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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어룽어룽
1화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시대를 배경으로 하나 실존 인물들의 생몰년도가 같을 뿐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과 다름을 밝힙니다. 주인공들 또한 실존 인물이 아닌 허구의 인물로 설정하였습니다.
1. 앞이야기
1636년.
“제가 어찌하여 이 댁에 머무는지 정녕 모르십니까?”
“죽어도 이 집 귀신이 되겠다는 되도 않는 소리 말이오? 죽든 말든 귀신이 되든 말든 난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제 마음이 수그러들지 않아 더욱 송구하였습니다. 비록 서얼이라 하나 제 어머님과 피를 나누어 가졌던 분께서 나리의 집안에 끼친 해악에, 그 피를 이어받은 저 또한 책임이 있는 것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리에 대한 제 연심이 변치 않아 더욱 송구하였습니다.”
극의 입술이 비틀렸다. 아니라 하더니! 아니, 그렇든 아니든 상관 말라더니!
“설사 나리와 제 입장이 바뀌었다 해도…… 그래도 달라지지 않았을 마음입니다.”
내 입장이라 하였어도 연심을 거두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당치 않다! 제 입장은 겪어 보지 않은 이는 결코 알지 못하는 것이다!
효완의 손목을 틀어쥔 손에 힘을 주어 당겼다. 소리 없는 신음과 함께 효완의 얼굴이 그에게 한층 가까워졌다. 그 얼굴을 올려다보며 극이 거칠게 속삭였다.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고? 나를 보며 늘 아버님을 부르시는 어머님을 보면서도 그러했을까? 아버님의 마지막을 목도하시고 그 뒤를 따르고자 하셨지만, 어린 나를 두고는 차마 가실 수 없어 껍데기만을 이승에 남겨 둔 어머님을 말이오!”
효완의 눈이 순식간에 붉어졌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사내에 눈멀어 돌아오지 않는 철없는 여식을 근심하느라 시름시름 앓는 어미를 둔 낭자가 그런 내 마음을 어찌 안단 말이오?”
점점 붉게 무르익던 그 과실은, 끝내 후드득 눈물을 쏟으며 터져 내렸다.
지끈지끈. 지겨웠다. 더위도, ……눈물도.
잡았던 손목을 당기면서 다른 손도 뻗었다. 그렇게 효완을 제 품으로 온전히 안아 들였다. 그리고 흐느낌을 참으려 앙다물린 입술을 제 것으로 덮었다.
두통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 저도 모를 것들이, 이제껏 밀어내었던 것이 순식간에 들어찼다. 머리로는 아버님께 어머님께 죄를 짓고 있었으나, 제 한 몸은 비로소 충만해진 느낌이었다.
처서인데도 매미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어제오늘 찬바람이 불었으니 이제 귀뚜라미 우는 가을이 올 것이다. 한여름에는 그리도 간절하던 소낙비가 가을에 내리면 영 쓸쓸하기만 한 법이니- 제 마음도 바뀔 것이다.
계절이 바뀌듯 기필코 바뀌어야 할 것이다.
2. 1606년
“경하드리옵니다, 중전마마! 진실로 이 나라의 홍복이옵니다!”
인빈 김씨는, 해산한 지 삼칠일이 지났어도 여전히 얼굴에 기미가 끼고 부은 채인 중전에게 한껏 고개를 조아렸다.
“고맙소, 인빈.”
중전께서는 인빈 자신이 낳은 옹주 또래이신데 참으로 점잖고 자애로우시니, 인빈은 속으로 다행이다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아들들이 살아날 길이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가 자신의 아들들을 죽이느냐, 바로 왕세자 광해였다. 그가 그 형인 임해군처럼 막무가내는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소리다. 세자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적장자가 없는 상황이라 같은 후궁 소생들을 모두 경쟁자라 여기는지 쳐다보는 눈빛이 여간 날이 서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왕자들끼리 어울려 격구라도 할라치면 한편이든 아니든 간에 배다른 왕자들을 필요 이상으로 다치게 하는 통에 다들 꺼려할 정도였다. 놀이를 하는데도 그러한데 보위에라도 오르면 하나같이 목숨을 보전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인빈의 생각이었다.
