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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가 늘 느끼는 것이 있다. 재욱은 평소에는 참 바보같이 굴면서도 진지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아니,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신중을 기해 스스로 제 무위군을 자청하고 나선 것일 터였다.
그날 재욱은 연화에게 그리도 자신이 좋으냐고 아무렇지 않게 물었지만 그녀의 심장은 터질 듯 했었기에 급하게 대답을 얼버무렸었다.
좋지요. 아주 많이 좋지요.
연화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척하고 방 끝에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재욱을 힐끔 바라보았다. 사실 오밤중에 무위군이라 하더라도 남정네가 공주의 침소에 있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연화는 예외를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도 철없던 때의 일이었지만 누군가가 침소에 잠입했던 것처럼 꾸며 아버지에게 청을 넣었었다. 무서워서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으니 무위군을 방에 들일 수 있게 해 달라고. 명주만으로는 무서워 죽을 것 같다고.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어차피 무위군은 왕족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냐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야 해서 마음이 아팠었다.
결국 아버지는 그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연화의 청을 받아들여 주었다. 물론 그 뒤에 종종 재욱을 불러내어 온갖 협박을 했지만.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비친 재욱의 얼굴은 너무나 여아하였다. 세상천지 어느 누가 재욱의 미모를 따라오겠느냐마는 여자들보다 아름다운 건 조금 화가 날 일이다. 새하얀 피부에 오뚝한 코, 얇지도 굵지도 않은 붉은 입술, 긴 속눈썹을 가진 눈, 날렵한 턱선. 확실히 재욱은 겉으로 보기에 듬직해 보이는 사내는 아니다. 키는 크지만 덩치는 왜소하며 흰 피부 탓에 살짝 병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일까. 그가 무위군을 뽑는 경연에 나왔을 때 서얼 출신인 것과 더불어 생김새로 인해 모두들 재욱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한 명도 이기지 못하고 죽사발이 되어 돌아갈 것이라고.
하지만 재욱의 실력은 누구보다도 뛰어나 왕마저 가끔 그를 불러 세자에게 검을 가르쳐 주기를 바랐다. 그게 반대가 되어 연화를 가르치고 있었지만.
계속 그를 몰래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창피해진 연화는 얼른 다시 시선을 책으로 돌리었다. 지금 자신이 읽는 책은 사서오경 같은 진부한 것이 아니었다. 세간에서 몰래 유통되고 있는 허구의 이야기들을 담은 소설이었다.
책장을 넘기는데 문득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 깼어?”
“처음부터 안 자고 있었습니다, 아기씨.”
재욱은 삐치면 늘 연화를 공주로 대한다. 저런 식으로 말이다.
“왜 삐쳐 있는 거야?”
“황공하오나 공주 아기씨, 삐쳐 있지 않사옵니다.”
“계속 그리 삐쳐 있을 거야?”
이틀 전부터 저랬으니 내가 월호 오라버니랑 너무 신나게 놀아서? 우울한 소리를 해서? 아니면 좋아한다고 하지 않고 얼버무린 것 때문에?
하지만 그건…….
“한낮 무위군이다. 정을 주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 또 조심하거라. 이루어질 리가 없질 않느냐.”
말할 수 없었다.
“얼른 잠자리에 드시지요. 벌써 자시(子時)를 넘겼사옵니다.”
재욱의 차가운 말투에 작게 혀를 차며 책을 한쪽으로 치워 놓은 뒤, 연화는 이불 안으로 들어가 누워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좋아해.”
달빛에 비춘 그의 표정이 놀란 듯 경직되었다.
“물론 월호 오라버니도.”
뒤이어 말하자 다시금 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연화는 입 모양으로만 깔깔거리듯 웃어 준 뒤 눈을 감았다.
속 좁은 오라버니에 대한 복수다, 흥!
그녀는 몸을 벽 쪽으로 돌려 누웠다.
