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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열네 살이 되던 해, 왕비께서 돌아가시자 연화는 도장을 떠났다. 도장을 떠나는 그녀를 저도 모르게 뒤따르다가 공주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날부터 무위군이 되기 위해 미치도록 노력하여 당당하게 자리에 올랐다.
얼자(양반과 천민 여성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자신이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목숨을 바쳐 지키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무위군이 된 이후로는 매일같이 그녀를 보살피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사실 공주 아기씨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는 것, 아니 생각하는 것조차 반역이지만 그들 사이에 그런 것은 없었다.
작년 이맘때쯤 살짝 술에 취한 그녀가 내뱉은 말이 있었다. 자신이 유일하게 궐 안에서 자신이 살 수 있는 자리를, 공기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고. 그 말에 가슴 설레면서도 재욱은 오히려 자신이 연화에게 살아갈 희망을 전해 받고 있음을 전하고 싶었다.
연화는 알까. 재욱이 그녀 앞에 설 때면 얼마나 가슴 설레는지, 심장이 터질 것 같은지. 저를 보며 미소 짓는 모습이 얼마나 소중한지.
하지만 사가로 돌아가면 노비들에게조차 차가운 눈길을 받곤 했다. 지금은 먼 곳에서 홀로 사시는 친어머니 대신 이름만 어머니가 되어 주신 월호의 친모에게도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자랐다.
재욱은 아버지의 첩이자 관비 출신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월호는 그의 배다른 형제로, 지금의 상감마마께서 신분에 차이를 두지 않으려 골고루 인재를 등용하려 애쓰고 계시지만 백성들이 체감하는 건 별다를 게 없었다. 여전히 노비는 노비이며, 백정은 백정이며, 서얼은 서얼이었다.
유년 시절의 재욱을 삐뚤어지지 않게 만들어 준 것은 월호였다. 그는 분노를 검술로서 다스리는 법을 알려 주었다. 덕분에 재욱은 조선 최고의 검술을 자랑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어 연화를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서얼임에도 이복동생인 자신을 사랑해 주니까.
“왜 더 즐기지 않으시고요.”
인기척이 느껴져 뒤돌아보니 효열이 자상한 미소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어느새 바싹 다가와 있었다.
“시기가 나 가만히 못 있겠습니다.”
재욱이 연화를 좋아하는 걸 효열은 알고 있었기에 솔직히 대답하자 그녀는 옆에 조심스레 다리를 모으고 앉으며 작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귀엽습니다.”
“뭐가 말입니까?”
“시기하는 것이요.”
그녀의 말에 볼이 살짝 화끈해지는 것을 느낀 재욱은 괜히 헛기침을 하였다.
“월호 형님 곁에만 있으면 뭐가 그리도 좋은 것인지 쉬지 않고 웃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느껴지지요.”
그의 물음에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고 효열이 대답하자 재욱은 한숨을 쉬었다. 웃고 있는 효열의 찰랑거리는 긴 속눈썹이 그녀가 살짝 눈을 감음과 동시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연화는 나리 앞에선 잘 우나요?”
“네. 잘 웁니다. 아주 잘 울지요. 지나가던 똥개가 다리를 저는 것을 보고도 울먹이고, 새장에 갇힌 새를 보고도 눈물을 글썽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약한 녀석이 월호 형님 앞에선 어찌나 강한 척을 하는지.”
“월호 나리 앞에서는 연화가 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러우셔요?”
효열은 여전히 자상한 미소로 뜻하는 바를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당연합니다.”
“그러신가요. 저는 재욱 나리가 더 부러운데요.”
“어째서?”
“다음에는 언제 이곳에 들리실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공주 아기씨 마음이시니까.”
자신의 대답에 동문서답하는 효열을 바라보며 답했다.
“그럼 잘 생각해 놓으셨다가 다음에 이곳에 오실 때에 맞춰 보시지요. 제가 월호 나리보다 재욱 나리를 더 부러워하는 이유를요.”
“그냥 답해 주시면 안 되십니까?”
“스스로 깨닫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으니까요.”
여전히 아리송한 말을 하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재욱은 다시금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 효열 누님은 내가 월호 형님보다 더 부럽다는 것일까? 연화의 마음은 내 곁에 없는데. 그녀가 늘 웃어 주는 것은 월호 형님이거늘.
