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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의 혼사가 미루어지는 것 때문에 역정을 내시는 분은 늘 어머님이셨는데, 이번에는 아버님께서 노발대발하셨다.
“달성위가 그간 혼사를 미뤄 왔던 것은, 하지 않으려 한다기보다-”
형님께서 차분히 입을 여셨다.
“보다-?”
“대군께서 잘못되시기를 기다렸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번 병으로 소경이 아니라 더한 것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창진을 앓다 아까운 생명을 잃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것도 나이가 어리다면 더더욱 그 수가 많고.
“어허, 고얀!”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 대군께서 탄생하셨을 적에 인빈 측에서는 본인 소생의 군(君)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후궁 소생의 임금 앞에 적통 대군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그 대군의 외가와 연을 맺음은 도리어 멸문을 재촉하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선왕께서 붕어하신 이후로 우리 집안에서 이 혼사를 조급해하는 이유도 어떻게든 세를 넓혀 멸문의 위기를 벗어나 보려 함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대군을 해하는 방법까지 일러 주는 것은 실로 잔인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안 되겠다! 괘씸해서라도 반드시 이 혼사를 성사시켜야겠어!”
“성상께서도 없었던 혼사로 하라 하셨다면서요.”
“그러니 더욱 해야지! 혼사를 윤허하신 선왕께서 갑자기 승하하시지만 않았더라면 벌써 세 해 전에 이루어졌을 혼사다.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야겠다 하면 성상께서도 더 반대하지는 못하실 것이야.”
“그것 가지고 되겠습니까?”
“세자로 하여금 보위를 잇게 하라는 선왕의 유언을 세자께서만 들었다 주장하며 보위에 오르셨으니- 이 혼사는 여럿이 들은 선왕의 또 다른 유지가 되니, 그 점을 직언드리면 같은 명을 또 내리지 않으실 것이야, 암.”
형님과 아버님께서 이야기를 나누시는 중에도 규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한 마디도 올릴 수 없었다.
한밤중. 혼자 술잔을 기울이던 규는 저만치 어른거리는 모양새에 고개를 들었다. 등 뒤에 앉은 이의 그림자가 그의 앞으로 드리워져 있는데, 그 그림자에서 고개가 수시로 끄덕여지고 있는 것이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첫날밤. 곱게 차림 한 새색시가 족두리도 벗지 못한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소리 없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제 답답함 때문에 안사람을 첫날부터 이리 딱한 지경에 이르게 하다니. 못난 놈.
노하신 아버님께서 각오대로 성상께 고하고 혼사를 밀어붙이시어 두 달포가 지나기도 전인 오늘 혼사를 치렀다. 형님을 혼주로 하여 신행길에 오르기 전에 인사를 드리러 새벽녘 사랑에 들었더니 하시는 말씀이, 내일 날이 밝기 전에 안사람을 데리고 본가로 돌아오라 하셨다. 지난번 서신 일로 장인어른 되실 달성위에게 단단히 역정이 나시어 혼례 절차마저 무시하시는 것이다.
게다가…… 이윽고 신방에 들어 연지곤지 찍고 고이 앉아 있는, 이제는 제 내자가 된 예생 낭자를 마주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큰 실수를 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혼사는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자신이라도 나서서 거절했어야 했는데.
멸문지화의 위태로움 속에 들어앉은 놈이 감히 내자를 맞다니. 그것도 몇 년간이나 마음에 품어 왔던 이를 대책도 없이. 예생 낭자를 진심으로 연모한다면 낭자를 자신이 있는 위험 속으로 끌어들일 혼인 따위는 결코 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인데!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꽃잠은커녕 정다운 말 한 마디 건넬 수 없었다. 이미 혼사를 치른 마당에 돌이킬 수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그저 신부를 등지고 앉아 취하지도 않는 술을 연거푸 들이켜며 그런 사내의 못난 짓을 기다리다 지친 이를 안쓰럽게 꾸벅꾸벅 졸게나 만들고.
