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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어둠이 내려앉은 텅 빈 갤러리 안, 우주는 우두커니 서서 그림 한 점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캔버스에는 광활한 바다가 담겼다. 그림 속 파도는 금방이라도 캔버스 밖으로 벗어나 하얀 거품을 쏟아 낼 듯 생생하다. 밀려든 바닷물이 발등을 핥고, 대리석 바닥 위에 얼룩진 흔적을 남길 것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위로 수백 마리의 새가 비상하고 있다. 새는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서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 작품이 사진이 아닌 초현실적인 그림임을 알려 주는 요소였다.
몇 달 전부터 갑작스레 화두에 오른 화가의 작품인 만큼 그림을 두고 많은 말이 나왔다. 사람들은 그림의 제목인 <영속(永續)>의 의미를 해체하고 해석했다. 그러나 정작 그림의 주인인 우주가 그림을 그리며 생각한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영원불멸이나 시곗바늘의 움직임에 영향받지 않는 초월된 무언가는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감정을 담은 것뿐이다. 삶이 끝을 맺을 때까지 영원히 남을, 떨쳐 내려 해도 머릿속을 꿰뚫고 들어오는 선명한 것들을.
우주는 그림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그림과 작별하기 위해서였다. 그 시간을 방해한 것은 타인의 그림자였다. 그림 위로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발견하고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우주의 의아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남자는 우주의 시선에 반응하듯 갤러리 안쪽으로 들어섰다. 간격이 좁혀지자 그림자에 의해 절단당했던 남자의 이목구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우주는 표정을 굳혔다. 옅은 색의 눈동자가 놀라움과 충격으로 경직되었다. 다섯 걸음 정도의 간격을 남겨 두고 남자는 멈춰 섰다. 놀란 우주와 달리 그는 흐트러짐 없는 안온한 얼굴로 그림을 감상했다. 어둠과 은은한 조명이 조화로이 내려앉은 그의 얼굴은 마치 명암이 극명한 그림 같았다.
한참 동안 그림을 바라보던 남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그림을 볼 때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
“새는 바다에서 태어난 건지, 아니면 뛰어들기 위해 바다를 찾은 건지.”
깊은 눈매가 설핏 호선을 그렸다. 그러나 진정으로 웃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웃음을 지우고 시선을 옮겨 그림을 등지고 서 있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조명이 무색하리만치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치자 가슴이 추락하는 듯했다.
그는 우주의 앞으로 다가와 긴 손끝으로 우주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겨 냈다. 연한 밤색 머리카락이 드러나자 남자의 눈동자가 잠시 일렁였다.
“이 그림의 주인이 네가 아니길 바랐어.”
“…….”
“네가 맞길 바라기도 했고.”
영원히 찬란할 줄만 알았던 시절을 함께한 사람이다. 그러나 과거는 종잇장처럼 구겨지고, 짓밟히고, 거스르지 못할 무언가에 의해 산산이 바스러진 지 오래였다.
“9년 동안 숨어 산 기분이 어땠어?”
표정은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노골적인 비난과 원망이 그녀를 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를 피해 도망 다닌 그 시간이 어땠냐고.”
꽉 말아 쥔 우주의 손이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잔가지처럼 파르르 떨렸다.
“나는…….”
그는 버겁게 입을 열었다.
“매 순간이 지옥이었어.”
01. 소낙비
“전학 오는 애가 말을 못 한다더라. 네가 잘 챙겨 줘.”
학창 시절에 반장을 하는 것은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우주가 반장이 되고 한 달 만에 깨달은 사실이다. 반 아이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우주를 통해 해결하려 했고, 담임 선생님마저 부담스러운 일을 떠맡기곤 했다.
“말을 아예 못 하는 거예요?”
우주가 물었다. 담임 선생님은 대답 없이 컴퓨터를 보며 분주히 마우스를 움직이기만 했다. 어쩐지 선생님의 눈이 퀭했다. 흰머리 섞인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고, 턱수염도 까칠해 보였다. 아무래도 곧 다가오는 중간고사 때문에 밤을 새우신 모양이다.
“쌤?”
