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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은호는 계속 말을 하지 않았다.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고, 친분이 느껴질 만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반 애들이 은호에게 몇 번 말을 걸었으나 그때마다 은호는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은호가 아무리 냉담해도 우주는 잘해 줄 생각이었다. 담임 선생님의 부탁이 있었으니까. 반장이라고 자주 부려 먹긴 하지만 그래도 우주에게는 좋은 선생님이었다. 우주가 미대에 가지 않겠다고 했을 때 자기 일처럼 걱정을 해 주시기도 했고, 어느 날 우주가 아팠을 때 직접 병원에 데려가 주신 적도 있었다.
그런 선생님이 흔치 않다는 사실을 몇 년의 학교생활로 알고 있었다. 억지로 된 반장이지만, 어쨌든 반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은호에게도 열심히 말을 걸었다.
“야, 이은호 같이 밥 먹자.”
“야, 은호야. 집에 같이 가자.”
“이은호 되게 일찍 왔네.”
하지만 우주의 끊임없는 도전에도 은호는 한결같이 대꾸가 없었다. 은호는 우주의 친절이 달갑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느 순간부터 은호는 우주가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늘도 은호는 우주를 피해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너 전학생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니냐.”
멍하니 서 있는 우주를 보며 재현이 불만스레 말했다.
“잘생긴 사람은 나 하나로 족해야지.”
“헛소리하지 마라.”
우주는 경멸을 담아 말했다. 재현이 상처받은 연기를 하며 가슴을 짚었다. 우주는 그런 재현의 가슴팍을 퍽 소리 나게 밀어 냈다.
“아무튼 걔한테 왜 그렇게 신경을 써?”
“그냥, 나쁜 애는 아닌 거 같아서.”
“나쁜 애든 아니든,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애한테 굳이 그럴 필요 있나.”
“그런가?”
정말 혼자 있고 싶은 걸까. 하지만 벌써부터 외로움을 자청하기에 우리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원해서 혼자가 된 게 아니라 혼자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면 어떡하지.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다는 여럿인 게 낫지 않을까?”
“걔한테는 아닐 수도 있지.”
재현이 무심히 대답했다. 우주는 엷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이래서 자신이 없었던 거다. 잘 챙겨 주는 것의 적정선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근데 너 오늘도 미술실에 있다 갈 거야?”
생각에 잠긴 우주에게 재현이 물었다.
“어, 응.”
“언제까지 몰래 그림 그릴 거야? 나 같으면 그냥 미대 보내 달라고 하겠다.”
“안 된다니까.”
우주의 대답에 재현은 영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방과 후에 남아서 그릴 정도로 그림을 좋아하면서 왜 취미에 그치려고 하는지 재현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가 안 된다, 진짜.”
“이해하지 마세요, 그럼.”
“3학년 때는 어쩌려고? 그때는 야자 강제잖아.”
“그때는 그림 말고 공부에 집중해야지. 아무튼 나 교무실 다녀온다.”
우주는 분주하게 유인물을 챙긴 뒤 교실을 빠져나갔다. 재현은 우주의 뒷모습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재현은 우주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주는 은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차이를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즈음에는 성숙해졌다 말할 수 있는 걸까.
열여덟이란 나이는 다 자란 것처럼 느껴지지만, 어쩔 때는 아주 어린 나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고 생각하는 것에 서투를 수밖에 없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게 가능할까? 우주는 의문했으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열여덟이란 나이는 불완전한 것투성이였다.
♣ ♣ ♣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봄비가 내렸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에 우주는 연필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얇은 빗줄기가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떨어지고 있다. 땅과 나뭇잎을 적시는 빗소리가 잔잔하여 기분이 좋았다.
