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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하지만, 안팎으로 고요한 사랑채에는 아직 멀쩡히 살아 있는 이들의 소리 없는 비명이 그득 들어차고 있었다.
“서, 성상께서…… 드디어 시작하시는 겝니까?”
“어머님, 고정하십시오.”
어머님의 목소리가 와들거리니 시아주버니께서 다독이셨다.
“과분하다 하였다가는 사달이 날 것이니, 일단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소.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으나, 그건 그때 가서 중지를 모으는 수밖에.”
옆에 서 계시던 형님께서도 제 등을 쓸어내리셨지만, 예생의 잔뜩 조여든 가슴에는 조금의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때부터 울렁거리던 가슴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는데…… 서방님 얼굴을 뵙기 전에는 결코 가라앉지 않을 것 같은데, 어찌 들어가라는 말이야! 여기서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밤엔 기필코-
그때였다. 저만치 어른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등불인가? 아니, 훤칠한 키에 도포와 갓 차림으로 등불을 든 사내종 옆에 걸어오시는 분은!
하도 반가워 자세히 보려고 문을 향해 조금 더 다가들었더니, 제 기세에 문이 밀렸는지 돌쩌귀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났다! 혹여 서방님께서 들으셨을까 봐 화들짝 놀랐다. 함께 놀라 경망스레 두 팔을 휘젓는 계옥이를 저만치 쫓아 버리고 자신은 경황이 없어 옆 담의 시커먼 그늘로 숨어들었다.
아아…… 아무리 뵙고 싶어도 참을 것을……. 들키면 심려를 끼쳐 드릴 것인데. 늦게까지 다녀오시느라 곤하실 터인데. 내일 먼 길을 떠나시려면 어서 들어가 쉬셔야 하는데.
어둠 속에서 작은 틈새를 하도 내다봐서 눈이 어룽거리는 것인지, 눈물이 어룽거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두 손으로 마구 눈을 비벼 댔다.
첫날밤에 그리 입 맞춰 주시고 안아 주신 이후로 단 한 번도 한 공간에 있어 본 적은 없지만, 서방님이니까 보고 싶어서 여태 기다렸는데 경망스럽게 행동하여 다 망쳐 버렸다. 내일이면 떠나셔서 5년 후에나 돌아오실 터인데.
아침나절에 어머님께서 부르셔서 말씀하시기를,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댁의 가풍에 익숙지 않으니 얼마간 배울 것은 배운 뒤 나중에 뒤따르라 하셨다. 나중에. 그 나중이 5년이 넘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생은 짐작하고 있었다. 말씀하신 이유 또한 진정이 아니라는 것도.
‘무, 무슨 일이라니요……? 우리 규한테 말입니까? 연고도 없는 그 먼 곳에서 뭔가 꼬투리를 잡힐 수 있단 말입니까? 아, 아니지요, 대감?’
이라고 어제 말씀 끝에 어머님께서 여쭈셨으나, 아버님께서는 끝내 아무 말씀도 없으셨으니까.
혹시라도 근심하실까 싶어 방의 불은 꺼 두었으니, 소리를 들으셨다 해도 자는가 하실 것이다. 어두운 그늘을 조심조심 걸어 중문에서 멀어졌다. 혹시 서방님께서 소리가 난 곳을 찾아 들어오셨다가도 자신을 알아보시지 못하도록. 그래서 그냥 가시도록…… 눈앞이 또 어룽거리는지 발밑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멈춰 서서 눈을 비볐다.
그때. 저만치서 인기척이 들렸다. 예생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혹시나 제대로 도망쳐 숨지 못한 계옥이가 기어 나오는 것일까? 이것을 내 그냥……! 이번에는 참말 꿀밤을 힘껏 때려 주고 말 것이야!
눈을 훔치다 말고 홱 돌아섰다. 아…… 중문 앞에 서서 이쪽을 향해 서신 분은…….
