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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타 너의 스타 5화
내 대답에 소피아와 매튜가 황당하다는 듯 동시에 물었다. 요즘 세상에 인터넷과 티비도 없이 산다니 믿기지 않는단 표정이었다. 그 심정이 이해는 된다. 나도 한국에 있었을 당시엔 인터넷과 티비가 없다는 건 상상조차 못 했었으니까. 최근 소식을 모르면 무리 지어 하는 대화에도 끼기 힘들었고.
하지만 항상 재밌게 보던 사건 사고가 막상 내 이야기가 되어 버리니 그것보다 무서운 건 없었다. 인터넷을 켜면 모든 사람이 나에 대해 떠들었다. 티비를 틀면 죄지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얼굴만이 비춰졌다. 수많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비참한 몰골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모습은 지금도 꿈에 나와 나를 괴롭히곤 했다.
그 이후론 인터넷도 티비도 모두 보지 않았다. 물론, 꽤 시간이 흘렸고 아직까지 나에 대해 떠들어 댈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연예계는 하루에도 수십 명이 데뷔하고 쉴 새 없이 새로운 사건이 터지는 곳이니까. 하지만 한 번 겪은 공포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미디어 자체를 피하다 보니 또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나름대로 익숙해졌다. 그래서 그동안 나름 괜찮다고 생각해 왔는데, 다른 사람이 볼 땐 무척 이상한 일인가 보다. 관심 없다는 듯 대본만 보고 있던 레이먼드조차 나를 희안한 사람 보듯 쳐다보고 있으니까.
“그럼, 스마트폰으론 뭘 해?”
“……알람 시계요.”
내 대답에 나를 조금 더 이상하게 쳐다보는 매튜였지만 곧 수긍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뭐, 세상엔 여러 사람이 있으니까. 아, 내 일 도와주러 온 거지? 그럼 일단 내가 주는 서류들을 모아서 스테이플러로 집어 줘.”
졸지에 별난 사람이 되어 버렸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커피를 다 마신 소피아가 이제 자기도 일하러 간다며 사무실로 돌아갔다. 매튜의 서류 정리를 도운 지 두 시간 정도 되었을 때였다. 각자 일에 집중하느라 고요해진 정적을 깨고 매튜가 책상 의자에서 일어났다.
“배고프지 않니? 뭐 좀 먹고 할까?”
매튜의 말에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까부터 배에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이번엔 매튜가 레이먼드를 쳐다봤다.
“레이먼드, 오늘도 샌드위치 먹을 거지?”
대본을 보고 있던 레이먼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어제 네가 갔던 카페 말이야. 거기 샌드위치는 웰빙 샌드위치라 아주 신선하고 맛있어. 너도 먹으면 좋아할 거야. 레이먼드는 입맛이 까다로워서 거기 샌드위치밖에 먹질 않거든.”
“아, 거기 저도 어제 먹어 봤어요. 정말 맛있던데. 특히 게살 들어간 거요.”
“아, 그러니? 어제 너도 사 먹었나 보구나?”
“그건 아니고. 레이먼드가 두 조각 남겼길래 그거 먹었는데…….”
말을 꺼내고 보니 괜히 말했나 싶었다. 남이 남길 걸 먹었다는 거에 대해 추잡스럽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인터넷, 티비 얘기 이후로 나를 좀 특이하게 보는 것 같던데. 슬쩍 눈치를 살피니 매튜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해 있었다.
“뭐? 레이먼드가? 정말이야?”
오묘한 표정을 지은 매튜가 그에게 물었지만, 레이먼드는 미간을 구길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레이먼드가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주다니. 처음 있는 일이야.”
매튜는 놀란 표정으로 ‘신기해, 신기해’라는 말을 반복했다. 레이먼드가 나에게 친절하게 음식을 줬다고 착각하는 것 같아 나는 그의 생각을 정정하기 위해 재빨리 입을 뗐다.
“아, 레이먼드가 준 게 아니라 남겨서 버리라는 거 제가 그냥 먹은 건데.”
말을 할수록 뭔가 스스로가 비참해지는 것 같아 어색하게 웃었다.
“응? 이상하네. 어제 하루 종일 굶어서 배가 많이 고팠을 텐데.”
내 말에도 이상함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의 오묘한 표정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그만 중얼거리고 샌드위치나 사 와.”
레이먼드가 짜증 섞인 말로 핀잔을 주고 나서야 매튜는 중얼거림을 멈추고 금방 사 오겠다며 사무실을 나갔다. 불행히도 나만 두고 가지 말라는 내 소리 없는 외침은 매튜에게 닿지 않았다.
***
샤워를 마치고 나와 시계를 봤다. 벌써 9시가 다 돼 가는 시간이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대충 닦고 옷장에서 잠옷을 꺼내 입었다. 그래도 며칠 일했다고 몸이 익숙해졌는지 집에 오면 뻐근했던 팔도 이제는 멀쩡했다.
뭔가 오랜만에 느끼는 해방감에 푹신한 침대에 풀썩 엎드려 누웠다. 저번에 읽고 접어 두었던 책도 폈다. 시간을 때우기엔 책보다 좋은 건 없지. 한참 작품에 깊게 빠져 있을 때였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벨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전화 올 사람은 소피아밖에 없는데, 무슨 일 있나? 핸드폰을 집어 들어 화면을 봤다. 당연히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을 줄 알았는데,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지금까지 모르는 번호로 전화 오는 일은 없었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누구지?
