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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타 너의 스타 1화
‘우와아아! 이재훈! 진규현! 성현재! 박승원! 영원히 사랑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조명이 화려한 무대 하나만을 비추고 있었다. 그 안을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들의 눈이 혹여 한 동작, 한마디라도 놓치진 않을까 잔뜩 긴장된 채 무대를 향해 있었다.
무대 위엔 이미 한차례 공연이 끝나고 난 후인지 땀에 흠뻑 젖어 있는 나와 그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중 숨을 헐떡이면서도 기분 좋게 미소까지 머금고 있는 내 모습은 마치 모든 걸 다 가진 사람 같이 행복해 보였다.
그 순간 옆에서 손이 하나 뻗어 왔다. 그의 다정한 어깨동무에 순간 흠칫하고 몸이 한번 떨렸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라,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무대에 서 있는 다른 멤버들만 빼면 말이다.
그것도 잠시, 팬들의 함성에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나는 다시 활짝 웃기 시작했다. 바보처럼. 지금 내 자신에게 몸이 닿을 수 있다면, 이것이 현실이라면 당장 무대로 뛰어가 저 멍청한 면상을 주먹으로 한 대 때려 주고 싶다. 넌 뭐가 그렇게 즐겁냐고 한껏 외쳐 주고 싶었다.
물론 그 이후엔 경호원들에게 비참하게 끌려 나가 경찰서나 가겠지. 분명 그날 저녁 뉴스와 기사는 온통 내 이야기뿐일 것이다. ‘최정상 아이돌 베스트 포 콘서트에 난입한 미친 X’이라고 말이다. 물론, 내가 그 멤버지만. 어이없는 망상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울컥하는 마음에 두 주먹을 꾹 쥔 채 꿈인지 알지만, 바뀌지 않을 것이란 것도 알지만 오늘도 크게 외쳤다.
‘그만!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어! 제발, 그만해!’
들릴 리 없는 내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흩어져 갔다. 저기 서 있는 난 여전히 웃고 있는데, 병신같이……. 그때 갑자기 비명과도 같은 한 여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공연장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박승원, 영원히 사랑할 거야! 사랑해!’
저 때 난 무슨 기분이었지? 아, 그저 행복했던 것 같다. 순진하게 저 말을 믿었다. 내 편이 생긴 것 같은 기쁨에 가슴이 찡하고 울렸던 것 같다. 내 편 같은 건 세상에 없는데.
행복했던 그때를 보고 있던 지금,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톡 떨어졌다. 아직도 흐를 눈물이 남아 있구나. 실소를 지으며 덤덤하게 생각했다.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번쩍 눈을 떴다.
아, 또 그 꿈이네……. 아침부터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한두 번 꾸는 악몽도 아니었고 이 무기력함 역시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개운하지 않은 몸에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하품을 한번 했다. 아직도 꿈속의 함성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느낌이었다.
어제 늦게까지 책을 읽다 세 시간밖에 자지 못해서인지 몸이 무거웠다. 이럴 때에 그 꿈이라니. 미간을 찌푸리며 옆에 있는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게 진짜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아, 진짜 가기 싫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귀찮은 마음을 다잡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 짧은 시간에도 잠이 부족한 몸이 좀 더 자게 해 달라며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시끄럽게 울리고 있는 핸드폰 알람을 손으로 밀어 꺼 버렸다. 몸을 쭉 늘리며 욕실로 천천히 들어섰다. 세면대 위 거울을 멍하니 바라봤다. 참, 꼴이 말이 아니네. 항상 이렇다. 항상 그 꿈을 꾸고 나면 무의식중에 눈물을 흘려서, 다음 날 일어나면 눈이 퉁퉁 부어 있곤 했다.
“괴물이 따로 없네. 정말.”
아직까지 남아 있는 꿈의 잔재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차가운 물을 손으로 받아 여러 번 얼굴을 적셨다. 아직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차가운 물로 적신 얼굴이 조금 얼얼해졌다. 그래도 덕분에 퉁퉁 부운 눈이 조금 원래대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흐렸던 시야가 뚜렷해지고 이제야 완전히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젖은 얼굴을 훔치며 고개를 드니 거울 속에 내 모습이 비쳤다.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물에 젖은 손으로 한번 쓸어 넘겼다. 도톰한 애교살 덕분에 남자답게 생긴 것과 거리가 먼 얼굴은 나이보다 어리게 보였다.
연습생 때는 이렇게 거울 보면서 표정 연습하곤 했는데, 그때를 생각하니 참 쓸데없는 행동으로 시간을 낭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거울 속에는 공허한 눈빛을 띠고 있는 나만 존재하고 있었다.
대충 씻고 나와 시계를 보니 벌써 7시 반이다. 늦장 부리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 버렸다. 학교에 가려면 시간이 조금 빠듯했다. 오늘도 아침은 패스해야 할 생각으로 현관문으로 걸음을 옮기다, 살짝 아쉬운 마음에 냉장고 문을 열었다. 생수 한 병만 드르륵하고 구를 뿐이었다. 작은 한숨이 새어 나갔다.
