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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화
삼십 대를 하루 앞두고 한지성한테 차였다. 그것도 문자 한 통으로. 답문은 당연히 씹혔고, 통화는 거부당했다.
축구 선수가 꿈이었다는 말이 그냥 한 말이 아니었는지 아주 시원하게 뻥 차였다. 차범근의 축구 교실에라도 다녔나. 이 정도면 호날두는 못 되어도 루니 정도는 가능했겠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차려면 공을 차야지, 왜 사람을 차. 연탄재도 함부로 차지 말란 말 못 들어 봤니.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었다. 헤어지자는 말이 심각한 오류를 일으켜 한겨울에 만우절을 찾을 정도로 버퍼링이 걸린 상태였다.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한 건 종무식이 끝나고, 퇴근 준비를 할 때였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그 새ㄲ…… 아니지, 한지성과 나는 광화문 광장에 나가 함께 카운트다운을 보기로 했었다. 그때 주려고 준비했던 선물을 가방 속에서 발견한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내일이면 서른이 되는 것도 충격인데 차이다뇨. 이거 꿈인가요?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가혹할 수가 있죠?
“그래도 완전 다행 아니냐. 시계라도 건져서.”
“그러니까. 그거 주고 헤어졌어 봐. 그땐 정말 통곡의 강을 건넜을걸?”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시계를 보며, 경자와 숙자가 한마디씩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한지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나 혼자 결혼을 꿈꾸고 있었다. 상상 속에서는 벌써 경자와 숙자 같은 쌍둥이 자매를 낳아 유모차에 태워 나들이를 가고 있었다. 앞서가도 너무 앞서간 것이다. 나는 거의 예물급의 시계를 보며 병나발을 불었다.
검은 눈물이 강을 이뤘다. 오늘따라 마스카라가 과했던 탓이다. 그래도 5년을 넘게 만났다. 끝이 어떤 모양이든, 슬프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얼굴 보고 말할 용기도 없어서 문자 하나 달랑 보내 놓고 잠수 타는 찌질한 새끼는 잊어.”
“맞아. 니가 뭐가 아쉬워서 그딴 놈한테 미련을 떨어.”
저렇게 말하는 쟤네 둘 다 남자 친구는 없다. 그러니 오늘 같은 날 나랑 술이나 마시고 앉아 있지.
“당장 내일부터 소개팅하자.”
“남자 없으면 못 사냐? 혼자도 괜찮아.”
“아니, 이유라도 말해 주면 어디가 덧나?”
술병을 테이블 위에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지난 5년이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었냐고. 그냥 헤어져, 그 한 마디만 했어도 충분했잖아.”
“그러니까 그런 새끼는 잊으라니까.”
“야, 마셔, 더 마셔.”
속상해하는 내 앞으로 경자와 숙자가 술을 몰아주었다. 술 마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마시고 또 마셨다.
2차까지 갔다가 3차로는 노래방에 갔다. 나는 마이크를 독점하고 <총 맞은 것처럼>만 주구장창 불러 댔다. 사실 나는 노래를 잘 못한다. 음정 박자 다 무시한 <총 맞은 것처럼>은 거의 고막 테러 수준이었다.
천송이는 예쁘기라도 했지.
실컷 소리를 지르다 나오니 목이 말라서 4차를 가고, 4차로 끝내자니 아쉬워서 5차도 가고, 술이 나인지 내가 술인지 그렇게 부어라 마셔라 다음 날까지 10차를 달렸다. 해 뜨는 것도 못 봤다. 맨 처음 잠깐이나마 정신이 돌아왔을 땐 현관을 굴러다니고 있었고, 그다음에 눈을 떴을 땐 변기를 붙잡고 어깨춤을 추고 있었으며, 그다음이 지금…… 그러니까 오늘이…….
더듬거리며 손을 뻗어 핸드폰을 확인했다.
1월 2일…… 오전 8시 30분.
1월 2일. 1월 2일?!!