스스로가 참으로 청승맞게 느껴져 재욱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춤추기를 그만둔 것인지, 월호는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옆에는 연화가 앉아 있었다. 재욱은 자연스럽게 비어 있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디 갔다 왔어?”
“측간.”
월호와 민호, 효열이 떠들고 있는 사이 연화가 조심히 재욱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신이 나가 있는 것에 대해 눈치는 채고 있던 모양이다.
“어디 간다고 말 좀 해주고 나가면 어디가 덧나?”
“궁둥이에 털 난다.”
무표정으로 농담을 하자 그녀가 얼굴 근육들을 일그러트렸다. 보고 있자니 시기하고 삐진 마음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순식간에 눈 녹듯 사그라졌다.
“농담이다. 바람 좀 쐬고 왔다.”
“무위군이 공주 안 지키고 뭐하는 거여?”
“민호도 있고 월호 형님도 있질 않느냐.”
“오라버니가 있어야 든든해.”
새침하게 내뱉은 그녀는 재빠르게 효열의 곁으로 가 옮겨 앉았다.
토끼 같은 녀석.
“공주 아기씨, 이만 가 봐야지.”
반대편에 앉은 연화를 바라보며 말하자 그녀가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아직 동도 트지 않았잖아.”
“동 트기 전에 가야지요.”
일어서서 발걸음을 저벅저벅 옮긴 다음 그녀의 팔뚝을 살짝 잡아 일으켜 세웠다. 이제 그만 갈 시간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기에 연화는 반항 없이 순순히 일어났다.
“월호 오라버니, 언제 다시 뵐 수 있어요?”
“보름은 더 기다려야 할 듯싶습니다, 아기씨.”
“규장각도 여간 깐깐한 게 아니네요.”
입술을 삐죽 내놓고 투정을 부리는 그녀의 모습에 월호가 넉살 좋게 웃었다.
“그럼 나중에 뵈어요. 민호 오라버니는 궐에서 뵐 수 있으니. 언니, 잘 지내고 있어.”
“응. 또 봐.”
“가자, 정말 동 트겠다.”
인사가 길어질 것만 같아 재욱은 연화의 손을 잡고 방에서 끌고 나와 기방을 빠져나왔다.
궐로 돌아가는 길, 연화는 총총걸음으로 발을 디뎠다. 달빛이 비추는 그녀의 뒷모습은 매우 청아하여 재욱은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따라 걸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오라버니.”
“응?”
총총거렸던 신난 발걸음은 사라지고 어느새 그녀의 발에는 어두운 무게가 실려 있었다.
“약속 하나만 해 줘.”
“무슨 약속 말이냐?”
“나보다 먼저 죽지 않겠다고.”
이 거리는 연화가 어렸을 적 제 어머니와 함께 걸었던 거리라고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그때도 이처럼 밝은 달이 떠 있었고 밤늦게까지 왕후 마마와 단둘이 몰래 바깥 구경을 하고 궐로 돌아갔었다고.
연화는 그날 무엇에도 견주지 못할 정도의 행복을 느꼈었다. 한데 다음 날, 어머니는 오래도록 앓아 오신 병으로 몸져누웠다. 그리고 몇 달 후, 영영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이곳을 걸었을 때가 왕후와의 행복했던 마지막 추억이었다고 재욱에게 말해 주었었다.
“그건 약속할 수 없다.”
이번에는 재욱이 담담한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그러자 연화가 뒤돌아보았다.
“명령이라 할지라도 따를 수 없어.”
“어째서?”
“나는 너의 무위군이니까. 나에겐 널 지킬 의무가 있으니까. 내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그럼 그따위 무위군은 관둬 버려.”
연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달빛을 등져 보이진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앞을 돌아보며 재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자 재욱은 급하게 따라가 얇은 손목을 낚아챘다. 그녀의 하늘색 도포가 산들바람에 아련하게 살랑거렸다.
“내가 무위군인 것이 싫으냐?”
“오라버니의 실력은 잘 알아. 어렸을 때부터 봐 왔으니까. 늘 같이 있을 수 있으니 좋아. 하지만…….”
그녀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히었다.