나는 빠듯하게 학교에 도착하는 걸 좋아한다. 조금이라도 학교에서 수업 외 시간을 만들지 않고 싶어서이다. 쉬는 시간마다 느껴지는 그들의 냉담하고 비웃음 가득한 눈초리는 애써 신경 쓰지 말자고 다짐해도 외면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학교의 동양인은 나 하나이다. 몇몇 동양인이 있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결코 오래 버티진 못했다고 한다.
내가 전학 왔을 때도 언제까지 버티는지 내기하는 무리가 있었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들은 내가 일주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한 모양이지만 결국 내기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이미 내가 이 학교에 온 지 8개월이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기에서 진 것이 억울한지 더욱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라커에서 교과서를 꺼내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역시 나에게 쏟아지는 달갑지 않은 시선들을 느끼며 자리로 걸어갔다. 곁눈질로 그들을 힐끗 바라봤다. 평소와 같이 수군거리며 웃고 있었지만 뭔가 달랐다. 뭔가 조금 더 들떠 있는 것 같아 보인 달까.
신경 쓰지 말자 생각하며 조금 더 빠르게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내 책상을 본 순간 그들이 저토록 들떠 있는 이유를 바로 알게 되었다. 아마도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하는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이 정도로 유치한 장난을 한 적은 없었는데. 나는 내 책상을 보고 할 말을 잃어야 했다.
무표정으로 책상을 보고 있던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제일 신난 표정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프레드가 얼굴을 젖히며 배를 잡고 즐거운 듯 웃었다.
“*칭크(중국인을 나타내는 영어의 모멸어이다. 처음에는 주로 미국의 백인이 중국계 이민자를 부르는 데 사용했다. 한국에서의 짱깨와 유사한 뜻을 가지고 있다.의 찡그린 표정 좀 봐. 어때? 내 선물 마음에 들어?”
역시 프레드였구나. 어쩐지 내 얼굴을 확인하곤 더 즐거워하는 것 같아 표정을 풀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소리에 프레드가 나를 조롱하듯 더 큰 목소리로 숨이 넘어갈 듯 오버해서 웃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무척이나 뿌듯한지 옆에 앉아 있는 셀리에게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프레드도 다른 애들과 같이 멸시하는 눈빛만을 나에게 내비쳤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날이 갈수록 그의 행동은 대담하고 과격해졌다. 아무 반응도 안 하면 질려서라도 그만할 줄 알았건만, 오히려 나를 놀릴 구실을 찾는 듯 내 주변을 맴도는 날이 갈수록 잦아졌다. 나는 책상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아 테이프를 떼기 시작했다.
띵디디딩.
수업종이 울렸다. 아직 풀지 못한 테이프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귀도 좋은 프레드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적당히 좀 감아 놓지. 서둘러 끝내고 싶은 마음에 빠른 손놀림으로 테이프를 떼고 있을 때였다. 그때 클래스 문이 열리고 선생님이 안으로 들어왔다.
쭈그려 앉아 테이프를 떼고 있는 나의 모습은 누가 봐도 문제가 있는 장면이었지만 선생님은 힐끗 한 번 쳐다보곤 얼굴을 찡그릴 뿐 딱히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저 찡그린 표정도 내가 괴롭힘을 당해서가 아니라 그저 테이프를 뜯는 소리가 시끄러워서인 건 이미 나도 알기에 눈치를 보며 살살 테이프를 뜯었다.
수업이 시작하자 책을 편 학생들은 칠판을 보다가도 힐끗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라도 열받은 혹은 충격을 받은 내가 울며 뛰쳐나가진 않을까 잔뜩 기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나는 묵묵히 책상을 깨끗이 하는 일에만 신경 썼다. 어차피 화를 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난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또 이곳에 있어야 했다. 여긴 벼랑 끝에 몰린 내가 선택한 최후의 도피처니까. 그들이 나를 경멸하고 놀리는 일 따윈 솔직히 별로 큰 상처가 되진 않는다. 이미 당한 일이라 무뎌져 버린 것일까.
센트레일즈 스쿨은 오래 전부터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부유층들이 다니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그래서 이곳 학생들이 자존심 강하고 또 커다란 긍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부자일지라도 동양인이라면 여기서 생활하기가 힘들었다. 센트레일즈 스쿨이 동양인에겐 기피 1순위인 학교인 건 그래서였다.
심하면 얼마나 심하겠냐며 이 학교에 입학한 동양인은 크게는 정신병을 앓고, 작게는 자존심이 바닥이 되어 센트레일즈를 떠났다고 한다. 우연히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바로 이 학교를 다니기로 결심했다. 동양인이 기피하는 학교라 하면 즉, 동양인이 없는 학교란 말이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그때의 나는 어떤 동양인과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알아볼까 봐, 혹은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차라리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를 당하는 게 어찌 보면 낫다고 생각한다. 이유 없는 경멸은 이미 깊게 파인 상처를 더 깊게 후벼 팔 순 없으니 말이다.
