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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네 이놈! 어떻게 사람에게 맛이 있고 없고, 그런 말을 해? 당장 잘못했다 용서를 빌어라!”
놀란 만효가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당황스러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조선에서 양반의 신분으로 살면 늘 좋은 말만 들을 줄 알았는데…….
너무 화가 나 따귀라도 때리고 싶었지만, 만효는 키가 작았고 맹인은 컸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화를 참으며 그를 노려만 보았다.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밥 얻어먹으러 온 주제에 감히 병조 판서의 딸을 희롱을 하다니! 아버지가 아시면 이자는 사지가 찢길 것이다.
허나 점을 치는 자였다. 분명 자신이 오늘 죽지 않을 운세인 걸 알아 그랬겠지.
‘무슨 뜻으로 그리 말했을까?’
만효는 맹인의 점괘가 어이없고, 불쾌했다. 그러면서도 묘한 호기심이 생겼다.
지금까지 열 손가락으로는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번 운세를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기분이 묘한 운세 풀이는 처음이었다.
만효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에 대해 몰라야 하는 어린 나이.
하지만 한나로 삼십삼 년을 살았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맛이 좋을 거라는 맹인의 말이 몹시 기분 나쁘게 들렸다.
생각할수록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냄새 타령, 맛 타령을 하며 어린애의 손을 더듬으려는 것이 너무도 참신하지 않은가?
만효가 노려보는 것을 알 리가 없겠지. 맹인은 웃음 띤 얼굴로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설마 겨우 어린애 손 좀 더듬어 보겠다고 신점이 어쩌고, 냄새가 어쩌고 떡밥을 뿌린 거야?’
만효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만난 나쁜 놈을 혼내 주고 싶었다. 어차피 그녀가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병조 판서의 여식에게 함부로 하는 자는 살아남지 못하겠지만.
고로 이자는 만효의 말 한마디면 끝이라는 얘기였다.
“네놈이 내게 빌 생각이 없구나? 내가 다 이를 것이다. 네놈이 우리 어머니 앞에서도 그딴 소리를 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
만효는 어린애처럼 엉엉 울까 잠시 생각했다. 우는 게 제일 쉬우니까. 하지만 그건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는 우는 대신 소리를 빽빽 지르며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만효의 목소리가 집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이제 겨우 여섯 살, 그 작은 몸으로 어찌나 목청이 좋은지 누가 들어도 놀랄 정도였다.
맹인은 산전수전 다 겪어 어지간한 사람 앞에서는 좀처럼 주눅 들지 않았다. 그런 그가 움찔했을 정도로 만효의 기세는 대단했다.
“어머니!”
“만효야! 무슨 일이냐?”
어머니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헐레벌떡 달려와 물으셨다. 집 안의 종들도 죄다 달려 나왔다.
그러나 이러든지 저러든지 맹인은 분위기에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만효는 맹인의 뻔뻔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머니의 옆에 딱 붙어 섰다.
맹인은 벌떡 일어나 옷에 생긴 주름을 펴듯 옷을 탁탁 잡아당겼다. 그리고 뜬금없게도 넙죽 큰절을 했다. 어머니에게 한번, 만효에게 한번 차분하게 절했다.
그는 어머니가 듣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어머니가 서 있는 쪽을 향해서 큰 목소리로 말했다.
“마님, 만효 아씨는 손이 거칠어지셔야 천수를 누리실 수 있습니다. 고운 손이 상한다고 속상해하지 마시고, 손을 많이 쓰게 하십시오. 그래야 손맛이 좋아져 운이 풀리실 겁니다.”
“이놈! 내 딸에게 그게 무슨 악담이냐! 밥 한 끼 얻어먹었으면 조용히 갈 것이지, 네놈의 농담이 아주 과하구나!”
“부디 소인의 말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씨의 손이 거칠어지게 하셔야 합니다. 날것을 잡느라 손에 상처가 나면 더 좋을 것입니다. 아씨께서는 살생을 많이 하시고, 손에 피를 묻히셔야 합니다. 이미 늦었으니 지금부터라도 온 정성을 쏟으십시오. 당장 시작하셔야 합니다.”
