녀의 고개가 무너지듯 떨어졌다.
* * *
“과장님 혹시…… 연애하세요?”
“네?”
결재 서류를 검토하던 혜연이 상미를 올려다봤다.
“요즘 부쩍 더 예뻐지시는 것 같아서요!”
“하하,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니에요.”
“정말요? 다른 부서 직원들도 요즘 과장님 얘기 많이 해요.”
“그래요?”
상미의 이야기에 그녀가 대수롭지 않은 듯 다시 서류를 훑었다.
“마케팅팀 제 동기가 말해 준 건데요.”
그녀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도 상미는 주변을 살핀 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마케팅팀 남자 직원들이 과장님의 물오른 미모 칭찬을 하다 김 실장님한테 걸려서 된통 깨졌대요.”
검토를 마치고 결재란에 사인을 하다 상미의 말에 펜을 삐끗했다. 왠지 묘하게 상상이 가는 개구리의 모습에 속으로 웃음을 삼킨 그녀가 서류를 건넸다.
“여기 서류요.”
상미는 뭔가 더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곧 짧게 고개를 숙이곤 제자리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뒷모습을 본 그녀가 미끄러지듯 제 책상에 엎드렸다.
벌써 몇 명째야.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던 그녀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나리의 출국 일에 나흘 동안 내리 소개팅 중이었다. 꾸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저녁 열리는 나리의 뷰티 숍과 의상실은 그녀를 더욱 피곤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덕에 요즘 회사 내에서 제 물오른 미모를 감탄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건 명백한 사실이지만.
“기집애, 성격하고는.”
원체 한 번 마음먹은 일은 무조건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나리였다. 지잉.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짧게 울리자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저녁 7시 30분 D카페.
010-XXXX-XXXX >
딱 핵심만 담고 있는 간결하고 짧은 문자를 본 그녀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D카페면 회사 바로 근처잖아!
당황한 그녀가 휴대 전화를 들고 빠르게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혹, 사람이 있을까 계단의 위아래를 모두 살펴본 그녀는 최근 통화 목록 제일 위를 차지한 번호를 눌렀다. 그러자 나리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들려왔다.
-갑자기 웬 전화? 쉬는 시간이야?
제 속도 모르고 태연하게 묻는 나리에 작게 속삭이듯 다그쳤다.
“야, D카페면 우리 회사 앞이잖아!”
-알아. 일부러 거기로 잡은 건데?
“왜?”
-멀리 나가면 너 피곤할거 같아서 내가 회사 가까운 데로 잡으라고 했어.
“배려해 줘서 눈물 나게 고마운데, 소개팅 주선을 그만하는 게 제일 좋은 배려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니?”
더 이상은 무리라는 걸 보여 주듯 지친 목소리로 조근 조근 묻자 나리가 애원조로 맞받아쳤다.
-이번만 나갔다 와. 마지막이잖아. 응?
“…….”
-이번에도 싫으면 다신 주선 안 할게. 오케이?
“다시는?”
-응. 다시는 안 할게. 네가 해 달라고 해도 절대 안 해 줄게.
“그래. 알겠어. 진짜 마지막이다?”
-그럼. 앞으론 절대 주선 안 해.
강력한 마지막 말에 혹한 혜연이 긍정적인 답변을 하자 나리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그럼, 일 열심히 하고. 이따 봐.
“그래. 너도 일 잘 보고 와.”
-오냐.
나리의 말과 함께 끊긴 통화에 그녀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라는데…….”
근데 왜 꼭 말린 기분이 들지? 분명 마지막이라는 약속을 받아 낸 것이 기뻐야 하는데 스멀스멀 올라오는 찜찜한 기분에 혜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상계단을 나섰다.
팀원들이 모두 퇴근할 때까지 사무실에서 기다린 혜연이 조심스레 회사를 빠져나왔다. 이게 더 튀려나? 집에서 나올 때 둘렀던 스카프로 반쯤 얼굴을 가리고 서둘러 카페로 향했다.
딸랑.
“어서 오세요.”
“네.”
약속 시간에 맞춰 카페로 들어간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순간 카페 안을 가득 울리며 들려오는 상큼발랄한 걸 그룹 벨소리에 그녀뿐 아니라 카페 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상큼발랄 걸 그룹의 벨소리가 울리는 휴대폰을 든 남자는 다른 한 손엔 머그컵을 들고 있었다.