내 편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여기서도, 다른 곳에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딱히 내편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받은 만큼 또 믿은 만큼 결국에는 악이 되어 나에게 상처로 돌아온다. 그런 일이 또 반복될까 두렵다. 그런 일이 한 번 더 생긴다면 꼭 잡아 둔 정신을 이제는 정말 놓치고 말 테니까.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내가 보고 들은 것만 믿고 지금처럼 혼자 살아가면 더 이상 상처받을 일도 생기지 않을 거다.
지겨운 수업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수업시간 내내 테이프를 흔들며 나는 놀려 대던 프레드에게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식당 입구에 찍을 카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당장 식당에 갈 생각은 없었다. 집요하다시피 날 좇는 시선들을 어느 정도 피하기 위해선 최대한 늦게 배식을 받아야 했다. 예전이었으면 이런 건 신경도 안 썼을 텐데. 내가 누군가의 시선을 이렇게 피해 다닐 줄이야.
한국에서는 나를 향한 타인의 시선이 당연했다. 데뷔하기 전부터 연습생이란 신분 덕분에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내 주변에 몰렸었고 지금처럼 그런 관심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아마 그때 친구들이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비웃음을 한껏 날리며 즐거워할 것이다.
멍하니 옛날 생각을 하며 클래스을 나서는데 들어오던 이와 부딪쳤다. 얼얼한 코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어올리자 이번 주엔 처음 보는 것 같은 레이먼드가 서 있었다.
학교에 잘 나오지도 않고 근처에서 그와 말해 본 적도 없었기에 남들이 다 감탄해 마지않는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눈부시게 밝고 매끄러운 금발에 넋을 놓고 있자 레이먼드가 그 잘생긴 얼굴을 찌푸리고 나를 내려다봤다.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아, 미안.”
갑작스러운 상황에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 평범하게 사과를 했다.
“됐어. 비켜.”
레이먼드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어깨를 으쓱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곤 레이먼드가 클래스 안으로 들어간 걸 확인하자마자 복도로 나왔다. 뭐 원래 티비에도 자주 나오고 가끔 지나가다 봤지만, 가까이서 본 그는 내 생각보다 더 잘생긴 것 같다. 나도 작은 편은 아닌데 올려다봐야 할 정도고, 심지어 몸까지 좋다. 왜 여자들이 레이먼드에게 환장하는지 알 것 같았다.
레이먼드는 학교에서 나를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보지 않는 몇 없는 학생 중 한 명이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다는 게 정답이겠지. 무관심에 하대하는 듯한 말투는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동일했다.
센트레일즈 학생들은 빼어난 외모와 최고위층 집안을 가진 레이먼드와 친해지기 위해 항상 노력했다. 하지만 레이먼드는 늘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짜증스럽게 보곤 했다. 덕분에 직접적으로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집안을 빼놓고 보더라도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할리우드 아역 배우 출신으로 지금도 최고의 주가를 달리는 배우였고, 최근엔 잘 큰 스타 1위와 살면서 한 번쯤 만나 보고 싶은 남자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 인기가 실로 대단해 한국에서도 레이먼드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를 보면 정말 하늘은 불공평하단 생각이 절로 났다. 어떻게 한 사람에게 모든 걸 저렇게 완벽하게 줄 수 있는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걸으니 금방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 입구에서부터 벌써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배를 한번 쓸며 출입문에 카드를 찍자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더욱 짙어진 음식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오늘도 역시나 울타리 속 동물이라도 된 듯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나를 힐끗 돌아봤다. 애써 수군거리는 소리를 무시하며 음식 모형이 있는 쇼 케이스를 쳐다봤다. 1번은 양식 코스 요리였고, 2번은 일식 코스 요리였다. 둘 다 맛있어 보이는데. 한참 동안 고민을 하다 디저트가 더 끌리는 1번 세트 쪽으로 걸어갔다. 오늘같이 스트레스받는 날은 달달한 디저트가 중요하지.
서둘러 요리를 받고 제일 구석 자리에 앉았다. 일부러 이쪽으로 오지 않는 한 사람들의 시선을 그나마 피할 수 있는 자리였다. 막 스테이크를 썰어 입으로 가져가려는 때였다. 언제 왔는지 프레드가 친구인 조지와 메이슨과 함께 내 앞으로 다가왔다. 밥 먹을 때까지 놀림을 당해야 하나. 나오려는 한숨을 참으며 프레드를 올려다봤다.
“무슨 일이야?”
놀릴 구실을 찾는지 나를 위아래로 훑어 보던 프레드의 눈이 스테이크에서 멈췄다. 그가 비웃음이 담긴 얼굴로 빈정거렸다.
“칭크, 지금 서양인인 척하는 거야? 먹고 싶은 걸 못 먹는 건 정말 슬픈 일이야.”
서양인인 척? 그의 알 수 없는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들고 있던 포크를 그릇에 내렸다.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네가 서양인인 척하느라 고국 음식도 앞에 두고 못 먹고 있잖아?”