2장
명주가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다. 일어나 아침 세안을 마치자 보모상궁인 전 상궁이 옷을 갈아입혔다. 당초 아침밥을 잘 먹지 않던 터라 곧이어 차려진 식사는 대충 껄떡거리다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동안 재욱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궁녀의 부름을 받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강녕전에 갈 것이다.”
재욱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연화는 그에게 살짝 시선을 흘긴 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재욱이 따라나서자 뒤이어 시종들이 줄줄이 줄을 섰다. 번거롭기 짝이 없는 하루가 또 시작되었다.
아침 문안 인사를 끝내면 간만에 오라버니에게 가 봐야지.
강녕전에 도착하자 앞을 지키고 선 내관이 문 너머로 연화가 온 것을 아뢰었다.
“들라 하라.”
들려온 위엄 넘치는 목소리에 궁녀들이 문을 열어 주자 연화는 서안 앞에 앉아 이른 아침부터 상소를 살피고 있는 그의 앞에 절을 올린 뒤 앉았다.
“아침 문안 여쭙사옵니다, 아바마마. 편히 주무셨는지요.”
“그래, 너도 간밤에 아무 일 없이 잘 잤느냐.”
“네, 아바마마.”
“네 오라비 말이다.”
늘 어제는 하루 종일 무엇을 하였는지, 또는 오늘 일정에 대해 물어보던 아버지께서 오늘은 모두 생략한 채 윤을 언급하며 입을 떼었다.
“오늘은 퇴선(궁중에서 임금이 수라상에서 물려 낸 음식을 이르던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정말입니까?”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이유 모를 병을 앓으며 몸이 많이 쇠약해진 오라비가 퇴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병이 나은 것만큼이나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다.
자신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고 연화는 오라버니에게 가 보겠다고 아뢰었다. 관료들에게는 귀신같이 무서운 왕이었으나, 자식들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고 자상하기만 아버지이기에 웃으며 어서 가 보라고 허락해 주자 그녀는 자리를 박차듯 일어나 동궁으로 향하였다.
“아기씨, 발걸음이 너무 빠르시옵니다. 그러다 넘어지셔요.”
뒤에서 명주가 연화를 걱정했지만 잔소리 아닌 잔소리가 지금 그녀의 귀에 들려올 리가 없었다. 결국 재빠른 걸음걸이에 발이 돌부리에 걸려 중심을 잃었다.
“아!”
순간 그녀의 뒤를 바짝 쫓던 재욱이 팔뚝을 낚아채 잡아 주었다.
“조심하시옵소서.”
그리 말하며 살짝 미소 짓는 재욱의 얼굴이 연화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고, 고맙다.”
연화는 어째선지 얼굴이 화끈거리고 더워지는 것을 느끼며 얼른 중심을 잡고 섰다. 재욱이 조심스레 놓아준 팔뚝을 잠시 바라보았다. 두근거림이 멈출 생각을 하질 않았다.
“에, 에헴!”
연화가 멍하니 걸음을 멈추고 있자 명주가 헛기침을 했다. 덕분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재욱을 올려다보았다가 어느새 가까워진 동궁을 발견하곤 재차 힘 있게 걸음을 옮겼다.
동궁인 자선당 앞의 월대에는 꽃신과 함께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신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꽃신은 세자빈, 하나는 윤의 것일 터였다.
다른 하나는 누구 것이지?
의문을 품으며 자선당 안으로 들어가자 내관이 아뢰었다.
“들라 하라.”
어쩜 저리도 아버지와 비슷한 음정이란 말인가.
너무도 닮은 목소리에 연화는 피식 웃고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세자빈과 사촌인 이현, 하성군이 와 있었다. 남은 신의 주인이 밝혀졌다.
“오늘은 내 손님이 참으로 많구나.”
윤이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자 연화는 부러 예를 갖춘 뒤 그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세자빈 마마, 현이 오라버니. 강녕하시옵니까?”
“하하, 어울리지 않게 웬 문안이냐. 그렇지 않소, 빈.”
“더욱이 천진난만해 보이셔서 저는 보기 좋사옵니다, 저하.”