술상을 밀어 내고 조용히 돌아앉았다. 해가 뜨려면 두어 식경밖에 남지 않았으니, 족두리라도 벗겨 주고 잠시라도 편히 눈을 붙이게 할 생각이었다.
어엇-!
그 와중에 고개가 어찌나 떨어지는지 저러다 고개 다칠까 저어되어 순간적으로 손을 내밀어 뺨을 받쳤다. 제멋대로 떨어질 때는 뜨이지 않던 눈이 반짝 뜨였다. 이런…….
신부는 아직 정신이 들지 않았는지 멍하니 그를 마주 보다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난다.
“에구머니……!”
손은 앞의 한삼 자락 속에 있는데 몸은 뒤로 물러나니, 당연히 벌러덩 나자빠질 판이었다. 순간적으로 그가 다시 손을 뻗었다. 이, 이런…… 요지경은 끝난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족두리가 앞으로 벗겨지며 신부의 콧잔등을 쳤다.
“아얏-!”
맙소사……! 신부는 무척이나 아픈지 두 눈을 꼭 감고 어깨를 움츠린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가 서둘러 족두리를 들어내었다. 콧잔등도 발갛고 입가도 울상이었다.
“저런, 많이 아프시오?”
딱한 마음에 그가 고개를 가져갔다.
호오…….
발간 부분만 살펴보며 거듭 입으로 바람을 불었다. 어느새 뜨인 눈이 그를 넘겨다보고 있었다.
“괘, 괜찮습니다……. 아프다기보다는 서방님 앞에서 추태를 부린 것 같아서…… 송구합니다. 졸아서는 아니 되는 것인데 어젯밤에 통 잠을 이루지 못해서…….”
마치 큰 죄라도 지은 양 더듬거리는 새신부를 바라보던 규의 뭉크러졌던 가슴에서 갑자기 보글거리는 즐거움이 여기저기서 샘솟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기뻐 마지않는 이였던 것을 참담함에 가슴을 치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신부를 아프게 한 뒤라 웃는 낯을 할 수는 없어 입을 앙다물고 참으려 하는데, 신부가 작게 물었다.
“요,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까?”
입을 앙다문 그의 반응이 짐짓 엄히 보이는지, 눈치를 보다 묻는 것이다. 자칫 숨 한번 잘못 쉬었다가는 간신히 참아 넘겼던 웃음이 터지고 말 것 같아 자제하고 또 자제하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야 신부도 다행스런 미소를 띠었다.
그 모습이 하도 어여뻐서, 자신은 어찌해도 그녀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크나큰 죄를 지은 주제에- 그가 다가갔다. 눈꼬리까지 휘어 가며 미소 짓던 눈이 놀라서 휘둥그레지는 순간, 그 뺨에 그의 입술이 쪽 하고 닿았다 떨어졌다.
임자년 가을이었다.
1612년 겨울.
어두운 내당 뜰에 선 예생은 다시금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겨우 섣달 그믐께인데 이리 춥다니. 초(初)추위가 더 춥다고들 하지만, 앞으로 더 추워질 텐데. 북쪽은 더 추울 테고. 내일이면 북쪽으로 가실 서방님을 생각하니 자꾸만 눈물이 어룽거렸다.
그래도 훌쩍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하얀 김도 잘 보이지 않도록 숨을 죽인 채 중문 틈새를 내다보고 있었다.
어제 서방님께서 개성 유수를 제수받으시고 내일 떠나셔야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라님의 갑작스런 처사는 어째서인지, 우리 가문은 앞으로 어찌 될지, 이런저런 우려들로 집안이 온통 뒤숭숭했다. 그러니 시집온 지 달포도 지나지 않은 자신까지 경거망동한다 근심을 들을까, 조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허억……!
갑자기 뒤에서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에 예생은 숨이 멎을 듯 놀랐다. 재빨리 두 손으로 제 입을 덥석 가렸기에 다행히 아무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았다. 돌아보니 친정서부터 데려온 계집종 계옥이었다. 저리 가라는데도 어느새 또 뒤에 와 있는 것이다.
