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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위에서 만나, 형 2화
“선배님?”
연기과 전과 시험에서 만난 선배였다. 오늘은 뿔테안경을 끼지 않았다. 하얗고 작은 얼굴을 다 드러내고 날 향해 활짝 웃었다.
난 방금 전 내 목을 껴안았다 멀어진 게 그라는 걸 깨달았다. 마주 웃으려다가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진짜 무례한 사람이잖아?
“기린 연기 어떻게 했어요?”
그는 인사말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난 애써 지우려 했던 그 기억이 떠올라 대번에 눈썹 사이가 구겨졌다.
“덕분에 많이 당황하진 않았습니다.”
“나도 했었는데! 연기과 전통이에요. 난 어떻게 했었는지 보여 줄까요?”
“아뇨.”
당황해서 빨리 말했다. 이 선배라면 시험 끝난 국문학도들이 쏟아져 나오는 이곳에서 갑자기 기린으로 변신할 수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세요? 국문학과에 볼일 있으세요?”
나는 손에 쥔 담배를 입에 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물었다.
선배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지가 내킬 때만 대화를 하는 스타일인가 보다. 주머니를 뒤져서 구겨진 담배 한 개비를 꺼내더니 내 손에 쥐인 라이터를 가져가서 불을 붙였다.
“있죠. 지롱 씨가 국문학과니까.”
그가 연기를 뿜는 걸 보면서 나도 라이터를 회수해 담배를 물었다.
저렇게 멋있는 척하면서 담배 피우는 사람 처음 본다. 긴 다리를 쭉 뻗은 그는 평범한 나무 벤치에 앉아 있으면서 표정은 거의 화보였다. 예쁜 손으로 필터를 잡고 시선을 내리깔고서 먼 곳을 향해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이런 담배구나.”
“네?”
“전 담배 안 피워서요.”
“아……. 다른 담배 피우신다는 거죠?”
“아뇨, 아예 안 피워요. 건강에 나쁘잖아요. 근데 지롱 씨는 취향이 클래식하네요.”
선배가 곧바로 담배를 흙바닥에 비벼서 꺼 버렸다. 딱 한 모금 피워 놓고……. 아니, 흡연자도 아니면서 아까운 남의 담배에 왜 손을 댄대? 좀 당황스러워서 나도 선배를 등지고 연기를 내뱉었다. 짙은 담배 향이 폐를 한 바퀴 돌아 나왔다.
“예, 전 재미없는 사람이라서요. 이 클래식한 담배만 3년째네요.”
“그렇군.”
“근데 저한테 볼일 있으세요?”
굳이 찾아와 만날 사이는 아니었다. 선배는 내 아스트랄한 전과 시험을 도와준 은인이지만 그것뿐이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이 스쳐 지나가는 캠퍼스에서 콕 집어 날 보러 국문학과 건물까지 오다니 뭔가 수상쩍다. 수상쩍을 일까진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어느새 말투에 날이 섰다. 내 담배에 손을 대는 사람에게 민감하기 때문이다.
내가 적대감을 보이자 선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좋은 소식 전하러 왔는데요?”
좋은 소식?
“한지롱 씨, 합격했어요. 전과 성공! 내년 3월부터 연기과예요!”
합격!
선배가 환하게 웃으면서 양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하이파이브 하자는 소리다. 방금 전까지 그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으로 대한 게 부끄럽다. 이 선배는 나와 평생 인연을 맺을 사람이다. 영원히 선후배의 정을 쌓아 나갈 사람!
감격에 젖어 선배의 손을 올려붙였다. 짝! 시원한 마찰음 뒤에 얼싸안기까지 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덕분입니다!”
선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 사람, 이상한 줄 알았는데 되게 괜찮잖아! 이 소식을 전하러 굳이 연락처도 없는 날 찾아서 여기까지 와 준 거야? 너무 고맙다. 난 이 마음을 듬뿍 담아서 충분히 포옹하고 떨어지려고 했다.
그런데 선배가 날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근데 저 선배 아닌데. 형.”
선배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1학년이에요.”
“네……?”
“전과 시험 날, 연기과 1학년들끼리 가위바위보 해서 당번 정했거든요. 그러니까 전 조교도 선배도 아니라는 거죠.”
“그럼……. 몇 살인 거예요?”
“형이랑 두 살 차이 나는 거죠.”
입이 쩍 벌어진다. 그럼 지금 눈앞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얘가 스무 살이라는 건가?