어울리지 않은 딱딱한 인사에 윤 부부가 농을 주고받았다.
“현이 오라버니도 간만에 뵙사옵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암요, 잘 지내다 말다요. 공주 아기씨도 강녕하시온지요.”
“네. 이 지루하되 지루한 궐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늘 강녕하옵니다.”
그녀의 대답에 자선당 안에 넉넉한 웃음소리가 번졌다. 아무래도 윤이 퇴선을 하지 않은 것 때문에 모두가 즐거운 모양이었다.
“무위군도 같이 온 게냐?”
“네.”
“같이 들어오지 그랬느냐.”
어렸을 적 다녔던 도장은 윤도 잠시 다닌 적 있었기에 그도 재욱을 알고 있었다.
“삐쳐 있어서 밖에 두었습니다.”
“삐치다니요?”
연화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말하자 세자빈이 물었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윤은 연화와 재욱이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알지만 세자빈과 하성군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친하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 결국 거짓말로 얼버무렸다. 자신이 너무 말을 안 들어서 뿔이 난 모양이라고 말이다.
그리 말하자 모두가 아주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괄량이 공주님을 모시고 계시니 무위군도 참으로 피곤하겠습니다.”
“그리 말하지 마십시오. 이래 봬도 소녀, 단아하게 있어야 할 때를 압니다.”
“지금도 말씀이십니까?”
하성군이 연화를 놀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단아하게 있어야 할 때가 아닙니다. 오라버니가 퇴선하지 않으셨고, 그런 경사는 당연히 크게 축하해야지요!”
“아하하, 알겠습니다. 진정하시고 용서하시옵소서.”
“하온데 오라버니께서 이곳에는 어인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몸에 좋다는 탕약을 손수 준비해 오셨다는구나.”
“오, 매번 존경각에 틀어박혀 계시는 분이 장한 일 좀 하셨군요?”
연화의 농에 하성군은 그저 허허허 웃을 뿐이었다.
“공주 아기씨는 여전히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진심이 담긴 그의 말에 연화는 짐짓 단아하게 미소 지으며 고맙다는 표시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올렸다.
그날 재욱은 연화에게 그리도 자신이 좋으냐고 아무렇지 않게 물었지만 그녀의 심장은 터질 듯 했었기에 급하게 대답을 얼버무렸었다.
좋지요. 아주 많이 좋지요.
연화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척하고 방 끝에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재욱을 힐끔 바라보았다. 사실 오밤중에 무위군이라 하더라도 남정네가 공주의 침소에 있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연화는 예외를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도 철없던 때의 일이었지만 누군가가 침소에 잠입했던 것처럼 꾸며 아버지에게 청을 넣었었다. 무서워서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으니 무위군을 방에 들일 수 있게 해 달라고. 명주만으로는 무서워 죽을 것 같다고.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어차피 무위군은 왕족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냐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야 해서 마음이 아팠었다.
결국 아버지는 그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연화의 청을 받아들여 주었다. 물론 그 뒤에 종종 재욱을 불러내어 온갖 협박을 했지만.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비친 재욱의 얼굴은 너무나 여아하였다. 세상천지 어느 누가 재욱의 미모를 따라오겠느냐마는 여자들보다 아름다운 건 조금 화가 날 일이다. 새하얀 피부에 오뚝한 코, 얇지도 굵지도 않은 붉은 입술, 긴 속눈썹을 가진 눈, 날렵한 턱선. 확실히 재욱은 겉으로 보기에 듬직해 보이는 사내는 아니다. 키는 크지만 덩치는 왜소하며 흰 피부 탓에 살짝 병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일까. 그가 무위군을 뽑는 경연에 나왔을 때 서얼 출신인 것과 더불어 생김새로 인해 모두들 재욱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한 명도 이기지 못하고 죽사발이 되어 돌아갈 것이라고.
하지만 재욱의 실력은 누구보다도 뛰어나 왕마저 가끔 그를 불러 세자에게 검을 가르쳐 주기를 바랐다. 그게 반대가 되어 연화를 가르치고 있었지만.
