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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한나! 미안한데, 안심 스테이크 좀 구워 줘. 스페셜 오더인데, 적당히 구워 달래.]
[필립, 왜 또 나한테 그래? 그냥 예열만 잘 하고 센 불에 구우면 된다니까?]
[에이, ‘적당히’가 제일 어려운 거 알잖아? 비싼 고기니까 불 조절의 여신님이 해 주세요. 응?]
오늘도 결국 잘생긴 필립의 애교에 넘어가 버렸다. 여신이라 치켜세우며 눈웃음까지 치는데, 안 해 주고 버티는 여자가 어디 있을까?
서른셋. 알 거 다 아는 나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한국에도 영국에도 가족이 없는, 외로운 어른 고아라서 그런가? 누가 조금만 살갑게 굴어도 마음이 약해진다.
아무래도 역시 혼자 남겨진 탓이겠지.
아빠와 엄마, 남동생은 문화재 연구소를 함께 꾸려 갔다. 나는 호텔 뷔페 조리팀에서 일하며 종종 현장 일을 도왔다. 하는 일은 달랐지만, 우리는 밖에서도 집에서도 함께하는 시간이 많은 유난히 화목한 가족이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였다. 어느 날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사고가 일어났다. 가족이 다 함께 흙더미에 파묻혔다.
끔찍하게도 그때 난 보쌈용 돼지고기를 삶고 있었다.
영국 런던의 코벤트 가든. 이곳에 내가 일하는 레스토랑이 있다. 가족을 떠나보낸 뒤 나는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런던에 정착했다.
내가 구운 고기를 먹기 위해 매일매일 문밖에 많은 사람들이 늘어섰다.
주방 동료들은 나를 불 조절의 여신이라 불렀다. 식재료 손질도 빠르게 잘했지만, 불 조절은 특히 대단하다고 했다. 같은 고기라도 내가 구우면 더 맛이 좋다고 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나는 혀의 감각이 무척이나 예민했다. 그래서 남들이 모르는 맛까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단기간에 런던 유명 레스토랑의 셰프가 되었다.
호텔 뷔페 조리팀에서 일할 땐 담당한 음식만 기계적으로 만들었다.
다양한 음식을 만들고 싶어 들어간 뷔페 조리팀.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난 반년 내내 보쌈만 만들어야 했다. 조리장님께 사정하여 옮긴 코너에서는 등갈비만 구웠고.
반면에 이곳에선 더 다양한 요리를 하고, 새로운 요리법도 연구할 수 있어서 좋았다. 심지어 손님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나는 내 음식을 먹는 사람을 구경하는 게 행복했다. 아무래도 요리사가 천직인 모양이다.
* * *
그날도 난 런던 빅벤의 종소리를 들으며 출근하고 있었다.
‘펑, 퍼펑.’
무언가가 터지는 굉음이 연달아 들렸고, 매캐한 냄새가 풍겼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각하지도 못할 만큼 내 상태는 좋지 않았다.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 폭탄 테러가 벌어졌다는 얘기를 언뜻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의료진들이 내가 누운 이동식 침대를 빠르게 옮겼다. 침대가 흔들흔들, 심하게 움직였다.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으슬으슬한 게 추운 것 같기도 했다.
찢어진 이마에서 흐르는 피가 자꾸만 눈으로 들어갔다. 앞이 보이지 않아 두려웠다.
혹시 먼저 떠난 가족을 만나러 가게 되는 걸까? 차라리 그런 거라면 외롭지 않으니 좋을 텐데…….
다시 흔들흔들.
* * *
흔들흔들.
잠시 정신을 잃었던 나는 흔들리는 가마 안에서 눈을 떴다.
“만효야! 이제 정신이 들어?”
“……누구세요?”
“아직도 어지럽니?”
“네?”
“온천물이 뜨겁긴 했어. 그러니까 다음에는 물에 너무 오래 들어가 있지 말아라.”
난 분홍색 비단 한복을 입고, 아름다운 여인에게 기대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심하게 당황스러웠다. 여기가 어디냐고 몇 번이나 물었지만, 계속 같은 대답만 돌아왔다. 어머니, 오라버니들과 함께 온천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나는 병조 판서 대감의 딸이 되어 있었다.
죽어 가며 환각을 보는 것인지 다른 삶을 얻게 된 것인지 따질 기운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놓였다. 더는 외롭지 않아도,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일까?
이것이 꿈이라면 부디 끝까지 행복한 꿈이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빌고 또 빌었다.
이제 세상에 ‘김한나’는 없나 보다.
* * *
신점(神占)을 치는 맹인은 ‘병조 판서(兵曹判書)’ 댁 앞을 지날 때, 고통스러울 정도로 심한 허기를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가 불러서 속이 더부룩했는데 참말로 희한한 일이었다.