한참이 지나도 벨 소리는 꺼지지 않았다. 안 받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든 나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벨 소리가 꺼지길 기다렸다. 한참 후 드디어 소리가 멎었다. 안심하고 책으로 눈을 돌릴 때였다. 핸드폰이 다시금 울리기 시작했다. 받을 때까지 울릴 것 같은 핸드폰을 바라보다 고민 끝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이제야 받네. 오빠, 나야! 리사!
휴대폰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내가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리사였다. 리사는 내가 아이돌로 활동했던 시절 같은 기획사에 있었던 동료이자, ‘베스트 포’의 동생 걸 그룹으로 데뷔한 ‘베이비 포’ 멤버였다. 그녀는 미국에서 온 교포로 데뷔 후 1년 만에 섹시하면서도 털털한 이미지로 많은 예능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고, 국민 여동생이란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하지만 곧 베이비 포에서 탈퇴를 하고 연예계 생활을 접었다. 미국에서 아이돌을 동경해 한국으로 건너와 꿈을 이룬 리사였지만, 살인적인 스케줄과 이해할 수 없는 문화 차이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겠지만, 결정적으로 리사가 탈퇴를 결심한 이유는 따돌림 때문이었다.
그녀를 제외한 ‘베이비 포’ 나머지 멤버들은 4, 5년 연습 생활을 거친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국에서 날아온 리사가 연습생이 된지 1년 만에 데뷔를 하자, 그녀들은 결국 끝까지 리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외국에서 자란 탓에 선후배 관계에 대해 이해도가 낮았던 리사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고 계속되는 따돌림에 힘들어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힘든 나날을 보내던 리사가 안쓰러워 내가 직접 그녀를 많이 챙겨 줬었다. 그런 나를 리사도 친오빠처럼 잘 따랐었고.
하지만 회사를 나오고 나서는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리사마저 그룹을 탈퇴했다는 소문은 들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도 대강 알고 있었다.
리사는 미국에서도 상류층에 속하는 부유한 집안의 외동딸로, 아버지는 그녀가 타국으로 나가 연습생 생활을 하는 걸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느 부모가 그렇듯 리사의 고집을 꺾지 못해 결국 데뷔까지 허락했다는 것이다. 그 뒤는 뻔했다. 리사의 아버지는 하나뿐인 딸이 타국에서 심한 마음고생을 하는 걸 알고는 한국으로 와 그녀를 미국으로 데려갔다.
절대 안 간다고 버티던 리사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못 이기는 척 한국을 떠났다. 한국에서 안 좋은 추억만 가득 가지고 말이다. 그런 리사의 갑작스러운 전화는 너무 뜬금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정말 내가 아는 그 리사가 맞는지 다시 확인해야 했다.
“리사? 베이비 포 리사?”
-하하, 그래. 오빠 진짜 살아 있었네.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연락을 다 끊을 수가 있어!
“그것보다 리사. 내 번호는 어떻게 안 거야?”
리사는 오랜만인 나와의 통화가 즐거운 듯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이제는 다 끊었다고 생각한 인연의 등장에 황당을 넘어 반쯤 넋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아, 오빠 미국에 있다는 소식 보고 아는 사람한테 오빠 번호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어.
“소식? 무슨 소식? 내가 미국에 있다는 걸 누가 안다는 거야?”
-엥? 무슨 소리야. 지금 인터넷에서 난리 났잖아. 오빠 근황이라면서 미국에서 지하철 타고 있는 모습이 인터넷에 올라와서 완전 핫 이슈인데. 지금 실검 1위 찍고 기사고 뭐고 다 오빠 얘기뿐인데 몰랐어?
리사의 말에 요즘 알바 갈 때마다 탄 지하철이 떠올랐다. 나름 신경 쓴다고 후드까지 푹 쓰고 다녔건만 나도 모르는 새에 사진이 찍혔나 보다. 어쩌면 조금은 방심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이젠 끝이라고 생각했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한순간에 또 이렇게 돼 버린 것이다.
다시금 한국에서 나에 대한 얘기가 그들 입에서 오르락내리락한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온몸을 뒤덮었다. 많이 잊혔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내 사진이 인터넷에 퍼졌다고?”
-응. 뭐야 진짜 몰랐어? 지금도 계속 기사 뜨고 있는데. 오빠 센트레일즈 스쿨 다니고 있다며? 거기 학비 완전 비싼 학교 아니야?
“뭐? 그건 또 어떻게 알아?”
-오빠, 왜이래. 한국 네티즌이잖아. 내일이면 오빠가 아침에 뭐 먹었는지까지 알아낼 수도 있다고.
리사의 농담 섞인 말에도 전혀 웃음이 안 나왔다. 왠지 진짜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땀이 배어 나온 손을 잠옷 바지에 닦고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녀의 말대로 한국 네티즌은 소식이 정말 빨랐다. 이젠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더는 도망칠 곳도 없었다. 막막함에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한동안 나에게서 대답이 없자, 리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 이제 괜찮은 거지?