방금 뭐랬어?
피? 손에 피를 묻히라고?
깜짝 놀란 만효가 제 손을 앞뒤로 뒤집어 가며 살펴보았다. 아까는 냄새가 난다더니, 이젠 살생을 하란다. 배고프다 울기에 든든하게 먹여 줬더니, 도대체 왜 저러나 싶었다.
하지만 ‘피’라는 단어의 느낌 때문인지 맹인의 헛소리라 무시하고 넘기기엔 왠지 찜찜했다.
점치는 맹인이 용하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어머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머니는 차분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병조 판서 대감의 막내딸이네. 이 아이가 손이 거칠어질 만큼 할 일이 뭐가 있다고 그리 말하는가? 살생을 하라니……. 손에 피를 묻히라니……. 말만 들어도 끔찍하구나. 우리 만효는 이제 겨우 여섯이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허나 어쩌겠습니까? 그리하셔야 이름 덕을 보실 텐데요.”
“저 작은 손으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기껏해야 수나 겨우 놓겠지. 자네가 실성했다고 생각하고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겠네. 그러니 앞으로는 어디 가서 남의 자식 이야기는 함부로 하지 말게. 나서지 말란 말일세. 알아듣겠는가?”
어머니가 당부하듯 말했지만, 맹인은 제 할 말을 계속했다.
“이런 운은 처음이라 소인도 놀랍습니다. 아씨의 명은 짧고도 길어 참말로 특이합니다.”
“뭐?”
“마님,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을 참 잘 지으셨습니다. 하지만 서두르셔야 합니다.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무엇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닙니다.”
“말을 꺼냈으면 상세히 풀어놓게나.”
“송구합니다. 더 이상은 말씀드려도 믿지 않으실 터. 소인은 오늘 먹은 맛있는 밥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옵니다. 만약 아씨께서 이름 덕을 보시게 된다면 훗날 밥을 또 한번 얻어먹을 수 있겠지요.”
계속해서 듣기 거북한 말이 나왔다. 만효는 주먹에 힘을 주고 맹인을 노려보았다.
“아씨, 대단한 손을 만질 수 있게 해 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무탈하십시오.”
맹인은 만효를 향해 돌아섰다. 이마가 무릎에 닿을 정도로 깊숙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사라졌다.
그것이 한양에서 점을 가장 잘 치기로 유명한 자의 예언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인사받은 아이의 이름은 김만효(金萬孝).
대대로 병조 판서 가문은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단명하였기에, 딸이 오래 살며 효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어 준 이름이었다.
만효야, 만효야.
이름을 많이 불릴수록 운이 좋아진다 하였는데…….
그녀의 신분이 높아 감히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몇 없었다.
* * *
천연두로 죽어 나가는 자가 많았다.
끔찍한 그 병은 동궁전의 세자를 덮쳤고, 뒤이어 대비까지 넘보았다. 천연두에 걸린 대비는 궁녀 여럿을 데리고 사가로 요양을 떠났다. 수라간에서 가장 손맛이 좋은 최 나인도 데려갔다.
한 달 후 대비는 결국 운명을 다하였고, 대비의 사가로 함께 갔던 궁녀들은 다시 입궐할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궐에서 나온 관리는 궁녀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말을 전했다.
“앞으로는 궁녀였던 것을 드러내지 말고 조용히 살거라. 무슨 뜻인지 알지?”
“정말로 다시는 궐로 돌아가지 못하나요?”
“대비마마를 모셨으니 어쩔 수 없다. 혹여 병을 옮기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예…….”
몸이 아픈 궁녀는 궐을 떠나야 했다. 궁녀는 절대로 궐 안에서 죽어서는 아니 되었다. 그렇기에 혹시 전염병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궁녀들을 궐에서 받아 줄 리는 없었다.
쫓겨난 궁녀들은 슬퍼하기만 할 뿐 그 누구도 임금을 원망하지 않았다. 궐내 법도가 그러한 것을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대비마마의 약시중을 들던 궁녀가 약과를 반으로 잘라 최 나인에게 건넸다. 궁녀는 반쪽짜리 약과를 씹으며 물었다.