한 시간만 더 그리다 집에 가야겠다고 다짐하고는 연필을 고쳐 잡았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그림도 더 잘 그려지는 것 같았고, 평소보다 빠르게 시간이 흐르는 듯했다. 작은 그림 한 장을 완성한 뒤 우주는 우산을 가지러 가기 위해 교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아연실색하며 뒤로 자빠질 뻔했다. 불이 꺼진 우중충한 교실 창문 쪽에 까만 무언가가 있었다. 다급히 불을 켜고 보니 이은호였다. 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채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뭐야, 이은호? 너 여기서 뭐 해?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은호는 우주의 말을 무시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평소와 같은 반응인데 왠지 분위기가 더 무거워 보였다.
“왜 그렇게 젖었어? 비 그칠 때까지 기다리려고?”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우주는 사물함에 있던 수건을 꺼내 은호의 머리에 덮어 주었다. 은호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있으면 감기 걸린다. 깨끗한 건 아닌데 그냥 써.”
눈매가 날카로워서 차가운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올려다보는 모습이 꼭 비에 젖은 고양이 같다. 우주가 빤히 바라보니 은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렸다.
“우산 없으면 집 같이 갈래? 나 우산 있어.”
은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떻게 가려고?”
은호는 대답 없이 수건으로 머리를 닦기만 했다.
재현의 말처럼 은호는 정말 혼자 있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비에 젖었는데도 도움의 손길을 거절할 만큼 혼자가 간절한 것은 어떤 기분일까. 아직 그런 기분을 경험한 적이 없는 우주는 은호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알았어, 그럼 나 먼저 갈게.”
우주는 돌아섰다. 교실 문 앞까지 간 건 좋은데, 왠지 마음이 쓰여서 다시 돌아보았다. 은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책상 어딘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우주는 다시 은호에게 성큼 다가섰다. 그리고 책상 위에 노란색 우산을 올려놓았다. 까만 눈동자가 시선을 들어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거 쓰고 가. 나는 경비 아저씨 우산 빌리면 돼. 아, 그리고 학교 9시에 문 닫으니까 그 전에 집에 가.”
“…….”
“내일 보자.”
우주는 빠르게 말을 마치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여전히 창밖에서는 하염없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가 와서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은호에게는 이 비가 반갑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깊이 침잠된 눈으로 책상 언저리를 바라보던 짙은 눈동자가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 ♣ ♣
다음 날 학교에 왔을 때 우주의 책상 위에는 우산이 놓여 있었다. 3단 접이식 우산은 마치 새로 샀을 때처럼 말끔히 접혀 있었다. 조금 강박적으로 보일 정도로. 그 무표정한 얼굴로 우산을 꼼꼼히 접었을 거라 생각하니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그나저나 우산을 쓰긴 한 건지 의문이었다. 썼다면 다행이지만 쓰지 않았다면 조금 화가 날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날 우주는 쫄딱 비를 맞았으니까. 우산은 빌리지 못했고, 사기에는 아까워 그냥 가방을 뒤집어쓰고 하교를 했다. 덕분에 약간 감기 기운이 있었다.
“점심시간 끝나기 전까지 문학 숙제 교탁 앞에 올려놔!”
우주는 교탁 앞에 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감기 기운이 있든 말든 반장은 할 일을 해야 했다. 물미역처럼 늘어져 있던 반 아이들이 우주의 말을 듣고 부랴부랴 노트를 펼쳤다. 우주도 자리에 돌아가 노트를 펼치고 숙제를 시작했다.
“반장아. 피자는 언제 쏠 거야?”
옆자리에서 핸드폰 게임을 하던 재현이 물었다. 우주는 숙제를 하며 차분히 말했다.
“너 피자의 줄임말이 뭔지 알아?”
“피자 영어잖아, 바보야. 핏쨔.”
“아니야. 피 터지게 조쟈 버리겠다의 줄임말이야.”
우주의 살벌한 말에 재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우주는 차갑게 말했다.
“빨리 숙제나 해라.”
“네.”
