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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은호가 향한 곳은 학교 근처의 병원이었다. 우주는 얼떨결에 의사 선생님에게 진찰을 받고, 약국에서 약도 처방받았다.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주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은호는 우주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런 친절을 베푸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우주가 비타민 음료의 뚜껑을 잘 열지 못하자 제힘으로 열어 주기까지 했다.
“나 아픈 거 어떻게 알았어?”
우주가 물었지만 은호는 무심하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제는 그렇게 매정하게 가더니 신경 쓰였어?”
“…….”
“이런 걸로 내 마음이 풀어질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너 어제 나한테 너무했던 거 알지? 내가 이렇게 생겼지만 여자인데 남자가 막 여자 팔 치고 그러는 거 아니란 말이야. 아무튼 네 미안함은 이번엔 접수하겠다만 다음에는 어림도 없어.”
우주는 쫑알쫑알 장난스럽게 말을 했으나 여전히 은호에게서 어떠한 반응도 얻어 낼 수 없었다.
“그래도 고마워. 나는 네가 나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은호는 고개를 돌려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저었다. 우주는 그 뜻을 파악하려 애썼다.
“엉? 뭐가 아니야?”
“…….”
“너 나 안 싫어해?”
은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우주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는 것 같다.
“근데 넌 어디 살아?”
약국을 나서며 물었다. 그러다 이내 이런 질문도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그만 가 봐. 나는 저기서 버스 타면 돼.”
“…….”
“잘 가. 병원 데리고 와 줘서 고마워.”
손을 흔들고 뒤를 돌았다. 그런데 몇 걸음 걷지 않아 팔이 붙잡혔다. 우주는 의아한 눈으로 은호를 바라보았다.
‘미안했어.’
은호는 입 모양으로 담담히 말을 전했다. 사과를 예상하지 못했던 우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호는 놀란 우주를 두고 돌아섰다.
멍하니 서 있던 우주가 정신을 차리고 은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은호가 살짝 몸을 돌려 우주를 응시했다.
“야, 이은호. 너 내가 말 걸면 싫어?”
까만 눈동자가 우주의 눈 안쪽의 마음을 들여다보듯 물끄러미 응시했다.
은호는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는지 약하게 제 입술을 깨물었다. 조각상처럼 섬세하다고 생각했던 입술이 약간 붉게 물들었다. 말을 하는 행위를 힘겨워하는 걸까. 머릿속에 있는 말을 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은호는 엷게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럼 됐어.”
우주는 환히 미소 지었다. 은호는 그저 우주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잘 가, 내일 보자.”
웃으며 손을 흔드는 얼굴이 비 갠 뒤의 하늘처럼 싱그럽다고, 은호는 생각했다.
♣ ♣ ♣
갑자기 가까워지는 건 역시 부자연스러운 전개였나 보다. 그날 병원에 다녀온 뒤로 우주는 은호에게 더 열심히 말을 걸었지만 은호한테서는 여전히 찬바람이 불었다. 참 한결같이 싹수없는 애라고 생각하면서도 우주는 은호만 발견하면 자동 반사적으로 말을 걸었다.
그래도 이제는 은호가 대놓고 귀찮고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어도 덜 상처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은호의 행동이 고의는 아니며, 나쁜 애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어, 이은호! 집에 같이 갈래?”
하굣길에 은호를 발견한 우주는 평소처럼 반갑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은호는 우주에게 잠시 눈길만 주었을 뿐, 우주가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무심히 걸음을 옮겼다.
“그만해라, 그만.”
뒤에서 나타난 재현이 우주의 가방을 뒤로 잡아끌었다.
“아, 왜.”
“할 만큼 했다.”
재현은 우주의 가방을 놓아주고는 휘적휘적 앞서 걸었다. 우주는 체념하고 재현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짜장 떡볶이 먹고 싶다. 왜 우리 동네에는 짜장 떡볶이 파는 데가 없지?”
길을 걸으며 재현이 투덜거렸다. 우주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짜파게티에 떡 넣어 먹어.”
“그건 짜장 떡볶이가 아니라 짜파게티 떡볶이인걸.”
“그럼 떡볶이에 짜장 스프 넣어 먹어.”
“듣자 듣자 하니 모욕적이네.”
재현이 멈춰 서서 우주를 바라보았다.
“뭐가?”