-여보세요?
휴대폰 너머와 동시에 육성으로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지금 제가 보고 있는 남자라는 사실에 그녀가 테이블로 다가갔다.
“여보세요? 여보세…….”
휴대폰에 대고 말을 하던 남자가 테이블 앞에 선 혜연을 보곤 얼른 머그컵을 내려두며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나혜연이에요.”
“아! 네! 반갑습니다. 오진상입니다.”
“아…….”
악수를 청하며 이름을 말하는 자랑에 그녀가 당황해하며 진상의 손을 맞잡았다.
“웃으셔도 됩니다. 다들 제 이름 들으면 웃더라고요.”
“아, 아니에요. 개성 넘치고 좋은데요.”
“앉으실까요?”
자리를 권하는 진상에 고개를 끄덕이며 앉았다.
“나리 씨한테 들었는데……. SP엔터 근무하신다고요?”
“네? 네, 뭐…….”
“그럼 KLEO랑 같은 회사네요.”
자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 연예인 질문을 던지는 자랑에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런 똥 매너를 봤나. 말을 시킬 거면 마실 거라도 좀 주고 시키든지. 본인은 마셨다 이거야?
자랑의 앞에 놓인 빈 머그컵을 본 그녀가 자꾸 찌그러지려는 인상을 억지로 피며 그를 쳐다봤다.
“그럼 KLEO도 보셨겠네요?”
처음과 달리 진상의 눈이 반짝거렸다.
“네, 뭐……. 많이는 아니고요. 오시는데 길은 안 막히셨어요?”
“네. 뭐. 아! 이번에 KLEO 신곡 나왔던데…….”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에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진상은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았는지 대화를 원점으로 되돌려 놨다.
진짜 눈치는 어디 개나 줬나.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세요.”
잠시라도 자리를 피하고 싶었던 그녀가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짜증나. 내가 KLEO 매니저야 뭐야. 왜 나한테 그런 걸 물어?”
화장실로 들어오자마자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을 뱉어냈다.
“제 입만 입이고 내 입은 입도 아니야? 목은 저만 마른 줄 아나. 말을 해도 내가 배는 많이 한 거 같은데.”
진상의 앞에서 하고 싶었던 말을 모조리 쏟아 낸 그녀가 세면대 위 거울을 쳐다봤다.
“괜히 예쁘게 하고 왔어. 아까워 죽겠네.”
제가 봐도 신경 쓴 티가 확 나는 메이크업과 의상에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똑똑. 문 밖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그녀가 빠르게 머리를 정리하곤 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문을 열자마자 저를 쌩하니 지나치는 여자에 머쓱해진 그녀는 헛기침을 했다.
“저기요.”
“네?”
그때, 귓가를 사로잡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그녀가 뒤를 돌았다.
“또 보네요.”
“하, 학사…….”
“네?”
갑자기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을 제 소개팅 장소에서 만난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벌써 세 번째네요?”
근데, 이 남자. 안 좋았던 기분도 정화시켜 주는 능력을 가진 걸까. 화장실 앞 설치된 조명을 마치 반사판으로 만드는 빛나는 얼굴에 혜연의 표정이 스르륵 풀렸다.
하지만 곧 나리의 말을 떠올린 그녀가 부러 표정을 굳히며 바닥을 쳐다봤다.
“지난번 성당에서의 일은 어떻게 잘 마무리되셨어요?”
“아……. 예.”
“다행이네요. 그날도 걱정 많이 했는데.”
남자의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가까스로 참아낸 그녀가 그만 자리를 피하려 고개를 들었다.
“제가 일행이…….”
“잠시 만요.”
그녀의 말을 끊은 남자가 한 발자국 다가섰다. 쿵쿵쿵쿵. 남자가 다가오자 일정하게 뛰던 그녀의 심장 박동이 급격히 빨라졌다. 그걸 모르는 남자는 이번엔 그녀의 얼굴 쪽으로 손을 뻗어왔다. 그럴수록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갈 것처럼 세차게 뛰었다. 남자의 손이 구불구불 웨이브진 머리카락에 닿았다 떨어졌다.
“다 됐어요. 여기 뭐가 묻어서.”
