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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타 너의 스타 4화
빵을 하나 더 구웠어야 하는데. 아쉬움을 달래며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설 때였다.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뒤에서 딜런이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승원! 식당 말고 여기서 만나니까 더 반가운데?”
“어, 안녕. 이제 학교 오는 거야?”
“응. 오늘 늦잠 자서. 아슬아슬하게 맞춰 왔네.”
딜런이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곤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너도 늦잠 잔 거야?”
“아니. 난 원래 이 시간에 학교에 와.”
“아……. 맞다. 별일 없었지? 동양인만 노린다는 묻지 마 폭행 말이야. 걱정됐다고.”
딜런이 내가 빠듯한 시간에 맞춰서 오는 이유를 눈치챘는지 급하게 말을 돌렸다.
“아, 그렇지 않아도 말해 주려고 했는데. 나 어제 그 미친놈 만났어.”
“뭐?”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딜런이 몹시 놀라며 걸음까지 멈춰 세웠다.
“대체 무슨 소리야! 어디 다치진 않았어?”
그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지었다.
“보는 대로. 하나도 안 다쳤어.”
태평한 내 대답에 딜런은 그제야 심각했던 표정을 풀고 조금 허탈하다는 듯 멈췄던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아니, 나 지금 너무 충격적이야. 네가 전 피하자들 사진을 못 봐서 그러나 본데. 진짜 충격적이야. 특히 마지막 피해자는……. 아무튼 그 가해자를 만났다는 거지?”
“안 그래도 나한테도 얌전히 있지 않으면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하더라고.”
“얌전히? 그게 무슨 말이야. 얌전히 맞으라는 거야?”
딜런의 말에 불쾌한 어제 기억이 떠올라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실 그 사람 동양인을 미워하는 게 아니었더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동양인을 좋아한대. 특히 나한테 반했다고 하더라. 무려 일주일전에.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등치 큰 사람이 일주일씩이나 쫓아다녔는데…….”
“뭐? 그럼 어떻게 도망친 거야. 누가 구해 준 거야?”
“아니, 그냥 발로 찼는데.”
내 말에 딜런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튼 다시 나타나면 푸딩으로 만들어 준다고 했으니, 이젠 내 앞에 안 나타날 거야.”
“푸딩……?”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곤 멍하니 서 있는 딜런을 계단 쪽으로 밀었다.
“이제 진짜 수업 시작하겠다. 한 층 위잖아. 어서 서둘러.”
복도엔 어느새 학생들의 모습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얼른 올라가라고 딜런을 재촉했지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다 정말 지각이라도 하겠다 싶을 때쯤 이내 손을 크게 흔들며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이따 점심 같이 먹는 거 알지?’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라커에서 책을 꺼내 들고 클래스 안으로 들어갔다.
***
수업이 끝나고 바로 사무실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레이먼드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눈치 볼 사람도 없어서 그런지 프레드의 행동이 조금 더 짓궂었다. 하루 종일 나를 따라다니며 꼬투리를 잡는데,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레이먼드가 학교에 오든 말든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가 등교하는 게 나한테 더 좋은 것 같다. 그래도 레이먼드가 있으면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니까.
회사 입구에 들어서니 어제 보았던 무뚝뚝해 보이는 경비원이 서 있었다. 슬쩍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그가 출입문 입구를 열어 주었다. 10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오늘도 바빠 보이는 소피아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살짝 눈치를 보며 안으로 들어가자 소피아가 눈인사를 해 왔다.
그녀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익숙한 이름의 대본이 놓여 있었다. ‘종말의 그날’ 대본이었다. 하도 소피아에게 로렌 역에 대해 들어서일까. 대본이 대체 무슨 내용일까 조금 관심이 갔다.
창밖을 보며 통화를 하고 있는 소피아를 슬쩍 보다 대본을 집어 들었다. 대충 내용만 훑어 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더 흡입력이 강했다. 나도 모르게 대충 넘기던 손을 멈추고 꼼꼼히 한 글자씩 읽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대본에 관심이 생긴 거야?”
깜짝 놀라 들고 있던 대본을 빠르게 덮었다. 소피아가 흥미롭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푹 빠졌는지 그녀가 전화를 끊고 이곳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읽고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론 뒷내용이 궁금해 더 보고 싶었지만, 그러면 날 로렌 역으로 세우겠단 소피아의 집착이 더 심해질 것 같아 들고 있던 대본을 다시 테이블 위로 올렸다.
“아니야, 더 봐도 돼.”
“아니에요. 그냥 기다리기 심심해서 잠깐 본 것뿐이에요.”
“난 또. 관심이라도 조금 생긴 줄 알았지.”
한결같은 내 대답에 또다시 실망한 표정을 짓는 소피아였다.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여기 서류들 정리하면 되는 거죠?”
“아, 어. 여기 있는 것들 어제처럼 종류별로 묶어서 순서대로 정리해 주면 돼. 오늘은 내가 밖에 볼일이 있어서 나가 봐야 하는데 괜찮겠어?”