‘어, 어찌 이러는 게야! 이, 경을 칠 것 같으니!’
차마 말은 못 하고 주먹을 움켜쥐고 고 주둥이를 찧는 시늉을 하며 입으로만 벙긋거리며 꾸짖었다. 계옥이 되레 억울한 표정을 짓더니 저도 똑같이 벙긋거리며 손짓 발짓을 해 가며 항변한다.
‘추우신데 이만 들어가시라고요! 제가 기다린다니까요!’
‘되었다 했지 않아!’
방으로 들어가 있다가 저가 달려와 서방님 오셨다고 고하면 그때 나오라며 거듭 말리는 참이었지만, 조금도 고맙지 않다. 어제도 저리 권하기에 잠시 몸을 녹이러 들어간 사이에 일을 그르치지 않았던가. 오셨다는 소리에 서둘러 뛰어나왔지만 서방님은 이미 작은사랑으로 드신 후였다.
개성으로 떠나시기 전까지 시일이 촉박하여 어제오늘 여기저기 인사를 드리러 다니시는 중인데, 오늘도 못 뵈면 내일 아침에 떠나시기 전에는 먼발치서 한 번 뵐까 말까 할 텐데- 그런 것을 어찌 들어가라는 말이야!
추운 것은 그리 괴로운 축에 끼지 못했다. 신행을 와서 대청에 올라 아버님께 처음으로 절을 드리는데 끝나기도 전에 돌아앉으시던 모습도, 상견례를 마친 어머님께서 덕담 없이 그냥 손만 한번 잡아 주시던 것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시집이라는 것이 으레 그런 것이라고, 귀머거리, 벙어리로 살아야 한다며 혼례식 전날에 댕기 머리를 풀고 쪽을 지어 비녀를 꽂아 주시던 어머님의 눈에 어룽어룽하던 눈물의 빚이라고만 생각했다. 그것들은 모두 연모하는 분이 옆에 계시니 감내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규의 혼사를 강행하는 것이 아니었소……!”
어제 서방님께서 퇴청하시기도 전에 제수 소식이 전해졌고 식구들이 사랑에 모여들었다. 여인인 예생은 형님과 마당에 서 있었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말씀들은 아니 들으려 해도 아니 들을 수 없었다.
아버님께서 그리 침통하게 말씀하셨을 때, 예생은 제 심장이 크게 쿵덕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감?”
“대비께서 인빈 김씨와 연이 닿으면 힘이 되리라 하셨고 이제껏 나도 그런 줄 알았소만- 성상께서 ‘기어이 혼인을 하였구나-!’ 하시더니 규를 외지로 내치라 하셨더이다!”
“대감께서 무얼 잘못 아신 것이 아닙니까? 사도(四都) 중 하나인 개성의 종4품 부유수(副留守)인데 외지라니요. 제 짧은 식견으로도 그것은 외관직도 아니고 경관직(京官職. 중앙직)으로 구분될 정도로 큰 광영이-”
“말이 좋아 경관직이지, 한성에 있지 못하고 그 먼 개성까지 가는 것이 뭐가 다릅니까? 종6품을 내려도 높은 벼슬인 장원 급제자에게 종4품을 내리셨다고 좋아라 할 일도 아닙니다! 외지로 내치는데 승차라도 시켜 주어야 모양새가 그럴듯하니 그리하신 것이라 합니다!”
“직접 전해진 이야기가 아니라면 당장에 믿어 불안을 앞당길 필요는 없습니다.”
날카롭게 지적한 것은 시아주버니시다. 예생이 맞잡은 손을 비틀었다. 부디 그렇기를…….
하지만, 아버님께서 콧방귀를 뀌셨다.