그믐께이니 달빛도 밝지 않은데다가 자신은 어두운 담 그늘 속에 서 있으니 아니 보이리라 생각했다. 저만 보일 것이라고. 저만 실컷 볼 것이라고……. 눈이 금세 어룽거려 다시 훔쳐야 하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라도 날까 봐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다.
아아…… 보이지 않아…… 어찌해……!
눈물이 치밀어 목구멍에서 끅끅거리는 소리가 나오려 했다.
아…… 안 돼……! 어서 가시어요, 제발……!
그때. 서방님께서 손을 내미셨다. 시커먼 담 그림자를 향해 그러시는 것은 아닐 터였다. 주책없는 발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한 번도 내당에 걸음을 아니 하시었으니, 지금도 저를 향해 손을 내미시는 것이 아닐지도. 하지만, 지난번엔 사내종을 시켜 뒤꼍에서 직접 따신 것이라며 홍시 두 개를 보내신 적도 있지 않았는가. 서방님이 보고 싶어 자신이 혼자 눈물짓는 것을 본 계옥이가 꾸민 일이 아니라면…… 이번에도 저를 향한 것이리라.
두어 걸음 더 걸어 담 그림자에서 나섰어도 내미셨던 손을 거두지 않으신다. 고였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고 다시 고이기 전에 그 손을 재촉하듯 흔드시는 것을 언뜻 보았다……! 발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빨리. 서방님의 두 팔이 첫날밤처럼 저를 향해 활짝 벌어진 순간, 나머지 몇 걸음을 나는 듯이 달려갔다.
“으허엉……!”
규도 마주 걸어, 달려오는 부인을 힘껏 끌어안았다. 새어 나오는 울음을 목구멍으로 꾹꾹 밀어 넣으면서도 눈물을 쉼 없이 흘리는 차가운 뺨을 마주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이 추운 데서 얼마나 기다리셨누.
어제 하루 종일 인사를 다니면서도 오늘은 들어가서 꼭 내당에 들어가 부인을 뵈어야지 하였다. 제 욕심으로 부인으로 맞아 놓고는 뒤늦게 제 죄를 깨달은 탓에 차마 곁에 들지 못하였어도 오늘만은…… 오늘 뵙고 내일 뵈어도 떠나 있는 동안에는 사무치도록 그리울 것이니…….
어제 처가에도 인사를 드리러 갔었다. 굳은 안색으로 제 절을 받으시고 하시는 말씀이 혼자 가라는 말씀이셨다. 옆에 앉으신 장모님께서도 같은 뜻이신지, 그의 얼굴만 하염없이 바라보셨다.
“자네도 알다시피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네. 나도, 사돈어른도.”
이번 그의 벼슬길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가늠하고 계시는 것이다.
“나는 여식의 고집에 졌고 사돈어른은- 인정(人情)에 지셨겠지. 귀하디귀한 조카님의 옥체를 해하기란 나 같아도 쉽지 않았을 것이네.”
침을 놓아 눈을 멀게 하시라는 서신에 대한 말씀인 것은 알아들었다. 하지만, 부인의 고집이라니……?
“자네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네.”
“무슨 말씀이신지……?”
“개성에 혼자서 가게.”
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예생이를 부임지로 데려가지 말라는 말일세. 그게 자네에게 주어진 기회라면 기회이니.”
기회.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기회라는 말씀이시다. 이대로 외지로 나가 일을 당하게 되면 부인은 영창대군의 외숙부 김 규의 내자로 같이 휘말리게 된다. 이대로 한성에 남아 있으면 달성위나 인빈께서 바로 손을 쓰실 수 있을 것이니, 옹주 자가의 따님으로 화를 면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다.
규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함께 갈 수는 없었다. 절대.
“서운해 말게.”
“아닙니다. 도리어 제가 송구합니다. 제가 없는 동안 내자를 부탁드립니다.”
혼인하였으니, 부유수의 임기는 5년이다. 처자가 함께 간다면 외로움이 덜하겠지만…….