재현은 노트를 펼쳐 열심히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끝나 갈 무렵에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숙제를 제출했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우주는 출석 번호대로 노트를 정리했다. 그런데 마지막 번호가 없었다. 마지막 출석 번호의 주인은 이은호였다.
우주는 고개를 들어 은호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은호는 자기 자리에 앉아 까만 눈으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주는 다가서서 은호의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은호는 고개를 돌려 우주를 응시했다.
“야, 은호. 숙제 내.”
오늘은 어째선지 눈이 더 날카로웠다. 우주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경계가 느껴졌다.
“안 했냐?”
은호는 물음을 무시하고 다시 몸을 엎드리려 했다. 우주는 그런 은호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일단 내 노트 보고 써.”
우주는 제 노트를 건네주었다. 그러나 은호는 노트를 받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 교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야!”
우주가 소리쳤으나 은호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질풍노도의 시기는 지날 때도 되지 않았나. 우주는 깊이 한숨을 내쉬고 은호의 책상에 앉았다.
문학 선생님은 성격이 좀 이상해서 트집을 잡으면 한 달 내내 학생을 괴롭히곤 한다. 전학 오자마자 찍히게 놔둘 수는 없어 우주는 은호 대신 숙제를 시작했다.
반장은 왜 자진 사퇴를 할 수 없는 걸까. 이게 다 도재현 때문이다. 걔가 나 반장 되게 만들었으니까. 우주는 속으로 불만을 늘어놓으며 손으로는 열심히 숙제를 했다.
“야, 임우주. 그냥 둬. 네가 왜 해 줘?”
은호의 짝꿍인 윤주가 말했다.
“문학 쌤 좀 까다롭잖아.”
“호구 새끼.”
“내가 왜 새끼야.”
“으휴, 착해 빠져 가지고.”
윤주가 우주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아, 하지 마. 나 이거 해야 돼.”
우주가 칭얼거리자 윤주는 웃으며 머리카락을 더 헝클어트렸다. 우주도 같이 대꾸하다가 결국 장난으로 번져서 은호의 숙제는 점심시간 내내 해야만 했다.
숙제를 다 했는데도 은호는 5교시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주는 심란한 얼굴로 은호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은호는 평소에도 날카로워 보이지만 오늘은 유독 심했던 거 같다. 어제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주는 은호를 찾기 위해 쉬는 시간을 틈타 교실을 빠져나왔다. 건물 뒤의 공터와 강당 옆에 가 보았지만 은호는 없었다. 대신 강당에서 열렬히 농구 경기를 하고 있는 고3 언니들만 보였다. 슬램덩크 못지않은 경기를 넋 놓고 구경하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은호를 찾으러 나섰다.
운동장에도 없고, 체육관에도 없고, 쓰레기장에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옥상에 가 보기로 했다. 더운 날씨에 꼭대기까지 가려니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호흡도 가빠졌지만, 우주는 걸음을 재촉했다.
간신히 꼭대기 층에 도달한 우주는 옥상 문을 열어젖혔다. 강한 햇볕이 시야를 가득 메워 눈이 따가웠다. 손차양을 하고 앞을 바라보았다. 날이 맑아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가운데, 옥상 난간 쪽에 서 있는 은호가 보였다.
순간적으로 나쁜 예감이 들었다. 우주는 은호에게 달려가 급히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은호의 몸이 기울어지고, 놀라서 크게 뜨인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바닥에 등이 부딪히리란 생각에 우주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런데 어깨에 팔이 감기며 몸이 회전했다. 쿵― 둔탁한 소리를 내며 은호의 등이 먼저 바닥에 닿았다.
코끝에 닿은 것은 부드러운 천이었고, 거기에서는 낯선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우주는 자신이 은호의 가슴팍에 코를 박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 너 뭐 하는……!”
우주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은호가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던 탓이다. 너야말로 뭐 하는 거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보며 우주는 자신이 바보 같은 착각을 했음을 알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귓바퀴가 화끈거렸다.