“내가 믿지 못할 이야기를 전하겠느냐? 규가 도승지가 다녀갔다며 돈녕부로 날 찾아왔더구나. 한시가 급한 일이니 찾아왔겠지. 성상께서 그이에게 말씀하시길, 비밀은 아니라고까지 하셨다더구나. 선왕의 유지를 받든답시고 성상의 명을 어겼다는 말씀이지 무어냐.”
“그리되면 벼슬을 받아들여도 문제고, 사양하여도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외척으로서 분에 넘치는 벼슬을 내렸으니 사양하여야 마땅하지만, 사양하면 또 어명을 거역한다 트집을 잡으실 것이고, 받아들였다가 차후 무슨 일에 휘말릴지…….”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 될 것입니다.”
“유배지서 죽은 임해군도 군사들의 보고처럼 병사(病死)가 아니었다는 말이 있다.”
“예? 병사가 아니면…… 주, 주상께서 동복형님을 어쩌기라도 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설마요……. 임해군께서 그리 난폭하여 민가를 약탈하거나 무고한 사람을 죽인다며 파직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수없이 올려도 윤허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유배를 보내신 것도 결국 왕권에 도전해 사병까지 키웠다 하니 하는 수 없이 그러신 것이지, 실상 사형으로 다스릴 만한 일이었습니다……!”
“어떻게든 결국 죽었지 않느냐. 그때도 규의 혼삿날을 잡기 직전이었는데, 달성위가 말도 되지 않는 핑계를 대며 미뤘었지.”
아…… 그랬었다. 그때도 친정아버님께서는 아직 출사도 하지 못한 사내에게 귀한 여식을 줄 수 없다 하셨다.
“그를 지키던 수장이 강제로 독을 먹였다는 소리도 있고 목을 졸랐다는 증언도 있다. 어쩌면 두 가지 다 했는지도 모르고.”
을씨년스러운 섣달 바람에 가지에 붙은 채로 말라 죽었던 단풍잎 몇 개가 떨어져 바스락거리며 굴러다녔다. 그 희미한 소리는 단풍잎이 죽어 가며 지르는 단말마다.
그의 혼사가 미루어지는 것 때문에 역정을 내시는 분은 늘 어머님이셨는데, 이번에는 아버님께서 노발대발하셨다.
“달성위가 그간 혼사를 미뤄 왔던 것은, 하지 않으려 한다기보다-”
형님께서 차분히 입을 여셨다.
“보다-?”
“대군께서 잘못되시기를 기다렸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번 병으로 소경이 아니라 더한 것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창진을 앓다 아까운 생명을 잃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것도 나이가 어리다면 더더욱 그 수가 많고.
“어허, 고얀!”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 대군께서 탄생하셨을 적에 인빈 측에서는 본인 소생의 군(君)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후궁 소생의 임금 앞에 적통 대군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그 대군의 외가와 연을 맺음은 도리어 멸문을 재촉하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선왕께서 붕어하신 이후로 우리 집안에서 이 혼사를 조급해하는 이유도 어떻게든 세를 넓혀 멸문의 위기를 벗어나 보려 함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대군을 해하는 방법까지 일러 주는 것은 실로 잔인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안 되겠다! 괘씸해서라도 반드시 이 혼사를 성사시켜야겠어!”
“성상께서도 없었던 혼사로 하라 하셨다면서요.”
“그러니 더욱 해야지! 혼사를 윤허하신 선왕께서 갑자기 승하하시지만 않았더라면 벌써 세 해 전에 이루어졌을 혼사다.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야겠다 하면 성상께서도 더 반대하지는 못하실 것이야.”
“그것 가지고 되겠습니까?”
“세자로 하여금 보위를 잇게 하라는 선왕의 유언을 세자께서만 들었다 주장하며 보위에 오르셨으니- 이 혼사는 여럿이 들은 선왕의 또 다른 유지가 되니, 그 점을 직언드리면 같은 명을 또 내리지 않으실 것이야, 암.”
형님과 아버님께서 이야기를 나누시는 중에도 규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한 마디도 올릴 수 없었다.