씻고 옷을 갈아입고 어쩌고 할 여유는 없었다. 회사까지는 아무리 빨리 가도 40분은 걸린다. 새해의 첫 출근 날이다. 시무식에, 회의에, 인사 발령에 말해 봐야 입만 아플 정도로 중요한 날이었다. 그런 날에 최악의 몰골로 지각을 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차 키를 들고 주차장까지 뛰어 내려갔다가 하필이면 차량 이부제에 걸린 걸 알았다. 오, 쉣!!!!! 누가 시곗바늘에 기름이라도 발라 놨나, 미친 듯이 9시를 향해 내달리는 시간을 보며 심장이 죄어들고 입 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택시를 잡아타고 가려는데 망할 놈의 택시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고 안 되겠다 버스라도 타자, 하는 마음으로 버스 정류장을 향해 뛰는데 하필이면 구두 굽이 보도블록 사이에 끼어 버렸다. 억지로 빼다가 구두 굽이 쑥 빠지며 뒤로 발라당 자빠졌다.
“악.”
짧은 치마를 입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로 구두 굽을 바닥으로 내려치다가 타야 할 버스가 오고 있는 걸 보았다. 방법이 없었다. 냅다 벗은 구두를 손에 쥐고 버스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겨우 버스에 올라탔다. 사람이 많아 자리를 잡기가 힘들어 아무 데나 비집고 들어가 섰다. 잡을 만한 손잡이가 남아 있지 않아 두 발에 잔뜩 힘을 주었다. 어디서 이러고 있으면 절대 넘어지지 않는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회사에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다 말고 갑자기 속력을 내는 버스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뭐든 잡으려 허우적거리는 내 앞으로 키가 큰 남자가 와서 섰다. 그 등에 쿵 하고 부딪쳤다. 남자가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쳤다. 좀 차가워 보이기는 해도 곱상하게 잘생긴 남자였다. 한 번쯤 뒤돌아볼 정도로.
“죄송합니다.”
부딪친 게 미안해 사과를 하자 잠시 내 얼굴을 쳐다보던 남자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뭐지. 방금 나를 살피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착각인가? 잘생긴 얼굴이 매너라는 착시 현상을 만든 건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생각들을 늘어놓다가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참.
나는 중심을 잘 잡고 서서 급하게 같은 부서 직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회사 도착했어? 분위기 어때? 아무래도 나 좀 늦을 것 같은데.]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를 했다. 계속해서 핸드폰을 확인하고 문자를 보내느라 당연히 아무것도 잡고 있지 않았다. 중심을 잃은 나는 뭘 붙잡고 말고 할 새도 없이 미끄러져 운전석 쪽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부딪친다. 두 눈을 질끈 감으려는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아주 천천히 슬로 모션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의 모든 감각이 개방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꿀벌의 날갯짓과 개미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때 미끄러지는 나를 향해 다가온 팔이 손목을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깨닫기도 전 확 끌어 당겨지는 힘 덕분에 간신히 멈춰 설 수 있었다.
“아가씨. 괜찮아요? 조심해야지. 넘어지면 큰일 나요. 꽉 붙들라고.”
“네? 아, 네.”
운전기사 아저씨의 말에 대충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까 그 잘생긴 남자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았다. 잘생긴 남자가 매너까지 좋다니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여기서 또 한 번 깨닫고 간다.
“저, 감사…….”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하고 있는데 버스가 정차했고 남자는 그사이 열린 문으로 내려 버렸다. 아니 ‘합니다’, 그 세 글자 더 듣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꼭 그렇게 내렸어야 했냐!
지각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거울을 보니 꼴이 엉망이었다. 머리는 산발에 온통 엉켜 있고, 화장은 다 지워져 얼룩덜룩했다. 옷은 입다 만 건지 벗다 만 건지, 단춧구멍이 제멋대로 끼워져 아방가르드 한 패션을 창조 중이었다. 나한테 이런 패션 센스가 있을 줄이야!