“그보다 괜찮아? 안 다쳤어?”
민망해서 말을 돌리고 은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은호는 손을 잡는 대신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흙먼지가 묻은 교복을 털었다. 그러더니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옥상 문으로 나가 버렸다. 멍하니 서 있던 우주는 급히 은호의 뒤를 쫓았다.
“야, 이은호. 너 5교시 수업 왜 빠졌어?”
은호는 대답 없이 빠르게 걷기만 했다.
“야, 같이 좀…….”
얼떨결에 팔을 잡자 은호가 강하게 팔을 쳐 냈다. 우주는 당황했다. 은호도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지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괜한 짓을 한 것 같다. 팔을 쳐 낸 것이 의도였든 아니든, 은호가 우주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재현의 말대로 은호는 그냥 혼자 있고 싶은 것이고, 우주의 관심은 괜한 참견이라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어른스러운 척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얘도 자신처럼 외로운 처지라서 철없는 동질감이라도 느끼길 바랐는지도.
“미안.”
허공에 애매하게 떠 있던 손을 내렸다. 방황하던 시선도 아래로 떨어졌다.
“진짜 미안.”
우주는 곧장 돌아섰다.
♣ ♣ ♣
결국 우주는 감기에 걸렸다. 어제 종일 생각에 잠겨 있느라 약을 사 먹는 것을 잊어버린 탓이다. 아침에 약을 먹고 학교에 왔는데도 좀처럼 열이 내리지 않았다. 우주는 종일 기운 없이 책상에 엎드린 채 하루를 보내야 했다.
“야. 임우주. 오늘도 미술실 갈 거야?”
종례가 끝나자 재현이 물었다.
“아니.”
“그럼 집에 같이 가?”
“아니, 들를 데 있어서…….”
“오늘 왜 이렇게 죽사발이야.”
“…….”
“기운 없으면 그냥 같이 집에 가지. 어디 가는데?”
그래도 친구라고 걱정은 되는 모양이다. 감기에 걸려서 병원을 가야 된다고 얘기하려는 순간, 영훈이 끼어들었다.
“야, 도재현. 우리 피씨방 갈 건데 너 갈 거냐?”
“당연.”
영훈의 물음에 재현은 냅다 사라져 버렸다. 우주는 허망한 눈으로 재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반장이라고 부려 먹을 땐 잘도 부려 먹으면서 이럴 땐 관심도 없다. 도재현 오늘 게임 다 져 버려라. 소심한 저주를 하고는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힘이 하나도 없었다. 조금만 쉬다가 병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내리감았다.
어느 순간 우주는 열이 펄펄 끓는 찜질방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찜질방이었다. 위는 찜통처럼 더운데 아래는 냉골이었다. 끔찍한 찜질방에 있으니 몸이 춥기도 하고 덥기도 했다. 창밖에서는 재현이 혀를 내밀며 우주를 약 올리고 있었다. 저 자식이…….
우주는 스르르 눈을 떴다. 감기에 걸리더니 별 이상한 꿈을 다 꾼다. 무거운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이마에 낯선 촉감이 느껴졌다. 우주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들었다.
이은호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새까만 눈동자가 당황한 듯 흔들렸다. 은호는 우주의 이마에서 손을 내려놓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할 말 있어?”
우주의 물음에도 은호는 대답이 없었다. 우주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은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가자.’
그게 은호가 한 첫말이었다. 입으로 소리를 낸 것도 아닌 그저 입 모양으로 말한 것뿐이지만, 어째선지 우주의 기억에는 인상 깊게 남았다.
은호는 우주의 가방을 들더니 교실에서 나갔고, 우주는 그런 은호의 뒤를 따라갔다.
“너 내 가방 왜 훔쳐 가.”