“고국 음식?”
“저기 일식 세트. 전부 네 고국 음식이잖아.”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게 재밌는지 그의 미소가 조금 더 진해졌다. 아차, 표정 관리해야지. 나는 찡그렸던 표정을 재빨리 풀었다.
“저기, 나 일본인 아닌데. 한국인이야.”
내 말에 프레드는 얄미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꽤나 큰 키에 남자다운 얼굴을 갖고 있는 그였지만, 표정만큼은 어찌 저리 야비한지 모르겠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아시아는 다 같은 아시아 아닌가? 칭크.”
자신도 억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그냥 그는 내 짜증 섞인 표정이 보고 싶을 뿐인 것 같았다. 문득 왜 이 말도 안 되는 말에 대답을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올려다보던 눈을 그릇으로 돌렸다. 내가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자 그가 무언가를 따지려는 듯, 한 발자국 다가왔을 때였다.
“그건 아니지. 아시아는 모든 고국 음식이 다 같다니, 무슨 논리야. 너무 무식한 발언 아닌가?”
갑자기 들려오는 음성에 뒤를 돌아보았다. 갈색 머리의 호감형인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듬직한 덩치를 가진 그는 키도 꽤나 커 보였다. 185센티미터 정도는 되어 보였다. 내 앞에 서 있는 프레드와 키가 비슷해 보이니까. 남자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프레드가 조금 빨개진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너 뭐야! 왜 말하는데 끼어들어. 무식하다니! 나한테 한 소리야?”
“자신의 무식함을 모르는 이를 보고 무식하다고 하는 거야.”
남자도 기분이 상했는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거 귀찮아지는 거 아니야?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프레드가 열받은 얼굴로 주먹을 쥘 때였다. 식당 문이 열리며 선생님들이 들어왔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여 바짝 긴장한 몸을 풀었다.
“어, 선생님들이다.”
내 말에 프레드가 뒤를 돌아보곤 한 번 더 나와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노려보더니 식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뒤를 조지와 메이슨이 급하게 따라갔다. 남자는 프레드의 뒷모습을 매섭게 쏘아본 뒤 내게 말을 걸었다.
“여기 앉아도 돼?”
이 학교에서 누가 먼저 내 앞에 앉겠다고 한 건 처음이었다. 얼떨떨한 마음에 말없이 보고만 있자 그가 싱긋 웃으며 앞자리에 앉았다.
“안녕, 나는 딜런.”
“어, 난 승원이야.”
“저 애 말,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 남을 무시하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 꼭 한 명씩 있더라. 정말 한심해.”
‘한 명이 아니라 이 학교 학생 전체가 그래.’ 하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냥 속으로 삼켰다.
“넌 어느 나라에서 왔어?”
“나 한국.”
“아, 한국. 내가 다니던 학교에도 있었어. 일본인도 있었고 한국인도 있었는데, 중국인이 가장 많았지.”
“다른 학교에서 왔어?”
“응. 일주일 전에 전학 왔어. 난 계속 럭비를 했었는데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아버지가 이참에 본격적으로 공부하라면서…….”
그의 표정이 한순간 울적하게 변했다. 산만 한 덩치와는 다르게 감정 표현이 풍부한 게 어딘가 귀엽게 느껴졌다. 살짝 웃음이 나왔다. 이 학교에서 인종 차별 없이 날 사람으로 대해 주는 사람은 처음 만났다. 신기하기도 하고 새롭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뿐일 테지. 며칠 더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그도 결국엔 다른 학생들과 똑같아질 거다. 원래 사람이란 다수가 하는 행동에 동화되고 결국 그걸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니까. 괜히 씁쓸해졌다. 슬쩍 앞을 쳐다보니 그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왜?”
“아니, 너 웃는 모습이…….”
“응?”
“이뻐서.”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자 딜런도 자신의 말에 객쩍은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남자한테 듣는 이쁘다는 말이라니, 전혀 달갑지 않다. 놀림당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넌 몇 학년이야?”
“나 12학년, 너는?”
내 말에 의외라는 듯 딜런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자 딜런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는 11학년. 난 당연히 나보다 어린 줄 알았어. 동양인의 대부분이 어려 보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딜런이 손목시계를 한번 쳐다봤다.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벌써 대부분의 학생들이 식당을 빠져나간 상태였다.
“오늘 반가웠어. 난 이만 가 볼게.”
간단한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앞에 있던 딜런도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도 같이 점심 먹을래?”
바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딜런은 내가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내일도 이 시간에 올게.”
딜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을 나가는 그의 모습을 잠깐 동안 바라봤다.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일은 나에게 아직 두려운 일이었다. 마음을 연 만큼 상처가 되어 돌아올 것이란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 작은 한숨을 푹 내쉬며 클래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아까 프레드 열받아서 나갔었지. 보복이랍시고 또 유치한 장난을 하는 건 아닐까 살짝 걱정이 들었다. 클래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프레드가 도끼눈을 하고 노려볼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레이먼드에게 환심을 사려는 듯 매우 바빠 보였다.
