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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볕이 유난히도 좋은 아침이었다. 이제 주모라 불리는 최 나인은 오랜만에 쑥떡이나 해 먹을까 하고 뒷산에 올랐다.
한참 정신없이 쑥을 뜯는데 주위가 이상할 정도로 소란스러워졌다.
“뭔 소리래?”
보부상이나 다니는 조용하고 좁은 길이었다. 계절 따라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풍경이 무척 아름다운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 지체 높은 댁의 마님을 태운 가마가 지나가곤 했다.
말발굽 소리가 요란한 걸 보니 호위 무사까지 여럿 대동한 모양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집안인가 궁금했다. 최 나인은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 아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살, 살려, 주세요. 제발…….”
깜짝 놀란 최 나인은 저도 모르게 큰 나무 뒤에 재빨리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 끔찍한 광경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뭘 하려는 거지? 헉.’
피 냄새가 진동했다.
그때 최 나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집안인지는 모르겠으나 종들끼리 칼부림이 난 것 같았다. 이렇게 끔찍한 것은 처음 보았기에 손이 덜덜 떨렸다. 칼을 든 자들은 모시던 웃전들까지 이미 해한 분위기였다.
‘세상에나……. 이걸 어쩌지?’
선혈이 낭자한 그 속에 분홍 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입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최 나인이 몸을 숨긴 나무를 향해 달려왔다. 울며불며 비명을 지르면서 달렸다.
“제발, 살려 주세요. 제, 제발요.”
아이는 쫓기는 와중에도 살려 달라 애원했다.
‘어쩌지, 이쪽으로 오면 안 되는데.’
최 나인은 두려웠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보았으니까.
저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고 말았으니 그들이 자신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녀는 이 참극의 목격자가 되었다.
‘얘야, 미안하지만 이쪽으로 오지 마. 정말 미안하지만, 오지 말아 줘. 제발.’
늙은이의 첩살이를 하며 겨우 부지한 목숨이었다. 그저 쑥떡이나 만들어 먹겠다고 산에 온 것인데, 모르는 자의 검에 찔려 허망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다시는 쑥떡을 먹나 봐라. 아우……. 어떡해.’
최 나인은 아이가 이쪽으로 오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마음이 전해진 걸까? 아이는 달음질을 멈추었고, 붉은 피를 잔뜩 토했다. 그리고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털썩.
양손으로 입을 막은 최 나인은 비명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아이의 등을 검으로 찌른 남자는 조금 이상했다. 노비처럼 허름한 차림이었지만, 무사처럼 날랬다.
최 나인은 그자의 얼굴을 확실히 보았다. 인중에 점이 하나, 눈썹 아래에도 점이 하나. 남자의 눈빛은 분명, 허드렛일을 하는 노비의 것이 아니었다.
그자는 아이를 다시 찌를 것처럼 검을 높이 들었다가, 이내 찌르지 않고 검을 거두었다. 그러곤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쓰러진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소인은 그저 웃전의 명을 따랐을 뿐입니다. 아씨께는 원한이 없으니 용서하십시오. ……아씨! 혹여 천운으로 목숨을 건지신다면 신분을 숨기고 숨어 사십시오. 그분은 아주 집요한 분이시니까요.”
그는 걱정처럼 들리는 경고를 남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사방이 고요해졌다. 난리가 끝난 모양이었다. 곧 점심 손님이 이 길을 지나갈 테고, 처참한 광경을 먼저 본 누군가가 관아에 신고하겠지.
최 나인은 이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사건의 목격자가 되어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도망가 입을 다물고 살 것인지.
궁녀 출신인지라 괜한 구설에 오르는 건 두려웠다. 도망가는 쪽으로 점점 마음이 기울어 갔다. 그런데 그때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또 무슨 소리래? 아우, 정말……. 헉!’
아이가 죽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약한 움직임이 최 나인의 눈에도 보였다. 노랑 저고리에 스며든 핏물이 넓게 퍼지고 있었다.
무슨 사연으로 칼을 맞은 것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피로 엉망이 된 고운 비단옷을 보니 아이가 가여웠다.
최 나인은 조심스레 다가갔다. 아이의 곁에 쭈그리고 앉아 팔을 잡고 살살 흔들었다.
“아씨, 아씨……. 제 말 들리세요?”
아이는 대답 없이 엷은 숨만 내쉬었다. 아직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잃으시면 아니 됩니다. 아씨,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최 나인은 속치마를 찢어 검에 베인 아이의 옆구리를 지혈했다. 그런 후 다른 이의 눈에 띄지 않게 잔뜩 캐 놓은 쑥과 나물을 아이의 몸 위에 쏟았다.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풀로 죄다 덮어 버렸다.
