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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위에서 만나, 형 3화
“확실히 말하는데 나 게이 아니야.”
난 진지한 말을 하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다.
“물론 존중해. 모든 인류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음…….”
“너도 좋은 사람 만나. 행운을 빌게.”
“으음…….”
“하지만 난 아니라고.”
내가 웅변을 하는 자세로 차근차근, 손짓까지 하며 말을 하자 마스는 웃음을 터뜨릴 것처럼 볼을 부풀렸다가 삼키고 말했다.
“그래? 형은 나 안 괜찮아?”
물론 무지 괜찮다. 내게 조금이라도 그런 취향이 있었으면 홀랑 넘어갔을 거다.
내 눈빛이 흔들렸는지, 휘어진 마스의 눈에 자신감이 들어찼다. 그는 턱을 괴고서 날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삭막한 한겨울인데도 창밖으로 들어오는 빛이 마스한테만 빨려 들어갔다. 그래, 그는 빛이 있으면 모조리 끌어다 쓰는 부류다. 즉, 지가 잘생긴 거 알고 여기저기 눈웃음을 뿌리며 순진한 사람 홀리는 것이었다.
그건 실효가 있다. 이봐라, 난 분명 아무 마음 없는데도 마스가 눈을 휠 때마다 심장이 콩닥거린다.
“얼굴 믿고 막 들이대지 마시고요.”
계속 이 야리꾸리한 마법에 당하느니 차라리 눈을 피하기로 했다. 그러자 마스가 하하하, 하고 청량하게 웃었다.
“그렇다고 사귀자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 말은 뉘앙스가 이상했다.
그리고 난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마스!”
쾅!
누군가 외창을 두드렸다. 화들짝 놀란 건 나뿐이었다. 활달하게 생긴 남자가 창문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난이야.”
마스는 그 남자를 난이라고 불렀다. 외창에서부터 마구 뛰어 카페 입간판을 넘어뜨리고 안으로 입성하는 이 남자는 연기과인 게 분명했다. 그는 우리 테이블에 서자마자 마스를 일으켜 세우고서 그의 양볼에 뽀뽀했다.
두 남자가 쪽쪽거리는 소리가 참으로 민망했다.
“아, 난이야. 내가 너한테 뽀뽀하고 있지만 사귀자는 건 아냐. 잘 알아 둬.”
난이는 마스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 같다. 알아들은 건 나다. 난 민망함에 달아오른 눈을 손으로 덮고서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연기과 애들은 다 이렇다는 거네.
내년 3월이 걱정된다.
***
종강 주간이다.
국문학과를 떠난다는 헛헛함과 함께 건물 복도를 걸었다. 2년 동안 열과 성을 다해 공부했던 터전을 떠나려니 시원섭섭했다. 정들었던 교실들을 한번씩 들여다보게 되었다.
기말고사가 끝난 과목들은 일찌감치 수업 마무리를 했고, 시험이 아니라 과제로 기말 대체를 한 과목들은 마지막 수업을 진행했다. 이번 <지구의 역사> 과목이 후자의 수업이었다. 난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카페에 들러서 따뜻한 커피를 한 잔 샀다. 그리고 일찌감치 교실로 들어가서 미리 써 놓은 편지와 함께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이 수업은 교양 과목이지만 난 교수님을 존경했다. 그 마음이 담기길 바라며 편지를 손으로 꾹 누르고서 자리로 돌아갔다.
“…….”
자리에는 반갑지 않은 얼굴이 있었다.
“안녕.”
마스.
녀석은 어찌 된 일인지 내 옆자리에 앉아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너 왜 여기 있어?”
“국문학과 왔다가 형이 이 교실에 있어서 따라 들어왔는데요?”
“국문학과는 왜 이렇게 자주 오냐?”
“형이 국문학과니까요.”
또 시작이다. 일주일 만에 만나자마자 쉴 새 없이 플러팅 중이시다. 난 이성적인 사람이니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마스의 눈웃음만 잘 피하면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형, 근데 저 교수님 좋아해요?”
앉다가 삐끗했다.
“야.”
“커피랑 편지 줬죠? 왜 그런 거예요? 고백?”
“사람이 말이야. 존경의 마음이란 게 있는 거야. 뭐가 다 좋아하고 고백……. 여기가 동물의 왕국인 줄 알아?”
그러자 마스가 책상에 엎어져서 마구 웃었다. 그렇게 격하게 웃긴 얘긴가? 강의실로 들어오는 학생들까지 쳐다보는 지경이 되자 난 애써 그와 내가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형, 연기과 오면 기절하겠네요.”