“엉?”
“걔가 말을 아예 못 하는 거예요, 아니면 안 하는 거예요?”
“선천적인 이유는 아닌 것 같더라고.”
“그럼요?”
“뭐, 못 하게 된 걸 수도 있고, 안 해야 하는 상황일 수도 있고.”
모호한 말에 우주의 콧잔등이 불만스럽게 찡그려졌다.
“집안 사정이 좀 복잡한가 봐. 너한테만 말하는 거니까 다른 애들한테 얘기하면 안 된다? 네가 잘 좀 챙겨 줘.”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선생님의 부탁은 이제 막 반장이 된 우주에게는 너무도 부담스러웠다. 18년이나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래 봤자 사회 경험 전무한 중졸이었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지 판단할 정도로 성숙하지 않다. 사연 있는 전학생을 능숙히 배려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애들이 따돌리고 그러면 나한테 바로 말하고.”
그런데도 우주는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답을 내어놓고 말았다.
“걱정 마세요, 쌤.”
고등학생은 이래서 문제다. 20년도 안 산 주제에 어른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한다.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의 원천은 어디일까. 우주는 속으로 탄식했다. 그러나 티를 내지 않고 선생님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우주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주름진 이마에 더 깊은 주름도 생겼다. 의심스러운 표정이었다. 어쩌면 지난번에 우주가 복사기를 고친답시고 때려 부쉈던 일을 떠올리고 계신지도 모른다.
“믿어도 되냐?”
“그럼요. 전 미인이잖아요.”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네가 왜 미인이야. 미남이면 모를까, 미남.”
선생님의 시선이 우주의 짧은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본래도 사내아이처럼 대책 없고 장난스러운 면이 많은 우주인데, 머리가 짧다 보니 더 장난꾸러기처럼 보이곤 했다.
“저 주민등록번호 2로 시작하거든요, 쌤. 얼굴이 아니라 마음이 미인이라고요, 마음이.”
담임 선생님의 표정이 개똥이라도 본 듯 일그러졌다.
“마음이 미인인 사람이 짝꿍 머리털을 뜯어?”
복사기가 아니라 그쪽이었나 보다.
“아! 그거는 도재현이 얄밉게 구니까 그렇죠……. 그거랑은 별개예요. 아무튼 걱정하지 마세요. 전학생은 제가 잘 보살필게요.”
“괜히 오버하다 사고 치지 말고. 그냥 무슨 일 생기면 바로바로 말하기만 하면 돼.”
“넵.”
“못 믿겠는데.”
담임 선생님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우주가 불만스레 꿍얼거렸다.
“못 믿으시면 처음부터 말을 하지 마시지…….”
“이게 자꾸 말대꾸야.”
“아! 1교시 시작하겠다!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존경하는 담임 선생님.”
선생님이 화를 내기 전에 우주는 과장스럽게 몸을 숙여 인사했다. 담임 선생님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우주는 헤헤 웃으며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 ♣ ♣
“헐.”
우주는 짧게 감탄했다. 진짜 미인은 따로 있었다. 마음 미인이 아니라 얼굴 미인 말이다. 미인이라는 단어는 눈앞의 전학생을 위해 만들어진 단어 같았다. 순정 만화책에서 갓 튀어나온 듯 잘생긴 얼굴을 보며 우주는 입을 벌렸다.
사연 있는 전학생이라고 하여 여린 외모를 예상했는데, 눈앞의 남자애는 키도 크고 눈빛도 날카로웠다. 조금 무서울 정도로 무표정한 전학생을 멍하니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밀었다.
“안녕, 내가 10반 반장이야. 잘 지내보자.”
깊고 큰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이며 우주를 응시했다. 시선이 우주의 짧은 밤색 머리카락에서 멈추더니, 체육복 차림으로 내려갔다. 부챗살 같은 속눈썹이 흰 피부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느릿한 시선이 도달한 곳은 우주의 손이었다. 정확히는 손에 묻은 물감이었다.
“아, 이건 물감이야. 더러운 건 아닌데…….”