계속 그를 몰래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창피해진 연화는 얼른 다시 시선을 책으로 돌리었다. 지금 자신이 읽는 책은 사서오경 같은 진부한 것이 아니었다. 세간에서 몰래 유통되고 있는 허구의 이야기들을 담은 소설이었다.
책장을 넘기는데 문득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 깼어?”
“처음부터 안 자고 있었습니다, 아기씨.”
재욱은 삐치면 늘 연화를 공주로 대한다. 저런 식으로 말이다.
“왜 삐쳐 있는 거야?”
“황공하오나 공주 아기씨, 삐쳐 있지 않사옵니다.”
“계속 그리 삐쳐 있을 거야?”
이틀 전부터 저랬으니 내가 월호 오라버니랑 너무 신나게 놀아서? 우울한 소리를 해서? 아니면 좋아한다고 하지 않고 얼버무린 것 때문에?
하지만 그건…….
“한낮 무위군이다. 정을 주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 또 조심하거라. 이루어질 리가 없질 않느냐.”
말할 수 없었다.
“얼른 잠자리에 드시지요. 벌써 자시(子時)를 넘겼사옵니다.”
재욱의 차가운 말투에 작게 혀를 차며 책을 한쪽으로 치워 놓은 뒤, 연화는 이불 안으로 들어가 누워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좋아해.”
달빛에 비춘 그의 표정이 놀란 듯 경직되었다.
“물론 월호 오라버니도.”
뒤이어 말하자 다시금 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연화는 입 모양으로만 깔깔거리듯 웃어 준 뒤 눈을 감았다.
속 좁은 오라버니에 대한 복수다, 흥!
그녀는 몸을 벽 쪽으로 돌려 누웠다.
2장
명주가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다. 일어나 아침 세안을 마치자 보모상궁인 전 상궁이 옷을 갈아입혔다. 당초 아침밥을 잘 먹지 않던 터라 곧이어 차려진 식사는 대충 껄떡거리다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동안 재욱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궁녀의 부름을 받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강녕전에 갈 것이다.”
재욱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연화는 그에게 살짝 시선을 흘긴 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재욱이 따라나서자 뒤이어 시종들이 줄줄이 줄을 섰다. 번거롭기 짝이 없는 하루가 또 시작되었다.
아침 문안 인사를 끝내면 간만에 오라버니에게 가 봐야지.
강녕전에 도착하자 앞을 지키고 선 내관이 문 너머로 연화가 온 것을 아뢰었다.
“들라 하라.”
들려온 위엄 넘치는 목소리에 궁녀들이 문을 열어 주자 연화는 서안 앞에 앉아 이른 아침부터 상소를 살피고 있는 그의 앞에 절을 올린 뒤 앉았다.
“아침 문안 여쭙사옵니다, 아바마마. 편히 주무셨는지요.”
“그래, 너도 간밤에 아무 일 없이 잘 잤느냐.”
“네, 아바마마.”
“네 오라비 말이다.”
늘 어제는 하루 종일 무엇을 하였는지, 또는 오늘 일정에 대해 물어보던 아버지께서 오늘은 모두 생략한 채 윤을 언급하며 입을 떼었다.
“오늘은 퇴선(궁중에서 임금이 수라상에서 물려 낸 음식을 이르던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정말입니까?”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이유 모를 병을 앓으며 몸이 많이 쇠약해진 오라비가 퇴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병이 나은 것만큼이나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다.
자신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고 연화는 오라버니에게 가 보겠다고 아뢰었다. 관료들에게는 귀신같이 무서운 왕이었으나, 자식들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고 자상하기만 아버지이기에 웃으며 어서 가 보라고 허락해 주자 그녀는 자리를 박차듯 일어나 동궁으로 향하였다.
“아기씨, 발걸음이 너무 빠르시옵니다. 그러다 넘어지셔요.”