“난 순수한 짜장 떡볶이가 먹고 싶은 거라고. 더 이상 짜장 떡볶이를 모욕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또 시작이네. 성격 이상한 재현의 말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는 게 상책이지만, 우주는 재현의 이상함을 이해할 수 없어 불만스레 말했다.
“입에 들어가면 다 똑같지. 짜장면 시켜서 떡볶이 찍어 먹어.”
“그만해라.”
“3분 짜장에 떡볶이 말아 먹…….”
“그만하라구!”
재현이 우주의 멱살을 잡고 탈탈 털었다.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키 차이가 나서 우주는 허우적거렸다. 정강이를 걷어차려는데 갑자기 시야에 누군가 들어섰다.
재현의 팔을 힘주어 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이은호였다. 하루 종일 요동 없이 고요하던 얼굴이 아니라 약간 인상을 쓰고 있다. 은호는 우주에게서 재현의 팔을 떼어 내고는 차가운 눈으로 재현을 바라보았다. 까맣고 짙은 눈동자가 서늘했다.
“뭔데?”
갑작스레 팔을 잡힌 재현 역시 짜증스러운 얼굴로 은호를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우주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장난친 거야, 장난! 오해하지 마, 나 얘랑 친해.”
우주가 재현의 가슴팍을 퍽퍽 치며 은호를 향해 말했다. 재현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투덜거렸다.
은호가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재현이 아무런 반응도 취하지 않자 이상한 상황이 아님을 파악했는지 다시 뒤돌아서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우주는 그런 은호의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야, 이은호가 나 도와주려고 그랬나 봐.”
“쟤가 널 왜 도와줘?”
“나 좋아하니까!”
재현의 얼굴이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은 사람마냥 찡그려졌다.
“네가 나르시시스트인 줄은 몰랐는데…….”
“아, 뭐래. 친구로서 좋아한다고. 그리고 몰래카메라 때문에 쟤가 너 나쁜 애인 줄 알잖아.”
재현이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며 굳어 버렸다. 그리고 갑자기 깨달은 듯 탄식했다.
“아, 맞다! 그랬지!”
바보 아니야? 우주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떡하지? 나 그런 애 아닌데.”
그보다 더한 애라고 말해 주려다가 다시 재현과 싸움이 날 것 같아서 참았다.
“말해야지, 아니라고.”
우주의 말에 재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멀리서 사라지는 은호를 향해 다급히 뛰어갔다.
♣ ♣ ♣
재현은 은호와 우정을 쌓아 보겠다면서 우주와 은호를 옆 동네 짜장 떡볶이 가게까지 끌고 왔다. 아마 우정은 핑계이고, 그저 짜장 떡볶이를 먹기 위한 속셈이었을 테다. 도재현은 기분이 좋은지 제가 만든 짜장 떡볶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은호는 옆에서 노래를 부르는 재현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어쩌면 미친놈 잘못 건드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주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어쩌다 도재현이랑 친해져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
“얘 일진 아니야. 몰래카메라 하는 도중에 영어 선생님이 들어오신 거야.”
우주가 은호의 앞에 젓가락을 놓으며 말했다.
“사실 일진보다는 더 이상한 놈이지만…….”
“야. 뒷담은 뒤에서 해라.”
“네가 귀 막으시든지.”
우주가 얄밉게 말하자 재현은 5살 먹은 어린아이처럼 우주를 노려보았다. 그 유치한 시선은 떡볶이가 나온 뒤에야 떨어졌다. 내가 저렇게 생겼으면 절대로 저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우주는 끌끌 혀를 찼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입 안에 떡볶이를 4개씩 밀어 넣는 재현과 달리 은호는 차분히 음식을 먹었다. 곱게 자랐을 것처럼 생겨서 걱정했는데 의외로 잘 먹는다.
“야. 근데 너는 말을 안 하는 거야, 못 하는 거야?”
떡볶이를 먹던 재현이 물었다. 우주는 놀라서 테이블 아래에 있는 재현의 정강이를 냅다 후려 찼다. 재현이 벌떡 일어서며 괴성을 질렀다.
“아!!”
“앗, 미안. 실수였어.”
우주가 태연히 말했다.
“실수 같은 소리 하네!”
“소중한 떡볶이님 식는다. 떡볶이나 먹자.”
