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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쓰러질 듯 보이는 초가집 앞마당에 사람들이 즐비했다. 하얀 그릇이 놓인 소반을 앞에 두고 무릎을 꿇어앉은 젊은 여자의 기세는 올곧아 칼로 저를 겨누고 있는 사람들을 움찔거리게 했다.
“내가 죽으면, 내가 이 사약을 마시고 죽으면 오라버니는 살려 줄 것이냐?”
연화의 물음에 연희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화!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
연화는 고집을 꺾을 아이가 아니다. 하여 절박한 목소리로 민호를 불렀지만 그는 고개만 돌릴 뿐이었다.
연화가 사약이 든 그릇을 들어 올렸다.
“안 된다! 연아, 안 된다!”
저를 짓이기고 있는 사내보다 더 힘차게 몸을 꿈틀거리자 다른 사내가 재욱의 다리를 짓밟았다.
“연아, 무슨 짓이냐. 놀러가기로 한 걸 기억 못 하느냐. 뭐하는 짓이냐고!”
그릇을 집어던지고 도망치거라, 제발!
하지만 바람과 달리 연화는 그릇을 입에다 가져다 댔다. 그대로 꿀꺽거리는 소리가 귓전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이연화!”
간절한 외침을 뒤로하고 연화는 결국 사약을 전부 넘기더니 입가까지 닦고 그릇을 소반 위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고 연희가 미친 듯 웃어 대기 시작했다.
연화가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미소 짓는다. 마치 괜찮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토해 내거라, 연화야. 네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것이야!”
사약은 마시면 적어도 이각(30분, 일각은 15분을 말한다)이나 삼각 뒤에 피를 토하며 죽는다. 그 안에 녹두를 달여 마시게 하면 해독되어 살아날 가능성이 크다. 일단 뱉어 내는 게 우선이라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재욱의 말에 반응한 것은 연화가 아닌 연희였다. 그녀는 호탕한 웃음소리를 멈추고 재욱을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여요. 방해꾼이 사라지는데 죽겠다니요.”
연희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재욱이 바닥에 누운 채로 발악하며 꿈틀거리자 연희가 사내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의 몸 위에서 발들이 치워졌다. 재욱이 간신히 반쯤 일어나 앉아 눈에 불을 켜고 연희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너같이 미친 자를 어찌 연모할 수 있겠느냐! 연화가 죽으면 이 짐승만도 못 한 사내들을 죽여 버린 뒤 나도 연화를 따라갈 것이다! 너는 뒤에 남아 연화의 말처럼 영원히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
퍼붓는 독설에 연희가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하자 사내 중 한 명이 다가와 받쳐 주었다. 연화는 이제 버티기가 힘든 것인지 한 손으로 소반을 잡고 견디고 있었다.
“연화야. 제발, 제발 토해 내거라!”
그때였다. 칼집에서 무언가 꺼내지는 소리가 귀를 간질여 시선을 돌렸다. 재욱의 독설에 정신을 놓아 버렸는지 연희가 한 사내의 칼을 꺼내 들어 비틀대는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뒤에 있던 사내들이 팔을 잡아 재욱을 일으켜 세웠다.
민호가 놀라 재욱을 바라보았다.
“저 자들을 포박하라!”
간절한 마음을 조금 놓이게 해 주는 목소리가 산속의 초가집까지 울려 퍼졌다. 뒤이어 엄청난 기합 소리와 함께 단체로 사람들이 바닥을 치닫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다. 연희가 화가 난 얼굴로 칼을 들고 재욱에게 달려들었다.
순간이었다. 소리도 없이 다가온 형체가 제욱의 몸을 감싸 안았다. 연화가 아니기를, 안 그래도 속이 뒤틀릴 듯 아플 연화가 아니기를, 차라리 잘못을 깨달은 민호이기를 빌 새도 없었다.
“연화야!”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연화가 피를 토했다. 사약 때문인지, 허리에 구멍이 나 버린 탓인지 알 길이 없었다. 여린 몸이 힘없이 넘어지기에 잡아 주려 했지만 손발을 쓸 수 없어 함께 넘어졌다. 바닥에 드러누워서도 연화는 계속 입에서 피를 흘렸다.
“연, 연아…….”
