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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타 너의 스타 3화
“하아, 하아. 역시 너무 이뻐. 집에서 나오질 않아서 얼마나 기회를 엿보았는지 몰라. 사실 어제 마트에서 나오는 널 우리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놓쳐 버렸지. 지금 생각해도 열받아.”
남자가 어제를 떠올리는 듯 붙잡은 손목에 더 세게 힘을 주었다. 쩌릿한 고통에 윽, 하고 신음을 뱉었지만 그의 손이 입을 틀어막고 있어 소리가 새어 나가진 않았다. 남자는 흥분한 듯 역겨운 얼굴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어젠 너무 열이 받아서 지나가는 동양인을 아무나 붙잡고 얼굴을 두드려 팼다고. 가엽게도, 살려 달라고 우는 모습이 어찌나 자극적이던지. 어젠 조금 과했지. 대신 오늘은 기분이 아주 좋아.”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 새끼 역대급이다.
“오오, 걱정 마! 너에겐 그럴 일 없어. 정말로 친절하게 대해 줄 거야. 자! 어서 우리 집으로 가자. 여기까지 쫓아오느라 힘들었다고.”
내 일그러진 표정이 겁을 먹어서라고 생각했는지, 미친놈은 자신의 친절함을 한껏 어필했다. 집으로 데려갈 거면 차라리 때려라, 이 변태 사이코야. 나는 씁, 하고 크게 숨을 모았다. 그래, 이럴 때 쓰라고 돈 내면서 태권도 학원을 다녔던 거였지. 나는 울면서 배웠던 태극 품새 8장을 떠올렸다.
사범님, 감사합니다.
미친놈의 손을 재빨리 쳐 내고 두 주먹을 가슴 위로 올렸다가 내렸다.
“어이!”
배에 힘을 꽉 주고 크게 기합을 외치니 미친놈의 표정이 좀 기괴하게 변하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놈에게 달려가 앞차기로 턱을 찼다. 몸뚱이가 하도 사람 같지 않아 꼼짝도 안 하면 어쩌지 했는데 다행히 제대로 통했는지 미친놈은 비틀거리며 턱을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놈이 살벌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자 다시 한번 “어이!”를 외쳤다. 남자가 흠칫하며 몸을 살짝 뒤로 물렸지만 놓치지 않고 옆차기로 얼굴을 전통으로 때려 주었다.
“으아아악!”
이번엔 조금 더 효과가 있었는지, 남자가 아픈 듯 비명을 내 지르며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조금의 틈도 주지 않으려 다시 한번 “어이!!” 기합을 넣자 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잠, 잠깐……!”
놈에게 빠르게 달려가 다리에 힘을 주고 돌려차기로 마무리를 해 주었다. 그제야 미친놈이 털썩, 하고 쓰러졌다. 하도 등 빨이 좋은 놈이라 이렇게까지 발차기를 했는데도 아직까지 꿈틀꿈틀 움직여 댔다.
“앞으로 또 한 번 내 앞에 나타나면, 네놈 면상을 푸딩처럼 물렁물렁하게 만들어 주마.”
아까 먹은 푸딩이 떠올라 들먹여 경고한 후 시계를 슬쩍 쳐다봤다. 아, 지각인데. 벌써 시간이 30분이나 지체했다. 마음이 급해져 거의 달리는 듯한 걸음으로 회사건물 앞에 도착했다. 그대로 회사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무뚝뚝해 보이는 경비원이 나를 막아섰다.
“무슨 일이시죠?”
“아, 오늘 청소부 알바하러 왔는데요.”
“……청소부?”
청소부라고 하지, 그의 표정이 의심스럽게 변했다. 하긴, 어려 보이는 동양인 남자가 청소부라니 나 같아도 이상하긴 하겠다.
“아! 소피아 소개로 왔습니다.”
경비원의 표정에 재빨리 소피아의 이름을 대자 그의 험악한 기세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남자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전화기를 들었다. 잠시 후 소피아와 대화가 끝났는지 경비원이 들어가라며 출입문을 열어 주었다. 10층으로 올라가라는 경비원의 말에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0층을 눌렀다. 멍하니 바뀌는 숫자만 바라보다 힐끗 주위를 살펴보았다.
회사가 커서 그런지 시설도 무척 좋았다. 심지어 엘리베이터도 좋네. 소피아는 좋은 회사를 다니고 있었구나. 실없는 생각을 몇 번에 벌써 10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활짝 열렸다.
깨끗한 복도에 들어서 두리번거리며 사무실을 구경했다. 층 전체가 한 사무실인지 옆면은 안이 훤히 보이는 유리문으로 덮여 있었다. 왼편으로 걸음을 옮기자 유리문 안에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소피아가 보였다. 환경 때문인지 왠지 소피아가 낯설게 느껴졌다.
위압감마저 드는 사무실에 들어가도 되나 싶어 잠시 가만히 서 있자, 서성거리는 날 발견한 소피아가 웃으며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소피아가 앞쪽에 있는 고급 가죽 소파에 앉으라고 눈짓했다. 여전히 어색하긴 했지만 푹신한 소파에 앉아 소피아가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
“네, 그럼 자세한 사항은 메일로 보내 드릴게요, 내일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소피아가 책상에서 일어나 내 맞은편에 앉았다. 다리를 꼬며 전화 전 마시던 거였는지 다 식은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웬일로 조금 늦었네?”