오늘 아침 아버님, 어머님께 말씀드렸다. 내자와 함께 가지 않겠노라고. 시댁의 가풍을 익힘에 미흡하니 조금 더 가르침을 주십사 말씀도 올렸다.
두 분께서는 비통히 고개만 끄덕이셨다. 성상의 뜻을 가늠하신 탓이었다. 장인어른의 뜻을 거듭 전하지 않아도 될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일이 닥친 어제오늘은 한 다경, 일 식경이 흘러갈수록 가슴이 문드러지는 것만 같았다. 안팎에 있는 모든 이들이 예측하고 있는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자신이 서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곁에 부인이 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애초에 혼인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을……!
“흐윽, 보, 보고 싶어서…… 한 번, 흐으, 한 번만이라도 더…… 흐응……!”
북받치는 흐느낌 사이로 간신히 전해지는 말씀에 가슴이 미어졌다.
“예, 예……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작고 찬 몸을 끌어안은 규도 소리 없이 오열하며 속삭였다.
“아, 아닙…… 아니…… 왜 서방님께서…… 으헝…….”
“제가 잘못한 겁니다…… 송구합니다…… 참말로 송구합니다……!”
“아…… 아니…… 어헝…….”
도리질 치는 고개가 잠시라도 멀어질까 뒤통수를 받쳐 안아 들이는데 비녀 꽂은 머리 타래마저도 얼음처럼 차디차니, 가슴이 또 찢어졌다.
“으헝……어엉…….”
따뜻한 방 안으로 들어와 아랫목에 앉았어도 부인의 떨림은 전혀 가시지 않았다. 울음도. 눈물도.
“울지 마세요, 부인.”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물은 여전하다. 아무리 닦아 내도 또다시 샘솟는다.
“그동안은 송구했습니다. 제가 잘못하여서…… 낭자를 부인으로 맞지 말았어야 했던 것을요.”
그 말에 저를 홱 올려다보시더니 끅끅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신다.
“부인? 부인?”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서둘러 초에 불을 붙이고 보니, 부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다. 경기라도 하심인가?
“부인! 어찌 이러십니까, 부인!”
급히 작은 등을 두드리는데도 숨을 토해 내지 못하시니, 더럭 겁이 났다. 서둘러 안아 들여서는 더 힘껏 두드리려 하는데, 몸을 빼내어 물러나신다.
급기야 두 손으로 입을 가리시더니, 그 속으로 장한 울음을 토해 내신다. 허리까지 굽혀 가며 서러이도 우신다. 어찌 이러시는지……!
그 울음 사이사이로 말씀이 간신히 새어 나왔다.
“어째…… 어째서요……? 저는 서방님을…… 여, 연모하였는데…… 어째서 서방님은…… 저를 아니라 하십니까……!”
저런……! 제 말씀을 오해하신 것이다!
“아니, 아닙니다! 부인이 싫어서가 아니에요!”
급히 부인해도 격하게 도리질을 치며 통곡이 더욱 장해진다. 이러시다 큰일 나실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물러나려 하시는 몸을 억지로 당겨 안고 얼굴을 마주하였다.
“저는-!”
눈물이 얼룩져서는 새파랗게 굳어 든 얼굴. 차마, 꿈에서라도 울려서는 아니 될 이인 것을……! 결코 그러고 싶지 않을 만큼 어여쁜 이인데!
“이렇게 부인을 울리게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바람 앞에 선 등불 같은 가문으로 맞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내당에 한 번도 발걸음을 하지 못했지요.”
통곡이 잠시 잠깐 멈추었다. 제 말씀을 제대로 들으셨다는 의미였다.
다음도 급히 속삭였다.
“지난 단옷날에 부인을 처음 뵈었습니다. 그네를 타셨지요.”