그런 와중에 정비께서 승하하시고 열아홉 어린 나이에 계비(繼妃)로 들어오신 중전께서 드디어 이 나라의 적통을 생산하신 것이다. 나라의 홍복이고 자신과 군(君)들에게도 홍복이었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중전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여 자신의 힘을 이 갓 난 대군에게 실어 주는 것이다.
아니, 대군이 아니라 곧 세자가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장차 이 나라의 보위에 오르실 것이다. 이미 세자께서 계시는데 어찌 그러할까들 생각하는 자들이 있지마는, 방계 승통에다가 서출이라는 점을 알게 모르게 의식하시는 성상께서 적장자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리셨는지, 30년을 넘게 모셔 온 자신이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후궁에게서 왕자를 얻을 때마다 기쁨에 앞서 ‘이놈이 중전에게서 태어났어야 할 것을……’이라며 씁쓸해하셨으니까.
게다가 왕세자의 행동거지를 영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니, 서너 해를 넘기기 무섭게 일이 진척될 것이다. 그리되면 이 갓 난 대군이 내 아드님들의 목숨을 살려 줄 은인이 되는 것이다.
“중전마마, 달성위의 장녀가 정유생으로 올해 10살이옵니다. 마마의 친정 아우님과 춘추가 얼추 걸맞으니, 일단 정혼이라도 해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달성위라면 인빈의 맏딸과 혼인한 부마다. 품에 안은 대군의 자는 얼굴을 내려다보던 중전이 고개를 들었다. 인빈의 표정을 보니, 그냥 농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자신의 친정 아우라면 계사생으로 올해 열넷인 둘째 규(珪)를 이르는 것일 터. 연안 김씨 가문의 대를 이을 장자도 아닌 차남과, 게다가 왜란도 진즉에 진압되어 조혼을 시킬 필요도 없는데 겨우 10살 난 외손녀를 혼인시키자니- 중전은 그 뒤에 숨은 뜻을 눈치채었다.
이 혼인은 그녀 또한 바라는 바였다. 이대로 세자가 보위에 오르면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대군이나 후궁 소생의 군(君)들이나 마찬가지이니, 서로 힘을 합해 보자는 뜻일 터. 자신 쪽에서도 어린 대군을 위해 지지 세력을 확보해 두는 것은 무척이나 중한 일이었다.
“친정아버님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느릿한 그 말끝의 미소에 인빈은 환한 미소로 화답하였다.
6년 후.
“이럴 줄 알았습니다. 선왕께옵서 서둘러 혼인하라 하실 적에도 달성위 댁에서 여식이 어리고 미숙하다는 핑계를 대 가며 혼사를 미룬 것이 다 이유가 있어서였던 것입니다! 그 댁 여식이 나이 들기를 기다리다 우리 규는 벌써 약관이 되었는데-!”
퇴청한 규가 문안 인사를 위해 대청 앞에 이르니, 어머님의 노성이 분합문을 넘고 있었다. 아침에 대군께서 창진(천연두)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님께서 입궐하신다더니…… 좋지 않은 소식을 듣고 오신 듯하다.
그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노복이 그냥 작은 사랑채로 가자고 연신 눈을 끔벅였다. 하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예생 낭자와 혼인을 못할 지경에 이를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 지난 단옷날 딱 한 번 보았던 사려 깊은 눈매와 살짝 미소 짓는 얼굴이 떠오르자 무거운 한숨이 뒤따랐다.
“우리 대군마마와 연을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겠지요.”
선왕께서 아직 어리시던 적통 대군을 세자로 올리겠다는 말씀을 꺼내시고 그 일을 추진하기도 전에 갑자기 붕어하셨다. 그 바람에 후궁 소생으로 세자 자리에 계시던 저하께서 그대로 보위에 오르셨으니, 우리 대군마마가 얼마나 불편한 존재일까. 더불어 그 외가 되는 우리 가문의 입지도 바람 앞의 촛불이 되었으니, 자신과의 혼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이제 주상 전하의 핍박이 우리 대군께 오롯이 쏟아질 것이니, 그 외가인 우리와 혼인을 맺고 싶지 않다는 것인데, 그것을 누가 안답니까. 하다못해 선왕께서 갑자기 승하하신 것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던-”
쉬잇-! 깜짝 놀라 말씀을 막으시는 것은 아버님이실 터다.
“이런, 부인! 말씀을 삼가세요! 누가 듣습니다!”