“네, 어제 보기도 했고. 문제없을 것 같아요.”
“응. 혹시 모르는 거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거나 위층에 매튜 있으니까, 물어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자 소피아도 싱긋 따라 웃으며 서류 몇 개를 가방에 넣고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 문을 나섰다.
“그럼 수고해!”
“네.”
소피아가 정말 바쁘긴 한가 보다. 나는 정리를 위해 소피아의 책상을 훑어보았다.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 그녀의 책상이 어제 매튜의 책상보다 조금 더 어지러웠다.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후딱 끝내야지. 팔을 걷어붙이고 빠르게 서류를 집어 들었다.
한참 서류 정리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매튜가 투명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 매튜. 안녕하세요.”
“승원, 열심히구나. 힘들지?”
“아니에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 사실 부탁 하나만 하려고.”
“부탁이요?”
매튜가 미안한 얼굴로 살짝 뜸을 들이다 말했다.
“지금 내가 급하게 가 봐야 할 곳이 있어서 카페에 들릴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나 대신 카페에서 음식 좀 사 와 줄 수 있겠니?”
생각보다 간단한 부탁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떤 거 사 오면 돼요?”
“호밀 샌드위치랑 아메리카노 샷 해서 한 잔 부탁할게.”
샷 라니 쓰게도 먹는구나. 달달한 걸 좋아하는 나로선 아메리카노는 무슨 맛으로 먹나 싶었다.
“네, 어디다 둘까요?”
“11층에…… 어, 네. 여보세요? 네네, 지금 출발했습니다.”
뭔가 급한 일인지 매튜가 전화를 받으며 카드를 건네주었다. 그러곤 고맙다는 듯 눈인사를 하고 급하게 사무실을 나갔다. 안 그래도 서류 정리하느라 팔이 뻐근했는데 산책할 겸 다녀오면 딱일 것 같았다. 카드를 주머니에 넣고 사무실을 나섰다.
카페에 도착하니 진한 원두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매튜가 부탁했던 호밀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케익 쇼 케이스를 구경했다. 먹음직스러운 케익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 돈도 가지고 오는 건데……. 아쉬움에 배를 한번 쓸었다. 슬슬 배가 아우성 칠 때가 된 것 같아서였다.
“샌드위치랑 커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살짝 상자를 열어 샌드위치를 구경했다. 안 그래도 어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려고 했는데, 결국 다 포기하고 잠을 선택했던 것이 생각났다. 상자 안엔 세 조각의 샌드위치가 들어 있었는데, 내용물이 조금씩 달랐다. 도톰하니 알차게도 들어갔다. 다음에 돈을 가지고 와 꼭 여기서 샌드위치를 사 먹을 거라고 다짐하며 군침을 삼켰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 나는 11층을 누르고 멍하니 앞을 보았다. 그냥 사무실 책상에 두고 오면 되는 건가? 왠지 매튜는 달달한 케이크를 좋아할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어쩐지 샷 한 아메리카노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11층에 도착했다. 곧바로 투명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
어제와 똑같은 자세로 소파에 앉아 대본을 보고 있는 레이먼드가 보였다. 있을 줄은 몰랐는데. 조금 놀랐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매튜의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책상 앞에 다가선 내가 음식을 내려놓는 순간, 뒤에서 레이먼드의 음성이 들렸다.
“가져와.”
갑작스러운 음성에 뒤를 홱 돌아보았다. 레이먼드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무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응? 뭐라고?”
“가져오라고.”
“……뭘.”
뜬금없는 그의 말에 당황한 나는 뭘 가지고 오라고 한 건지 생각해야 했다. 저 무서운 얼굴하며, 낮게 내리깐 목소리하며. 불량배를 만난 이 느낌은 뭐지. 설마 돈을……?
“나 돈 없는데…….”
“…….”
들려오는 말은 없었지만 매우 언짢아 보이는 그의 표정이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돈 달라고 한 게 아니었나 보네.
“그거, 샌드위치.”
“아아, 이거? 뭐야. 네 거였어?”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에 올려 두었던 샌드위치 상자와 커피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와, 무슨 샷까지 해서 먹냐. 샌드위치를 받아 든 레이먼드가 박스에서 꺼낸 샌드위치를 하나 꺼내 베어 물었다. 그가 눈을 들어 올려 왜 안 나가냐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사실 나도 바로 나가려고 했는데 샌드위치를 보는 순간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난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서 멍하니 샌드위치를 바라봤다.
꼬르르륵.
아…… 진짜. 그냥 빨리 나갈걸. 자괴감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방금 소리 들었겠지? 모른 척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소리였다. 못 듣는 게 이상하지. 쪽팔림에 슬쩍 레이먼드를 쳐다봤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 듯 대본만 보고 있었다.
뭐야, 못 들은 건가? 아, 그래. 대본에 집중해서 못 들었을 수도 있겠구나.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빠르게 문으로 향했다.