“합격 축하해요.”
게다가 그는 난데없이 가까워지더니 내 볼에 쪽, 하고 뽀뽀하는 것이었다. 쪽? 뽀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
“저기요.”
이름 모를 스무 살은 날 계속 쫓아왔다. 내가 이렇게 열받은 티 팍팍 내면서 빠르게 걸어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저기요, 지롱이 형.”
형이라니. 호칭까지 친근해졌다. 그와 나의 심적 거리감은 반비례하나 보다.
내가 싫어하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놀래키는 사람, 내 담배 건드는 사람, 예의 없이 구는 사람. 그는 위 세 가지에 모두 해당하며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 어깨를 톡톡 쳤다.
“축하주 사 줘요.”
또 발끈하게 만든다.
“제가요? 왜요? 저 낯선 사람이랑 술 안 마시는데요?”
개무시하던 내가 돌아봐 주니 스무 살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제가 낯설어요?”
“네. 조교도 아니고 선배도 아니었잖아요. 전부 다 거짓말이니 우린 서로 완전 모르는 사람이 된 거죠.”
“저 거짓말 안 했는데. 형이 착각한 거지.”
그 말도 맞다.
맞는 말을 들으니 말문이 막힌다. 연기과 복도에서 긴장한 와중에 마주친 사람이라 당연하게 상전으로 모셨다. 착각한 사람은 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숙이고 들어갈 이유는 없어서, 난 다시 그에게 등을 돌리고 걸었다.
“아무튼, 우리가 마주 보고 앉아서 술 먹을 사이는 아닌 것 같네요.”
“왜요?”
“우린 번호도 서로 모르고…….”
“여기, 제 핸드폰이요.”
“……그쪽 이름도 모르잖아요.”
그러자 스무 살이 내 손을 잡아챘다.
“제 이름, 궁금하죠?”
당연히 궁금해할 거라고 확신하는 저 자신만만한 미소. 그 순간 내가 어떤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난 손을 확 잡아 뺐다. 그가 하하, 웃었다.
“맥주 짠! 하면서 알려 드릴게요.”
“사람 이름 하나 알자고 그런 수고를…….”
그때 마침 경영관 건물로 향하는 카페 입간판이 보였다.
그래, 커피 정도는 뭐.
내가 카페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자 스무 살도 따라 들어왔다.
“뭐 마실래요?”
계산대에 서자마자 자연스럽게 카드를 꺼냈다. 알바생 뒤에 걸린 메뉴판에는 잡다한 음료와 가격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스무 살은 더 이상 맥주를 고집하지 않았다. 흐음, 하고 고심하더니 말했다.
“아메리카노요.”
“아메리카노 하나랑 그린티 라떼 주세요.”
평소엔 커피만 마시지만 오늘은 다른 걸 시켰다. 스무 살과 다른 걸 시켜 먹겠다는 유치한 마음에서였다.
창밖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바라보니 한숨이 나왔다. 사람과의 갈등을 꺼리는 내게 미움을 받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스무 살은 그걸 해냈다. 저렇게 잘생긴 얼굴로 서글서글 웃으면서 말이다.
계산대 앞에서 음료가 나오길 기다리는 스무 살을 보았다. 나이를 듣고 보니 진짜 어려 보였다. 고등학생에 비견될 정도의 동안. 첫인상이 적중했다. 좀 꼰대 같긴 하지만 국문학과 1학년들과 비교됐다. 걔들이 나한테 예의 차리는 거 생각하면, 이 스무 살은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짠.”
스무 살은 음료를 받고 자리에 앉자마자 이상한 효과음을 냈다. 짠? 맥주 짠?
“마스.”
그가 내게 그린티 라떼를 쥐여 주고서 기어이 자기 아메리카노를 내 음료에 부딪쳤다. 동시에, 난 그가 자기 이름을 말했다는 걸 알았다.
“마스 씨.”
“잘 마실게요.”
“성은 뭐예요?”
“성 없어요. 씨 자도 빼요. 그냥 마스라고 불러요.”
“닉네임이에요?”
마스라고 하니 크리스마스 같기도 하고, 화성의 영어말 같기도 하다. 연기과니까 배우 데뷔해서 쓸 예명을 미리 지어 놓은 건가? 나도 별 뜻 없이 물은 말이었지만 마스는 웃으면서 내 말을 씹었다. 그러라지.