“아……. 감사합니다.”
제 앞에 짧은 실을 들어 보인 남자에 그녀가 서둘러 짧게 묵례를 하곤 자랑이 기다리는 자리로 돌아갔다.
“늦으셨네요. 집에 가신 줄 알았어요.”
“네? 아, 죄송해요.”
자리에 앉자마자 비아냥거리듯 말하는 진상에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녀가 사과를 건넸다. 그 뒤로도 진상의 질문은 계속 됐다.
“그럼 KLEO 사인 같은 것도 받으실 수 있겠어요.”
“아, 지난번에 KLEO가 라디오 나와서…….”
“KLEO 이번 앨범은 누가…….”
하지만 정작, 답변을 해야 할 그녀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질문도 슬슬 수그러들었다. 그 때, 테이블 앞으로 직원이 다가와 그녀의 앞에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갑작스런 직원의 등장에 두 사람의 시선이 직원을 향했다.
“혜연 씨 뭐 시키셨어요?”
“아뇨. 저 이거 안 시켰는데……”
“이거 드리면 알 거라고 하시던데요.”
직원이 그녀에게 냅킨을 건넸다. 냅킨엔 깔끔한 필체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매번 저랑 부딪히셨는데 제대로 사과를 못 드린 것 같아서요.
사과 주스로 대신합니다. 다음에 만나면 제대로 사과할게요.
-단아한
“단……아한?”
“네?”
천천히 아한이 남긴 냅킨의 글을 읽은 그녀가 제 앞에 놓인 맑은 색의 사과 주스를 쳐다봤다. 단아한. 이름까지 완벽한 남자는 성격 역시 완벽했다.
“진짜 아깝다.”
그녀의 두 눈에 아쉬움이 한가득 들어찼다.
“꼴이…… 말이 아닌데?”
“잠을 설쳐서.”
“딱 봐도 그래 보여. 눈에 빨간 물감 부은 줄.”
“그 정도야?”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는 혜연의 얼굴을 보던 나리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어떻길……. 이게 뭐야!”
테이블 위 거울을 가리키는 나리에 그녀가 거울에 얼굴을 비추다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네가 봐도 대박이지?”
“으아아, 이게 뭐야…….”
“쭉 자라고 일부러 깨우지도 않았는데 몰골이 참…….”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는 그녀에 나리가 쯧, 혀를 찼다.
“나리야아, 이대로 눈이 터지는 거 아닐까?”
“애냐? 눈이 어떻게 터져. 기다려.”
한 며칠 밤을 샌 모양새를 한 그녀의 눈에 나리가 제 방으로 들어가더니 휴대용 구급함을 들고 나왔다.
“소파에 누워.”
구급함을 테이블 위에 올린 나리가 구급함을 열어 안약을 꺼냈다.
“눈 살짝 위로 떠 봐.”
구급함에 들어 있던 멸균 장갑까지 낀 나리가 안약의 뚜껑을 열고 아래 눈꺼풀을 살짝 잡아당겼다.
“약 들어가면 잠깐 눈 감고 있어. 바로 뜨지 말고.”
“응.”
주의를 준 나리가 안약을 떨어뜨렸다. 그리곤 반대쪽 눈에도 똑같이 행했다. 나리의 말대로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눈을 뜨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슬며시 눈을 떴다.
“덜 뻑뻑하지?”
“응. 고마워.”
“뭐 하느라 잠도 안 잤어?”
장갑을 벗은 뒤 구급함 정리를 하던 나리가 눈을 깜박거리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그게 어젯밤 꿈…….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나리의 물음에 별생각 없이 술술 얘기를 하려던 그녀가 급하게 제 입을 막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에 수상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던 나리가 다 정리된 구급함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 하마터면 다 말할 뻔했어.
방으로 들어가는 나리를 보며 그녀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 사실대로 말했으면 아마 등짝을 맞았을 거야. 절대 내 입으로 말 못 하지. 또 그 남자 꿈꿨다고 어떻게 말해.
그녀가 자못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제 입을 앙 다물었다. 나리는 더 이상 별 관심이 없는지 거실 바닥에 앉아 리모컨으로 채널을 휙휙 돌렸다.
“혜연아, 그래서 학사님은 꿈에서 잘 만났어?”