‘우와아아! 이재훈! 진규현! 성현재! 박승원! 영원히 사랑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조명이 화려한 무대 하나만을 비추고 있었다. 그 안을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들의 눈이 혹여 한 동작, 한마디라도 놓치진 않을까 잔뜩 긴장된 채 무대를 향해 있었다.
무대 위엔 이미 한차례 공연이 끝나고 난 후인지 땀에 흠뻑 젖어 있는 나와 그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중 숨을 헐떡이면서도 기분 좋게 미소까지 머금고 있는 내 모습은 마치 모든 걸 다 가진 사람 같이 행복해 보였다.
그 순간 옆에서 손이 하나 뻗어 왔다. 그의 다정한 어깨동무에 순간 흠칫하고 몸이 한번 떨렸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라,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무대에 서 있는 다른 멤버들만 빼면 말이다.
그것도 잠시, 팬들의 함성에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나는 다시 활짝 웃기 시작했다. 바보처럼. 지금 내 자신에게 몸이 닿을 수 있다면, 이것이 현실이라면 당장 무대로 뛰어가 저 멍청한 면상을 주먹으로 한 대 때려 주고 싶다. 넌 뭐가 그렇게 즐겁냐고 한껏 외쳐 주고 싶었다.
물론 그 이후엔 경호원들에게 비참하게 끌려 나가 경찰서나 가겠지. 분명 그날 저녁 뉴스와 기사는 온통 내 이야기뿐일 것이다. ‘최정상 아이돌 베스트 포 콘서트에 난입한 미친 X’이라고 말이다. 물론, 내가 그 멤버지만. 어이없는 망상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울컥하는 마음에 두 주먹을 꾹 쥔 채 꿈인지 알지만, 바뀌지 않을 것이란 것도 알지만 오늘도 크게 외쳤다.
‘그만!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어! 제발, 그만해!’
들릴 리 없는 내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흩어져 갔다. 저기 서 있는 난 여전히 웃고 있는데, 병신같이……. 그때 갑자기 비명과도 같은 한 여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공연장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박승원, 영원히 사랑할 거야! 사랑해!’
저 때 난 무슨 기분이었지? 아, 그저 행복했던 것 같다. 순진하게 저 말을 믿었다. 내 편이 생긴 것 같은 기쁨에 가슴이 찡하고 울렸던 것 같다. 내 편 같은 건 세상에 없는데.
행복했던 그때를 보고 있던 지금,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톡 떨어졌다. 아직도 흐를 눈물이 남아 있구나. 실소를 지으며 덤덤하게 생각했다.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번쩍 눈을 떴다.
아, 또 그 꿈이네……. 아침부터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한두 번 꾸는 악몽도 아니었고 이 무기력함 역시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개운하지 않은 몸에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하품을 한번 했다. 아직도 꿈속의 함성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느낌이었다.
어제 늦게까지 책을 읽다 세 시간밖에 자지 못해서인지 몸이 무거웠다. 이럴 때에 그 꿈이라니. 미간을 찌푸리며 옆에 있는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게 진짜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아, 진짜 가기 싫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귀찮은 마음을 다잡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 짧은 시간에도 잠이 부족한 몸이 좀 더 자게 해 달라며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시끄럽게 울리고 있는 핸드폰 알람을 손으로 밀어 꺼 버렸다. 몸을 쭉 늘리며 욕실로 천천히 들어섰다. 세면대 위 거울을 멍하니 바라봤다. 참, 꼴이 말이 아니네. 항상 이렇다. 항상 그 꿈을 꾸고 나면 무의식중에 눈물을 흘려서, 다음 날 일어나면 눈이 퉁퉁 부어 있곤 했다.
“괴물이 따로 없네. 정말.”
아직까지 남아 있는 꿈의 잔재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차가운 물을 손으로 받아 여러 번 얼굴을 적셨다. 아직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차가운 물로 적신 얼굴이 조금 얼얼해졌다. 그래도 덕분에 퉁퉁 부운 눈이 조금 원래대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흐렸던 시야가 뚜렷해지고 이제야 완전히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젖은 얼굴을 훔치며 고개를 드니 거울 속에 내 모습이 비쳤다.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물에 젖은 손으로 한번 쓸어 넘겼다. 도톰한 애교살 덕분에 남자답게 생긴 것과 거리가 먼 얼굴은 나이보다 어리게 보였다.
연습생 때는 이렇게 거울 보면서 표정 연습하곤 했는데, 그때를 생각하니 참 쓸데없는 행동으로 시간을 낭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거울 속에는 공허한 눈빛을 띠고 있는 나만 존재하고 있었다.
대충 씻고 나와 시계를 보니 벌써 7시 반이다. 늦장 부리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 버렸다. 학교에 가려면 시간이 조금 빠듯했다. 오늘도 아침은 패스해야 할 생각으로 현관문으로 걸음을 옮기다, 살짝 아쉬운 마음에 냉장고 문을 열었다. 생수 한 병만 드르륵하고 구를 뿐이었다. 작은 한숨이 새어 나갔다.