마주 앉으니 할 말이 없었다. 이름만 말해 놓고 입을 다물어 버린 연기과 또라이야. 우리가 단둘이 시간 보낼 사이가 아니라니까. 난 그의 입을 열게 할 화제를 궁리해 보았지만 생각나는 건 무례한 질문밖에 없었다.
“근데 게이예요?”
볼 뽀뽀 당한 입장에서 충분히 물어볼 자격이 있는 질문이었다. 마스가 창밖으로 던졌던 시선을 내게 돌렸다. 난 여전히 닫혀 있는 입술을 쳐다보다 한 번 더 물었다.
“연기과에 게이 많아요?”
“편견 있어요?”
드디어 돌아온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대답이었다.
아니, 뭐…….
갑자기 민망해져서 그린티 라떼로 시선을 숨겼다. 빨대로 잔을 휘저을 때마다 커다란 얼음 사이로 음료가 찰랑댔다.
“그런 건 아니고.”
“아까 기분 나빴어요? 미안해요.”
또 정상적인 사과. 감을 못 잡겠다. 난 사과를 받는 둥 마는 둥 빨대를 쪽 빨았다.
“이런 거 핑계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 몰입형이거든요. 한번 배역 맡으면 거기서 빠져나오기 전까지 시간이 걸려요.”
“뭐……. 최근에 연기했어요?”
“이번 기말 실습에서 프랑스 남자를 연기했어요. 개방적이고 사랑이 많아서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꼬시는 역할.”
“아하…….”
“근데 그 역할이요. 무대에서 만나는 모든 배역한테 볼 뽀뽀를 해요. 눈만 마주치면 무조건. 그래서 연극 끝나고 나서도 고생이라니까요. 오해받기 딱 좋잖아요. 지롱이 형한테도 그렇고.”
음……. 할 말이 없다. 난 한 번 더 빨대를 빨아들였다. 세 번 빠니까 음료가 바닥을 보였다.
그렇구나, 몰입. 나도 배우가 되려는 입장이니 이해가 간다. 배역에 깊이 빠져들어서 현실과 구분이 안 되는 배우가 있다던데 마스도 그런 유형인가 보다. 이유를 듣고 보니 미움이 사라지고 존경심이 샘솟았다. 그는 내가 가려는 세계에 몸담은 사람이니까.
“고생이 많으시네요.”
“말 편하게 하세요.”
“아뇨, 전 말 빨리 안 놓는데요.”
“어차피 전과하시면 저랑 수업 같이 들어요. 얼굴도 자주 볼 텐데 그냥 빨리 놔 버려요.”
생각보다 붙임성이 있다. 이렇게 챙겨 주다니, 난 괜히 마스를 삐뚤게 본 것 같아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생각을 바꿨더니 뽀얀 얼굴로 환하게 웃는 마스가 순수하게 보였다.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려서 빨대를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만난 지 두 번만에 말 놓는 건 좀…….”
“그럼 나 먼저 놓는다.”
“…….”
“형, 안녕.”
어이가 없다.
“야.”
“어, 형도 말 놨다.”
“넌 뭐가 이러냐? 연기과 애들 다 이러냐?”
“화났어? 은근 성질 있네.”
“네가 나라고 생각해 봐. 이랬다 저랬다……. 정신없어 죽겠어.”
“난 친해지는 것 같아서 좋은데. 그거 맛있어?”
맛있기는, 그냥 밍밍한 그린티 라떼……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마스가 내 컵을 들고 가서 빨대를 쪽 빨았다. 내가 빨던 빨대에 입을 대고 쪼옥. 그가 맛을 음미하려 하기에 내가 컵을 낚아챘다.
“아, 그러니까 난 이런 거 너무 싫다고!”
“어, 형 나한테 짜증 낸 거야? 우리 친해진 거다?”
“저기요, 마스 씨. 저는요. 퍼스널 스페이스가 중요한 사람이거든요? 만난 지 몇 분 만에 말 놓고 빨대 같이 쓰고, 이런 거는 할 수가 없어요!”
“뭐 어때? 어차피 친해질 건데.”
마스가 씨익 웃었다. 잘생긴 얼굴 하나 믿고 계속 웃음으로 무마하려고 한다.
“연기과 애들 다 이런가…….”
한숨 섞인 한탄을 하자 마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다른 연기과 애들한텐 안 그래. 형이 맘에 들어서 그런 건데.”
이제야 난 깨달았다. 이것은 플러팅이었다.