“아니 계속 뒷모습만……. 헉!”
아무 생각 없이 돌아가는 채널을 바라보던 혜연이 나리의 물음에 자연스럽게 답하다 순간적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아, 그래서 네가 잠을 설쳤구나! 어?”
“하하하, 그게…….”
음산한 기운을 뿜어 내는 나리의 뒷모습에 그녀가 순간적으로 소파에서 일어나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야! 나혜연! 문 안 열어?”
“싫어! 못 열어! 안 열어!”
“내가 그만 생각하랬지! 어?”
“나는 뭐 꾸고 싶어서 꿨나? 원래 꿈은 무의식의 실현이야! 의사가 그것도 모르냐!”
혹시 나리가 들어올까 방문 손잡이를 꼭 쥔 그녀가 잠잠한 문 밖에 손에 슬슬 힘을 뺐다.
“윤……나리?”
“…….”
“나리야?”
분명 방금 전까지 앞에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바깥에 혜연이 고민했다.
문을 열까? 아냐, 앞에 있을지도 몰라. 그냥 방에 들어갔나?
분명 들려야 되는 TV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요한 바깥에 문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얘가 방에 들어 갔…… 엄마!”
홀로 중얼거리던 그녀가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돌려지는 손잡이에 반사적으로 손잡이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승기는 나리에게로 기울어져 있었다.
“하하하, 나…… 나리야?”
“나와.”
“응?”
“나오라고.”
방문을 잡은 채 나리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인 그녀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등짝 맞을 줄 알았는데?
나오라는 말만 남기고 거실로 향하는 나리에 그녀가 조심스레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은 나리의 반대편 바닥에 천천히 앉았다.
여차하면 방으로 전력 질주 하는 거야.
혹시나 제가 예상하는 상황이 벌어질까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까지 한 그녀가 비장한 눈으로 나리를 쳐다봤다. 나리는 그런 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 받아.”
“핸드폰은 왜?”
예상과는 달리 차분히 휴대폰을 내밀자 혜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골라.”
“뭐를……. 이게 뭐야?”
다짜고짜 고르라는 말에 그녀가 휴대폰의 화면을 쳐다봤다. 화면엔 남자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걔를 1번으로 옆으로 넘기면 5번까지 있어.”
“설마…….”
“제일 마음에 드는 애부터 골라. 제일 처음으로 만나게.”
“소개팅?”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그녀가 난감한 표정으로 묻자 나리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출국하기 전까지 다 만나 보자. 알겠지?”
단단히 결심한 나리에 그녀의 고개가 무너지듯 떨어졌다.
* * *
“과장님 혹시…… 연애하세요?”
“네?”
결재 서류를 검토하던 혜연이 상미를 올려다봤다.
“요즘 부쩍 더 예뻐지시는 것 같아서요!”
“하하,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니에요.”
“정말요? 다른 부서 직원들도 요즘 과장님 얘기 많이 해요.”
“그래요?”
상미의 이야기에 그녀가 대수롭지 않은 듯 다시 서류를 훑었다.
“마케팅팀 제 동기가 말해 준 건데요.”
그녀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도 상미는 주변을 살핀 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마케팅팀 남자 직원들이 과장님의 물오른 미모 칭찬을 하다 김 실장님한테 걸려서 된통 깨졌대요.”
검토를 마치고 결재란에 사인을 하다 상미의 말에 펜을 삐끗했다. 왠지 묘하게 상상이 가는 개구리의 모습에 속으로 웃음을 삼킨 그녀가 서류를 건넸다.
“여기 서류요.”
상미는 뭔가 더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곧 짧게 고개를 숙이곤 제자리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뒷모습을 본 그녀가 미끄러지듯 제 책상에 엎드렸다.
벌써 몇 명째야.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던 그녀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나리의 출국 일에 나흘 동안 내리 소개팅 중이었다. 꾸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저녁 열리는 나리의 뷰티 숍과 의상실은 그녀를 더욱 피곤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덕에 요즘 회사 내에서 제 물오른 미모를 감탄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건 명백한 사실이지만.
“기집애, 성격하고는.”
원체 한 번 마음먹은 일은 무조건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나리였다. 지잉.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짧게 울리자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저녁 7시 30분 D카페.