뒤에서 명주가 연화를 걱정했지만 잔소리 아닌 잔소리가 지금 그녀의 귀에 들려올 리가 없었다. 결국 재빠른 걸음걸이에 발이 돌부리에 걸려 중심을 잃었다.
“아!”
순간 그녀의 뒤를 바짝 쫓던 재욱이 팔뚝을 낚아채 잡아 주었다.
“조심하시옵소서.”
그리 말하며 살짝 미소 짓는 재욱의 얼굴이 연화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고, 고맙다.”
연화는 어째선지 얼굴이 화끈거리고 더워지는 것을 느끼며 얼른 중심을 잡고 섰다. 재욱이 조심스레 놓아준 팔뚝을 잠시 바라보았다. 두근거림이 멈출 생각을 하질 않았다.
“에, 에헴!”
연화가 멍하니 걸음을 멈추고 있자 명주가 헛기침을 했다. 덕분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재욱을 올려다보았다가 어느새 가까워진 동궁을 발견하곤 재차 힘 있게 걸음을 옮겼다.
동궁인 자선당 앞의 월대에는 꽃신과 함께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신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꽃신은 세자빈, 하나는 윤의 것일 터였다.
다른 하나는 누구 것이지?
의문을 품으며 자선당 안으로 들어가자 내관이 아뢰었다.
“들라 하라.”
어쩜 저리도 아버지와 비슷한 음정이란 말인가.
너무도 닮은 목소리에 연화는 피식 웃고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세자빈과 사촌인 이현, 하성군이 와 있었다. 남은 신의 주인이 밝혀졌다.
“오늘은 내 손님이 참으로 많구나.”
윤이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자 연화는 부러 예를 갖춘 뒤 그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세자빈 마마, 현이 오라버니. 강녕하시옵니까?”
“하하, 어울리지 않게 웬 문안이냐. 그렇지 않소, 빈.”
“더욱이 천진난만해 보이셔서 저는 보기 좋사옵니다, 저하.”
어울리지 않은 딱딱한 인사에 윤 부부가 농을 주고받았다.
“현이 오라버니도 간만에 뵙사옵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암요, 잘 지내다 말다요. 공주 아기씨도 강녕하시온지요.”
“네. 이 지루하되 지루한 궐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늘 강녕하옵니다.”
그녀의 대답에 자선당 안에 넉넉한 웃음소리가 번졌다. 아무래도 윤이 퇴선을 하지 않은 것 때문에 모두가 즐거운 모양이었다.
“무위군도 같이 온 게냐?”
“네.”
“같이 들어오지 그랬느냐.”
어렸을 적 다녔던 도장은 윤도 잠시 다닌 적 있었기에 그도 재욱을 알고 있었다.
“삐쳐 있어서 밖에 두었습니다.”
“삐치다니요?”
연화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말하자 세자빈이 물었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윤은 연화와 재욱이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알지만 세자빈과 하성군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친하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 결국 거짓말로 얼버무렸다. 자신이 너무 말을 안 들어서 뿔이 난 모양이라고 말이다.
그리 말하자 모두가 아주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괄량이 공주님을 모시고 계시니 무위군도 참으로 피곤하겠습니다.”
“그리 말하지 마십시오. 이래 봬도 소녀, 단아하게 있어야 할 때를 압니다.”
“지금도 말씀이십니까?”
하성군이 연화를 놀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단아하게 있어야 할 때가 아닙니다. 오라버니가 퇴선하지 않으셨고, 그런 경사는 당연히 크게 축하해야지요!”
“아하하, 알겠습니다. 진정하시고 용서하시옵소서.”
“하온데 오라버니께서 이곳에는 어인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몸에 좋다는 탕약을 손수 준비해 오셨다는구나.”
“오, 매번 존경각에 틀어박혀 계시는 분이 장한 일 좀 하셨군요?”
연화의 농에 하성군은 그저 허허허 웃을 뿐이었다.
“공주 아기씨는 여전히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진심이 담긴 그의 말에 연화는 짐짓 단아하게 미소 지으며 고맙다는 표시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올렸다.