“선배님?”
연기과 전과 시험에서 만난 선배였다. 오늘은 뿔테안경을 끼지 않았다. 하얗고 작은 얼굴을 다 드러내고 날 향해 활짝 웃었다.
난 방금 전 내 목을 껴안았다 멀어진 게 그라는 걸 깨달았다. 마주 웃으려다가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진짜 무례한 사람이잖아?
“기린 연기 어떻게 했어요?”
그는 인사말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난 애써 지우려 했던 그 기억이 떠올라 대번에 눈썹 사이가 구겨졌다.
“덕분에 많이 당황하진 않았습니다.”
“나도 했었는데! 연기과 전통이에요. 난 어떻게 했었는지 보여 줄까요?”
“아뇨.”
당황해서 빨리 말했다. 이 선배라면 시험 끝난 국문학도들이 쏟아져 나오는 이곳에서 갑자기 기린으로 변신할 수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세요? 국문학과에 볼일 있으세요?”
나는 손에 쥔 담배를 입에 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물었다.
선배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지가 내킬 때만 대화를 하는 스타일인가 보다. 주머니를 뒤져서 구겨진 담배 한 개비를 꺼내더니 내 손에 쥐인 라이터를 가져가서 불을 붙였다.
“있죠. 지롱 씨가 국문학과니까.”
그가 연기를 뿜는 걸 보면서 나도 라이터를 회수해 담배를 물었다.
저렇게 멋있는 척하면서 담배 피우는 사람 처음 본다. 긴 다리를 쭉 뻗은 그는 평범한 나무 벤치에 앉아 있으면서 표정은 거의 화보였다. 예쁜 손으로 필터를 잡고 시선을 내리깔고서 먼 곳을 향해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이런 담배구나.”
“네?”
“전 담배 안 피워서요.”
“아……. 다른 담배 피우신다는 거죠?”
“아뇨, 아예 안 피워요. 건강에 나쁘잖아요. 근데 지롱 씨는 취향이 클래식하네요.”
선배가 곧바로 담배를 흙바닥에 비벼서 꺼 버렸다. 딱 한 모금 피워 놓고……. 아니, 흡연자도 아니면서 아까운 남의 담배에 왜 손을 댄대? 좀 당황스러워서 나도 선배를 등지고 연기를 내뱉었다. 짙은 담배 향이 폐를 한 바퀴 돌아 나왔다.
“예, 전 재미없는 사람이라서요. 이 클래식한 담배만 3년째네요.”
“그렇군.”
“근데 저한테 볼일 있으세요?”
굳이 찾아와 만날 사이는 아니었다. 선배는 내 아스트랄한 전과 시험을 도와준 은인이지만 그것뿐이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이 스쳐 지나가는 캠퍼스에서 콕 집어 날 보러 국문학과 건물까지 오다니 뭔가 수상쩍다. 수상쩍을 일까진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어느새 말투에 날이 섰다. 내 담배에 손을 대는 사람에게 민감하기 때문이다.
내가 적대감을 보이자 선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좋은 소식 전하러 왔는데요?”
좋은 소식?
“한지롱 씨, 합격했어요. 전과 성공! 내년 3월부터 연기과예요!”
합격!
선배가 환하게 웃으면서 양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하이파이브 하자는 소리다. 방금 전까지 그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으로 대한 게 부끄럽다. 이 선배는 나와 평생 인연을 맺을 사람이다. 영원히 선후배의 정을 쌓아 나갈 사람!
감격에 젖어 선배의 손을 올려붙였다. 짝! 시원한 마찰음 뒤에 얼싸안기까지 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덕분입니다!”
선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 사람, 이상한 줄 알았는데 되게 괜찮잖아! 이 소식을 전하러 굳이 연락처도 없는 날 찾아서 여기까지 와 준 거야? 너무 고맙다. 난 이 마음을 듬뿍 담아서 충분히 포옹하고 떨어지려고 했다.
그런데 선배가 날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근데 저 선배 아닌데. 형.”
선배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1학년이에요.”
“네……?”
“전과 시험 날, 연기과 1학년들끼리 가위바위보 해서 당번 정했거든요. 그러니까 전 조교도 선배도 아니라는 거죠.”
“그럼……. 몇 살인 거예요?”
“형이랑 두 살 차이 나는 거죠.”
입이 쩍 벌어진다. 그럼 지금 눈앞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얘가 스무 살이라는 건가?
