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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는 가끔 남장을 하고 기방에 놀러 가고는 하였는데, 그녀와 사촌지간임에도 스스로 기녀가 된 효열을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기녀가 된 데에는 기구한 사연이 있었지만 연화가 하도 기방을 들락거리다가 오라버니들에게 덕분에 서로 친해질 수 있었다.

아직까지 들키지 않아 망정이지, 만에 하나 이 일이 왕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연화는 그렇게 도장에서 2년을 보낸 뒤 어머니인 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 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종종 몰래 빠져나가 신분을 숨기고 재욱, 민호, 월호와 효열을 만나 놀았다.

그녀가 열네 살이 되던 해, 열여덟 살인 재욱이 공주의 무위군을 뽑는 경연장에 나와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자리에 올랐다. 신분을 알릴 수밖에 없게 된 연화는 행여 사이가 어색해질 까봐 걱정했지만 착오였다는 것을 재욱이 몸소 보여 주었다.

민호와 월호는 죽여 달라고 말하며 예를 갖추지 못한 죄를 빌었지만 재욱은 떠받들어지는 것에 질린 연화를 이해해 평소와 같이 대해 주었다. 어찌 되었든 덕분에 연화는 재욱과 함께 있을 때면 그나마 숨통 트이는 삶을 살 수 있었다.

“하, 이러다가 상감마마께 들키기라도 한다면…….”

“안 들킨다. 괜찮아.”

“매일 천하태평처럼 보이셔서 참으로 부럽습니다!”

명주가 연화를 보며 소리치더니 이내 다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제대로 예를 갖춘 채 입을 열었다.

“강론에 드실 시간이옵니다.”

“알겠다.”

“어디 아프십니까?”

연화가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하니 명주가 다시금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참 재미있는 아이다.

“안 아픈데.”

“근데 왜 도망 안 가십니까?!”

“도망가 주리?”

“아뇨! 아닙니다, 공주 아기씨. 가시지요.”

푸드득거리는 말처럼 고개를 마구 휘젓는 귀여운 명주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봐 주며 자리에서 일어나 수업을 받기 위해 따로 정해져 있는 방으로 향하였다.

이건 엄청난 사치야. 나도 그냥 종친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건춘문으로 가면 되잖아.

그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방에 도착한 연화는 명과 다른 시종들을 밖에 세워 둔 뒤 재욱만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명주의 눈치를 받으면서도 그를 데리고 들어온 것은 이유가 있었다.

오늘부로 바뀐 그녀의 직강이 민호임을 미리 알았던 터라 셋이서 뭉치고 싶은 것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자 누군가 예를 갖추며 들어와 연화에게 절을 올렸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네.”

“어.”

민호의 물음에 연화와 재욱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들 사이를 가리고 있는 얇은 천 사이로 비치는 민호의 표정은 불안감에 휩싸인 의아함으로 물어 있었다.

“공주 아기씨, 옆에 다른 누군가가 계시는지요.”

“네, 재욱 오라버니요.”

“뭐, 뭐 하는 짓이냐!”

그녀의 대답에 민호는 작게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숨어 있는 재욱을 찾으려 애썼다. 연화는 쿡쿡 웃어 대다가 재욱과 함께 천을 치우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민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배가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넙죽 엎드렸다.

“만날 때마다 이러니까 불편해요.”

“공주 아기씨, 저 망할 것……이 아니라 석연치 않은 무위군이 잘못된 것이옵니다. 계속 저리 아기씨를 함부로 대하게 놔둔다면 더더욱 거만하고 멍청한 자식…… 자가 될 것이옵니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 서 있는 재욱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상스러운 욕을 참으려다 툭툭 내뱉고 마는 민호가 연화는 너무나 반가웠다. 한 달 만에 만나 여전한 걸 보니 기뻐 그를 안아 버리고 말았다. 당연하게도 민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리도 공주 아기씨 품이 좋으냐?”

“……!”

재욱의 농에 민호는 연화의 곁에서 떨어져 안 그래도 터질 것 같은 얼굴을 더 붉힌 채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저 망할 놈의 입에 주리를 틀어 놓든 해야지!”

“그럼 넌 공주 아기씨에게 안기는 것이 싫다는 것이냐?”

“그런 거였습니까?”

재욱의 장난에 맞추어 연화가 울상을 짓자 예상대로 민호는 당황하며 해명했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그럼 좋아?”

“당연히 이로 말할 수 없이…….”

“호색한.”

재욱이 씩 웃으며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덕분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민호는 오늘이야말로 더러운 버릇을 뜯어고쳐 주겠다며 재욱을 붙잡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그가 잽싸게 연화 뒤로 숨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공주 아기씨, 왜 저 녀석의 어리광을 계속 받아 주시기만 하십니까! 체통을 지키시옵소서!”

“그놈의 체통, 체통. 얼어 죽을.”

“아기씨!”

민호가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호통을 쳤다.

이래서 싫었다. 연화는 늘 틀에 박힌 삶을 살아왔다. 누구에게 존경받을 짓 따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받들어져 왔다.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함에도 어렸을 적부터 이상하게 공주로서의 대우가 매우 불편하고 싫었다.