010-XXXX-XXXX >
딱 핵심만 담고 있는 간결하고 짧은 문자를 본 그녀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D카페면 회사 바로 근처잖아!
당황한 그녀가 휴대 전화를 들고 빠르게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혹, 사람이 있을까 계단의 위아래를 모두 살펴본 그녀는 최근 통화 목록 제일 위를 차지한 번호를 눌렀다. 그러자 나리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들려왔다.
-갑자기 웬 전화? 쉬는 시간이야?
제 속도 모르고 태연하게 묻는 나리에 작게 속삭이듯 다그쳤다.
“야, D카페면 우리 회사 앞이잖아!”
-알아. 일부러 거기로 잡은 건데?
“왜?”
-멀리 나가면 너 피곤할거 같아서 내가 회사 가까운 데로 잡으라고 했어.
“배려해 줘서 눈물 나게 고마운데, 소개팅 주선을 그만하는 게 제일 좋은 배려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니?”
더 이상은 무리라는 걸 보여 주듯 지친 목소리로 조근 조근 묻자 나리가 애원조로 맞받아쳤다.
-이번만 나갔다 와. 마지막이잖아. 응?
“…….”
-이번에도 싫으면 다신 주선 안 할게. 오케이?
“다시는?”
-응. 다시는 안 할게. 네가 해 달라고 해도 절대 안 해 줄게.
“그래. 알겠어. 진짜 마지막이다?”
-그럼. 앞으론 절대 주선 안 해.
강력한 마지막 말에 혹한 혜연이 긍정적인 답변을 하자 나리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그럼, 일 열심히 하고. 이따 봐.
“그래. 너도 일 잘 보고 와.”
-오냐.
나리의 말과 함께 끊긴 통화에 그녀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라는데…….”
근데 왜 꼭 말린 기분이 들지? 분명 마지막이라는 약속을 받아 낸 것이 기뻐야 하는데 스멀스멀 올라오는 찜찜한 기분에 혜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상계단을 나섰다.
팀원들이 모두 퇴근할 때까지 사무실에서 기다린 혜연이 조심스레 회사를 빠져나왔다. 이게 더 튀려나? 집에서 나올 때 둘렀던 스카프로 반쯤 얼굴을 가리고 서둘러 카페로 향했다.
딸랑.
“어서 오세요.”
“네.”
약속 시간에 맞춰 카페로 들어간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순간 카페 안을 가득 울리며 들려오는 상큼발랄한 걸 그룹 벨소리에 그녀뿐 아니라 카페 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상큼발랄 걸 그룹의 벨소리가 울리는 휴대폰을 든 남자는 다른 한 손엔 머그컵을 들고 있었다.
-여보세요?
휴대폰 너머와 동시에 육성으로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지금 제가 보고 있는 남자라는 사실에 그녀가 테이블로 다가갔다.
“여보세요? 여보세…….”
휴대폰에 대고 말을 하던 남자가 테이블 앞에 선 혜연을 보곤 얼른 머그컵을 내려두며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나혜연이에요.”
“아! 네! 반갑습니다. 오진상입니다.”
“아…….”
악수를 청하며 이름을 말하는 자랑에 그녀가 당황해하며 진상의 손을 맞잡았다.
“웃으셔도 됩니다. 다들 제 이름 들으면 웃더라고요.”
“아, 아니에요. 개성 넘치고 좋은데요.”
“앉으실까요?”
자리를 권하는 진상에 고개를 끄덕이며 앉았다.
“나리 씨한테 들었는데……. SP엔터 근무하신다고요?”
“네? 네, 뭐…….”
“그럼 KLEO랑 같은 회사네요.”
자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 연예인 질문을 던지는 자랑에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런 똥 매너를 봤나. 말을 시킬 거면 마실 거라도 좀 주고 시키든지. 본인은 마셨다 이거야?
자랑의 앞에 놓인 빈 머그컵을 본 그녀가 자꾸 찌그러지려는 인상을 억지로 피며 그를 쳐다봤다.
“그럼 KLEO도 보셨겠네요?”
처음과 달리 진상의 눈이 반짝거렸다.
“네, 뭐……. 많이는 아니고요. 오시는데 길은 안 막히셨어요?”
“네. 뭐. 아! 이번에 KLEO 신곡 나왔던데…….”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에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진상은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았는지 대화를 원점으로 되돌려 놨다.