“합격 축하해요.”
게다가 그는 난데없이 가까워지더니 내 볼에 쪽, 하고 뽀뽀하는 것이었다. 쪽? 뽀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
“저기요.”
이름 모를 스무 살은 날 계속 쫓아왔다. 내가 이렇게 열받은 티 팍팍 내면서 빠르게 걸어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저기요, 지롱이 형.”
형이라니. 호칭까지 친근해졌다. 그와 나의 심적 거리감은 반비례하나 보다.
내가 싫어하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놀래키는 사람, 내 담배 건드는 사람, 예의 없이 구는 사람. 그는 위 세 가지에 모두 해당하며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 어깨를 톡톡 쳤다.
“축하주 사 줘요.”
또 발끈하게 만든다.
“제가요? 왜요? 저 낯선 사람이랑 술 안 마시는데요?”
개무시하던 내가 돌아봐 주니 스무 살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제가 낯설어요?”
“네. 조교도 아니고 선배도 아니었잖아요. 전부 다 거짓말이니 우린 서로 완전 모르는 사람이 된 거죠.”
“저 거짓말 안 했는데. 형이 착각한 거지.”
그 말도 맞다.
맞는 말을 들으니 말문이 막힌다. 연기과 복도에서 긴장한 와중에 마주친 사람이라 당연하게 상전으로 모셨다. 착각한 사람은 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숙이고 들어갈 이유는 없어서, 난 다시 그에게 등을 돌리고 걸었다.
“아무튼, 우리가 마주 보고 앉아서 술 먹을 사이는 아닌 것 같네요.”
“왜요?”
“우린 번호도 서로 모르고…….”
“여기, 제 핸드폰이요.”
“……그쪽 이름도 모르잖아요.”
그러자 스무 살이 내 손을 잡아챘다.
“제 이름, 궁금하죠?”
당연히 궁금해할 거라고 확신하는 저 자신만만한 미소. 그 순간 내가 어떤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난 손을 확 잡아 뺐다. 그가 하하, 웃었다.
“맥주 짠! 하면서 알려 드릴게요.”
“사람 이름 하나 알자고 그런 수고를…….”
그때 마침 경영관 건물로 향하는 카페 입간판이 보였다.
그래, 커피 정도는 뭐.
내가 카페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자 스무 살도 따라 들어왔다.
“뭐 마실래요?”
계산대에 서자마자 자연스럽게 카드를 꺼냈다. 알바생 뒤에 걸린 메뉴판에는 잡다한 음료와 가격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스무 살은 더 이상 맥주를 고집하지 않았다. 흐음, 하고 고심하더니 말했다.
“아메리카노요.”
“아메리카노 하나랑 그린티 라떼 주세요.”
평소엔 커피만 마시지만 오늘은 다른 걸 시켰다. 스무 살과 다른 걸 시켜 먹겠다는 유치한 마음에서였다.
창밖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바라보니 한숨이 나왔다. 사람과의 갈등을 꺼리는 내게 미움을 받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스무 살은 그걸 해냈다. 저렇게 잘생긴 얼굴로 서글서글 웃으면서 말이다.
계산대 앞에서 음료가 나오길 기다리는 스무 살을 보았다. 나이를 듣고 보니 진짜 어려 보였다. 고등학생에 비견될 정도의 동안. 첫인상이 적중했다. 좀 꼰대 같긴 하지만 국문학과 1학년들과 비교됐다. 걔들이 나한테 예의 차리는 거 생각하면, 이 스무 살은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짠.”
스무 살은 음료를 받고 자리에 앉자마자 이상한 효과음을 냈다. 짠? 맥주 짠?
“마스.”
그가 내게 그린티 라떼를 쥐여 주고서 기어이 자기 아메리카노를 내 음료에 부딪쳤다. 동시에, 난 그가 자기 이름을 말했다는 걸 알았다.
“마스 씨.”
“잘 마실게요.”
“성은 뭐예요?”
“성 없어요. 씨 자도 빼요. 그냥 마스라고 불러요.”
“닉네임이에요?”
마스라고 하니 크리스마스 같기도 하고, 화성의 영어말 같기도 하다. 연기과니까 배우 데뷔해서 쓸 예명을 미리 지어 놓은 건가? 나도 별 뜻 없이 물은 말이었지만 마스는 웃으면서 내 말을 씹었다. 그러라지.