재현은 화가 난 듯 씩씩거렸지만 떡볶이가 식을까 걱정됐는지 다시 얌전히 앉아서 떡볶이를 먹었다. 단순해서 다루기는 참 쉽다.
먹는 내내 은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씩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우주는 은호가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다.
떡볶이를 다 먹은 뒤에는 재현에게 이끌려 인형 뽑기까지 하게 되었다. 은호는 죽기 살기로 인형 뽑기를 하는 두 사람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야. 돈 더 없어? 빨리 줘 봐.”
우주가 재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양아치냐.”
“아, 얼른.”
“이제 돈 없어.”
“에이 씨. 돈만 날렸네. 나 집에 갈래. 배고파.”
“떡볶이 먹었잖아.”
“떡볶이는 간식이지.”
우주의 태연한 말에 재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은호 너 어디 살아? 도재현은 여기서 가깝고 나는 흑목동 사는데……. 야! 같이 가!”
은호는 우주의 말을 듣지 않고 돌아서서 걸었다. 저 싸가지. 우주는 눈썹을 찡그리고 은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가는 방향이 같기 때문에 우주와 재현은 은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은호는 그러든지 말든지 그저 말없이 걷기만 했다.
집이 더 가까운 재현과 먼저 헤어지고, 은호와 우주는 나란히 길을 걷게 되었다. 우주는 아까 불만스러웠던 것도 잊고 열심히 쫑알쫑알 말을 걸었다.
“도재현 진짜 웃기지 않아? 내 인생에서 제일 이상한 놈 같아. 어릴 때부터 친했는데 걘 그때부터 좀 이상했어. 그래도 예전엔 귀엽기라도 했지.”
“…….”
“내가 반장 된 것도 다 쟤 때문이야. 쟤가 나를 합법적으로 부려 먹으려고 반장으로 뽑았대.”
사람들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이 말을 하지 않으면 어려워하지만, 우주는 천성이 말이 많은 성격이었다. 은호에게 말을 하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어, 난 이 길로 가야 돼.”
열심히 말을 잇던 우주는 걸음을 멈추었다. 은호도 멈춰 서서 우주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감정한 눈이다. 거울처럼 반질반질한 눈동자로 우주를 응시하던 은호는 아무런 대꾸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인사라도 좀 해 주지. 우주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은호를 바라보다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내일은 인사해 주겠지, 뭐.
묵묵히 걷기만 하던 은호는 멈춰 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 우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팔랑팔랑 걷는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색이 밝은 우주의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어떻게 저 애는 뒷모습마저 밝아 보이는 걸까.
은호는 우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돌아섰다. 하늘에서는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희뿌연 하늘색과 황색이 뒤섞이기 시작한 하늘은 오묘한 빛을 띠었다. 마지막 빛을 다하며 여무는 노을이 오늘따라 유독 쓸쓸했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우주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 ♣
“이번 달부터 진로 상담해야 하니까, 장래 희망이랑 지망 대학 써서 제출해라.”
오늘도 피곤한 얼굴의 담임 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다. 유인물을 받아 든 우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2인데 벌써 지망 대학을 생각해야 하는 걸까.
“야, 도재현. 넌 나중에 뭐 되고 싶어?”
우주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재현에게 물었다. 재현은 핸드폰으로 열심히 붕어빵 굽는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붕어빵 게임.”
뭐 하냐고 물어본 거 아닌데……. 우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단한 붕어빵 되시겠네.”
“조용히 해. 한 판도 안 태우고 있다고 지금.”
물어본 내 잘못이지. 우주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한참 동안 열심히 게임을 하던 재현이 갑자기 욕을 하며 핸드폰을 내려놓더니 의자 위로 축 늘어졌다. 염색이 빠진 짙은 갈색 머리가 뒤에 있는 책상 위로 흐트러졌다. 뒷자리인 소연이 재현의 머리를 밀어 냈다.
“나 이제 붕어빵 안 먹어.”
“잘도 안 먹겠다.”
“진짜야. 앞으로 풀빵만 먹을 거야.”
“그러든지 말든지…….”
우주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재현은 다른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근데 너 아까 뭐라고 했냐?”
“뭐 되고 싶냐고. 담임 선생님이 오늘까지 장래 희망이랑 지망 대학 적어서 제출하래.”
“아. 난 뭐 하고 있냐고 물어본 줄 알았네.”