“이거 가져가.”
레이먼드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그가 샌드위치 박스를 눈짓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뭐야, 쓰레기까지 치우라는 건가? 아, 맞다. 나 청소부지. 순간 잊을 뻔한 내 정체성을 다시 한번 되뇌며 상자를 들어 올렸는데 꽤 묵직했다. 열려진 틈새 사이에 샌드위치가 두 조각이나 그대로 남아 있었다.
뭐지, 더 안 먹는 건가?
“이거 남았는데.”
“버리든지, 알아서 처리해.”
“어? 진짜?”
레이먼드의 말에 순간적으로 눈까지 휘며 기뻐해 버렸다. 아, 너무 티 나게 좋아했나. 레이먼드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민망함에 얼른 표정 관리를 했다. 그러곤 혹여나 그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할까, 샌드위치 상자를 꼭 부여잡고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와 허겁지겁 샌드위치를 흡입했다.
맛은 두말할 것 없이 최고였다.
오늘은 최악의 날이었다. 다름 아닌 미술 수업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연달아 두 시간 수업이었는데, 크로키 북을 들고 나가, 학교 내에서 자율적으로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돌아오는 수업 방식이었다. 저번에 걷었던 크로키 북을 교탁에서 가지고 왔다. 주변의 눈치를 보며 슬쩍 크로키 북을 열었다.
사실, 나는 그림에 아주 소질이 없었다. 분명 저번 시간에 그린 건 옆 건물 식물원 안에 피었던 예쁜 꽃이었건만, 정작 크로키 북 속에 있는 그림은 구불구불거리는 해괴망측한 이상 물체였다. 심지어 이 그림은 반 학생들 대부분이 본 그림이었다.
그날 그림을 그리고 돌아왔을 때, 프레드가 크로키 북을 제출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서 이걸 빼앗아 웃으며 반 전체 학생들에게 보여 주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지금 까지 프레드의 놀림 중 가장 창피했던 경험이었다.
그때 쪽팔림에 기필코 집에 가서 그림 연습을 하겠노라 결심했지만, 막상 집에 돌아오고 보니 귀찮다는 생각에, 그냥 생긴 대로 살자 하며 내 자신을 납득시켰었다. 하지만 오늘 와서야 연습 좀 할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작은 한숨을 내쉬며 크로키 북을 닫는데, 프레드가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어이, 칭크. 오늘은 어떤 그림을 그려서 웃겨 줄 거야?”
프레드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나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오늘 그림을 그려 오면 정말 프레드와 반 학생들에게 웃음을 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였다. 하지만 저번 주 슬쩍 본 프레드의 그림도 만만치 않았다. 그 나물에 그 밥이면서.
“웃고 싶으면 네 그림이나 보고 웃지 그래?”
본인도 제 그림 실력을 아는지 프레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마도 자신이 무시하는 동양인에게 치부를 들킨 것이 몹시 분한 모양이었다. 펄쩍 뛰던 프레드가 홱 몸을 돌려 클래스 밖으로 나갔다. 뒷모습에서도 분한 게 느껴졌다. 그 뒤를 조지와 메이슨이 빠른 걸음으로 쫓아갔다.
반 애들이 나가고 오늘도 제일 마지막으로 교실을 나갔다. 자주 가는 식물원으로 걸음을 옮기다 멈춰 섰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없는 장소를 찾다 보니 항상 그림을 그릴 때마다 식물원으로 향했었다. 덕분에 크로키 북 속엔 온통 꽃 그림뿐이었다.
분명 오늘도 프레드는 그림을 보려고 할 텐데.
아무래도 꽃은 그리기 어려우니까 다른 쉬운 걸 그려보자는 생각에 학교를 천천히 돌아다녔다. 2층을 돌아다니다 피아노 룸을 발견했다. 2층의 피아노 룸은 총 세 방이 있었는데,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이곳으로 와서 피아노를 치곤 했다. 난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지만.
피아노 구경이라도 해 볼까 해서 첫 번째 룸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나 피아노를 쳐 보고 싶어졌다. 뚜껑을 열고 띵, 한 음을 쳐 봤다. 익숙하고도 그리운 음이 귓가에 맴돌았다. 순간 몸에서 찌릿하고 전율이 흘렀다, 오랜만에 맛본 감각에 더 많은 소리를 내고 싶다는 욕구가 피어올랐다.
나는 가만히 피아노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검고 흰 건반을 손바닥으로 쓱, 한번 쓸었다. 그리웠다. 악기, 음악이란 것에 목말라 있었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손가락을 가져가 노래와 함께 건반을 쳐 나갔다.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쿵.
갑작스레 들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건반에서 손을 뗐다. 뭐지? 의자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프레드? 쟤가 여기 웬일이지. 설마 방금 내가 친 피아노와 노래, 들은 건 아니겠지. 만약 들었다면 이 나이에 동요나 부르고 있다는 것을 들켰다는 건데 정말 창피할 것 같다.
