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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위에서 만나, 형 4화







“그 짐이요.”

말없이 복도를 걷는 와중에 마스가 말했다.

“집에 가져갈 거예요?”

“그래야겠지?”

“학교에서 쓸 거면 연기과 사물함에 놔요.”

“아직 배정 못 받아서…….”

“내 거에 넣어 놓으면 되죠.”

마스가 배려심을 보였다. 그는 내가 과방에서 지현 선배와 헤어질 때 무슨 심정이었는지 다 이해하는 얼굴로 날 보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경험은 나보다 한 수 위다.

‘좋은 배우가 될 거야.’

마음이 뜨거워지는 이 말도 여러 번 들어 봤겠지?

“연기과 사물함이 어딘데?”

마스가 천장을 가리켰다.

사물함은 연기과 건물 옥상에 있었다.

연기과는 고립되어 있다. 지하철역과 연결된 정문으로부터 샛길로 한참을 걸어가다 보면 나무가 빽빽한 언덕이 나온다. 거기로 또 한참을 가야 낡고 투박한 건물이 나오는데 그게 연기과다. 오래되기도 했지만 방음을 위해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시끄러운 소음을 내면서 일반대 공부를 방해하는 예체능 건물들은 모두 여기 모여 있다.

끝없는 오르막길을 걸어왔는데 여기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마스와 난 묵묵히 5층 계단을 올랐다. 한겨울인데도 땀이 난다.

오르면서 마스를 힐끗 봤다. 헉헉대는 나와는 달리 마스는 평화로워 보였다. 그렇군, 사물함을 옥상에 두는 몰상식한 짓을 한 이유는 배우들의 체력 단련을 위한 건가?

우리는 벌써 30분째 대화가 없었다. 마스는 내킬 때만 떠드는 녀석이지만 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옥상 도착.

“와, 옛날식이다.”

다행히 사물함은 실내에 있었다. 낡은 철제 사물함들이 옥상으로 통하는 문안에 배치되어 있었다. 마스가 손으로 이름표를 훑어 자기 사물함을 열었다. 들여다보니, 테니스공이나 페인트 붓, 반짝이 의상같이 알 수 없는 잡동사니들로 가득했다.

“단편 영화 찍을 때 받은 소품들인데 감독들이랑 연락 끊겨서 반납 못 한 거예요.”

“…….”

“종종 그래요. 자기가 만든 거 창피하면 도망가는 감독들이 있죠.”

그래……? 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내 짐을 안에다가 넣었다.

“나도 너 나온 영화 볼 수 있어?”

“저한테 없어요. 감독이 편집하다 도망가서…….”

“아니, 도망을 왜 가……. 너무하네.”

“왜요, 제 연기 궁금해요?”

마스와 나는 옥상으로 나갔다. 겨울의 새하얀 하늘이 펼쳐졌다. 언덕 위로 올라온 덕분에 풍경은 멋있었다. 정문까지 내려가는 길이 다 보였다. 지금은 나무들이 앙상하지만 봄과 가을에는 색색의 장관이 펼쳐질 것 같았다.

“궁금하긴 한데……. 나중에 볼 거니까.”

마스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내가 담배 피울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나 보지? 난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물끄러미 마스를 봤다. 파악할 수가 없는 녀석이다. 제멋대로 행동하다가도 배려를 보이고, 옆에 누가 있든 상관 안 하다가도 상대에게 충실하고. 지금은 이렇게 진지한 눈을 하고 있고.

“형은 연기 왜 시작했어요?”

갑자기 진지한 질문을 한다.

난 기지개를 켜면서 연기과 교수들한테 했던 지리멸렬한 대답들이 떠올랐다. 그건 지워 버리고, 솔직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난 감정 표현이 서툴렀어. 지금도 그렇잖아. 사람들이랑 대화하는 것보다는 혼자 책 읽고 생각하는 걸 더 좋아했거든.”

“그래서 국문학과 갔구나.”

“응. 감성보다는 이성이 더 큰 문과생이었지.”

“나랑 반대네. 난 이성이 없는데.”

마스는 기다란 몸을 옥상 난간에 기대고서 날 비스듬히 올려 보았다. 그는 이 각도가, 자기가 잘생겨 보이는 각도라는 걸 안다. 그를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다 교회 수련회에서 처음으로 연기를 하게 됐는데, 역할도 대단한 게 아니었어.”