진짜 눈치는 어디 개나 줬나.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세요.”
잠시라도 자리를 피하고 싶었던 그녀가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짜증나. 내가 KLEO 매니저야 뭐야. 왜 나한테 그런 걸 물어?”
화장실로 들어오자마자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을 뱉어냈다.
“제 입만 입이고 내 입은 입도 아니야? 목은 저만 마른 줄 아나. 말을 해도 내가 배는 많이 한 거 같은데.”
진상의 앞에서 하고 싶었던 말을 모조리 쏟아 낸 그녀가 세면대 위 거울을 쳐다봤다.
“괜히 예쁘게 하고 왔어. 아까워 죽겠네.”
제가 봐도 신경 쓴 티가 확 나는 메이크업과 의상에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똑똑. 문 밖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그녀가 빠르게 머리를 정리하곤 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문을 열자마자 저를 쌩하니 지나치는 여자에 머쓱해진 그녀는 헛기침을 했다.
“저기요.”
“네?”
그때, 귓가를 사로잡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그녀가 뒤를 돌았다.
“또 보네요.”
“하, 학사…….”
“네?”
갑자기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을 제 소개팅 장소에서 만난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벌써 세 번째네요?”
근데, 이 남자. 안 좋았던 기분도 정화시켜 주는 능력을 가진 걸까. 화장실 앞 설치된 조명을 마치 반사판으로 만드는 빛나는 얼굴에 혜연의 표정이 스르륵 풀렸다.
하지만 곧 나리의 말을 떠올린 그녀가 부러 표정을 굳히며 바닥을 쳐다봤다.
“지난번 성당에서의 일은 어떻게 잘 마무리되셨어요?”
“아……. 예.”
“다행이네요. 그날도 걱정 많이 했는데.”
남자의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가까스로 참아낸 그녀가 그만 자리를 피하려 고개를 들었다.
“제가 일행이…….”
“잠시 만요.”
그녀의 말을 끊은 남자가 한 발자국 다가섰다. 쿵쿵쿵쿵. 남자가 다가오자 일정하게 뛰던 그녀의 심장 박동이 급격히 빨라졌다. 그걸 모르는 남자는 이번엔 그녀의 얼굴 쪽으로 손을 뻗어왔다. 그럴수록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갈 것처럼 세차게 뛰었다. 남자의 손이 구불구불 웨이브진 머리카락에 닿았다 떨어졌다.
“다 됐어요. 여기 뭐가 묻어서.”
“아……. 감사합니다.”
제 앞에 짧은 실을 들어 보인 남자에 그녀가 서둘러 짧게 묵례를 하곤 자랑이 기다리는 자리로 돌아갔다.
“늦으셨네요. 집에 가신 줄 알았어요.”
“네? 아, 죄송해요.”
자리에 앉자마자 비아냥거리듯 말하는 진상에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녀가 사과를 건넸다. 그 뒤로도 진상의 질문은 계속 됐다.
“그럼 KLEO 사인 같은 것도 받으실 수 있겠어요.”
“아, 지난번에 KLEO가 라디오 나와서…….”
“KLEO 이번 앨범은 누가…….”
하지만 정작, 답변을 해야 할 그녀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질문도 슬슬 수그러들었다. 그 때, 테이블 앞으로 직원이 다가와 그녀의 앞에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갑작스런 직원의 등장에 두 사람의 시선이 직원을 향했다.
“혜연 씨 뭐 시키셨어요?”
“아뇨. 저 이거 안 시켰는데……”
“이거 드리면 알 거라고 하시던데요.”
직원이 그녀에게 냅킨을 건넸다. 냅킨엔 깔끔한 필체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매번 저랑 부딪히셨는데 제대로 사과를 못 드린 것 같아서요.
사과 주스로 대신합니다. 다음에 만나면 제대로 사과할게요.
-단아한
“단……아한?”
“네?”
천천히 아한이 남긴 냅킨의 글을 읽은 그녀가 제 앞에 놓인 맑은 색의 사과 주스를 쳐다봤다. 단아한. 이름까지 완벽한 남자는 성격 역시 완벽했다.
“진짜 아깝다.”
그녀의 두 눈에 아쉬움이 한가득 들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