하긴, 만약 그가 들었다면 저렇게 가만히 있진 않을 것이다. 분명 신이 나서 놀려 댔겠지. 나는 다시 룸 안으로 들어와 크로키 북을 열었다. 바닥에 앉아 피아노를 열심히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슬슬 엉덩이가 아파 와 흘끔 시계를 보니 벌써 수업을 마치기 15분 전이었다. 슬슬 그림을 마무리 지어야 할 시간이었다. 연필을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팔을 뻗어 내가 그린 그림을 감상했다. 눈을 얇게 뜨고 찬찬히 살폈다. 분명 내가 그린 것은 고급스러운 그랜드 피아노인데…….
흠, 지금까지 그림이 흉측했던 건 꽃이 그리기 어려워서가 아니었구나. 그냥, 내가 그리는 것은 다 알아보지 못할 기이한 모양으로 변하는 모양이었다. 역시 그림은 나랑 안 맞다고 생각하며 그림을 덮어 버렸다. 벌써부터 비열한 프레드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빙빙 맴도는 것 같았다. 한숨을 삼키며 천천히 클래스로 향했다.
그런데 반에 들어서자마자 내 그림을 빼앗아 놀려 댈 줄 알았던 프레드가 웬일인지 조용했다. 크로키 북을 선생님께 제출하고도 그는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만을 지을 뿐 별다른 제스처를 보이지 않았다. 왜인지는 몰라도 오늘은 잘 넘어간 것 같아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소피아가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깨끗해진 책상이 마음에 드는 듯 크게 웃으며 책상을 한번 두드렸다.
“역시 책상이 깨끗하니까 일할 맛이 난다. 어제 몇 시에 돌아갔어?”
“10시쯤이요.”
내 말에 소피아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고생했네.”
“아니에요.”
“이제 매튜 사무실 정리하러 올라갈 거지? 방금 매튜가 밀린 서류 작업 시작해야 한다면서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전화했거든.”
소피아는 매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하는 듯 짓궂게 웃었다.
“오늘은 나도 한가하니까 같이 올라가자. 매튜 얼굴도 구경할 겸.”
“네.”
소피아와 11층 사무실로 들어서자 정말 곧 울 것 같은 표정의 매튜가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튜보단 오른쪽 소파에 앉아 있는 인물에게 더 시선이 갔다. 벌써 3일째 같은 자리에서, 아마도 같은 대본을 읽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재방송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무실에 좀처럼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던 소피아 말과는 달리 레이먼드는 항상 이곳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요즘 유난히도 그와 자주 마주치는 느낌이 들었다.
“어, 뭐야. 레이먼드 또 사무실 나온 거야? 웬일이야, 얼굴 보기 힘든 녀석이?”
역시나 3일 연속으로 그가 여기 있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나 보다. 소피아가 몹시 놀라워하며 레이먼드를 쳐다보자, 힐끗 그녀를 본 레이먼드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못 올 때 왔어?”
대본을 보며 무뚝뚝한 말투로 묻자 소피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건 아니지만.”
레이먼드 맞은편 소파에 앉은 소피아가 서류 정리를 하고 있는 매튜를 쳐다봤다.
“그나저나 맷 다니엘 감독, 난 좀 충격이야.”
소피아의 말에 매튜가 고개를 주억이며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렸다.
“그건 그래. 저번 파티 때도 그렇게 아내를 챙겼잖아. 잉꼬부부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레이먼드. 너 맷 다니엘 감독이랑 영화 같이 찍지 않았어?”
소피아의 말에 모두가 그를 바라봤다. 소피아는 레이먼드가 촬영 현장에 있었던 재밌는 일을 말해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꽤 오래 레이먼드를 보고 있었지만 그에게선 아무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재미없다는 듯 콧방귀를 낀 소피아의 시선이 이번엔 나를 향했다.
“승원, 너도 충격적이지 않아?”
소피아가 맞장구 쳐 주길 바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없었다. 나는 맥 다니엘 감독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 맷 다니엘 감독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맷 다니엘 감독는 60대의 성공한 감독으로서 독특하고 신선한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기로 알려져 있는 할리우드에서도 가장 알아주는 감독이었다.
연기자의 매력을 그대로 살려 줄 뿐 아니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뛰어난 연출력 덕에 그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 대부분이 스타덤에 올랐고,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배우가 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매년 수많은 할리우드 인사들이 러브 콜을 보낸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 유명한 감독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궁금한 마음에 질문을 했을 뿐인데,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뭐야. 지금 지금 티비고 인터넷이고 다 난리잖아. 맷 다니엘 감독이 30살 연하와 바람을 폈다는 소식 말이야.”
소피아가 황당하다는 듯 말을 꺼내자, 옆에 있던 매튜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거들었다.
“맞아. 전 국민이 다 아는 사건인데. 뭐야. 승원, 집에 인터넷이랑 티비 없어?”
“네, 없어요.”
“……뭐?”