“아, 오는 길에 일이 좀 있어서요. 죄송해요.”
“뭐, 죄송할 것까진 없어. 근데 무슨 일?”
“……그냥 조금 사소한 일이요. 아, 지금부터 일하면 되나요?”
소피아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남자에게 스토킹당했다는 얘긴 창피해서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티 나게 말을 돌렸지만 다행히 소피아는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응. 네가 할 일은 사무실 청소랑 서류 정리 정도가 다야. 11층에 사무실이 하나 더 있거든? 거기랑 여기만 부탁 좀 할게.”
“사무실 안만 청소하면 되는 건가요? 생각보다 간단하네요.”
“응. 근데 대부분 서류 정리를 도와주는 것 위주로 일하게 될 거야. 중요한 서류가 많으니까 꼭 신경 써서 부탁해.”
“네.”
“아, 11층도 간단히 인사시켜 줄게. 거긴 매니지먼트실이야. 가끔 스타님께서 방문하시는데, 거의 안 오니까 신경 쓸 것 없어.”
“스타요?”
“응, 잘난 스타시지. 웬만하면 얽히지 마. 승질이 고약하거든.”
“네.”
소피아가 남은 커피를 한 입 더 들이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취하는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가며 방금 소피아가 했던 말을 되짚어 보았다. 소피아가 스타님이라 말하는 극존칭 속에는 비꼼이 듬뿍 당겨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승질이 어지간히 고약한 게 아닌가 보네.
뭐, 나랑은 별로 상관없는 일이겠지.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이곳에 자주 오지도 않는다고 하니까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소피아를 따라 한 층 더 올라가니 10층같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는 사무실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문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우리를 보고 사람 좋게 웃었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남자는 먼저 소피아와 인사를 하고 몸을 틀어 나를 바라봤다.
“어제 내가 말했지. 승원 박이야. 오늘부터 사무실 정리 도와줄 예정이고.”
“네가 승원이구나? 소피아에게 말 많이 들었어. 나는 매튜라고 해.”
“아, 반가워요.”
“소피아에게 들었지만 정말 매력적으로 생겼구나. 정말 로렉 역과 잘 어울리는 얼굴이야.”
매튜의 말에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소피아가 매튜에게 그런 말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 내가 당황해하자 매튜가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손을 올리고 내 귀에 살짝 속삭였다.
“사실, 소피아가 로렌 역은 너밖에 없다며 술 마실 때마다 주정을 부리거든.”
매튜의 말에 소피아를 쳐다봤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앉아서 얘기하자 말하곤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소피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너무 의외의 인물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이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나 싶다가도 저렇게 눈에 띄는 사람이 또 있을 리가 없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며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킨 채 바보처럼 입을 벌릴 정도였다.
“어? 네가 왜 여기 있어?”
레이먼드가 내 손가락질에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의식적으로 뻗은 손가락을 재빨리 내렸다. 들고 있던 대본을 내리며 레이먼드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너야말로 왜 여기 있지?”
순간 말문이 막혀 우물거리고 있자 소피아와 매튜가 놀란 얼굴로 우리 둘을 번갈아 보았다.
“둘이 아는 사이야?”
“에? 저 스타님이랑 승원이랑 아는 사이라고?”
소피아의 스타님이란 소리에 레이먼드의 표정이 한층 더 구겨졌다. 나는 어리둥절하게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학교에서 같은 반이에요.”
“뭐? 그럼 네가 다니는 학교가 센트레일즈 스쿨이야?”
“네, 뭐…….”
“아니, 나 전혀 몰랐다고. 잠깐! 거기 동양인 인종 차별이 정말 심한 학교 아니야?”
소피아는 이미 내가 다니는 학교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구겨진 얼굴을 펴지 않으며 물었다. 딱히 할 말이 없어 대답하지 않고 머리를 긁적이자, 그녀는 내가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상상이 가는지 더욱 얼굴을 찡그렸다. 그때 소파에 앉아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레이먼드가 입을 열었다.
“어제 책상과 의자가 테이프로 칭칭 감겼다고 하던데.”
점심때 학교에 온 레이먼드에게까지 벌써 소문이 들어간 건가. 하긴, 뿌듯한 표정으로 셀리에게 자랑하던 프레드를 생각하면 신이 나 레이먼드에게도 자랑했을 것 같다. 그 말을 들은 소피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런 유치한 장난을 친다는 거야!”
소피아는 당사자인 나보다 더 흥분한 것 같았다. 덕분에 난 그녀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소피아, 괜찮아요. 이제 익숙해지기도 했고 곧 졸업인데요, 뭐.”
“아니, 익숙해지다니! 그런 일은 익숙해져선 안 되는 거야!”
잔뜩 흥분한 소피아가 콧바람까지 뿜어낼 기세로 씩씩거렸다. 그때 다시 레이먼드가 나를 슬쩍 쳐다봤다.
“그 정도 태권도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가만히 당하고 있지?”
“……태권도?”
“아까 골목에서 한 발차기 말이야.”