우주의 말에도 전학생은 악수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미인이라고 한 거 취소다. 싸가지 없으면 연예인 뺨치는 외모를 데리고 와도 말짱 도루묵이다. 나쁜 놈.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반장의 책임감을 잃지 않은 우주는 손을 끌어다 악수를 했다. 전학생이 표정을 약간 찌푸리더니 손을 빼내었다. 냉담한 반응에 찬물을 끼얹은 듯 기운이 쭉 빠졌다. 우주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내 이름은 우주야, 임우주! 네 이름은…….”
우주는 시선을 옮겨 전학생의 명찰을 바라보았다. 이은호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은호구나, 이은호. 이름 예쁘다. 전학 와서 좀 낯설지? 그래도 걱정하지 마. 우리 반 애들 다 착해.”
“…….”
“아, 너 수학 좋아해? 내가 성적으로 반장이 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수학은 잘해! 수신이야, 수학 신. 혹시 나중에 모르는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도 돼. 어…… 그리고 그림도 잘 그려. 너는 잘생겼으니까 나중에 내가 그려 줄게.”
우주는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았으나 어떠한 반응도 얻어 낼 수 없었다. 우주를 응시하는 까만 눈동자는 미동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이놈은 전학 오면서 감정을 이전 학교에 놓고 온 모양이다.
난처한 와중에도 우주는 전학생의 입매가 소묘할 때 쓰는 석고상 아그리파나 줄리앙보다도 예쁘다고 생각했다. 서양 영화에 나오는 남자 배우의 입술 같기도 했다.
“일단 올라가자, 반 애들 소개해 줄게.”
입꼬리에 경련이 나도록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우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우주의 짝꿍인 도재현은 반장의 줄임말이 ‘반’에서 가‘장’ 부려먹기 쉬운 애의 줄임말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놈은 합법적으로 우주를 부려 먹기 위해 반장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우주는 지금의 고생이 모두 도재현 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은호를 데리고 교실 앞문으로 들어서자 이목이 집중되었다. 말 못 하는 화려한 얼굴의 전학생을 향한 호기심 어린 시선이었다.
간단하게 인사라도 시켜야 덜 어색할 것 같아서 교탁 앞으로 가려 하는데, 갑자기 도재현이 먼저 교탁 앞으로 튀어나왔다. 누구한테 빌려 입었는지 이상한 깔깔이 옷을 입고 있었다.
“수금을 시작하지.”
재현이 껄렁한 어조로 말했다. 그 말에 반 애들이 숙연해지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세상에서 제일 질 나쁜 일진이라도 만난 것 같은 태도였다. 얘네 뭐 하는 거야……? 우주가 재현에게 다가가려 하자 영식이 우주의 팔을 붙잡았다.
“야, 임우주. 기다려. 쉿.”
“너네 뭐 하냐……?”
“전학생 몰래카메라 할 거야.”
우주는 인상을 썼다.
“으. 벌써 재미없어.”
“초 치지 마.”
안타깝게도 전학생은 이런 몰래카메라에 어울릴 부류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도재현은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더니, 반에서 가장 덩치가 좋은 성현이를 지목했다.
“넌 오늘 뭘 가지고 왔지?”
“난 빵이랑 우유를 가져왔어 재현아!”
성현이는 날렵하게 빵과 우유를 가져다 바쳤다. 성현이는 인상을 쓰면 누구든 물리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외모를 가진 애였다. 그런 애가 쩔쩔매니 재현이 대단한 일진처럼 보이긴 했다.
“무슨 우유를 가져왔는데?”
“딸기 우유!”
“그딴 벌레로 만든 우유를 먹으라는 건가.”
“벌레라니?”
“딸기 우유의 색소인 코치닐추출색소의 원료는 연지벌레야. 고로 너는 나한테 벌레를 먹이겠다는 거지.”
재현이 빠르게 말을 늘어놓았다. 일진 행세하는 주제에 스펀지 열심히 봤나 보다. 우주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나는……!”
“머리 박아.”
재현의 말에 성현이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다. 성현의 머리에 핏줄이 섰다. 전학생 몰래카메라 하겠다고 사서 고생을 한다. 이런 반에서 1년간 반장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우주는 머리가 아파 왔다.