“없다고?”
빵을 하나 더 구웠어야 하는데. 아쉬움을 달래며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설 때였다.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뒤에서 딜런이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승원! 식당 말고 여기서 만나니까 더 반가운데?”
“어, 안녕. 이제 학교 오는 거야?”
“응. 오늘 늦잠 자서. 아슬아슬하게 맞춰 왔네.”
딜런이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곤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너도 늦잠 잔 거야?”
“아니. 난 원래 이 시간에 학교에 와.”
“아……. 맞다. 별일 없었지? 동양인만 노린다는 묻지 마 폭행 말이야. 걱정됐다고.”
딜런이 내가 빠듯한 시간에 맞춰서 오는 이유를 눈치챘는지 급하게 말을 돌렸다.
“아, 그렇지 않아도 말해 주려고 했는데. 나 어제 그 미친놈 만났어.”
“뭐?”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딜런이 몹시 놀라며 걸음까지 멈춰 세웠다.
“대체 무슨 소리야! 어디 다치진 않았어?”
그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지었다.
“보는 대로. 하나도 안 다쳤어.”
태평한 내 대답에 딜런은 그제야 심각했던 표정을 풀고 조금 허탈하다는 듯 멈췄던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아니, 나 지금 너무 충격적이야. 네가 전 피하자들 사진을 못 봐서 그러나 본데. 진짜 충격적이야. 특히 마지막 피해자는……. 아무튼 그 가해자를 만났다는 거지?”
“안 그래도 나한테도 얌전히 있지 않으면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하더라고.”
“얌전히? 그게 무슨 말이야. 얌전히 맞으라는 거야?”
딜런의 말에 불쾌한 어제 기억이 떠올라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실 그 사람 동양인을 미워하는 게 아니었더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동양인을 좋아한대. 특히 나한테 반했다고 하더라. 무려 일주일전에.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등치 큰 사람이 일주일씩이나 쫓아다녔는데…….”
“뭐? 그럼 어떻게 도망친 거야. 누가 구해 준 거야?”
“아니, 그냥 발로 찼는데.”
내 말에 딜런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튼 다시 나타나면 푸딩으로 만들어 준다고 했으니, 이젠 내 앞에 안 나타날 거야.”
“푸딩……?”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곤 멍하니 서 있는 딜런을 계단 쪽으로 밀었다.
“이제 진짜 수업 시작하겠다. 한 층 위잖아. 어서 서둘러.”
복도엔 어느새 학생들의 모습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얼른 올라가라고 딜런을 재촉했지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다 정말 지각이라도 하겠다 싶을 때쯤 이내 손을 크게 흔들며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이따 점심 같이 먹는 거 알지?’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라커에서 책을 꺼내 들고 클래스 안으로 들어갔다.
***
수업이 끝나고 바로 사무실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레이먼드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눈치 볼 사람도 없어서 그런지 프레드의 행동이 조금 더 짓궂었다. 하루 종일 나를 따라다니며 꼬투리를 잡는데,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레이먼드가 학교에 오든 말든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가 등교하는 게 나한테 더 좋은 것 같다. 그래도 레이먼드가 있으면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니까.
회사 입구에 들어서니 어제 보았던 무뚝뚝해 보이는 경비원이 서 있었다. 슬쩍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그가 출입문 입구를 열어 주었다. 10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오늘도 바빠 보이는 소피아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살짝 눈치를 보며 안으로 들어가자 소피아가 눈인사를 해 왔다.
그녀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익숙한 이름의 대본이 놓여 있었다. ‘종말의 그날’ 대본이었다. 하도 소피아에게 로렌 역에 대해 들어서일까. 대본이 대체 무슨 내용일까 조금 관심이 갔다.
창밖을 보며 통화를 하고 있는 소피아를 슬쩍 보다 대본을 집어 들었다. 대충 내용만 훑어 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더 흡입력이 강했다. 나도 모르게 대충 넘기던 손을 멈추고 꼼꼼히 한 글자씩 읽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대본에 관심이 생긴 거야?”
깜짝 놀라 들고 있던 대본을 빠르게 덮었다. 소피아가 흥미롭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푹 빠졌는지 그녀가 전화를 끊고 이곳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읽고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론 뒷내용이 궁금해 더 보고 싶었지만, 그러면 날 로렌 역으로 세우겠단 소피아의 집착이 더 심해질 것 같아 들고 있던 대본을 다시 테이블 위로 올렸다.
“아니야, 더 봐도 돼.”
“아니에요. 그냥 기다리기 심심해서 잠깐 본 것뿐이에요.”
“난 또. 관심이라도 조금 생긴 줄 알았지.”
한결같은 내 대답에 또다시 실망한 표정을 짓는 소피아였다.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여기 서류들 정리하면 되는 거죠?”
“아, 어. 여기 있는 것들 어제처럼 종류별로 묶어서 순서대로 정리해 주면 돼. 오늘은 내가 밖에 볼일이 있어서 나가 봐야 하는데 괜찮겠어?”