월호 형님 앞에서는 그리도 강한 녀석이, 내 앞에만 서면 어찌 이리도 연약한 모습을 보이느냔 말이냐. 그러니 더욱 놓아주기가 힘들구나. 네가 길례라도 올리는 날에는 난…….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하며 재욱은 자신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난 네 무위군인 것이 좋다. 당당히 네 곁에서 널 지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무위군이 아니게 되더라도 널 지킬 거야. 네가 어디에 있든 끝까지 쫒아갈 것이다. 넌 그만큼 내게 소중한 녀석이니까. 그러니까 그 약속은 들어줄 수가 없어. 하지만…… 노력은 해 볼게. 최대한 그런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야.”
그리 말하며 재욱이 환하게 웃어 보이자 연화도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너도 내가 그리 좋으냐? 그런 말을 다 하게.”
좋아한다, 아니 연모한다는 대답을 원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재욱의 힘을 쫙 빼놓았다.
“싫겠어, 그럼? 아, 맞아! 들려야 할 곳이 있어.”
김빠지게 만드는 대답에 연화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웃으며 이 오밤중에 어딜 가느냐고 물었다.
“책 거간꾼한테!”
이 오밤중에 책을 거래하는 사람이 있다고? 게다가 무슨 책? 궐에 넘쳐 나는 것이 책이건만.
재욱은 구시렁거리고 싶은 것을 참고 연화의 뒤를 조용히 뒤따랐다.
* * *
이틀 전, 그러니까 효열 언니를 보고 온 그날 재욱과 함께 달빛을 벗 삼아 걷던 일을 떠올리며 연화는 어머니의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러자니 사람은 정말 언제 떠날지 모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연화는 재욱에게 약속 하나를 받아 내려 했었다. 적어도 자신보다 먼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먼저 죽지 말라 약조해 달라고.
지금도 자신의 시간은 어머니가 죽은 그날에 멈춰져 있는데 재욱마저 사라진다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재욱은 연화의 약조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쉽지 않은 약조인 것을 알지만, 말뿐이라도 그리하겠다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내심 서운했었다.
“난 네 무위군인 것이 좋다. 당당히 네 곁에서 널 지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무위군이 아니게 되더라도 널 지킬 거야. 네가 어디에 있든 끝까지 쫒아갈 것이다. 넌 그만큼 내게 소중한 녀석이니까. 그러니까 그 약속은 들어줄 수가 없어. 하지만…… 노력은 해 볼게. 최대한 그런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야.”
하지만 그녀의 생각을 단숨에 바꾸는 대답이 돌아왔었다.
얼자(양반과 천민 여성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자신이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목숨을 바쳐 지키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무위군이 된 이후로는 매일같이 그녀를 보살피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사실 공주 아기씨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는 것, 아니 생각하는 것조차 반역이지만 그들 사이에 그런 것은 없었다.
작년 이맘때쯤 살짝 술에 취한 그녀가 내뱉은 말이 있었다. 자신이 유일하게 궐 안에서 자신이 살 수 있는 자리를, 공기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고. 그 말에 가슴 설레면서도 재욱은 오히려 자신이 연화에게 살아갈 희망을 전해 받고 있음을 전하고 싶었다.
연화는 알까. 재욱이 그녀 앞에 설 때면 얼마나 가슴 설레는지, 심장이 터질 것 같은지. 저를 보며 미소 짓는 모습이 얼마나 소중한지.
하지만 사가로 돌아가면 노비들에게조차 차가운 눈길을 받곤 했다. 지금은 먼 곳에서 홀로 사시는 친어머니 대신 이름만 어머니가 되어 주신 월호의 친모에게도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자랐다.
재욱은 아버지의 첩이자 관비 출신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월호는 그의 배다른 형제로, 지금의 상감마마께서 신분에 차이를 두지 않으려 골고루 인재를 등용하려 애쓰고 계시지만 백성들이 체감하는 건 별다를 게 없었다. 여전히 노비는 노비이며, 백정은 백정이며, 서얼은 서얼이었다.
유년 시절의 재욱을 삐뚤어지지 않게 만들어 준 것은 월호였다. 그는 분노를 검술로서 다스리는 법을 알려 주었다. 덕분에 재욱은 조선 최고의 검술을 자랑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어 연화를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서얼임에도 이복동생인 자신을 사랑해 주니까.
“왜 더 즐기지 않으시고요.”
인기척이 느껴져 뒤돌아보니 효열이 자상한 미소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어느새 바싹 다가와 있었다.
“시기가 나 가만히 못 있겠습니다.”