“일진이 좋은 날이거늘, 몸이 왜 이렇지? 배가 찢어질 만큼 먹지 않았더냐?”
허기가 어찌나 심한지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예사롭지 않은 허기에 맹인은 있는 힘을 다해 병조 판서 댁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안에, 계십니까?”
“누구시오?”
잠시 후 남자 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못 이기고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다. 모처럼 주인이 안 계셔 마음 편히 쉬던 중인데, 방해받아 짜증이 난 것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담겼다.
“저기, 지나가던 중인데 배가 고파 못 걷겠습니다. 남은 밥이 있으면 한 그릇만 주십시오.”
“밥 달라고 불렀다고? 아우 씨, 쉬는 데 귀찮게……. 댁 줄 밥 없소. 딴 데 가서 알아보시구려.”
“제발 조금만이라도 안 되겠습니까? 허기가 져서 이 댁 앞에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아, 귀찮게 하지 말고 딴 데 가 보라니까.”
“부탁드립니다.”
맹인이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남자 종은 성질을 내며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먹어야 한다. 꼭, 이 댁의 밥을 먹어야 해!’
맹인은 문 앞에 쓰러지듯 철퍼덕 주저앉았다.
이 집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음식 냄새는 아니었지만, 아주 맛이 좋을 것 같은 냄새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 집에서 밥을 얻어먹지 못하면 평생 배를 곯을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지팡이를 쥔 손에도,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근처에 다른 집이 있지만, 반드시 이 집의 밥을 먹고 싶었다. 꼭, 이 집의 음식이어야만 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생전 처음 느끼는 낯선 허기짐이 두려웠다. 이 집에 이상한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답답했다.
맹인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두렵고 속상한 마음에 자꾸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 댁에 대체 무엇이 있는 것인가? 그것이 무엇이길래……. 일단 밥부터 얻어먹고 점을 다시 쳐야겠구나. 반드시 알아내야 해!”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배가 고파 도저히 일어설 수 없었다. 급기야 맹인은 문 앞에 주저앉은 채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감당하지 못할 허기를 느끼는 지금의 상황이 무서우리만큼 슬펐다.
그때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때마침 병조 판서 댁 마님과 여섯 살 난 딸 만효가 외출했다가 돌아온 것이다.
마님은 가마에서 내리자마자 문 앞에 주저앉아 서럽게 우는 맹인을 발견했다.
병조 판서 댁 마님은 선녀 같은 외모만큼이나 마음씨도 고왔다. 그런 마님이 자신의 집 앞에서 우는 맹인을 그냥 지나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님이 바닥에 앉아 우는 맹인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맹인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이보게. 무슨 일로 그리 슬피 우는가?”
들리는 목소리에선 부드러운 힘이 느껴졌다. 맹인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했다.
“예사 분이 아니시군요. 귀하신 분의 냄새가 납니다.”
“이곳은 내 집일세. 무슨 일로 우는지 말해 보게. 내가 돕겠네.”
맹인은 대답이 없었다.
만효는 한숨을 삼키며 맹인과 어머니를 번갈아 보았다. 가엾은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 여린 어머니도, 우는 이유를 대답하지 않는 맹인도 둘 다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아오, 진짜!’
성격이 급한 만효는 속이 터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는데 끼어들 수는 없어 가만히 기다렸다.
만효는 최대한 순진한 표정으로 제 어미의 옥색 치마를 꼭 붙들었다. 참견하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으며, 어머니의 물음에 맹인이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맹인은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자꾸만 서럽게 울었다. 그러다 만효의 인내심이 바닥을 보일 때쯤, 한참 만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소인이 신점(神占)을 조금 볼 줄 압니다.”
“그래? 좋은 재주를 가졌구나.”
“어느 귀하신 분 댁에서 점을 봐 드리고, 복채로 밥을 거하게 얻어먹고 돌아가는 길이었습죠. 며칠을 굶어도 끄떡없을 만큼, 배가 아주 불렀답니다.”
“듣고 있으니 계속 말해 보게.”
만효는 맹인이 좀 더 빨리 이야기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예나 지금이나 호기심이 많았다. 맹인의 사연이 몹시 궁금해서 미칠 지경인데, 그가 일부러 뜸을 들이는 것 같아 조금씩 짜증 났다.
‘혹시 저 사람, 어머니한테서 돈 뜯어내려고 저러는 거 아니야? 서울 살 때 사이비 종교 전도하는 사람들이 저러는 걸 본 것 같은데…….’
만효는 맹인을 아래위로 훑으며 속셈을 가늠해 보려 했다.