“네, 어제 보기도 했고. 문제없을 것 같아요.”
“응. 혹시 모르는 거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거나 위층에 매튜 있으니까, 물어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자 소피아도 싱긋 따라 웃으며 서류 몇 개를 가방에 넣고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 문을 나섰다.
“그럼 수고해!”
“네.”
소피아가 정말 바쁘긴 한가 보다. 나는 정리를 위해 소피아의 책상을 훑어보았다.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 그녀의 책상이 어제 매튜의 책상보다 조금 더 어지러웠다.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후딱 끝내야지. 팔을 걷어붙이고 빠르게 서류를 집어 들었다.
한참 서류 정리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매튜가 투명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 매튜. 안녕하세요.”
“승원, 열심히구나. 힘들지?”
“아니에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 사실 부탁 하나만 하려고.”
“부탁이요?”
매튜가 미안한 얼굴로 살짝 뜸을 들이다 말했다.
“지금 내가 급하게 가 봐야 할 곳이 있어서 카페에 들릴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나 대신 카페에서 음식 좀 사 와 줄 수 있겠니?”
생각보다 간단한 부탁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떤 거 사 오면 돼요?”
“호밀 샌드위치랑 아메리카노 샷 해서 한 잔 부탁할게.”
샷 라니 쓰게도 먹는구나. 달달한 걸 좋아하는 나로선 아메리카노는 무슨 맛으로 먹나 싶었다.
“네, 어디다 둘까요?”
“11층에…… 어, 네. 여보세요? 네네, 지금 출발했습니다.”
뭔가 급한 일인지 매튜가 전화를 받으며 카드를 건네주었다. 그러곤 고맙다는 듯 눈인사를 하고 급하게 사무실을 나갔다. 안 그래도 서류 정리하느라 팔이 뻐근했는데 산책할 겸 다녀오면 딱일 것 같았다. 카드를 주머니에 넣고 사무실을 나섰다.
카페에 도착하니 진한 원두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매튜가 부탁했던 호밀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케익 쇼 케이스를 구경했다. 먹음직스러운 케익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 돈도 가지고 오는 건데……. 아쉬움에 배를 한번 쓸었다. 슬슬 배가 아우성 칠 때가 된 것 같아서였다.
“샌드위치랑 커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살짝 상자를 열어 샌드위치를 구경했다. 안 그래도 어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려고 했는데, 결국 다 포기하고 잠을 선택했던 것이 생각났다. 상자 안엔 세 조각의 샌드위치가 들어 있었는데, 내용물이 조금씩 달랐다. 도톰하니 알차게도 들어갔다. 다음에 돈을 가지고 와 꼭 여기서 샌드위치를 사 먹을 거라고 다짐하며 군침을 삼켰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 나는 11층을 누르고 멍하니 앞을 보았다. 그냥 사무실 책상에 두고 오면 되는 건가? 왠지 매튜는 달달한 케이크를 좋아할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어쩐지 샷 한 아메리카노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11층에 도착했다. 곧바로 투명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
어제와 똑같은 자세로 소파에 앉아 대본을 보고 있는 레이먼드가 보였다. 있을 줄은 몰랐는데. 조금 놀랐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매튜의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책상 앞에 다가선 내가 음식을 내려놓는 순간, 뒤에서 레이먼드의 음성이 들렸다.
“가져와.”
갑작스러운 음성에 뒤를 홱 돌아보았다. 레이먼드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무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응? 뭐라고?”
“가져오라고.”
“……뭘.”
뜬금없는 그의 말에 당황한 나는 뭘 가지고 오라고 한 건지 생각해야 했다. 저 무서운 얼굴하며, 낮게 내리깐 목소리하며. 불량배를 만난 이 느낌은 뭐지. 설마 돈을……?
“나 돈 없는데…….”
“…….”
들려오는 말은 없었지만 매우 언짢아 보이는 그의 표정이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돈 달라고 한 게 아니었나 보네.
“그거, 샌드위치.”
“아아, 이거? 뭐야. 네 거였어?”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에 올려 두었던 샌드위치 상자와 커피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와, 무슨 샷까지 해서 먹냐. 샌드위치를 받아 든 레이먼드가 박스에서 꺼낸 샌드위치를 하나 꺼내 베어 물었다. 그가 눈을 들어 올려 왜 안 나가냐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사실 나도 바로 나가려고 했는데 샌드위치를 보는 순간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난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서 멍하니 샌드위치를 바라봤다.
꼬르르륵.
아…… 진짜. 그냥 빨리 나갈걸. 자괴감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방금 소리 들었겠지? 모른 척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소리였다. 못 듣는 게 이상하지. 쪽팔림에 슬쩍 레이먼드를 쳐다봤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 듯 대본만 보고 있었다.
뭐야, 못 들은 건가? 아, 그래. 대본에 집중해서 못 들었을 수도 있겠구나.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빠르게 문으로 향했다.