“최 나인, 갈 곳은 정했어? 나는 고향으로 갈 거야.”
“어……. 나는 그냥 아는 분께.”
“처음 궐에 들어올 때는 승은 상궁이 되는 게 꿈이었거든. 근데 임금님과 밤일은커녕 죽을 때까지 밭일만 하게 생겼네. 우리 팔자도 참 박복하다. 그치?”
최 나인은 고개만 끄덕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궐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궁녀들은 각자의 사가로 떠났다. 하지만 가족이 없는 최 나인은 돌아갈 곳도, 잠시 몸을 의탁할 아는 이도 없었다.
일부 양반들은 출궁한 궁녀를 몰래 첩으로 들이기도 했다. 발각될 경우 큰 사달이 나는 일인데도 다들 쉬쉬하며 그리했다. 임금의 여자를 취한다는 배덕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최 나인은 대비의 먼 친척인 어느 영감에게 화려한 나비 뒤꽂이를 몰래 선물 받았다.
그 선물이 어떤 의미인지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기에 영감의 집으로 찾아갔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용기 낸 일이었다.
최 나인은 난생처음으로 일부러 눈웃음을 치며 영감을 유혹했다.
“귀한 선물을 받았으니, 보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 밤 각오를 단단히 하고 환갑이 넘은 영감의 술 시중을 들었다. 영감의 첩이 된 최 나인은 부엌일 대신 몸단장을 해야 했다.
몇 년쯤은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영감이 원할 때마다 눈웃음치며 거짓으로 좋은 척하면 될 뿐이었다. 하지만 영감이 죽고 나자 최 나인은 다시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녀의 손엔 재물이 있었다. 그동안 영감에게 받은 값비싼 장신구가 꽤 많았다.
최 나인은 앞으로는 쓸 일이 없는 그것들을 팔아 망해 가는 주막을 샀다.
그리고 이젠 누군가가 시켜서가 아닌, 그녀가 만들고 싶은 음식을 최선을 다해 만들기 시작했다.
“네 이놈! 어떻게 사람에게 맛이 있고 없고, 그런 말을 해? 당장 잘못했다 용서를 빌어라!”
놀란 만효가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당황스러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조선에서 양반의 신분으로 살면 늘 좋은 말만 들을 줄 알았는데…….
너무 화가 나 따귀라도 때리고 싶었지만, 만효는 키가 작았고 맹인은 컸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화를 참으며 그를 노려만 보았다.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밥 얻어먹으러 온 주제에 감히 병조 판서의 딸을 희롱을 하다니! 아버지가 아시면 이자는 사지가 찢길 것이다.
허나 점을 치는 자였다. 분명 자신이 오늘 죽지 않을 운세인 걸 알아 그랬겠지.
‘무슨 뜻으로 그리 말했을까?’
만효는 맹인의 점괘가 어이없고, 불쾌했다. 그러면서도 묘한 호기심이 생겼다.
지금까지 열 손가락으로는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번 운세를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기분이 묘한 운세 풀이는 처음이었다.
만효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에 대해 몰라야 하는 어린 나이.
하지만 한나로 삼십삼 년을 살았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맛이 좋을 거라는 맹인의 말이 몹시 기분 나쁘게 들렸다.
생각할수록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냄새 타령, 맛 타령을 하며 어린애의 손을 더듬으려는 것이 너무도 참신하지 않은가?
만효가 노려보는 것을 알 리가 없겠지. 맹인은 웃음 띤 얼굴로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설마 겨우 어린애 손 좀 더듬어 보겠다고 신점이 어쩌고, 냄새가 어쩌고 떡밥을 뿌린 거야?’
만효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만난 나쁜 놈을 혼내 주고 싶었다. 어차피 그녀가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병조 판서의 여식에게 함부로 하는 자는 살아남지 못하겠지만.
고로 이자는 만효의 말 한마디면 끝이라는 얘기였다.