계속되는 침묵에 리사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걱정하는 듯한 그녀에게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내 입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거짓이라도 괜찮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스스럼없이 말하기엔 아직 상처가 덜 아문 것 같다. 리사가 타이르듯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알아. 오빠가 겉으론 담담하고 강해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여리고 착한 사람이라는 거. 하지만 이건 스스로 이겨 낼 일이야.
리사의 말에 내가 여리고 착했었나 하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거기에 대해서 말을 하진 않았다.
-내가 힘들 때 오빠가 많이 도와줬잖아. 나도 오빠를 돕고 싶어.
리사의 말에 꽉 막혔던 가슴속이 조금 뚫린 기분이었다.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말만으로도 고마워.”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또 통화하자.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리사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밝아져 있었다.
“그래, 너도 쉬어.”
-아, 맞다. 오빠, 조만간 선물 하나 도착할 거야.
“선물? 무슨 선물?”
-엄청 좋은 거. 아, 드라마 시작했다. 안녕!
무슨 선물이냐며 필요 없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리사는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사실 의미 없는 소리긴 했다. 리사에게 아무리 필요 없다고 거절해도 굳이 손에 쥐여 줄 성격이기에 그저 이상한 선물이 아니기 만을 빌 뿐이었다.
다시 누워 책을 펼쳤지만 이미 머릿속이 잔뜩 어지러워져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일을 시작한 지도 벌써 열흘이나 지났다. 어느새 학교가 끝나고 회사로 향하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지금은 일도 손에 많이 익어 부담도 줄어서 한층 일하기도 편해졌다.
그 와중에 레이먼드와는 열흘 중 일곱 번이나 마주쳤다. 길게 같이 있어 본 적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이제는 당연한 것처럼 그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소피아는 무슨 변덕이 올라 안 나오던 사무실에 출근 도장을 찍냐며 불편하다는 듯 불평했지만, 레이먼드에게 싸늘한 시선만 받을 뿐이었다.
10층 사무실의 청소를 마치고 11층으로 올라가자, 오늘도 역시 그가 지정석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대본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사무실 주인인 매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매튜는 어디 갔어?”
레이먼드가 힐끗 나를 쳐다보곤 답했다.
“오늘 외근이라 안 올 거야.”
레이먼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빗자루를 들고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예전만큼 둘이 있다는 것에 어색감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빗자루로 책상 아래를 쓸고 있는데 그동안 궁금했던 것 하나가 떠올랐다.
왜 편한 집에서 대본을 안 보고 항상 이곳에 와서 보는 거지? 궁금함에 물어볼까 말까 몇 번 고민하다 이런 걸 생각할 시간에 질문하는 게 나을 듯해 입을 열었다.
“근데…… 왜 너는 사무실에 와서 대본을 보는 거야?”
대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가 대답했다.
“집에는 상대역을 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음, 레이먼드는 혼자 사나? 아니면 가족들이 바쁠 수도 있겠다. 거기까지 묻는 건 왠지 사생활을 캐묻는 것 같아 그냥 다른 질문을 했다.
“매튜가 상대역을 해 준단 말이야?”
“일하다가 틈틈이.”
소피아의 말에 따르면 레이먼드는 요 근래 들어 자주 회사에 온다고 했는데, 그럼 이전에는 매튜가 상대역을 안 해 준 건가? 궁금해 죽겠다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레이먼드가 묻기도 전에 대답했다.
“원래 내 매니저가 상대역을 해 줬었는데 지금은 잘라서 없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매튜가 대신 상대역을 해 주고 있을 뿐이야.”
“아, 근데 매니저 없이 활동하기 힘들지 않아?”
“지금은 휴식기야.”
그의 말에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휴식기? 그럼 촬영이 없다는 말이잖아. 레이먼드를 사무실에서 자주 보긴 했었지만, 학교에는 열흘 동안 3번밖에 나오질 않았었다. 분명 바쁜 스케줄 덕에 학교에 나오지 않는 줄 알았는데.
“휴식기라고? 그럼 학교는 왜 안 나오는 거야?”
레이먼드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한 눈빛을 내비치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가기 싫어서.”
당당한 그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와는 다른 의미지만 그도 학교에서 늘 상당수의 시선을 받고 있으니까. 부담스럽긴 할 것 같다. 그는 사람들의 아부 섞인 시선을 즐기거나 하는 성격이 아닌 것 같으니까.
한편으론 생각보다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그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선 항상 누군가가 말을 시키면 거의 꺼져 혹은 비켜라고 말하는 것만 들어서 그런지 대화하기 좀 더 힘들 줄 알았는데.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책상에 걸쳐 두었던 빗자루를 다시 들었을 때였다. 돌연 레이먼드가 날 불렀다.
“이리 와 봐.”
“응? 나?”
예상치 못한 부름에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날 부른 건가? 물론, 여기서 오라고 할 사람은 나 혼자뿐이니까 나에게 한 말이겠지만…… 갑자기 왜?
“상대역 좀 해.”
거절은 생각도 않는 사람처럼 당당한 요구에 잠깐 동안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내가 왜?”