설마 아까 그 미친놈과 싸우는 장면을 본 건가? 하긴 회사로 들어오는 골목이었으니까, 그곳에 레이먼드가 있었다고 해서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보고 있었으면 좀 도와 주지. 매정하긴.
아, 그것보다 설마 이쁘다느니 일주일간 지켜봤다느니 하는 대화 내용까지 들은 건 아니겠지? 남자에게 스토킹이라니…… 정말 누군가 알게 된다고 생각만 해도 창피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에게서 별말이 없는 걸 보니 대화 내용까지 듣진 못한 모양이었다.
“별로. 문제 만들고 싶지 않아.”
아무리 얄밉다곤 해도 그 부유한 집안 녀석들에게 아까 미친놈에게 했던 것처럼 발차기를 날린다면, 그날 당장 교장실로 끌려가거나 학교에서 쫓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런 눈치도 볼 것 없는 그는 내 대답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보였다.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레이먼드가 다시 대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이번엔 옆에 있던 소피아가 성화였다. 그녀가 흥분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태권도? 네가 그걸 할 줄 안단 말이야?”
대단하다는 듯 번쩍거리는 눈빛이 조금 부담스러워 손을 저었다.
“한국 남자들은 어릴 때 대부분 태권도 배워요. 대단한 것 아니에요.”
“그치만 그 순진한 얼굴로 박력 있는 태권도라니. 언밸런스한 매력이야!”
소피아의 다소 과한 칭찬에 민망해진 나는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일감을 찾았다.
“어디서부터 청소하면 돼요?”
그제야 매튜가 흥분한 소피아를 진정시키며 팔을 뻗어 책상을 가리켰다.
“우선 저 책상 좀 부탁할게. 중요한 서류가 많으니까 섞이지 않게. 난 잠시 서류 좀 대표님께 넘기고 올게.”
매튜는 서류 봉투 몇 개를 손에 쥐고 여전히 흥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피아를 데리고 나갔다. 아니, 잠깐 둘 다 나가 버리면 레이먼드와 둘만 남는데……. 나가지 말라는 소리가 입 안에서 맴돌았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은 모르는 사람과 있는 것보다 서먹했다. 어색함에 시선을 책상에만 고정하며 종이로 가득 쌓여 있는 책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대부분 서류와 대본들이었는데, 몇 번이나 중요한 서류라고 강조했기에 섞이지 않게 조심하며 정리했다.
한참 집중하며 치우고 있는데 문득 이 공간에 나 말고 한 명이 더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레이먼드가 앉아 있는 소파를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눈이 마주쳐 버렸다. 순간 뜨끔하는 마음에 살짝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레이먼드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웃지말걸. 아마 바보 같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민망함에 미소를 거두고 고개를 숙이자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왜 여기 있어?”
레이먼드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 줄은 몰랐기에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서류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의 질문에 답을 못 했던 것 같아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오늘부터 여기서 알바해. 소피아가 소개시켜 줬거든.”
“알바?”
레이먼드는 알바라는 단어가 생소한지 살짝 눈썹을 들어올렸다.
“응, 요즘 생활비가 떨어지기도 했고…….”
레이먼드는 내 대답에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내가 봐도 그 학비 비싼 부유한 사람만 다니는 학교 학생이 알바라니, 참 아이러니했다. 뭐라고 더 말할지 변명할 말을 찾다가 내가 왜 친하지도 않은 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지란 생각이 들어서 말았다.
아까 놓쳤던 서류를 집어 들고 정리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소파아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야.”
왜 저렇게 궁금한 게 많은 거야. 학교에서는 가끔 시선만 마주쳤을 뿐 대화를 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그와의 대화는 무척 어색했다. 근데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언제 돌아 왔는지 소피아가 그 질문에 대신 답했다.
“내가 승원을 캐스팅할 뻔했거든. 로렌 역에.”
소피아의 말에 레이먼드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캐스팅이라니 우스운 걸까? 괜한 멋쩍음에 서류 정리를 하는 손이 빨라졌다.
“아, 정말 아쉬워. 테스트라도 한번 해 보지. 승원, 레이먼드가 친구라면 연기하는데 더 쉽지 않겠어? 연기 도움도 받을 수도 있을 테고. 아직도 할 생각은 전혀 없는 거야?”
“친구? 아…… 친구 아니에요. 그냥 같은 반. 근데 레이먼드와 연기랑 무슨 상관이에요?”
친구란 말에 레이먼드가 행여나 기분이라도 나빠하면 어쩌나 눈치를 보며 말을 정정했지만,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것 같았다.
“몰랐어? 아, 몰랐겠구나. 내가 안 알려 줬으니까. 하하.”
혼자 묻고 대답하며 즐겁게 웃는 소피아를 보고 있자니 참 첫인상과는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첫인상은 무천이나 도도해 보였는데 말이다.
“내가 너한테 주구장창 말했던 ‘종말의 그날’ 말이야. 그거 주인공이 레이먼드야.”
아, 그 드라마 제목이 종말의 그날이었구나. 거기다 주인공이 레이먼드였다니.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어차피 할 생각도 없었지만 더더욱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때? 레이먼드가 주인공이라고. 저놈 싸가지는 없지만 그래도 연기 하나는 끝내주잖아! 물론, 얼굴도. 대박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소피아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작게 소리를 줄이고 말하자, 레이먼드가 기분 나쁘다는 듯 대본 종이를 세게 넘겼다.