“아씨, 힘쓸 사람 데려올 테니까 꼭 기다리세요. 정신 놓으시면 아니 됩니다!”
최 나인은 개장수에게 쫓기는 떠돌이 개처럼 미친 듯이 달렸다.
빨리, 더 빨리.
아픈 아이를 주막까지 빨리 데려가려면 힘센 사내의 도움이 필요했다. 다행히 주막엔 도와줄 만한 사내가 있었다.
“계동 아버지, 빨리! 빨리 좀.”
“왜? 뭐라는겨?”
주막으로 간 최 나인은 봉놋방에서 쉬고 있던 보부상을 다짜고짜 잡아끌었다. 둘은 어린 아들을 가끔 최 나인에게 맡기고 몇 달씩 떠날 때가 있을 정도로 서로 믿는 사이였다.
“빨리 좀 가요. 급해요.”
최 나인이 거친 숨을 내쉬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보부상은 의아한 얼굴로 최 나인을 쳐다보며 일어섰다.
“어후, 주모답지 않게 왜 이려? 뭔 일이길래 이리 호들갑이여?”
“일단 빨리 좀 가요. 어린애가 다 죽어 가요. 계동이 또래 어린애니까 빨리요.”
보부상은 아들 또래 어린애라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더는 묻지 않고 최 나인이 안내해 주는 길로 전속력으로 달렸다.
최 나인과 보부상은 아이를 덮어 놓은 쑥과 나물을 걷어 냈다. 그곳에 쓰러져 있는 아이를 보고 최 나인은 다시 왈칵 눈물을 쏟았다. 참담한 상황에 말문이 막혔다.
“양반 댁 아씨 같은데, 누구여? 이게 뭔 일이려?”
“칼에 맞았어요. 주막으로 얼른 데려가야 해요.”
“빨리 등에 업게 거들어 봐.”
한 달에 한 번 들르는 보부상, 계동 아범이 그날 마침 주막에 있었으니 참으로 명이 긴 아이가 아닌가?
* * *
나그네가 모여 자는 주막의 봉놋방은 이제 아이의 차지가 되었다.
그곳에는 최 나인과 보부상, 보부상의 아들인 계동이, 그리고 최 나인이 궁녀였던 시절, 최 나인에게 신세 진 일이 있는 이천 어르신만 드나들었다.
최 나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주모가 해야 할 일을 했다. 계동 아범은 아이를 치료하는 데 쓰라며 가진 돈을 다 내어 주고 장사를 하러 떠났다. 이천 어르신은 그날 일에 대해서 조용히 알아보러 다녔고, 계동이는 아이의 병수발을 들었다.
아이가 의식을 차리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쯤 이천 어르신이 그날 일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최 나인, 하마터면 세상이 뒤집힐 뻔하였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 아이의 아버지가 반정 반대 세력이었던 병조 판서 대감인 모양이네.”
“병조 판서 대감이요? 참말이십니까? 그렇게 지체 높으신 분이 어찌 그리 허망하게 가신 겁니까?”
“온천 여행을 떠나던 길이라 들었네. 역모를 꾸미던 자들이 병조 판서가 방해될까 두려워 자객을 미리 심어 놓은 모양이야.”
최 나인은 종들끼리 칼부림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끔찍한 광경이었다.
“이제 어찌합니까? 아이의 친척을 찾아볼까요?”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네. 그리고 아직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밝히지 않는 게 좋겠어.”
“역적들은 모두 잡혀 참수되지 않았습니까?”
“아마 전부는 아닐걸세. 참수된 자들은 병조 판서 식솔을 다 죽일 수 있을 정도로 힘 있는 자들이 아니거든. 일을 꾸민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목격자인 아이를 다시 해하려 들걸세.”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끔찍한 상황에 최 나인의 얼굴이 굳었다. 목구멍 안쪽으로 뜨거운 게 울컥 넘어갔다. 최 나인은 울먹이며 말했다.
“아이의 운명이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마음이 아픕니다.”
“수라간 궁녀였던 자네가 이리 주모로 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실부모(早失父母) 역시 이 아이의 운명이겠지.”
그제야 말을 이해한 최 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조 판서 대감의 딸이라니……. 이제 어떻게 할까요?”
“집안이 이미 풍비박산 난 데다가 아이는 사고 난 날을 기억 못 하지 않는가?”
“그건 그렇지만…….”
“누가 저지른 일인지 확실히 밝혀지기 전에는 아이를 숨기는 게 좋을 것 같네.”
이제 최 나인에게도 가족이 생겼다. 최 나인은 범인이 밝혀져 안전해질 때까지 아이의 고모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병조 판서의 고명딸 김만효는 이제 최 나인의 조카 최송이가 되었다. 주막에서의 새 삶이 시작된 것이다.