최대한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세수를 하며 버스에서 봤던 남자를 잠깐 떠올렸다. 이 꼴을 봤으니 그 표정이 납득이 갔다. 나는 타일 벽에 머리를 짓찧으며 절규했다. 죽자. 죽어.
그건 그렇고, 지금은 절규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시무식에 참석하고, 회의에도 들어갔다. 오후에 난 인사 발령을 통해 대리로 승진했다는 것을 알았다.
신은 공평했다. 하나를 빼앗으니 다른 하나를 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잘됐다. 승진 엄청 기다렸잖아. 축하해.
조금 한가해진 틈을 타 경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같이 마셔 댔으니 무사한가 싶어 걸었는데 목소리가 쌩쌩한 걸로 보아 괜찮아 보였다.
아침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다가 승진 소식을 전했더니 역시나 내 일처럼 기뻐해 준다. 처음 만난 중학생 때부터 나한테 친구라고는 얘네 둘밖에 없었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일 좋은 친구들이었다.
차라리 우리 셋이 같이 살면 좋을 텐데. 숙자는 싫다고 하겠지만.
통화를 끝내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인정받고 위로 올라가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당장은 좋았다. 대리라. 대리. 드디어 오 대리가 되는 것이다. 분명히 오다리라고 놀리는 것들이 있겠지만 어떻게 조질지는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은 일단 기쁨을 마음껏 만끽하고 싶었다.
“참, 얘기 들었어?”
혼자 실실 웃고 있는데 옆자리의 김지나가 물었다.
“무슨 얘기?”
“다음 준가 인턴 온다는 것 같던데.”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알려 줄 건 알려 주고 혼내야 할 땐 혼내 가며 적당히 사수 노릇을 하면 된다. 인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 정도였는데, 그땐 몰랐다.
버스에서 만난 그 남자를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이번에 우리 팀에서 일하게 된 주한결 씨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주한결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공중에서 시선이 마주쳤다가 이내 엇갈렸다. 아무래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게…… 좀 추했어야지.
젠장.
이쯤에서 인턴에 대한 썰을 하나 풀어 보기로 한다.
회사 하루 이틀 다닌 것도 아니고, 진상 짓 하는 인턴이 한두 명이었던 것도 아니지만 진상 오브 진상으로 직원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인턴이 하나 있었다.
술만 마셨다 하면 꽐라가 되는 건 기본이고, 그녀의 남자 친구는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내 전화통에 불이 나도록 전화를 해 댔다. 처음에는 그냥 여자 친구를 너무 아끼고 사랑하나 보다 했지. 그 마음이 갸륵해서 전화번호를 알려 준 게 화근이었다. 그래 뭐, 거기까지도 좋다 친다. 취해서 걸핏하면 무단결근을 해 대는데 그걸 어느 사수가 눈감아 주겠으며 어느 회사가 이해해 주겠는가.
“난 진짜 걔처럼 뻔뻔한 애는 본 적이 없어.”
“그래 놓고 자기가 왜 정식 채용이 안 된 거냐고 따지는데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지.”
“동기들한테 들었는데 결국 그때 뒤치다꺼리하던 남자 친구랑 헤어지고 다른 남자랑 결혼한다대? 전 남자 친구라던가.”
“어머. 그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래?”
퇴근 후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나온 <전 남자 친구> 발언에 나는 맥주 한 캔을 단숨에 비운 뒤 빈 캔을 손으로 찌그러뜨렸다. 슬픔은 잠시고, 분노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지금 한지성이 내 눈앞에 있다면 찌그러진 캔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맞다. 그때 사수가 오 대리였지?”
나의 분노가 그녀들의 화제 속으로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다. 대상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 여자나 그 새끼나 떠올리면 열받기는 매한가지였으니까.
“그건 그렇고, 이번에 오 대리네 인턴 잘생겼더라. 주한결이라고 했나?”
이야기는 과거의 인턴을 지나 현재의 인턴으로 넘어왔다. 그러니까 주한결. 그 주한결이 문제다.
“잘생기긴.”
영락없이 슬리데린 하이패스상이더만.
