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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타 너의 스타 2화





클래스 안에서 프레드는 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의 영향력이 컸다. 그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레이먼드가 없을 때의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처럼 레이먼드가 학교에 오는 날이면 프레드는 항상 그 옆에서 얼쩡거렸다.

레이먼드는 옆에 앉아 무언갈 열심히 말하고 있는 프레드가 귀찮은지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프레드는 눈치가 있는 편이 아닌 듯 보였다.

“그래서 레이먼드. 저번에 내가 산 지갑 있지? 그거 네가 모델 했던 지갑이라며? 난 모르고 샀지만 정말 신기한 우연이야.”

프레드가 레이먼드와의 접점을 찾기 위해 일부러 지갑을 샀다는 걸 이렇게 멀리서 듣는 나조차 알 것 같은데, 하물며 당사자인 레이먼드가 저 어설픈 말을 더더욱 믿을 것 같진 않았다. 아마 여기 있는 학생들 중에 프레드의 말을 믿는 사람을 결코 한 명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녀석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정면만 줄기차게 보고 있던 레이먼드가 슬쩍 프레드를 쳐다봤다. 프레드는 레이먼드가 자신을 바라봤다는 사실에 감격했는지 표정이 티 나게 밝아졌다. 그것도 그럴 것이 열심히 무언갈 떠드는 프레드와는 달리 레이먼드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녀석은 아마도 그가 ‘네가 산 지갑이 내가 모델을 한 지갑이라니.’ 하고 놀라 주길 바라는 얼굴이었다.

“꺼져.”

그러나 그는 역시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싸늘한 레이먼드의 말에 프레드가 눈을 크게 떴다. 레이먼드의 말이 못내 충격이었나 보다. 그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응……?”

“꺼지라고.”

프레드가 자신의 붉은색 머리를 넘기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래, 오랜만에 학교 와서 피곤했지? 좀 쉬어.”

슬쩍 뒤를 돌아보다 레이먼드와 눈이 마주쳤다.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짜증이 가득 서려 있었다. 괜히 불똥 튀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마트 앞에 걸음을 멈췄다. 학교 교복은 눈에 띄어 하교 시엔 항상 사복으로 갈아입고 학교에서 나온다. 자주 입는 검은색 후드티를 푹 눌러쓰고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학교나 집 이외에는 다른 곳을 잘 가지 않는다. 오늘 아침에 텅 빈 냉장고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주 안 오는 마트이기에 미리 필요한 생필품과 음식들을 이것저것 담았다. 계산을 하고 보니 생각보다 너무 많이 산 것 같다. 이걸 가지고 갈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막막해졌다. 직접 들어 보니 더 무거운 무게에 손이 하얗게 저려오기 시작했다.

조금씩 걸음이 빨라져 어느새 헐떡이며 경보하듯 빠르게 걷고 있을 때였다. 이상하게 뒤에서 계속 시선이 느껴지는 듯한 기분에 힐끗 뒤를 쳐다봤다. 묘하게 신경을 거슬리는 시선이었다.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착각인가?”

가던 길을 멈추고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역시 수상해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너무 민감한 건가. 그래도 역시 어딘가 찝찝한 마음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그 기분을 떨치려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다다라 있었다.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락감이 드는 익숙한 집 안으로 들어서서야 긴장했던 온몸이 편하게 풀어졌다.

“아, 역시 집이 최고야.”

잠깐 사이 혹사된 근육이 쉬게 해 달라고 아우성 치고 있었다. 나는 털썩 침대에 누웠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뜨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침대 옆 협탁에 어제 먹다 남은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달달한 걸 먹으면 어쩐지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기분이 들어 이곳에 초콜릿을 항상 가득 채워 두었다. 한창 입을 우물거리고 있을 때였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띠리리링.

바지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거의 알람시계나 다름없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 사람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미국에 아는 사람도 없거니와 나에게 친절하게 전화까지 해 줄 사람은 더더욱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핸드폰을 꺼내 들자 역시나 예상했던 ‘소파아’라는 이름이 화면에 떠 있었다.