은호는 돌아서서 우주를 바라보았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미간을 좁히고 있다. 우주는 푸스스 소리 내어 웃었다. 은호는 가벼운 웃음을 짓는 우주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다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은호는 계속 말을 하지 않았다.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고, 친분이 느껴질 만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반 애들이 은호에게 몇 번 말을 걸었으나 그때마다 은호는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은호가 아무리 냉담해도 우주는 잘해 줄 생각이었다. 담임 선생님의 부탁이 있었으니까. 반장이라고 자주 부려 먹긴 하지만 그래도 우주에게는 좋은 선생님이었다. 우주가 미대에 가지 않겠다고 했을 때 자기 일처럼 걱정을 해 주시기도 했고, 어느 날 우주가 아팠을 때 직접 병원에 데려가 주신 적도 있었다.
그런 선생님이 흔치 않다는 사실을 몇 년의 학교생활로 알고 있었다. 억지로 된 반장이지만, 어쨌든 반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은호에게도 열심히 말을 걸었다.
“야, 이은호 같이 밥 먹자.”
“야, 은호야. 집에 같이 가자.”
“이은호 되게 일찍 왔네.”
하지만 우주의 끊임없는 도전에도 은호는 한결같이 대꾸가 없었다. 은호는 우주의 친절이 달갑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느 순간부터 은호는 우주가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늘도 은호는 우주를 피해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너 전학생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니냐.”
멍하니 서 있는 우주를 보며 재현이 불만스레 말했다.
“잘생긴 사람은 나 하나로 족해야지.”
“헛소리하지 마라.”
우주는 경멸을 담아 말했다. 재현이 상처받은 연기를 하며 가슴을 짚었다. 우주는 그런 재현의 가슴팍을 퍽 소리 나게 밀어 냈다.
“아무튼 걔한테 왜 그렇게 신경을 써?”
“그냥, 나쁜 애는 아닌 거 같아서.”
“나쁜 애든 아니든,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애한테 굳이 그럴 필요 있나.”
“그런가?”
정말 혼자 있고 싶은 걸까. 하지만 벌써부터 외로움을 자청하기에 우리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원해서 혼자가 된 게 아니라 혼자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면 어떡하지.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다는 여럿인 게 낫지 않을까?”
“걔한테는 아닐 수도 있지.”
재현이 무심히 대답했다. 우주는 엷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이래서 자신이 없었던 거다. 잘 챙겨 주는 것의 적정선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근데 너 오늘도 미술실에 있다 갈 거야?”
생각에 잠긴 우주에게 재현이 물었다.
“어, 응.”
“언제까지 몰래 그림 그릴 거야? 나 같으면 그냥 미대 보내 달라고 하겠다.”
“안 된다니까.”
우주의 대답에 재현은 영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방과 후에 남아서 그릴 정도로 그림을 좋아하면서 왜 취미에 그치려고 하는지 재현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가 안 된다, 진짜.”
“이해하지 마세요, 그럼.”
“3학년 때는 어쩌려고? 그때는 야자 강제잖아.”
“그때는 그림 말고 공부에 집중해야지. 아무튼 나 교무실 다녀온다.”
우주는 분주하게 유인물을 챙긴 뒤 교실을 빠져나갔다. 재현은 우주의 뒷모습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재현은 우주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주는 은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차이를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즈음에는 성숙해졌다 말할 수 있는 걸까.
열여덟이란 나이는 다 자란 것처럼 느껴지지만, 어쩔 때는 아주 어린 나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고 생각하는 것에 서투를 수밖에 없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게 가능할까? 우주는 의문했으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열여덟이란 나이는 불완전한 것투성이였다.
♣ ♣ ♣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봄비가 내렸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에 우주는 연필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얇은 빗줄기가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떨어지고 있다. 땅과 나뭇잎을 적시는 빗소리가 잔잔하여 기분이 좋았다.