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1화
삼십 대를 하루 앞두고 한지성한테 차였다. 그것도 문자 한 통으로. 답문은 당연히 씹혔고, 통화는 거부당했다.
축구 선수가 꿈이었다는 말이 그냥 한 말이 아니었는지 아주 시원하게 뻥 차였다. 차범근의 축구 교실에라도 다녔나. 이 정도면 호날두는 못 되어도 루니 정도는 가능했겠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차려면 공을 차야지, 왜 사람을 차. 연탄재도 함부로 차지 말란 말 못 들어 봤니.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었다. 헤어지자는 말이 심각한 오류를 일으켜 한겨울에 만우절을 찾을 정도로 버퍼링이 걸린 상태였다.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한 건 종무식이 끝나고, 퇴근 준비를 할 때였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그 새ㄲ…… 아니지, 한지성과 나는 광화문 광장에 나가 함께 카운트다운을 보기로 했었다. 그때 주려고 준비했던 선물을 가방 속에서 발견한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내일이면 서른이 되는 것도 충격인데 차이다뇨. 이거 꿈인가요?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가혹할 수가 있죠?
“그래도 완전 다행 아니냐. 시계라도 건져서.”
“그러니까. 그거 주고 헤어졌어 봐. 그땐 정말 통곡의 강을 건넜을걸?”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시계를 보며, 경자와 숙자가 한마디씩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한지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나 혼자 결혼을 꿈꾸고 있었다. 상상 속에서는 벌써 경자와 숙자 같은 쌍둥이 자매를 낳아 유모차에 태워 나들이를 가고 있었다. 앞서가도 너무 앞서간 것이다. 나는 거의 예물급의 시계를 보며 병나발을 불었다.
검은 눈물이 강을 이뤘다. 오늘따라 마스카라가 과했던 탓이다. 그래도 5년을 넘게 만났다. 끝이 어떤 모양이든, 슬프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얼굴 보고 말할 용기도 없어서 문자 하나 달랑 보내 놓고 잠수 타는 찌질한 새끼는 잊어.”
“맞아. 니가 뭐가 아쉬워서 그딴 놈한테 미련을 떨어.”
저렇게 말하는 쟤네 둘 다 남자 친구는 없다. 그러니 오늘 같은 날 나랑 술이나 마시고 앉아 있지.
“당장 내일부터 소개팅하자.”
“남자 없으면 못 사냐? 혼자도 괜찮아.”
“아니, 이유라도 말해 주면 어디가 덧나?”
술병을 테이블 위에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지난 5년이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었냐고. 그냥 헤어져, 그 한 마디만 했어도 충분했잖아.”
“그러니까 그런 새끼는 잊으라니까.”
“야, 마셔, 더 마셔.”
속상해하는 내 앞으로 경자와 숙자가 술을 몰아주었다. 술 마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마시고 또 마셨다.
2차까지 갔다가 3차로는 노래방에 갔다. 나는 마이크를 독점하고 <총 맞은 것처럼>만 주구장창 불러 댔다. 사실 나는 노래를 잘 못한다. 음정 박자 다 무시한 <총 맞은 것처럼>은 거의 고막 테러 수준이었다.
천송이는 예쁘기라도 했지.
실컷 소리를 지르다 나오니 목이 말라서 4차를 가고, 4차로 끝내자니 아쉬워서 5차도 가고, 술이 나인지 내가 술인지 그렇게 부어라 마셔라 다음 날까지 10차를 달렸다. 해 뜨는 것도 못 봤다. 맨 처음 잠깐이나마 정신이 돌아왔을 땐 현관을 굴러다니고 있었고, 그다음에 눈을 떴을 땐 변기를 붙잡고 어깨춤을 추고 있었으며, 그다음이 지금…… 그러니까 오늘이…….
더듬거리며 손을 뻗어 핸드폰을 확인했다.
1월 2일…… 오전 8시 30분.
1월 2일. 1월 2일?!!