“네놈이 내게 빌 생각이 없구나? 내가 다 이를 것이다. 네놈이 우리 어머니 앞에서도 그딴 소리를 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
만효는 어린애처럼 엉엉 울까 잠시 생각했다. 우는 게 제일 쉬우니까. 하지만 그건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는 우는 대신 소리를 빽빽 지르며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만효의 목소리가 집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이제 겨우 여섯 살, 그 작은 몸으로 어찌나 목청이 좋은지 누가 들어도 놀랄 정도였다.
맹인은 산전수전 다 겪어 어지간한 사람 앞에서는 좀처럼 주눅 들지 않았다. 그런 그가 움찔했을 정도로 만효의 기세는 대단했다.
“어머니!”
“만효야! 무슨 일이냐?”
어머니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헐레벌떡 달려와 물으셨다. 집 안의 종들도 죄다 달려 나왔다.
그러나 이러든지 저러든지 맹인은 분위기에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만효는 맹인의 뻔뻔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머니의 옆에 딱 붙어 섰다.
맹인은 벌떡 일어나 옷에 생긴 주름을 펴듯 옷을 탁탁 잡아당겼다. 그리고 뜬금없게도 넙죽 큰절을 했다. 어머니에게 한번, 만효에게 한번 차분하게 절했다.
그는 어머니가 듣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어머니가 서 있는 쪽을 향해서 큰 목소리로 말했다.
“마님, 만효 아씨는 손이 거칠어지셔야 천수를 누리실 수 있습니다. 고운 손이 상한다고 속상해하지 마시고, 손을 많이 쓰게 하십시오. 그래야 손맛이 좋아져 운이 풀리실 겁니다.”
“이놈! 내 딸에게 그게 무슨 악담이냐! 밥 한 끼 얻어먹었으면 조용히 갈 것이지, 네놈의 농담이 아주 과하구나!”
“부디 소인의 말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씨의 손이 거칠어지게 하셔야 합니다. 날것을 잡느라 손에 상처가 나면 더 좋을 것입니다. 아씨께서는 살생을 많이 하시고, 손에 피를 묻히셔야 합니다. 이미 늦었으니 지금부터라도 온 정성을 쏟으십시오. 당장 시작하셔야 합니다.”
방금 뭐랬어?
피? 손에 피를 묻히라고?
깜짝 놀란 만효가 제 손을 앞뒤로 뒤집어 가며 살펴보았다. 아까는 냄새가 난다더니, 이젠 살생을 하란다. 배고프다 울기에 든든하게 먹여 줬더니, 도대체 왜 저러나 싶었다.
하지만 ‘피’라는 단어의 느낌 때문인지 맹인의 헛소리라 무시하고 넘기기엔 왠지 찜찜했다.
점치는 맹인이 용하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어머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머니는 차분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병조 판서 대감의 막내딸이네. 이 아이가 손이 거칠어질 만큼 할 일이 뭐가 있다고 그리 말하는가? 살생을 하라니……. 손에 피를 묻히라니……. 말만 들어도 끔찍하구나. 우리 만효는 이제 겨우 여섯이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허나 어쩌겠습니까? 그리하셔야 이름 덕을 보실 텐데요.”
“저 작은 손으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기껏해야 수나 겨우 놓겠지. 자네가 실성했다고 생각하고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겠네. 그러니 앞으로는 어디 가서 남의 자식 이야기는 함부로 하지 말게. 나서지 말란 말일세. 알아듣겠는가?”
어머니가 당부하듯 말했지만, 맹인은 제 할 말을 계속했다.
“이런 운은 처음이라 소인도 놀랍습니다. 아씨의 명은 짧고도 길어 참말로 특이합니다.”
“뭐?”
“마님,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을 참 잘 지으셨습니다. 하지만 서두르셔야 합니다.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무엇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닙니다.”
“말을 꺼냈으면 상세히 풀어놓게나.”
“송구합니다. 더 이상은 말씀드려도 믿지 않으실 터. 소인은 오늘 먹은 맛있는 밥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옵니다. 만약 아씨께서 이름 덕을 보시게 된다면 훗날 밥을 또 한번 얻어먹을 수 있겠지요.”
계속해서 듣기 거북한 말이 나왔다. 만효는 주먹에 힘을 주고 맹인을 노려보았다.