“매튜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왜!’ 하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레이먼드가 더 말하기 귀찮다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빗자루를 다시 책상에 걸쳐 두고 그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레이먼드가 소파 앞, 테이블 아래에서 대본을 하나 더 꺼냈다. 아마 매튜가 상대역을 해 줬을 때 사용하던 대본인 듯했다.
그가 대본을 나한테 던져 주었다. 참 친절하게도 준다 생각하며 안을 살펴봤다. 저번에 소피아 사무실에서 읽었던 것과 똑같은 대본이었다. 레이먼드가 자신의 대본을 툭툭 쳤다.
“125쪽.”
대체 내가 왜 지금 여기 앉아 있는 거지 싶었지만 내 느린 동작이 마음에 안 드는 듯 그가 인상을 쓰자 저절로 눈치가 보였다. 재빨리 125쪽을 펼쳤다. 레이먼드가 대본을 보며 역할을 알려 주었다.
“여기서 재커리가 내 역이야. 넌 노아 역을 읽어.”
레이먼드의 말에 노아라고 쓰여 있는 대사를 보았다. 재커리에 비해선 그래도 많지 않은 비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 연기 못해.”
“연기 기대 안 하니까, 그냥 읽어.”
별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하게 내뱉는 그의 말에 살짝 울컥함이 몰려왔다. 말할 생각이야 당연히 없지만, 그래도 연기 경험도 있고 아직 뭘 보여 준 것도 아닌데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연습생 시절, 연기 수업을 들었을 때만 해도 스스로에 대한 내의 평가는 나름 괜찮다 였다. 그리고 데뷔 후 조연으로 몇 작의 드라마에 출연하기도 했었고, 시청자 평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연기를 하는 것에 재미를 붙여 빠져들 때쯤 유명 시나리오 작가인 오연숙 작가님에게서 연락 온 적이 있었다. 영화에 더블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싶다는 제의였고, 곧 시나리오까지 보내 왔다.
시나리오 속 내 역할은 아들 역이었는데, 아버지 역으로는 이미 공호준 선배님이 캐스팅된 상황이었다. 공호준 선배님은 40대 후반의 중년 배우로 신들린 연기력을 뽐내며 국민 배우라는 칭호를 얻은 분이었다. 최고의 배우와, 그리고 최고의 작가와 함께하는 영화라니, 설렘에 밤잠도 설치며 하루 만에 시나리오를 빠르게 읽었다.
역시나 스토리는 훌륭했다. 시나리오에 푹 빠져 더욱 이 배역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온몸을 덮었다. 대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으며 연락만을 기다렸었다.
하지만 끝내 나에겐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내가 간절히 바랐던 그 배역은 잔인하게도 같은 그룹 멤버였던 이재훈에게 갔다. 그때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모든 게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예상대로 영화는 천만을 넘으며 흥행에 대성공을 이뤘고, 그는 천만 배우 이재훈이라고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천만 배우라는 타이틀이나 사람들의 사랑이 샘이 나서가 아니었다. 그저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피어올랐던 전율이, 그리고 배역에 대한 욕심이 시나리오를 읽고 또 읽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커져 있었나 보다. 그만큼 나에게 다가온 아쉬움은 컸으니까. 그 이후 나는 음악 활동에만 집중하며 다른 연기 활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이게 첫 연기였다. 비록 제대로 된 세트장은 아니었지만 묘한 감상에 젖기엔 충분했다. 나는 잠시 말없이 대본을 바라보다가 먼저 대사를 쳤다.
“재커리, 시간이 없어. 곧 빌딩이 무너져 내릴 거야.”
상황에 맞춰 조급한 느낌으로 목소리를 내자, 대본을 보고 있던 레이먼드가 슬쩍 나를 쳐다봤다. 뭐지, 너무 못했나? 아니면 발음이 이상했나? 오랜만의 도전에 온갖 생각이 다 들던 그때, 레이먼드의 입에서 다음 대사가 튀어나왔다.
“아직 제인을 찾지 못했어.”
“이대론 우리까지 빌딩에 깔릴 거야. 다 죽는다고! 내 말 모르겠어”
“제인을 버리고 갈 순 없어!”
“제발, 재커리. 냉정하게 생각해. 이게 제인이 바라는 일이라고 생각해?”
“넌 먼저 빠져나가. 제인은 내가 데리고 갈 테니.”
“……빌딩을 지탱하는 중심 기둥이 부서졌어. 무슨 말인지 몰라? 몇 분, 아니, 당장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다고!”
“렌과 먼저 제이스트 광장으로 가 있어.”
“젠 네 마음대로 해. 네가 깔려 죽든 말든 난 상관 안 할 거라고!”
“방 돌아올게.”
“…….”
다음 대사를 읽어야 할 내가 침묵을 지키자 대본을 보고 있던 레이먼드가 왜 안 읽냐는 듯 고개를 들어올렸다.
“너무 너만 착한 거 아니야?”
뚱한 얼굴로 투덜거리자 그가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그러곤 들고 있던 대본을 아래로 내렸다.
“연기잖아.”
“그래도. 너무 나만 나쁜 놈 같잖아.”
내 말에 레이먼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노아를 잘 알지 못하는 내가 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세세하게 역할을 설명하고 분석해 주었다.