“제가 그렇다는 말씀입니까? 저자에서 다들 그리 떠든다는-”
“어허, 그래도! 중전께서, 아, 아니, 이제 대비시지. 대군을 위해 자중 또 자중하라 하신 것을 잊으셨습니까!”
선왕 전하의 급작스러운 붕어로 인해 이제 대비가 되신 누님의 경칭도 낯설기는 가솔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럴 리가요.”
그사이 누그러지신 듯 어머님이 한결 차분한 음성으로 한 번 더 말씀하셨다.
“예,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대감.”
“대비께서 인빈과 다시 말씀을 해 보겠노라 하셨습니다.”
“대군께서 지금 열이 높으신데, 대비께서 그럴 정신이 있으십니까? 게다가 그런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혼사가 깨지면 여식을 가진 집안이 더 아쉬운 법임에도 혼사를 거절한다면서요.”
“부마인 달성위가 반대하는 것이지, 인빈께서는 그렇지 않다니 하시는 말씀입니다. 대군께서 잘못되시면 다음 차례는 후궁 소생의 왕자들이 확실하니 걱정을 아니 할 수 있겠습니까. 인빈께서 설득하실 것입니다.”
“예…… 그래도 야속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척신들 중에 우리 규처럼 제대로 대과에 급제한 이가 대체 몇이나 있다고요. 이제 당당히 벼슬길에도 나아갈 텐데요. 게다가 제 속으로 낳았지만, 훤칠하고 고매한 인품까지 갖춘 것이 좋은 시절 같으면 이 나라서 내로라하는 신랑감 축에 들 것을요.”
“알지요. 내가 부인 심정을 왜 모르겠습니까.”
안방의 말씀이 한숨과 함께 잦아들었다. 그제야 규는 안에 고했다.
“아버님, 어머님. 소자 돌아왔습니다.”
“가뜩이나 대군의 열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여 근심이거늘,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며칠 뒤. 급히 사랑으로 불려 간 규는, 노발대발하신 아버님께서 내팽개치시는 서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읽어 보아라.”
규의 궁금함을 알아챈 형님께서 권하셨다. 형님의 목소리도 침통한 것이 여간한 문제가 아닌 듯했다.
“예, 형님.”
“규를 부도총관에 임명하신 것으로 성상께서 어느 정도 경계심을 푸셨다고 생각하였는데, 인빈이나 달성위 쪽에서는 다르게 본 것일까요?”
아버지께 여쭈는 형님의 목소리에 근심이 담겨 있었다.
“아무리 대대로 척신(戚臣)이 맡는 벼슬이라 해도, 대과에 급제까지 한 문관을 그깟 무관에 임명하시었으니. 성상의 의중이 어떠하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서신을 읽어 내릴수록 규의 얼굴도 흙빛이 되었다. 두 번 세 번 읽어도 그대로였다. 그의 표정을 보고 아버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대비께서 인빈을 통해 달성위에게 말씀을 넣으셨더니, 바로 이런 서신이 왔다.”
‘심하게 역병을 앓는 아이에게 어느 혈에다 침을 놓으면 죽지 않고 소경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반드시 그에 따라 침을 놓으십시오’라니.
“이, 이건…….”
“지금 병을 앓으시는 대군께 침을 놓으라는 이야기지.”
그가 이해한 것이 틀리지 않았다. 아래에는 응하시면 침술이 가능한 의원을 보내겠다고 덧붙여 놓기까지 했다. 이런……!
“대군께서 소경이 되시면 성상께서 경계하지 않으시리라 하는 게지. 대체 왜 그리 대군을 경계하시는가! 대비께서는 성상을 믿고 보위에 오르는 것을 윤허하셨거늘 어찌 역지사지를 생각지 못하시는 게야!”
달성위의 무도한 서신에 역정이 나신 것인지, 아님 성상의 대군을 향한 경계심이 답답하신 것인지 알 수 없다. 규는 침이 말랐다. 어찌 이렇게까지…… 그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인 것인가? 함께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이번에 대과에도 함께 급제한 동기가 그에게 말하기를, 멸문지화의 공포 속에서 어찌 사느냐고 하더니…….
“평소 달성위를 지혜롭다 여겼는데 이제 보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 죄도 없는 대군을 어찌 장님으로 만든다는 말이냐!”