재욱이 연화를 좋아하는 걸 효열은 알고 있었기에 솔직히 대답하자 그녀는 옆에 조심스레 다리를 모으고 앉으며 작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귀엽습니다.”
“뭐가 말입니까?”
“시기하는 것이요.”
그녀의 말에 볼이 살짝 화끈해지는 것을 느낀 재욱은 괜히 헛기침을 하였다.
“월호 형님 곁에만 있으면 뭐가 그리도 좋은 것인지 쉬지 않고 웃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느껴지지요.”
그의 물음에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고 효열이 대답하자 재욱은 한숨을 쉬었다. 웃고 있는 효열의 찰랑거리는 긴 속눈썹이 그녀가 살짝 눈을 감음과 동시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연화는 나리 앞에선 잘 우나요?”
“네. 잘 웁니다. 아주 잘 울지요. 지나가던 똥개가 다리를 저는 것을 보고도 울먹이고, 새장에 갇힌 새를 보고도 눈물을 글썽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약한 녀석이 월호 형님 앞에선 어찌나 강한 척을 하는지.”
“월호 나리 앞에서는 연화가 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러우셔요?”
효열은 여전히 자상한 미소로 뜻하는 바를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당연합니다.”
“그러신가요. 저는 재욱 나리가 더 부러운데요.”
“어째서?”
“다음에는 언제 이곳에 들리실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공주 아기씨 마음이시니까.”
자신의 대답에 동문서답하는 효열을 바라보며 답했다.
“그럼 잘 생각해 놓으셨다가 다음에 이곳에 오실 때에 맞춰 보시지요. 제가 월호 나리보다 재욱 나리를 더 부러워하는 이유를요.”
“그냥 답해 주시면 안 되십니까?”
“스스로 깨닫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으니까요.”
여전히 아리송한 말을 하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재욱은 다시금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 효열 누님은 내가 월호 형님보다 더 부럽다는 것일까? 연화의 마음은 내 곁에 없는데. 그녀가 늘 웃어 주는 것은 월호 형님이거늘.
스스로가 참으로 청승맞게 느껴져 재욱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춤추기를 그만둔 것인지, 월호는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옆에는 연화가 앉아 있었다. 재욱은 자연스럽게 비어 있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디 갔다 왔어?”
“측간.”
월호와 민호, 효열이 떠들고 있는 사이 연화가 조심히 재욱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신이 나가 있는 것에 대해 눈치는 채고 있던 모양이다.
“어디 간다고 말 좀 해주고 나가면 어디가 덧나?”
“궁둥이에 털 난다.”
무표정으로 농담을 하자 그녀가 얼굴 근육들을 일그러트렸다. 보고 있자니 시기하고 삐진 마음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순식간에 눈 녹듯 사그라졌다.
“농담이다. 바람 좀 쐬고 왔다.”
“무위군이 공주 안 지키고 뭐하는 거여?”
“민호도 있고 월호 형님도 있질 않느냐.”
“오라버니가 있어야 든든해.”
새침하게 내뱉은 그녀는 재빠르게 효열의 곁으로 가 옮겨 앉았다.
토끼 같은 녀석.
“공주 아기씨, 이만 가 봐야지.”
반대편에 앉은 연화를 바라보며 말하자 그녀가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아직 동도 트지 않았잖아.”
“동 트기 전에 가야지요.”
일어서서 발걸음을 저벅저벅 옮긴 다음 그녀의 팔뚝을 살짝 잡아 일으켜 세웠다. 이제 그만 갈 시간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기에 연화는 반항 없이 순순히 일어났다.
“월호 오라버니, 언제 다시 뵐 수 있어요?”
“보름은 더 기다려야 할 듯싶습니다, 아기씨.”
“규장각도 여간 깐깐한 게 아니네요.”
입술을 삐죽 내놓고 투정을 부리는 그녀의 모습에 월호가 넉살 좋게 웃었다.
“그럼 나중에 뵈어요. 민호 오라버니는 궐에서 뵐 수 있으니. 언니, 잘 지내고 있어.”
“응. 또 봐.”
“가자, 정말 동 트겠다.”
인사가 길어질 것만 같아 재욱은 연화의 손을 잡고 방에서 끌고 나와 기방을 빠져나왔다.
궐로 돌아가는 길, 연화는 총총걸음으로 발을 디뎠다. 달빛이 비추는 그녀의 뒷모습은 매우 청아하여 재욱은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따라 걸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오라버니.”