나는 빠듯하게 학교에 도착하는 걸 좋아한다. 조금이라도 학교에서 수업 외 시간을 만들지 않고 싶어서이다. 쉬는 시간마다 느껴지는 그들의 냉담하고 비웃음 가득한 눈초리는 애써 신경 쓰지 말자고 다짐해도 외면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학교의 동양인은 나 하나이다. 몇몇 동양인이 있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결코 오래 버티진 못했다고 한다.
내가 전학 왔을 때도 언제까지 버티는지 내기하는 무리가 있었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들은 내가 일주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한 모양이지만 결국 내기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이미 내가 이 학교에 온 지 8개월이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기에서 진 것이 억울한지 더욱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라커에서 교과서를 꺼내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역시 나에게 쏟아지는 달갑지 않은 시선들을 느끼며 자리로 걸어갔다. 곁눈질로 그들을 힐끗 바라봤다. 평소와 같이 수군거리며 웃고 있었지만 뭔가 달랐다. 뭔가 조금 더 들떠 있는 것 같아 보인 달까.
신경 쓰지 말자 생각하며 조금 더 빠르게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내 책상을 본 순간 그들이 저토록 들떠 있는 이유를 바로 알게 되었다. 아마도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하는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이 정도로 유치한 장난을 한 적은 없었는데. 나는 내 책상을 보고 할 말을 잃어야 했다.
무표정으로 책상을 보고 있던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제일 신난 표정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프레드가 얼굴을 젖히며 배를 잡고 즐거운 듯 웃었다.
“*칭크(중국인을 나타내는 영어의 모멸어이다. 처음에는 주로 미국의 백인이 중국계 이민자를 부르는 데 사용했다. 한국에서의 짱깨와 유사한 뜻을 가지고 있다.의 찡그린 표정 좀 봐. 어때? 내 선물 마음에 들어?”
역시 프레드였구나. 어쩐지 내 얼굴을 확인하곤 더 즐거워하는 것 같아 표정을 풀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소리에 프레드가 나를 조롱하듯 더 큰 목소리로 숨이 넘어갈 듯 오버해서 웃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무척이나 뿌듯한지 옆에 앉아 있는 셀리에게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프레드도 다른 애들과 같이 멸시하는 눈빛만을 나에게 내비쳤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날이 갈수록 그의 행동은 대담하고 과격해졌다. 아무 반응도 안 하면 질려서라도 그만할 줄 알았건만, 오히려 나를 놀릴 구실을 찾는 듯 내 주변을 맴도는 날이 갈수록 잦아졌다. 나는 책상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아 테이프를 떼기 시작했다.
띵디디딩.
수업종이 울렸다. 아직 풀지 못한 테이프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귀도 좋은 프레드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적당히 좀 감아 놓지. 서둘러 끝내고 싶은 마음에 빠른 손놀림으로 테이프를 떼고 있을 때였다. 그때 클래스 문이 열리고 선생님이 안으로 들어왔다.
쭈그려 앉아 테이프를 떼고 있는 나의 모습은 누가 봐도 문제가 있는 장면이었지만 선생님은 힐끗 한 번 쳐다보곤 얼굴을 찡그릴 뿐 딱히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저 찡그린 표정도 내가 괴롭힘을 당해서가 아니라 그저 테이프를 뜯는 소리가 시끄러워서인 건 이미 나도 알기에 눈치를 보며 살살 테이프를 뜯었다.
수업이 시작하자 책을 편 학생들은 칠판을 보다가도 힐끗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라도 열받은 혹은 충격을 받은 내가 울며 뛰쳐나가진 않을까 잔뜩 기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나는 묵묵히 책상을 깨끗이 하는 일에만 신경 썼다. 어차피 화를 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난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또 이곳에 있어야 했다. 여긴 벼랑 끝에 몰린 내가 선택한 최후의 도피처니까. 그들이 나를 경멸하고 놀리는 일 따윈 솔직히 별로 큰 상처가 되진 않는다. 이미 당한 일이라 무뎌져 버린 것일까.
센트레일즈 스쿨은 오래 전부터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부유층들이 다니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그래서 이곳 학생들이 자존심 강하고 또 커다란 긍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부자일지라도 동양인이라면 여기서 생활하기가 힘들었다. 센트레일즈 스쿨이 동양인에겐 기피 1순위인 학교인 건 그래서였다.
심하면 얼마나 심하겠냐며 이 학교에 입학한 동양인은 크게는 정신병을 앓고, 작게는 자존심이 바닥이 되어 센트레일즈를 떠났다고 한다. 우연히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바로 이 학교를 다니기로 결심했다. 동양인이 기피하는 학교라 하면 즉, 동양인이 없는 학교란 말이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그때의 나는 어떤 동양인과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알아볼까 봐, 혹은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차라리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를 당하는 게 어찌 보면 낫다고 생각한다. 이유 없는 경멸은 이미 깊게 파인 상처를 더 깊게 후벼 팔 순 없으니 말이다.