제 가슴에 고여 있던 것을 조금씩 쏟아 내자, 부인께서 눈을 깜박이셨다. 모르셨을 것이다. 음흉한 사내의 시선이란 대놓고 나설 만한 것이 아닌지라 나무 뒤에서 몰래 뵈었는데- 생각만 해도 진달래 빛 미소가 떠오르는 모습이셨다.
“하도 어여쁘셔서…… 혼인날만 손꼽아 기다렸지요. 철없이…… 가문이 어떤 상황인 줄 알면서도 부인에 대해서만은 연결 지어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첫날밤에야 깨달았지요. 그러니 제 어리석음 때문이라면 부디…… 부디 울지 마세요……!”
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다시 한 줄기 흘러내렸다. 두 손과 팔은 부인을 부여안고 있으니, 다시 눈물을 닦아 드릴 손이 없었다. 그래서 얼굴을 가져갔다. 뺨으로 문지르고 입술로 닦았다. 혀로 훑고…… 제 눈물을 더했다.
한참 후에야 간신히 다시 눈을 뜨고는 부인을 마주했다. 그리고 청을 하였다. 한껏 더듬거리면서도…… 간절히…… 청을 하였다.
“기왕 욕심을 내었으니…… 한 번 더 욕심을 내 보아도 괜찮겠습니까?”
부인은 새파란 충격은 사라지고 약간 멍한 기색이셨으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고개를 내려, 그토록 바라 왔던 앵두 같은 입술에 입을 맞췄다. 제 뺨을 스쳐 가는 작은 숨결이 사무치도록 안타까웠다. 이런 순간을…… 과연 다시 함께 할 수 있을까?
방의 불이 켜지는 순간 섬돌 아래 서서 ‘아이고, 저를 어째!’라며 발을 동동 구르던 계옥은 얼마 만엔가 방의 불이 꺼지자, 그제야 안도하며 돌아섰다.
코를 훌쩍이더니 마님께 고뿔이 옮았나? 하고 중얼거리다가, 정작은 코가 아니라 눈가를 소매로 문질러 닦으며 따뜻한 제 방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하지만, 안팎으로 고요한 사랑채에는 아직 멀쩡히 살아 있는 이들의 소리 없는 비명이 그득 들어차고 있었다.
“서, 성상께서…… 드디어 시작하시는 겝니까?”
“어머님, 고정하십시오.”
어머님의 목소리가 와들거리니 시아주버니께서 다독이셨다.
“과분하다 하였다가는 사달이 날 것이니, 일단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소.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으나, 그건 그때 가서 중지를 모으는 수밖에.”
옆에 서 계시던 형님께서도 제 등을 쓸어내리셨지만, 예생의 잔뜩 조여든 가슴에는 조금의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때부터 울렁거리던 가슴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는데…… 서방님 얼굴을 뵙기 전에는 결코 가라앉지 않을 것 같은데, 어찌 들어가라는 말이야! 여기서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밤엔 기필코-
그때였다. 저만치 어른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등불인가? 아니, 훤칠한 키에 도포와 갓 차림으로 등불을 든 사내종 옆에 걸어오시는 분은!
하도 반가워 자세히 보려고 문을 향해 조금 더 다가들었더니, 제 기세에 문이 밀렸는지 돌쩌귀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났다! 혹여 서방님께서 들으셨을까 봐 화들짝 놀랐다. 함께 놀라 경망스레 두 팔을 휘젓는 계옥이를 저만치 쫓아 버리고 자신은 경황이 없어 옆 담의 시커먼 그늘로 숨어들었다.
아아…… 아무리 뵙고 싶어도 참을 것을……. 들키면 심려를 끼쳐 드릴 것인데. 늦게까지 다녀오시느라 곤하실 터인데. 내일 먼 길을 떠나시려면 어서 들어가 쉬셔야 하는데.
어둠 속에서 작은 틈새를 하도 내다봐서 눈이 어룽거리는 것인지, 눈물이 어룽거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두 손으로 마구 눈을 비벼 댔다.