그때 앞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얘넨 또 뭐 하는 거야. 얼른 들어가!”
몰래카메라가 막장으로 치닫기 전에 다행히 영어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재현과 성현이 분주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몰래카메라가 어설프게 끝나 버리자 반 애들은 당황하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우주는 은호에게 빈자리를 알려 주고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이미 우주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재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떡하지? 몰래카메라.”
“어떡하긴. 망한 거지 뭐.”
“쟤가 오해하면 어떡해. 나 딸기 우유 좋아한단 말이야.”
우주는 인상을 쓰며 재현을 바라보았다. 일진으로 오해받는 게 걱정이 아니라 딸기 우유가 더 걱정이라니. 하여튼 정상적인 애는 아니다.
옆에서 한참 심각하게 고민하던 도재현은 쪽지를 적었다.
「난 딸기 우유를 좋아한단다.」
슬쩍 훔쳐본 쪽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우주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얼굴은 멀쩡하게 생겨 가지고 하는 짓은 순 미친놈이다.
재현의 쪽지가 반 아이들의 손을 거쳐 전달되는 동안 우주는 슬쩍 은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이 무척 짙었다. 먹물처럼 까만데도 머릿결이 무척 좋은지 햇빛을 반사시켜 반짝거렸다.
우주는 색이 밝은 제 머리카락을 매만지다 다시 눈을 돌려 은호를 바라보았다. 책상 위에 놓인 쪽지를 바라보는 은호의 눈은 무감했다. 느릿한 손길이 종이를 펼치고, 까만 눈동자가 글자를 읽으며 은호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그리고 내내 감정 없던 눈에 의아함이 가득 찼다.
처음으로 사람다운 모습을 보며 우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반 아이들과 선생님이 의아한 눈으로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엔 은호의 시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임우주, 갑자기 왜 웃니?”
영어 선생님이 물었다. 당황한 우주는 어설픈 변명을 했다.
“어제 TV에서 본 게 생각나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교실에 채워졌다. 우주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음 지었다.
프롤로그
어둠이 내려앉은 텅 빈 갤러리 안, 우주는 우두커니 서서 그림 한 점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캔버스에는 광활한 바다가 담겼다. 그림 속 파도는 금방이라도 캔버스 밖으로 벗어나 하얀 거품을 쏟아 낼 듯 생생하다. 밀려든 바닷물이 발등을 핥고, 대리석 바닥 위에 얼룩진 흔적을 남길 것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위로 수백 마리의 새가 비상하고 있다. 새는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서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 작품이 사진이 아닌 초현실적인 그림임을 알려 주는 요소였다.
몇 달 전부터 갑작스레 화두에 오른 화가의 작품인 만큼 그림을 두고 많은 말이 나왔다. 사람들은 그림의 제목인 <영속(永續)>의 의미를 해체하고 해석했다. 그러나 정작 그림의 주인인 우주가 그림을 그리며 생각한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영원불멸이나 시곗바늘의 움직임에 영향받지 않는 초월된 무언가는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감정을 담은 것뿐이다. 삶이 끝을 맺을 때까지 영원히 남을, 떨쳐 내려 해도 머릿속을 꿰뚫고 들어오는 선명한 것들을.
우주는 그림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그림과 작별하기 위해서였다. 그 시간을 방해한 것은 타인의 그림자였다. 그림 위로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발견하고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우주의 의아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남자는 우주의 시선에 반응하듯 갤러리 안쪽으로 들어섰다. 간격이 좁혀지자 그림자에 의해 절단당했던 남자의 이목구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우주는 표정을 굳혔다. 옅은 색의 눈동자가 놀라움과 충격으로 경직되었다. 다섯 걸음 정도의 간격을 남겨 두고 남자는 멈춰 섰다. 놀란 우주와 달리 그는 흐트러짐 없는 안온한 얼굴로 그림을 감상했다. 어둠과 은은한 조명이 조화로이 내려앉은 그의 얼굴은 마치 명암이 극명한 그림 같았다.