내 대답에 소피아와 매튜가 황당하다는 듯 동시에 물었다. 요즘 세상에 인터넷과 티비도 없이 산다니 믿기지 않는단 표정이었다. 그 심정이 이해는 된다. 나도 한국에 있었을 당시엔 인터넷과 티비가 없다는 건 상상조차 못 했었으니까. 최근 소식을 모르면 무리 지어 하는 대화에도 끼기 힘들었고.
하지만 항상 재밌게 보던 사건 사고가 막상 내 이야기가 되어 버리니 그것보다 무서운 건 없었다. 인터넷을 켜면 모든 사람이 나에 대해 떠들었다. 티비를 틀면 죄지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얼굴만이 비춰졌다. 수많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비참한 몰골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모습은 지금도 꿈에 나와 나를 괴롭히곤 했다.
그 이후론 인터넷도 티비도 모두 보지 않았다. 물론, 꽤 시간이 흘렸고 아직까지 나에 대해 떠들어 댈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연예계는 하루에도 수십 명이 데뷔하고 쉴 새 없이 새로운 사건이 터지는 곳이니까. 하지만 한 번 겪은 공포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미디어 자체를 피하다 보니 또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나름대로 익숙해졌다. 그래서 그동안 나름 괜찮다고 생각해 왔는데, 다른 사람이 볼 땐 무척 이상한 일인가 보다. 관심 없다는 듯 대본만 보고 있던 레이먼드조차 나를 희안한 사람 보듯 쳐다보고 있으니까.
“그럼, 스마트폰으론 뭘 해?”
“……알람 시계요.”
내 대답에 나를 조금 더 이상하게 쳐다보는 매튜였지만 곧 수긍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뭐, 세상엔 여러 사람이 있으니까. 아, 내 일 도와주러 온 거지? 그럼 일단 내가 주는 서류들을 모아서 스테이플러로 집어 줘.”
졸지에 별난 사람이 되어 버렸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커피를 다 마신 소피아가 이제 자기도 일하러 간다며 사무실로 돌아갔다. 매튜의 서류 정리를 도운 지 두 시간 정도 되었을 때였다. 각자 일에 집중하느라 고요해진 정적을 깨고 매튜가 책상 의자에서 일어났다.
“배고프지 않니? 뭐 좀 먹고 할까?”
매튜의 말에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까부터 배에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이번엔 매튜가 레이먼드를 쳐다봤다.
“레이먼드, 오늘도 샌드위치 먹을 거지?”
대본을 보고 있던 레이먼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어제 네가 갔던 카페 말이야. 거기 샌드위치는 웰빙 샌드위치라 아주 신선하고 맛있어. 너도 먹으면 좋아할 거야. 레이먼드는 입맛이 까다로워서 거기 샌드위치밖에 먹질 않거든.”
“아, 거기 저도 어제 먹어 봤어요. 정말 맛있던데. 특히 게살 들어간 거요.”
“아, 그러니? 어제 너도 사 먹었나 보구나?”
“그건 아니고. 레이먼드가 두 조각 남겼길래 그거 먹었는데…….”
말을 꺼내고 보니 괜히 말했나 싶었다. 남이 남길 걸 먹었다는 거에 대해 추잡스럽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인터넷, 티비 얘기 이후로 나를 좀 특이하게 보는 것 같던데. 슬쩍 눈치를 살피니 매튜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해 있었다.
“뭐? 레이먼드가? 정말이야?”
오묘한 표정을 지은 매튜가 그에게 물었지만, 레이먼드는 미간을 구길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레이먼드가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주다니. 처음 있는 일이야.”
매튜는 놀란 표정으로 ‘신기해, 신기해’라는 말을 반복했다. 레이먼드가 나에게 친절하게 음식을 줬다고 착각하는 것 같아 나는 그의 생각을 정정하기 위해 재빨리 입을 뗐다.
“아, 레이먼드가 준 게 아니라 남겨서 버리라는 거 제가 그냥 먹은 건데.”
말을 할수록 뭔가 스스로가 비참해지는 것 같아 어색하게 웃었다.
“응? 이상하네. 어제 하루 종일 굶어서 배가 많이 고팠을 텐데.”
내 말에도 이상함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의 오묘한 표정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그만 중얼거리고 샌드위치나 사 와.”
레이먼드가 짜증 섞인 말로 핀잔을 주고 나서야 매튜는 중얼거림을 멈추고 금방 사 오겠다며 사무실을 나갔다. 불행히도 나만 두고 가지 말라는 내 소리 없는 외침은 매튜에게 닿지 않았다.
***
샤워를 마치고 나와 시계를 봤다. 벌써 9시가 다 돼 가는 시간이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대충 닦고 옷장에서 잠옷을 꺼내 입었다. 그래도 며칠 일했다고 몸이 익숙해졌는지 집에 오면 뻐근했던 팔도 이제는 멀쩡했다.
뭔가 오랜만에 느끼는 해방감에 푹신한 침대에 풀썩 엎드려 누웠다. 저번에 읽고 접어 두었던 책도 폈다. 시간을 때우기엔 책보다 좋은 건 없지. 한참 작품에 깊게 빠져 있을 때였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벨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전화 올 사람은 소피아밖에 없는데, 무슨 일 있나? 핸드폰을 집어 들어 화면을 봤다. 당연히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을 줄 알았는데,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지금까지 모르는 번호로 전화 오는 일은 없었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누구지?