첫날밤에 그리 입 맞춰 주시고 안아 주신 이후로 단 한 번도 한 공간에 있어 본 적은 없지만, 서방님이니까 보고 싶어서 여태 기다렸는데 경망스럽게 행동하여 다 망쳐 버렸다. 내일이면 떠나셔서 5년 후에나 돌아오실 터인데.
아침나절에 어머님께서 부르셔서 말씀하시기를,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댁의 가풍에 익숙지 않으니 얼마간 배울 것은 배운 뒤 나중에 뒤따르라 하셨다. 나중에. 그 나중이 5년이 넘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생은 짐작하고 있었다. 말씀하신 이유 또한 진정이 아니라는 것도.
‘무, 무슨 일이라니요……? 우리 규한테 말입니까? 연고도 없는 그 먼 곳에서 뭔가 꼬투리를 잡힐 수 있단 말입니까? 아, 아니지요, 대감?’
이라고 어제 말씀 끝에 어머님께서 여쭈셨으나, 아버님께서는 끝내 아무 말씀도 없으셨으니까.
혹시라도 근심하실까 싶어 방의 불은 꺼 두었으니, 소리를 들으셨다 해도 자는가 하실 것이다. 어두운 그늘을 조심조심 걸어 중문에서 멀어졌다. 혹시 서방님께서 소리가 난 곳을 찾아 들어오셨다가도 자신을 알아보시지 못하도록. 그래서 그냥 가시도록…… 눈앞이 또 어룽거리는지 발밑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멈춰 서서 눈을 비볐다.
그때. 저만치서 인기척이 들렸다. 예생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혹시나 제대로 도망쳐 숨지 못한 계옥이가 기어 나오는 것일까? 이것을 내 그냥……! 이번에는 참말 꿀밤을 힘껏 때려 주고 말 것이야!
눈을 훔치다 말고 홱 돌아섰다. 아…… 중문 앞에 서서 이쪽을 향해 서신 분은…….
그믐께이니 달빛도 밝지 않은데다가 자신은 어두운 담 그늘 속에 서 있으니 아니 보이리라 생각했다. 저만 보일 것이라고. 저만 실컷 볼 것이라고……. 눈이 금세 어룽거려 다시 훔쳐야 하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라도 날까 봐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다.
아아…… 보이지 않아…… 어찌해……!
눈물이 치밀어 목구멍에서 끅끅거리는 소리가 나오려 했다.
아…… 안 돼……! 어서 가시어요, 제발……!
그때. 서방님께서 손을 내미셨다. 시커먼 담 그림자를 향해 그러시는 것은 아닐 터였다. 주책없는 발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한 번도 내당에 걸음을 아니 하시었으니, 지금도 저를 향해 손을 내미시는 것이 아닐지도. 하지만, 지난번엔 사내종을 시켜 뒤꼍에서 직접 따신 것이라며 홍시 두 개를 보내신 적도 있지 않았는가. 서방님이 보고 싶어 자신이 혼자 눈물짓는 것을 본 계옥이가 꾸민 일이 아니라면…… 이번에도 저를 향한 것이리라.
두어 걸음 더 걸어 담 그림자에서 나섰어도 내미셨던 손을 거두지 않으신다. 고였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고 다시 고이기 전에 그 손을 재촉하듯 흔드시는 것을 언뜻 보았다……! 발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빨리. 서방님의 두 팔이 첫날밤처럼 저를 향해 활짝 벌어진 순간, 나머지 몇 걸음을 나는 듯이 달려갔다.
“으허엉……!”
규도 마주 걸어, 달려오는 부인을 힘껏 끌어안았다. 새어 나오는 울음을 목구멍으로 꾹꾹 밀어 넣으면서도 눈물을 쉼 없이 흘리는 차가운 뺨을 마주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이 추운 데서 얼마나 기다리셨누.