내 편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여기서도, 다른 곳에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딱히 내편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받은 만큼 또 믿은 만큼 결국에는 악이 되어 나에게 상처로 돌아온다. 그런 일이 또 반복될까 두렵다. 그런 일이 한 번 더 생긴다면 꼭 잡아 둔 정신을 이제는 정말 놓치고 말 테니까.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내가 보고 들은 것만 믿고 지금처럼 혼자 살아가면 더 이상 상처받을 일도 생기지 않을 거다.
지겨운 수업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수업시간 내내 테이프를 흔들며 나는 놀려 대던 프레드에게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식당 입구에 찍을 카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당장 식당에 갈 생각은 없었다. 집요하다시피 날 좇는 시선들을 어느 정도 피하기 위해선 최대한 늦게 배식을 받아야 했다. 예전이었으면 이런 건 신경도 안 썼을 텐데. 내가 누군가의 시선을 이렇게 피해 다닐 줄이야.
한국에서는 나를 향한 타인의 시선이 당연했다. 데뷔하기 전부터 연습생이란 신분 덕분에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내 주변에 몰렸었고 지금처럼 그런 관심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아마 그때 친구들이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비웃음을 한껏 날리며 즐거워할 것이다.
멍하니 옛날 생각을 하며 클래스을 나서는데 들어오던 이와 부딪쳤다. 얼얼한 코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어올리자 이번 주엔 처음 보는 것 같은 레이먼드가 서 있었다.
학교에 잘 나오지도 않고 근처에서 그와 말해 본 적도 없었기에 남들이 다 감탄해 마지않는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눈부시게 밝고 매끄러운 금발에 넋을 놓고 있자 레이먼드가 그 잘생긴 얼굴을 찌푸리고 나를 내려다봤다.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아, 미안.”
갑작스러운 상황에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 평범하게 사과를 했다.
“됐어. 비켜.”
레이먼드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어깨를 으쓱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곤 레이먼드가 클래스 안으로 들어간 걸 확인하자마자 복도로 나왔다. 뭐 원래 티비에도 자주 나오고 가끔 지나가다 봤지만, 가까이서 본 그는 내 생각보다 더 잘생긴 것 같다. 나도 작은 편은 아닌데 올려다봐야 할 정도고, 심지어 몸까지 좋다. 왜 여자들이 레이먼드에게 환장하는지 알 것 같았다.
레이먼드는 학교에서 나를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보지 않는 몇 없는 학생 중 한 명이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다는 게 정답이겠지. 무관심에 하대하는 듯한 말투는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동일했다.
센트레일즈 학생들은 빼어난 외모와 최고위층 집안을 가진 레이먼드와 친해지기 위해 항상 노력했다. 하지만 레이먼드는 늘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짜증스럽게 보곤 했다. 덕분에 직접적으로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집안을 빼놓고 보더라도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할리우드 아역 배우 출신으로 지금도 최고의 주가를 달리는 배우였고, 최근엔 잘 큰 스타 1위와 살면서 한 번쯤 만나 보고 싶은 남자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 인기가 실로 대단해 한국에서도 레이먼드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를 보면 정말 하늘은 불공평하단 생각이 절로 났다. 어떻게 한 사람에게 모든 걸 저렇게 완벽하게 줄 수 있는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걸으니 금방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 입구에서부터 벌써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배를 한번 쓸며 출입문에 카드를 찍자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더욱 짙어진 음식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오늘도 역시나 울타리 속 동물이라도 된 듯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나를 힐끗 돌아봤다. 애써 수군거리는 소리를 무시하며 음식 모형이 있는 쇼 케이스를 쳐다봤다. 1번은 양식 코스 요리였고, 2번은 일식 코스 요리였다. 둘 다 맛있어 보이는데. 한참 동안 고민을 하다 디저트가 더 끌리는 1번 세트 쪽으로 걸어갔다. 오늘같이 스트레스받는 날은 달달한 디저트가 중요하지.
서둘러 요리를 받고 제일 구석 자리에 앉았다. 일부러 이쪽으로 오지 않는 한 사람들의 시선을 그나마 피할 수 있는 자리였다. 막 스테이크를 썰어 입으로 가져가려는 때였다. 언제 왔는지 프레드가 친구인 조지와 메이슨과 함께 내 앞으로 다가왔다. 밥 먹을 때까지 놀림을 당해야 하나. 나오려는 한숨을 참으며 프레드를 올려다봤다.
“무슨 일이야?”
놀릴 구실을 찾는지 나를 위아래로 훑어 보던 프레드의 눈이 스테이크에서 멈췄다. 그가 비웃음이 담긴 얼굴로 빈정거렸다.
“칭크, 지금 서양인인 척하는 거야? 먹고 싶은 걸 못 먹는 건 정말 슬픈 일이야.”
서양인인 척? 그의 알 수 없는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들고 있던 포크를 그릇에 내렸다.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네가 서양인인 척하느라 고국 음식도 앞에 두고 못 먹고 있잖아?”