“죄송해요. 저는 별로…….”
내 대답을 약간은 기대했었는지 소피아의 표정이 티 나게 실망감으로 젖었다. 소피아에겐 무척 미안하지만, 다시 연예계로 돌아가라니 그건 나를 지옥으로 떠미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녀에게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그냥 한번 물어본 거야.”
괜한 미안함에 더 열심히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반 정도 서류가 정리되니 책상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났다. 책상 색깔이 갈색이었구나…….
이곳의 정리가 끝나면 소피아의 사무실도 정리해야 했다. 아까 얼핏 봤던 그녀의 책상이 떠올랐다. 여기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던 것 같다. 입을 비집고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조금 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정신없이 청소에 매달렸더니 어느새 매튜가 돌아왔다. 아까 한 번 돌아왔다 나간 뒤 한참 만이었다. 비록 첫날이지만 매튜가 정신없이 바쁘다는 건 알 것 같았다. 소피아도 바쁜지 여기저기 전화를 하며 배우들 프로필로 보이는 서류를 훑어 보고 있었다.
“승원, 미안해. 손이 많이 가지? 원래 이 정도까진 아닌데, 요 며칠 정리를 아예 못 했거든.”
매튜의 말에 작은 안도감이 들었다. 아직 아래층은 손도 대지 못했는데. 매일 이 상태였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니에요. 여기는 곧 마무리될 것 같은데. 소피아, 아래층 바로 시작할까요?”
“아니야.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 해 줘.”
늦었다는 말에 힐끗 시계를 쳐다봤다. 어느새 시간이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와, 시간 가는지도 모르고 정리했다.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다니. 시간을 확인해서 그런지 배도 출출한 느낌이었다. 집에 가서 샌드위치나 만들어 먹고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서류 정리를 마무리지었다.
소피아와 매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여전히 대본을 보고 있는 레이먼드에게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안 하는 건 너무 매정한 것 같아, 그의 뒤통수에 대고 “레이먼드, 내일 학교에서 봐.”라고 말하며 사무실을 나왔다. 사실 내일 학교에 안 나올 수도 있지만 형식적인 말이니까 상관없지 싶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어깨가 결려 어깨를 주무르면서 왔다. 장시간 손을 사용해서 그런지 팔이 뻐근하게 저려 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뛰어들었다. 배에서 밥을 달라며 크게 천둥이 치고 있었지만, 피곤함이 배고픔을 잡아먹어 버렸다. 씻기도 귀찮고 옷을 갈아입을 힘도 없어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몸이 힘든 것도 힘든 거였지만 갑작스러운 레이먼드와의 만남에 신경이 곤두서 두 배로 힘들었던 것 같다. 다행히 레이먼드는 사무실에 잘 안 온다고 했으니까. 더 이상 그와 만날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사방이 어둠으로 잠식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깜깜했다. 여긴 어디지? 주변을 둘러보다 금세 이곳이 어딘지 알아차렸다. 이곳은 고독하고 쓸쓸한 내 꿈속이었다. 지겹지도 않은지 나를 고통으로 몰아넣을 꿈이 다시금 나를 찾아온 것이다.
찰칵찰칵, 카메라 소리가 들렸다.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밝게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에 눈을 질끈 감았다. 수십, 아니, 수백 명의 기자들이 내뱉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귀를 괴롭혔다.
‘박승원 씨, 변명이 있다면 한마디 해 주시죠.’
‘지금 사실을 인정하시는 겁니까? 박승원 씨, 대답해 주세요.’
‘검찰 출두를 거부하셨다는데,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충격을 받았을 팬들에게 한마디 해 주시죠.’
시끄러워. 아니야, 아니라고! 그만…… 제발, 나 좀 나둬 주세요. 내 잘못이 아니야.
있는 힘껏 소리치고 싶지만 이빨을 드러낸 맹수처럼 나를 위협하는 카메라에, 공포에 질려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바보처럼,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기만 했다. 이때로 돌아간다면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아니, 다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을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던 소용없을 것이다. 이미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을 테니까.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꼭 이런다. 피곤에 지쳐 푹 자고 싶을 때마다 나를 놀리듯, 예전의 악몽을 까먹지 말라는 듯 그날 일이 꿈속에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오늘도 퉁퉁 부운 눈을 끔뻑이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어제 결린 어깨가 한층 더 무거워진 것 같다.
기지개를 쭉 펴며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이 몸에 닿으니 조금 근육이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럴 땐 따끈한 탕에 들어가 몸을 푹 담그는 게 최고인데. 점점 더 늘어지는 몸과 마음을 다잡고 기분 좋은 온도로 흐르는 물을 억지로 껐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오는데 배가 고팠다. 슬쩍 배를 한번 쓸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피곤해서 저녁도 못 먹고 잠들었구나. 곧 천둥이 칠 것 같은 배를 매만지며 얼른 토스트 기계에 식빵을 넣었다. 수건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옷장을 열어 재빨리 교복을 입었다. 마지막으로 토스트 기계에서 올라온 빵을 우적우적 씹으며 집을 나섰다.
