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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무리 인턴이라고 해도 별 쓸데 없는 서류라는 건 한눈에 알아보았을 것이다. 이건 그냥 내 나름의 소심한 복수 같은 거였다. 내 요구가 부당하다는 걸 알아도, 지가 어쩌겠는가. 여차하면 직급으로 눌러 버리면 그만인 것을.

난 대리고 넌 인턴이야. 억울하면 출세해. 그래 봤자 이 회사에 정식 채용되기는 힘들 거야. 내가 방해할 거니까.

복사만 하다가 오늘 하루가 다 갈 것이다. 어디 하루 종일 서서 다리 좀 아파 보라지. 혼자서 신나 하고 있는데 그런 나를 보던 주한결이 피식 웃는다.

“왜 웃어요?”

내가 물었다.

“그냥요.”

“…….”

“유치하다고 해야 할지, 귀엽다고 해야 할지.”

유치? 귀엽?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주한결이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복사실로 가 버렸다. 뭐지, 이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것 같은 상황은?

그건 그렇고 나는 그가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을 곱씹고 있었다. 유치라는 말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가 내게 귀엽다고 했다…….

나대지 마, 심장아.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생활건강 브랜드로 샴푸, 세제, 치약에서부터 유기농 기초 화장품, 그리고 드럭스토어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사업을 확장 중이었다. 나는 이 중에서 화장품사업본부에 소속되어 신규 브랜드 론칭을 진행 중이었고, 주한결은 내 밑에서 복사와 A4 상자 옮기기, 정수기 물통 교체…… 등의 잡다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까지 하냐? 그러다 정식으로 채용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경자가 말했다.

“안 그래도 그럴 것 같아. 학벌, 외모, 능력, 뭐 하나 빠지는 게 있어야지.”

“대체 어떻게 생겼길래. 나 너네 회사 앞으로 놀러 가도 돼? 잘생긴 인턴 얼굴 한번 보게.”

숙자가 말했다.

잘생기기야 했지. 그 잘생긴 얼굴로 나한테 엿을 먹여서 문제지. 그런데도 도무지 미워지지가 않는 건 역시 얼굴 때문인가.

“신경이 쓰이기도 하겠다. 잘생긴 남자가 옆에서 왔다 갔다 하면 나라도 그러지.”

“더구나 남자 친구하고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경자가 말하자 숙자가 거들었다.

“그러게.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는지.”

아무 미련도 남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이유라도 말해 주었다면 이렇게까지 답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문도 모르는 채로 한지성의 인생에서 가위질당해 버린 뒤, 나는 어쩌면 주한결을 통해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뭐, 어때. 뭐든 기회가 있을 때 잡는 거지. 일이든, 남자든.”

기회를 잡고 자시고 간에, 주한결은 나한테 아무 관심도 없다. 없는 게 분명하다. 설사 있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비록 한지성에게는 문자 한 통으로 끝내 버릴 수 있었던 사랑이라고 해도, 적어도 나만큼은 그와 나의 지난 사랑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





당연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주한결은 또래 남자 직원들 사이에서는 천하의 나쁜 남자쯤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그들은 주한결을 공동의 적으로 인식하며 자기들끼리 똘똘 뭉쳤다. 루저들의 발악이 어째 좀 짠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한 가운데, 들어 보니 결전의 날이라도 잡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저녁. 뭐 밧줄로 꽁꽁 묶어서라도 술을 먹이고 말겠다나.

지나가다가 우연히 작당 모의를 듣게 되었다. 미리 조심하라고 알려 줄까 말까 하다가 내가 왜 그런 친절까지 베풀어야 하나 싶어 관두었다.

“그럼 먼저 퇴근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내일 봐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서는 주한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일에 열중했다. 일이 많아 조금이라도 일찍 퇴근하려면 다른 생각은 할 여유가 없었다.

어느 정도 일을 끝마치고 나니 열 시가 넘어 있었다. 찌뿌둥한 몸에 한껏 기지개를 켜고 서둘러 퇴근 준비를 했다.

불이 거의 다 꺼진 회사를 나와 종종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다 말고 근처에 남자 직원들이 주한결의 묘자리……로 삼은 술집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운 놈이지만 그래도 걱정은 되어서, 가 볼까 말까 몇 번을 망설이다가 슬쩍 보고만 오자,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유리문 너머로 주한결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리고 뒤이어 눈에 들어온 광경에 나는 완전 놀라고 말았다. 주한결을 제외한 남자 직원들이 싹 다 전멸 상태였던 것이다.

“주한결 씨.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대리님?”

많이 마신 것 같기는 한데 생각보다 멀쩡한 주한결이 나를 보고 조금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괜찮아요?”

“네. 그런데 여긴 어떻게.”

“그냥 좀, 걱정이 돼서. 일어나요. 일단 이 사람들 다 보내야겠네요.”

여기를 오는 게 아니었는데, 괜히 와서는 뒤처리를 하게 생겼다. 주한결과 나는 쓰러진 남자 직원들을 하나하나 챙겨 다 택시를 태워 보냈다.

그러고 나니 둘만 남았다.

“겨우 끝났네요.”

“네.”

한숨 돌린 내 말에 주한결이 짧게 대답했다.

“오늘 고생했어요. 잘 가요.”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주한결이 갑자기 내 손목을 붙잡아 왔다.

“왜, 왜요?”

당황한 내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왜 저는 그냥 두고 가세요?”

“혼자 갈 수 있잖아요.”

“그래 보여요?”

“네.”

“아닌데.”

그 말에 무어라 말하기도 전 다가온 주한결이 내 품에 쓰러지듯이 기대 왔다. 그때 알았다. 멀쩡한 게 아니라 멀쩡한 척했을 뿐이라는 것을.