아주 어렸을 적, 왕후가 그녀와 윤을 궐 안 사람들 몰래 데리고 궐을 빠져나가 놀게 해 준 적이 있었다. 그때 한 평민 가족을 보았다. 어린 여자아이가 제 오라비를 비롯한 친구들과 함께 빗자루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너무나 부러웠다. 숨 막히지 않고 자유로운 모습이. 궁에 돌아온 후에 윤은 연화에게 조금이나마 자유를 주려고 노력했지만 그래 봤자 궐이라 여전히 갇힌 틀 안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더더욱.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왕후가 죽기 직전 연화에게 ‘네 자신의 인생을 살아다오’라고 말한 이유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그 무엇도 자신만의 틀을 가로막을 수 없게 그리 살라고. 그녀는 왕후답게 매우 품격 높게 행동하였으나 어딘가 방방 뛰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친한 이들이 저에게 격식을 차릴 때면 연화는 어머니와 신분을 연관 지어 생각했다. 어머니의 말처럼 살고 싶어도 태어날 때부터 공주라 정해진 신분이 자꾸만 뒤를 쫒아와 그럴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자제하겠습니다.”

결국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방 안이 침묵으로 휩싸였다. 재욱은 연화를 걱정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많은 만큼 재욱은 그녀가 생각하는 바를 일찍이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공주 아기씨. 오늘 누님을 보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아, 응!”

재욱이 말한 누님은 효열을 뜻함이었다. 사실 효열을 보러 갈 생각은 없었다. 오늘은 민호를 궐 안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침부터 매우 기대돼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나 우울해진 연화의 마음을 달래려 꺼낸 제안이었다.

“민호 오라버니도 가실 것이지요?”

“……저도 가도 됩니까?”

민호는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효열에게 푹 빠져 있었다. 효열의 얘기를 꺼내자마자 아까와는 다른 표정으로 얼굴이 발개졌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연화는 또 한 번 그를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아 내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수업을 시작하시지요. 어차피 밤이 될 때까지 할 짓은 없고 시간은 많으니.”

그리 말하며 연화는 환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 * *



“재욱 오라버니! 재욱 오라버니, 이거 봐!”

매일이 지루하다고 투정 부리면서도 공주로서의 본분을 마치고서 연화는 강론을 마치자마자 밤늦게 아무도 모르게 궐을 빠져나와 효열을 찾았다.

연화를 한 번 쳐다보았다가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 월호가 효열의 연지를 얼굴에 덕지덕지 바르고 기생의 창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욱아, 너도 추어 보거라! 이 얼마나 흥겨운 장단이냐!”

월호는 재욱에게 소리치며 해와 닮은 눈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흡사 세간의 각설이 흉내를 내는 자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월호에게 말하면 맞아 죽을 소리였다.

연화는 깔깔거리며 웃어 대더니 재욱에게로 다가와 손을 내뻗는 월호의 손도 함께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몸을 움직이며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재욱은 조금 시기가 들었다. 연화는 자신을 아주 잘 따랐지만, 월호가 나타나면 늘 그에게 쪼르르 달려가곤 했다.

얼자인 자신과 달리 그는 왕의 최측근인 사대부 가(家) 자제로서 검술도, 학문도 뛰어났다. 지금은 규장각에 들어가 생활하고 있었다. 재욱은 형인 그를 늘 존경하면서도 옆에 서 있으면 자신이 한없이 부족해 보여 자격지심에 빠져들었다.

손을 맞잡고 춤추는 그들을 보자니 기분이 안 좋아진 재욱은 고개를 돌렸다. 효열이 남장을 한 연화와 월호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을, 민호가 바라보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재욱은 다시금 힐끗 마냥 해맑은 연화를 바라보았다.

왜 늘 네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은 그곳인 게냐.

월호로 인해 행복해하는 연화의 모습을 더 보고 있노라면 드러나서는 안 될 감정이 한순간에 터져 버릴 것만 같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향하였다.

재욱은 다가오는 기녀들을 차가운 목소리로 떨쳐 내고 혼자 툇마루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멋대로 펼쳐진 밤하늘의 별들이 마치 연꽃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연화의 얼굴을 잊을까 하여 나온 것인데, 그녀를 닮은 연꽃을 그리며 놀고 있다니. 게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월호와 연화의 웃음소리가 섞여 마음을 어지럽혔다.

재욱은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허리에 찬 검을 그러쥐었다.

그의 나이 열두 살에 처음 연화를 만났다. 달빛을 품고 있는 듯 초롱초롱 빛나면서도 어두운 색의 눈동자, 윤기 나는 긴 머리카락. 고작 여덟 살임에도 조선의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미모를 가진 아이의 엉뚱함과 정의로움은 순식간에 재욱의 마음을 빼앗아 가 버렸다.

연화는 세상 모든 것을 아꼈다. 생선 같은 음식을 먹을 때면 늘 ‘미안해’라고 중얼거릴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