1화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시대를 배경으로 하나 실존 인물들의 생몰년도가 같을 뿐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과 다름을 밝힙니다. 주인공들 또한 실존 인물이 아닌 허구의 인물로 설정하였습니다.
1. 앞이야기
1636년.
“제가 어찌하여 이 댁에 머무는지 정녕 모르십니까?”
“죽어도 이 집 귀신이 되겠다는 되도 않는 소리 말이오? 죽든 말든 귀신이 되든 말든 난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제 마음이 수그러들지 않아 더욱 송구하였습니다. 비록 서얼이라 하나 제 어머님과 피를 나누어 가졌던 분께서 나리의 집안에 끼친 해악에, 그 피를 이어받은 저 또한 책임이 있는 것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리에 대한 제 연심이 변치 않아 더욱 송구하였습니다.”
극의 입술이 비틀렸다. 아니라 하더니! 아니, 그렇든 아니든 상관 말라더니!
“설사 나리와 제 입장이 바뀌었다 해도…… 그래도 달라지지 않았을 마음입니다.”
내 입장이라 하였어도 연심을 거두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당치 않다! 제 입장은 겪어 보지 않은 이는 결코 알지 못하는 것이다!
효완의 손목을 틀어쥔 손에 힘을 주어 당겼다. 소리 없는 신음과 함께 효완의 얼굴이 그에게 한층 가까워졌다. 그 얼굴을 올려다보며 극이 거칠게 속삭였다.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고? 나를 보며 늘 아버님을 부르시는 어머님을 보면서도 그러했을까? 아버님의 마지막을 목도하시고 그 뒤를 따르고자 하셨지만, 어린 나를 두고는 차마 가실 수 없어 껍데기만을 이승에 남겨 둔 어머님을 말이오!”
효완의 눈이 순식간에 붉어졌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사내에 눈멀어 돌아오지 않는 철없는 여식을 근심하느라 시름시름 앓는 어미를 둔 낭자가 그런 내 마음을 어찌 안단 말이오?”
점점 붉게 무르익던 그 과실은, 끝내 후드득 눈물을 쏟으며 터져 내렸다.
지끈지끈. 지겨웠다. 더위도, ……눈물도.
잡았던 손목을 당기면서 다른 손도 뻗었다. 그렇게 효완을 제 품으로 온전히 안아 들였다. 그리고 흐느낌을 참으려 앙다물린 입술을 제 것으로 덮었다.
두통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 저도 모를 것들이, 이제껏 밀어내었던 것이 순식간에 들어찼다. 머리로는 아버님께 어머님께 죄를 짓고 있었으나, 제 한 몸은 비로소 충만해진 느낌이었다.
처서인데도 매미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어제오늘 찬바람이 불었으니 이제 귀뚜라미 우는 가을이 올 것이다. 한여름에는 그리도 간절하던 소낙비가 가을에 내리면 영 쓸쓸하기만 한 법이니- 제 마음도 바뀔 것이다.
계절이 바뀌듯 기필코 바뀌어야 할 것이다.
2. 1606년
“경하드리옵니다, 중전마마! 진실로 이 나라의 홍복이옵니다!”
인빈 김씨는, 해산한 지 삼칠일이 지났어도 여전히 얼굴에 기미가 끼고 부은 채인 중전에게 한껏 고개를 조아렸다.
“고맙소, 인빈.”
중전께서는 인빈 자신이 낳은 옹주 또래이신데 참으로 점잖고 자애로우시니, 인빈은 속으로 다행이다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아들들이 살아날 길이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가 자신의 아들들을 죽이느냐, 바로 왕세자 광해였다. 그가 그 형인 임해군처럼 막무가내는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소리다. 세자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적장자가 없는 상황이라 같은 후궁 소생들을 모두 경쟁자라 여기는지 쳐다보는 눈빛이 여간 날이 서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왕자들끼리 어울려 격구라도 할라치면 한편이든 아니든 간에 배다른 왕자들을 필요 이상으로 다치게 하는 통에 다들 꺼려할 정도였다. 놀이를 하는데도 그러한데 보위에라도 오르면 하나같이 목숨을 보전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인빈의 생각이었다.