한참 동안 그림을 바라보던 남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그림을 볼 때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
“새는 바다에서 태어난 건지, 아니면 뛰어들기 위해 바다를 찾은 건지.”
깊은 눈매가 설핏 호선을 그렸다. 그러나 진정으로 웃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웃음을 지우고 시선을 옮겨 그림을 등지고 서 있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조명이 무색하리만치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치자 가슴이 추락하는 듯했다.
그는 우주의 앞으로 다가와 긴 손끝으로 우주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겨 냈다. 연한 밤색 머리카락이 드러나자 남자의 눈동자가 잠시 일렁였다.
“이 그림의 주인이 네가 아니길 바랐어.”
“…….”
“네가 맞길 바라기도 했고.”
영원히 찬란할 줄만 알았던 시절을 함께한 사람이다. 그러나 과거는 종잇장처럼 구겨지고, 짓밟히고, 거스르지 못할 무언가에 의해 산산이 바스러진 지 오래였다.
“9년 동안 숨어 산 기분이 어땠어?”
표정은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노골적인 비난과 원망이 그녀를 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를 피해 도망 다닌 그 시간이 어땠냐고.”
꽉 말아 쥔 우주의 손이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잔가지처럼 파르르 떨렸다.
“나는…….”
그는 버겁게 입을 열었다.
“매 순간이 지옥이었어.”
01. 소낙비
“전학 오는 애가 말을 못 한다더라. 네가 잘 챙겨 줘.”
학창 시절에 반장을 하는 것은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우주가 반장이 되고 한 달 만에 깨달은 사실이다. 반 아이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우주를 통해 해결하려 했고, 담임 선생님마저 부담스러운 일을 떠맡기곤 했다.
“말을 아예 못 하는 거예요?”
우주가 물었다. 담임 선생님은 대답 없이 컴퓨터를 보며 분주히 마우스를 움직이기만 했다. 어쩐지 선생님의 눈이 퀭했다. 흰머리 섞인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고, 턱수염도 까칠해 보였다. 아무래도 곧 다가오는 중간고사 때문에 밤을 새우신 모양이다.
“쌤?”
“엉?”
“걔가 말을 아예 못 하는 거예요, 아니면 안 하는 거예요?”
“선천적인 이유는 아닌 것 같더라고.”
“그럼요?”
“뭐, 못 하게 된 걸 수도 있고, 안 해야 하는 상황일 수도 있고.”
모호한 말에 우주의 콧잔등이 불만스럽게 찡그려졌다.
“집안 사정이 좀 복잡한가 봐. 너한테만 말하는 거니까 다른 애들한테 얘기하면 안 된다? 네가 잘 좀 챙겨 줘.”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선생님의 부탁은 이제 막 반장이 된 우주에게는 너무도 부담스러웠다. 18년이나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래 봤자 사회 경험 전무한 중졸이었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지 판단할 정도로 성숙하지 않다. 사연 있는 전학생을 능숙히 배려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애들이 따돌리고 그러면 나한테 바로 말하고.”
그런데도 우주는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답을 내어놓고 말았다.
“걱정 마세요, 쌤.”
고등학생은 이래서 문제다. 20년도 안 산 주제에 어른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한다.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의 원천은 어디일까. 우주는 속으로 탄식했다. 그러나 티를 내지 않고 선생님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우주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주름진 이마에 더 깊은 주름도 생겼다. 의심스러운 표정이었다. 어쩌면 지난번에 우주가 복사기를 고친답시고 때려 부쉈던 일을 떠올리고 계신지도 모른다.
“믿어도 되냐?”
“그럼요. 전 미인이잖아요.”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네가 왜 미인이야. 미남이면 모를까, 미남.”
선생님의 시선이 우주의 짧은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본래도 사내아이처럼 대책 없고 장난스러운 면이 많은 우주인데, 머리가 짧다 보니 더 장난꾸러기처럼 보이곤 했다.
“저 주민등록번호 2로 시작하거든요, 쌤. 얼굴이 아니라 마음이 미인이라고요, 마음이.”
담임 선생님의 표정이 개똥이라도 본 듯 일그러졌다.