소피아는 한 엔터테인먼트의 캐스팅 실장이다. 내가 미국에 처음 왔었을 시기에 그녀는 나에게 길거리 캐스팅을 한 적이 있었다. 큰 주목을 받으며 막대한 투자를 받은 새 드라마가 곧 제작에 들어간다고 했다.

지구가 멸망해 살아남은 전 세계의 소수 인구에 대한 SF 드라마라고 했나. 관심 없이 대충 들어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충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또 나를 처음 봤을 때 로렌이란 배역과 이미지가 너무 잘 맞고 생각해 신호 대기 중인 차를 급히 갓길에 대고 뛰어왔다고도 했다.

그때 난 집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누군가 어깨를 치는 느낌에 뒤를 돌아봤었다. 거기에는 웬 3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목덜미까지 딱 떨어지는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날카롭지만 세련돼 보이는 인상의 여자였다. 그녀에게서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흥분에 젖어 번쩍거리는 갈색 눈동자였다. 어쩐지 조금 소름이 올라왔다.

“……무슨 일이시죠?”

번뜩이는 눈빛과 당장이라도 날 잡아먹을 것 같은 사나운 기세에 눌려 주춤 뒤로 몸을 빼자, 그녀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양손으로 내 손을 움켜잡았다. 곧 흥분으로 조금 업 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좋은 얼굴이야! 피터 윌리엄스 감독 알지? 전 세계에서 주목받는 감독 말이야. 그 감독님이 지금 새로운 드라마를 제작하는데 그 배역 중 ‘로렌’이라는 역이 있어, 그런데 내가 상상하던 얼굴이 딱 너야!”

솔직히 말하면 미친 사람 같았다. 그래서 다소 불손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조금 더 내 쪽으로 바짝 붙어서 손을 세게 쥐었다.

“걱정 마. 조연급이라 대사도 별로 없고, 얼굴 위주로 찍을 거야. 이번에 새로움을 위해 신인 위주로 캐스팅하고 있거든. 전혀 부담 가질 것 없어! 그냥 테스트만 한번 해 보지 않을래?”

이미 그녀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예계라면 치를 떨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말문이 막혔다. 아마 흥분한 그녀는 내 표정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 배역 중 로렌은 어리바리하고 순진한 역할이야. 주인공을 따라다니며 도와주는 인물이지.”

신이 나 말하는 소피아의 말 중 어리바리란 단어에 얼굴을 찡그렸다. 애초에 관심도 없었지만 나를 보고 떠올렸다던 배역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뒤늦게 내 표정을 눈치챈 그녀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 물론, 로렌은 모두에게 사랑받는 매혹적인 캐릭터야.”

그녀는 다시 한번 기대에 찬 미소를 지으며 돌아올 반응을 기다렸다.

“죄송합니다. 생각 없습니다.”

예상외의 대답이었는지 표정이 티 나게 굳어졌다. 그녀의 손을 가볍게 떼어 내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그녀가 너무 세게 잡고 있던 덕에 많은 힘이 필요했다. 뒤를 돌아가던 길을 다시 걸었다. 그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던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내 앞을 다시 막아섰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껏 찡그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잠깐!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 줄이나 알고 거절하는 거야? 거기 출연하면 너는 스타가 될 수 있다고.”

그녀의 말에 씁쓸한 웃음이 배어 나왔다.

“스타가 되면 뭐가 달라지나요?”

조소가 담긴 물음에 그녀가 할 말을 잃은 듯 가만히 나를 쳐다봤다. 그러곤 그녀가 입꼬리를 올려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핸드폰 좀 줘 봐.”

당당한 요구에 황당한 얼굴로 가만히 있자, 그녀가 내 재킷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멋대로 가지고 갔다. 그러곤 능숙하게 핸드폰에 무언가를 입력하더니 자신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었다.

“여기 내 전화번호 저장해 뒀어.”

그녀가 내미는 핸드폰을 받아 들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내 대답에 그녀가 화통하게 웃었다.