마스가 눈물까지 흘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뭔 소리야.
“오늘은 왜 존댓말 하냐?”
“전 제 맘대로 말하는데요.”
잡담이 길어지기 직전에 교수님이 들어왔다. 교수님은 내 커피와 편지를 발견하고서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고맙다고 했다. 편지는 곧바로 펼쳐서 읽고 씨익 웃으셨다. 됐다! 익명의 선물 전달자로서 너무나 뿌듯하다.
흐으음, 하는 의심스러운 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마스가 아직 옆자리에 있었다. 너 안 가? 내가 입 모양으로 물었더니 녀석은 본격적으로 학생 수첩까지 펼쳤다. 필통은 안 갖고 다니는지 내 필통에서 펜 하나를 빼 들었다. 어휴, 맘대로 해라. 난 녀석에게 신경을 끄고서 수업에 집중했다.
10분 후 마스는 잠들었다. 아무리 배우라지만 교양 공부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혀를 쯧쯧 차게 된다.
***
“오늘은 마지막 수업 시간입니다.”
수업이 끝나기 직전에 교수님이 말했다. 학생들은 공책과 펜을 가방에 챙기다 말고 교수님을 쳐다봤다.
“한 학생이 제게 편지를 썼는데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준비를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내 얘기였다. 난 수업에서 느낀 감상과 함께 연기과에서 새롭게 시작될 내 미래에 대해 설렘과 걱정을 담아 편지에 적었다.
“새 출발은 하는 건 이 학생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죠. 이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올 테고, 우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한 발 내딛겠죠.”
교수님이 지구본을 한 바퀴 돌리면서 계절의 변화를 설명하자 학생들 사이에 한차례 웃음이 일었다.
“즐거운 일만 있지는 않을 거예요. 막막하거나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겠죠. 그럴 때는 전 여러분이 이 수업을 떠올리면 좋겠어요. 다들 배웠죠? 우주는 너무 넓어서 우리는 티끌만도 못한 존재라고요.”
교수님이 학생들의 눈을 하나씩 훑었다. 반짝반짝, 가르침을 받고자 집중할 때 모두의 눈이 별처럼 빛났다. 그중엔 나도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교수님이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너무 크고 난 너무 작아서 스스로가 보잘것없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우주의 구성원이에요. 우주는 수많은 티끌로 이루어져 있어요. 각자의 위치에서 즐겁게 살아 보세요. 그럼 그 거대했던 우주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을 거예요.”
감동적이다. 연기를 배우면서 많이 좌절하겠지만 그때마다 내가 우주를 구성하는 입자라고 생각한다면 최소한 내 가치를 인정할 수는 있겠다. 마지막까지 너무 좋은 강의였다.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때, 마스는 깨어 있었다.
“형이 저 교수님, 좋아하는 것 같은데.”
“…….”
“형은 지적인 남자한테 끌리나 보다. 아니면 나이 많은 사람?”
마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대충 가방에 필기구를 퍽퍽 넣고서 일어났다.
“불경한 소리할 거면 그만 가라.”
“헛소리였어요. 난 지적일 수는 있지만 형보다 나이가 많아질 수는 없거든요.”
또, 또 수작질. 어이가 없어서 녀석을 봤다가 나른히 책상에 기대고서 쳐다보는 그 눈길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황급히 자리를 떴다.
“밥 먹고 가요.”
꽤 빠른 속도로 복도를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스는 긴 다리로 금방 따라왔다.
“언제까지 따라올 거니?”
“배고파요”
“난 안 고픈데. 너 수업 없어?”
마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기말 실습을 끝냈다니 웬만한 수업은 종강했을 거다. 연기과는 일반학과와 마주칠 일이 없다. 전공 수업이 대부분이라서 교양 학점을 채우지 않아도 되고, 커리큘럼이 빡세서 복전이나 부전을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스에겐 지금이 이미 겨울 방학이다. 한가해서 좋겠다.
“저 때문에 배 안 고픈 척할 필요는 없는데요.”
“진짠데.”
“담배는 피울 거죠?”
난 인상을 잔뜩 썼다. 담배까지 참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마스가 내 눈썹 사이를 엄지로 꾹 누르기에 팍, 치우고서 담배 나무로 향했다.
이 녀석은 뭘까.
클래식한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자 마스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담배도 안 피우면서 웬 라이터?”