그런 와중에 정비께서 승하하시고 열아홉 어린 나이에 계비(繼妃)로 들어오신 중전께서 드디어 이 나라의 적통을 생산하신 것이다. 나라의 홍복이고 자신과 군(君)들에게도 홍복이었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중전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여 자신의 힘을 이 갓 난 대군에게 실어 주는 것이다.
아니, 대군이 아니라 곧 세자가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장차 이 나라의 보위에 오르실 것이다. 이미 세자께서 계시는데 어찌 그러할까들 생각하는 자들이 있지마는, 방계 승통에다가 서출이라는 점을 알게 모르게 의식하시는 성상께서 적장자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리셨는지, 30년을 넘게 모셔 온 자신이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후궁에게서 왕자를 얻을 때마다 기쁨에 앞서 ‘이놈이 중전에게서 태어났어야 할 것을……’이라며 씁쓸해하셨으니까.
게다가 왕세자의 행동거지를 영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니, 서너 해를 넘기기 무섭게 일이 진척될 것이다. 그리되면 이 갓 난 대군이 내 아드님들의 목숨을 살려 줄 은인이 되는 것이다.
“중전마마, 달성위의 장녀가 정유생으로 올해 10살이옵니다. 마마의 친정 아우님과 춘추가 얼추 걸맞으니, 일단 정혼이라도 해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달성위라면 인빈의 맏딸과 혼인한 부마다. 품에 안은 대군의 자는 얼굴을 내려다보던 중전이 고개를 들었다. 인빈의 표정을 보니, 그냥 농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자신의 친정 아우라면 계사생으로 올해 열넷인 둘째 규(珪)를 이르는 것일 터. 연안 김씨 가문의 대를 이을 장자도 아닌 차남과, 게다가 왜란도 진즉에 진압되어 조혼을 시킬 필요도 없는데 겨우 10살 난 외손녀를 혼인시키자니- 중전은 그 뒤에 숨은 뜻을 눈치채었다.
이 혼인은 그녀 또한 바라는 바였다. 이대로 세자가 보위에 오르면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대군이나 후궁 소생의 군(君)들이나 마찬가지이니, 서로 힘을 합해 보자는 뜻일 터. 자신 쪽에서도 어린 대군을 위해 지지 세력을 확보해 두는 것은 무척이나 중한 일이었다.
“친정아버님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느릿한 그 말끝의 미소에 인빈은 환한 미소로 화답하였다.
6년 후.
“이럴 줄 알았습니다. 선왕께옵서 서둘러 혼인하라 하실 적에도 달성위 댁에서 여식이 어리고 미숙하다는 핑계를 대 가며 혼사를 미룬 것이 다 이유가 있어서였던 것입니다! 그 댁 여식이 나이 들기를 기다리다 우리 규는 벌써 약관이 되었는데-!”
퇴청한 규가 문안 인사를 위해 대청 앞에 이르니, 어머님의 노성이 분합문을 넘고 있었다. 아침에 대군께서 창진(천연두)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님께서 입궐하신다더니…… 좋지 않은 소식을 듣고 오신 듯하다.
그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노복이 그냥 작은 사랑채로 가자고 연신 눈을 끔벅였다. 하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예생 낭자와 혼인을 못할 지경에 이를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 지난 단옷날 딱 한 번 보았던 사려 깊은 눈매와 살짝 미소 짓는 얼굴이 떠오르자 무거운 한숨이 뒤따랐다.
“우리 대군마마와 연을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겠지요.”
선왕께서 아직 어리시던 적통 대군을 세자로 올리겠다는 말씀을 꺼내시고 그 일을 추진하기도 전에 갑자기 붕어하셨다. 그 바람에 후궁 소생으로 세자 자리에 계시던 저하께서 그대로 보위에 오르셨으니, 우리 대군마마가 얼마나 불편한 존재일까. 더불어 그 외가 되는 우리 가문의 입지도 바람 앞의 촛불이 되었으니, 자신과의 혼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이제 주상 전하의 핍박이 우리 대군께 오롯이 쏟아질 것이니, 그 외가인 우리와 혼인을 맺고 싶지 않다는 것인데, 그것을 누가 안답니까. 하다못해 선왕께서 갑자기 승하하신 것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던-”
쉬잇-! 깜짝 놀라 말씀을 막으시는 것은 아버님이실 터다.
“이런, 부인! 말씀을 삼가세요! 누가 듣습니다!”