“고국 음식?”
“저기 일식 세트. 전부 네 고국 음식이잖아.”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게 재밌는지 그의 미소가 조금 더 진해졌다. 아차, 표정 관리해야지. 나는 찡그렸던 표정을 재빨리 풀었다.
“저기, 나 일본인 아닌데. 한국인이야.”
내 말에 프레드는 얄미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꽤나 큰 키에 남자다운 얼굴을 갖고 있는 그였지만, 표정만큼은 어찌 저리 야비한지 모르겠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아시아는 다 같은 아시아 아닌가? 칭크.”
자신도 억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그냥 그는 내 짜증 섞인 표정이 보고 싶을 뿐인 것 같았다. 문득 왜 이 말도 안 되는 말에 대답을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올려다보던 눈을 그릇으로 돌렸다. 내가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자 그가 무언가를 따지려는 듯, 한 발자국 다가왔을 때였다.
“그건 아니지. 아시아는 모든 고국 음식이 다 같다니, 무슨 논리야. 너무 무식한 발언 아닌가?”
갑자기 들려오는 음성에 뒤를 돌아보았다. 갈색 머리의 호감형인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듬직한 덩치를 가진 그는 키도 꽤나 커 보였다. 185센티미터 정도는 되어 보였다. 내 앞에 서 있는 프레드와 키가 비슷해 보이니까. 남자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프레드가 조금 빨개진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너 뭐야! 왜 말하는데 끼어들어. 무식하다니! 나한테 한 소리야?”
“자신의 무식함을 모르는 이를 보고 무식하다고 하는 거야.”
남자도 기분이 상했는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거 귀찮아지는 거 아니야?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프레드가 열받은 얼굴로 주먹을 쥘 때였다. 식당 문이 열리며 선생님들이 들어왔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여 바짝 긴장한 몸을 풀었다.
“어, 선생님들이다.”
내 말에 프레드가 뒤를 돌아보곤 한 번 더 나와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노려보더니 식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뒤를 조지와 메이슨이 급하게 따라갔다. 남자는 프레드의 뒷모습을 매섭게 쏘아본 뒤 내게 말을 걸었다.
“여기 앉아도 돼?”
이 학교에서 누가 먼저 내 앞에 앉겠다고 한 건 처음이었다. 얼떨떨한 마음에 말없이 보고만 있자 그가 싱긋 웃으며 앞자리에 앉았다.
“안녕, 나는 딜런.”
“어, 난 승원이야.”
“저 애 말,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 남을 무시하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 꼭 한 명씩 있더라. 정말 한심해.”
‘한 명이 아니라 이 학교 학생 전체가 그래.’ 하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냥 속으로 삼켰다.
“넌 어느 나라에서 왔어?”
“나 한국.”
“아, 한국. 내가 다니던 학교에도 있었어. 일본인도 있었고 한국인도 있었는데, 중국인이 가장 많았지.”
“다른 학교에서 왔어?”
“응. 일주일 전에 전학 왔어. 난 계속 럭비를 했었는데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아버지가 이참에 본격적으로 공부하라면서…….”
그의 표정이 한순간 울적하게 변했다. 산만 한 덩치와는 다르게 감정 표현이 풍부한 게 어딘가 귀엽게 느껴졌다. 살짝 웃음이 나왔다. 이 학교에서 인종 차별 없이 날 사람으로 대해 주는 사람은 처음 만났다. 신기하기도 하고 새롭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뿐일 테지. 며칠 더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그도 결국엔 다른 학생들과 똑같아질 거다. 원래 사람이란 다수가 하는 행동에 동화되고 결국 그걸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니까. 괜히 씁쓸해졌다. 슬쩍 앞을 쳐다보니 그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왜?”
“아니, 너 웃는 모습이…….”
“응?”
“이뻐서.”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자 딜런도 자신의 말에 객쩍은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남자한테 듣는 이쁘다는 말이라니, 전혀 달갑지 않다. 놀림당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넌 몇 학년이야?”
“나 12학년, 너는?”
내 말에 의외라는 듯 딜런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자 딜런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는 11학년. 난 당연히 나보다 어린 줄 알았어. 동양인의 대부분이 어려 보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딜런이 손목시계를 한번 쳐다봤다.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벌써 대부분의 학생들이 식당을 빠져나간 상태였다.
“오늘 반가웠어. 난 이만 가 볼게.”
간단한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앞에 있던 딜런도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도 같이 점심 먹을래?”
바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딜런은 내가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내일도 이 시간에 올게.”
딜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을 나가는 그의 모습을 잠깐 동안 바라봤다.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일은 나에게 아직 두려운 일이었다. 마음을 연 만큼 상처가 되어 돌아올 것이란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 작은 한숨을 푹 내쉬며 클래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아까 프레드 열받아서 나갔었지. 보복이랍시고 또 유치한 장난을 하는 건 아닐까 살짝 걱정이 들었다. 클래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프레드가 도끼눈을 하고 노려볼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레이먼드에게 환심을 사려는 듯 매우 바빠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