“하아, 하아. 역시 너무 이뻐. 집에서 나오질 않아서 얼마나 기회를 엿보았는지 몰라. 사실 어제 마트에서 나오는 널 우리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놓쳐 버렸지. 지금 생각해도 열받아.”
남자가 어제를 떠올리는 듯 붙잡은 손목에 더 세게 힘을 주었다. 쩌릿한 고통에 윽, 하고 신음을 뱉었지만 그의 손이 입을 틀어막고 있어 소리가 새어 나가진 않았다. 남자는 흥분한 듯 역겨운 얼굴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어젠 너무 열이 받아서 지나가는 동양인을 아무나 붙잡고 얼굴을 두드려 팼다고. 가엽게도, 살려 달라고 우는 모습이 어찌나 자극적이던지. 어젠 조금 과했지. 대신 오늘은 기분이 아주 좋아.”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 새끼 역대급이다.
“오오, 걱정 마! 너에겐 그럴 일 없어. 정말로 친절하게 대해 줄 거야. 자! 어서 우리 집으로 가자. 여기까지 쫓아오느라 힘들었다고.”
내 일그러진 표정이 겁을 먹어서라고 생각했는지, 미친놈은 자신의 친절함을 한껏 어필했다. 집으로 데려갈 거면 차라리 때려라, 이 변태 사이코야. 나는 씁, 하고 크게 숨을 모았다. 그래, 이럴 때 쓰라고 돈 내면서 태권도 학원을 다녔던 거였지. 나는 울면서 배웠던 태극 품새 8장을 떠올렸다.
사범님, 감사합니다.
미친놈의 손을 재빨리 쳐 내고 두 주먹을 가슴 위로 올렸다가 내렸다.
“어이!”
배에 힘을 꽉 주고 크게 기합을 외치니 미친놈의 표정이 좀 기괴하게 변하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놈에게 달려가 앞차기로 턱을 찼다. 몸뚱이가 하도 사람 같지 않아 꼼짝도 안 하면 어쩌지 했는데 다행히 제대로 통했는지 미친놈은 비틀거리며 턱을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놈이 살벌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자 다시 한번 “어이!”를 외쳤다. 남자가 흠칫하며 몸을 살짝 뒤로 물렸지만 놓치지 않고 옆차기로 얼굴을 전통으로 때려 주었다.
“으아아악!”
이번엔 조금 더 효과가 있었는지, 남자가 아픈 듯 비명을 내 지르며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조금의 틈도 주지 않으려 다시 한번 “어이!!” 기합을 넣자 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잠, 잠깐……!”
놈에게 빠르게 달려가 다리에 힘을 주고 돌려차기로 마무리를 해 주었다. 그제야 미친놈이 털썩, 하고 쓰러졌다. 하도 등 빨이 좋은 놈이라 이렇게까지 발차기를 했는데도 아직까지 꿈틀꿈틀 움직여 댔다.
“앞으로 또 한 번 내 앞에 나타나면, 네놈 면상을 푸딩처럼 물렁물렁하게 만들어 주마.”
아까 먹은 푸딩이 떠올라 들먹여 경고한 후 시계를 슬쩍 쳐다봤다. 아, 지각인데. 벌써 시간이 30분이나 지체했다. 마음이 급해져 거의 달리는 듯한 걸음으로 회사건물 앞에 도착했다. 그대로 회사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무뚝뚝해 보이는 경비원이 나를 막아섰다.
“무슨 일이시죠?”
“아, 오늘 청소부 알바하러 왔는데요.”
“……청소부?”
청소부라고 하지, 그의 표정이 의심스럽게 변했다. 하긴, 어려 보이는 동양인 남자가 청소부라니 나 같아도 이상하긴 하겠다.
“아! 소피아 소개로 왔습니다.”
경비원의 표정에 재빨리 소피아의 이름을 대자 그의 험악한 기세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남자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전화기를 들었다. 잠시 후 소피아와 대화가 끝났는지 경비원이 들어가라며 출입문을 열어 주었다. 10층으로 올라가라는 경비원의 말에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0층을 눌렀다. 멍하니 바뀌는 숫자만 바라보다 힐끗 주위를 살펴보았다.
회사가 커서 그런지 시설도 무척 좋았다. 심지어 엘리베이터도 좋네. 소피아는 좋은 회사를 다니고 있었구나. 실없는 생각을 몇 번에 벌써 10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활짝 열렸다.
깨끗한 복도에 들어서 두리번거리며 사무실을 구경했다. 층 전체가 한 사무실인지 옆면은 안이 훤히 보이는 유리문으로 덮여 있었다. 왼편으로 걸음을 옮기자 유리문 안에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소피아가 보였다. 환경 때문인지 왠지 소피아가 낯설게 느껴졌다.
위압감마저 드는 사무실에 들어가도 되나 싶어 잠시 가만히 서 있자, 서성거리는 날 발견한 소피아가 웃으며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소피아가 앞쪽에 있는 고급 가죽 소파에 앉으라고 눈짓했다. 여전히 어색하긴 했지만 푹신한 소파에 앉아 소피아가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
“네, 그럼 자세한 사항은 메일로 보내 드릴게요, 내일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소피아가 책상에서 일어나 내 맞은편에 앉았다. 다리를 꼬며 전화 전 마시던 거였는지 다 식은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웬일로 조금 늦었네?”