[한나! 미안한데, 안심 스테이크 좀 구워 줘. 스페셜 오더인데, 적당히 구워 달래.]
[필립, 왜 또 나한테 그래? 그냥 예열만 잘 하고 센 불에 구우면 된다니까?]
[에이, ‘적당히’가 제일 어려운 거 알잖아? 비싼 고기니까 불 조절의 여신님이 해 주세요. 응?]
오늘도 결국 잘생긴 필립의 애교에 넘어가 버렸다. 여신이라 치켜세우며 눈웃음까지 치는데, 안 해 주고 버티는 여자가 어디 있을까?
서른셋. 알 거 다 아는 나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한국에도 영국에도 가족이 없는, 외로운 어른 고아라서 그런가? 누가 조금만 살갑게 굴어도 마음이 약해진다.
아무래도 역시 혼자 남겨진 탓이겠지.
아빠와 엄마, 남동생은 문화재 연구소를 함께 꾸려 갔다. 나는 호텔 뷔페 조리팀에서 일하며 종종 현장 일을 도왔다. 하는 일은 달랐지만, 우리는 밖에서도 집에서도 함께하는 시간이 많은 유난히 화목한 가족이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였다. 어느 날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사고가 일어났다. 가족이 다 함께 흙더미에 파묻혔다.
끔찍하게도 그때 난 보쌈용 돼지고기를 삶고 있었다.
영국 런던의 코벤트 가든. 이곳에 내가 일하는 레스토랑이 있다. 가족을 떠나보낸 뒤 나는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런던에 정착했다.
내가 구운 고기를 먹기 위해 매일매일 문밖에 많은 사람들이 늘어섰다.
주방 동료들은 나를 불 조절의 여신이라 불렀다. 식재료 손질도 빠르게 잘했지만, 불 조절은 특히 대단하다고 했다. 같은 고기라도 내가 구우면 더 맛이 좋다고 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나는 혀의 감각이 무척이나 예민했다. 그래서 남들이 모르는 맛까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단기간에 런던 유명 레스토랑의 셰프가 되었다.
호텔 뷔페 조리팀에서 일할 땐 담당한 음식만 기계적으로 만들었다.
다양한 음식을 만들고 싶어 들어간 뷔페 조리팀.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난 반년 내내 보쌈만 만들어야 했다. 조리장님께 사정하여 옮긴 코너에서는 등갈비만 구웠고.
반면에 이곳에선 더 다양한 요리를 하고, 새로운 요리법도 연구할 수 있어서 좋았다. 심지어 손님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나는 내 음식을 먹는 사람을 구경하는 게 행복했다. 아무래도 요리사가 천직인 모양이다.
* * *
그날도 난 런던 빅벤의 종소리를 들으며 출근하고 있었다.
‘펑, 퍼펑.’
무언가가 터지는 굉음이 연달아 들렸고, 매캐한 냄새가 풍겼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각하지도 못할 만큼 내 상태는 좋지 않았다.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 폭탄 테러가 벌어졌다는 얘기를 언뜻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의료진들이 내가 누운 이동식 침대를 빠르게 옮겼다. 침대가 흔들흔들, 심하게 움직였다.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으슬으슬한 게 추운 것 같기도 했다.
찢어진 이마에서 흐르는 피가 자꾸만 눈으로 들어갔다. 앞이 보이지 않아 두려웠다.
혹시 먼저 떠난 가족을 만나러 가게 되는 걸까? 차라리 그런 거라면 외롭지 않으니 좋을 텐데…….
다시 흔들흔들.
* * *
흔들흔들.
잠시 정신을 잃었던 나는 흔들리는 가마 안에서 눈을 떴다.
“만효야! 이제 정신이 들어?”
“……누구세요?”
“아직도 어지럽니?”
“네?”
“온천물이 뜨겁긴 했어. 그러니까 다음에는 물에 너무 오래 들어가 있지 말아라.”
난 분홍색 비단 한복을 입고, 아름다운 여인에게 기대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심하게 당황스러웠다. 여기가 어디냐고 몇 번이나 물었지만, 계속 같은 대답만 돌아왔다. 어머니, 오라버니들과 함께 온천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나는 병조 판서 대감의 딸이 되어 있었다.
죽어 가며 환각을 보는 것인지 다른 삶을 얻게 된 것인지 따질 기운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놓였다. 더는 외롭지 않아도,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일까?
이것이 꿈이라면 부디 끝까지 행복한 꿈이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빌고 또 빌었다.
이제 세상에 ‘김한나’는 없나 보다.
* * *
신점(神占)을 치는 맹인은 ‘병조 판서(兵曹判書)’ 댁 앞을 지날 때, 고통스러울 정도로 심한 허기를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가 불러서 속이 더부룩했는데 참말로 희한한 일이었다.