“그냥 붕어빵이나 돼라.”
“붕어빵으로 사는 기분은 어떨까.”
“뜨끈뜨끈하겠지.”
“난 아이스 붕어빵 할 건데?”
원래 고등학생은 반쯤 미쳐 있는 게 정상이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기분이 오락가락하고, 대화의 절반이 헛소리를 차지한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주는 재현의 종이를 가져다 장래 희망 칸에 ‘아이스 붕어빵’이라고 글씨를 적었다. 선생님한테 혼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는 너는 뭐 되고 싶은데?”
핸드폰 게임을 하며 재현이 물었다.
“글쎄. 돈 많은 백수?”
“그건 모두의 꿈 아니냐. 그거 말고 넌 화가 해야지.”
“내가 몇 번이나 말했냐. 우리 엄마 등골 휜다고.”
“화가 하다가 더 좋은 기회가 와서 많이 벌 수도 있는 거잖아.”
넌 부자로 태어나서 좋겠다, 인마. 우주는 떠오르는 말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더 많이 벌 자신이 없으니까 그렇지.”
“그래도 넌 그림 그릴 때 제일 행복해하는 거 같은데. 잘 그리기도 하고.”
우주는 놀란 눈으로 재현을 바라보았다. 조금 감동받을 뻔했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선 재현이 갑자기 핸드폰을 쓰레기통에 던져 골인 시켰다.
“안 해!!!”
그리고 포효하듯 소리를 지른다. 감동이 파사삭 사그라졌다. 화가 난 듯 씩씩거리던 재현은 다시 쓰레기통 앞으로 가더니 주섬주섬 핸드폰을 주웠다. 그리고 핸드폰에 묻은 먼지를 조심스레 툭툭 털어 냈다.
“너는 붕어빵 말고는 뭐 할 건데?”
우주가 물었다.
“몰라. 이왕이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사람 됐으면 좋겠다.”
“대통령?”
“대통령 좋네.”
“너무 무리한 꿈 아니야?”
“꿈은 크게 가지라고 있는 거지.”
그런가. 꿈을 크게 가진다는 상상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상황이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우주는 조금 울적해졌다.
은호가 향한 곳은 학교 근처의 병원이었다. 우주는 얼떨결에 의사 선생님에게 진찰을 받고, 약국에서 약도 처방받았다.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주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은호는 우주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런 친절을 베푸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우주가 비타민 음료의 뚜껑을 잘 열지 못하자 제힘으로 열어 주기까지 했다.
“나 아픈 거 어떻게 알았어?”
우주가 물었지만 은호는 무심하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제는 그렇게 매정하게 가더니 신경 쓰였어?”
“…….”
“이런 걸로 내 마음이 풀어질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너 어제 나한테 너무했던 거 알지? 내가 이렇게 생겼지만 여자인데 남자가 막 여자 팔 치고 그러는 거 아니란 말이야. 아무튼 네 미안함은 이번엔 접수하겠다만 다음에는 어림도 없어.”
우주는 쫑알쫑알 장난스럽게 말을 했으나 여전히 은호에게서 어떠한 반응도 얻어 낼 수 없었다.
“그래도 고마워. 나는 네가 나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은호는 고개를 돌려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저었다. 우주는 그 뜻을 파악하려 애썼다.
“엉? 뭐가 아니야?”
“…….”
“너 나 안 싫어해?”
은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우주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는 것 같다.
“근데 넌 어디 살아?”
약국을 나서며 물었다. 그러다 이내 이런 질문도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그만 가 봐. 나는 저기서 버스 타면 돼.”
“…….”
“잘 가. 병원 데리고 와 줘서 고마워.”
손을 흔들고 뒤를 돌았다. 그런데 몇 걸음 걷지 않아 팔이 붙잡혔다. 우주는 의아한 눈으로 은호를 바라보았다.
‘미안했어.’
은호는 입 모양으로 담담히 말을 전했다. 사과를 예상하지 못했던 우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호는 놀란 우주를 두고 돌아섰다.
멍하니 서 있던 우주가 정신을 차리고 은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은호가 살짝 몸을 돌려 우주를 응시했다.
“야, 이은호. 너 내가 말 걸면 싫어?”
까만 눈동자가 우주의 눈 안쪽의 마음을 들여다보듯 물끄러미 응시했다.