“아, 오는 길에 일이 좀 있어서요. 죄송해요.”
“뭐, 죄송할 것까진 없어. 근데 무슨 일?”
“……그냥 조금 사소한 일이요. 아, 지금부터 일하면 되나요?”
소피아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남자에게 스토킹당했다는 얘긴 창피해서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티 나게 말을 돌렸지만 다행히 소피아는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응. 네가 할 일은 사무실 청소랑 서류 정리 정도가 다야. 11층에 사무실이 하나 더 있거든? 거기랑 여기만 부탁 좀 할게.”
“사무실 안만 청소하면 되는 건가요? 생각보다 간단하네요.”
“응. 근데 대부분 서류 정리를 도와주는 것 위주로 일하게 될 거야. 중요한 서류가 많으니까 꼭 신경 써서 부탁해.”
“네.”
“아, 11층도 간단히 인사시켜 줄게. 거긴 매니지먼트실이야. 가끔 스타님께서 방문하시는데, 거의 안 오니까 신경 쓸 것 없어.”
“스타요?”
“응, 잘난 스타시지. 웬만하면 얽히지 마. 승질이 고약하거든.”
“네.”
소피아가 남은 커피를 한 입 더 들이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취하는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가며 방금 소피아가 했던 말을 되짚어 보았다. 소피아가 스타님이라 말하는 극존칭 속에는 비꼼이 듬뿍 당겨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승질이 어지간히 고약한 게 아닌가 보네.
뭐, 나랑은 별로 상관없는 일이겠지.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이곳에 자주 오지도 않는다고 하니까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소피아를 따라 한 층 더 올라가니 10층같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는 사무실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문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우리를 보고 사람 좋게 웃었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남자는 먼저 소피아와 인사를 하고 몸을 틀어 나를 바라봤다.
“어제 내가 말했지. 승원 박이야. 오늘부터 사무실 정리 도와줄 예정이고.”
“네가 승원이구나? 소피아에게 말 많이 들었어. 나는 매튜라고 해.”
“아, 반가워요.”
“소피아에게 들었지만 정말 매력적으로 생겼구나. 정말 로렉 역과 잘 어울리는 얼굴이야.”
매튜의 말에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소피아가 매튜에게 그런 말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 내가 당황해하자 매튜가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손을 올리고 내 귀에 살짝 속삭였다.
“사실, 소피아가 로렌 역은 너밖에 없다며 술 마실 때마다 주정을 부리거든.”
매튜의 말에 소피아를 쳐다봤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앉아서 얘기하자 말하곤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소피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너무 의외의 인물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이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나 싶다가도 저렇게 눈에 띄는 사람이 또 있을 리가 없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며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킨 채 바보처럼 입을 벌릴 정도였다.
“어? 네가 왜 여기 있어?”
레이먼드가 내 손가락질에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의식적으로 뻗은 손가락을 재빨리 내렸다. 들고 있던 대본을 내리며 레이먼드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너야말로 왜 여기 있지?”
순간 말문이 막혀 우물거리고 있자 소피아와 매튜가 놀란 얼굴로 우리 둘을 번갈아 보았다.
“둘이 아는 사이야?”
“에? 저 스타님이랑 승원이랑 아는 사이라고?”
소피아의 스타님이란 소리에 레이먼드의 표정이 한층 더 구겨졌다. 나는 어리둥절하게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학교에서 같은 반이에요.”
“뭐? 그럼 네가 다니는 학교가 센트레일즈 스쿨이야?”
“네, 뭐…….”
“아니, 나 전혀 몰랐다고. 잠깐! 거기 동양인 인종 차별이 정말 심한 학교 아니야?”
소피아는 이미 내가 다니는 학교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구겨진 얼굴을 펴지 않으며 물었다. 딱히 할 말이 없어 대답하지 않고 머리를 긁적이자, 그녀는 내가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상상이 가는지 더욱 얼굴을 찡그렸다. 그때 소파에 앉아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레이먼드가 입을 열었다.
“어제 책상과 의자가 테이프로 칭칭 감겼다고 하던데.”
점심때 학교에 온 레이먼드에게까지 벌써 소문이 들어간 건가. 하긴, 뿌듯한 표정으로 셀리에게 자랑하던 프레드를 생각하면 신이 나 레이먼드에게도 자랑했을 것 같다. 그 말을 들은 소피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런 유치한 장난을 친다는 거야!”
소피아는 당사자인 나보다 더 흥분한 것 같았다. 덕분에 난 그녀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소피아, 괜찮아요. 이제 익숙해지기도 했고 곧 졸업인데요, 뭐.”
“아니, 익숙해지다니! 그런 일은 익숙해져선 안 되는 거야!”
잔뜩 흥분한 소피아가 콧바람까지 뿜어낼 기세로 씩씩거렸다. 그때 다시 레이먼드가 나를 슬쩍 쳐다봤다.
“그 정도 태권도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가만히 당하고 있지?”
“……태권도?”
“아까 골목에서 한 발차기 말이야.”
