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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난 냉미남이 좋더라. 차가운 겉모습 안에 뜨거운 가슴을 감추고 있을 것 같잖아.”

“이미 난리 났던걸? 여자 친구는 있대?”

“우리 인턴은 오자마자 여자 친구 있다고 철벽 치더라. 물어본 사람 아무도 없는데.”

“주한결 얼굴 정도면 있을지도 모르지.”

“한 달 동안만이라도 우리들의 주한결로 남아 주면 안 되겠니?”

주한결의 사수라는 이유로 한동안 시달릴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버스에서 보았던 그 곱상한 이미지는 어디다 홀랑 팔아먹고, 무표정과 단답형의 대답으로 일관하고 있는 주한결.

솔직히 말하면 나는 주한결이 그날의 나를 깨끗하게 잊어 주기를 바랐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추한 첫인상으로 남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나를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여하튼 아는 척하지 않는 주한결을 보고 안심했다. 그런데! 은근하게 무시당하는 것 같은 이 기분을 무어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대체 뭔데. 그래서 기억을 하는 건데, 못하는 건데. 내가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다는 거야? 그 정도로 임팩트가 있었는데 어떻게 나를 몰라봐? 한 달이 지났어, 일 년이 지났어? 저기요, 혹시 안면 인식 장애라도 있으신가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이 바쁘다는 것이었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신경 쓸 일도 많고 인턴까지 챙기고 가르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한결은 묵묵히 제 할 일을 해 나갔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제법 센스도 있고 빠릿빠릿해서 같은 인턴들 사이에서나 직원들 사이에서나 평판이 좋았다. 성격도 모난 데 없이 잘 지내는 것 같은데 유독 내게만 딱딱하게 구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거야 뭐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점심을 먹고 나니 졸린 것 같기도 해서 책이나 볼 겸 사내 도서실에 갔다. 한쪽 벽에 붙은 신간 도서 목록을 확인하고 끌리는 제목이 있어 책을 찾으러 갔다. 찾다 보니 참 애매한 위치에도 꽂혀 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자니 오버하는 것 같고, 내 키로는 무리고. 이럴 땐 인체의 신비를 믿어 보기로 한다. 기지개를 켜 몸을 쭉쭉 늘려 주고, 있는 힘껏 까치발을 들었다.

책이 손에 닿아 속으로 오예를 외치며 꺼낸 순간 손이 미끄러지더니 책이 공중 부양을 했다. 정수리에 책 모서리가 찍히길 기다리며(?) 두려움에 꼭 감은 눈 속에서 오만 가지 생각을 했다. 그냥 사다리 놓고 올라갈걸, 아니면 꺼내 달라고 할걸.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떨어지고도 남을 시간인데 정수리 쪽의 사정은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슬그머니 실눈을 떴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넥타이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드니 떨어질 뻔한 책을 나이스 캐치한 주한결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엥? 언제부터 여기에…… 어리둥절해하는 내 손에 책을 쥐여 주길래,

“아, 고마…….”

워요. 라고 말하려는데 말허리를 뚝 잘라먹고는 그냥 가 버린다. 아, 이 새끼.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넌 사과 받으면 죽는 귀신이라도 붙었냐!





생각보다 회식 날짜가 늦게 잡혔다. 이래저래 바쁜 일이 많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승진 축하와 인턴 환영을 겸한 회식이었다.

술자리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딱히 피하는 편도 아니었다. 일부러 술자리를 만들어 가며까지 술을 마시지는 않는데 요즘은 어쩐지 매일 술독에 빠져 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괜찮다고 하면서도 내 마음은 사실 한지성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로 인해 생각보다 큰 데미지를 입은 상태였다.

대차게 차이고 나니 실연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고민하게 되었다. 말이 5년이지, 내게 그 시간은 몇 잔의 술로 잊어버릴 수 있는 세월이 아니었다.

가장 손쉽게 택한 방법은 몸을 혹사시키는 것이었다. 가장 격렬한 운동이 뭘까 찾다가 스피닝을 시작했다. 한 며칠을 무식하게 하다가 상상을 초월하는 근육통에 일주일을 끙끙 앓았다. 이 정도에서 끝났기에 망정이지 더 했다가는 횡문근 융해증으로 병원에 실려 갈 뻔했다. 근육이 녹아 콜라색의 소변을 보게 된다던데……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주한결 씨, 뭐 해. 한 잔 받아.”

나도 이 회식의 주인공인데 나한테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쳇. 안 따라 줘도 내가 알아서 마신다. 나는 잔에 차고 넘치도록 꽉꽉 술을 채웠다.

“죄송합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술은 마시지 않습니다.”

잘못 들었나. 모르긴 몰라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교회 다녀?”

대답하지 않는 주한결에, 무안해진 부장님이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회생활 할 거면 한두 잔은 마실 줄도 알아야지. 자네가 아직 사회를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사회라는 게 말이야.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아요. 내가 자네 나이 때는 말이지.”

“부장님, 부장님. 안 마신다는 사람은 그냥 두시고 제 술 한잔 받으세요.”