주위에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소리와 함께 월호 형님의 목소리도 어렴풋이 들려왔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힘겹게 웃는 연화뿐이었다.
그녀가 재욱의 볼에 제 손을 올렸다.
“연화야? 연아, 이연화!”
생살을 찢는 듯 고통스런 목소리가 산속 가득 울려 퍼져 나갔다.
1장
“이름이 무엇이냐.”
비싼 비단 옷을 흙으로 물들인 여자아이. 아이는 누가 봐도 보호받으며 자란 귀한 집 가문의 여식으로 보였다. 서너 살 정도 더 먹은 듯 보이는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의 이름을 물었다.
“……연. 이연이라고 하랍니다.”
“하란다고?”
희한한 대답에 남자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예.”
“누가?”
“아버지가요.”
이제 갓 일곱, 여덟 살 정도 되었을까. 몸집이 매우 작고 여려 보이는 연, 아니 연화는 자신보다 몸집도 크고 강해 보이는 남자아이를 당당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남자아이는 연화의 대답에 의아함을 떨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내 얼굴에 묻은 흙이 코로 들어가 간지러운 것인지 킁킁거리다가 결국 재채기를 하는 연화를 보며 궁금증을 잊은 채 웃었다.
“난 재욱(栽旭)이라 한다.”
여자처럼 얼굴이 새하얗고 광채가 나는 남자아이, 재욱이 연화에게 주먹을 쥔 손을 내밀자 연화는 그 손을 멍하니 내려 보았다.
“너도 주먹 쥐어 보거라.”
재욱의 말에 연화는 얌전히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재욱은 자신의 주먹 쥔 손을 연화의 주먹 쥔 손에 살짝 부딪히며 말했다.
“내가 만든 인사다!”
호탕하게 웃어젖히는 재욱의 모습에 저도 모를 두근거림을 느끼며 연화는 두 볼을 밝게 물들였다. 하지만 너무 어려 그 마음이 무엇인지 깨닫지도 못한 채 재욱을 바라보며 연화도 환하게 웃음 지었다.
* * *
나 ‘이연화(李蓮化)’는 모든 백성들의 축복 속에서 태어난 조선의 공주다. 아버지는 성군이시며, 지난 역사에서처럼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려 든다거나 역모를 꾀하는 자들 하나 없었다. 백성들 또한 굶지 않고 불이익을 당하는 자가 없어 매일에 만족하여 왕을 따랐다.
하지만 그러한 환경에서 태어났어도 연화는 공주인 것이 너무나 싫었다.
“왜 공주가 싫다는 게냐? 이렇게 맛있는 것도 매일 먹고, 예쁜 비단 옷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직접 씻겨 주질 않느냐.”
“지루해.”
“욕을 아주 그냥 오줌싸개가 머리에 쓴 소쿠리 크기만큼 얻어먹을 소리를.”
철들기 전부터, 아니 아직도 철은 안 들었지만 아주 어렸을 적부터 함께한 오라비이자 친구이자 동생이자 부모 같은 존재인 무위군, 재욱이 창가에 기대고 서서 강아지풀을 씹다가 뱉으며 똥 씹은 표정으로 그녀를 혼냈다.
연화는 재욱의 표정을 똑같이 따라 하며 말했다.
“어허,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게냐!”
“고, 공주 아기씨. 죽을죄를…… 은 무슨. 만날 네 편할 때만 공주 노릇이지!”
어느새 재욱이 다가와 연화의 머리를 자신의 주먹으로 둘러싼 뒤 비벼 대기 시작했다. 고통이 너무나 심해 연화가 작게 신음을 내뱉고는 재욱의 배를 한 대 세게 쳐 주었다.
“으허엉. 아퍼어.”
재욱은 손을 배로 가져가 붙잡으며 우는 소리를 내고는 앉아 있던 연화의 어깨에 제 얼굴을 기대었다.
“켁.”
그리고 죽은 척.
“에구구, 그랬쪄요? 우리 아가, 아팠쪄요?”
어깨에 올려져 있는 오라비의 얼굴을, 매만지듯 손으로 툭툭 치며 혀 짧은 소리를 내자 재욱은 아예 자신의 얼굴을 파묻고는 킥킥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웃기 시작하였다. 그때였다.