“해설자 했죠?”

“어떻게 알았어?”

“기억력 좋잖아요. 보통 그럼 해설자 해요.”

그렇게 말하니까 연극 박사 같다. 난 매번 연극에서 대사가 가장 많은 역을 맡았다는 걸 상기했다.

“아무튼 무대에 섰는데 대사를 할 때마다 속이 시원한 거야.”

“아아.”

“한 글자씩 입에서 나갈 때마다 가슴속에 응어리라고 해야 하나. 그걸 다 뱉어 내는 것 같았어.”

말을 하다 쑥스럽게 마스를 봤다.

“좀 과하지? 너도 다 겪어 봤을 텐데.”

“모든 경험은 각자의 것이죠. 그래서요?”

“응, 그래서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국문학회에서 연극패 했는데 좋았고, 이게 내가 해 본 것 중에 제일 재밌는 일이어서 계속해 보려고.”

“흐음, 형은 열정이 있구나.”

난 마스가 교수 혹은 박사처럼 구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나도 난간에 등 돌려 기댄 다음 물었다.

“넌 연기 왜 해?”

마스는 곤란한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눈을 조금 찡그렸다.

“잘하니까요.”

하하, 곤란할 만하네.

뻐기는 게 아니었다. 마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지간한 중견 배우도 스스로 연기 잘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마스는 이런 엄청난 자신감을 가질 정도로 주변에서 칭찬과 환호를 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현 선배가 아무한테나 연기 칭찬하는 사람이 아닌데…….”

“…….”

“네가 그렇게 연기 잘해?”

마스의 무심한 시선에 입을 다물게 됐다. 순수한 호기심이었는데 시비조로 들렸을까? 내 질문이 이상하긴 하다. 지가 연기 잘한다고 생각한다는데 그걸 어떻게 증명할 거야?

“보여 드릴까요?”

마스는 예상치 못한 대답을 했다.

“여기서……?”

뻘쭘하기 그지없었다. 연기과의 겨울 방학이라 5층을 올라오면서 행인 하나 못 만나긴 했지만 그래도 옥상 아래로 고개를 뻗어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뭐 어때요? 여기가 무대. 형이 관객.”

난 멍석 깔아 줘도 연기하기 전엔 늘 쑥스럽던데, 얘는 그런 것도 없나 보다. 옥상 바닥을 한 번, 날 한 번 가리킨 마스가 피식, 짧게 웃고 웃음을 감췄다. 그리고 날 바라봤다.

눈동자는 날 향했지만 그는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무표정 안에서 여러 가지 감정을 재는 듯하더니 이윽고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감정을 쭉 밀어 올리는 것이었다.

“안젤리나.”

마스가 환희에 찬 얼굴을 했다.

“평생 당신 손에 입 맞추고 싶었습니다.”

그는 내 배역도 정해 버렸다. 난 안젤리나가 되어 손을 내주었다. 마스가 감사를 표하더니 내 손에 입을 맞추었다. 손톱 끝에 보드라운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사나운 이빨을 가진 바다! 그것이 제 배를 할퀴고 선원들을 삼킬 때도 전 안젤리나! 당신만을 떠올리며 견뎠습니다. 나의 여신. 자비의 빛으로 날 구원하소서.”

마스가 내 손을 양손으로 붙들고 기도하듯이 이마를 댔다. 난 얼굴이 후끈거려 어쩔 줄을 모르겠다. 연기하는 마스는 태연했다. 안젤리나라는 여자한테 사랑을 고백하는 것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오늘이 제 최고의 날입니다. 죽어 땅에 묻혀도 당신 향기를 잊을 수 없을 겁니다. 하나 욕심 많은 전 하나를 더 바라게 되는군요.”

이게 마스의 연기라는 말이지…….

연기를 평가할 새도 없이 마스가 쉴 새 없이 동작을 전환하며 정신을 빼 갔다. 그는 순식간에 내게서 멀어져서 옥상을 한 바퀴 걷고 돌아오더니 난데없이 내 허리를 감싸 쥐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몰라.”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 대답이 마스에게 영향을 끼쳤나 보다. 그는 가까워진 내 눈동자를 집어삼킬 것처럼 진하게 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배역에 몰입하는 배우의 눈을 본 적이 없다. 사랑 고백을 들은 안젤리나도 아니면서 마음이 간지러웠다.