설마 아까 그 미친놈과 싸우는 장면을 본 건가? 하긴 회사로 들어오는 골목이었으니까, 그곳에 레이먼드가 있었다고 해서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보고 있었으면 좀 도와 주지. 매정하긴.
아, 그것보다 설마 이쁘다느니 일주일간 지켜봤다느니 하는 대화 내용까지 들은 건 아니겠지? 남자에게 스토킹이라니…… 정말 누군가 알게 된다고 생각만 해도 창피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에게서 별말이 없는 걸 보니 대화 내용까지 듣진 못한 모양이었다.
“별로. 문제 만들고 싶지 않아.”
아무리 얄밉다곤 해도 그 부유한 집안 녀석들에게 아까 미친놈에게 했던 것처럼 발차기를 날린다면, 그날 당장 교장실로 끌려가거나 학교에서 쫓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런 눈치도 볼 것 없는 그는 내 대답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보였다.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레이먼드가 다시 대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이번엔 옆에 있던 소피아가 성화였다. 그녀가 흥분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태권도? 네가 그걸 할 줄 안단 말이야?”
대단하다는 듯 번쩍거리는 눈빛이 조금 부담스러워 손을 저었다.
“한국 남자들은 어릴 때 대부분 태권도 배워요. 대단한 것 아니에요.”
“그치만 그 순진한 얼굴로 박력 있는 태권도라니. 언밸런스한 매력이야!”
소피아의 다소 과한 칭찬에 민망해진 나는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일감을 찾았다.
“어디서부터 청소하면 돼요?”
그제야 매튜가 흥분한 소피아를 진정시키며 팔을 뻗어 책상을 가리켰다.
“우선 저 책상 좀 부탁할게. 중요한 서류가 많으니까 섞이지 않게. 난 잠시 서류 좀 대표님께 넘기고 올게.”
매튜는 서류 봉투 몇 개를 손에 쥐고 여전히 흥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피아를 데리고 나갔다. 아니, 잠깐 둘 다 나가 버리면 레이먼드와 둘만 남는데……. 나가지 말라는 소리가 입 안에서 맴돌았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은 모르는 사람과 있는 것보다 서먹했다. 어색함에 시선을 책상에만 고정하며 종이로 가득 쌓여 있는 책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대부분 서류와 대본들이었는데, 몇 번이나 중요한 서류라고 강조했기에 섞이지 않게 조심하며 정리했다.
한참 집중하며 치우고 있는데 문득 이 공간에 나 말고 한 명이 더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레이먼드가 앉아 있는 소파를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눈이 마주쳐 버렸다. 순간 뜨끔하는 마음에 살짝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레이먼드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웃지말걸. 아마 바보 같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민망함에 미소를 거두고 고개를 숙이자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왜 여기 있어?”
레이먼드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 줄은 몰랐기에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서류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의 질문에 답을 못 했던 것 같아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오늘부터 여기서 알바해. 소피아가 소개시켜 줬거든.”
“알바?”
레이먼드는 알바라는 단어가 생소한지 살짝 눈썹을 들어올렸다.
“응, 요즘 생활비가 떨어지기도 했고…….”
레이먼드는 내 대답에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내가 봐도 그 학비 비싼 부유한 사람만 다니는 학교 학생이 알바라니, 참 아이러니했다. 뭐라고 더 말할지 변명할 말을 찾다가 내가 왜 친하지도 않은 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지란 생각이 들어서 말았다.
아까 놓쳤던 서류를 집어 들고 정리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소파아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야.”
왜 저렇게 궁금한 게 많은 거야. 학교에서는 가끔 시선만 마주쳤을 뿐 대화를 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그와의 대화는 무척 어색했다. 근데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언제 돌아 왔는지 소피아가 그 질문에 대신 답했다.
“내가 승원을 캐스팅할 뻔했거든. 로렌 역에.”
소피아의 말에 레이먼드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캐스팅이라니 우스운 걸까? 괜한 멋쩍음에 서류 정리를 하는 손이 빨라졌다.
“아, 정말 아쉬워. 테스트라도 한번 해 보지. 승원, 레이먼드가 친구라면 연기하는데 더 쉽지 않겠어? 연기 도움도 받을 수도 있을 테고. 아직도 할 생각은 전혀 없는 거야?”
“친구? 아…… 친구 아니에요. 그냥 같은 반. 근데 레이먼드와 연기랑 무슨 상관이에요?”
친구란 말에 레이먼드가 행여나 기분이라도 나빠하면 어쩌나 눈치를 보며 말을 정정했지만,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것 같았다.
“몰랐어? 아, 몰랐겠구나. 내가 안 알려 줬으니까. 하하.”
혼자 묻고 대답하며 즐겁게 웃는 소피아를 보고 있자니 참 첫인상과는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첫인상은 무천이나 도도해 보였는데 말이다.
“내가 너한테 주구장창 말했던 ‘종말의 그날’ 말이야. 그거 주인공이 레이먼드야.”
아, 그 드라마 제목이 종말의 그날이었구나. 거기다 주인공이 레이먼드였다니.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어차피 할 생각도 없었지만 더더욱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때? 레이먼드가 주인공이라고. 저놈 싸가지는 없지만 그래도 연기 하나는 끝내주잖아! 물론, 얼굴도. 대박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소피아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작게 소리를 줄이고 말하자, 레이먼드가 기분 나쁘다는 듯 대본 종이를 세게 넘겼다.