“아씨, 대단한 손을 만질 수 있게 해 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무탈하십시오.”
맹인은 만효를 향해 돌아섰다. 이마가 무릎에 닿을 정도로 깊숙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사라졌다.
그것이 한양에서 점을 가장 잘 치기로 유명한 자의 예언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인사받은 아이의 이름은 김만효(金萬孝).
대대로 병조 판서 가문은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단명하였기에, 딸이 오래 살며 효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어 준 이름이었다.
만효야, 만효야.
이름을 많이 불릴수록 운이 좋아진다 하였는데…….
그녀의 신분이 높아 감히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몇 없었다.
* * *
천연두로 죽어 나가는 자가 많았다.
끔찍한 그 병은 동궁전의 세자를 덮쳤고, 뒤이어 대비까지 넘보았다. 천연두에 걸린 대비는 궁녀 여럿을 데리고 사가로 요양을 떠났다. 수라간에서 가장 손맛이 좋은 최 나인도 데려갔다.
한 달 후 대비는 결국 운명을 다하였고, 대비의 사가로 함께 갔던 궁녀들은 다시 입궐할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궐에서 나온 관리는 궁녀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말을 전했다.
“앞으로는 궁녀였던 것을 드러내지 말고 조용히 살거라. 무슨 뜻인지 알지?”
“정말로 다시는 궐로 돌아가지 못하나요?”
“대비마마를 모셨으니 어쩔 수 없다. 혹여 병을 옮기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예…….”
몸이 아픈 궁녀는 궐을 떠나야 했다. 궁녀는 절대로 궐 안에서 죽어서는 아니 되었다. 그렇기에 혹시 전염병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궁녀들을 궐에서 받아 줄 리는 없었다.
쫓겨난 궁녀들은 슬퍼하기만 할 뿐 그 누구도 임금을 원망하지 않았다. 궐내 법도가 그러한 것을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대비마마의 약시중을 들던 궁녀가 약과를 반으로 잘라 최 나인에게 건넸다. 궁녀는 반쪽짜리 약과를 씹으며 물었다.
“최 나인, 갈 곳은 정했어? 나는 고향으로 갈 거야.”
“어……. 나는 그냥 아는 분께.”
“처음 궐에 들어올 때는 승은 상궁이 되는 게 꿈이었거든. 근데 임금님과 밤일은커녕 죽을 때까지 밭일만 하게 생겼네. 우리 팔자도 참 박복하다. 그치?”
최 나인은 고개만 끄덕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궐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궁녀들은 각자의 사가로 떠났다. 하지만 가족이 없는 최 나인은 돌아갈 곳도, 잠시 몸을 의탁할 아는 이도 없었다.
일부 양반들은 출궁한 궁녀를 몰래 첩으로 들이기도 했다. 발각될 경우 큰 사달이 나는 일인데도 다들 쉬쉬하며 그리했다. 임금의 여자를 취한다는 배덕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최 나인은 대비의 먼 친척인 어느 영감에게 화려한 나비 뒤꽂이를 몰래 선물 받았다.
그 선물이 어떤 의미인지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기에 영감의 집으로 찾아갔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용기 낸 일이었다.
최 나인은 난생처음으로 일부러 눈웃음을 치며 영감을 유혹했다.
“귀한 선물을 받았으니, 보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 밤 각오를 단단히 하고 환갑이 넘은 영감의 술 시중을 들었다. 영감의 첩이 된 최 나인은 부엌일 대신 몸단장을 해야 했다.
몇 년쯤은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영감이 원할 때마다 눈웃음치며 거짓으로 좋은 척하면 될 뿐이었다. 하지만 영감이 죽고 나자 최 나인은 다시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녀의 손엔 재물이 있었다. 그동안 영감에게 받은 값비싼 장신구가 꽤 많았다.
최 나인은 앞으로는 쓸 일이 없는 그것들을 팔아 망해 가는 주막을 샀다.
그리고 이젠 누군가가 시켜서가 아닌, 그녀가 만들고 싶은 음식을 최선을 다해 만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