“공주 아기씨, 명주이옵니다. 들어가겠사옵니다.”
직속 궁녀이자 무위군만큼이나 연화의 그림자까지 따라다니며 시중을 드는 명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연화와 재욱이 무간(無間)한 사이, 그러니까 딱히 신분을 따지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명주이기에 재욱은 여전히 연화의 어깨에서 자신의 얼굴을 치우지 않고 고개만 살짝 돌려 명주를 바라보았다.
“이, 이 무슨 망측한!”
“뭐, 한두 번도 아닌데. 그치?”
명주의 소리침에 재욱은 다시 얼굴을 제대로 연화의 어깨에 기대며 말하였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명주가 냉큼 달려와 재욱을 떼어 내었다.
“아직 길례도 올리지 않은 분입니다!”
“그럼 길례를 올리면 이리 안아도 된다는 뜻이냐?”
“좀!”
재욱이 사악한 미소로 앉아 연화를 뒤에서 껴안듯 양팔을 벌리며 말하자 명주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한 얼굴로 재욱을 벽으로 밀쳐 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러운지 연화는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웃어 대었다.
“공주 아기씨, 제발 체통을 지키시옵소서! 이러시는 모습을 부마가 보시기라도 하면…….”
“난 아직 부마가 없지 않느냐.”
여전히 벽에서 붙어 선 그를 바라보며 말하자 재욱은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는 재욱을 여덟 살에 처음 만났다. 그녀는 매일같이 제대로 올라가지도 못하는 말을 타겠다고 억지를 부리다 다치고, 친남매 사이인 윤을 따라 검술 수련에 가 혼자 난리를 치다 흙투성이가 되고는 했었다. 어디 한번 겁에 질려 보라는 심산으로 아버지가 그녀를 남자들만 있는 도장으로 홀로 보내는 바람에 거기서 재욱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계획과 달리 연화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친해졌다. 특히 여자만큼이나 예쁘게 생긴 재욱과 말이다. 그밖에 말이 많은 민호(慜浩), 재욱의 형인 월호(月好)가 있었다.
쓰러질 듯 보이는 초가집 앞마당에 사람들이 즐비했다. 하얀 그릇이 놓인 소반을 앞에 두고 무릎을 꿇어앉은 젊은 여자의 기세는 올곧아 칼로 저를 겨누고 있는 사람들을 움찔거리게 했다.
“내가 죽으면, 내가 이 사약을 마시고 죽으면 오라버니는 살려 줄 것이냐?”
연화의 물음에 연희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화!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
연화는 고집을 꺾을 아이가 아니다. 하여 절박한 목소리로 민호를 불렀지만 그는 고개만 돌릴 뿐이었다.
연화가 사약이 든 그릇을 들어 올렸다.
“안 된다! 연아, 안 된다!”
저를 짓이기고 있는 사내보다 더 힘차게 몸을 꿈틀거리자 다른 사내가 재욱의 다리를 짓밟았다.
“연아, 무슨 짓이냐. 놀러가기로 한 걸 기억 못 하느냐. 뭐하는 짓이냐고!”
그릇을 집어던지고 도망치거라, 제발!
하지만 바람과 달리 연화는 그릇을 입에다 가져다 댔다. 그대로 꿀꺽거리는 소리가 귓전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이연화!”
간절한 외침을 뒤로하고 연화는 결국 사약을 전부 넘기더니 입가까지 닦고 그릇을 소반 위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고 연희가 미친 듯 웃어 대기 시작했다.
연화가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미소 짓는다. 마치 괜찮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토해 내거라, 연화야. 네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것이야!”
사약은 마시면 적어도 이각(30분, 일각은 15분을 말한다)이나 삼각 뒤에 피를 토하며 죽는다. 그 안에 녹두를 달여 마시게 하면 해독되어 살아날 가능성이 크다. 일단 뱉어 내는 게 우선이라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재욱의 말에 반응한 것은 연화가 아닌 연희였다. 그녀는 호탕한 웃음소리를 멈추고 재욱을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여요. 방해꾼이 사라지는데 죽겠다니요.”