씻고 옷을 갈아입고 어쩌고 할 여유는 없었다. 회사까지는 아무리 빨리 가도 40분은 걸린다. 새해의 첫 출근 날이다. 시무식에, 회의에, 인사 발령에 말해 봐야 입만 아플 정도로 중요한 날이었다. 그런 날에 최악의 몰골로 지각을 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차 키를 들고 주차장까지 뛰어 내려갔다가 하필이면 차량 이부제에 걸린 걸 알았다. 오, 쉣!!!!! 누가 시곗바늘에 기름이라도 발라 놨나, 미친 듯이 9시를 향해 내달리는 시간을 보며 심장이 죄어들고 입 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택시를 잡아타고 가려는데 망할 놈의 택시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고 안 되겠다 버스라도 타자, 하는 마음으로 버스 정류장을 향해 뛰는데 하필이면 구두 굽이 보도블록 사이에 끼어 버렸다. 억지로 빼다가 구두 굽이 쑥 빠지며 뒤로 발라당 자빠졌다.
“악.”
짧은 치마를 입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로 구두 굽을 바닥으로 내려치다가 타야 할 버스가 오고 있는 걸 보았다. 방법이 없었다. 냅다 벗은 구두를 손에 쥐고 버스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겨우 버스에 올라탔다. 사람이 많아 자리를 잡기가 힘들어 아무 데나 비집고 들어가 섰다. 잡을 만한 손잡이가 남아 있지 않아 두 발에 잔뜩 힘을 주었다. 어디서 이러고 있으면 절대 넘어지지 않는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회사에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다 말고 갑자기 속력을 내는 버스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뭐든 잡으려 허우적거리는 내 앞으로 키가 큰 남자가 와서 섰다. 그 등에 쿵 하고 부딪쳤다. 남자가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쳤다. 좀 차가워 보이기는 해도 곱상하게 잘생긴 남자였다. 한 번쯤 뒤돌아볼 정도로.
“죄송합니다.”
부딪친 게 미안해 사과를 하자 잠시 내 얼굴을 쳐다보던 남자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뭐지. 방금 나를 살피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착각인가? 잘생긴 얼굴이 매너라는 착시 현상을 만든 건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생각들을 늘어놓다가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참.
나는 중심을 잘 잡고 서서 급하게 같은 부서 직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회사 도착했어? 분위기 어때? 아무래도 나 좀 늦을 것 같은데.]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를 했다. 계속해서 핸드폰을 확인하고 문자를 보내느라 당연히 아무것도 잡고 있지 않았다. 중심을 잃은 나는 뭘 붙잡고 말고 할 새도 없이 미끄러져 운전석 쪽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부딪친다. 두 눈을 질끈 감으려는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아주 천천히 슬로 모션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의 모든 감각이 개방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꿀벌의 날갯짓과 개미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때 미끄러지는 나를 향해 다가온 팔이 손목을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깨닫기도 전 확 끌어 당겨지는 힘 덕분에 간신히 멈춰 설 수 있었다.
“아가씨. 괜찮아요? 조심해야지. 넘어지면 큰일 나요. 꽉 붙들라고.”
“네? 아, 네.”
운전기사 아저씨의 말에 대충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까 그 잘생긴 남자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았다. 잘생긴 남자가 매너까지 좋다니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여기서 또 한 번 깨닫고 간다.
“저, 감사…….”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하고 있는데 버스가 정차했고 남자는 그사이 열린 문으로 내려 버렸다. 아니 ‘합니다’, 그 세 글자 더 듣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꼭 그렇게 내렸어야 했냐!
지각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거울을 보니 꼴이 엉망이었다. 머리는 산발에 온통 엉켜 있고, 화장은 다 지워져 얼룩덜룩했다. 옷은 입다 만 건지 벗다 만 건지, 단춧구멍이 제멋대로 끼워져 아방가르드 한 패션을 창조 중이었다. 나한테 이런 패션 센스가 있을 줄이야!