“어제 샀지롱.”
또 인상을 쓰게 된다. ‘지롱’으로 말을 끝내는 장난은 초등학교 때도 유치해서 안 했다. 유치한 이 녀석이 라이터를 사서 들고 다니는 이유도 명백하다. 내 앞에 나타나기 위해서였겠지.
이해가 안 된다. 마스는 내게 뭘 원하는 걸까? 난 친구 하기 좋은 성격도 아니고, 게이도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는데. 이렇게 공을 들여 쫓아다니면서까지 내게 얻어먹을 것이 있다는 말인가?
마스는 몸에 나쁜 담배 연기를 마시면서 싱글벙글 웃었다.
그렇지, 모든 행동에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 <지구의 역사> 교수님이 말씀하시길, 존재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마스가 따라다니는 것도 그냥 관성일 수도 있어. 우주를 공전하는 화성이라도 된 모양이지. 아무 생각 없이 궤도를 돌고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난 쓰레기통에 담배를 비벼 끄고서 앞서 걸었다.
“나 과방 갈 거야.”
“저도요.”
어휴.
***
“지롱아.”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과방에는 지현 선배가 책을 읽고 있었다. 나도 반갑게 인사를 꾸벅했다.
“짐 챙기러 왔어요.”
“그래? 얼른 챙겨 가, 나 울기 전에.”
“아, 왜 그러세요. 선배…….”
과방은 국문학회의 본거지였다. 학회라는 이름과는 달리 연극패에 가까운 우리는 학교 극장에서 정기 공연을 했고 길거리에서 게릴라 공연을 했다. 연기에 대한 호기심만 있던 내게 무대의 기본부터 차근차근 알려 준 지현 선배는 내가 특히나 존경하는 사람이다.
연기과로 전과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제일 아쉬웠던 것이 바로 이 과방을 떠나는 것이었다. 세상 어디서 연기를 해도 학회 시절의 뜨거움을 다시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3년간 쌓아 둔 짐을 챙기면서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현 선배도 그렇겠지…….
“마스! 맞죠?”
……지현 선배는 내가 아니라 마스를 보고 있었다.
“이번 연극 봤어요. 프랑스 남자 연기하셨죠!”
“보셨군요.”
마스는 씨익 웃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 본 듯 여유가 있었다. 지현 선배가 그 손을 외면하면 좋을 텐데, 선배는 오히려 마스의 손을 양손으로 쥐고서 감격 어린 표정을 지었다.
“봤죠! 너무 잘 봤죠.”
“1학년 실습이라 챙겨 보기 어려우셨을 텐데.”
“작품은 그냥 그랬어요. 그런데 1회차 본 친구들이 남주 연기가 너무 좋다고 해서 2회차 갔거든요? 저 울었잖아요.”
“괜찮았습니까?”
마스는 너무도 태연하게 자기 연기 칭찬을 받아들였다. 지현 선배가 이 정도 칭찬하는 거면 진짜 장난 아닌 건데, 마스가 일상적인 듯 접수하는 걸 보니 기가 막혔다. 게다가, 1학년 실습 공연이 배우 연기로 소문이 난다고? 그게 가능한가? 내가 어리벙벙하는 와중에 지현 선배가 돌아봤다.
“그렇구나! 네가 연기과 가면 마스 배우님이랑 같이 연기하는 거구나.”
배우님?
“멋있다, 지롱아.”
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네, 네, 하고 대답했다. 뻐기듯 턱을 치올리는 마스 ‘배우님’을 보자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때는 난 아직 몰랐다. 내 앞에선 뺀질대는 마스가, 이 학교에서 내로라하는 천재 배우라는 것을 말이다.
과방을 떠나기 전에 지현 선배와 포옹했다.
“지롱아. 유명해져도 나 잊으면 안 돼.”
“잊긴요. 여기가 제 뿌리인데요.”
껴안으니 눈물 날 것 같다. 마스가 뒤에 버티고 서 있으니 쪽팔린 눈물은 거둬 두었다. 지현 선배도 눈이 촉촉했다. 아들 먼 길 떠나보내는 엄마처럼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쓸어넘겼다.
“넌 마음이 따뜻한 애니까 좋은 배우가 될 거야. 응원할게.”
그 말에는 가까스로 눈물을 참았다. 포옹을 마치고 내 짐이 실린 박스를 옮기는데, 제일 위에 내가 처음 연기한 대본집이 있어서 울컥했다. 뒷모습으로 꾸벅 인사하고서 과방을 나왔다.