“로렌 배역 맡아 달라고 하는 거 아니야. 그냥 너를 알고 싶달까? 내 이름은 소피아. 너는?”

굉장히 당혹스럽고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답할 때까지 보내 줄 것 같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작은 한숨을 내쉬며 항복했다.

“승원이요. 승원 박.”

“흠. 좋은 이름이네. 아참, 만약 내 번호를 지우거나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찾아낼 테니까 각오해.”

장난인 듯 웃고 있지만 어쩐지 진심으로 들리는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소피아가 손을 흔들며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갔다. 그게 그녀와의 강렬한 첫 만남이었다.



띠리리링.

“여보세요.”

-아, 정말. 왜 이렇게 늦게 받는 거야!

네 번이 울렸을 때 전화를 받았지만 소피아는 늦게 받았다며 나를 다그쳤다. 분명 그녀와의 첫 만남은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하지만 날카롭다는 첫인상과는 다르게 소피아의 쿨한 성격 덕분에 어느새 부담 없이 통화하고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아직도 가끔 로렌 역을 할 생각이 없냐며 지나가는 말로 물어 보는 그녀였지만 늘 단호하게 거절할 뿐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뭐,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하나. 그냥 잘 지내냐고. 2주만이잖아.

“무슨 일 있어요? 목소리가 안 좋아 보여요.”

-내가 기분 안 좋을 게 뭐가 있겠어. 캐스팅이 문제지, 캐스팅! 어휴. 작가랑 감독이 어찌나 까다로운지. 정말 지친다, 지쳐.

정말 힘든지 소피아의 목소리엔 기운이 없었다. 그들이 워낙 까다롭다는 말은 소피아에게 전화 올 때마다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캐스팅 때문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못 구한 배역이 몇 명인지 알아? 전부 다 까여서 그래. 이렇게 캐스팅을 해 가도 다 까이는데 이게 의미 있는 일인지 모르겠어, 정말.

그녀가 울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안쓰러웠지만 곧 저 말 뒤에 무슨 말이 나올지 알고 있기에 서둘러 대답했다.

“전 로렌 역 할 생각 없습니다.”

-……그래, 솔직히 기대도 안 했어. 아, 맞아. 저번에 알바 할 만한 곳 찾아봐 달라고 했었지?

소피아의 말에 그제야 저번에 부탁했던 일이 떠올랐다. 슬슬 주머니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염치없지만 일자리를 부탁했었다. 그동안 이것저것 일이 바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줄곧 찾아봤던 모양이다. 며칠 전 일을 생각하며 통장 잔고를 생각하다 보니 문득 과거 일이 생각나 씁쓸해졌다.

내가 한국에서 아이돌 활동을 한 건 3년이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데뷔하자마자 큰 주목을 받으며 믿기 힘들 만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보답하고자 쉴 새 없이 일했다. 살인적인 스케줄에 밥과 수면 모두 이동하는 밴 안에서 해결해야 했다.

힘들수록, 잠자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인기는 더욱 더 올라갔다. 내 시간을 모두 빼앗긴 대신 한국 최정상 아이돌이라는 타이틀을 얻었고 돈도 많이 벌었다. 그때는 내가 얻은 부와 명예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냉혹한 현실을 몰랐던 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는 건 금방 깨달았다.

문제의 사건 이후 각종 매체들에게 위약금을 물어 주고, 회사에서 나오기 위해 지원비와 계약금의 10배에 달하는 위약금도 지불해야 했다. 어마어마한 학교 등록비도 재정 상태를 악화시키는 데 한몫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돈도 어느새 손 틈새로 새어 나가는 모래알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월세와 생활비를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막상 뭐부터 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때문에 소피아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몇 곳 알아보니까 현장에 조명 촬영 보조 스텝 구한다고 하는데, 어때? 내가 부탁하면 페이도 나쁘지 않게 해 줄 거야.

“촬영 현장이요?”

-응. 힘들긴 하겠지만, 연예인도 보고 재밌을 거야.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때?