어제 하루 종일 인사를 다니면서도 오늘은 들어가서 꼭 내당에 들어가 부인을 뵈어야지 하였다. 제 욕심으로 부인으로 맞아 놓고는 뒤늦게 제 죄를 깨달은 탓에 차마 곁에 들지 못하였어도 오늘만은…… 오늘 뵙고 내일 뵈어도 떠나 있는 동안에는 사무치도록 그리울 것이니…….
어제 처가에도 인사를 드리러 갔었다. 굳은 안색으로 제 절을 받으시고 하시는 말씀이 혼자 가라는 말씀이셨다. 옆에 앉으신 장모님께서도 같은 뜻이신지, 그의 얼굴만 하염없이 바라보셨다.
“자네도 알다시피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네. 나도, 사돈어른도.”
이번 그의 벼슬길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가늠하고 계시는 것이다.
“나는 여식의 고집에 졌고 사돈어른은- 인정(人情)에 지셨겠지. 귀하디귀한 조카님의 옥체를 해하기란 나 같아도 쉽지 않았을 것이네.”
침을 놓아 눈을 멀게 하시라는 서신에 대한 말씀인 것은 알아들었다. 하지만, 부인의 고집이라니……?
“자네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네.”
“무슨 말씀이신지……?”
“개성에 혼자서 가게.”
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예생이를 부임지로 데려가지 말라는 말일세. 그게 자네에게 주어진 기회라면 기회이니.”
기회.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기회라는 말씀이시다. 이대로 외지로 나가 일을 당하게 되면 부인은 영창대군의 외숙부 김 규의 내자로 같이 휘말리게 된다. 이대로 한성에 남아 있으면 달성위나 인빈께서 바로 손을 쓰실 수 있을 것이니, 옹주 자가의 따님으로 화를 면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다.
규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함께 갈 수는 없었다. 절대.
“서운해 말게.”
“아닙니다. 도리어 제가 송구합니다. 제가 없는 동안 내자를 부탁드립니다.”
혼인하였으니, 부유수의 임기는 5년이다. 처자가 함께 간다면 외로움이 덜하겠지만…….
오늘 아침 아버님, 어머님께 말씀드렸다. 내자와 함께 가지 않겠노라고. 시댁의 가풍을 익힘에 미흡하니 조금 더 가르침을 주십사 말씀도 올렸다.
두 분께서는 비통히 고개만 끄덕이셨다. 성상의 뜻을 가늠하신 탓이었다. 장인어른의 뜻을 거듭 전하지 않아도 될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일이 닥친 어제오늘은 한 다경, 일 식경이 흘러갈수록 가슴이 문드러지는 것만 같았다. 안팎에 있는 모든 이들이 예측하고 있는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자신이 서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곁에 부인이 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애초에 혼인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을……!
“흐윽, 보, 보고 싶어서…… 한 번, 흐으, 한 번만이라도 더…… 흐응……!”
북받치는 흐느낌 사이로 간신히 전해지는 말씀에 가슴이 미어졌다.
“예, 예……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작고 찬 몸을 끌어안은 규도 소리 없이 오열하며 속삭였다.
“아, 아닙…… 아니…… 왜 서방님께서…… 으헝…….”
“제가 잘못한 겁니다…… 송구합니다…… 참말로 송구합니다……!”
“아…… 아니…… 어헝…….”
도리질 치는 고개가 잠시라도 멀어질까 뒤통수를 받쳐 안아 들이는데 비녀 꽂은 머리 타래마저도 얼음처럼 차디차니, 가슴이 또 찢어졌다.
“으헝……어엉…….”
따뜻한 방 안으로 들어와 아랫목에 앉았어도 부인의 떨림은 전혀 가시지 않았다. 울음도. 눈물도.
“울지 마세요, 부인.”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물은 여전하다. 아무리 닦아 내도 또다시 샘솟는다.
“그동안은 송구했습니다. 제가 잘못하여서…… 낭자를 부인으로 맞지 말았어야 했던 것을요.”
그 말에 저를 홱 올려다보시더니 끅끅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신다.