“확실히 말하는데 나 게이 아니야.”
난 진지한 말을 하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다.
“물론 존중해. 모든 인류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음…….”
“너도 좋은 사람 만나. 행운을 빌게.”
“으음…….”
“하지만 난 아니라고.”
내가 웅변을 하는 자세로 차근차근, 손짓까지 하며 말을 하자 마스는 웃음을 터뜨릴 것처럼 볼을 부풀렸다가 삼키고 말했다.
“그래? 형은 나 안 괜찮아?”
물론 무지 괜찮다. 내게 조금이라도 그런 취향이 있었으면 홀랑 넘어갔을 거다.
내 눈빛이 흔들렸는지, 휘어진 마스의 눈에 자신감이 들어찼다. 그는 턱을 괴고서 날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삭막한 한겨울인데도 창밖으로 들어오는 빛이 마스한테만 빨려 들어갔다. 그래, 그는 빛이 있으면 모조리 끌어다 쓰는 부류다. 즉, 지가 잘생긴 거 알고 여기저기 눈웃음을 뿌리며 순진한 사람 홀리는 것이었다.
그건 실효가 있다. 이봐라, 난 분명 아무 마음 없는데도 마스가 눈을 휠 때마다 심장이 콩닥거린다.
“얼굴 믿고 막 들이대지 마시고요.”
계속 이 야리꾸리한 마법에 당하느니 차라리 눈을 피하기로 했다. 그러자 마스가 하하하, 하고 청량하게 웃었다.
“그렇다고 사귀자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 말은 뉘앙스가 이상했다.
그리고 난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마스!”
쾅!
누군가 외창을 두드렸다. 화들짝 놀란 건 나뿐이었다. 활달하게 생긴 남자가 창문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난이야.”
마스는 그 남자를 난이라고 불렀다. 외창에서부터 마구 뛰어 카페 입간판을 넘어뜨리고 안으로 입성하는 이 남자는 연기과인 게 분명했다. 그는 우리 테이블에 서자마자 마스를 일으켜 세우고서 그의 양볼에 뽀뽀했다.
두 남자가 쪽쪽거리는 소리가 참으로 민망했다.
“아, 난이야. 내가 너한테 뽀뽀하고 있지만 사귀자는 건 아냐. 잘 알아 둬.”
난이는 마스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 같다. 알아들은 건 나다. 난 민망함에 달아오른 눈을 손으로 덮고서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연기과 애들은 다 이렇다는 거네.
내년 3월이 걱정된다.
***
종강 주간이다.
국문학과를 떠난다는 헛헛함과 함께 건물 복도를 걸었다. 2년 동안 열과 성을 다해 공부했던 터전을 떠나려니 시원섭섭했다. 정들었던 교실들을 한번씩 들여다보게 되었다.
기말고사가 끝난 과목들은 일찌감치 수업 마무리를 했고, 시험이 아니라 과제로 기말 대체를 한 과목들은 마지막 수업을 진행했다. 이번 <지구의 역사> 과목이 후자의 수업이었다. 난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카페에 들러서 따뜻한 커피를 한 잔 샀다. 그리고 일찌감치 교실로 들어가서 미리 써 놓은 편지와 함께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이 수업은 교양 과목이지만 난 교수님을 존경했다. 그 마음이 담기길 바라며 편지를 손으로 꾹 누르고서 자리로 돌아갔다.
“…….”
자리에는 반갑지 않은 얼굴이 있었다.
“안녕.”
마스.
녀석은 어찌 된 일인지 내 옆자리에 앉아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너 왜 여기 있어?”
“국문학과 왔다가 형이 이 교실에 있어서 따라 들어왔는데요?”
“국문학과는 왜 이렇게 자주 오냐?”
“형이 국문학과니까요.”
또 시작이다. 일주일 만에 만나자마자 쉴 새 없이 플러팅 중이시다. 난 이성적인 사람이니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마스의 눈웃음만 잘 피하면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형, 근데 저 교수님 좋아해요?”
앉다가 삐끗했다.
“야.”
“커피랑 편지 줬죠? 왜 그런 거예요? 고백?”
“사람이 말이야. 존경의 마음이란 게 있는 거야. 뭐가 다 좋아하고 고백……. 여기가 동물의 왕국인 줄 알아?”
그러자 마스가 책상에 엎어져서 마구 웃었다. 그렇게 격하게 웃긴 얘긴가? 강의실로 들어오는 학생들까지 쳐다보는 지경이 되자 난 애써 그와 내가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형, 연기과 오면 기절하겠네요.”