연희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재욱이 바닥에 누운 채로 발악하며 꿈틀거리자 연희가 사내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의 몸 위에서 발들이 치워졌다. 재욱이 간신히 반쯤 일어나 앉아 눈에 불을 켜고 연희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너같이 미친 자를 어찌 연모할 수 있겠느냐! 연화가 죽으면 이 짐승만도 못 한 사내들을 죽여 버린 뒤 나도 연화를 따라갈 것이다! 너는 뒤에 남아 연화의 말처럼 영원히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
퍼붓는 독설에 연희가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하자 사내 중 한 명이 다가와 받쳐 주었다. 연화는 이제 버티기가 힘든 것인지 한 손으로 소반을 잡고 견디고 있었다.
“연화야. 제발, 제발 토해 내거라!”
그때였다. 칼집에서 무언가 꺼내지는 소리가 귀를 간질여 시선을 돌렸다. 재욱의 독설에 정신을 놓아 버렸는지 연희가 한 사내의 칼을 꺼내 들어 비틀대는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뒤에 있던 사내들이 팔을 잡아 재욱을 일으켜 세웠다.
민호가 놀라 재욱을 바라보았다.
“저 자들을 포박하라!”
간절한 마음을 조금 놓이게 해 주는 목소리가 산속의 초가집까지 울려 퍼졌다. 뒤이어 엄청난 기합 소리와 함께 단체로 사람들이 바닥을 치닫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다. 연희가 화가 난 얼굴로 칼을 들고 재욱에게 달려들었다.
순간이었다. 소리도 없이 다가온 형체가 제욱의 몸을 감싸 안았다. 연화가 아니기를, 안 그래도 속이 뒤틀릴 듯 아플 연화가 아니기를, 차라리 잘못을 깨달은 민호이기를 빌 새도 없었다.
“연화야!”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연화가 피를 토했다. 사약 때문인지, 허리에 구멍이 나 버린 탓인지 알 길이 없었다. 여린 몸이 힘없이 넘어지기에 잡아 주려 했지만 손발을 쓸 수 없어 함께 넘어졌다. 바닥에 드러누워서도 연화는 계속 입에서 피를 흘렸다.
“연, 연아…….”
주위에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소리와 함께 월호 형님의 목소리도 어렴풋이 들려왔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힘겹게 웃는 연화뿐이었다.
그녀가 재욱의 볼에 제 손을 올렸다.
“연화야? 연아, 이연화!”
생살을 찢는 듯 고통스런 목소리가 산속 가득 울려 퍼져 나갔다.
1장
“이름이 무엇이냐.”
비싼 비단 옷을 흙으로 물들인 여자아이. 아이는 누가 봐도 보호받으며 자란 귀한 집 가문의 여식으로 보였다. 서너 살 정도 더 먹은 듯 보이는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의 이름을 물었다.
“……연. 이연이라고 하랍니다.”
“하란다고?”
희한한 대답에 남자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예.”
“누가?”
“아버지가요.”
이제 갓 일곱, 여덟 살 정도 되었을까. 몸집이 매우 작고 여려 보이는 연, 아니 연화는 자신보다 몸집도 크고 강해 보이는 남자아이를 당당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남자아이는 연화의 대답에 의아함을 떨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내 얼굴에 묻은 흙이 코로 들어가 간지러운 것인지 킁킁거리다가 결국 재채기를 하는 연화를 보며 궁금증을 잊은 채 웃었다.
“난 재욱(栽旭)이라 한다.”
여자처럼 얼굴이 새하얗고 광채가 나는 남자아이, 재욱이 연화에게 주먹을 쥔 손을 내밀자 연화는 그 손을 멍하니 내려 보았다.
“너도 주먹 쥐어 보거라.”
재욱의 말에 연화는 얌전히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재욱은 자신의 주먹 쥔 손을 연화의 주먹 쥔 손에 살짝 부딪히며 말했다.
“내가 만든 인사다!”
호탕하게 웃어젖히는 재욱의 모습에 저도 모를 두근거림을 느끼며 연화는 두 볼을 밝게 물들였다. 하지만 너무 어려 그 마음이 무엇인지 깨닫지도 못한 채 재욱을 바라보며 연화도 환하게 웃음 지었다.