마스의 가슴이 들썩였다. 안젤리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요동치는 걸까?

호흡이 점진적으로 빨라졌다. 하나, 하나 둘, 하나 둘 셋, 속도를 다르게 숨을 빨아들이던 끝에.

마스가 내게 키스했다.

“…….”

마스의 입술은 촘촘히 내 것을 막았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부동의 키스.

이것은 연극적인 키스다. ‘남주가 여주에게 키스한다’라는 지문을 표현하기 위해 배우들이 서로에게 실례가 되지 않으면서도 관객의 몰입을 깨지 않는 수준의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입술은 젖지 않았고 혀도 들락이지 않았지만 부드러운 입술은 틀림없이 내게 엉겨 붙었다.

미친…….

“야!”

있는 힘껏 밀쳤다. 마스는 순순히 떨어져 나가서 양손을 들고 말했다.

“끝.”

연기가 끝났다는 소리다. 난 마스를 노려봤다.

“저 잘하죠?”

확정적인 어조.

마스는 여유로웠다. 광적인 사랑의 배역을 벗고 평범한 연기과 대학생으로 돌아왔다.

여유를 잃은 건 나였다.

난 아직도 가슴이 들썩였다. 감미로운 사랑의 말에 사로잡혀 입술을 도둑질당한 안젤리나가 됐다. 먼저 뜨거운 말을 해 놓고서 입을 싹 씻은 사내를 노려보고 있다. 나도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 모르겠다. 마스의 연기 스킬을 정량적으로 파악할 틈은 없었지만 난 틀림없이 휘말렸고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난 마스의 셔츠 깃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이번에는 연극 무대에서 하는 눈속임이 아니었다. 그의 아랫입술을 물고 축축하게 만들었다. 입술이 여러 번 교차하도록 묵묵한 그의 입술 사이를 열고 혀를 얽었다. 헛소리를 잘도 내뱉은 윗니를 핥아 먹고서 얌전해진 그의 혀를 뭉근히 건드렸다. 이때 이미 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마스는 어느 순간 고개를 숙이고서 내 머리를 손으로 받쳤다. 그리고 연신 그를 자극했던 날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예고되지 않은 입맞춤이었지만 이 한겨울에 뇌를 녹일 정도로 뜨거웠다.

그리고 모든 것이 진정된 후에 난 이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고, 허공에 대고서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



도망치듯 마스와 헤어졌다.

창피한 말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야, 다시는 이러지 마.

내 앞에서 연기하지 마.

손에 뽀뽀도 하지 마.

그런 느끼한 눈으로 쳐다보지 말고, 나 건드리지도 말고.

아니,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마스 멱살 잡고 키스한 건 나면서 그런 헛소리를 마구 소리치며 계단을 뛰어 내려가다가 발목까지 삐끗했다.

자취방에 누워 천장을 보면서도 내내 그 키스에 대해 생각했다.

그건 뭐였을까? 게이도 아니고, 연애 감정도 없는데 상대 멱살 잡고서 혀를 집어넣고 싶은 그 마음은 뭐였을까?

내가 헤픈 건가? 아니다. 지난 두 번의 연애 경험에서 난 이렇게 쉽게 키스하지 않았다. 손잡고, 좋아한다고 많이 말한 다음에 한 달은 지나서 했다. 사랑과 설렘을 담아 수줍게 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난데없고 더럽다고까지 할 수 있는 키스를 한 것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가슴에 손을 얹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양심대로 말하자면 이건 분노가 아니다. 냉골 같은 자취방에서도 얼굴의 열기는 식지 않았고, 난 한참 전에 사라졌어야 할 입술의 감촉을 아직도 쥐고 있다.

세 번 만난 또라이는 내 입술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키스는 뭐였을까.

그렇게 자취방에 어둠이 찾아왔을 때 난 정신 승리를 했다.

그래, 이건 내가 배우가 될 사람이라 그런 거야. 옥상에서 우리는 마스와 한지롱이 아니었어. 어느 프랑스 항구에서 재회한 연인이었던 거야. 배역에 심취해서 현실과 구분이 안 됐던 거지. 이게 바로 몰입이야. 그러니 이제 그만 날 용서하자.

그런데도 꿈에서는 마스가 나왔다. 용서할 수 없게도, 꿈에서 키스를 한 번 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