마스가 눈물까지 흘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뭔 소리야.
“오늘은 왜 존댓말 하냐?”
“전 제 맘대로 말하는데요.”
잡담이 길어지기 직전에 교수님이 들어왔다. 교수님은 내 커피와 편지를 발견하고서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고맙다고 했다. 편지는 곧바로 펼쳐서 읽고 씨익 웃으셨다. 됐다! 익명의 선물 전달자로서 너무나 뿌듯하다.
흐으음, 하는 의심스러운 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마스가 아직 옆자리에 있었다. 너 안 가? 내가 입 모양으로 물었더니 녀석은 본격적으로 학생 수첩까지 펼쳤다. 필통은 안 갖고 다니는지 내 필통에서 펜 하나를 빼 들었다. 어휴, 맘대로 해라. 난 녀석에게 신경을 끄고서 수업에 집중했다.
10분 후 마스는 잠들었다. 아무리 배우라지만 교양 공부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혀를 쯧쯧 차게 된다.
***
“오늘은 마지막 수업 시간입니다.”
수업이 끝나기 직전에 교수님이 말했다. 학생들은 공책과 펜을 가방에 챙기다 말고 교수님을 쳐다봤다.
“한 학생이 제게 편지를 썼는데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준비를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내 얘기였다. 난 수업에서 느낀 감상과 함께 연기과에서 새롭게 시작될 내 미래에 대해 설렘과 걱정을 담아 편지에 적었다.
“새 출발은 하는 건 이 학생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죠. 이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올 테고, 우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한 발 내딛겠죠.”
교수님이 지구본을 한 바퀴 돌리면서 계절의 변화를 설명하자 학생들 사이에 한차례 웃음이 일었다.
“즐거운 일만 있지는 않을 거예요. 막막하거나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겠죠. 그럴 때는 전 여러분이 이 수업을 떠올리면 좋겠어요. 다들 배웠죠? 우주는 너무 넓어서 우리는 티끌만도 못한 존재라고요.”
교수님이 학생들의 눈을 하나씩 훑었다. 반짝반짝, 가르침을 받고자 집중할 때 모두의 눈이 별처럼 빛났다. 그중엔 나도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교수님이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너무 크고 난 너무 작아서 스스로가 보잘것없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우주의 구성원이에요. 우주는 수많은 티끌로 이루어져 있어요. 각자의 위치에서 즐겁게 살아 보세요. 그럼 그 거대했던 우주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을 거예요.”
감동적이다. 연기를 배우면서 많이 좌절하겠지만 그때마다 내가 우주를 구성하는 입자라고 생각한다면 최소한 내 가치를 인정할 수는 있겠다. 마지막까지 너무 좋은 강의였다.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때, 마스는 깨어 있었다.
“형이 저 교수님, 좋아하는 것 같은데.”
“…….”
“형은 지적인 남자한테 끌리나 보다. 아니면 나이 많은 사람?”
마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대충 가방에 필기구를 퍽퍽 넣고서 일어났다.
“불경한 소리할 거면 그만 가라.”
“헛소리였어요. 난 지적일 수는 있지만 형보다 나이가 많아질 수는 없거든요.”
또, 또 수작질. 어이가 없어서 녀석을 봤다가 나른히 책상에 기대고서 쳐다보는 그 눈길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황급히 자리를 떴다.
“밥 먹고 가요.”
꽤 빠른 속도로 복도를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스는 긴 다리로 금방 따라왔다.
“언제까지 따라올 거니?”
“배고파요”
“난 안 고픈데. 너 수업 없어?”
마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기말 실습을 끝냈다니 웬만한 수업은 종강했을 거다. 연기과는 일반학과와 마주칠 일이 없다. 전공 수업이 대부분이라서 교양 학점을 채우지 않아도 되고, 커리큘럼이 빡세서 복전이나 부전을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스에겐 지금이 이미 겨울 방학이다. 한가해서 좋겠다.
“저 때문에 배 안 고픈 척할 필요는 없는데요.”
“진짠데.”
“담배는 피울 거죠?”
난 인상을 잔뜩 썼다. 담배까지 참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마스가 내 눈썹 사이를 엄지로 꾹 누르기에 팍, 치우고서 담배 나무로 향했다.
이 녀석은 뭘까.
클래식한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자 마스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담배도 안 피우면서 웬 라이터?”
“어제 샀지롱.”