* * *
나 ‘이연화(李蓮化)’는 모든 백성들의 축복 속에서 태어난 조선의 공주다. 아버지는 성군이시며, 지난 역사에서처럼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려 든다거나 역모를 꾀하는 자들 하나 없었다. 백성들 또한 굶지 않고 불이익을 당하는 자가 없어 매일에 만족하여 왕을 따랐다.
하지만 그러한 환경에서 태어났어도 연화는 공주인 것이 너무나 싫었다.
“왜 공주가 싫다는 게냐? 이렇게 맛있는 것도 매일 먹고, 예쁜 비단 옷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직접 씻겨 주질 않느냐.”
“지루해.”
“욕을 아주 그냥 오줌싸개가 머리에 쓴 소쿠리 크기만큼 얻어먹을 소리를.”
철들기 전부터, 아니 아직도 철은 안 들었지만 아주 어렸을 적부터 함께한 오라비이자 친구이자 동생이자 부모 같은 존재인 무위군, 재욱이 창가에 기대고 서서 강아지풀을 씹다가 뱉으며 똥 씹은 표정으로 그녀를 혼냈다.
연화는 재욱의 표정을 똑같이 따라 하며 말했다.
“어허,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게냐!”
“고, 공주 아기씨. 죽을죄를…… 은 무슨. 만날 네 편할 때만 공주 노릇이지!”
어느새 재욱이 다가와 연화의 머리를 자신의 주먹으로 둘러싼 뒤 비벼 대기 시작했다. 고통이 너무나 심해 연화가 작게 신음을 내뱉고는 재욱의 배를 한 대 세게 쳐 주었다.
“으허엉. 아퍼어.”
재욱은 손을 배로 가져가 붙잡으며 우는 소리를 내고는 앉아 있던 연화의 어깨에 제 얼굴을 기대었다.
“켁.”
그리고 죽은 척.
“에구구, 그랬쪄요? 우리 아가, 아팠쪄요?”
어깨에 올려져 있는 오라비의 얼굴을, 매만지듯 손으로 툭툭 치며 혀 짧은 소리를 내자 재욱은 아예 자신의 얼굴을 파묻고는 킥킥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웃기 시작하였다. 그때였다.
“공주 아기씨, 명주이옵니다. 들어가겠사옵니다.”
직속 궁녀이자 무위군만큼이나 연화의 그림자까지 따라다니며 시중을 드는 명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연화와 재욱이 무간(無間)한 사이, 그러니까 딱히 신분을 따지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명주이기에 재욱은 여전히 연화의 어깨에서 자신의 얼굴을 치우지 않고 고개만 살짝 돌려 명주를 바라보았다.
“이, 이 무슨 망측한!”
“뭐, 한두 번도 아닌데. 그치?”
명주의 소리침에 재욱은 다시 얼굴을 제대로 연화의 어깨에 기대며 말하였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명주가 냉큼 달려와 재욱을 떼어 내었다.
“아직 길례도 올리지 않은 분입니다!”
“그럼 길례를 올리면 이리 안아도 된다는 뜻이냐?”
“좀!”
재욱이 사악한 미소로 앉아 연화를 뒤에서 껴안듯 양팔을 벌리며 말하자 명주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한 얼굴로 재욱을 벽으로 밀쳐 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러운지 연화는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웃어 대었다.
“공주 아기씨, 제발 체통을 지키시옵소서! 이러시는 모습을 부마가 보시기라도 하면…….”
“난 아직 부마가 없지 않느냐.”
여전히 벽에서 붙어 선 그를 바라보며 말하자 재욱은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는 재욱을 여덟 살에 처음 만났다. 그녀는 매일같이 제대로 올라가지도 못하는 말을 타겠다고 억지를 부리다 다치고, 친남매 사이인 윤을 따라 검술 수련에 가 혼자 난리를 치다 흙투성이가 되고는 했었다. 어디 한번 겁에 질려 보라는 심산으로 아버지가 그녀를 남자들만 있는 도장으로 홀로 보내는 바람에 거기서 재욱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계획과 달리 연화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친해졌다. 특히 여자만큼이나 예쁘게 생긴 재욱과 말이다. 그밖에 말이 많은 민호(慜浩), 재욱의 형인 월호(月好)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