한 시간만 더 그리다 집에 가야겠다고 다짐하고는 연필을 고쳐 잡았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그림도 더 잘 그려지는 것 같았고, 평소보다 빠르게 시간이 흐르는 듯했다. 작은 그림 한 장을 완성한 뒤 우주는 우산을 가지러 가기 위해 교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아연실색하며 뒤로 자빠질 뻔했다. 불이 꺼진 우중충한 교실 창문 쪽에 까만 무언가가 있었다. 다급히 불을 켜고 보니 이은호였다. 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채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뭐야, 이은호? 너 여기서 뭐 해?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은호는 우주의 말을 무시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평소와 같은 반응인데 왠지 분위기가 더 무거워 보였다.
“왜 그렇게 젖었어? 비 그칠 때까지 기다리려고?”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우주는 사물함에 있던 수건을 꺼내 은호의 머리에 덮어 주었다. 은호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있으면 감기 걸린다. 깨끗한 건 아닌데 그냥 써.”
눈매가 날카로워서 차가운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올려다보는 모습이 꼭 비에 젖은 고양이 같다. 우주가 빤히 바라보니 은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렸다.
“우산 없으면 집 같이 갈래? 나 우산 있어.”
은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떻게 가려고?”
은호는 대답 없이 수건으로 머리를 닦기만 했다.
재현의 말처럼 은호는 정말 혼자 있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비에 젖었는데도 도움의 손길을 거절할 만큼 혼자가 간절한 것은 어떤 기분일까. 아직 그런 기분을 경험한 적이 없는 우주는 은호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알았어, 그럼 나 먼저 갈게.”
우주는 돌아섰다. 교실 문 앞까지 간 건 좋은데, 왠지 마음이 쓰여서 다시 돌아보았다. 은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책상 어딘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우주는 다시 은호에게 성큼 다가섰다. 그리고 책상 위에 노란색 우산을 올려놓았다. 까만 눈동자가 시선을 들어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거 쓰고 가. 나는 경비 아저씨 우산 빌리면 돼. 아, 그리고 학교 9시에 문 닫으니까 그 전에 집에 가.”
“…….”
“내일 보자.”
우주는 빠르게 말을 마치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여전히 창밖에서는 하염없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가 와서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은호에게는 이 비가 반갑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깊이 침잠된 눈으로 책상 언저리를 바라보던 짙은 눈동자가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 ♣ ♣
다음 날 학교에 왔을 때 우주의 책상 위에는 우산이 놓여 있었다. 3단 접이식 우산은 마치 새로 샀을 때처럼 말끔히 접혀 있었다. 조금 강박적으로 보일 정도로. 그 무표정한 얼굴로 우산을 꼼꼼히 접었을 거라 생각하니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그나저나 우산을 쓰긴 한 건지 의문이었다. 썼다면 다행이지만 쓰지 않았다면 조금 화가 날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날 우주는 쫄딱 비를 맞았으니까. 우산은 빌리지 못했고, 사기에는 아까워 그냥 가방을 뒤집어쓰고 하교를 했다. 덕분에 약간 감기 기운이 있었다.
“점심시간 끝나기 전까지 문학 숙제 교탁 앞에 올려놔!”
우주는 교탁 앞에 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감기 기운이 있든 말든 반장은 할 일을 해야 했다. 물미역처럼 늘어져 있던 반 아이들이 우주의 말을 듣고 부랴부랴 노트를 펼쳤다. 우주도 자리에 돌아가 노트를 펼치고 숙제를 시작했다.
“반장아. 피자는 언제 쏠 거야?”
옆자리에서 핸드폰 게임을 하던 재현이 물었다. 우주는 숙제를 하며 차분히 말했다.
“너 피자의 줄임말이 뭔지 알아?”
“피자 영어잖아, 바보야. 핏쨔.”
“아니야. 피 터지게 조쟈 버리겠다의 줄임말이야.”
우주의 살벌한 말에 재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우주는 차갑게 말했다.
“빨리 숙제나 해라.”
“네.”