“죄송해요. 저는 별로…….”
내 대답을 약간은 기대했었는지 소피아의 표정이 티 나게 실망감으로 젖었다. 소피아에겐 무척 미안하지만, 다시 연예계로 돌아가라니 그건 나를 지옥으로 떠미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녀에게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그냥 한번 물어본 거야.”
괜한 미안함에 더 열심히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반 정도 서류가 정리되니 책상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났다. 책상 색깔이 갈색이었구나…….
이곳의 정리가 끝나면 소피아의 사무실도 정리해야 했다. 아까 얼핏 봤던 그녀의 책상이 떠올랐다. 여기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던 것 같다. 입을 비집고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조금 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정신없이 청소에 매달렸더니 어느새 매튜가 돌아왔다. 아까 한 번 돌아왔다 나간 뒤 한참 만이었다. 비록 첫날이지만 매튜가 정신없이 바쁘다는 건 알 것 같았다. 소피아도 바쁜지 여기저기 전화를 하며 배우들 프로필로 보이는 서류를 훑어 보고 있었다.
“승원, 미안해. 손이 많이 가지? 원래 이 정도까진 아닌데, 요 며칠 정리를 아예 못 했거든.”
매튜의 말에 작은 안도감이 들었다. 아직 아래층은 손도 대지 못했는데. 매일 이 상태였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니에요. 여기는 곧 마무리될 것 같은데. 소피아, 아래층 바로 시작할까요?”
“아니야.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 해 줘.”
늦었다는 말에 힐끗 시계를 쳐다봤다. 어느새 시간이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와, 시간 가는지도 모르고 정리했다.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다니. 시간을 확인해서 그런지 배도 출출한 느낌이었다. 집에 가서 샌드위치나 만들어 먹고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서류 정리를 마무리지었다.
소피아와 매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여전히 대본을 보고 있는 레이먼드에게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안 하는 건 너무 매정한 것 같아, 그의 뒤통수에 대고 “레이먼드, 내일 학교에서 봐.”라고 말하며 사무실을 나왔다. 사실 내일 학교에 안 나올 수도 있지만 형식적인 말이니까 상관없지 싶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어깨가 결려 어깨를 주무르면서 왔다. 장시간 손을 사용해서 그런지 팔이 뻐근하게 저려 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뛰어들었다. 배에서 밥을 달라며 크게 천둥이 치고 있었지만, 피곤함이 배고픔을 잡아먹어 버렸다. 씻기도 귀찮고 옷을 갈아입을 힘도 없어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몸이 힘든 것도 힘든 거였지만 갑작스러운 레이먼드와의 만남에 신경이 곤두서 두 배로 힘들었던 것 같다. 다행히 레이먼드는 사무실에 잘 안 온다고 했으니까. 더 이상 그와 만날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사방이 어둠으로 잠식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깜깜했다. 여긴 어디지? 주변을 둘러보다 금세 이곳이 어딘지 알아차렸다. 이곳은 고독하고 쓸쓸한 내 꿈속이었다. 지겹지도 않은지 나를 고통으로 몰아넣을 꿈이 다시금 나를 찾아온 것이다.
찰칵찰칵, 카메라 소리가 들렸다.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밝게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에 눈을 질끈 감았다. 수십, 아니, 수백 명의 기자들이 내뱉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귀를 괴롭혔다.
‘박승원 씨, 변명이 있다면 한마디 해 주시죠.’
‘지금 사실을 인정하시는 겁니까? 박승원 씨, 대답해 주세요.’
‘검찰 출두를 거부하셨다는데,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충격을 받았을 팬들에게 한마디 해 주시죠.’
시끄러워. 아니야, 아니라고! 그만…… 제발, 나 좀 나둬 주세요. 내 잘못이 아니야.
있는 힘껏 소리치고 싶지만 이빨을 드러낸 맹수처럼 나를 위협하는 카메라에, 공포에 질려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바보처럼,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기만 했다. 이때로 돌아간다면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아니, 다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을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던 소용없을 것이다. 이미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을 테니까.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꼭 이런다. 피곤에 지쳐 푹 자고 싶을 때마다 나를 놀리듯, 예전의 악몽을 까먹지 말라는 듯 그날 일이 꿈속에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오늘도 퉁퉁 부운 눈을 끔뻑이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어제 결린 어깨가 한층 더 무거워진 것 같다.
기지개를 쭉 펴며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이 몸에 닿으니 조금 근육이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럴 땐 따끈한 탕에 들어가 몸을 푹 담그는 게 최고인데. 점점 더 늘어지는 몸과 마음을 다잡고 기분 좋은 온도로 흐르는 물을 억지로 껐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오는데 배가 고팠다. 슬쩍 배를 한번 쓸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피곤해서 저녁도 못 먹고 잠들었구나. 곧 천둥이 칠 것 같은 배를 매만지며 얼른 토스트 기계에 식빵을 넣었다. 수건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옷장을 열어 재빨리 교복을 입었다. 마지막으로 토스트 기계에서 올라온 빵을 우적우적 씹으며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