볕이 유난히도 좋은 아침이었다. 이제 주모라 불리는 최 나인은 오랜만에 쑥떡이나 해 먹을까 하고 뒷산에 올랐다.
한참 정신없이 쑥을 뜯는데 주위가 이상할 정도로 소란스러워졌다.
“뭔 소리래?”
보부상이나 다니는 조용하고 좁은 길이었다. 계절 따라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풍경이 무척 아름다운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 지체 높은 댁의 마님을 태운 가마가 지나가곤 했다.
말발굽 소리가 요란한 걸 보니 호위 무사까지 여럿 대동한 모양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집안인가 궁금했다. 최 나인은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 아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살, 살려, 주세요. 제발…….”
깜짝 놀란 최 나인은 저도 모르게 큰 나무 뒤에 재빨리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 끔찍한 광경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뭘 하려는 거지? 헉.’
피 냄새가 진동했다.
그때 최 나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집안인지는 모르겠으나 종들끼리 칼부림이 난 것 같았다. 이렇게 끔찍한 것은 처음 보았기에 손이 덜덜 떨렸다. 칼을 든 자들은 모시던 웃전들까지 이미 해한 분위기였다.
‘세상에나……. 이걸 어쩌지?’
선혈이 낭자한 그 속에 분홍 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입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최 나인이 몸을 숨긴 나무를 향해 달려왔다. 울며불며 비명을 지르면서 달렸다.
“제발, 살려 주세요. 제, 제발요.”
아이는 쫓기는 와중에도 살려 달라 애원했다.
‘어쩌지, 이쪽으로 오면 안 되는데.’
최 나인은 두려웠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보았으니까.
저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고 말았으니 그들이 자신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녀는 이 참극의 목격자가 되었다.
‘얘야, 미안하지만 이쪽으로 오지 마. 정말 미안하지만, 오지 말아 줘. 제발.’
늙은이의 첩살이를 하며 겨우 부지한 목숨이었다. 그저 쑥떡이나 만들어 먹겠다고 산에 온 것인데, 모르는 자의 검에 찔려 허망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다시는 쑥떡을 먹나 봐라. 아우……. 어떡해.’
최 나인은 아이가 이쪽으로 오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마음이 전해진 걸까? 아이는 달음질을 멈추었고, 붉은 피를 잔뜩 토했다. 그리고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털썩.
양손으로 입을 막은 최 나인은 비명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아이의 등을 검으로 찌른 남자는 조금 이상했다. 노비처럼 허름한 차림이었지만, 무사처럼 날랬다.
최 나인은 그자의 얼굴을 확실히 보았다. 인중에 점이 하나, 눈썹 아래에도 점이 하나. 남자의 눈빛은 분명, 허드렛일을 하는 노비의 것이 아니었다.
그자는 아이를 다시 찌를 것처럼 검을 높이 들었다가, 이내 찌르지 않고 검을 거두었다. 그러곤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쓰러진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소인은 그저 웃전의 명을 따랐을 뿐입니다. 아씨께는 원한이 없으니 용서하십시오. ……아씨! 혹여 천운으로 목숨을 건지신다면 신분을 숨기고 숨어 사십시오. 그분은 아주 집요한 분이시니까요.”
그는 걱정처럼 들리는 경고를 남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사방이 고요해졌다. 난리가 끝난 모양이었다. 곧 점심 손님이 이 길을 지나갈 테고, 처참한 광경을 먼저 본 누군가가 관아에 신고하겠지.
최 나인은 이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사건의 목격자가 되어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도망가 입을 다물고 살 것인지.
궁녀 출신인지라 괜한 구설에 오르는 건 두려웠다. 도망가는 쪽으로 점점 마음이 기울어 갔다. 그런데 그때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또 무슨 소리래? 아우, 정말……. 헉!’
아이가 죽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약한 움직임이 최 나인의 눈에도 보였다. 노랑 저고리에 스며든 핏물이 넓게 퍼지고 있었다.
무슨 사연으로 칼을 맞은 것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피로 엉망이 된 고운 비단옷을 보니 아이가 가여웠다.
최 나인은 조심스레 다가갔다. 아이의 곁에 쭈그리고 앉아 팔을 잡고 살살 흔들었다.
“아씨, 아씨……. 제 말 들리세요?”
아이는 대답 없이 엷은 숨만 내쉬었다. 아직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잃으시면 아니 됩니다. 아씨,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최 나인은 속치마를 찢어 검에 베인 아이의 옆구리를 지혈했다. 그런 후 다른 이의 눈에 띄지 않게 잔뜩 캐 놓은 쑥과 나물을 아이의 몸 위에 쏟았다.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풀로 죄다 덮어 버렸다.