은호는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는지 약하게 제 입술을 깨물었다. 조각상처럼 섬세하다고 생각했던 입술이 약간 붉게 물들었다. 말을 하는 행위를 힘겨워하는 걸까. 머릿속에 있는 말을 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은호는 엷게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럼 됐어.”
우주는 환히 미소 지었다. 은호는 그저 우주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잘 가, 내일 보자.”
웃으며 손을 흔드는 얼굴이 비 갠 뒤의 하늘처럼 싱그럽다고, 은호는 생각했다.
♣ ♣ ♣
갑자기 가까워지는 건 역시 부자연스러운 전개였나 보다. 그날 병원에 다녀온 뒤로 우주는 은호에게 더 열심히 말을 걸었지만 은호한테서는 여전히 찬바람이 불었다. 참 한결같이 싹수없는 애라고 생각하면서도 우주는 은호만 발견하면 자동 반사적으로 말을 걸었다.
그래도 이제는 은호가 대놓고 귀찮고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어도 덜 상처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은호의 행동이 고의는 아니며, 나쁜 애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어, 이은호! 집에 같이 갈래?”
하굣길에 은호를 발견한 우주는 평소처럼 반갑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은호는 우주에게 잠시 눈길만 주었을 뿐, 우주가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무심히 걸음을 옮겼다.
“그만해라, 그만.”
뒤에서 나타난 재현이 우주의 가방을 뒤로 잡아끌었다.
“아, 왜.”
“할 만큼 했다.”
재현은 우주의 가방을 놓아주고는 휘적휘적 앞서 걸었다. 우주는 체념하고 재현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짜장 떡볶이 먹고 싶다. 왜 우리 동네에는 짜장 떡볶이 파는 데가 없지?”
길을 걸으며 재현이 투덜거렸다. 우주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짜파게티에 떡 넣어 먹어.”
“그건 짜장 떡볶이가 아니라 짜파게티 떡볶이인걸.”
“그럼 떡볶이에 짜장 스프 넣어 먹어.”
“듣자 듣자 하니 모욕적이네.”
재현이 멈춰 서서 우주를 바라보았다.
“뭐가?”
“난 순수한 짜장 떡볶이가 먹고 싶은 거라고. 더 이상 짜장 떡볶이를 모욕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또 시작이네. 성격 이상한 재현의 말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는 게 상책이지만, 우주는 재현의 이상함을 이해할 수 없어 불만스레 말했다.
“입에 들어가면 다 똑같지. 짜장면 시켜서 떡볶이 찍어 먹어.”
“그만해라.”
“3분 짜장에 떡볶이 말아 먹…….”
“그만하라구!”
재현이 우주의 멱살을 잡고 탈탈 털었다.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키 차이가 나서 우주는 허우적거렸다. 정강이를 걷어차려는데 갑자기 시야에 누군가 들어섰다.
재현의 팔을 힘주어 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이은호였다. 하루 종일 요동 없이 고요하던 얼굴이 아니라 약간 인상을 쓰고 있다. 은호는 우주에게서 재현의 팔을 떼어 내고는 차가운 눈으로 재현을 바라보았다. 까맣고 짙은 눈동자가 서늘했다.
“뭔데?”
갑작스레 팔을 잡힌 재현 역시 짜증스러운 얼굴로 은호를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우주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장난친 거야, 장난! 오해하지 마, 나 얘랑 친해.”
우주가 재현의 가슴팍을 퍽퍽 치며 은호를 향해 말했다. 재현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투덜거렸다.
은호가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재현이 아무런 반응도 취하지 않자 이상한 상황이 아님을 파악했는지 다시 뒤돌아서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우주는 그런 은호의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야, 이은호가 나 도와주려고 그랬나 봐.”
“쟤가 널 왜 도와줘?”
“나 좋아하니까!”
재현의 얼굴이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은 사람마냥 찡그려졌다.
“네가 나르시시스트인 줄은 몰랐는데…….”
“아, 뭐래. 친구로서 좋아한다고. 그리고 몰래카메라 때문에 쟤가 너 나쁜 애인 줄 알잖아.”
재현이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며 굳어 버렸다. 그리고 갑자기 깨달은 듯 탄식했다.
“아, 맞다! 그랬지!”
바보 아니야? 우주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떡하지? 나 그런 애 아닌데.”