한밤중. 혼자 술잔을 기울이던 규는 저만치 어른거리는 모양새에 고개를 들었다. 등 뒤에 앉은 이의 그림자가 그의 앞으로 드리워져 있는데, 그 그림자에서 고개가 수시로 끄덕여지고 있는 것이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첫날밤. 곱게 차림 한 새색시가 족두리도 벗지 못한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소리 없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제 답답함 때문에 안사람을 첫날부터 이리 딱한 지경에 이르게 하다니. 못난 놈.
노하신 아버님께서 각오대로 성상께 고하고 혼사를 밀어붙이시어 두 달포가 지나기도 전인 오늘 혼사를 치렀다. 형님을 혼주로 하여 신행길에 오르기 전에 인사를 드리러 새벽녘 사랑에 들었더니 하시는 말씀이, 내일 날이 밝기 전에 안사람을 데리고 본가로 돌아오라 하셨다. 지난번 서신 일로 장인어른 되실 달성위에게 단단히 역정이 나시어 혼례 절차마저 무시하시는 것이다.
게다가…… 이윽고 신방에 들어 연지곤지 찍고 고이 앉아 있는, 이제는 제 내자가 된 예생 낭자를 마주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큰 실수를 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혼사는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자신이라도 나서서 거절했어야 했는데.
멸문지화의 위태로움 속에 들어앉은 놈이 감히 내자를 맞다니. 그것도 몇 년간이나 마음에 품어 왔던 이를 대책도 없이. 예생 낭자를 진심으로 연모한다면 낭자를 자신이 있는 위험 속으로 끌어들일 혼인 따위는 결코 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인데!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꽃잠은커녕 정다운 말 한 마디 건넬 수 없었다. 이미 혼사를 치른 마당에 돌이킬 수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그저 신부를 등지고 앉아 취하지도 않는 술을 연거푸 들이켜며 그런 사내의 못난 짓을 기다리다 지친 이를 안쓰럽게 꾸벅꾸벅 졸게나 만들고.
술상을 밀어 내고 조용히 돌아앉았다. 해가 뜨려면 두어 식경밖에 남지 않았으니, 족두리라도 벗겨 주고 잠시라도 편히 눈을 붙이게 할 생각이었다.
어엇-!
그 와중에 고개가 어찌나 떨어지는지 저러다 고개 다칠까 저어되어 순간적으로 손을 내밀어 뺨을 받쳤다. 제멋대로 떨어질 때는 뜨이지 않던 눈이 반짝 뜨였다. 이런…….
신부는 아직 정신이 들지 않았는지 멍하니 그를 마주 보다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난다.
“에구머니……!”
손은 앞의 한삼 자락 속에 있는데 몸은 뒤로 물러나니, 당연히 벌러덩 나자빠질 판이었다. 순간적으로 그가 다시 손을 뻗었다. 이, 이런…… 요지경은 끝난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족두리가 앞으로 벗겨지며 신부의 콧잔등을 쳤다.
“아얏-!”
맙소사……! 신부는 무척이나 아픈지 두 눈을 꼭 감고 어깨를 움츠린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가 서둘러 족두리를 들어내었다. 콧잔등도 발갛고 입가도 울상이었다.
“저런, 많이 아프시오?”
딱한 마음에 그가 고개를 가져갔다.
호오…….
발간 부분만 살펴보며 거듭 입으로 바람을 불었다. 어느새 뜨인 눈이 그를 넘겨다보고 있었다.
“괘, 괜찮습니다……. 아프다기보다는 서방님 앞에서 추태를 부린 것 같아서…… 송구합니다. 졸아서는 아니 되는 것인데 어젯밤에 통 잠을 이루지 못해서…….”
마치 큰 죄라도 지은 양 더듬거리는 새신부를 바라보던 규의 뭉크러졌던 가슴에서 갑자기 보글거리는 즐거움이 여기저기서 샘솟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기뻐 마지않는 이였던 것을 참담함에 가슴을 치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신부를 아프게 한 뒤라 웃는 낯을 할 수는 없어 입을 앙다물고 참으려 하는데, 신부가 작게 물었다.