또 인상을 쓰게 된다. ‘지롱’으로 말을 끝내는 장난은 초등학교 때도 유치해서 안 했다. 유치한 이 녀석이 라이터를 사서 들고 다니는 이유도 명백하다. 내 앞에 나타나기 위해서였겠지.
이해가 안 된다. 마스는 내게 뭘 원하는 걸까? 난 친구 하기 좋은 성격도 아니고, 게이도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는데. 이렇게 공을 들여 쫓아다니면서까지 내게 얻어먹을 것이 있다는 말인가?
마스는 몸에 나쁜 담배 연기를 마시면서 싱글벙글 웃었다.
그렇지, 모든 행동에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 <지구의 역사> 교수님이 말씀하시길, 존재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마스가 따라다니는 것도 그냥 관성일 수도 있어. 우주를 공전하는 화성이라도 된 모양이지. 아무 생각 없이 궤도를 돌고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난 쓰레기통에 담배를 비벼 끄고서 앞서 걸었다.
“나 과방 갈 거야.”
“저도요.”
어휴.
***
“지롱아.”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과방에는 지현 선배가 책을 읽고 있었다. 나도 반갑게 인사를 꾸벅했다.
“짐 챙기러 왔어요.”
“그래? 얼른 챙겨 가, 나 울기 전에.”
“아, 왜 그러세요. 선배…….”
과방은 국문학회의 본거지였다. 학회라는 이름과는 달리 연극패에 가까운 우리는 학교 극장에서 정기 공연을 했고 길거리에서 게릴라 공연을 했다. 연기에 대한 호기심만 있던 내게 무대의 기본부터 차근차근 알려 준 지현 선배는 내가 특히나 존경하는 사람이다.
연기과로 전과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제일 아쉬웠던 것이 바로 이 과방을 떠나는 것이었다. 세상 어디서 연기를 해도 학회 시절의 뜨거움을 다시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3년간 쌓아 둔 짐을 챙기면서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현 선배도 그렇겠지…….
“마스! 맞죠?”
……지현 선배는 내가 아니라 마스를 보고 있었다.
“이번 연극 봤어요. 프랑스 남자 연기하셨죠!”
“보셨군요.”
마스는 씨익 웃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 본 듯 여유가 있었다. 지현 선배가 그 손을 외면하면 좋을 텐데, 선배는 오히려 마스의 손을 양손으로 쥐고서 감격 어린 표정을 지었다.
“봤죠! 너무 잘 봤죠.”
“1학년 실습이라 챙겨 보기 어려우셨을 텐데.”
“작품은 그냥 그랬어요. 그런데 1회차 본 친구들이 남주 연기가 너무 좋다고 해서 2회차 갔거든요? 저 울었잖아요.”
“괜찮았습니까?”
마스는 너무도 태연하게 자기 연기 칭찬을 받아들였다. 지현 선배가 이 정도 칭찬하는 거면 진짜 장난 아닌 건데, 마스가 일상적인 듯 접수하는 걸 보니 기가 막혔다. 게다가, 1학년 실습 공연이 배우 연기로 소문이 난다고? 그게 가능한가? 내가 어리벙벙하는 와중에 지현 선배가 돌아봤다.
“그렇구나! 네가 연기과 가면 마스 배우님이랑 같이 연기하는 거구나.”
배우님?
“멋있다, 지롱아.”
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네, 네, 하고 대답했다. 뻐기듯 턱을 치올리는 마스 ‘배우님’을 보자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때는 난 아직 몰랐다. 내 앞에선 뺀질대는 마스가, 이 학교에서 내로라하는 천재 배우라는 것을 말이다.
과방을 떠나기 전에 지현 선배와 포옹했다.
“지롱아. 유명해져도 나 잊으면 안 돼.”
“잊긴요. 여기가 제 뿌리인데요.”
껴안으니 눈물 날 것 같다. 마스가 뒤에 버티고 서 있으니 쪽팔린 눈물은 거둬 두었다. 지현 선배도 눈이 촉촉했다. 아들 먼 길 떠나보내는 엄마처럼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쓸어넘겼다.
“넌 마음이 따뜻한 애니까 좋은 배우가 될 거야. 응원할게.”
그 말에는 가까스로 눈물을 참았다. 포옹을 마치고 내 짐이 실린 박스를 옮기는데, 제일 위에 내가 처음 연기한 대본집이 있어서 울컥했다. 뒷모습으로 꾸벅 인사하고서 과방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