최대한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세수를 하며 버스에서 봤던 남자를 잠깐 떠올렸다. 이 꼴을 봤으니 그 표정이 납득이 갔다. 나는 타일 벽에 머리를 짓찧으며 절규했다. 죽자. 죽어.
그건 그렇고, 지금은 절규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시무식에 참석하고, 회의에도 들어갔다. 오후에 난 인사 발령을 통해 대리로 승진했다는 것을 알았다.
신은 공평했다. 하나를 빼앗으니 다른 하나를 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잘됐다. 승진 엄청 기다렸잖아. 축하해.
조금 한가해진 틈을 타 경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같이 마셔 댔으니 무사한가 싶어 걸었는데 목소리가 쌩쌩한 걸로 보아 괜찮아 보였다.
아침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다가 승진 소식을 전했더니 역시나 내 일처럼 기뻐해 준다. 처음 만난 중학생 때부터 나한테 친구라고는 얘네 둘밖에 없었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일 좋은 친구들이었다.
차라리 우리 셋이 같이 살면 좋을 텐데. 숙자는 싫다고 하겠지만.
통화를 끝내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인정받고 위로 올라가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당장은 좋았다. 대리라. 대리. 드디어 오 대리가 되는 것이다. 분명히 오다리라고 놀리는 것들이 있겠지만 어떻게 조질지는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은 일단 기쁨을 마음껏 만끽하고 싶었다.
“참, 얘기 들었어?”
혼자 실실 웃고 있는데 옆자리의 김지나가 물었다.
“무슨 얘기?”
“다음 준가 인턴 온다는 것 같던데.”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알려 줄 건 알려 주고 혼내야 할 땐 혼내 가며 적당히 사수 노릇을 하면 된다. 인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 정도였는데, 그땐 몰랐다.
버스에서 만난 그 남자를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이번에 우리 팀에서 일하게 된 주한결 씨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주한결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공중에서 시선이 마주쳤다가 이내 엇갈렸다. 아무래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게…… 좀 추했어야지.
젠장.
이쯤에서 인턴에 대한 썰을 하나 풀어 보기로 한다.
회사 하루 이틀 다닌 것도 아니고, 진상 짓 하는 인턴이 한두 명이었던 것도 아니지만 진상 오브 진상으로 직원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인턴이 하나 있었다.
술만 마셨다 하면 꽐라가 되는 건 기본이고, 그녀의 남자 친구는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내 전화통에 불이 나도록 전화를 해 댔다. 처음에는 그냥 여자 친구를 너무 아끼고 사랑하나 보다 했지. 그 마음이 갸륵해서 전화번호를 알려 준 게 화근이었다. 그래 뭐, 거기까지도 좋다 친다. 취해서 걸핏하면 무단결근을 해 대는데 그걸 어느 사수가 눈감아 주겠으며 어느 회사가 이해해 주겠는가.
“난 진짜 걔처럼 뻔뻔한 애는 본 적이 없어.”
“그래 놓고 자기가 왜 정식 채용이 안 된 거냐고 따지는데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지.”
“동기들한테 들었는데 결국 그때 뒤치다꺼리하던 남자 친구랑 헤어지고 다른 남자랑 결혼한다대? 전 남자 친구라던가.”
“어머. 그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래?”
퇴근 후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나온 <전 남자 친구> 발언에 나는 맥주 한 캔을 단숨에 비운 뒤 빈 캔을 손으로 찌그러뜨렸다. 슬픔은 잠시고, 분노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지금 한지성이 내 눈앞에 있다면 찌그러진 캔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맞다. 그때 사수가 오 대리였지?”
나의 분노가 그녀들의 화제 속으로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다. 대상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 여자나 그 새끼나 떠올리면 열받기는 매한가지였으니까.
“그건 그렇고, 이번에 오 대리네 인턴 잘생겼더라. 주한결이라고 했나?”
이야기는 과거의 인턴을 지나 현재의 인턴으로 넘어왔다. 그러니까 주한결. 그 주한결이 문제다.
“잘생기긴.”
영락없이 슬리데린 하이패스상이더만.
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