“그래요, 부장님.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먹여요.”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는지 부장님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구석에 앉아 술을 홀짝거리며 주한결을 감싸고도는 여직원들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저 하나 때문에 다들 저 난린데 정작 주한결은 그 속에서 홀로 고고하게 앉아 있었다. 저렇게 자기주장 강하고 뻣뻣한 인턴이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안주도 없이 마신 술이 올라와 정신이 없는 와중에 1차가 끝나고, 2차까지 갈 생각은 없어 적당히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술기운에 비틀거리며 이리 쿵 저리 쿵 하고 있는데 주한결이 옆에 와 섰다.

“왜……?”

당연히 2차도 갈 거라고 생각했다. 여직원들이 쉽게 놔줬을 리가 없으니까.

“뭐가요?”

주한결이 되물었다.

“2차 안 가요?”

“술도 안 마시는데 뭐 하러요.”

그건 그렇긴 한데, 그래도 그게 다는 아닐 텐데.

말없이 걷는 내 옆을 따라 걷길래 가는 방향이 같은가 보다 했다. 그러다 문득 아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나 물었다.

“종교 때문에 술 안 마신다는 거 진짜예요?”

“거짓말이에요.”

너무 당당하게 말해 술이 확 달아날 정도로 놀라 버렸다.

“왜 그런 거짓말을?”

주한결은 잠시 말이 없었다. 부는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멀리서, 트와이스의 노래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사탕처럼 달콤하다는데, 하늘을 나는 것 같다는데.

주한결이 말했다.

“제가 취하면 대리님을 데려다줄 수가 없잖아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취해서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다른 사람도 아닌 주한결이 저런 말을 할 리가 없다.

“데려다……준다고요? 나를?”

나는 겁도 없이 확인 사살의 방법을 택했다. 잘못 들은 게 맞다면 당장 접시 물에 코라도 박고 싶겠지만, 지금 나는 취했으니까, 걸음도 제대로 못 걸으니까, 기억 안 나는 척하면 그만이다.

“네.”

그런데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지난번 건강 검진 할 때 내 오른쪽 귀 소음성 난청이라고 한 새끼 나와. 이건 뭐 거의 소머즈급이구만.

“왜요? 혼자서도 갈 수 있는데.”

괜히 한번 그렇게 말해 보았다. 그럼 또 뭐라고 할지 궁금해서.

“안 돼요.”

너의 대답, 십 점 만점에 십 점.

하지만 그 대답에 큰 의미는 부여하지 않기로 한다. 한지성과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새로운 남자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쉬운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개자식이어도, 한때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주었던 그다.

문득 10년 가까이 연애하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6개월 만에 다른 남자와 결혼한 동료가 떠올랐다. 텅 비어 버린 마음의 틈새를 아무렇지도 않게 파고드는 남자는 여러모로 위험하다. 나는 한 걸음 물러나 철벽을 쳤다.

“택시 타고 가면 되니까 걱정 말고 가요.”

“같이 타고 가시죠.”

“정말 괜찮다니까요.”

한사코 사양하는 나를 관찰하듯 보던 주한결이 말했다.

“괜찮으신 거 맞는 거죠?”

“네? 아, 그렇다니까요. 술 뭐 하루 이틀 마셔 보나요.”

“지난번에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아서요.”

지난번?

순간 등줄기가 싸해졌다.

주한결과 나 사이에 지난번이라고 할 만한 게 있다면 그건 그날뿐이다. 그러니까, 그날. 주한결의 기억에서는 물론이고 내 인생에서도 지워 버리고 싶은 흑.역.사.의 날.

“설마 버스에서?”

나는 내가 양의 울음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머릿속으로 이런 글자가 지나갔다. 오수주 님께서 양의 울음소리 스킬을 습득하셨습니다.

“네. 버스에서.”

나는 경악했다. 뭐야, 다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그러면서 여태 모른 척한 거였어? 이건 무슨 기쁨 두 배, 행복 두 배도 아니고 모르는 척을 하다가 아는 척을 하니 충격이 두 배였다. 토르의 묠니르로 얻어맞으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 그건 사망각이겠지.

“기억……하고 있었어요?”

주한결이 그렇게 묻는 나를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기억을 못 할 리가 있겠습니까.”

“…….”

그러곤 쐐기를 박는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게 그런 이야기였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난.

할 수만 있다면 이름 모를 어딘가의 머나먼 별로 꺼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서 감자나 캐고 살아야 한다고 해도 여기보다는 낫겠지 싶었다.

김칫국을 사발로 드링킹 하고 나니 배가 터질 것 같았다.

이러지 마, 주한결. 차라리 나를 오다리라고 불러.





결국 집에는 혼자서 택시를 타고 갔다(라고 쓰고 도망쳤다, 라고 읽는다).

어제 있었던 일 모두, 술에 취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척을 하긴 했지만 그런다고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로 되지는 않았다.

창피한 건 둘째 치고, 나는 다 기억하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을 해 온 주한결이 괘씸했다. 그의 앞에서 엄청 도도하고 엘레강스한 척 굴었는데 그런 나를 속으로 얼마나 비웃고 있었을 거야.

“이거 복사해 와요. 100장씩.”

내가 건넨 서류를 쳐다보던 주한결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지지 않고 쳐다봐 주었다.

왜?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