“마음이 미인인 사람이 짝꿍 머리털을 뜯어?”
복사기가 아니라 그쪽이었나 보다.
“아! 그거는 도재현이 얄밉게 구니까 그렇죠……. 그거랑은 별개예요. 아무튼 걱정하지 마세요. 전학생은 제가 잘 보살필게요.”
“괜히 오버하다 사고 치지 말고. 그냥 무슨 일 생기면 바로바로 말하기만 하면 돼.”
“넵.”
“못 믿겠는데.”
담임 선생님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우주가 불만스레 꿍얼거렸다.
“못 믿으시면 처음부터 말을 하지 마시지…….”
“이게 자꾸 말대꾸야.”
“아! 1교시 시작하겠다!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존경하는 담임 선생님.”
선생님이 화를 내기 전에 우주는 과장스럽게 몸을 숙여 인사했다. 담임 선생님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우주는 헤헤 웃으며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 ♣ ♣
“헐.”
우주는 짧게 감탄했다. 진짜 미인은 따로 있었다. 마음 미인이 아니라 얼굴 미인 말이다. 미인이라는 단어는 눈앞의 전학생을 위해 만들어진 단어 같았다. 순정 만화책에서 갓 튀어나온 듯 잘생긴 얼굴을 보며 우주는 입을 벌렸다.
사연 있는 전학생이라고 하여 여린 외모를 예상했는데, 눈앞의 남자애는 키도 크고 눈빛도 날카로웠다. 조금 무서울 정도로 무표정한 전학생을 멍하니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밀었다.
“안녕, 내가 10반 반장이야. 잘 지내보자.”
깊고 큰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이며 우주를 응시했다. 시선이 우주의 짧은 밤색 머리카락에서 멈추더니, 체육복 차림으로 내려갔다. 부챗살 같은 속눈썹이 흰 피부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느릿한 시선이 도달한 곳은 우주의 손이었다. 정확히는 손에 묻은 물감이었다.
“아, 이건 물감이야. 더러운 건 아닌데…….”
우주의 말에도 전학생은 악수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미인이라고 한 거 취소다. 싸가지 없으면 연예인 뺨치는 외모를 데리고 와도 말짱 도루묵이다. 나쁜 놈.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반장의 책임감을 잃지 않은 우주는 손을 끌어다 악수를 했다. 전학생이 표정을 약간 찌푸리더니 손을 빼내었다. 냉담한 반응에 찬물을 끼얹은 듯 기운이 쭉 빠졌다. 우주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내 이름은 우주야, 임우주! 네 이름은…….”
우주는 시선을 옮겨 전학생의 명찰을 바라보았다. 이은호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은호구나, 이은호. 이름 예쁘다. 전학 와서 좀 낯설지? 그래도 걱정하지 마. 우리 반 애들 다 착해.”
“…….”
“아, 너 수학 좋아해? 내가 성적으로 반장이 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수학은 잘해! 수신이야, 수학 신. 혹시 나중에 모르는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도 돼. 어…… 그리고 그림도 잘 그려. 너는 잘생겼으니까 나중에 내가 그려 줄게.”
우주는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았으나 어떠한 반응도 얻어 낼 수 없었다. 우주를 응시하는 까만 눈동자는 미동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이놈은 전학 오면서 감정을 이전 학교에 놓고 온 모양이다.
난처한 와중에도 우주는 전학생의 입매가 소묘할 때 쓰는 석고상 아그리파나 줄리앙보다도 예쁘다고 생각했다. 서양 영화에 나오는 남자 배우의 입술 같기도 했다.
“일단 올라가자, 반 애들 소개해 줄게.”
입꼬리에 경련이 나도록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우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우주의 짝꿍인 도재현은 반장의 줄임말이 ‘반’에서 가‘장’ 부려먹기 쉬운 애의 줄임말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놈은 합법적으로 우주를 부려 먹기 위해 반장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우주는 지금의 고생이 모두 도재현 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은호를 데리고 교실 앞문으로 들어서자 이목이 집중되었다. 말 못 하는 화려한 얼굴의 전학생을 향한 호기심 어린 시선이었다.