“이거 가져가.”
레이먼드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그가 샌드위치 박스를 눈짓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뭐야, 쓰레기까지 치우라는 건가? 아, 맞다. 나 청소부지. 순간 잊을 뻔한 내 정체성을 다시 한번 되뇌며 상자를 들어 올렸는데 꽤 묵직했다. 열려진 틈새 사이에 샌드위치가 두 조각이나 그대로 남아 있었다.
뭐지, 더 안 먹는 건가?
“이거 남았는데.”
“버리든지, 알아서 처리해.”
“어? 진짜?”
레이먼드의 말에 순간적으로 눈까지 휘며 기뻐해 버렸다. 아, 너무 티 나게 좋아했나. 레이먼드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민망함에 얼른 표정 관리를 했다. 그러곤 혹여나 그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할까, 샌드위치 상자를 꼭 부여잡고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와 허겁지겁 샌드위치를 흡입했다.
맛은 두말할 것 없이 최고였다.
오늘은 최악의 날이었다. 다름 아닌 미술 수업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연달아 두 시간 수업이었는데, 크로키 북을 들고 나가, 학교 내에서 자율적으로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돌아오는 수업 방식이었다. 저번에 걷었던 크로키 북을 교탁에서 가지고 왔다. 주변의 눈치를 보며 슬쩍 크로키 북을 열었다.
사실, 나는 그림에 아주 소질이 없었다. 분명 저번 시간에 그린 건 옆 건물 식물원 안에 피었던 예쁜 꽃이었건만, 정작 크로키 북 속에 있는 그림은 구불구불거리는 해괴망측한 이상 물체였다. 심지어 이 그림은 반 학생들 대부분이 본 그림이었다.
그날 그림을 그리고 돌아왔을 때, 프레드가 크로키 북을 제출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서 이걸 빼앗아 웃으며 반 전체 학생들에게 보여 주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지금 까지 프레드의 놀림 중 가장 창피했던 경험이었다.
그때 쪽팔림에 기필코 집에 가서 그림 연습을 하겠노라 결심했지만, 막상 집에 돌아오고 보니 귀찮다는 생각에, 그냥 생긴 대로 살자 하며 내 자신을 납득시켰었다. 하지만 오늘 와서야 연습 좀 할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작은 한숨을 내쉬며 크로키 북을 닫는데, 프레드가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어이, 칭크. 오늘은 어떤 그림을 그려서 웃겨 줄 거야?”
프레드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나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오늘 그림을 그려 오면 정말 프레드와 반 학생들에게 웃음을 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였다. 하지만 저번 주 슬쩍 본 프레드의 그림도 만만치 않았다. 그 나물에 그 밥이면서.
“웃고 싶으면 네 그림이나 보고 웃지 그래?”
본인도 제 그림 실력을 아는지 프레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마도 자신이 무시하는 동양인에게 치부를 들킨 것이 몹시 분한 모양이었다. 펄쩍 뛰던 프레드가 홱 몸을 돌려 클래스 밖으로 나갔다. 뒷모습에서도 분한 게 느껴졌다. 그 뒤를 조지와 메이슨이 빠른 걸음으로 쫓아갔다.
반 애들이 나가고 오늘도 제일 마지막으로 교실을 나갔다. 자주 가는 식물원으로 걸음을 옮기다 멈춰 섰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없는 장소를 찾다 보니 항상 그림을 그릴 때마다 식물원으로 향했었다. 덕분에 크로키 북 속엔 온통 꽃 그림뿐이었다.
분명 오늘도 프레드는 그림을 보려고 할 텐데.
아무래도 꽃은 그리기 어려우니까 다른 쉬운 걸 그려보자는 생각에 학교를 천천히 돌아다녔다. 2층을 돌아다니다 피아노 룸을 발견했다. 2층의 피아노 룸은 총 세 방이 있었는데,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이곳으로 와서 피아노를 치곤 했다. 난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지만.
피아노 구경이라도 해 볼까 해서 첫 번째 룸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나 피아노를 쳐 보고 싶어졌다. 뚜껑을 열고 띵, 한 음을 쳐 봤다. 익숙하고도 그리운 음이 귓가에 맴돌았다. 순간 몸에서 찌릿하고 전율이 흘렀다, 오랜만에 맛본 감각에 더 많은 소리를 내고 싶다는 욕구가 피어올랐다.
나는 가만히 피아노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검고 흰 건반을 손바닥으로 쓱, 한번 쓸었다. 그리웠다. 악기, 음악이란 것에 목말라 있었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손가락을 가져가 노래와 함께 건반을 쳐 나갔다.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쿵.
갑작스레 들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건반에서 손을 뗐다. 뭐지? 의자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프레드? 쟤가 여기 웬일이지. 설마 방금 내가 친 피아노와 노래, 들은 건 아니겠지. 만약 들었다면 이 나이에 동요나 부르고 있다는 것을 들켰다는 건데 정말 창피할 것 같다.