“응?”
총총거렸던 신난 발걸음은 사라지고 어느새 그녀의 발에는 어두운 무게가 실려 있었다.
“약속 하나만 해 줘.”
“무슨 약속 말이냐?”
“나보다 먼저 죽지 않겠다고.”
이 거리는 연화가 어렸을 적 제 어머니와 함께 걸었던 거리라고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그때도 이처럼 밝은 달이 떠 있었고 밤늦게까지 왕후 마마와 단둘이 몰래 바깥 구경을 하고 궐로 돌아갔었다고.
연화는 그날 무엇에도 견주지 못할 정도의 행복을 느꼈었다. 한데 다음 날, 어머니는 오래도록 앓아 오신 병으로 몸져누웠다. 그리고 몇 달 후, 영영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이곳을 걸었을 때가 왕후와의 행복했던 마지막 추억이었다고 재욱에게 말해 주었었다.
“그건 약속할 수 없다.”
이번에는 재욱이 담담한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그러자 연화가 뒤돌아보았다.
“명령이라 할지라도 따를 수 없어.”
“어째서?”
“나는 너의 무위군이니까. 나에겐 널 지킬 의무가 있으니까. 내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그럼 그따위 무위군은 관둬 버려.”
연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달빛을 등져 보이진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앞을 돌아보며 재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자 재욱은 급하게 따라가 얇은 손목을 낚아챘다. 그녀의 하늘색 도포가 산들바람에 아련하게 살랑거렸다.
“내가 무위군인 것이 싫으냐?”
“오라버니의 실력은 잘 알아. 어렸을 때부터 봐 왔으니까. 늘 같이 있을 수 있으니 좋아. 하지만…….”
그녀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히었다.
월호 형님 앞에서는 그리도 강한 녀석이, 내 앞에만 서면 어찌 이리도 연약한 모습을 보이느냔 말이냐. 그러니 더욱 놓아주기가 힘들구나. 네가 길례라도 올리는 날에는 난…….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하며 재욱은 자신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난 네 무위군인 것이 좋다. 당당히 네 곁에서 널 지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무위군이 아니게 되더라도 널 지킬 거야. 네가 어디에 있든 끝까지 쫒아갈 것이다. 넌 그만큼 내게 소중한 녀석이니까. 그러니까 그 약속은 들어줄 수가 없어. 하지만…… 노력은 해 볼게. 최대한 그런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야.”
그리 말하며 재욱이 환하게 웃어 보이자 연화도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너도 내가 그리 좋으냐? 그런 말을 다 하게.”
좋아한다, 아니 연모한다는 대답을 원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재욱의 힘을 쫙 빼놓았다.
“싫겠어, 그럼? 아, 맞아! 들려야 할 곳이 있어.”
김빠지게 만드는 대답에 연화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웃으며 이 오밤중에 어딜 가느냐고 물었다.
“책 거간꾼한테!”
이 오밤중에 책을 거래하는 사람이 있다고? 게다가 무슨 책? 궐에 넘쳐 나는 것이 책이건만.
재욱은 구시렁거리고 싶은 것을 참고 연화의 뒤를 조용히 뒤따랐다.
* * *
이틀 전, 그러니까 효열 언니를 보고 온 그날 재욱과 함께 달빛을 벗 삼아 걷던 일을 떠올리며 연화는 어머니의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러자니 사람은 정말 언제 떠날지 모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연화는 재욱에게 약속 하나를 받아 내려 했었다. 적어도 자신보다 먼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먼저 죽지 말라 약조해 달라고.
지금도 자신의 시간은 어머니가 죽은 그날에 멈춰져 있는데 재욱마저 사라진다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재욱은 연화의 약조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쉽지 않은 약조인 것을 알지만, 말뿐이라도 그리하겠다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내심 서운했었다.
“난 네 무위군인 것이 좋다. 당당히 네 곁에서 널 지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무위군이 아니게 되더라도 널 지킬 거야. 네가 어디에 있든 끝까지 쫒아갈 것이다. 넌 그만큼 내게 소중한 녀석이니까. 그러니까 그 약속은 들어줄 수가 없어. 하지만…… 노력은 해 볼게. 최대한 그런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야.”
하지만 그녀의 생각을 단숨에 바꾸는 대답이 돌아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