간단하게 인사라도 시켜야 덜 어색할 것 같아서 교탁 앞으로 가려 하는데, 갑자기 도재현이 먼저 교탁 앞으로 튀어나왔다. 누구한테 빌려 입었는지 이상한 깔깔이 옷을 입고 있었다.
“수금을 시작하지.”
재현이 껄렁한 어조로 말했다. 그 말에 반 애들이 숙연해지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세상에서 제일 질 나쁜 일진이라도 만난 것 같은 태도였다. 얘네 뭐 하는 거야……? 우주가 재현에게 다가가려 하자 영식이 우주의 팔을 붙잡았다.
“야, 임우주. 기다려. 쉿.”
“너네 뭐 하냐……?”
“전학생 몰래카메라 할 거야.”
우주는 인상을 썼다.
“으. 벌써 재미없어.”
“초 치지 마.”
안타깝게도 전학생은 이런 몰래카메라에 어울릴 부류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도재현은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더니, 반에서 가장 덩치가 좋은 성현이를 지목했다.
“넌 오늘 뭘 가지고 왔지?”
“난 빵이랑 우유를 가져왔어 재현아!”
성현이는 날렵하게 빵과 우유를 가져다 바쳤다. 성현이는 인상을 쓰면 누구든 물리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외모를 가진 애였다. 그런 애가 쩔쩔매니 재현이 대단한 일진처럼 보이긴 했다.
“무슨 우유를 가져왔는데?”
“딸기 우유!”
“그딴 벌레로 만든 우유를 먹으라는 건가.”
“벌레라니?”
“딸기 우유의 색소인 코치닐추출색소의 원료는 연지벌레야. 고로 너는 나한테 벌레를 먹이겠다는 거지.”
재현이 빠르게 말을 늘어놓았다. 일진 행세하는 주제에 스펀지 열심히 봤나 보다. 우주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나는……!”
“머리 박아.”
재현의 말에 성현이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다. 성현의 머리에 핏줄이 섰다. 전학생 몰래카메라 하겠다고 사서 고생을 한다. 이런 반에서 1년간 반장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우주는 머리가 아파 왔다.
그때 앞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얘넨 또 뭐 하는 거야. 얼른 들어가!”
몰래카메라가 막장으로 치닫기 전에 다행히 영어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재현과 성현이 분주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몰래카메라가 어설프게 끝나 버리자 반 애들은 당황하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우주는 은호에게 빈자리를 알려 주고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이미 우주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재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떡하지? 몰래카메라.”
“어떡하긴. 망한 거지 뭐.”
“쟤가 오해하면 어떡해. 나 딸기 우유 좋아한단 말이야.”
우주는 인상을 쓰며 재현을 바라보았다. 일진으로 오해받는 게 걱정이 아니라 딸기 우유가 더 걱정이라니. 하여튼 정상적인 애는 아니다.
옆에서 한참 심각하게 고민하던 도재현은 쪽지를 적었다.
「난 딸기 우유를 좋아한단다.」
슬쩍 훔쳐본 쪽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우주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얼굴은 멀쩡하게 생겨 가지고 하는 짓은 순 미친놈이다.
재현의 쪽지가 반 아이들의 손을 거쳐 전달되는 동안 우주는 슬쩍 은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이 무척 짙었다. 먹물처럼 까만데도 머릿결이 무척 좋은지 햇빛을 반사시켜 반짝거렸다.
우주는 색이 밝은 제 머리카락을 매만지다 다시 눈을 돌려 은호를 바라보았다. 책상 위에 놓인 쪽지를 바라보는 은호의 눈은 무감했다. 느릿한 손길이 종이를 펼치고, 까만 눈동자가 글자를 읽으며 은호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그리고 내내 감정 없던 눈에 의아함이 가득 찼다.
처음으로 사람다운 모습을 보며 우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반 아이들과 선생님이 의아한 눈으로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엔 은호의 시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임우주, 갑자기 왜 웃니?”
영어 선생님이 물었다. 당황한 우주는 어설픈 변명을 했다.
“어제 TV에서 본 게 생각나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교실에 채워졌다. 우주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