한참이 지나도 벨 소리는 꺼지지 않았다. 안 받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든 나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벨 소리가 꺼지길 기다렸다. 한참 후 드디어 소리가 멎었다. 안심하고 책으로 눈을 돌릴 때였다. 핸드폰이 다시금 울리기 시작했다. 받을 때까지 울릴 것 같은 핸드폰을 바라보다 고민 끝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이제야 받네. 오빠, 나야! 리사!
휴대폰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내가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리사였다. 리사는 내가 아이돌로 활동했던 시절 같은 기획사에 있었던 동료이자, ‘베스트 포’의 동생 걸 그룹으로 데뷔한 ‘베이비 포’ 멤버였다. 그녀는 미국에서 온 교포로 데뷔 후 1년 만에 섹시하면서도 털털한 이미지로 많은 예능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고, 국민 여동생이란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하지만 곧 베이비 포에서 탈퇴를 하고 연예계 생활을 접었다. 미국에서 아이돌을 동경해 한국으로 건너와 꿈을 이룬 리사였지만, 살인적인 스케줄과 이해할 수 없는 문화 차이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겠지만, 결정적으로 리사가 탈퇴를 결심한 이유는 따돌림 때문이었다.
그녀를 제외한 ‘베이비 포’ 나머지 멤버들은 4, 5년 연습 생활을 거친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국에서 날아온 리사가 연습생이 된지 1년 만에 데뷔를 하자, 그녀들은 결국 끝까지 리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외국에서 자란 탓에 선후배 관계에 대해 이해도가 낮았던 리사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고 계속되는 따돌림에 힘들어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힘든 나날을 보내던 리사가 안쓰러워 내가 직접 그녀를 많이 챙겨 줬었다. 그런 나를 리사도 친오빠처럼 잘 따랐었고.
하지만 회사를 나오고 나서는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리사마저 그룹을 탈퇴했다는 소문은 들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도 대강 알고 있었다.
리사는 미국에서도 상류층에 속하는 부유한 집안의 외동딸로, 아버지는 그녀가 타국으로 나가 연습생 생활을 하는 걸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느 부모가 그렇듯 리사의 고집을 꺾지 못해 결국 데뷔까지 허락했다는 것이다. 그 뒤는 뻔했다. 리사의 아버지는 하나뿐인 딸이 타국에서 심한 마음고생을 하는 걸 알고는 한국으로 와 그녀를 미국으로 데려갔다.
절대 안 간다고 버티던 리사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못 이기는 척 한국을 떠났다. 한국에서 안 좋은 추억만 가득 가지고 말이다. 그런 리사의 갑작스러운 전화는 너무 뜬금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정말 내가 아는 그 리사가 맞는지 다시 확인해야 했다.
“리사? 베이비 포 리사?”
-하하, 그래. 오빠 진짜 살아 있었네.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연락을 다 끊을 수가 있어!
“그것보다 리사. 내 번호는 어떻게 안 거야?”
리사는 오랜만인 나와의 통화가 즐거운 듯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이제는 다 끊었다고 생각한 인연의 등장에 황당을 넘어 반쯤 넋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아, 오빠 미국에 있다는 소식 보고 아는 사람한테 오빠 번호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어.
“소식? 무슨 소식? 내가 미국에 있다는 걸 누가 안다는 거야?”
-엥? 무슨 소리야. 지금 인터넷에서 난리 났잖아. 오빠 근황이라면서 미국에서 지하철 타고 있는 모습이 인터넷에 올라와서 완전 핫 이슈인데. 지금 실검 1위 찍고 기사고 뭐고 다 오빠 얘기뿐인데 몰랐어?
리사의 말에 요즘 알바 갈 때마다 탄 지하철이 떠올랐다. 나름 신경 쓴다고 후드까지 푹 쓰고 다녔건만 나도 모르는 새에 사진이 찍혔나 보다. 어쩌면 조금은 방심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이젠 끝이라고 생각했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한순간에 또 이렇게 돼 버린 것이다.
다시금 한국에서 나에 대한 얘기가 그들 입에서 오르락내리락한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온몸을 뒤덮었다. 많이 잊혔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내 사진이 인터넷에 퍼졌다고?”
-응. 뭐야 진짜 몰랐어? 지금도 계속 기사 뜨고 있는데. 오빠 센트레일즈 스쿨 다니고 있다며? 거기 학비 완전 비싼 학교 아니야?
“뭐? 그건 또 어떻게 알아?”
-오빠, 왜이래. 한국 네티즌이잖아. 내일이면 오빠가 아침에 뭐 먹었는지까지 알아낼 수도 있다고.
리사의 농담 섞인 말에도 전혀 웃음이 안 나왔다. 왠지 진짜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땀이 배어 나온 손을 잠옷 바지에 닦고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녀의 말대로 한국 네티즌은 소식이 정말 빨랐다. 이젠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더는 도망칠 곳도 없었다. 막막함에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한동안 나에게서 대답이 없자, 리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 이제 괜찮은 거지?