“아씨, 힘쓸 사람 데려올 테니까 꼭 기다리세요. 정신 놓으시면 아니 됩니다!”
최 나인은 개장수에게 쫓기는 떠돌이 개처럼 미친 듯이 달렸다.
빨리, 더 빨리.
아픈 아이를 주막까지 빨리 데려가려면 힘센 사내의 도움이 필요했다. 다행히 주막엔 도와줄 만한 사내가 있었다.
“계동 아버지, 빨리! 빨리 좀.”
“왜? 뭐라는겨?”
주막으로 간 최 나인은 봉놋방에서 쉬고 있던 보부상을 다짜고짜 잡아끌었다. 둘은 어린 아들을 가끔 최 나인에게 맡기고 몇 달씩 떠날 때가 있을 정도로 서로 믿는 사이였다.
“빨리 좀 가요. 급해요.”
최 나인이 거친 숨을 내쉬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보부상은 의아한 얼굴로 최 나인을 쳐다보며 일어섰다.
“어후, 주모답지 않게 왜 이려? 뭔 일이길래 이리 호들갑이여?”
“일단 빨리 좀 가요. 어린애가 다 죽어 가요. 계동이 또래 어린애니까 빨리요.”
보부상은 아들 또래 어린애라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더는 묻지 않고 최 나인이 안내해 주는 길로 전속력으로 달렸다.
최 나인과 보부상은 아이를 덮어 놓은 쑥과 나물을 걷어 냈다. 그곳에 쓰러져 있는 아이를 보고 최 나인은 다시 왈칵 눈물을 쏟았다. 참담한 상황에 말문이 막혔다.
“양반 댁 아씨 같은데, 누구여? 이게 뭔 일이려?”
“칼에 맞았어요. 주막으로 얼른 데려가야 해요.”
“빨리 등에 업게 거들어 봐.”
한 달에 한 번 들르는 보부상, 계동 아범이 그날 마침 주막에 있었으니 참으로 명이 긴 아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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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가 모여 자는 주막의 봉놋방은 이제 아이의 차지가 되었다.
그곳에는 최 나인과 보부상, 보부상의 아들인 계동이, 그리고 최 나인이 궁녀였던 시절, 최 나인에게 신세 진 일이 있는 이천 어르신만 드나들었다.
최 나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주모가 해야 할 일을 했다. 계동 아범은 아이를 치료하는 데 쓰라며 가진 돈을 다 내어 주고 장사를 하러 떠났다. 이천 어르신은 그날 일에 대해서 조용히 알아보러 다녔고, 계동이는 아이의 병수발을 들었다.
아이가 의식을 차리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쯤 이천 어르신이 그날 일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최 나인, 하마터면 세상이 뒤집힐 뻔하였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 아이의 아버지가 반정 반대 세력이었던 병조 판서 대감인 모양이네.”
“병조 판서 대감이요? 참말이십니까? 그렇게 지체 높으신 분이 어찌 그리 허망하게 가신 겁니까?”
“온천 여행을 떠나던 길이라 들었네. 역모를 꾸미던 자들이 병조 판서가 방해될까 두려워 자객을 미리 심어 놓은 모양이야.”
최 나인은 종들끼리 칼부림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끔찍한 광경이었다.
“이제 어찌합니까? 아이의 친척을 찾아볼까요?”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네. 그리고 아직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밝히지 않는 게 좋겠어.”
“역적들은 모두 잡혀 참수되지 않았습니까?”
“아마 전부는 아닐걸세. 참수된 자들은 병조 판서 식솔을 다 죽일 수 있을 정도로 힘 있는 자들이 아니거든. 일을 꾸민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목격자인 아이를 다시 해하려 들걸세.”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끔찍한 상황에 최 나인의 얼굴이 굳었다. 목구멍 안쪽으로 뜨거운 게 울컥 넘어갔다. 최 나인은 울먹이며 말했다.
“아이의 운명이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마음이 아픕니다.”
“수라간 궁녀였던 자네가 이리 주모로 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실부모(早失父母) 역시 이 아이의 운명이겠지.”
그제야 말을 이해한 최 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조 판서 대감의 딸이라니……. 이제 어떻게 할까요?”
“집안이 이미 풍비박산 난 데다가 아이는 사고 난 날을 기억 못 하지 않는가?”
“그건 그렇지만…….”
“누가 저지른 일인지 확실히 밝혀지기 전에는 아이를 숨기는 게 좋을 것 같네.”
이제 최 나인에게도 가족이 생겼다. 최 나인은 범인이 밝혀져 안전해질 때까지 아이의 고모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병조 판서의 고명딸 김만효는 이제 최 나인의 조카 최송이가 되었다. 주막에서의 새 삶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