“아, 촬영 현장은 좀……. 다른 곳은 없나요?”

-왜, 마음에 안 들어? 분명 마음에 들 줄 알았는데. 이런, 다른 알바라…… 잠깐만.

촬영 현장은 옛날 생각이 날 것 같아 거부감이 들었다. 괜찮은 페이를 준다는 말에도 어쩐지 끌리지가 않았다. 잠시 종이를 뒤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다시 소피아의 음성을 들려왔다.

-촬영 현장을 제외하면 사람 구하는 곳이 생각보다 없네.

미안한지 작아진 목소리에 오히려 그녀를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아 이쪽이 더 미안해졌다.

“괜찮아요. 이번엔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아, 하나가 있긴 한데……. 아니다. 그건 좀…….

“네? 뭔데요?”

-우리 사무실 청소해 줄 사람을 구하는데…… 페이도 너무 적고. 아니야. 내가 다시 한번 알아볼게.

“거기 사무실에 동양인 있어요?”

-동양인? 아니, 없어. 그건 왜?

동양인이 있다면 나를 알아볼 염려가 있어서 물어본 것이었다. 나는 어리둥절하게 없다고 말하는 소피아의 말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거 할게요.”

-뭐?

“청소 알바 제가 할게요. 언제부터 나가면 돼요?”

-어, 내일부터 나오면 좋지. 그럼 내가 말해 둘 테니까.

“고마워요, 소피아.”

-아니야. 나도 네가 일해 준다면 편하고 좋지. 주소는 문자로 보내 줄게.

“네. 내일 봬요.”

-그래, 승원. 내일 보자.

그래도 아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일하면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쓴 것도 별로 없고 산 것도 별로 없는데 누가 훔쳐 간 것처럼 금방 사라져 가는 돈을 생각하면, 적지만 그래도 돈을 벌 수 있는 청소 알바도 나쁘지 않았다.



***



다행히 오늘은 책상과 의자가 테이프로 감겨 있는 일은 없었다. 모두의 시선은 레이먼드를 향해 있었다. 덕분에 나에 대한 관심도도 떨어져 오전 수업 동안 별일 없이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오늘도 마지막으로 교실에서 나와 천천히 복도를 걸어갔다. 식당에 거의 다와 갈 때쯤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쳤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딜런이 웃으며 서 있었다.

“승원, 기다렸어.”

“어?”

“뭐야. 어제 여기서 보기로 했잖아.”

“그렇긴 한데…….”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어제 딜런이 같이 점심을 먹자고 말하긴 했지만, 분명 다른 친구들에게 내 이야기를 듣고 나를 기피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떨떠름한 내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고프다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릇을 올린 쟁반을 들고 항상 앉는 구석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뒤따라온 딜런이 어제처럼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디저트로 나온 푸딩에 먼저 숟가락을 가져갔다.

“아, 승원. 그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요즘 이 주변에서 동양인만 노리는 묻지 마 폭행이 일어난대.”

“묻지 마 폭행?”

“응. 어제로 당한 사람이 3명인데, 모두 동양인이었나 봐. 다행히 사망자는 없지만 꽤 심각한 중상을 입은 것 같더라.”

딜런의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딜런이 걱정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

“특히 얼굴 쪽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더라고.”

그의 말은 조금 충격으로 다가왔다. 동양인을 향한 폭행 자체는 생소한 것이 아니었지만, 바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니 좀 더 현실감 있게 받아들여졌달까.

“아무튼 이 소식 듣고 네가 걱정이더라고. 돌아다닐 때 조심해.”

딜런의 걱정 어린 말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나를 걱정해 주는 것에 조금 생소함이 들었지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고마워. 조심할게.”



***



수업이 끝나고 소피아의 회사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소피아의 회사는 학교에서 지하철을 타고 40분 정도 가야 하는 데에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이곳에선 1분이 1년같이 느껴졌다.