계속되는 침묵에 리사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걱정하는 듯한 그녀에게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내 입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거짓이라도 괜찮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스스럼없이 말하기엔 아직 상처가 덜 아문 것 같다. 리사가 타이르듯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알아. 오빠가 겉으론 담담하고 강해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여리고 착한 사람이라는 거. 하지만 이건 스스로 이겨 낼 일이야.
리사의 말에 내가 여리고 착했었나 하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거기에 대해서 말을 하진 않았다.
-내가 힘들 때 오빠가 많이 도와줬잖아. 나도 오빠를 돕고 싶어.
리사의 말에 꽉 막혔던 가슴속이 조금 뚫린 기분이었다.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말만으로도 고마워.”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또 통화하자.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리사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밝아져 있었다.
“그래, 너도 쉬어.”
-아, 맞다. 오빠, 조만간 선물 하나 도착할 거야.
“선물? 무슨 선물?”
-엄청 좋은 거. 아, 드라마 시작했다. 안녕!
무슨 선물이냐며 필요 없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리사는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사실 의미 없는 소리긴 했다. 리사에게 아무리 필요 없다고 거절해도 굳이 손에 쥐여 줄 성격이기에 그저 이상한 선물이 아니기 만을 빌 뿐이었다.
다시 누워 책을 펼쳤지만 이미 머릿속이 잔뜩 어지러워져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일을 시작한 지도 벌써 열흘이나 지났다. 어느새 학교가 끝나고 회사로 향하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지금은 일도 손에 많이 익어 부담도 줄어서 한층 일하기도 편해졌다.
그 와중에 레이먼드와는 열흘 중 일곱 번이나 마주쳤다. 길게 같이 있어 본 적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이제는 당연한 것처럼 그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소피아는 무슨 변덕이 올라 안 나오던 사무실에 출근 도장을 찍냐며 불편하다는 듯 불평했지만, 레이먼드에게 싸늘한 시선만 받을 뿐이었다.
10층 사무실의 청소를 마치고 11층으로 올라가자, 오늘도 역시 그가 지정석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대본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사무실 주인인 매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매튜는 어디 갔어?”
레이먼드가 힐끗 나를 쳐다보곤 답했다.
“오늘 외근이라 안 올 거야.”
레이먼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빗자루를 들고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예전만큼 둘이 있다는 것에 어색감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빗자루로 책상 아래를 쓸고 있는데 그동안 궁금했던 것 하나가 떠올랐다.
왜 편한 집에서 대본을 안 보고 항상 이곳에 와서 보는 거지? 궁금함에 물어볼까 말까 몇 번 고민하다 이런 걸 생각할 시간에 질문하는 게 나을 듯해 입을 열었다.
“근데…… 왜 너는 사무실에 와서 대본을 보는 거야?”
대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가 대답했다.
“집에는 상대역을 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음, 레이먼드는 혼자 사나? 아니면 가족들이 바쁠 수도 있겠다. 거기까지 묻는 건 왠지 사생활을 캐묻는 것 같아 그냥 다른 질문을 했다.
“매튜가 상대역을 해 준단 말이야?”
“일하다가 틈틈이.”
소피아의 말에 따르면 레이먼드는 요 근래 들어 자주 회사에 온다고 했는데, 그럼 이전에는 매튜가 상대역을 안 해 준 건가? 궁금해 죽겠다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레이먼드가 묻기도 전에 대답했다.
“원래 내 매니저가 상대역을 해 줬었는데 지금은 잘라서 없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매튜가 대신 상대역을 해 주고 있을 뿐이야.”
“아, 근데 매니저 없이 활동하기 힘들지 않아?”
“지금은 휴식기야.”
그의 말에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휴식기? 그럼 촬영이 없다는 말이잖아. 레이먼드를 사무실에서 자주 보긴 했었지만, 학교에는 열흘 동안 3번밖에 나오질 않았었다. 분명 바쁜 스케줄 덕에 학교에 나오지 않는 줄 알았는데.
“휴식기라고? 그럼 학교는 왜 안 나오는 거야?”
레이먼드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한 눈빛을 내비치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가기 싫어서.”
당당한 그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와는 다른 의미지만 그도 학교에서 늘 상당수의 시선을 받고 있으니까. 부담스럽긴 할 것 같다. 그는 사람들의 아부 섞인 시선을 즐기거나 하는 성격이 아닌 것 같으니까.
한편으론 생각보다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그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선 항상 누군가가 말을 시키면 거의 꺼져 혹은 비켜라고 말하는 것만 들어서 그런지 대화하기 좀 더 힘들 줄 알았는데.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책상에 걸쳐 두었던 빗자루를 다시 들었을 때였다. 돌연 레이먼드가 날 불렀다.
“이리 와 봐.”
“응? 나?”
예상치 못한 부름에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날 부른 건가? 물론, 여기서 오라고 할 사람은 나 혼자뿐이니까 나에게 한 말이겠지만…… 갑자기 왜?
“상대역 좀 해.”
거절은 생각도 않는 사람처럼 당당한 요구에 잠깐 동안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내가 왜?”