“요,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까?”
입을 앙다문 그의 반응이 짐짓 엄히 보이는지, 눈치를 보다 묻는 것이다. 자칫 숨 한번 잘못 쉬었다가는 간신히 참아 넘겼던 웃음이 터지고 말 것 같아 자제하고 또 자제하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야 신부도 다행스런 미소를 띠었다.
그 모습이 하도 어여뻐서, 자신은 어찌해도 그녀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크나큰 죄를 지은 주제에- 그가 다가갔다. 눈꼬리까지 휘어 가며 미소 짓던 눈이 놀라서 휘둥그레지는 순간, 그 뺨에 그의 입술이 쪽 하고 닿았다 떨어졌다.
임자년 가을이었다.
1612년 겨울.
어두운 내당 뜰에 선 예생은 다시금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겨우 섣달 그믐께인데 이리 춥다니. 초(初)추위가 더 춥다고들 하지만, 앞으로 더 추워질 텐데. 북쪽은 더 추울 테고. 내일이면 북쪽으로 가실 서방님을 생각하니 자꾸만 눈물이 어룽거렸다.
그래도 훌쩍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하얀 김도 잘 보이지 않도록 숨을 죽인 채 중문 틈새를 내다보고 있었다.
어제 서방님께서 개성 유수를 제수받으시고 내일 떠나셔야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라님의 갑작스런 처사는 어째서인지, 우리 가문은 앞으로 어찌 될지, 이런저런 우려들로 집안이 온통 뒤숭숭했다. 그러니 시집온 지 달포도 지나지 않은 자신까지 경거망동한다 근심을 들을까, 조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허억……!
갑자기 뒤에서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에 예생은 숨이 멎을 듯 놀랐다. 재빨리 두 손으로 제 입을 덥석 가렸기에 다행히 아무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았다. 돌아보니 친정서부터 데려온 계집종 계옥이었다. 저리 가라는데도 어느새 또 뒤에 와 있는 것이다.
‘어, 어찌 이러는 게야! 이, 경을 칠 것 같으니!’
차마 말은 못 하고 주먹을 움켜쥐고 고 주둥이를 찧는 시늉을 하며 입으로만 벙긋거리며 꾸짖었다. 계옥이 되레 억울한 표정을 짓더니 저도 똑같이 벙긋거리며 손짓 발짓을 해 가며 항변한다.
‘추우신데 이만 들어가시라고요! 제가 기다린다니까요!’
‘되었다 했지 않아!’
방으로 들어가 있다가 저가 달려와 서방님 오셨다고 고하면 그때 나오라며 거듭 말리는 참이었지만, 조금도 고맙지 않다. 어제도 저리 권하기에 잠시 몸을 녹이러 들어간 사이에 일을 그르치지 않았던가. 오셨다는 소리에 서둘러 뛰어나왔지만 서방님은 이미 작은사랑으로 드신 후였다.
개성으로 떠나시기 전까지 시일이 촉박하여 어제오늘 여기저기 인사를 드리러 다니시는 중인데, 오늘도 못 뵈면 내일 아침에 떠나시기 전에는 먼발치서 한 번 뵐까 말까 할 텐데- 그런 것을 어찌 들어가라는 말이야!
추운 것은 그리 괴로운 축에 끼지 못했다. 신행을 와서 대청에 올라 아버님께 처음으로 절을 드리는데 끝나기도 전에 돌아앉으시던 모습도, 상견례를 마친 어머님께서 덕담 없이 그냥 손만 한번 잡아 주시던 것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시집이라는 것이 으레 그런 것이라고, 귀머거리, 벙어리로 살아야 한다며 혼례식 전날에 댕기 머리를 풀고 쪽을 지어 비녀를 꽂아 주시던 어머님의 눈에 어룽어룽하던 눈물의 빚이라고만 생각했다. 그것들은 모두 연모하는 분이 옆에 계시니 감내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규의 혼사를 강행하는 것이 아니었소……!”