그보다 더한 애라고 말해 주려다가 다시 재현과 싸움이 날 것 같아서 참았다.
“말해야지, 아니라고.”
우주의 말에 재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멀리서 사라지는 은호를 향해 다급히 뛰어갔다.
♣ ♣ ♣
재현은 은호와 우정을 쌓아 보겠다면서 우주와 은호를 옆 동네 짜장 떡볶이 가게까지 끌고 왔다. 아마 우정은 핑계이고, 그저 짜장 떡볶이를 먹기 위한 속셈이었을 테다. 도재현은 기분이 좋은지 제가 만든 짜장 떡볶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은호는 옆에서 노래를 부르는 재현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어쩌면 미친놈 잘못 건드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주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어쩌다 도재현이랑 친해져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
“얘 일진 아니야. 몰래카메라 하는 도중에 영어 선생님이 들어오신 거야.”
우주가 은호의 앞에 젓가락을 놓으며 말했다.
“사실 일진보다는 더 이상한 놈이지만…….”
“야. 뒷담은 뒤에서 해라.”
“네가 귀 막으시든지.”
우주가 얄밉게 말하자 재현은 5살 먹은 어린아이처럼 우주를 노려보았다. 그 유치한 시선은 떡볶이가 나온 뒤에야 떨어졌다. 내가 저렇게 생겼으면 절대로 저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우주는 끌끌 혀를 찼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입 안에 떡볶이를 4개씩 밀어 넣는 재현과 달리 은호는 차분히 음식을 먹었다. 곱게 자랐을 것처럼 생겨서 걱정했는데 의외로 잘 먹는다.
“야. 근데 너는 말을 안 하는 거야, 못 하는 거야?”
떡볶이를 먹던 재현이 물었다. 우주는 놀라서 테이블 아래에 있는 재현의 정강이를 냅다 후려 찼다. 재현이 벌떡 일어서며 괴성을 질렀다.
“아!!”
“앗, 미안. 실수였어.”
우주가 태연히 말했다.
“실수 같은 소리 하네!”
“소중한 떡볶이님 식는다. 떡볶이나 먹자.”
재현은 화가 난 듯 씩씩거렸지만 떡볶이가 식을까 걱정됐는지 다시 얌전히 앉아서 떡볶이를 먹었다. 단순해서 다루기는 참 쉽다.
먹는 내내 은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씩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우주는 은호가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다.
떡볶이를 다 먹은 뒤에는 재현에게 이끌려 인형 뽑기까지 하게 되었다. 은호는 죽기 살기로 인형 뽑기를 하는 두 사람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야. 돈 더 없어? 빨리 줘 봐.”
우주가 재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양아치냐.”
“아, 얼른.”
“이제 돈 없어.”
“에이 씨. 돈만 날렸네. 나 집에 갈래. 배고파.”
“떡볶이 먹었잖아.”
“떡볶이는 간식이지.”
우주의 태연한 말에 재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은호 너 어디 살아? 도재현은 여기서 가깝고 나는 흑목동 사는데……. 야! 같이 가!”
은호는 우주의 말을 듣지 않고 돌아서서 걸었다. 저 싸가지. 우주는 눈썹을 찡그리고 은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가는 방향이 같기 때문에 우주와 재현은 은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은호는 그러든지 말든지 그저 말없이 걷기만 했다.
집이 더 가까운 재현과 먼저 헤어지고, 은호와 우주는 나란히 길을 걷게 되었다. 우주는 아까 불만스러웠던 것도 잊고 열심히 쫑알쫑알 말을 걸었다.
“도재현 진짜 웃기지 않아? 내 인생에서 제일 이상한 놈 같아. 어릴 때부터 친했는데 걘 그때부터 좀 이상했어. 그래도 예전엔 귀엽기라도 했지.”
“…….”
“내가 반장 된 것도 다 쟤 때문이야. 쟤가 나를 합법적으로 부려 먹으려고 반장으로 뽑았대.”
사람들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이 말을 하지 않으면 어려워하지만, 우주는 천성이 말이 많은 성격이었다. 은호에게 말을 하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어, 난 이 길로 가야 돼.”