“매튜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왜!’ 하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레이먼드가 더 말하기 귀찮다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빗자루를 다시 책상에 걸쳐 두고 그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레이먼드가 소파 앞, 테이블 아래에서 대본을 하나 더 꺼냈다. 아마 매튜가 상대역을 해 줬을 때 사용하던 대본인 듯했다.
그가 대본을 나한테 던져 주었다. 참 친절하게도 준다 생각하며 안을 살펴봤다. 저번에 소피아 사무실에서 읽었던 것과 똑같은 대본이었다. 레이먼드가 자신의 대본을 툭툭 쳤다.
“125쪽.”
대체 내가 왜 지금 여기 앉아 있는 거지 싶었지만 내 느린 동작이 마음에 안 드는 듯 그가 인상을 쓰자 저절로 눈치가 보였다. 재빨리 125쪽을 펼쳤다. 레이먼드가 대본을 보며 역할을 알려 주었다.
“여기서 재커리가 내 역이야. 넌 노아 역을 읽어.”
레이먼드의 말에 노아라고 쓰여 있는 대사를 보았다. 재커리에 비해선 그래도 많지 않은 비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 연기 못해.”
“연기 기대 안 하니까, 그냥 읽어.”
별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하게 내뱉는 그의 말에 살짝 울컥함이 몰려왔다. 말할 생각이야 당연히 없지만, 그래도 연기 경험도 있고 아직 뭘 보여 준 것도 아닌데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연습생 시절, 연기 수업을 들었을 때만 해도 스스로에 대한 내의 평가는 나름 괜찮다 였다. 그리고 데뷔 후 조연으로 몇 작의 드라마에 출연하기도 했었고, 시청자 평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연기를 하는 것에 재미를 붙여 빠져들 때쯤 유명 시나리오 작가인 오연숙 작가님에게서 연락 온 적이 있었다. 영화에 더블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싶다는 제의였고, 곧 시나리오까지 보내 왔다.
시나리오 속 내 역할은 아들 역이었는데, 아버지 역으로는 이미 공호준 선배님이 캐스팅된 상황이었다. 공호준 선배님은 40대 후반의 중년 배우로 신들린 연기력을 뽐내며 국민 배우라는 칭호를 얻은 분이었다. 최고의 배우와, 그리고 최고의 작가와 함께하는 영화라니, 설렘에 밤잠도 설치며 하루 만에 시나리오를 빠르게 읽었다.
역시나 스토리는 훌륭했다. 시나리오에 푹 빠져 더욱 이 배역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온몸을 덮었다. 대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으며 연락만을 기다렸었다.
하지만 끝내 나에겐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내가 간절히 바랐던 그 배역은 잔인하게도 같은 그룹 멤버였던 이재훈에게 갔다. 그때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모든 게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예상대로 영화는 천만을 넘으며 흥행에 대성공을 이뤘고, 그는 천만 배우 이재훈이라고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천만 배우라는 타이틀이나 사람들의 사랑이 샘이 나서가 아니었다. 그저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피어올랐던 전율이, 그리고 배역에 대한 욕심이 시나리오를 읽고 또 읽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커져 있었나 보다. 그만큼 나에게 다가온 아쉬움은 컸으니까. 그 이후 나는 음악 활동에만 집중하며 다른 연기 활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이게 첫 연기였다. 비록 제대로 된 세트장은 아니었지만 묘한 감상에 젖기엔 충분했다. 나는 잠시 말없이 대본을 바라보다가 먼저 대사를 쳤다.
“재커리, 시간이 없어. 곧 빌딩이 무너져 내릴 거야.”
상황에 맞춰 조급한 느낌으로 목소리를 내자, 대본을 보고 있던 레이먼드가 슬쩍 나를 쳐다봤다. 뭐지, 너무 못했나? 아니면 발음이 이상했나? 오랜만의 도전에 온갖 생각이 다 들던 그때, 레이먼드의 입에서 다음 대사가 튀어나왔다.
“아직 제인을 찾지 못했어.”
“이대론 우리까지 빌딩에 깔릴 거야. 다 죽는다고! 내 말 모르겠어”
“제인을 버리고 갈 순 없어!”
“제발, 재커리. 냉정하게 생각해. 이게 제인이 바라는 일이라고 생각해?”
“넌 먼저 빠져나가. 제인은 내가 데리고 갈 테니.”
“……빌딩을 지탱하는 중심 기둥이 부서졌어. 무슨 말인지 몰라? 몇 분, 아니, 당장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다고!”
“렌과 먼저 제이스트 광장으로 가 있어.”
“젠 네 마음대로 해. 네가 깔려 죽든 말든 난 상관 안 할 거라고!”
“방 돌아올게.”
“…….”
다음 대사를 읽어야 할 내가 침묵을 지키자 대본을 보고 있던 레이먼드가 왜 안 읽냐는 듯 고개를 들어올렸다.
“너무 너만 착한 거 아니야?”
뚱한 얼굴로 투덜거리자 그가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그러곤 들고 있던 대본을 아래로 내렸다.
“연기잖아.”
“그래도. 너무 나만 나쁜 놈 같잖아.”
내 말에 레이먼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노아를 잘 알지 못하는 내가 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세세하게 역할을 설명하고 분석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