어제 서방님께서 퇴청하시기도 전에 제수 소식이 전해졌고 식구들이 사랑에 모여들었다. 여인인 예생은 형님과 마당에 서 있었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말씀들은 아니 들으려 해도 아니 들을 수 없었다.
아버님께서 그리 침통하게 말씀하셨을 때, 예생은 제 심장이 크게 쿵덕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감?”
“대비께서 인빈 김씨와 연이 닿으면 힘이 되리라 하셨고 이제껏 나도 그런 줄 알았소만- 성상께서 ‘기어이 혼인을 하였구나-!’ 하시더니 규를 외지로 내치라 하셨더이다!”
“대감께서 무얼 잘못 아신 것이 아닙니까? 사도(四都) 중 하나인 개성의 종4품 부유수(副留守)인데 외지라니요. 제 짧은 식견으로도 그것은 외관직도 아니고 경관직(京官職. 중앙직)으로 구분될 정도로 큰 광영이-”
“말이 좋아 경관직이지, 한성에 있지 못하고 그 먼 개성까지 가는 것이 뭐가 다릅니까? 종6품을 내려도 높은 벼슬인 장원 급제자에게 종4품을 내리셨다고 좋아라 할 일도 아닙니다! 외지로 내치는데 승차라도 시켜 주어야 모양새가 그럴듯하니 그리하신 것이라 합니다!”
“직접 전해진 이야기가 아니라면 당장에 믿어 불안을 앞당길 필요는 없습니다.”
날카롭게 지적한 것은 시아주버니시다. 예생이 맞잡은 손을 비틀었다. 부디 그렇기를…….
하지만, 아버님께서 콧방귀를 뀌셨다.
“내가 믿지 못할 이야기를 전하겠느냐? 규가 도승지가 다녀갔다며 돈녕부로 날 찾아왔더구나. 한시가 급한 일이니 찾아왔겠지. 성상께서 그이에게 말씀하시길, 비밀은 아니라고까지 하셨다더구나. 선왕의 유지를 받든답시고 성상의 명을 어겼다는 말씀이지 무어냐.”
“그리되면 벼슬을 받아들여도 문제고, 사양하여도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외척으로서 분에 넘치는 벼슬을 내렸으니 사양하여야 마땅하지만, 사양하면 또 어명을 거역한다 트집을 잡으실 것이고, 받아들였다가 차후 무슨 일에 휘말릴지…….”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 될 것입니다.”
“유배지서 죽은 임해군도 군사들의 보고처럼 병사(病死)가 아니었다는 말이 있다.”
“예? 병사가 아니면…… 주, 주상께서 동복형님을 어쩌기라도 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설마요……. 임해군께서 그리 난폭하여 민가를 약탈하거나 무고한 사람을 죽인다며 파직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수없이 올려도 윤허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유배를 보내신 것도 결국 왕권에 도전해 사병까지 키웠다 하니 하는 수 없이 그러신 것이지, 실상 사형으로 다스릴 만한 일이었습니다……!”
“어떻게든 결국 죽었지 않느냐. 그때도 규의 혼삿날을 잡기 직전이었는데, 달성위가 말도 되지 않는 핑계를 대며 미뤘었지.”
아…… 그랬었다. 그때도 친정아버님께서는 아직 출사도 하지 못한 사내에게 귀한 여식을 줄 수 없다 하셨다.
“그를 지키던 수장이 강제로 독을 먹였다는 소리도 있고 목을 졸랐다는 증언도 있다. 어쩌면 두 가지 다 했는지도 모르고.”
을씨년스러운 섣달 바람에 가지에 붙은 채로 말라 죽었던 단풍잎 몇 개가 떨어져 바스락거리며 굴러다녔다. 그 희미한 소리는 단풍잎이 죽어 가며 지르는 단말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