마주 앉으니 할 말이 없었다. 이름만 말해 놓고 입을 다물어 버린 연기과 또라이야. 우리가 단둘이 시간 보낼 사이가 아니라니까. 난 그의 입을 열게 할 화제를 궁리해 보았지만 생각나는 건 무례한 질문밖에 없었다.
“근데 게이예요?”
볼 뽀뽀 당한 입장에서 충분히 물어볼 자격이 있는 질문이었다. 마스가 창밖으로 던졌던 시선을 내게 돌렸다. 난 여전히 닫혀 있는 입술을 쳐다보다 한 번 더 물었다.
“연기과에 게이 많아요?”
“편견 있어요?”
드디어 돌아온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대답이었다.
아니, 뭐…….
갑자기 민망해져서 그린티 라떼로 시선을 숨겼다. 빨대로 잔을 휘저을 때마다 커다란 얼음 사이로 음료가 찰랑댔다.
“그런 건 아니고.”
“아까 기분 나빴어요? 미안해요.”
또 정상적인 사과. 감을 못 잡겠다. 난 사과를 받는 둥 마는 둥 빨대를 쪽 빨았다.
“이런 거 핑계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 몰입형이거든요. 한번 배역 맡으면 거기서 빠져나오기 전까지 시간이 걸려요.”
“뭐……. 최근에 연기했어요?”
“이번 기말 실습에서 프랑스 남자를 연기했어요. 개방적이고 사랑이 많아서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꼬시는 역할.”
“아하…….”
“근데 그 역할이요. 무대에서 만나는 모든 배역한테 볼 뽀뽀를 해요. 눈만 마주치면 무조건. 그래서 연극 끝나고 나서도 고생이라니까요. 오해받기 딱 좋잖아요. 지롱이 형한테도 그렇고.”
음……. 할 말이 없다. 난 한 번 더 빨대를 빨아들였다. 세 번 빠니까 음료가 바닥을 보였다.
그렇구나, 몰입. 나도 배우가 되려는 입장이니 이해가 간다. 배역에 깊이 빠져들어서 현실과 구분이 안 되는 배우가 있다던데 마스도 그런 유형인가 보다. 이유를 듣고 보니 미움이 사라지고 존경심이 샘솟았다. 그는 내가 가려는 세계에 몸담은 사람이니까.
“고생이 많으시네요.”
“말 편하게 하세요.”
“아뇨, 전 말 빨리 안 놓는데요.”
“어차피 전과하시면 저랑 수업 같이 들어요. 얼굴도 자주 볼 텐데 그냥 빨리 놔 버려요.”
생각보다 붙임성이 있다. 이렇게 챙겨 주다니, 난 괜히 마스를 삐뚤게 본 것 같아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생각을 바꿨더니 뽀얀 얼굴로 환하게 웃는 마스가 순수하게 보였다.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려서 빨대를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만난 지 두 번만에 말 놓는 건 좀…….”
“그럼 나 먼저 놓는다.”
“…….”
“형, 안녕.”
어이가 없다.
“야.”
“어, 형도 말 놨다.”
“넌 뭐가 이러냐? 연기과 애들 다 이러냐?”
“화났어? 은근 성질 있네.”
“네가 나라고 생각해 봐. 이랬다 저랬다……. 정신없어 죽겠어.”
“난 친해지는 것 같아서 좋은데. 그거 맛있어?”
맛있기는, 그냥 밍밍한 그린티 라떼……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마스가 내 컵을 들고 가서 빨대를 쪽 빨았다. 내가 빨던 빨대에 입을 대고 쪼옥. 그가 맛을 음미하려 하기에 내가 컵을 낚아챘다.
“아, 그러니까 난 이런 거 너무 싫다고!”
“어, 형 나한테 짜증 낸 거야? 우리 친해진 거다?”
“저기요, 마스 씨. 저는요. 퍼스널 스페이스가 중요한 사람이거든요? 만난 지 몇 분 만에 말 놓고 빨대 같이 쓰고, 이런 거는 할 수가 없어요!”
“뭐 어때? 어차피 친해질 건데.”
마스가 씨익 웃었다. 잘생긴 얼굴 하나 믿고 계속 웃음으로 무마하려고 한다.
“연기과 애들 다 이런가…….”
한숨 섞인 한탄을 하자 마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다른 연기과 애들한텐 안 그래. 형이 맘에 들어서 그런 건데.”
이제야 난 깨달았다. 이것은 플러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