재현은 노트를 펼쳐 열심히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끝나 갈 무렵에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숙제를 제출했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우주는 출석 번호대로 노트를 정리했다. 그런데 마지막 번호가 없었다. 마지막 출석 번호의 주인은 이은호였다.
우주는 고개를 들어 은호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은호는 자기 자리에 앉아 까만 눈으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주는 다가서서 은호의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은호는 고개를 돌려 우주를 응시했다.
“야, 은호. 숙제 내.”
오늘은 어째선지 눈이 더 날카로웠다. 우주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경계가 느껴졌다.
“안 했냐?”
은호는 물음을 무시하고 다시 몸을 엎드리려 했다. 우주는 그런 은호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일단 내 노트 보고 써.”
우주는 제 노트를 건네주었다. 그러나 은호는 노트를 받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 교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야!”
우주가 소리쳤으나 은호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질풍노도의 시기는 지날 때도 되지 않았나. 우주는 깊이 한숨을 내쉬고 은호의 책상에 앉았다.
문학 선생님은 성격이 좀 이상해서 트집을 잡으면 한 달 내내 학생을 괴롭히곤 한다. 전학 오자마자 찍히게 놔둘 수는 없어 우주는 은호 대신 숙제를 시작했다.
반장은 왜 자진 사퇴를 할 수 없는 걸까. 이게 다 도재현 때문이다. 걔가 나 반장 되게 만들었으니까. 우주는 속으로 불만을 늘어놓으며 손으로는 열심히 숙제를 했다.
“야, 임우주. 그냥 둬. 네가 왜 해 줘?”
은호의 짝꿍인 윤주가 말했다.
“문학 쌤 좀 까다롭잖아.”
“호구 새끼.”
“내가 왜 새끼야.”
“으휴, 착해 빠져 가지고.”
윤주가 우주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아, 하지 마. 나 이거 해야 돼.”
우주가 칭얼거리자 윤주는 웃으며 머리카락을 더 헝클어트렸다. 우주도 같이 대꾸하다가 결국 장난으로 번져서 은호의 숙제는 점심시간 내내 해야만 했다.
숙제를 다 했는데도 은호는 5교시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주는 심란한 얼굴로 은호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은호는 평소에도 날카로워 보이지만 오늘은 유독 심했던 거 같다. 어제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주는 은호를 찾기 위해 쉬는 시간을 틈타 교실을 빠져나왔다. 건물 뒤의 공터와 강당 옆에 가 보았지만 은호는 없었다. 대신 강당에서 열렬히 농구 경기를 하고 있는 고3 언니들만 보였다. 슬램덩크 못지않은 경기를 넋 놓고 구경하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은호를 찾으러 나섰다.
운동장에도 없고, 체육관에도 없고, 쓰레기장에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옥상에 가 보기로 했다. 더운 날씨에 꼭대기까지 가려니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호흡도 가빠졌지만, 우주는 걸음을 재촉했다.
간신히 꼭대기 층에 도달한 우주는 옥상 문을 열어젖혔다. 강한 햇볕이 시야를 가득 메워 눈이 따가웠다. 손차양을 하고 앞을 바라보았다. 날이 맑아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가운데, 옥상 난간 쪽에 서 있는 은호가 보였다.
순간적으로 나쁜 예감이 들었다. 우주는 은호에게 달려가 급히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은호의 몸이 기울어지고, 놀라서 크게 뜨인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바닥에 등이 부딪히리란 생각에 우주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런데 어깨에 팔이 감기며 몸이 회전했다. 쿵― 둔탁한 소리를 내며 은호의 등이 먼저 바닥에 닿았다.
코끝에 닿은 것은 부드러운 천이었고, 거기에서는 낯선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우주는 자신이 은호의 가슴팍에 코를 박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 너 뭐 하는……!”
우주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은호가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던 탓이다. 너야말로 뭐 하는 거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보며 우주는 자신이 바보 같은 착각을 했음을 알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귓바퀴가 화끈거렸다.