“부인? 부인?”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서둘러 초에 불을 붙이고 보니, 부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다. 경기라도 하심인가?
“부인! 어찌 이러십니까, 부인!”
급히 작은 등을 두드리는데도 숨을 토해 내지 못하시니, 더럭 겁이 났다. 서둘러 안아 들여서는 더 힘껏 두드리려 하는데, 몸을 빼내어 물러나신다.
급기야 두 손으로 입을 가리시더니, 그 속으로 장한 울음을 토해 내신다. 허리까지 굽혀 가며 서러이도 우신다. 어찌 이러시는지……!
그 울음 사이사이로 말씀이 간신히 새어 나왔다.
“어째…… 어째서요……? 저는 서방님을…… 여, 연모하였는데…… 어째서 서방님은…… 저를 아니라 하십니까……!”
저런……! 제 말씀을 오해하신 것이다!
“아니, 아닙니다! 부인이 싫어서가 아니에요!”
급히 부인해도 격하게 도리질을 치며 통곡이 더욱 장해진다. 이러시다 큰일 나실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물러나려 하시는 몸을 억지로 당겨 안고 얼굴을 마주하였다.
“저는-!”
눈물이 얼룩져서는 새파랗게 굳어 든 얼굴. 차마, 꿈에서라도 울려서는 아니 될 이인 것을……! 결코 그러고 싶지 않을 만큼 어여쁜 이인데!
“이렇게 부인을 울리게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바람 앞에 선 등불 같은 가문으로 맞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내당에 한 번도 발걸음을 하지 못했지요.”
통곡이 잠시 잠깐 멈추었다. 제 말씀을 제대로 들으셨다는 의미였다.
다음도 급히 속삭였다.
“지난 단옷날에 부인을 처음 뵈었습니다. 그네를 타셨지요.”
제 가슴에 고여 있던 것을 조금씩 쏟아 내자, 부인께서 눈을 깜박이셨다. 모르셨을 것이다. 음흉한 사내의 시선이란 대놓고 나설 만한 것이 아닌지라 나무 뒤에서 몰래 뵈었는데- 생각만 해도 진달래 빛 미소가 떠오르는 모습이셨다.
“하도 어여쁘셔서…… 혼인날만 손꼽아 기다렸지요. 철없이…… 가문이 어떤 상황인 줄 알면서도 부인에 대해서만은 연결 지어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첫날밤에야 깨달았지요. 그러니 제 어리석음 때문이라면 부디…… 부디 울지 마세요……!”
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다시 한 줄기 흘러내렸다. 두 손과 팔은 부인을 부여안고 있으니, 다시 눈물을 닦아 드릴 손이 없었다. 그래서 얼굴을 가져갔다. 뺨으로 문지르고 입술로 닦았다. 혀로 훑고…… 제 눈물을 더했다.
한참 후에야 간신히 다시 눈을 뜨고는 부인을 마주했다. 그리고 청을 하였다. 한껏 더듬거리면서도…… 간절히…… 청을 하였다.
“기왕 욕심을 내었으니…… 한 번 더 욕심을 내 보아도 괜찮겠습니까?”
부인은 새파란 충격은 사라지고 약간 멍한 기색이셨으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고개를 내려, 그토록 바라 왔던 앵두 같은 입술에 입을 맞췄다. 제 뺨을 스쳐 가는 작은 숨결이 사무치도록 안타까웠다. 이런 순간을…… 과연 다시 함께 할 수 있을까?
방의 불이 켜지는 순간 섬돌 아래 서서 ‘아이고, 저를 어째!’라며 발을 동동 구르던 계옥은 얼마 만엔가 방의 불이 꺼지자, 그제야 안도하며 돌아섰다.
코를 훌쩍이더니 마님께 고뿔이 옮았나? 하고 중얼거리다가, 정작은 코가 아니라 눈가를 소매로 문질러 닦으며 따뜻한 제 방으로 종종걸음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