“제가 그렇다는 말씀입니까? 저자에서 다들 그리 떠든다는-”
“어허, 그래도! 중전께서, 아, 아니, 이제 대비시지. 대군을 위해 자중 또 자중하라 하신 것을 잊으셨습니까!”
선왕 전하의 급작스러운 붕어로 인해 이제 대비가 되신 누님의 경칭도 낯설기는 가솔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럴 리가요.”
그사이 누그러지신 듯 어머님이 한결 차분한 음성으로 한 번 더 말씀하셨다.
“예,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대감.”
“대비께서 인빈과 다시 말씀을 해 보겠노라 하셨습니다.”
“대군께서 지금 열이 높으신데, 대비께서 그럴 정신이 있으십니까? 게다가 그런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혼사가 깨지면 여식을 가진 집안이 더 아쉬운 법임에도 혼사를 거절한다면서요.”
“부마인 달성위가 반대하는 것이지, 인빈께서는 그렇지 않다니 하시는 말씀입니다. 대군께서 잘못되시면 다음 차례는 후궁 소생의 왕자들이 확실하니 걱정을 아니 할 수 있겠습니까. 인빈께서 설득하실 것입니다.”
“예…… 그래도 야속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척신들 중에 우리 규처럼 제대로 대과에 급제한 이가 대체 몇이나 있다고요. 이제 당당히 벼슬길에도 나아갈 텐데요. 게다가 제 속으로 낳았지만, 훤칠하고 고매한 인품까지 갖춘 것이 좋은 시절 같으면 이 나라서 내로라하는 신랑감 축에 들 것을요.”
“알지요. 내가 부인 심정을 왜 모르겠습니까.”
안방의 말씀이 한숨과 함께 잦아들었다. 그제야 규는 안에 고했다.
“아버님, 어머님. 소자 돌아왔습니다.”
“가뜩이나 대군의 열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여 근심이거늘,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며칠 뒤. 급히 사랑으로 불려 간 규는, 노발대발하신 아버님께서 내팽개치시는 서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읽어 보아라.”
규의 궁금함을 알아챈 형님께서 권하셨다. 형님의 목소리도 침통한 것이 여간한 문제가 아닌 듯했다.
“예, 형님.”
“규를 부도총관에 임명하신 것으로 성상께서 어느 정도 경계심을 푸셨다고 생각하였는데, 인빈이나 달성위 쪽에서는 다르게 본 것일까요?”
아버지께 여쭈는 형님의 목소리에 근심이 담겨 있었다.
“아무리 대대로 척신(戚臣)이 맡는 벼슬이라 해도, 대과에 급제까지 한 문관을 그깟 무관에 임명하시었으니. 성상의 의중이 어떠하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서신을 읽어 내릴수록 규의 얼굴도 흙빛이 되었다. 두 번 세 번 읽어도 그대로였다. 그의 표정을 보고 아버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대비께서 인빈을 통해 달성위에게 말씀을 넣으셨더니, 바로 이런 서신이 왔다.”
‘심하게 역병을 앓는 아이에게 어느 혈에다 침을 놓으면 죽지 않고 소경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반드시 그에 따라 침을 놓으십시오’라니.
“이, 이건…….”
“지금 병을 앓으시는 대군께 침을 놓으라는 이야기지.”
그가 이해한 것이 틀리지 않았다. 아래에는 응하시면 침술이 가능한 의원을 보내겠다고 덧붙여 놓기까지 했다. 이런……!
“대군께서 소경이 되시면 성상께서 경계하지 않으시리라 하는 게지. 대체 왜 그리 대군을 경계하시는가! 대비께서는 성상을 믿고 보위에 오르는 것을 윤허하셨거늘 어찌 역지사지를 생각지 못하시는 게야!”
달성위의 무도한 서신에 역정이 나신 것인지, 아님 성상의 대군을 향한 경계심이 답답하신 것인지 알 수 없다. 규는 침이 말랐다. 어찌 이렇게까지…… 그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인 것인가? 함께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이번에 대과에도 함께 급제한 동기가 그에게 말하기를, 멸문지화의 공포 속에서 어찌 사느냐고 하더니…….
“평소 달성위를 지혜롭다 여겼는데 이제 보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 죄도 없는 대군을 어찌 장님으로 만든다는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