“그보다 괜찮아? 안 다쳤어?”
민망해서 말을 돌리고 은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은호는 손을 잡는 대신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흙먼지가 묻은 교복을 털었다. 그러더니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옥상 문으로 나가 버렸다. 멍하니 서 있던 우주는 급히 은호의 뒤를 쫓았다.
“야, 이은호. 너 5교시 수업 왜 빠졌어?”
은호는 대답 없이 빠르게 걷기만 했다.
“야, 같이 좀…….”
얼떨결에 팔을 잡자 은호가 강하게 팔을 쳐 냈다. 우주는 당황했다. 은호도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지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괜한 짓을 한 것 같다. 팔을 쳐 낸 것이 의도였든 아니든, 은호가 우주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재현의 말대로 은호는 그냥 혼자 있고 싶은 것이고, 우주의 관심은 괜한 참견이라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어른스러운 척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얘도 자신처럼 외로운 처지라서 철없는 동질감이라도 느끼길 바랐는지도.
“미안.”
허공에 애매하게 떠 있던 손을 내렸다. 방황하던 시선도 아래로 떨어졌다.
“진짜 미안.”
우주는 곧장 돌아섰다.
♣ ♣ ♣
결국 우주는 감기에 걸렸다. 어제 종일 생각에 잠겨 있느라 약을 사 먹는 것을 잊어버린 탓이다. 아침에 약을 먹고 학교에 왔는데도 좀처럼 열이 내리지 않았다. 우주는 종일 기운 없이 책상에 엎드린 채 하루를 보내야 했다.
“야. 임우주. 오늘도 미술실 갈 거야?”
종례가 끝나자 재현이 물었다.
“아니.”
“그럼 집에 같이 가?”
“아니, 들를 데 있어서…….”
“오늘 왜 이렇게 죽사발이야.”
“…….”
“기운 없으면 그냥 같이 집에 가지. 어디 가는데?”
그래도 친구라고 걱정은 되는 모양이다. 감기에 걸려서 병원을 가야 된다고 얘기하려는 순간, 영훈이 끼어들었다.
“야, 도재현. 우리 피씨방 갈 건데 너 갈 거냐?”
“당연.”
영훈의 물음에 재현은 냅다 사라져 버렸다. 우주는 허망한 눈으로 재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반장이라고 부려 먹을 땐 잘도 부려 먹으면서 이럴 땐 관심도 없다. 도재현 오늘 게임 다 져 버려라. 소심한 저주를 하고는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힘이 하나도 없었다. 조금만 쉬다가 병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내리감았다.
어느 순간 우주는 열이 펄펄 끓는 찜질방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찜질방이었다. 위는 찜통처럼 더운데 아래는 냉골이었다. 끔찍한 찜질방에 있으니 몸이 춥기도 하고 덥기도 했다. 창밖에서는 재현이 혀를 내밀며 우주를 약 올리고 있었다. 저 자식이…….
우주는 스르르 눈을 떴다. 감기에 걸리더니 별 이상한 꿈을 다 꾼다. 무거운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이마에 낯선 촉감이 느껴졌다. 우주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들었다.
이은호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새까만 눈동자가 당황한 듯 흔들렸다. 은호는 우주의 이마에서 손을 내려놓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할 말 있어?”
우주의 물음에도 은호는 대답이 없었다. 우주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은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가자.’
그게 은호가 한 첫말이었다. 입으로 소리를 낸 것도 아닌 그저 입 모양으로 말한 것뿐이지만, 어째선지 우주의 기억에는 인상 깊게 남았다.
은호는 우주의 가방을 들더니 교실에서 나갔고, 우주는 그런 은호의 뒤를 따라갔다.
“너 내 가방 왜 훔쳐 가.”
은호는 돌아서서 우주를 바라보았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미간을 좁히고 있다. 우주는 푸스스 소리 내어 웃었다. 은호는 가벼운 웃음을 짓는 우주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다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