비틀거리는 그를 힘주어 붙잡았다. 우리의 앞으로 몇 대의 택시가 지나갔지만 잡아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2화



갑자기 점심 약속이 취소되는 바람에 구내식당으로 가자 주한결이 인턴 동기들과 밥을 먹고 있었다. 또래와 함께 있는 그는 나와 있을 때와는 달리 편안한 얼굴이었다. 뭐, 당연하겠지. 나도 부장님이랑 밥 먹을 땐 얼굴이 썩으니까.

오늘의 메뉴인 육개장을 들고 서서 주한결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뒤늦게 나를 발견한 인턴들이 벌떡 일어나 서로 제 옆자리를 내주려 했다. 혼자 먹어도 상관은 없지만 이제 와 빼기도 그렇고 해서 아무 자리에나 앉았다. 어쩌다 보니 주한결의 맞은편 자리에.

주한결의 얼굴이 단번에 썩어 빈정이 상했다. 와, 나 지금 부장님이랑 동급인 거야? 나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육개장을 철근처럼 씹어 삼켰다.

그러고 보니 어제 이후로 처음, 주한결의 얼굴을 제대로 본다. 오전 내내 바빠서 서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할 틈도 없었다. 그래서 물어보지도 못했다. 어제 잘 들어갔냐고. 속은 괜찮으냐고. 택시만 태워 보낸 게 영 마음에 걸렸었는데, 썩은 얼굴과 마주하고 있으려니 자신의 오지랖이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고 있는지 원. 내 코가 석 잔데.

“대리님. 괜찮으세요? 육개장이 맛이 없으세요?”

아무래도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나 보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것 같아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맛있어요. 그런데 다들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요? 괜히 내가 와서 방해한 거 아니에요?”

“전혀요. 그냥 이제 인턴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아서요. 저희끼리 친목을 다지는 의미로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오, 좋죠. 이럴 때 동료만큼 큰 힘이 되는 것도 없으니까요. 앞으로도 잘들 지내면 좋겠네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오래 일하다 보면 어디에선가는 꼭 만나게 되더라고요.”

별거 아닌 이야기에도 눈을 초롱초롱 빛내, 나는 무슨 구원의 메시아라도 된 기분이었다. 뭐, 꼬맹이들 데리고 대장 노릇 하는 것도 나쁘진 않네.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오빠. 우리 여기 가는 거 어때요? 인터넷 하다가 본 집인데 괜찮을 것 같아서요.”

“오, 어딘데?”

내게 쏠려 있던 관심이 한 번에 확 옮겨 간 것도 충분히 짜증이 나는데 주한결을 <오빠>라 부르는 여자 인턴에 나는 하마터면 육개장 그릇을 부술 뻔했다. 영혼까지 끌어모은 콧소리였다. 웬만한 내공이 아니면 그런 콧소리는 낼 수가 없다.

방금 전까지 아무 관심도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조금 궁금해졌다. 너란 인턴에 대해. 그래, 네가 어느 부서 소속이었더라.

“서로 오빠, 동생 하기로 했나 보죠?”

영혼은 너만 끌어모을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고 여유 있는 모습으로 여자 인턴과 주한결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아, 네.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고 해서요.”

“사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건 좋은 일이죠. 내가 상관할 일도 아니고. 그런데 여기는 회사라는 걸 잊지 마세요. 언니나 오빠 같은 사적인 호칭이 어울리는 곳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죠?”

여자 인턴의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로서는 좀 창피하고 민망했을지 몰라도, 나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후배가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선배의 역할이 아니던가.

가슴에 손을 얹고 절대 다른 의도는 없었음을 밝힌다. 그녀가 주한결에게 오빠라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다. 둘이 잘 어울려서도 아니고, 그녀가 예뻐서는 더더욱 아니다.

아니라고. 진짜.

발걸음도 가볍게 구내식당을 나와 걷는데, 저쪽에서 아는 언니가 막 엘리베이터에 타는 것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언니, 같이 가!”

라고 소리치다 말고 문득 뒤가 켕겨 고개를 돌렸다.

오, 마이 갓…….

아무리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이라지만, 이렇게 막 한 입으로 두말하고, 또 그걸 주한결이 딱 보고 그럴 줄은 몰랐지.

에라. 모르겠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줄행랑을 쳐 버렸다.





그 일로 딱히 주한결이 무슨 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나는 알아서 꼬리를 내렸다. 어찌 됐든 약점을 잡힌 이상 방심은 금물이었다. 덕분에 복사실에서 벗어난 주한결은 다른 인턴들에 비해서는 늦게 실무를 접하는 중이었다. 일을 가르치면서 느낀 거지만 사고방식이 꽤 유연했다. 업무에 대한 이해도도 높고. 여러모로 뛰어난 인재라는 건 말해 봤자 입만 아플 뿐이었다. 그러니 아마도 큰 이변이 없는 한 정식 직원으로 채용이 되겠지. 나는 무심코 달력을 보았다가 이제 인턴 기간이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주한결 씨, 오늘 퇴근하고 뭐 해요?”

인턴 기간이 다 끝나 가도록 밥 한번 같이 먹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라 주한결에게 물었다. 진짜 좋은 마음으로 물어본 건데. 얼굴이 왜 그래, 또.

“걱정 마요. 안 잡아먹어요.”

내 돈 쓰면서 내가 이런 말까지 해야 해?

“그냥 밥 한번 사 주고 싶어서 그래요.”

나는 거의 애원하듯이 말했다.

“네.”

주한결이 대답했다.

정말이지 황송무지로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