하긴, 만약 그가 들었다면 저렇게 가만히 있진 않을 것이다. 분명 신이 나서 놀려 댔겠지. 나는 다시 룸 안으로 들어와 크로키 북을 열었다. 바닥에 앉아 피아노를 열심히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슬슬 엉덩이가 아파 와 흘끔 시계를 보니 벌써 수업을 마치기 15분 전이었다. 슬슬 그림을 마무리 지어야 할 시간이었다. 연필을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팔을 뻗어 내가 그린 그림을 감상했다. 눈을 얇게 뜨고 찬찬히 살폈다. 분명 내가 그린 것은 고급스러운 그랜드 피아노인데…….
흠, 지금까지 그림이 흉측했던 건 꽃이 그리기 어려워서가 아니었구나. 그냥, 내가 그리는 것은 다 알아보지 못할 기이한 모양으로 변하는 모양이었다. 역시 그림은 나랑 안 맞다고 생각하며 그림을 덮어 버렸다. 벌써부터 비열한 프레드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빙빙 맴도는 것 같았다. 한숨을 삼키며 천천히 클래스로 향했다.
그런데 반에 들어서자마자 내 그림을 빼앗아 놀려 댈 줄 알았던 프레드가 웬일인지 조용했다. 크로키 북을 선생님께 제출하고도 그는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만을 지을 뿐 별다른 제스처를 보이지 않았다. 왜인지는 몰라도 오늘은 잘 넘어간 것 같아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소피아가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깨끗해진 책상이 마음에 드는 듯 크게 웃으며 책상을 한번 두드렸다.
“역시 책상이 깨끗하니까 일할 맛이 난다. 어제 몇 시에 돌아갔어?”
“10시쯤이요.”
내 말에 소피아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고생했네.”
“아니에요.”
“이제 매튜 사무실 정리하러 올라갈 거지? 방금 매튜가 밀린 서류 작업 시작해야 한다면서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전화했거든.”
소피아는 매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하는 듯 짓궂게 웃었다.
“오늘은 나도 한가하니까 같이 올라가자. 매튜 얼굴도 구경할 겸.”
“네.”
소피아와 11층 사무실로 들어서자 정말 곧 울 것 같은 표정의 매튜가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튜보단 오른쪽 소파에 앉아 있는 인물에게 더 시선이 갔다. 벌써 3일째 같은 자리에서, 아마도 같은 대본을 읽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재방송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무실에 좀처럼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던 소피아 말과는 달리 레이먼드는 항상 이곳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요즘 유난히도 그와 자주 마주치는 느낌이 들었다.
“어, 뭐야. 레이먼드 또 사무실 나온 거야? 웬일이야, 얼굴 보기 힘든 녀석이?”
역시나 3일 연속으로 그가 여기 있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나 보다. 소피아가 몹시 놀라워하며 레이먼드를 쳐다보자, 힐끗 그녀를 본 레이먼드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못 올 때 왔어?”
대본을 보며 무뚝뚝한 말투로 묻자 소피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건 아니지만.”
레이먼드 맞은편 소파에 앉은 소피아가 서류 정리를 하고 있는 매튜를 쳐다봤다.
“그나저나 맷 다니엘 감독, 난 좀 충격이야.”
소피아의 말에 매튜가 고개를 주억이며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렸다.
“그건 그래. 저번 파티 때도 그렇게 아내를 챙겼잖아. 잉꼬부부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레이먼드. 너 맷 다니엘 감독이랑 영화 같이 찍지 않았어?”
소피아의 말에 모두가 그를 바라봤다. 소피아는 레이먼드가 촬영 현장에 있었던 재밌는 일을 말해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꽤 오래 레이먼드를 보고 있었지만 그에게선 아무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재미없다는 듯 콧방귀를 낀 소피아의 시선이 이번엔 나를 향했다.
“승원, 너도 충격적이지 않아?”
소피아가 맞장구 쳐 주길 바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없었다. 나는 맥 다니엘 감독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 맷 다니엘 감독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맷 다니엘 감독는 60대의 성공한 감독으로서 독특하고 신선한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기로 알려져 있는 할리우드에서도 가장 알아주는 감독이었다.
연기자의 매력을 그대로 살려 줄 뿐 아니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뛰어난 연출력 덕에 그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 대부분이 스타덤에 올랐고,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배우가 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매년 수많은 할리우드 인사들이 러브 콜을 보낸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 유명한 감독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궁금한 마음에 질문을 했을 뿐인데,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뭐야. 지금 지금 티비고 인터넷이고 다 난리잖아. 맷 다니엘 감독이 30살 연하와 바람을 폈다는 소식 말이야.”
소피아가 황당하다는 듯 말을 꺼내자, 옆에 있던 매튜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거들었다.
“맞아. 전 국민이 다 아는 사건인데. 뭐야. 승원, 집에 인터넷이랑 티비 없어?”
“네, 없어요.”
“……뭐?”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