“일진이 좋은 날이거늘, 몸이 왜 이렇지? 배가 찢어질 만큼 먹지 않았더냐?”
허기가 어찌나 심한지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예사롭지 않은 허기에 맹인은 있는 힘을 다해 병조 판서 댁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안에, 계십니까?”
“누구시오?”
잠시 후 남자 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못 이기고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다. 모처럼 주인이 안 계셔 마음 편히 쉬던 중인데, 방해받아 짜증이 난 것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담겼다.
“저기, 지나가던 중인데 배가 고파 못 걷겠습니다. 남은 밥이 있으면 한 그릇만 주십시오.”
“밥 달라고 불렀다고? 아우 씨, 쉬는 데 귀찮게……. 댁 줄 밥 없소. 딴 데 가서 알아보시구려.”
“제발 조금만이라도 안 되겠습니까? 허기가 져서 이 댁 앞에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아, 귀찮게 하지 말고 딴 데 가 보라니까.”
“부탁드립니다.”
맹인이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남자 종은 성질을 내며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먹어야 한다. 꼭, 이 댁의 밥을 먹어야 해!’
맹인은 문 앞에 쓰러지듯 철퍼덕 주저앉았다.
이 집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음식 냄새는 아니었지만, 아주 맛이 좋을 것 같은 냄새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 집에서 밥을 얻어먹지 못하면 평생 배를 곯을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지팡이를 쥔 손에도,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근처에 다른 집이 있지만, 반드시 이 집의 밥을 먹고 싶었다. 꼭, 이 집의 음식이어야만 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생전 처음 느끼는 낯선 허기짐이 두려웠다. 이 집에 이상한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답답했다.
맹인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두렵고 속상한 마음에 자꾸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 댁에 대체 무엇이 있는 것인가? 그것이 무엇이길래……. 일단 밥부터 얻어먹고 점을 다시 쳐야겠구나. 반드시 알아내야 해!”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배가 고파 도저히 일어설 수 없었다. 급기야 맹인은 문 앞에 주저앉은 채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감당하지 못할 허기를 느끼는 지금의 상황이 무서우리만큼 슬펐다.
그때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때마침 병조 판서 댁 마님과 여섯 살 난 딸 만효가 외출했다가 돌아온 것이다.
마님은 가마에서 내리자마자 문 앞에 주저앉아 서럽게 우는 맹인을 발견했다.
병조 판서 댁 마님은 선녀 같은 외모만큼이나 마음씨도 고왔다. 그런 마님이 자신의 집 앞에서 우는 맹인을 그냥 지나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님이 바닥에 앉아 우는 맹인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맹인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이보게. 무슨 일로 그리 슬피 우는가?”
들리는 목소리에선 부드러운 힘이 느껴졌다. 맹인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했다.
“예사 분이 아니시군요. 귀하신 분의 냄새가 납니다.”
“이곳은 내 집일세. 무슨 일로 우는지 말해 보게. 내가 돕겠네.”
맹인은 대답이 없었다.
만효는 한숨을 삼키며 맹인과 어머니를 번갈아 보았다. 가엾은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 여린 어머니도, 우는 이유를 대답하지 않는 맹인도 둘 다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아오, 진짜!’
성격이 급한 만효는 속이 터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는데 끼어들 수는 없어 가만히 기다렸다.
만효는 최대한 순진한 표정으로 제 어미의 옥색 치마를 꼭 붙들었다. 참견하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으며, 어머니의 물음에 맹인이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맹인은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자꾸만 서럽게 울었다. 그러다 만효의 인내심이 바닥을 보일 때쯤, 한참 만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소인이 신점(神占)을 조금 볼 줄 압니다.”
“그래? 좋은 재주를 가졌구나.”
“어느 귀하신 분 댁에서 점을 봐 드리고, 복채로 밥을 거하게 얻어먹고 돌아가는 길이었습죠. 며칠을 굶어도 끄떡없을 만큼, 배가 아주 불렀답니다.”
“듣고 있으니 계속 말해 보게.”
만효는 맹인이 좀 더 빨리 이야기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예나 지금이나 호기심이 많았다. 맹인의 사연이 몹시 궁금해서 미칠 지경인데, 그가 일부러 뜸을 들이는 것 같아 조금씩 짜증 났다.
‘혹시 저 사람, 어머니한테서 돈 뜯어내려고 저러는 거 아니야? 서울 살 때 사이비 종교 전도하는 사람들이 저러는 걸 본 것 같은데…….’
만효는 맹인을 아래위로 훑으며 속셈을 가늠해 보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