열심히 말을 잇던 우주는 걸음을 멈추었다. 은호도 멈춰 서서 우주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감정한 눈이다. 거울처럼 반질반질한 눈동자로 우주를 응시하던 은호는 아무런 대꾸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인사라도 좀 해 주지. 우주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은호를 바라보다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내일은 인사해 주겠지, 뭐.
묵묵히 걷기만 하던 은호는 멈춰 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 우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팔랑팔랑 걷는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색이 밝은 우주의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어떻게 저 애는 뒷모습마저 밝아 보이는 걸까.
은호는 우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돌아섰다. 하늘에서는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희뿌연 하늘색과 황색이 뒤섞이기 시작한 하늘은 오묘한 빛을 띠었다. 마지막 빛을 다하며 여무는 노을이 오늘따라 유독 쓸쓸했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우주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 ♣
“이번 달부터 진로 상담해야 하니까, 장래 희망이랑 지망 대학 써서 제출해라.”
오늘도 피곤한 얼굴의 담임 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다. 유인물을 받아 든 우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2인데 벌써 지망 대학을 생각해야 하는 걸까.
“야, 도재현. 넌 나중에 뭐 되고 싶어?”
우주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재현에게 물었다. 재현은 핸드폰으로 열심히 붕어빵 굽는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붕어빵 게임.”
뭐 하냐고 물어본 거 아닌데……. 우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단한 붕어빵 되시겠네.”
“조용히 해. 한 판도 안 태우고 있다고 지금.”
물어본 내 잘못이지. 우주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한참 동안 열심히 게임을 하던 재현이 갑자기 욕을 하며 핸드폰을 내려놓더니 의자 위로 축 늘어졌다. 염색이 빠진 짙은 갈색 머리가 뒤에 있는 책상 위로 흐트러졌다. 뒷자리인 소연이 재현의 머리를 밀어 냈다.
“나 이제 붕어빵 안 먹어.”
“잘도 안 먹겠다.”
“진짜야. 앞으로 풀빵만 먹을 거야.”
“그러든지 말든지…….”
우주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재현은 다른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근데 너 아까 뭐라고 했냐?”
“뭐 되고 싶냐고. 담임 선생님이 오늘까지 장래 희망이랑 지망 대학 적어서 제출하래.”
“아. 난 뭐 하고 있냐고 물어본 줄 알았네.”
“그냥 붕어빵이나 돼라.”
“붕어빵으로 사는 기분은 어떨까.”
“뜨끈뜨끈하겠지.”
“난 아이스 붕어빵 할 건데?”
원래 고등학생은 반쯤 미쳐 있는 게 정상이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기분이 오락가락하고, 대화의 절반이 헛소리를 차지한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주는 재현의 종이를 가져다 장래 희망 칸에 ‘아이스 붕어빵’이라고 글씨를 적었다. 선생님한테 혼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는 너는 뭐 되고 싶은데?”
핸드폰 게임을 하며 재현이 물었다.
“글쎄. 돈 많은 백수?”
“그건 모두의 꿈 아니냐. 그거 말고 넌 화가 해야지.”
“내가 몇 번이나 말했냐. 우리 엄마 등골 휜다고.”
“화가 하다가 더 좋은 기회가 와서 많이 벌 수도 있는 거잖아.”
넌 부자로 태어나서 좋겠다, 인마. 우주는 떠오르는 말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더 많이 벌 자신이 없으니까 그렇지.”
“그래도 넌 그림 그릴 때 제일 행복해하는 거 같은데. 잘 그리기도 하고.”
우주는 놀란 눈으로 재현을 바라보았다. 조금 감동받을 뻔했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선 재현이 갑자기 핸드폰을 쓰레기통에 던져 골인 시켰다.
“안 해!!!”
그리고 포효하듯 소리를 지른다. 감동이 파사삭 사그라졌다. 화가 난 듯 씩씩거리던 재현은 다시 쓰레기통 앞으로 가더니 주섬주섬 핸드폰을 주웠다. 그리고 핸드폰에 묻은 먼지를 조심스레 툭툭 털어 냈다.
“너는 붕어빵 말고는 뭐 할 건데?”
우주가 물었다.
“몰라. 이왕이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사람 됐으면 좋겠다.”
“대통령?”
“대통령 좋네.”
“너무 무리한 꿈 아니야?”
“꿈은 크게 가지라고 있는 거지.”
그런가. 꿈을 크게 가진다는 상상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상황이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우주는 조금 울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