학교에서 나오기 전 갈아입은 티의 후드를 조금 더 푹 눌러썼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길 바라며 땅만 보고 서 있자 어느새 도착역에 다다랐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는지 주먹에 땀이 흥건했다.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 있으면 어쩐지 옛날 생각이나 절로 긴장하고 만다. 이것도 어서 익숙해져야 할 텐데. 빠른 걸음으로 소피아가 알려 준 출구로 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핸드폰으로 보 내 준 사진 속 건물이 오른편에 크게 솟아 있었다. 생각보다 큰 건물이네.

회사가 자리한 곳으로 향하는는 도중 순간 멈칫 다리를 멈췄다. 어제 마트를 나왔을 때 느꼈던 시선이 또 한 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불쾌한 시선. 아까보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슬쩍 뒤를 돌아봤다.

“아, 뭐야.”

역시 오늘도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지, 기가 허해졌나. 찝찝한 마음으로 좁은 골목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헤이, 이쁜이.”

등 뒤에서 음습하고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조용한 정적을 깨고 들려왔다. 설마 날 부른 건 아니겠지? 뭐, 멀쩡한 사내놈을 저렇게 낯간지러운 호칭으로 부를 정신 나간 인간이 있을 리 없지. 그나저나 저 사람에게 이쁜이라고 불린 사람은 소름 좀 끼치겠는데.

서둘러 골목을 벗어나기 위해 다시금 걸음을 떼자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쳐 왔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려던 순간 다시 한번 듣기 싫은 목소리가 뒤에서 흘러나왔다. 오싹한 위기감과 불쾌함에 미간을 찡그렸다.

“이쁜이, 어딜 그렇게 빨리 가.”

그 이쁜이가 나였다고? 살갗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차갑게 식은 팔을 문지르며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제일 먼저 보인 건 어깨까지 오는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었다. 곱슬머리는 관리가 잘되지 않았는지 엉망으로 헝클여져 있었고, 얼굴의 반이 덥수룩한 수염으로 뒤덮여 무척 지저분해 보였다. 덩치와 키도 무척 커 눈앞에 서 있기만 해도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외적인 평가를 다 제쳐 두더라도 그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접점이 없었던 것 같은데.

미심쩍은 눈으로 빤히 그를 쳐다보는데, 수염 때문에 입이 가려져 잘 보이진 않았지만 남자가 씩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나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내가 얼마나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몰라.”

“저기, 저 아세요? 누구세요?”

찝찝한 얼굴로 묻자 남자의 입에서 경악스러운 말이 터져 나왔다.

“일주일 동안 같이 있었잖아.”

“일주일……?”

“너를 보고 한눈에 반했거든. 줄곧 뒤를 따라다녔는데 눈치 못 챈 거야?”

“네?”

“나는 동양인을 좋아하거든. 근데 넌 동양인 중에서도 제일 이쁜 것 같아.”

대체 무슨 말이야. 인상을 쓰며 다시 소름이 올라온 팔을 문질렸다.

“저기요. 저는 남잔데요.”

“그래. 넌 남자지.”

“혹시 여자분이세요?”

“…….”

덥수룩한 수염과 저 커다란 덩치만 봐도 아니란 걸 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 봤다. 남자는 인상만 구길 뿐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남자가 순식간에 내 양팔을 잡고 벽으로 밀쳤다. 부딪친 등이 매우 아팠지만 그의 손길이 더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가 내가 쓰고 있는 후드를 벗기곤 목에 더운 입김을 후, 하고 내뱉었다. 메스꺼움에 아픔조차 잊었다.

“뭐 하는 거야!”

버럭 소리치자 남자가 한쪽 손을 풀어 두툼하고 꺼칠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강한 아귀힘에 머리가 부서질 듯 눌러졌다. 이번엔 귀 바로 옆에서 더운 입김과 함께 한층 더 음습해진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몸을 뒤틀었다.

“가만있어. 친절하게 대해 줄게. 반항하면 너도 다른 새끼들처럼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남자의 말에 꿈틀거리던 몸을 멈췄다. 오늘 점심때 딜런에게 들은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동양인이 그냥 싫어서 폭행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은 생각보다 더 사이코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